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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유토피아 구상과 신자유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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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유토피아 구상과 신자유주의 비판



강원돈

천년 단위의 시간이 바뀌는 오늘의 시점에서 유토피아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공연한 말장난
일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이 일찍이 보지 못한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경제의 지구화로 인해 자본이 국경을 넘나들며
운동을 하고 있지만, 이 자본의 운동을 적절하게 통제하여 인류의 공영을 이루지 못하는 것
이 문제다. 경제의 지구화 조건 아래서 자본의 수익성이 모든 경제활동의 기준이 되면서 성
장과 복지의 적절한 조절이 뒷전에 밀려나고, 자본과 노동, 경제와 환경, 부와 가난의 대립
이 지역적, 국민경제적, 세계적 차원에서 격심해 지고 있다. 미래를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서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현재의 위기를 극복
하기 위해 어떤 대안을 모색하여야 할 것인가는 이제 겨우 토론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중신학은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거의 사용한 적이 없고, 경우에 따라
서는 유토피아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신학이 유토피
아적 사유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토피아를 어떤 식으로 구상하고 전개하는가
에 따라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만, 민중신학은 고난받는 민중이 꿈꾸는 새 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강력한 유토피
아적 동기를 갖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나 메시아 왕국에 대한 민중신학의 논의가 그것을 말
해 준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이제까지 민중신학에서 표현되어 왔던 다양한 유토피아 구상을 살펴
보겠다. 그 다음, 나는 민중신학의 유토피아적 동기를 견지하면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
해 몇 가지 제안을 생각해 보겠다.

I. 민중신학의 유토피아 구상

민중신학의 유토피아 구상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안병무의 해석, 메시아 왕국에 대한 서남
동의 성찰, 메시아 통치에 대한 김용복의 접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안병무의 해석

안병무는 하느님 나라의 역사적 구체성을 민중운동과 결합시켜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그에
게서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이다. 안병무는 바로 이 민중테제를 독
재권력에 의해 민중이 철저히 억눌리고 수탈당하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던 1970년
대 초에 대담하게 주장하였다. 민중은 역사의 주인으로 임명되었는데, 현재까지는 그것에 반
역한 자들이 역사의 표면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 점점 제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 역사의 향방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민중의 주체화 과정이 하느님 나라
의 실현과정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안병무의 인식이다.
 안병무는 하느님 나라의 역사적 핵을 밝히기 위해 예수의 민중운동을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서구 신약학의 통설을 비판한다. 이제까지의 통설에 따르면, 예수는 분명히 하느
님 나라를 선포하였으나 그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안병무는 이 견해를 거꾸로 뒤집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호응하여 모인 민중에게 하
느님 나라가 무엇인가는 애초부터 자명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그에게 몰
려온 민중에게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였을 텐데 신약에는 그런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하느
님 나라가 민중에게 자명하였던 까닭은 민중의 "갈망과 그 나라 도래가 일치"하였기 때문이
다. 민중이 갈망하는 새 현실이 하느님 나라의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을 뜻한다. 하느님의 주권이 실현된다는 것은 하느
님과 민중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다는 뜻이다. 민중은 하느님의 주권 아래서 그들의 삶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형성한다. 하느님과 민중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것은 그들 사이에 무
엇인가가 끼어 들어와 하느님의 주권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권력의 독점과 물질의 사유화이다. 권력이 독점되고 물질이 사유화된 곳에서 하느님의 주권
은 도전받고 민중은 억눌린다. 하느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세력이 곧 민중을 억압하는 세력
인 것이다.
 안병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주권이 실현된 한 역사적 모델을 본다. 거기서 사
람들은 "오직 야훼만으로"라는 신앙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그 공동체는 권력의 독점
을 거부하고 물질의 사유화를 거부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의 운영원리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 이 공동체가 군주국가의 성립에 의해 깨뜨려지자 이 공동체의 이상을 회복하려
는 민중의 운동이 예언자 운동으로 펼쳐졌고, 이스라엘이 이방의 지배 아래 있었을 때에는
묵시문학 운동을 통해 펼쳐졌다. 예수의 민중운동은 하느님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한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이 전통에 속해 있는 예수와 민중에게 자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운동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미래지향적
운동"이면서 "뿌리(=고대 이스라엘 -필자)에로의 회귀운동"이었던 것이다.
 안병무는 "화산맥"이라는 은유를 통해 예수의 민중운동은 여러 가지 형태의 민중운동을
통해 폭발한다고 본다. 그렇게 보면 민중운동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실현하고 현재화
하려는 운동이다. 1980년대의 한국 민중운동을 고려하면서 안병무는 오늘의 민중운동을 통
해 현재화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갖는가를 물었다. 그것이 곧 "공"
(公)의 실천이다. 그의 말을 들어본다.

"公은 사유화할 수 없는 것, 사유화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 속했습니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즉 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읍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것을 사유화 또는 독점하는 것이 죄입니다. 까닭은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즉 公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러한 사유화는 性(sex)에 적용하면 정욕(epithumia)이 되고(로마 1,24), 재산에 적용하면 물욕이 될 것입니다(마르 4,9). (...) 사유욕은 결코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력에도 적용됩니다. (...) 세상의 악이란 모두 권력의 남용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公權의 사유화를 의미합니다."

 안병무는 공을 공으로 돌리는 일이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고 본다. 하나는 권력의 독
점과 물질의 사유화로 인해 나타난 결과를 원상 회복시키는 일이며, 그것은 성서의 희년정
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정치나 경제나 모든 걸 다 포함해서 사유화함으로써 분열되고 찢겨진 그것을 다시 公으로 돌리는 일은 하느님 나라 성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거예요. (...) '公은 公으로 돌려라'는 말은 (...) 결국 민중의 언어로 바꾸면, 다 빼앗긴 사람들, 밭 한 뙤기 없이 거덜난 사람들에게 자기 것을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 농민에게 그 생산한 몫을 정당하게 돌려주는 것이예요. 이렇게 잃어버린 제 것을 도로 찾는 운동만큼 하느님 나라를 의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희년운동이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면, 또 하나의 축은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다. 안병무는 예수 운동에서 하느님 나라가 함께 나누어 먹는 일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
음에 주목하고 하느님 나라의 현재화는 "나눔의 질서"를 실현하는 것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나라가 임하옵소서' 하면서 맨처음에 등장하는 것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物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物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오늘 하루 먹을 만큼만 달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일용할 만큼씩만 주어진다는 것은 곧 골고루 나누어진다는 것 아니겠어요?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러한 나눔의 질서란 말이지요. (...) 만일 가짜가 아닌 진짜(real) 하느님 나라라고 하면 나누어 먹는 것 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에 임하는 예수의 일관된 자세는 '더불어 먹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먹는 것 이상 즐거운 게 없어요. '더불어 먹는다'는 건  삶의 즐거움을 최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일용할 양식!"

 인용문에서 안병무는 "일용할 양식"으로 상징되는 부의 나눔이 공동체적 삶의 기쁨을 이
루는 밑바탕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있는 물질을
독점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의
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 그것은 지배의 논리를 넘어선 곳에 있는
정치, 곧 남을 섬기는 정치다.
 이제까지의 분석을 종합해 보면, 안병무는 민중의 주권을 실현하는 것과 하느님의 주권을
실현하는 것이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때 그때의 현실 속에서
민중이 그들의 삶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것을 가로막는 체제는 하느님의 주권을
가로막는 세력이다. 이 세력은 권력을 독점하고 물질을 사유화하는 제도로 구현된다. 이 제
도를 깨고 민중이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고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
체를 실현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길이다.
 물론 안병무는 민중이 실현해 가는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의
틀로 구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公"의 실천을 말하기는 하였지
만, 점점 더 복잡해지는 현실 속에서 "公"의 제도화가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인가
를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민중신학의 이름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을 금기시한
그의 신학적 사유와 무관하지 않다.

2. 메시아 왕국에 대한 서남동의 성찰

서남동의 유토피아적 구상은 메시아 왕국에 대한 그의 성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물론
그에게서 유토피아와 메시아 왕국은 그 뿌리와 표현이 다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에 따
르면, 유토피아는 그리스 사상의 흐름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엘리트주의적이고, 현존하는 세
계와 공간적으로 구별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구상으로 나타나는 데 반해서, 메시아 왕국은
히브리 사상의 흐름에서 나온 것으로서 민중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하고 "썩어가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새로워지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지향한다고 한다. 나는 유토피아와 메시아
왕국에 대한 서남동의 개념적 구별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썩어가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극복하는 새 세계의 탄생과 고난받는 민중의 주체성 실현을 직결시킴으
로써 그는 후천개벽의 실천주체를 민중으로 분명히 설정한다.
 서남동은 이 생각을 민중이 메시아 왕국의 담당자라는 테제로 정리하였다. 그는 이 테제
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했다. 여기서 나는 그가 전개한 이 테제의 여러 측면들을 모
두 다룰 생각은 없고, 그가 극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한과 단의 변증법"에 비추어 민중의
메시아적 기능에 대한 그의 생각을 조금 더 자세히 밝혀 보려고 한다. "한과 단의 변증법"
은 원래 김지하의 담시 "장일담"의 구상 메모에 나타난다. 이 구상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메시아와 "나락의 한과의 완전한 일치"이다. 이에 대해 서남동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국의 민중전통과 기독교의 민중전통을 아울러 이어받는 '해방의 설교자' 장일담이라는 인물의 선교의 출발점은 그의 '득도'(得道)인 '밑바닥의 일치'에서부터다. 이것을 그(김지하 -필자보충)는 '나락의 한(限)과의 일치'라고도 말한다. 강도, 살인, 강간, 절도, 사기 등 인륜상실자들, 이 사회에서 저주받고 이 땅에서 추방당한 버림받은 자들의 소굴에 몸소 들어가서 그들과 마음으로 일치하는 경험이다. 그는 이러한 인륜상실 현상은 억압에서 생겨진 한이 내면적으로 뒤집혀서 표출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마음 속에서 다른 어느 인간집단에서도 볼 수 없는 참 마음, 곧 신을 만나게 된다. 그렇기에 이 밑바닥을 다시 뒤집으면 바로 하늘이 되고 거기에서 민중의 메시아가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인내천을 생각한다. 그는 창녀들의 소굴에 가서 한 창녀 산모가 아기를 낳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성병으로 육신이 썩을 대로 썩었고 거기다가 정신착란증까지 겸한 폐인이다. 그런데 그런 시궁창에서 새 생명 - 신이 출현하는 것을 보고 득도하여 인간해방의 설교자로 나서는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의 담당자인 노동자, 농민이 아니라 그보다 한층 더 내려가서 밑바닥에 깔린 인륜상실자들이 메시아 왕국의 담당자라는 것이다."

이 긴 인용문에서 "밑바닥을 다시 뒤집으면 바로 하늘이 된다"는 말은 은유적이지만, 메시
아 현상과 메시아 통치의 본질을 매우 함축적으로 형상화한 표현이다. 인용문은 썩을 대로
썩은 창녀의 몸에서 아기가 탄생하는 것을 신의 출현으로 인지하는 데서 그 절정에 도달한
다. 이를 가리켜 "득도"라 한다. 밑바닥과 하늘의 일치를 인식하는 득도는 민중의 해방실천
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한과 단의 변증법"이다.
 밑바닥 사람들이 품고 있는 한은 메시아의 출현을 인식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
만, 인륜상실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것은 억압에서 비롯된 한이 매우 파괴적인 힘으로 분출
되는 경우이다. 한이 파괴적인 힘으로 분출하면 이 세상에서 한의 악순환을 넘어설 수 없다.
한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 곧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이다. 서남동이 인용한 김지하의 메모
는 이를 다음과 같이 힘있게 표현한다.

"세속적 변혁을 위해 세속의 집착을 근원적으로 끊는 것! 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 단! 쌓이는 한과 거듭하는 한, 한편에서는 살육과 무한보복과 파괴와 끝없는 증오를 불태운 무서운 한의 축적이,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의 악순환적인 폭발(즉자적 폭발)을 억제, 조작해서 보다 높은 정신적 힘으로 승화하는 단의 반복이 필요하다."

 한의 악순환을 끊는 "단"은 한을 품은 사람들이 한을 푸는 데서 가능해 진다. 맺힌 한을
푸는 것이 곧 단이다. 그것은 결코 심리적인 위안이나 종교적인 행사에 그칠 수 없다. 서남
동은 무당의 푸닥거리와 증산교의 해원공사(解寃公事)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다음과 같
이 말한 적이 있다. "(...) 그것은 결국 눌린 자의 갈망을 비현실화, 비정치화해서 해소시키는
지배권력이 베푸는 민중의 마취제로 작용한다." 이 말은 한이 생성된 맥락을 더듬어 그것
을 실제로 해소시키지 않고서는 한을 풀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과 단의 변증법"은
한의 부정적 표출을 극복하자는 것이지, 한을 생성시키는 현실의 관계들을 그냥 내버려두자
는 것이 아니다. 서남동은 민중신학을 구상하던 초기에 이미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발
언을 한 적이 있다.

"모든 대립의 화해는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하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 누르는 자와 눌린 자 사이의 화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네모난 원(圓)과 같이 있을 수 없는 논리다. 나는 여전히 '부자와 누르는 자에게는 주기도를 드릴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정언적으로 단언한다. 구조악에 대한 회개가 메시아의 잔치가 베풀어질 수 있는 준비조건이다. 메시아의 잔치(이사야 25장, 누가 13장 등), 그것을 샬롬(평화)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민중의 신학'의 궁극적인 사회적 비전이다."

인용문에서 서남동은 사회적 가난을 가져오고 지배와 억압이 나타나는 현실의 조건들이 그
대로 있는 구조악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메시아 잔치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메시아 잔
치, 곧 샬롬은 "회개"할 때에만, 곧 구조악으로부터 180도 방향전환을 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남동은 샬롬이 실현되는 현실이 곧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라고 보았고, 이를 실현하
는 것이 "천년왕국의 현실화"라고 인식하였다. 그는 1980년대 초에 샬롬의 실현을 가로막
는 구조악의 정체가 분단체제 아래서 부자유와 불평등이 구조적으로 짜여진 체제라고 인식
하고, "자유와 평등의 동시적이고 상보적이며 균형적인 실현과정"이 천년왕국을 이 땅에 실
현하는 구체적인 방안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지금 정녕 천년왕국을 현실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기구의 기본구조로 3권이 엄연히 구별되고, 모든 경우에 피의자에게 일체의 부당한 구금과 고문이 없고, 언론 출판 등 표현의 자유가 있고, 근로자의 노동 3권이 제한 규정 없이 보장되고 나아가서 반드시 적절하게 근로자에게 경영참여권과 이익분배 규정권이 인정되는 천년왕국을 우리는 설계하는 것이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토론되던 1980년 초에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조직한 유신헌법 개정에 관한 토론을 평가하면서 이 글이 쓰여진 것을 감안하면, "천년왕국
의 현실화"가 전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고 매우 구체적인 현실인식과 제도개혁에 대한 제
안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보고 놀라게 된다. 서남동은 민중의 실천을 통해 구조악을 깨뜨리
면서 실현되는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가 인간과 인간,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의 통전적
인 공동체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의좋게 같이 살며, 같이 일하고, 같이 나누고, 같이 협력하고, 같이 창조하는 사회다. 그리고 각자의 개성과, 지역적인 특징과, 세대적인 다양과, 성별의 표현이 유감 없이 발휘되면서도 전체의 조화가 창조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다. 인간적인 것, 민중적인 것, 제3세계적인 것은 사랑의 친교, 열심히 일하며 생산하는 모습, 의좋게 사는 평화, 생래적인 자연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모습, 인정있고 검소하고 소박하고 소탈한 성품, 젊고 생동적인 삶, 단순 솔직한 태도와 표현, 그러면서도 과감하고 용기있고 강인하고 의리있는 행동
등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진실이 진리이고, 정의가 선이고, 각자의 생래적인 자연이 미의 표준이 되는 것이 인간적인 것, 민중적인 것이다."

 서남동은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가 봉건주의와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의 굴레로부터 벗어
나는 데서 시작되고 분단체제로 응결된 이 중첩된 모순들을 극복하는 민중의 힘이 "자유와
평등과 통일과 참여와 친교"를 동시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라고 확신한다.

3. 메시아 통치에 대한 김용복의 접근

김용복의 신학에서 핵심적인 주제를 이루는 것은 민중의 사회전기를 관통하는 "메시아 정
치"이다. 그에게서 민중의 사회전기의 신학적 입지점은 하느님과 그 백성의 계약이고, 따라
서 그것은 하느님의 계시의 역사적 틀이다. 그에게서 성서의 이야기와 민중의 사회전기
는 둘이 아니라 하나다. 이 둘을 분리시키면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하느님의 구원사는
초점을 잃는다. 성서의 이야기와 민중의 사회전기는 구체적인 상황과 그 안에서의 민중의
삶을 매개로 해서 서로 엮어져 구원사의 구체적인 핵을 이룬다. 그 핵이 곧 메시아 정치다.
민중이 메시아 왕국에 참여하는 것과 민중이 역사의 자유로운 주체가 되는 것은 똑같은 의
미이며, 메시아적 정치를 향한 민중의 고취는 민중의 고난과 투쟁으로부터 분리시켜 생각
할 수 없다.

"민중의 메시아적 고취는 민중과 권력의 역사적 대립에서 비롯된다. 메시아 왕국은 환상적이거나 유토피아적 꿈이 아니다. 그것은 고난받는 민중, 곧 가난한 사람들과 눌린 사람들이 투쟁하며 추구하는 역사의 핵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구체적이다. 바로 여기에 메시아적 언어의 기원과 토대가 있다. 그것은 꿈같은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말할 때, 우리는 민중의 메시아, 민중에게 속한 분으로 민중 자신이 느끼는 메시아를 말한다."

 메시아 정치에서 민중은 자신의 주체성을 실현하는 해방의 과정 속에 있다. 메시아 정치
는 정치적 메시아주의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1970년대 말에 김용복은 제국주의와
결합되었던 일본 천황제, 북한의 공산주의, 남한의 현대적 기술지배체제를 정치적 메시아주
의의 세 가지 표현형태들로 파악하고, 이를 다음과 같이 성격화한 적이 있다. "정치적 메시
아주의의 이 세가지 표현형태들은 전체주의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대립구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그들의 역사관은 서로 투쟁하는
두 권력들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절대선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악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지배엘리트의 메시아주의는 민중의 주체성과 민중의 권력을 적대시하고 이를 말살시킨다.
김용복은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이같은 파괴적 성격이 하느님의 정의가 기존의 정치지배체
제에 내재한다는 폐쇄적 완벽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여기서는 지배자가 곧 메시아의
역할을 맡는다. 그는 민중을 "위한" 메시아를 참칭하지만, 결국 민중을 아무 것도 아닌 존
재로 전락시키고 조작과 지배의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바로 이 점에
서 예수의 메시아 정치와 갈라진다.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민중을 역사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거나 자신의 요구를 실현하는 데 동원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려고 하는 데 반해, 예수의 메시아 정치는 민중으로 하여금 그들의 역사적 주체성을 실현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역사적 운명의 주인이 되게 하는 정치이다."

이렇게 메시아 정치와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날카롭게 구별한 다음 김용복은 그의 중심테제
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민중과 메시아의 관계는 주체로서의 민중과 그들의 기능으로서의 메시아 사이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민중의 메시아적 기능은 정치적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엘리트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고난받는 종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민중이 메시아의 기능을 맡는 메시아 정치가 해방적 성격을 갖는 것은 그것이 권력의 자
기중심성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메시아와 고난받는 종은 같은 실체
의 두 면이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민중의 메시아인 예수다. 그는 고난받는 종으로 왔고
(이사 53장), 자기자신을 비웠다(필립 2,5-11). 권력의 행사와 폭력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그는 세상을 지배하는 죄의 권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 십자가상의 죽임에서
종말론적인 역전이 일어난다. 그는 죄의 가장 큰 권세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그것을
무력화시켰다.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죽임의 권세가 지배하는 현실을 넘어서
서 만물을 새롭게 형성하고 갱신하는 메시아 정치의 현실성과 그 미래를 보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용복은 역사 속에서 고난당하고 그 고난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갈망
하는 민중의 모습을 본다. 역사적으로 보면 민중은 삶의 모든 영역과 틀에서 권력을 박
탈당했다. 민중은 그들을 누르고 그들에게서 삶의 기회를 빼앗고 그들의 생각과 감정마저
도 조작하려는 엄청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 폭력은 민중을 영원히 죽이지는
못한다. 민중은 모든 것이 왜곡되고 굴절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갈망과 희망을 잃
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살아감으로써 폭력의 지배를 무력화한다. 폭력을 넘어서 있
는 곳에 민중의 미래가 있기에 권력의 형성과 그 행사를 포기하고 종의 모습으로 서로 봉
사하며 서로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가 민중이 지금 살아가고자 하는 현실이고 또 앞으로 살
아가며 형성하여야 할 미래의 현실이다. 김용복은 이 미래의 현실을 "메시아 왕국의 내용"
으로 파악하고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메시아 왕국의 내용은 정의, 친교, 샬롬(평화 혹은 온전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의는 신실한 관계 혹은 민중과 권력의 이야기가 서로 신실하게 얽혀져 둘 사이에 어떤 대립도 없는 것을 가리킨다. 친교는 민중 사이에서 일어나는 창조적인 상호행위의 내용이다. 샬롬은 인간과 그 복지의 온전한 발달이다."

 메시아 정치와 그 내용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실천론의 구상과 관련해서도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메시아 정치의 핵심은 민중주체성의 실현이고, 민중의 주체성이 실현될 때
비로소 정의와 친교, 샬롬이 실현된다. 이 말은 민중이 생활세계의 전영역에 주체적으로 참
여할 때 비로소 새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참여는 민중의 주체성을 정치적으로 표현
하는 형식이다. 참여가 가능하려면 참여를 가로막는 배제의 논리와 그 틀이 깨지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 민중을 배제하는가? 기득권 세력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려
고 하기 때문에 그 기득권을 온갖 논리로 정당화하고 폭력으로 지켜내려고 한다. 거기서는
폭력 자체가 질서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정상화된다.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논리의 핵심인
소유권도 사실은 정당화된 폭력의 또 다른 표현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소유권은 물건에 대
한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지배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의 참여는 기득권을 정
당화하는 논리의 타당성 요구를 거부하고, 그 논리의 실천적 기반인 폭력을 지양할 때 비
로소 가능하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바로 이 대목에서 김용복의 실천론 구상에서 핵심을 이루는 종의 도(Doularchie)를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의 도는 폭력과 그 행사에 대한 굴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권력현상 그 자체의 극복이다. 권력현상이 나타나는 곳에
서는 권력을 행사하는 세력과 권력의 지배를 받는 세력이 서로 갈라진다. 권력은 왜 필요
한가? 자기주장 때문이다. 자기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주장에 맞서는 것을 누르지 않으
면 안 된다. 그리고 자기주장을 하는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력현상과는 달리 종의 도는 스스로를 주장하기에 앞서서 남을 일으켜
세워 주인의 역할을 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남을 섬기고 남과 더불어 나누고 사귀고자
하는 데 지배와 권력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지배와 권력이 지양되는 곳에서는 사귐의 공
동체가 이루어진다. 사귐은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종의 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이 참여공동체의 진면목이다. 참여공동체는
섬김의 공동체요, 나눔의 공동체요, 사귐의 공동체다.

4. 중간결산

우리 시대의 민중신학의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안병무, 서남동, 김용복에게서 새
로운 미래에 대한 비전은 민중의 주체성 실현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들은 유토피아라는 개
념 대신에 하느님 나라나 메시아 왕국이라는 상징을 재해석하려고 하였다. 그들에게서 돋보
이는 것은 하느님 나라 내지 메시아 왕국과 역사의 연관성을 포착하고 이 둘의 연결고리를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아적 기능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들에게서 민중의 주체성을 억누르
는 현실에 대한 투쟁과 민중이 갈망하는 새로운 현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역사의 조건 아래서 민중이 갈망하는 현실을 "하느님 나라의 역사적 핵"(안병무),
"메시아 왕국의 현재화"(서남동) 혹은 "메시아 왕국의 내용"(김용복)이라는 말로 표현하였
다. 이 표현들에는 현실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그 극복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 표현들에 담
겨진 내용들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그들은, 비록 그 구체성의 수준이
다르다 할지라도, 여러 의견을 내어놓았다. 분명한 것은 민중신학자들이 미래의 대안을 강령
적으로 제안하려고 하기보다는 민중이 주체적으로 삶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
들을 구체적으로 밝히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독재의 극복과 분배의 정의가 그러
한 최소한의 조건들에 속한다. 정의와 친교와 샬롬의 새 현실은 민중의 힘으로 실현하고
지켜 나가야 할 이 최소한의 조건들 아래서 민중이 구현해 나가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미래를 위한 강령들을 제시하는 데 민중신학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하기도 하지만, 나는 민중의 주체성에 대한 신뢰와 엘리트주
의에 대한 경계가 민중신학자들로 하여금 그런 입장을 취하게 하였다고 해석한다.
 다른 민중신학자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지만 김용복이 명시적으로 밝힌 메시아 정
치와 메시아주의의 엄격한 구별은 천년대의 시간이 바뀌는 오늘날 유토피아적 구상을 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적 메시아주의에 대한 김용복의 경고에서 드러나듯
이, 지배엘리트의 유토피아 구상은 언제라도 민중을 배반할 수 있다. 민중의 주체성을 살리
지 않고 민중을 객체화하거나 민중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민중을 동원하여 기존의 체제를
강화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유토피아 구상은 지배엘리트가 설정한 목표를 신
성화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들의 조직을 절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토피아는
닫힌 유토피아다. 김용복은 닫힌 유토피아를 극복하는 길을 메시아 정치에 참여하여 역사의
주체성을 실현하는 민중의 실천에서 찾았다. 열린 유토피아는 민중의 메시아적 기능에 근거
한다. 민중은 고난 가운데 살면서 그들의 고난을 가져온 정치적 억압과 사회경제적 조작에
대항하여 줄기차게 투쟁하면서 그들이 갈망하는 것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메시아적 기능을
담당한다. 민중의 갈망은 이제까지의 역사를 점철하여 왔던 지배와 폭력을 넘어서는 새 세
계를 향하고 있다. 그 세계는 물론 아직은 없는 세계이지만, 종의 도를 실천하며 정의와 친
교와 샬롬을 이루어 나가는 민중의 실천을 통하여 동터오고 있다.

II. 민중신학에서 본 신자유주의의 문제

세계화와 관련된 김용복의 논의를 제외하면, 민중신학은 이제까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지 못했다. 민중신학은 국가주도의 자본화 과정에서 비롯된 문제들에 대
해서는 날카롭게 대응하였지만, 경제의 지구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들
을 민중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일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1990년대 초 이래로 유례없이 큰 규모로 빠르게 진행된 경제의 지구화는 우리 나라가 속
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엄청난 화폐자본을 운반하여 유례없는 명목성장과 과잉유동성을
가져왔고 민중의 소멸이라는 선전이 먹혀들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신자유주의가 이미 관철
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민중의 엄청난 희생이 준비되고 있었지만, 이 점은 제대로 인식
되지 않았다. 그 당시 민중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상이 없는 공허한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사람들로 몰아붙여졌고, 민중신학도 이러한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IMF의 경
제관리로 압축되는 오늘의 사태발전은 민중의 시각에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신흥시장들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를 거대한 위기로 몰아가고 민중의
삶의 기회를 박탈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극복하고 그 대안을 찾는 것은 이제 민중신학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1. 신자유주의의 논리와 그 실천

신자유주의는 통일된 개념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1940년대 초반이래 소비에트식의 중앙관
리경제나 파시스트 국가의 지도경제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나라마
다 그 표현이 달랐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리드리히 A. 폰 하예크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와 노동조합의 간섭으로부터 사경제의 자율성과 이니시어티브를 방어
하려고 하였고, 경제를 시장의 자연적인 합리성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복지
수준의 향상이나 완전고용의 실현, 빈곤퇴치, 국가의 경제계획 등이 시장의 자연적 합리성을
파괴한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봘터 오위켄을 중심으로 한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학파는 사
경제의 자율성과 이니시어티브를 존중하면서도 가격장치의 왜곡과 자유경쟁의 제약 등을 제
거하는 국가에 의한 시장규율을 중시하는 입장에 섰다. 규율자유주의(Ordoliberalismus)로
알려진 독일의 이 신자유주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 아래서
경제운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경제와 사회윤리의 결합을 배제하지 않았다. 독일
에서 실천된 사회적 시장경제는 이 규율자유주의의 논리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규율자유주의보다는 시장이 스스로를 규
율하고 자원할당을 최대화한다고 믿는 폰 하예크의 논리에 가깝다. 이 논리는 1970년대 초
이래로 서구 사회를 강타한 침체 속의 인플레이션, 곧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한 대
안으로서 제시되면서부터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1970년대 말에 신자유주의자들은 투자의
위축과 수요인플레이션의 증가, 급증하는 실업과 국가재정의 파탄, 시장에 대한 국가의 지나
친 개입 등 복합적인 경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국가개입주의를 강력
하게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내건 처방은 국민소득 가운데 보다 많은 부분을 투자로
돌리고 국가의 시장규제를 철폐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임금소득의 하락, 국가의 재정지
출 가운데 사회복지성 지출의 감축, 국가부문의 축소를 의미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1960년대
초이래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황에서 비대해진 노동권력을 약화시키는 것도 중요했다. 고용
안정법의 개정과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책이 그 일화능로 추진되었다. 이 논리는 국민소득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이 투자로 돌려지면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이 이루어지고, 유휴노동력
의 고용흡수를 통해 유효수요가 창출되면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이 이어진다는 데 근거하였
다. 이것이 곧 공급측면 경제학의 골자다. 그러나 이 공급 측면 경제학은 성공을 거두지 못
했다. 그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다.
 첫째, 국제화된 시장조건 아래서 제조업의 가격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고정비용을
높여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투자가 더 많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노동력은 제조업 부문에서 더 많이 퇴출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비용을 절약하는 투자를 중
시하다 보니 독점자본들은 보다 싼 노동력을 구해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기거나 아웃 소싱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실업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국가의 사회복
지 지출이 축소되는 상황 아래서 실업자들을 위시한 저소득층의 삶의 처지는 급속히 악화되
었다. 1980년대 초 이래로 서구 여러 나라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가난"은 바로 이
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둘째로, 국민소득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투자로 돌리는 정책은 필연적으로 시장이자율을
높이게 되었다. 시장이자율이 높아지면서 자본소득 계층의 부는 빠르게 증가하였고, 자본소
득자들과 임금소득자들의 양극적 분화가 심화되었다. 또한 시장이자율이 기업의 수익률을
상회하면서 화폐자본이 생산자본으로 빠르게 이탈하여 금융부문이 비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태발전을 더욱더 악화시킨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 거대한 규모로 늘어나기 시작
한 미국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였다. 미국은 자본수지를 유지하기 위해 고이자 정책을 실시
하였고, 이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시장이자율은 덩달아 급등하였다. 그 결과, 실물경제로부터
금융자본이 보다 큰 규모로 빠져나가고, 금융자본의 재테크를 중심으로 해서 카지노 자본주
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선진 경제들에서의 정책적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세계적
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동구의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붕괴
되고 세계경제가 자본주의 경제의 "지구화"를 통해 급속히 재편되면서 신자유주의의 논리
는 국제금융체제와 국제무역구조에 의해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이제 금융자본은 사상 유
례없는 규모로 기존의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자유롭게 운동하게 되었고, 우르과이
라운드를 통해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대체하게 된 "세계무역기구"
(WTO)가 세계무역질서를 새롭게 조율하게 되었다. 자본시장의 자유화는 자본수익의 극대
화라는 논리를 전세계적인 규범으로 만들고 있다. 환시장, 주식시장, 채권시장이 자유화되
고 컴퓨터 정보망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금융자본은 단기적인 차익을 좇아 빛과 같은 속도
로 손을 바꾸며 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첨단금융기법이 등장하면서 투기자본의 활동범위
는 점점 더 넓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세계적인 금융기관들은 투기자본에 엄청난 신용공여
를 해 주고 단기수익을 서로 나누는 관행에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투기자본이 세계금융시
장에서 약한 고리를 침으로써 지역 금융시장을 교란하여 투기적 수익을 볼 수 있게 된 것
은 이와 같은 세계금융기관들의 방조 내지 협력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시장규제의 철폐를 통한 자본수익의 극대화라는 논리는 세계무역질서에도 그대로 관철되
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자본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가격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거대한 독점자본들은 가격경쟁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임금수준이 높은 지역으로
부터 낮은 지역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거나 글로벌 소싱을 통해 수직적인 국제분업을 이루
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생산된 제품들은 아직까지 유효수요를 높게 유지하는 거대한 지역
시장들로 수출된다. 경제의 "지구화"가 실현되기 이전에 가난하였던 나라들은, 설사 해외독
점자본들의 직접투자로 인해 명목적인 생산활동이 늘어난다고 해도, 이와 같은 무역조건
아래서는 별로 큰 기대를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 지역들의 저임금구조는 유요수요
가 있는 시장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그 곳에서 생산된 제품은 거대한 유효수요를
가진 지역들로 수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출지향적으로 재편된 지역
경제들은 제한된 시장진입을 위해 치열한 가격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수출수익성은 나
날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경제의 지구화 조건 아래서 신자유주의를 급속히 확산시키는 기구는 IMF다. IMF의 이
와 같은 기능이 강화된 것은 점점더 자주 발생하는 외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술
과 첨단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선진공업국가들에 여러 모로 유리하게 짜여진 국제무역구조
에서 무역수지를 제대로 맞추는 것은 개발도상국가들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미국처럼
국제기축통화를 발행할 수 있어서 자본수지의 불균형을 채권발행이나 이자율조절로 극복할
수 있지 않는 한,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리는 나라들은 필연적으로 외채위기에 몰릴 수
밖에 없다. 자본의 운동이 자유화된 오늘날에는 외채조달에 의한 과잉투자와 기업수익성
하락을 회피하지 못할 경우에도 외채위기에 몰리게 된다.  IMF는 외채위기에 빠진 나라들
의 경제구조를 조정한다는 명목으로 신자유주의를 강요하고, 이 나라들의 경제를 수출지향
구조로 재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외채위기에 시달리는 국가들에 대해 IMF가 내어 놓는
처방의 요점은 국민경제의 수요부문을 억압하고 공급부문을 강화하는 한편, 경제구조를 세
계무역구조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경제정책, 구조정책, 금융정책의 중점은 재정지출을 억제
하고,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하여 외채와 이자를 우선적으로 변제하는 데 놓이게 된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노동과 환경과 여성이 희생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국민경제의
소득분배에서 이들에게 돌아갈 몫은 점점 더 적어진다. 격증하는 실업의 압력과 인플레이션
으로 인한 실질적인 소득감소로 인해 노동문제, 환경문제, 여성문제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주변적인 의제가 되고, 기업의 노동정책, 사회정책, 환경정책도 퇴조한다. 자본운동의 세계성
과 국민국가의 경제적 주권이 비대칭적이어서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가뜩이나 약화
되어 있는 상황에서, IMF의 경제관리 아래 있는 국가의 경제주권의 행사는 더욱더 제약된
다. 경제정책, 사회정책, 환경정책 등을 조율하는 국가의 기능은 급격히 약화된다.

2.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중신학의 비판

민중신학은 신자유주의의 논리와 그 실천이 민중의 삶의 처지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민중
의 주체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분석에서 드러났듯이, 오늘날 전세계적
으로 확산된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연적"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경제를 시장의
원리에 맡기면 시장의 자율적인 규제기능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이 최대화된다는 신념이 그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신자유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시장법칙을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믿었던 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자들의 고전적인 저작들에도 나타난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
서는 시장법칙에 순응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고 "합리적"인
일이다. 여기서는 시장이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창조물이고 인간이 시장을 규율할 수 있
다는 사실이 망각된다. 시장법칙이 자연적 필연성과 같은 성격을 띠지 않고, 교환을 위해 고
안된 제도적인 틀을 가리키는 데 불과하다는 사실은 망각된다. 이 제도적인 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마련하는 것은 인간의 결단인데도, 마치 그것이 시장현상에 내재된 자연적
본성의 표현, 곧 사실필연성인 양 생각한다. 그 배후에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믿고
그것에 얽매이는 강박증(Sachzwang)이 작용한다. 문제는 이 강박증이 의식되지 않고 도리
어 구축(驅逐, Verdraengung)된다는 데 있다. 시장법칙에 대한 신념은 이렇게 해서 탄생하
고 이를 믿는 사람들은 시장법칙의 노예가 되어 이를 찬미한다. 프란츠 J. 힝켈람메르트는
이를 "기업가의 형이상학"이라는 말로 요약하였다:

"기업가의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전통과는 - 필자 보충) 다른 본성, 곧 상품, 화폐, 자본의 본성을 갖는다. 그것은 그것들의 본성을 참된 신적인 본성으로 신학적으로 자명하게 해석한다. 그것은 이 본성을 인간의 소산으로 보지 않고, 그것들의 법칙을 인간의 법칙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그것들의 본성과 법칙을 신성화하면서 완벽한 정당성을 느낀다. 이 본성과 법칙이 저 형이상학이 경배하는 대상이다."

 F. A. 폰 하예크가 정치적으로 옹호하고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구현된 신자유
주의가 위험한 것은 시장의 "자연적" 합리성에 맡기면 모든 것이 제대로 해결된다는 시장만
능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이 시장만능주의에서는 시장법칙이 곧 신이다. 이 신에 대한
적대적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교만"(Hybris)이요 신성모독이다. 이와 같은 죄를
범하는 자들에게 시장은 보복한다. "고문과 노예생활과 죽음"이 그 죄에 대한 대가다. 따
라서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겸손이다. 그리고 오직 시장과정들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에게만 자유가 허락된다. 힝켈람메르트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 겸손과 쌍을 이루는 것이 부르주아적 사유가 이해하고 있는 바의 자유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장들의 지배를 긍정하는 자유, 따라서 일차적으로 가격들의 자유로 이해되는 자유이다. 사람들은 겸손의 그늘 아래서 가격들과 기업들과 시장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하고 그것들의 지표에 복종하는 만큼만 자유롭게 행동한다."

시장만능주의는 시장의 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시장이 반드시 보응한다고 가르친다. 그것
이 곧 "시장의 기적"이다. 시장의 기적은 상품의 풍부한 공급과 소비로 표현된다. 그것이 시
장이 베푸는 축복이다.
 이렇게 보면, 시장만능주의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지향을 하고 있
는 셈이다. 물론 그것은 닫힌 유토피아이다. 그것은 경제적 메시아주의라고 할만도 하다. 이
메시아주의는 풍부한 상품의 공급과 소비를 약속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동원하여 시장법
칙에 복종하게 한다. 시장의 기적이 언급되지만, 그것을 통해 공급되는 상품의 배분은 기껏
해야 "파레토 최적원리"에 따라 이루어질 뿐이어서 풍요 속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다. 시장을 동요시키는 세력에 대한 억압과 시장의 법칙에 순응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
이 경제적 메시아주의의 무기다. 경제적 메시아주의는 이를 통해 자본의 지배를 강화시키고
마침내 자본에 대한 인간의 노예화를 실현시킨다.
 민중신학은 정치적 메시아주의에 반대하였던 것과 똑같은 논리로 신자유주의가 내거는 시
장의 "자연적" 합리성에 대한 신앙과 그것에 내포된 경제적 메시아주의를 비판한다. 권력현
상이 인간의 집단적 삶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고 따라서 권력이 마치 "자연의
질서"인 양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민중신학이 "종의 도"를 제시한 것처럼, 민중신학은
시장의 "자연적" 합리성이 시장강박에서 비롯된 미신임을 폭로한다. 민중신학은 경제적 메
시아주의에는 노동을 통해 삶을 꾸려 가는 구체적인 인간들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점도 비
판한다. 바로 그 인간들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경제의 틀을 만들어 가는 것인데도 특정한
시장법칙을 영원한 법으로 만들어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억누르고 노예화하는
것을 민중신학은 용납할 수 없다. 민중신학은 경제의 틀을 그때그때 만들어 가는 것은 민중
이고 민중은 이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인 삶을 형성해 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민중신학은 시
장만능의 유토피아를 넘어서서 민중이 경제적 삶의 주체가 되어 더불어 사는 나눔의 질서를
구상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경제의 "지구화"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민중신학
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III. 민중의 경제를 위한 민중신학의 몇 가지 제안

민중의 경제를 위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민중의 경제적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
라, 민중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경제적인 삶을 꾸려 나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들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시장의 "자연적" 합리성에 대한 미신도 위
험하지만, 희귀성의 조건 아래서 욕망충족의 효율성을 달성하는 시장경제의 역할에 대한 지
나친 이데올로기적 폄하도 위험하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시장을 신비화하지 않고 시장의
실패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시장을 인간친화적, 사회친화적, 환경친화적으로 형성하는 데 필
요한 역사적 조건들을 밝히는 일이다.

1. 시장의 실패에 대한 인식

시장의 실패는 시장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그 논리에 이미 배태되어 있다. 근대적 의미의 시
장경제는 영리와 가계의 역사적 분리와 뗄 레야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있다. 영리활동과 가
계활동의 분리는 역사적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시장경제에서 가계는 소비와 노동력
제공을 맡고 영리활동은 재화와 용역의 생산과 판매, 이를 위한 자본과 노동력 투입을 맡게
되었다. 영리활동이 이루어지는 기본틀은 말할 것도 없이 교환관계이다. 이 교환관계에서의
성공이 영리활동의 효율성, 곧 경제적 합리성을 가늠하는 잣대이다. 이같은 합리성의 규준
아래 수행되는 영리활동은 생활세계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체제로 발전하고, 경제적 합
리성은 생활세계의 규범적 합리성과 질적으로 구별되기에 이르렀다.
 시장경제는 시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재화와 용역의 교환을 위해 있고, 따라서 시장
업적을 제공할 수 없는 것은 시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유효수요가 없거나 시장업적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일단 시장에 참여할 수 없다. 그리고 재화와 용역의 교환을 규율하거
나 시장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시장주체들의 권력이다. 시장주체들은 시장
에서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그들의 권력을 적나라하게 행사한다. 지금까지 시장권력
들을 규율해서 공정한 교환 혹은 등가교환을 실현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많은 노력이 있어
왔지만,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생산물시장에서의 공정한 교환을 위해 이제까지 고안된 최선의 장치는 독과점 규율이다.
이 교환은 가격 메카니즘에 의해 규율된다고 굳게 믿어지고 있기 때문에 가격 메카니즘을
교란할 수 있는 요인들을 배제하는 것이 생산물시장 규율정책의 핵심과제가 되는 것이다.
가격 메카니즘이 과연 생산물 시장의 규율정책의 파라다임이 될 정도로 신뢰할 만한 것인
가는 따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독과점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시
장경제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독과점의 폐해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공정한 경쟁에 입각하여 경제활동의 효율성을 향상시킬 수 없다.
 요소시장에서의 공정한 교환은 사회정의 문제의 본질 문제이다. 요소시장에서의 교환이
시장주체들의 권력에 의해 공정하지 못하게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영리
와 가계가 역사적으로 분리되면서 나타난 요소시장들, 곧 노동시장과 자본시장은 노동의
권력과 자본의 권력이 직접 투쟁하는 자리이다. 노동시장과 자본시장에서 형성되는 임금과
시장이자는 이 투쟁의 결과이며, 국민소득의 분배에서 노동의 몫과 자본의 몫도 이 투쟁에
의해 결정된다. 이 투쟁은 요소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많은 경우
격화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의 어느 시장경제에서도 요소시장을 지배하는 불투명성이 제
거된 적은 없다.
 불투명하기는 경제를 위해 자연을 동원하고 활용하는 데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이 가져
다주는 부를 측정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잣대는 없다. 자연을 동원하여 활용하는 데 투입
되는 자본과 노동의 양이 자연자원이 가질 수 있는 시장가치이다. 이 시장가치만이 시장경
제에서는 중요하다. 생태계의 안정과 저(低) 엔트로피의 희귀성을 시장가치로 환산하는 방
법은 시장경제의 조직원리 자체로부터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경제를 위한 생태계의 동
원과 활용에서 관찰되는 것은 교환가치를 중심에 놓는 가치이론의 자연망각이고 자연에 대
한 경제의 폭력이다.
 요소시장을 통해 각각 조달된 노동력과 자본은 생산과정에 투입된다. 잘 알려져 있는 바
와 같이 거기서 자본과 노동력은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시장을 위한 생산에서 노동력과 자
본은 서로 불가분리적이고 상호불가결하다. 이 점만 보면, 노동과 자본의 협력은 생산을 위
해 강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품생산에서 노동력은 자본의 감독과 명령 아래
놓이고 노동업적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조직된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관계는 자본주의
적 상품생산의 역사적 조건이다. 거기서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이 노동협약에 따라 노
동시간 동안 자신의 인격으로부터 노동력이 분리되는 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
주의적 상품생산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따라서 두 가지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지배
관계로부터 민주주의적 협력관계로 전환시키고, 노동력을 투입하는 생산과정을 인간화시키
는 것이 그것이다.
 경제의 지구화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시장의 실패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시 거론하지 않
는다.

2. 시장의 규율에 대한 민중신학의 제안

이처럼 시장의 실패가 시장의 구성논리에 내장되어 있는 것을 지적한다고 해서 시장의 폐
지를 말할 수는 없다. 시장은 끊임 없이 실패하고 있지만, 시장경제보다 더 효율적인 경제
제도는 아직까지 고안되지 않았다. 희귀성의 조건 아래서 욕구충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의 효율성 문제를 비켜가면서 경제를 운영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시장은 필요악이
다. 중요한 것은 시장의 실패에 대한 인식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시장만능주의를 청산하고
시장을 제대로 규율함으로써 시장의 순기능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해법은 민중
의 광범위한 참여가 보장되는 시장의 민주주의적 규율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의 민주주의적 규율을 위해 여러 가지 개념들이 제시되었지만, 경제 민주주의 개념
은 민중의 광범위한 참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경제 민주주의의 핵심은 시장경
제에서 나타나는 불투명한 폭력을 제거하여 경제주체들의 민주주의적 참여를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경제 민주주의를 참여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경제 민주주의는 정
치적 민주주의를 필요불가결한 전제로 삼고 있지만, 정치적 민주주의만 가지고는 시장권력
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데에는 미흡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오늘날 경제 민주주의는
생태학적 정의까지 고려하면서 시장경제를 규율하는 틀로 구상되고 있다.
 경제 민주주의는 일단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에서 노동의 단결권이 확보되어 자본의 권력
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단결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매우 어려운 과제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단결권의 행사와 관련해서 여전히 해결하여야 할
과제들이 많이 있다. 경제 민주주의는 단결권에 입각한 노동의 권력형성을 통해 노동의 이
해관계를 자본의 이해관계에 대항시켜 균형을 유지시키는 데 주안점이 있다. 시장경제에서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대립 속의 협조"라고 볼 때, 노동과 자본의 권력균형을
이루는 것은 노동과 자본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노동과 자본의 권력균형을 전제로 해서 경제 민주주의는 노동과 자본의 이해관계를 조절
하는 세 가지 심급을 설정한다. 하나는 거시경제적 사회협약이고, 이 사회협약은 단순한 노
사협약의 수준을 넘어서서 국민소득의 적정분배를 통해 소비와 투자의 균형을 추구하고자
한다. 국민소득에서 소비(노동)의 몫과 투자(자본)의 몫이 적정하게 결정되면, 균형성장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고, 국민경제의 자원할당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성장의 속도조
절정책, 투자정책, 구조정책 등이 거시적으로 입안될 수 있다. 최근에는 국민소득의 분배에
서 노동의 몫과 자본의 몫 이외에 자연의 몫을 어떻게 배정하여 국민경제의 환경친화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도 다루어지고 있다.
 또 하나의 심급은 미시경제적 수준에서의 노사관계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과제가 설정
된다. 노동자들의 단결권이 최대한으로 발휘되는 산별 수준에서 노사협약을 체결하여 이
노사협약의 구속력을 산별 산하 사업장에서 관철시키는 것이 그 하나다. 이것은 자본의 권
력이 노동의 권력을 압도할 수 있는 개별 사업장에서 체결되는 노사협약이 노동자들의 이
해관계에 극도로 불리할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방책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산별 노동협약이 이제까지 거의 실천되지 않았고, 요즈음 일부 산별노조 차원에서 초보적
으로 시도되고 있는 형편이다.
 또 다른 하나는 기업 차원에서 노동과 자본의 "대립 속의 타협"을 제도적으로 도출해 내
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주식법과 회사법이 앵글로색슨 지역과는 다르게 법제화되어 있어
서 이 문제를 처리하는 데 감독위원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거기서는 주주총
회에 의해 이사회가 선임되어 자본의 집행기구 기능을 수행하고, 다시 주주총회는 감독위
원회를 선임하여 이사회의 활동을 감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경제 민주주의는 자본의 집
행기구가 입안하고 집행하는 기업의 경제정책, 인사정책, 사회정책이 자본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노동의 이해관계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주목하여, 자본의 집행기구를
감독하는 감독위원회에 노동측과 자본측이 동수로 참여하여 각각의 이해관계를 적정하게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기업 수준에서 경제 민주주의는 감독위원회 구성의 노자동등권 확보를 요구하는 데 그치
지 않고, 생산자산의 형성에 노동자들이 참여하여 기업에서 노동자들의 주체적 지위를 강
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생산자산의 형성에 대한 노동자들의 참여는 기업 수준에서
노동과 자본의 기능을 혼융하자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업의 생산자산
형성에 노동자들의 지분을 확보하도록 하는 것은 기업에서 노동자들의 주체의식과 책임을
강화하는 효과가 크다고 보고 있다.
 요즈음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업활동을 통해 직간접적인 영향
을 받는 이웃 주민들과 자연환경의 이익을 어떻게 기업내 의사결정과정에 반영할 수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현재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경제 민주
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제 민주주의의 세번째 심급은 작업장이며, 작업장의 민주주의적이고 인간적인 형성이
그 과제로 설정되고 있다. 작업장에서의 노동관계를 민주화하고 노동조건을 인간화하는 일
은 작업장에서의 노동과정 형성에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
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관계가 첨예하게 드러날 수 있는 현장에서 자본의 기능을 무
시하지 않으면서도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일방적인 지배관계가 아니라 쌍방적인 협력관계
로 전환시키고, 노동자들의 인간생태학적, 심리학적, 정신적, 육체적 요구를 고려하여 생산
공정을 조직하는 것이 작업장 민주화와 인간화의 핵심 과제다.
 경제 민주주의는 세계금융시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거대한 화폐자본의 폐해를 민주주의적
으로 통제하는 방책을 생각하는 데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세계금융시장의 민주주의적 규율
은 산업자본으로부터 이탈하여 "카지노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들을 연출하고 있는 금융자
본의 재갈을 잡기 위해 필요하다. IMF의 신자유주의적이고 화폐주의적 접근을 수정하면,
IMF의 특별인출권을 이용하여 세계화폐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폐가 창출되는
그 순간 IMF는 세계무역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자금흐름의 왜곡을 처리하는 본연의 임
무에 충실해질 수 있다. IMF의 특별인출권을 발행하는 조건도 획기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가령 브라질의 아마존 산림지역을 보존한다는 정부의 약속에 근거해서 특별인출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한다면, 브라질은 외채를 갚기 위해 아마존 지역을 무리하게 개발해서
지구의 허파를 파괴하는 일을 중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존 열대 우림의 파괴에서 비롯
되는 생태학적 재앙을 피하는 데 드는 비용이나 이를 복구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안한다
면, 이보다 더 좋은 대책은 없을 것이다. 금융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화하도록 강제하기 위
한 수단도 여러 가지로 강구할 수 있다. 주식시장과 환시장, 채권시장을 통해 빛과 똑같은
속도로 손을 바꾸는 금융자본의 상당부분을 시장진입을 위한 예탁금 형태로 묶어 두는 것
도 충분히 가능하고, 시세차익의 상당부분을 자본소득세의 형태로 환수하는 것도 기술적으
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렇게 퍼낸 가치총량의 상당부분을 환경보호기금으로 전환시킨다
면, 무한히 팽창되는 가치생산을 둔화시켜 전세계적으로 지속가능한 균형성장을 도모할 수
도 있다. 이 모든 일은 그러나 세계금융시장의 민주주의적 규율이 가능할 때에만 비로소
성사될 수 있다. IMF나 IBRD(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구가 종래의 지배구조를 청산하
고 원칙적으로 각 회원국의 동등한 의사결정권에 입각한 민주적인 기구로 재편성된다면 셰
계금융시장의 민주주의적 통제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IV. 결론

나는 이 글에서 민중신학의 유토피아적 구상을 추적하고,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
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극복해야 하는가를 생각하였다. 민중신학은 하느님 나라나 메
시아 왕국과 같은 상징을 민중의 갈망과 연결시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실
현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었다. 나는 민중신학의 이러한 관점이 민중의 경제를 모색하
는 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핵심문제가 된 신자유주의는 시장만능의 유토피아를 내세워 민중부문을 광
범위하게 배제하는 가운데 자본의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자본의 지배 아래서 민중의 삶의
처지는 극도로 악화되고, 이와 동시에 자연도 황폐화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시
장에서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시장의 신을 내세워 이 신을 경배하게 만들고 이러한 우상숭
배를 하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노예화한다. 나는 이를 경제적 메시아주의라고 불렀다. 이 경
제적 메시아주의를 극복하고 민중의 경제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민중의 참여 아래서
이루어지는 시장의 민주주의적 규율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민중이 갈망하는
정의와 친교와 샬롬의 공동체를 실현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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