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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12 (17:31) from 211.41.243.183' of 211.41.243.183' Article Number :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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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권과 소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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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권과 소유권

강원돈(아시아경제윤리연구소장)

I. 머리말

 우리 사회에는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노사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노사관계는 식민지 시대로부터 민간 및 군부 독재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인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할 만큼 크게 왜곡되어 왔다.
 압축 성장을 위해 급속한 자본 축적과 집중을 국가전략으로 삼았던 군부 독재시기에 노동력 착취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단결권은 인정되지 않거나 어용 노동조합의 형태로 실현되었을 뿐이다. 병영적 노사관리로 상징되는 참혹한 노동자 탄압은 그 당시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군부독재를 절반쯤 청산하였다고 알려진 문민의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세계화"를 추구하였고, 이 정부의 노동정책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법제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목표는 IMF의 경제 관리를 집중적으로 받았던 국민의 정부에서 달성되었다. 그 결과, 군부독재에 대항하며 성장하였던 노동 권력은 궤멸적으로 약화되었고, 총노동인구의 60 퍼센트 이상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에 묶였으며, 국민총소득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극적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권리가 크게 제약되어 있다는 것은 노동조합법, 단체교섭법, 노동쟁의법 등 노동3권의 실현을 규정하는 법률들을 검토하여 보아도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들의 단결권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합법화된 1990년대 말에 이르러 비로소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단체교섭법은 단위 사업장 차원에서 이루어지도록 규율되고 있는데, 독일 등 선진공업국가들에서 시행하고 있는 바 노동의 권력을 강화해서 자본의 권력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는 산별 단체교섭은 법제화되어 있지 않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실현시키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게 되어 있는 파업권은 노동쟁의법에 의해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다.
 기업 차원에서 노동과 자본의 협력을 규정하는 "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이 있기는 하지만, 이 법은 노사 협력을 통해 기업 경영의 합리화와 생산성 향상을 목적으로 한 것이어서 애초부터 단위 사업장 차원에서 노사의 건설적 타협과 상생을 위해 독일 등지에서 널리 채택되고 있는 노사 공동결정 제도의 취지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었다. 자본측은 이와 같은 선진적인 제도에 대한 논의 자체에 대해서도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여기에 더하여 불법 파업으로 규정된 노동 쟁의로 인해 기업이 손해를 보았을 경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고 채권 확보를 위한 가압류 신청이 빈발하고 있다. 이것은 기업 경영자 측이 소유권 행사를 통해 노동측을 제압하려는 전술로 인식되고 있다. 2002년 초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가 분신한 이후 2003년에 들어와서만 네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는데, 이것은 자본 쪽의 공세에 대한 노동측의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짧은 글에서 한국 사회의 노동 문제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으므로, 필자는 최근에 매우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는 소유권에 의한 노동권의 억압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 문제의 성격을 분석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몇 가지 원칙들을 기독교 사회윤리의 틀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II. 문제의 분석

1. 손해배상청구 소송 및 가압류의 실상

 자본측의 소유권 행사에 의한 노동권 억압의 실상은 2002년 초에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분신으로 극적으로 밝혀졌다. 두산중공업 경영 측은 노사 단체협약에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였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결의하여 쟁의 행위에 돌입하자 이를 쟁의 절차를 무시한 불법 파업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자본측은 쟁의 행위로 인한 경영 손실에 대해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의 배상을 요구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고, 채권 확보를 위해 법원에 가압류 조치를 청구하였다. 가압류 대상은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의 급여 채권의 2분지 1, 노동조합비 전액, 신원보증인들의 부동산, 전세보증금, 자동차 등을 망라하였다. 이렇게 되면,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의 생계는 크게 위협받고, 노동조합의 정상적인 활동은 불가능해지며, 신원보증인들의 재산권 행사가 위축된다.
 두산중공업의 노사 대결과 같은 예는 다른 사업장들에서도 무수히 찾아 볼 수 있다. 민주노총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이후 불법 쟁의 행위에 대한 자본측의 손해배상청구 및 가압류는 2002년 6월말 현재 38개 사업장, 1253억 원에 달했고, 6개월 이후인 2003년 1월 현재 50개 사업장에 2천222억 9천만 원 가량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단지 민주노총에 보고된 수치만을 말한 것이므로, 실제로 그 규모는 더 클 것이다.
 자본측이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 조치 등 재산권 행사를 통해 노동측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 선 이후의 일이다. 1990년대 초에도 이러한 조치가 노동측을 압박하기 위해 논의된 적이 있으나, 그 실행은 유보되었다. 불법 파업으로 규정되는 노동자들의 쟁의 행위에 대해 자본측이 소유권 행사로 맞서기 시작한 것은 정부의 자문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2.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 개선 논의의 현주소

 자본측의 소유권 공세로 인해 노동자들이 분신 등의 극단적 방법으로 항거하자, 여러 가지 해결책들이 논의되었다. 노동측은 단체교섭에 신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본측을 압박하기 위해 노동측이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쟁의 행위가 불법 파업으로 규정되기 일쑤이니, 노동쟁의법을 개정하여 쟁의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들고 나왔다. 정당한 쟁의 행위는 쟁의행위법상 형사 처벌과 민사상 배상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불법 파업이라 할지라도, 노동측이 평화 의무를 준수하였을 경우에는 파업으로 인한 경영 손실을 노동측이 배상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고, 가압류 조치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제도 개선책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그 개선책의 핵심 내용은 크게 보아 다섯 가지이다. 가압류 때 노조 조합원의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도록 한다는 것, 노조 조합비의 가압류를 제한한다는 것, 신원보증인의 연대책임을 제한한다는 것, 대법원에 가압류 처분결정을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 노조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가압류를 부당노동행위로 간주하여 처벌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정부의 개선책에는 노동쟁의법 개정에 관한 언급이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정부의 제도 및 제도 운영 개선책을 구체화할 수 있는 연구 결과를 내어놓았다. 이 기관의 연구위원 문무기 씨는 "불법 쟁의행위에 대한 민사책임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이라는 보고서에서 몇 가지 입장을 밝혔다. 우선, 쟁의행위를 규율하는 현행 법규가 지나친 제약 조치들을 규정하고 있어서 사실상 합법적인 쟁의행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노동측 주장에 대해서, 그는 "노동관계법 개정과 쟁의행위의 한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문제는 장기적이고도 심층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그 다음, 급여 채권의 가압류 조치에 대해서 그는 압류를 금지하는 급여채권의 범위를 급여의 2분지 1로 제한한 현행 규정을 4분의 3으로 상향조정하거나, 급여채권 2분의 1에 대해 압류를 금지하되 압류 후 잔액이 최저임금을 하회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가압류에 따른 근로자의 생계곤란을 방지하기 위해 가압류의 집행을 정지시키기 위한 공탁금액이나 가압류 취소를 위한 담보금액을 낮게 결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조합비에 대한 가압류 범위를 제한하고, 신원보증법을 개정하여 신원보증인의 책임범위를 조정하는 방안 등을 검토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3. 기존의 논의들에 대한 평가

 한국노동연구원 문무기 씨의 대안 제시와 정부의 제도 개선책은 자본측이 소유권 행사를 통하여 노동권을 압박하는 행위의 정당성을 문제로 삼지 않은 채, 소유권 행사의 정도를 가혹하지 않을 정도로 완화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헌법이 명시한 노동3권 가운데 특히 단체행동권을 하위 절차법이 크게 제약하여 노동자들의 쟁의 행위가 걸핏하면 불법 행위로 나타나게 만드는 법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다. 이에 반해 노동계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해결 방향도 제대로 잡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자본측의 소유권 행사가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억압·말살하고, 노동자들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에, 자본측의 소유권 행사의 빌미가 되고 있는 쟁의행위법을 조속히 개정하여 노동자들의 헌법상 권리를 보장하고, 소유권이 노동권을 억압하는 반문명적인 조치들이 당장 철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래서는 이 두 가지 주장들의 근거를 밝히기 위해 현대 국가에서 소유권과 노동권이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가를 고찰하고, 기독교 윤리의 입장에서 소유권에 의한 노동권 억압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로 한다.

III. 현대 국가에서의 소유권과 노동권

1. 소유권 규정

 현대 국가들에서 소유권은 신성불가침한 인간의 권리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도 제23조 1항에서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여 소유권의 불가침성과 법률적 보호를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제23조 2항은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이 항목은 1항의 규정을 본질적으로 침해하지 못하는 선언적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 세계에서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을 선언한 최초의 명문 규정은 프랑스 혁명 이후 선포된 "인권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선언의 정신은 프랑스 헌법에 명시된 뒤에 나폴레옹 법전을 통해 유럽 각국의 헌법에 뿌리를 내렸다.
 소유권의 신성불가침 사상은 본래 로마의 물권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로마 물권법은 물건에 대한 소유자의 권리를 규정하는데, 그것은 물건을 소유하는 자가 그 물건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소유권은 한 마디로 물건에 대한 소유자의 절대적 처분권(Verfuegungsmacht)이며, 이 처분권에 대한 타인의 간섭은 원칙적으로 배척된다. 물권은 오직 물권의 행사가 타인의 물권을 침해하는 경우에만 제한될 수 있는데, 그것은 타인의 물권 역시 침해의 배척이라는 절대적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로마의 물권법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물권에 대한 권리만을 명시할 뿐, 인간에 대한 지배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지배될 수 없다.

 시장경제가 역사적으로 탄생한 뒤에 소유권은 시장경제의 운영과 밀접하게 결합되었다. 시장경제는 가계와 영리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이 둘을 결합시키는 생산물시장과 노동시장을 구성요소로 갖는다. 생산물시장에서의 거래는 재화의 소유권 양도 계약으로 이루어지며, 이 경우 재화의 거래는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재화의 소유권을 전제한다. 여기서는 먼저 기업 경영에서 소유권이 갖는 의미를 따진 뒤에 노동시장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기업 경영에서 소유권은 기업 지배 구조의 핵심 문제로 간주된다. 본시 기업은 노동력, 자본, 원료 등 생산요소들을 적절히 배합하여 상품을 생산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영리단체이다. 원료는 자본의 한 표현형태이므로 이 둘을 묶어 자본의 소유 문제를 고찰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다. 자본의 소유자는 그 자본에 대한 절대적 처분권을 가지며, 이에 대한 타인의 간섭을 절대적으로 배척한다. 자본의 소유자는 그 자본을 활용해서 직접 경영을 할 수도 있고, 전문가에게 그 자본을 맡겨 운영하게 할 수도 있다. 자본의 운영자, 곧 경영자는 자본의 운영에 대한 전권을 갖는데, 이 권한은 시장경제에서 기업의 경제정책으로 표현된다. 경제정책은 대체로 사업 구상과 결정, 생산설비의 확장과 축소, 이전과 폐쇄, 매각과 매입 등으로 표현된다.

 기업 경영에서 생산 요소로 간주되는 노동력은 매우 복잡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자본가 혹은 자본의 운영을 위임받은 경영자는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을 매입한다. 그 노동력은 사람의 몸 속에 들어 있다. 노동력은 그 노동력을 몸 속에 지니고 있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노동시장은 노동력이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상품으로 거래되는 것을 논리적으로 전제하며, 노동계약을 통해 노동력 거래가 완료되면, 그 노동력은 사실상 그것을 산 사람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노동력을 매입하여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은 그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을 요구할 것이며, 그것은 시장경제에서 기업 경영자의 배타적 인사권으로 표현된다. 이제 노동력을 몸 속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인사권자가 임의로 배치하는 곳에서 인사권 행사자의 노무관리 아래서 일을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일은 노동자의 일이 아니라 부리는 자의 일이며, 따라서 타인의 노동이다. 그 일의 결과는 노동하는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부리는 자에게 귀속된다. 노동자는 그에게 마주선 타인으로서의 경영자의 지배 대상이 된다. 노동시장이 시장경제의 구성요소가 되면서 소유권은 물건에 대한 지배권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는 인간에 대한 지배까지를 포함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태는 소유권의 본래 규정, 곧 물건에 대한 임의적 처분권 규정과 배치된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는, 사각의 원 같은 것이지만, 시장경제에서 관행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현대 국가에서 헌법에 명시된 소유권 규정은 기업 소유자나 경영자가 자본과 노동력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듯한 망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기업의 인사정책과 노무관리, 그리고 경제정책을 통해 배타적 권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노동력과 사람은 분리되지 않거니와 노동자는 노동을 할 때에도 사람이고,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도 역시 사람이다. 사람인 이상 그는 노동 과정에서 단순한 생산 요소 이상의 지위를 요구하고 사람의 권리를 주장한다.

2. 노동권 규정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이래로 노동권은 인간의 사회적 권리로 인정되는 추세에 있다. 대한민국 헌법도 제32조 1항에서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헌법이 노동의 권리를 인정하고 고용 촉진과 적정임금 보장을 국가의 책무로 규정한 것은 노동자들이 시장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헌법 제32조 2항은 노동의 권리에 대응하는 노동의 의무를 규정하여 노동을 통해 사회의 형성에 이바지해야 할 각 사람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노동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헌법 제15조는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여 노동의 의무가 노동의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될 수 없음을 명시한다. 이 두 헌법 조항들은 노동의 의무가 강제노동이나 부역의 형태로 실현될 수 없으며, 노동의 의무를 법률로 정할 때에도 노동의 의무를 지닌 사람들의 참여와 동의에 의거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3조는 또한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향상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이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명시하여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사회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 노동3권 가운데 단체행동권은 "법률이 정하는 주요방위산업체에 종사하는 근로자"에 한하여 오직 법률에 의해서만 제한되거나 배제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단체행동권의 제한은 헌법에 종속되는 하위법률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사회국가(Sozialstaat)의 전통이 강한 선진 사회들에서는 단체행동권의 제한 자체를 엄격히 한정하고 있다. 노동의 여러 권리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보호를 위한 것이므로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입법 취지가 강조되기 때문이다.
 노동권을 인간의 사회적 권리로 인정하는 사회국가 전통에서 노동권은 본래 시장경제에서 노동자의 생존과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인정한 권리이다. 한편으로 노동권은 일할 능력이 있고 일할 의사가 있는 모든 사람이 일자리를 갖고서 돈벌이 노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그것은 노동자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노동권은 노동을 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비롯되는 권리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노동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원칙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노동권의 이 두 가지 측면을 가장 분명하게 주장한 학자는 에두아르트 하이만(Eduard Heimann)이다. 그에 따르면, 노동권은 "노동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노동 안에서 그리고 노동에 접할 때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eine Berechtigung des Arbeiters nicht nur aus seiner Arbeit, sondern in und an seiner Arbeit)이다. 이 노동권 규정을 가지고서 그는 노동과 관련된 모든 영역들에서 인간과 인격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한다. 이것은 노동세계에서 노동자들이 지배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을 지양하고 주체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원칙은 결사의 자유로 표현되고, 자본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노동의 권력을 조직할 수 있는 권리로 관철되어야 한다. 하이만은 인격과 결합된 노동에 대한 경영자의 지배권을 부정한다.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노동세계에서 노동자는 설사 임금을 수령하는 대가로 자신의 노동력을 가치생산 과정에 들여놓는다 하더라도 노동권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고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권을 인간의 권리로 인정할 경우, 이 권리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다. 소유권의 행사를 보호하는 것이 로마의 물권법을 이어받은 현대 국가의 의무로 인정되고 있지만, 노동권은 소유권 행사에 의해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

3. 노동권과 소유권의 조화

 노동권과 소유권이 가장 첨예하기 맞부딪치는 장소는 시장경제의 중추기구인 기업이다. 기업에서 노동과 자본은 현대 공업 사회의 조건들 아래서 서로 결합하고 협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조건들 아래서 노동과 자본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해관계들을 갖고 있으며, 이 대립은 시장경제가 지양되지 않는 한 해소될 수 없다. 필자는 이 두 가지 측면들을 아울러서 노동과 자본은 시장경제에서 상호 "대립 속의 협조" 관계를 맺는다고 정리한다.
 공업화된 시장경제의 조건들 아래서 노동과 자본이 대립 속의 협조 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최적화되는 경우는 노동이 자본의 권리를 인정하고, 자본이 노동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자본이 노동의 권리를 부정하면, 노동은 자본에 대항하여 적대적인 투쟁을 벌이게 될 것이고, 이것은 자본의 장기적인 이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거꾸로 노동이 자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기업에서 자본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킬 것이고, 기업의 경쟁력은 약화될 수 있다. 이것은 노동의 장기적인 이익을 침해한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조건들 아래서 노동과 자본의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도는 노동의 권리와 자본의 권리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타협을 하는 것이다.
 이 타협은 노동권의 행사가 소유권을 부정하지 않고, 소유권의 행사가 노동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달리 말하면, 소유권과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자본의 권리를 십분 인정하겠지만, 그것은 오직 노동권이 제한되지 않는 한에서 그렇다는 뜻일 것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이러한 타협의 첫 걸음은 기업에서 소유권의 행사가 노동하는 인간의 지배와 임의적 배제를 의미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기업 경영자의 인사권은 시장경제의 발전과정에서 노동자의 생존권을 함부로 박탈하는 방식으로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노무관리권 행사도 기업에서 노동하는 사람의 주체적 지위를 부정하고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노동자의 사람됨을 침해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둘째로, 기업 경영자의 소유권 행사가 표현되는 경제정책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경제정책의 적절성이 자본과 노동이 대등한 파트너로서 참여하는 평의회 형태의 의사결정 기구에서 검토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 기업 경영자의 소유권 행사는 노동자들의 권익 실현 수단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실현하는 방식 가운데 단체행동권의 행사가 기업의 운영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여 손실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은 노동과 자본이 시장경제의 조건들 아래서 "대립 속의 협조" 관계를 맺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사태이다. 노동과 자본은 이러한 사태를 회피하기 위하여 성실하게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뿐,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로 인한 손실을 노동 쪽이 배상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위의 세 가지 사항들이 자본 쪽의 성실성에 의해 보장되는 한, 노동은 자본의 권리를 인정하여야 한다. 자본의 소유자나 그로부터 자본 운영의 권한을 위임받은 경영자가 날로 치열해지는 시장경쟁의 조건들 아래서 기업의 생존을 위해 자원 할당의 조작적 합리성을 추구하고, 기업 조직의 체계적 합리성을 최대화하고, 기업 활동의 생활세계적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한, 노동은 자본의 이 기능들을 인정하는 데 주저할 것이 없다. 또한 노동은 기업의 생존을 위한 혁신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기업의 이윤 가운데 상당 부분이 투자 항목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바도 없다.
 그러나 노동과 자본이 기업 현실을 감안하면서 "대립 속의 협조"에 나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쌍방이 상호 신뢰성을 구축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은 각자의 처지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노동과 자본은 "수인의 딜레마"에 빠질 것이며, 노동과 자본의 이익 투쟁은 매우 적대적이고 상호 파괴적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노사관계가 적대관계로 점철되어 온 것은 바로 이 "수인의 딜레마"를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IV. 노동권과 소유권에 대한 신학적 검토

 노동권과 소유권은 현대 국가의 헌법에 명시된 권리들이지만, 이 헌법 규정들이 신학적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문제이다.

1. 노동권에 대한 검토

 노동권의 신학적 근거는 분명하다. 성서는 노동이 하나님에 의해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 제정되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창세기 1장 28절은 인간의 노동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고, 하나님에 의해 긍정되었음을 말한다. 노동은 생활활동인 동시에 공동체 형성 과정이기도 하다. 창세기는 다른 맥락에서 노동이 활동과 고역, 기쁨과 고통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성은 결코 노동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운명임을 뜻하지 않는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은 것은 노동이 아니고 땅이라고 지적한다. 저주를 받은 땅은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었다. 이것은 노동조건이 악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조건 아래서 노동은 "이마에 땀을 흘리는" 고역이 된다. 그렇지만, 노동이 생활을 꾸려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한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에 의해 긍정되고 축복된 노동을 보호하기 위해 성서는 매우 다양한 보호 장치들을 마련하였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수집된 율법들은 노동과 휴식의 엄격한 규정을 마련하고, 노동소득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십일조 규정을 두었다. 이 율법들은 강제노역과 과중한 조세 부담으로부터 노동자들을 해방할 것을 요구하고, 노임의 정시 지급을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이자는 노동 소득을 강탈하여 생계를 위협하고, 자유인을 노예로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수에게 계승되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 선포에 호응하여 모여든 무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이여,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들을 편히 쉬게 하겠다"고 말을 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강제노동과 과중한 세금으로부터 해방된 세계였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상하 위계 질서를 가졌던 시대에 교회가 노동을 죄의 결과로 폄하하는 잘못된 해석에 빠져들기도 하였으나, 종교개혁자들은 노동을 소명으로 인식하고, 노동을 통해 각 사람이 자신의 생계를 꾸려야 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 봉사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인간의 노동이 하나님의 창조 활동에 동참하는 행위임을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노동 소명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 착취에 악용되기도 하였지만, 사회적 개신교는 부르주아적 직업윤리에 머물지 않고 노동하는 사람의 권리를 부각시켰다. 사회적 개신교는 노동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자본의 권력에 대항하는 다양한 제도들을 구상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신학은 기본적으로 노동이 삶을 위한 활동임을 인정하고 있으며, 시장경제의 조건들 아래서 사람들이 돈벌이 노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는 노동을 할 때에나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나 하나님과 이웃 앞에 선 독립적이고 연대적인 행위의 주체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각 사람은 노동의 업적을 이룩하여 공동체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하지만, 노동의 업적을 내지 못한 사람도 공동체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사람다운 삶을 보장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업적을 낸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업적을 보지 않고 각 사람을 자신과 관계를 맺도록 이끌어 들인다. 바로 이 신학적 주장은 사람들을 업적 이데올로기와 업적 강박으로부터 해방시킨다.

2. 소유권에 대한 검토

 성서는 소유권에 대해 매우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렇지만 성서가 모든 형태의 소유권을 부정한다는 견해는 지나친 주장이다. 무엇보다도 성서는 노동을 통하여 삶을 꾸려 나갈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서의 규정은 노동을 통하여 얻은 소산에 대한 노동자의 자유로운 처분권을 전제로 한다. 내 것과 네 것을 가르는 것은 최소한 자신의 삶을 책임 있게 영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노동 소득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권은 공동체의 이익과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위해 본질적인 제한을 받는다. 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실례는 십일조 규정이다. 이러한 정신은 소유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에 의해 계승되었다. 루터는 소유권을 인정한 바 있는데, 그 까닭은 이웃을 위해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웃에 대한 책임이 소유권 주장에 앞선 셈이다. 소유를 위한 소유는 종교개혁자들에게 낯선 사상이었다. 소유권 행사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이바지하여야 한다는 것은 개신교가 특별히 강조해 온 사상이었다.

 다시 성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성서는 노동 소득에 대한 임의처분권 이외에 고대 사회에서 생존과 노동의 기반이 되었던 물질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활 수단이자 생산 수단이었던 땅은 그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땅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땅은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의 것이다(레위 25:23). 사람들은 하나님이 맡겨준 땅에 깃들어 그 땅에 대한 경작권만을 가질 뿐이며, 그 경작권은 가문 단위로 세습되었다. 히브리 사회에서 땅의 매매가 인정되지 않은 것은 땅에 대한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땅에 대한 세습 경작권만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땅이 인간의 지배 대상일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이 임의로 땅의 얼굴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땅을 발로 밟으라"(cabash ha'arets)는 창세기 1장 28절의 하나님의 분부는 프랜시스 베이컨 이래로 서양 근대 문명의 패러다임이 되었던 "땅의 지배"(dominium terrae) 사상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서양 근대에서 도미나움 떼레는 대상화된 자연의 지배를 의미하는 슬로건이었으며, 여기서 지배는 땅과 땅 위의 모든 물체가 인간의 임의 처분권에 맡겨져 있음을 전제한다. 성서는 이런 의미의 지배를 알지 못하며, 그 지배를 뒷받침하는 소유권도 알지 못한다. 성서는 소유권에 입각한 인간의 지배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성서가 노예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노예제도는 성서의 창작이 아니고, 단지 성서의 환경이었다. 그 환경이 성서에 반영되어 나타났지만, 성서는 사람에 대한 소유에 바탕을 둔 노예제도를 정당화한 적이 없다. 성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선언하고 있으며(창세 1:26),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뿐, 그 무엇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

 성서가 소유권에 대해 갖는 이와 같은 유보적 입장은 물론 현대 사회에서 자본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몇 가지 시사점을 주기는 한다. 우선, 자본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자본을 만들어낸 사람이 그 자본에 대해 처분권을 갖는다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에 부합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을 만든 것은 노동이다. 노동 소득 가운데 일부가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 저축되어 나타난 것이 자본이다. 시장경제는 시장 업적에 따라 자본과 노동으로 소득 배분이 이루어진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마르크스에 의해 수정된 가치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가가 노동력 구매를 위해 지불한 것과 노동력을 이용하여 얻은 것 사이의 가치 차이가 자본가의 수중에 집적된 것이 자본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 자본이 노동자들에게 낯선 권력으로 나타나 지배하는 것이 시장경제의 터무니없는 점이다. 이 터무니없음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선차성과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본 형성의 역사적 과정을 놓고 보거나 사리를 놓고 볼 때 옳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선차성과 우위를 제도화하는 방안으로는 자본의 중립화가 있다. 자본의 중립화는 예컨대 기업에서 자본의 운영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경영 기능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이 자본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해서 노동이 경영 기능을 도맡겠다는 뜻도 아니다. 자본의 중립화는 이윤 추구를 위해 자본이 지배의 인격체로 등장하여 노동자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 다음, 중요한 생활 수단과 생산 수단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은 성서의 가르침은 자본의 소유와 운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자본은 현대 공업 사회에서 생산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자본은 현대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도구이다. 자본은 노동력 지출을 절약하게 하고, 인간을 단조롭고 힘든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와 같은 좋은 도구로서의 자본은 무수한 노동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공동체적으로 형성한 것이니 만큼 일차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물론 역사적 시장경제에서 자본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자본의 소유권이 꼬리표처럼 명시되어야 시장경제의 조건들 아래서 기업 경영을 잘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자본의 사용은 공동체의 이익을 전제로 해야지, 자본 소유자의 권리 행사가 공익을 침해하는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현대 경제에서 자본의 소유권 행사가 그 권리의 행사자에게 플러스의 외부 효과를 내지만, 권리 행사자의 환경을 이루는 공동체에게 마이너스의 외부효과를 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기업 경영의 효율성을 위해 유리한 생산 입지를 찾아 생산 기지를 옮긴다든지, 과격한 인력 조정을 단행함으로써 공동체 전체가 엄청난 사회비용을 물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시장 경제에서 자본은 엄중한 사회적 책임을 지어야 하며, 공동체는 그 책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자본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하다면, 자본측의 소유권 행사가 노동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노동권은 인간의 생활 활동에서 유래하는 노동자들의 권리이며, 이 권리는 소유권 행사에 앞서는 권리이다. 소유권에 대한 노동권의 우위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선차성과 우위라는 기독교 윤리의 원칙에도 부합한다.

V. 마치는 글

 기독교 윤리는 노동과 소유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윤리적 판단의 근거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성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본에 앞선다고 가르친다. 그 다음, 인간은 자본을 활용하여 삶을 꾸려나가는 다양한 틀들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그러한 생활 활동은 노동하는 사람의 이익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에도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생계를 위해 생활 활동을 펼쳐 나간다. 시장경제의 역사적 조건들 아래서 인간은 생애의 대부분의 시간을 돈벌이 노동을 준비하고 돈벌이 노동을 하면서 생활하게 되었다. 돈벌이 노동 이외의 생활 활동은 오늘의 시장경제에서도 다양하게 조직되고 있지만, 돈벌이 노동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조건이 되었다. 이런 여건에서는 돈벌이 노동과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보호되어야 한다. 별도의 제한 조건들이 없는 한, 자본은 부르주아 헌정 질서에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을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문명 사회의 책무이다. 이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 문명 사회가 추구해야 할 일은 자본의 도구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자본을 중립화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본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등장하지 않고, 인간과 노동을 위한 충직한 도구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불법 파업을 벌였다는 이유로 개별적인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청구를 하고 이를 위해 급여 채권과 노동조합비를 가압류하고 신원보증인에게 무한연대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노동자의 생존권과 단결권, 그리고 단체행동권을 압살하려는 자본측의 공세이며, 이 공세가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것은 분명히 문명 사회의 스캔들이다.
 이 스캔들로부터 벗어나려면, 헌법이 보장한 단체행동권을 제약하는 하급 절차법을 조속히 개정하여 노동자들의 쟁의행위가 불법으로 규정될 수 있는 소지를 없애야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 사회가 명심하여야 할 것이 있다. 자본측의 소유권 행사는 그들의 고유한 권리이지만, 이 소유권 행사가 노동권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시민사회에 확산되어 노동권을 압박하는 자본측의 섣부른 소유권 행사를 봉쇄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진정한 문명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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