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신학아키브 논문자료실
Kang Won-Don's Social Ethics Article Archive

2004/02/16 (21:44) from 61.106.75.166' of 61.106.75.166' Article Number : 187
Delete Modify 강원돈 (kwdth@chollian.net) Access : 8765 , Lines : 102
지구화 시대의 노동자운동의 과제
Download : 노동운동(각주보완).hwp (54 Kbytes)
지구화 시대의 노동자운동의 과제
- 기독교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I. 머리말

 노동세계의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은 긴 역사를 남겼다. 독일의 사회적 개신교는 19세기 중반 이래로 사회 문제와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실천을 벌이고 제도 개혁안을 제시해 왔다. 영국의 산업 선교는 노동세계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실현하고 노동세계를 인간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노동 사목은 노동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현존 방식을 보여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업선교는 암울했던 개발독재 시대에 노동 탄압에 맞서 싸우는 합법, 반(半)합법 공간을 마련하고 노동자 권익을 실현하고자 한 기독교적 실천의 중요한 실례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인간의 삶이 제도를 매개로 한 관계들 속에서 형성되고 전개된다는 점에 주목한 기독교 분파들의 실천을 보여 준다. 그들은 제도를 개혁하거나 혁명적으로 변화시켜 인간의 삶을 제도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강력한 의도를 천명하곤 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장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찬양하고 주요 갈등들이 종식되었다고 말하며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였지만, 시장경제가 존속하는 한, 노동과 자본은 대립과 협력을 반복할 것이고, 시장경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노동의 기획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노동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요인들은 크게 보아 세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추진하는 "위로부터의 계급 혁명"이다. 자본의 팽창과 축적을 위해 탈규제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노동은 거의 무장 해제된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하나는 정보화에 근거한 이른바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이다. 지식기반 경제의 성립과 고도 전문직 부문의 확대, 노동 및 생산 조직의 변화, 린 생산 방식의 지구적 확산 등은 노동세계에 매우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노동자운동에서 나타나는 의식과 지향의 변화이다. 지구화와 정보화가 가져온 변화된 현실에서 노동자 운동은 적절한 경제적 업적 보상을 쟁취하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고, 여기서 더 나아가 지역, 국가, 국제사회에서 정치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몇 가지 요인들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노동자운동이 직면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기독교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 경제윤리가 노동세계의 문제들을 풀기 위해 어떤 판단과 행위의 원칙들을 갖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II. 노동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의 원칙들

 기독교 경제윤리는 제도적인 관계들을 다루는 기독교 사회윤리의 한 분과로서 특히 경제 관계들의 제도적 측면을 다루고자 한다. 경제는 자원의 희소성 조건들 아래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행위 체계를 가리키는데, 시장경제가 역사적으로 성립한 이래로 재화의 생산과 분배를 둘러싸고 세 가지 근본 문제들이 나타났다. 하나는 비교적 최근에 날카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경제 활동의 생태학적 한계의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본과 노동의 제도적 관계의 문제이고, 나머지 하나는 재화의 분배 원칙을 둘러싼 문제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 패러다임을 구상한 바 있다.
 논의의 초점을 노동 문제에 맞출 때, 기독교 경제윤리는 노동이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연사에 뿌리를 두고 진화되어 온 인간학적 사실이라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은 사람과 그 환경 사이에서 에너지와 물질이 교환되는 한 방식이다. 이 일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방식을 발전시키고 도구를 개발하였다. 사람이 일하는 노동 방식과 재화를 만들어내는 생산 방식은 선사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왔다. 노예제, 농노제, 임노동, 노동자 자주관리제 등은 인간의 노동과 생산을 조직하여 온 역사적 형태들이다.
 기독교 경제윤리가 노동을 자연사에 뿌리를 둔 인간학적 사실로 간주한다고 해서 노동에 대한 해석을 마다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 경제윤리가 노동 문제를 다루면서 판단과 행위의 원칙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노동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 해석의 초점은 신이 인간에게 삶을 영위하도록 노동을 위임하였다는 것이다. 노동은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축복이다. 따라서 노동은 생활 활동으로서 보호되고, 노동의 산물은 노동하는 사람의 몫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노동은 "땅"으로 은유되는 노동의 대상들을 변형시키는 활동이지만, 그 활동은 신이 만들어낸 자연 전체의 상호연관성을 유지하는 한도 안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노동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서 주목되는 것은 노동하는 인간의 주체성과 노동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성이 내적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하는 사람은 노동을 할 수 있는 정신적, 신체적, 기예적 능력을 자기 몸 속에 갖고 있는 개인이다. 그가 곧 노동의 주체이다. 이 주체성을 적절하게 나타내는 말은 페르손(person)인데, 페르손은 자기 자신 안에 유폐되어 있지 않다. 그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자기 밖에서 자기를 보고, 자기 자신을 개방하여 다른 페르손들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다. 이를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공동체 능력이라 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인간을 인식인간학적으로 "유적 존재"라고 지칭한 적이 있는데, 기독교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행위주체로서의 개인과 공동체는 같이 간다. 노동은 노동하는 주체들의 공동체 없이는 펼쳐질 수 없다.
 나는 이러한 몇 가지 전제들 아래서 노동 문제와 관련해서 기독교 경제윤리가 제시할 수 있는 판단과 행위의 원칙들을 여섯 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1. 기독교 경제윤리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노동주체성을 강조한다. 노동을 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 몸 속의 노동력을 지출하며 일을 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는 노동을 할 때 사람으로서 일한다. 그것은 그가 노동을 하기 이전에도 사람이고, 노동을 한 뒤에도 사람인 것과 똑같다.
 인간의 노동주체성의 원칙을 중시한다면, 마르크스가 "노동의 소외"라고 부른 현상들은 지양되어야 한다. 시장경제가 성립된 뒤로 노동력은 사람의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노동력 상품의 등장은 그 상품을 사들여 생산과정에 투입하는 사람이 노동력을 지배할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노동력에 대한 지배이지만, 노동력이 노동하는 사람의 몸으로부터 실제로 분리되지 않기에 노동자에 대한 지배나 다를 바 없고, 급기야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관계로 제도화된다.
 노동력이 노동하는 사람에게서 분리되는 것처럼 우기는 세상에서는 노동력을 활용하여 일하는 사람은 그 노동력을 부리는 사람을 위해서 일한다. 이것이 바로 타인의 노동이고, 그 결과물 역시 타인의 소유로 된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는 노동을 할 때 그 자신일 수 없고, 오직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만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그가 일을 열심히 해서 재화와 용역을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그의 노동력을 부리는 사람의 권력이 더욱더 커질 뿐이다. 타인의 지배 아래서 그의 노동은 임의로 분절되고 파편화될 수 있고, 따라서 그는 옆의 동료와 자발적 주체로서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노동의 소외는 노동 주체성의 상실이다.
 
 2. 인간의 노동주체성 요구는 노동권 우선의 원칙으로 나타난다. 노동자는 노동의 권리를 갖는다. 노동의 권리는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일자리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보다 더 넓게 해석되어야 한다. 노동권은 먹고살기 위해 노동을 한다는 단순한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권리들을 의미한다.
 일찍이 에두아르트 하이만은 노동권을 "노동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노동 안에서 그리고 노동에 접할 때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라고 규정하였다. 노동권은 한 마디로 노동과 관련된 모든 영역들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들을 의미한다. 노동세계에서 노동자들이 지배의 대상이 되지 않고 주체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면, 노동은 기업 경영, 국민경제 운영, 세계경제 규율 등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곳에 참여하여 함께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하고, 일터를 인간화하고 민주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은 결사의 자유를 통해 단결과 연대로 힘을 강화하고, 자본의 권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권은 단결과 연대, 그리고 참여의 권리이다.
 노동권은 사람답게 노동하려는 노동자들의 기본권이기 때문에 사회세력들의 다른 권리들, 이를테면 소유권에 의해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권과 소유권이 충돌할 때에는, 소유권과 노동권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며, 좀 더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경제제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소유권에 대한 노동권의 우위가 인정되어도 무방하다. 이것은 자본이 노동의 파생물이라는 발생사적 맥락을 보아도 수긍할 만하고, 인간의 노동주체성이라는 인간학적 원칙을 고려할 때에도 설득력이 있다.

 3. 기독교 경제윤리는 노동자의 자기 실현의 원칙을 제안하고자 한다. 노동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개인이고 자기 실현의 욕구를 갖는다. 사람은 살기 위해 노동을 하지, 노동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노동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노동은 인간의 삶에서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자연사에 뿌리를 둔 필연성일 뿐이다.
 바로 여기에 까마득한 옛날부터 철학적 주제로 자리잡아 온 자유와 필연성의 문제가 있다. 노동을 필연의 왕국에 속한 것이라고 본다면, 자유인은 노동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한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런 주장은 자유인을 위해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을 수탈해도 좋다는 논리로 통한다. 노동이 생존의 필연성이라고 한다면, 그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노동의 필연성을 앞세워 노동자의 생활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강제하고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생활의 시간을 빼앗아 버리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가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의 삶 앞에 진지하게 서고 자기 실현의 기회를 확보할 여력을 잃는다. 그런데도 시장경제는 엄격한 노동 규율 아래서 과잉 노동을 프로그래밍하고, 이러한 노동 규율을 노동자의 의식과 몸에 새겨서 "생체권력"(M. Foucault)이 되게 한다. 과잉 노동의 성과는 물론 자본의 축적과 팽창으로 나타났다. 노동자의 자기 실현 우선의 원칙은 "생체권력"으로 나타나는 노동통제를 거부한다.

 4.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서 암시한 바 있듯이, 사람의 노동과 사람 사이의 상호행위는 서로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둘은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 나는 이를 노동과 의사소통의 통전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일찍이 하버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을, 한나 아렌트의 버전을 통해, 현대화하면서 노동과 상호행위는 자연사에 뿌리를 둔, 서로 환원할 수 없는 삶의 두 방식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셀링의 동일철학적 언어로 정식화한 적이 있었다. 도구적 합리성이 생활세계적 합리성을 식민지화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동과 상호행위의 이원성을 주장한 하버마스의 의도는 그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러한 이원론적 패러다임은 포드주의 체제 속의 노동자를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의 수준에 묶어 놓고, 복지 국가의 관리체계에 노동이 완전하게 포섭되었다는 주장을 사회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노동의 해방적 성격을 기각하고, 성찰하는 정신의 의사소통 능력 안에서 해방의 원천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노동이 생활의 자료를 획득하기 위해 대상을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행위로서 자연사에 뿌리를 내렸을 때, 그것은 이미 두 가지 점에서 대화적이었다. 첫째, 동료들과의 협업 형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노동은 이미 대화적 현존 방식이었다. 둘째, 노동은 노동 대상에 적응하고 그 대상의 경험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전제하기에 노동하는 인간은 그 환경과 소통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자연에 대한 지배를 목표로 대상의 인지적 구성을 조직한 것은 근대의 자연과학적 세계관이었고, 이 세계관은 과학주의(scientism)와 기술주의(technology)의 통합을 통해 그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근대의 발전에서 기술이 의사소통을 대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는 노동을 대상에 대한 기술적 통제로 축소시킨 다음에 의사소통을 노동의 영역에서 분리해내고 의사소통의 규범부여적 기능을 강화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오히려 대상을 경험하기 위해 자기 자신 바깥으로 나가 그것에 적응하고 그 경험을 자기 안으로 끌고 들어와 자기를 새롭게 인지하는 인간 노동의 의사소통 능력을 재발견하는 데 있다. 나는 여기서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노동의 가능성을 본다.
 노동과 의사소통의 통전성은 테일러주의에서 극단화된 손노동과 두뇌노동의 위계적 이분법을 극복하고, 일터의 민주화와 인간화, 노동 과정의 생태학적 조직, 기업의 의사소통적 재조직화, 노동운동의 정치사회적 방향 설정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원칙이다.

 5. 노동이 생산한 재화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는 경제 운영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이와 관련해서 기독교 경제윤리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정의의 원칙이다. 정의의 원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각 사람에게 각 사람의 몫을 돌려주라는 공식으로 나타났다.
 시장경제에서는 자본가에게 자본가의 몫을, 노동자에게 노동자의 몫을 돌려주는 방식을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있었다. 시장 업적에 따라 각자의 몫을 분배하자는 것은 이러한 논의 끝에 나온 한 공식이다. 데이비드 리카아도처럼 "산 노동"(노동)과 "죽은 노동"(자본)이 모두 가치생산적이라고 우기고, 가치배분의 비율을 정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리카아도의 분배 방식이 잉여가치 수탈을 은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이래로 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노동과 자본의 시장업적을 평가하기 위한 경영학의 줄기찬 노력은, 마르크스에 의해 수정되고 비판된 노동가치론을 전제하지 않는 한, 노동과 자본의 공통항수가 없기 때문에 기껏해야 블랙박스 이론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노동시장에서 노동 소득이 결정되는 제도적 현실을 고려하면, 경영학이 시장업적에 따른 분배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임금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의 권력투쟁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주류 경제학이 한사코 인정하려고 들지 않아서 그렇지, 잉여가치 개념을 승인하고 이 개념을 분배 문제를 논의하는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면, 분배 문제를 풀 수 있는 명료한 해법이 떠오를 것이다. 기업이든 국민경제든 총소득에서 노동비용과 자본비용을 공제한 다음에 남는 것이 바로 잉여가치이다. 그런데 설사 잉여가치의 원천이 노동에 있다 할지라도, 노동자들은 잉여가치를 몽땅 차지하겠다고 나설 수 없을 것이다. 잉여가치의 일부가 법인세로 지급된 다음에, 세후 잉여가치의 상당부분은 노동자들이 속해 있는 기업이 시장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투자되어야 할 것이고, 그 나머지는 기업의 위험 회피를 위한 보험, 후세대 노동력을 위한 교육 기금,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 기금 등등으로 지출되고, 그러고도 남는 것이 노동자 복지를 위해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잉여가치의 분배 비율은 노동과 자본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기업 의회에서 결정되면 아무 탈이 없다. 이러한 논리를 확장하면 국민경제 차원의 소득분배 원칙이 수립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민경제의 성장 속도를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면, 국민경제 차원에서 적정 저축률과 적정 투자율을 계산할 수 있고, 잉여 자금의 투자를 위한 적정 이자율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경제윤리는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정의는 공동체에 합치하는 태도를 말한다. 더불어 사는 데 적절한 태도가 바른 태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노동이 생산한 재화는 노동 업적이 있든 없든 사람의 얼굴을 가진 중생이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삶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배분되어야 한다. 이를 가리켜 필요에 따른 분배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복지 국가들에서는 소득재분배를 통하여 이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 왔지만, 시장업적에 따른 분배를 전제하는 이 정책은 노동생산성이 빠른 속도로 향상되어 일자리가 대규모로 사라지는 상황에서는 견뎌내기 어렵다. 기독교적 정의 원칙에서 보면, 인간의 얼굴을 가진 중생의 기본소득을 보장하고 노동 업적을 통하여 과외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식의 소득분배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본소득 정책이 채택되면, 기업의 노동비용 계산과 잉여가치 분배 방식에 약간의 손질이 필요할 것이다.

 6. 오늘의 "고용 없는 경제성장"을 "환경파괴 없는 노동"으로 전환시키자는 논의는 독일 등지에서는 이미 1980년대 초 이래로 활성화되어 왔다. "환경파괴 없는 노동"은 생태계 안정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경제 활동의 틀을 다시 짜자는 문명사적 기획을 지칭한다. 오늘의 노동 문제를 다룰 때, 생태계 안정의 원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일 경제계와 생태계 사이의 에너지·물질 교환을 통제하는 계정 장치를 정치적으로 도입할 수 있다면, 경제 활동에는 여러 가지 변화들이 나타날 것이다. 국민소득을 배분할 때, 노동과 자본의 몫만 결정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재화와 부의 생산에 참여한 자연의 몫을 고려하는 일이 필요해진다. 그래야 생태계 안정을 위한 투자 재원이 제대로 마련될 수 있다. 또한 지구적 차원의 물류에 근거한 거대 경제는 지역공동체 차원의 생활 경제들의 네트워크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 노동은 생태계 안정의 원칙 아래서 생산과 유통 체계를 재조직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새로운 미래에 대비하여야 한다.

III. 오늘의 노동 문제와 그 대응 방안

 오늘의 상황에서 노동운동은 매우 긴박한 문제들에 맞부딪치고 있다. 실업과 노동시장의 분단, 노동권의 위축, 주주 자본주의의 전면화, 국가 공공성의 해체 등이 그것이다. 아래의 적절한 문맥에서 나는 이 문제들을 진단하고 적절한 대응 방안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1. 실업과 노동시장의 분단에 대한 대응

 경제의 지구화와 정보화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노동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용 없는 경제성장"이 우리의 현실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우리나라 실업 통계의 허구성은 잘 알려져 있지만, 청년 미취업 사태와 장년층 이상 노동인구의 실업은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한 현실이다. 지구적 경쟁 상황에서 노동비용 절약을 위한 투자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이 급속히 향상되고 있고, 이로 인해 1차 산업부문과 2차 산업부문에서 급격한 노동력 퇴출이 일어나고 있다. 제조업 분야에서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수효는 이미 극적으로 줄어들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투자 규모가 큰 대기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인 서비스 산업 부문에서도 사무자동화로 인해 무수한 직업군이 사라졌고 이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물론 증권분석, 파이낸싱, 부동산, 사업 컨설팅, 시장분석 등 이른바 4차 서비스 산업 부문이 발전하고 있고, 지식기반 경제 부문의 네트워크화로 기업 경영을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사업 서비스 부문이 확대되고 있기는 하지만, 민간 서비스 산업 분야에서 신규 노동력 창출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다. 소규모 자영업 창출로 자기고용(自己雇傭)과 가족고용(家族雇傭)에 나서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이 분야에서의 경쟁은 가히 살인적이고, 무수한 도산이 줄을 잇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실업은 구조화되고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실업 문제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은 노동시장의 분단이다. 우선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 아래서 노동시장은 정규직 노동시장과 비정규직 노동시장으로 분단되었다. 전통적인 산업 부문의 노동자들은 린 생산 방식 아래서 핵심 노동력 부분과 주변 노동력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이러한 기업내 노동시장 분단 추세는 강화될 전망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황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씨의 조사연구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1999년 9월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인구의 58%에 달했고, 그들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은 종류의 노동을 하더라도 정규직 노동자 소득의 40% 정도를 벌어들인 것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 더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산재보험을 제외하고는 사회보장성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할 만한 통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비정규직 노동은 더욱더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용의 불안정성에 시달리고, 빈곤계층으로 빠르게 전락할 수밖에 없다.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은 우리 사회의 강력한 가부장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고질적인 병폐인 데다가 노동시장 규모가 축소되면서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소득은 남성노동자들의 67% 수준에 머물러 있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비율은 전체 여성노동인구의 80%에 이른다.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은 매우 딱할 정도이다.
 노동시장에서의 인종 차별도 매우 심각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권은 크게 제약되어 있다. 외국인 노동허가 제도가 시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국제적인 기준에서 보면 여전히 인종차별적이다.
 노동 능력이 있고 노동 의욕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자리를 요구하는 것은 노동권의 핵심 사항에 속한다. 이런 원칙 아래서 실업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매우 다양한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오늘의 실업 사태는 경기순환적 현상이 아니라 지구적 경쟁과 정보 혁명에서 비롯되는 구조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대증 요법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노동생산성 향상이 제도적 강박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상, 전통적인 1차 산업부문과 2차 산업 부문에서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 분야에서는 기존의 일자리를 쪼개는 방식으로 일자리 배분이 가능할 것이며, 그것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서 실현될 것이다. 그간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이 법제화되었는데, 10% 정도의 노동시간 단축은 매우 미흡하다. 일자리를 나누기 위해서는 보다 급진적인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고, 임금조정의 최적성이 실현되어야 한다. 노동생산성이 급격히 상승하는 조건 아래서 노동측은 노동시간 단축에 따르는 비례적 임금조정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고, 바로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오늘의 실업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휴 노동력을 서비스 산업 분야에 흡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민간 서비스 분야에서의 일자리 창출은 매우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고, 노동집약적인 서비스업 분야에서는 불완전 취업과 저임금이 일상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가의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 일자리 창출을 위해 바람직하다. 일시적인 공공 사업을 실시하는 것은 소득 이전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의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교육, 보건, 환경 분야에서 국가의 투자를 늘리고 교육 서비스, 보건 서비스, 생태계 안정을 위한 공공 서비스를 획기적으로 확충하는 장기적인 공공 서비스 사업 기획이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장과 국가 영역 바깥에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사회적 일자리 창출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데, 외국에서는 이와 관련된 매우 정교한 이론들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시장경제와 자율적 자급경제를 결합시키는 이중경제(二重經濟) 구상에 근거하여 노동사회를 지양하고 사회적이고 생태학적 친화성을 갖는 노동세계를 형성하자는 주장이 그것이다. 노동측은 공적인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일자리 창출을 위한 획기적인 복안을 갖고서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생활세계에 각인해야 할 것이다.
 노동시장의 분단은 노동권 실현의 요구조건인 노동자들의 연대와 단결을 통하여 극복해야 할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성차별,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제를 마련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는 문명 사회를 향한 진정한 첫 걸음이다.

2.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대응

 우리나라에서 주주 자본주의는 매우 낯선 개념이었지만, IMF 경제관리 이래로 이 개념은 기업구조개혁을 이끄는 슬로건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이른바 재벌의 "총수 독재" 체제가 주주 자본주의 지배 체제로 전환되었는가는 더 따져볼 주제이지만, 금융시장의 전면적 자유화 조처로 외국인의 주식 소유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주식시장 거래 주식의 40% 안팎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주들의 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커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주주 자본주의의 확산은 이른바 "총수 독재"를 견제한다는 구실도 있지만, 주주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목표 아래서 기업 잉여가치의 배분을 왜곡시키고 기업의 미래를 위한 장기 투자를 어렵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보이고 있다. 주주들이 과도한 주식 배당을 요구하면, 투자와 노동 복지는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외국인 주주들은 막대한 이익을 국외로 빼 돌릴 것이다. 외국인들의 주식 투자는 물론 직접 투자의 성격을 띠고 있는 터라 정부의 환영을 받고 있지만, 이러한 투자가 생산적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시세 차익을 실현하기 위한 기업 인수합병 쪽으로 몰려드는 것도 두드러진 현상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외국인 주주들이 빼돌린 수익이 12조에 달한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나라 GDP의 2% 이상이 유출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비 지출이 GDP의 2%를 간신히 웃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 동안 주주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 국적의 대주주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하자는 논의가 일각에서 있었다. 이른바 "총수 독재" 체제가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서 꼭 나쁜 것이냐는 항변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주주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의 시계를 뒤로 돌릴 수는 없다.
 주주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해당사자 자본주의이다. 이해당사자 자본주의의 모델로 꼽히고 있는 것은 독일과 일본의 기업들이다. 지면 관계상 독일 기업에 국한해서 살펴보면,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는 주주(자본소득자)들, 노동자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이해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독일의 석탄 및 철강 산업 부문에서 운영되고 있는 노자동등권(勞資同等權) 원칙의 공동결정제도는 다른 산업 분야의 거대 합자회사들과 주식회사들의 공동결정제도들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역사적인 계급타협의 산물로 성립된 독일의 기업 모델은 그러나 1980년대 초 이래로 후퇴하고 있고, 더 중요한 것은 "본래적인 공동결정 영역"으로 간주되는 기업의 경제정책과 인사정책에 노동측이 실질적으로 관여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부르주아적 소유권 개념의 절대성을 보장한 헌정질서 아래서 노동권은 소유권을 침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측은 계급타협의 틀에서 기업의 사회계획과 국가의 소득재분배 정책에 안주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적 노동통제와 "총수 독재"에서 겨우 벗어나기 시작한 우리 경제에서 이해당사자 자본주의 기업 모델을 도입하는 것은 여전히 진보적인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주체성과 노동권의 선차성을 옹호하는 기독교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측은 "본래적인 공동결정 영역"에서 노동이 정책 결정권을 나누어 갖자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업 모델은 오직 자본을 중립화하는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할 때 실현될 수 있다. 이미 정의의 원칙에서 시사한 바 있듯이, 설사 소유권에 대한 노동권의 우위가 인정된다 할지라도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경영 활동은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자본이 자본가적 관심을 가지고 이윤을 독차지하려고 들지 않고, 기업 활동을 위한 중요한 도구의 역할을 하는 데 멈춘다 해도, 자본의 실체를 보존하고 적정 수준의 자본 축적을 꾀하는 데 본질적인 장애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시장경제에서 노동과 자본은 기업의 틀에서 대립하기도 하지만 서로 협력하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다. 나는 자본의 기능을 이렇게 재규정하는 것을 가리켜 자본의 중립화라고 말한다. 자본의 중립화는 기업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제조건이다.

3. 산별 노동조합의 제도화

 단결과 연대의 권리로 나타나는 노동권 옹호의 원칙에서 볼 때, 우리 사회에서 산별 노동조합을 제도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나라 노동법은 단위 사업장 노사교섭만을 인정하고 있고, 이것은 노동권을 위축시키는 법제라 할 수 있다. 단위사업장 단위의 노사교섭은 자본측이 노동측에 심각한 정치적 압박과 사회심리적 압력을 가할 수 있다. 또한 개별사업장 차원의 노사교섭은 산업부문의 발전과 이에 연관된 국민경제의 발전을 폭넓게 고려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데 많은 한계가 있다.
 시장경제의 틀에서 노동과 자본이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조건은 노동의 권력과 자본의 권력이 균형 상태를 이루는 상태이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가 제도화되어 있는 시장경제에서 이 권력 균형 상태를 이루는 방편은 위에서 말한 기업 지배 모델 이외에도 산별 교섭체계를 법제화하여 노동의 교섭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논의가 노동측에서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 왔지만, 자본측은 산별 교섭제도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고, 정부도 이를 법제화하려는 뚜렷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산별 교섭제도가 포드주의의 유산이기에 포스트포드주의 생산방식이 도입되고 지역경제, 국민경제, 국제경제 차원에서 린 생산 방식이 네트워크 형태로 조직되어 있는 오늘의 상황에 적절하지 않다는 반론이 있기는 하지만, 산별 교섭체제를 통해 임금, 노동시간, 노동조건 등에 관한 노사협약의 최소 준수 사항을 결정하고 단위사업장 차원의 유연한 협상을 보장한다면 제도 운영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산별 교섭제도의 취지는 노동권을 강화하고, 산업 부문별로 노동시간, 노동조건, 노동소득의 균형을 유지하자는 데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노동, 자본, 국가,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합의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4. 국민경제적 차원의 사회경제 프로그램의 공동 기획

 자본에 의해 경제의 지구화가 강력하게 추진되는 상황에서 국민경제를 논할 가치가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전문직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노동력이 국민경제의 영역 내에 발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국민경제의 사회경제적·생태적 재구성을 위한 논의는 도리어 활성화되어야 한다. 국가가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고 공공성을 상실하고 있는 듯하지만, 국가는 경제의 지구화 시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국가가 사회세력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공익의 실현자로 나설 수 있는 힘은 노동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노동이 국민경제 차원에서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곳에 참여하여 함께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볼 때, 정부는 국민경제의 사회경제적·생태적 재구성을 위한 사회협약 기구를 마련해서 노동과 자본을 대등한 사회세력으로 초청하여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노사정위원회가 사회협약기구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는 사회협약기구의 형식을 갖추고 있을 뿐, 노동의 권익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는 듯하다. 노동측은 IMF 경제관리 시대 이후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통 분담의 원칙이 준수되지 않았다는 불만을 터트려 왔고, 국가가 자본친화적 편향을 보이고 있다는 불신의 시각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노사정위원회의 신뢰성 위기는 시급히 극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노사정위원회는 사회세력들의 자발적 참여와 신뢰에 기반을 두고 작동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노사정위원회의 신뢰성이 확보되어 사회협약 기구로서 기능을 발휘한다고 가정할 때, 이 기구는 정부의 입법 능력에 기대어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노동측은 국가가 국민경제의 사회경제적·생태적 재구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자신의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나는 좀더 사회적이고 좀더 생태친화적인 국민경제의 틀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사정위원회 차원에서 몇 가지 주제들이 시급히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의 성과를 야수적으로 수탈하는 금융시장을 규율하고, 국제적 차원에서 이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나라 정부의 주도권을 강화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금융시장 규율을 위한 국제적 협약이 먼 미래의 일이라 해도, 정부는 주식법 개정을 통해서도 노동의 성과를 기업과 국민경제의 틀에서 보호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노사정위원회가 중시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소득분배 정책이다. 소득분배 정책의 핵심은 성장과 복지의 조화이다. 이 중요한 과제는 오직 성장 속도에 대한 사회협약을 통해서만 민주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성장 속도를 시장에 맡기는 것은 경제 순환의 무정부성과 파괴성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 시장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규율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국가의 고유한 책무이지만, 국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장 속도를 규율하기 위하여 국민경제의 사회경제적·생태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정부의 기획을 강화하여 시장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성장 속도가 결정되면, 국민소득에서 저축과 투자의 비율이 결정될 것이고, 적정이자율도 계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성장의 속도 조절은 오직 내수경제와 수출경제의 관계를 재정립할 때 의미 있는 조치가 될 것이다. 국민경제 차원에서 소비되지 않는 투자재와 소비재를 많이 만들어 해외 시장에 내다 팔겠다는 수출지상주의 아래서는 성장의 속도 조절이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비대한 수출경제 부문은 국제적인 시장경쟁을 위해 투자 확대의 강박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는 수출과 내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마련되어야 한다. 수출 경제는 엄청난 에너지 물질 소비 구조를 갖고 있고, 엄청난 사회 비용과 환경 비용을 외부화한다. 거기에 더하여 수출가득률은 날로 떨어지고 있다. 에너지와 물질의 가격이 점차 비싸지고, 폐기 에너지와 폐기 물질의 처리비용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감안하면, 수출경제의 미래가 밝을 리 없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국민경제에서 내수의 비중을 늘리고 해외시장 의존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향으로 국민경제를 재편하기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경제가 이미 "고용 없는 경제성장" 단계에 진입하였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노사정위원회 차원에서 논의하여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일자리 창출과 기본소득에 관한 사회협약이다. 기본소득 협약은 일자리 분배를 위한 획기적인 노동시간정책에 관한 협약과 같이 갈 때 그 의미가 커진다. 국민경제에서 경제성장을 위한 투자와 저축의 비율이 결정되면, 국민소득 가운데 노동소득비율이 계산될 것이고 이를 기본소득비율과 업적소득비율로 나누면 된다. 이러한 소득분배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지대소득, 이자소득, 기업이윤, 노동소득, 양도소득, 상속소득 등 주요소득원 가운데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세금으로 징수하여 기본소득 지급 기금을 조성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소득정책에 대한 사회협약이 체결되고, 법정 노동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면, 새로운 생활세계 문화가 꽃 필 수 있다. 돈벌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생활 활동 시간은 노동자의 자기 실현의 기회를 확대하고 이웃과 자연과 공동체를 돌보는 다양한 활동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활세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는 물론 시민사회의 역량에 달려 있지만, 노사정위원회의 사회협약은 그 기반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공기업 민영화 문제와 국가의 공공 서비스 유지 문제도 노사정위원회 차원에서 체결할 사회협약의 대상이다. 자본은 공기업의 민영화를 통하여 국가 기간 산업을 장악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기려 들고 있고, 전기, 가스, 물, 철도, 보건, 교육, 교정(矯正) 등 이제까지 국가가 제공했던 공공 서비스의 거의 모든 분야를 민간 서비스로 전환시켜 수익성 원칙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이와 관련된 미국과 영국의 사례들은 매우 파국적 결과를 가져 왔다. 노사정위원회는 이 의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여야 한다.
 공공 서비스 확대를 통한 국가의 일자리 창출 방안과 노동시장 분단을 극복하는 방안도 노사정위원회가 다루어야 할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의제들이지만, 이에 대한 설명은 위의 III.1에서의 논의로 대신한다.

5. 노동권과 소유권의 제도적 양립

 노동권과 소유권은 기업 차원에서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권리 형태들이다. 소유권은 부르주아적 헌정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절대적 권리이다. 노동권도 부르주아 국가의 헌정질서에서 시민권을 부여받고 있지만, 이 권리는 부르주아 국가의 사회국가적 지향성을 통해 실현되게끔 되어 있다.
 노동권과 소유권의 균형에 관해서는 이미 이 글의 III.2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었지만, 이렇게 절을 따로 떼어내어 재론을 하는 까닭은 불법파업에 따른 자본측의 손해배상 청구와 구상권 행사를 위한 가압류 조치의 남발이라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대응 방안을 찾기 위해서이다. 노동권을 보장한다는 헌법 규정이 쟁의절차를 규정하는 까다로운 하위법에 의해 본질적으로 제약되는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이 쟁위절차 규정을 위반한 노동자들의 권력 행사가 자본측의 소유권 행사에 의해 제동이 걸리는 것을 보면서 이 나라가 과연 사회국가의 이념을 유지할 생각이 있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공업화된 시장경제의 조건들 아래서 노동과 자본이 대립 속의 협조 상황에 있다고 한다면,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최적화되는 경우는 노동이 자본의 권리를 인정하고, 자본이 노동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자본이 노동의 권리를 부정하면, 노동은 자본에 대항하여 적대적인 투쟁을 벌이게 될 것이고, 이것은 자본의 장기적인 이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거꾸로 노동이 자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기업에서 자본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킬 것이고, 기업의 경쟁력은 약화될 수 있다. 이것은 노동의 장기적인 이익을 침해한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조건들 아래서 노동과 자본의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도는 노동의 권리와 자본의 권리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타협을 하는 것이다.
 이 타협은 노동권의 행사가 소유권을 부정하지 않고, 소유권의 행사가 노동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달리 말하면, 소유권과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자본의 권리를 십분 인정하겠지만, 그것은 오직 노동권이 제한되지 않는 한에서 그렇다는 뜻일 것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기업 경영자의 소유권 행사는 노동자들의 권익 실현 수단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실현하는 방식 가운데 단체행동권의 행사가 기업의 운영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여 손실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은 노동과 자본이 시장경제의 조건들 아래서 "대립 속의 협조" 관계를 맺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사태이다. 노동과 자본은 이러한 사태를 회피하기 위하여 성실하게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뿐,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로 인한 손실을 노동 쪽이 배상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IV. 마치는 말

 이 글에서 나는 기독교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노동자운동이 해결하여야 할 과제들을 살펴보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윤리적 판단과 행위의 원칙들을 제시하고자 했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서 노동자운동의 무장해제가 착착 진행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위에서 말한 그 어떤 과제도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여기서 엿보이는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에 대한 노동의 저항은, 설사 그것이 시장경제의 혁명적 철거로까지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강화되어야 한다. 시장경제를 넘어서는 노동자들의 역사적 기획과 그 실행은 노동자운동의 역량에 달려 있다.
 이 짧은 글에서 나는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노동의 관점에서 시장경제를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었고, 이와 관련해서 노동자운동이 제시할 수 있는 사회적 의제들을 명확하게 다듬고자 하였다. 물론 이 글에서 노동자운동의 국제주의를 다루지 못하고, 시장경제의 생태학적 규율 문제를 자세히 다루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경제의 지구화와 정보화로 인하여 노동세계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운동은 단위사업장 차원의 경제투쟁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노동자운동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통해 기업과 국민경제의 사회경제적·생태적 재구성을 위해 헌신하여야 하며, 이를 통하여 생활세계적 정당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경제의 지구화와 정보화는 노동자운동의 국제주의를 통해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새로운 지구화와 정보화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진보적 기독교 분파는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시민사회에서 이러한 노동자운동을 지지하는 우군이 될 것이다.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