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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6 (12:35) from 61.106.72.131' of 61.106.72.131' Article Number :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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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 비판과 그 기독교윤리적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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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 비판과 그 기독교윤리적 함의

강원돈(아시아경제윤리연구소장)

I. 머리말

 오늘의 세계에서 자본주의는 경제의 지구화와 정보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의 발전, 신소재 기술의 확산, 유전자 조작, 지구적 차원에서 실현된 생산, 유통, 소비의 네트워크 등은 한 세대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적 소유권에 근거한 지식기반 경제의 발전은 이미 자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며, 미래 경제에서 "유형자본"에 대한 "무형자본"의 우위를 약속하고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눈부시게 발전하는 자본주의는 그 이면에 약탈과 억압의 광기를 감추고 있다. 엄청난 몸집으로 부풀어 오른 화폐자본은 1990년대 말의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보듯이 국민경제들을 초토화할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으며, 국가의 전통적인 경제주권을 무력화하고 있다. 지구적 경쟁의 격화는 노동절약적 합리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린 생산의 지구적 네트워크 등을 통하여 노동을 압박하고, 북반구와 남반구의 어느 사회에서나 새로운 사회적 가난을 확산시키고 있다. 지적 소유권에 근거한 신경제는 정보 처리와 획득의 사회적 불평등을 확산시키고, 유전자 자원에 대한 약탈을 제도화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의 양지와 음지는 모두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세계에서 지구와 그 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은 자본의 팽창과 실질적 포섭의 대상으로 완전히 포획된 것처럼 보인다.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는 암세포의 증식논리와 닮아서 자본의 숙주인 인간과 자연을 죽이고 무덤 속에 파묻어 버리고 있는 것 같다.
 바로 이것이 오늘 기독교윤리학이 대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독교윤리학은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 기독교윤리학은 인간과 자연의 생명공동체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완성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책임 있게 동참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학의 분과는 자본의 팽창과 축적의 논리에서 비롯되는 생명 파괴의 세계 현실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일을 회피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 분석과 대안 모색 과정에서 기독교윤리학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재검토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잉여가치의 원천이 인간의 노동에서 기술로, 그리고 지식기반 경제에서 "지식"으로 옮겨져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더 이상 현실에 대한 설명 능력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기술 독점과 지식 독점이 초과 이윤 능력을 가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기에 일리가 있으나, 시장경제의 심층에 있는 잉여가치 추출 메커니즘의 끈질김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장경제가 존속하는 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비판적 현실 인식과 실천적 대안 모색에 기여할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우선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을 이루는 부르주아 노동가치론 비판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사회적 관점과 생태학적 관점을 통합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해부하고 있음을 밝혀낼 것이다. 그 다음, 잉여가치의 배분에 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재구성하여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에 대항하는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정상 경제의 몇 가지 원칙들을 기업 차원과 국민경제 차원에서 제시할 것이다. 끝으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 비판과 그것에 바탕을 둔 대안의 추구를 기독교윤리학의 관점에서 간략하게 평가할 것이다.
 그러면 마르크스 이전의 부르주아 노동가치론이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간략하게 살피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기로 한다.  

II. 마르크스 이전의 부르주아적 노동가치론의 전개

 마르크스 이전의 노동가치론은 존 로크의 노동소유권 이론에서 싹이 트고, 아담 스미드의 교환척도 이론에서 비교적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데이비드 리카아도의 노동가치론에서 완성된 형태를 취한다.

1. 존 로크의 노동소유권 이론은 소유권의 근거가 노동의 기여에 있다는 것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한다. 그는 화폐 발명 이전과 이후의 자연상태를 구별하면서 노동소유권 이론을 전개했다.
 우선, 화폐 발명 이전의 자연상태에서 소유권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로크에 따르면, 태초에 신은 아담과 그 후손에게 세계를 공유재로 부여하였지만, 개개인은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할 권리를 갖고 있다. 만인의 공유와 개인의 소유 사이에 나타나는 이 모순을 해명하기 위하여, 로크는 개인의 특성에 주목했다. "땅과 모든 하등 생명체들은 모든 인간에게 공히 부여되었지만, 각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 각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행위 주체이며, 노동은 이 행위 주체가 한 일이다. "각 사람이 몸을 놀려 한 일과 손을 놀려 만든 것은 (…) 본래적 의미에서 그 사람의 소유이다."
 로크에게서 노동을 통한 소유의 정당화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1) 각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고 삶을 향유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획득해야 한다. 2)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얻기 위해서는 일해야 한다. 3) 일을 해서 얻은 것은 그 일을 한 사람의 소유이다. 중요한 것은 소유의 대상이 생활필수품에 국한되지 않고 생산수단까지도 포함한다는 점이다. 개인은 경작되지 않는 땅을 개간해서, 곧 노동의 기여를 통하여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 이를 노동을 위한 수단으로 지배한다.
 그 다음, 화폐의 발명 이후의 자연상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화폐의 발명은 무제한한 소유를 향한 길을 연다. 왜냐하면 화폐는 노동의 소산이 썩을 것에 대한 염려를 불식시키기 때문이다. 이제 경작지의 소유는 한도를 모르게 되었다. 각 사람이 땅을 더 많이 개간하면 할수록 땅의 소산은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로크의 노동 소유권 이론은 자연에 대한 인간 노동의 절대적 우위를 전제한다. 이러한 주장 뒤에는 인간에게 부여된 신의 노동 위임이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포함한다는 이신론적 견해가 깔려 있다. 그는 생명공동체를 형성하라는 신의 계명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땅의 점유와 지배를 신의 계명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인간을 제외한 피조물들은 "충만한 자연의 보고"로서 인간의 "향유"를 위해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고,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자연으로부터 탈취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인식된다. 인간의 노동 능력(이성, 근면, 수고)은 자연재를 자원으로서 지배한다.
 로크의 노동소유권 이론은 후대의 노동가치론의 발전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두 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가치형성에서 자연이 기여한 몫을 무시하는 관점이다. 로크는 가치형성에서 원료를 공급하는 땅이 기여한 몫을 거의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 몫은 너무나도 적기 때문에 우리에게서조차 땅은 목축이나 개간 혹은 식물 재배조차 하지 않고 자연에 내맡겨둘 정도이다." 가치형성에서 자연의 기여를 고려하지 않을 경우, 생활필수품은 오직 그것이 노동의 산물이기 때문에 제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로크의 견해는 장차 부르주아적 노동가치론의 기본 특징을 이루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임노동자의 소유권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로크는 화폐의 발명 이후에 임노동이 등장하였고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실상 보편화되었다고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임노동은 노동의 대가를 이미 지불받았기 때문에 그 소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못박았고, 따라서 임노동자는 소유의 보호를 목표로 해서 조직된 정치공동체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2. 경제학의 틀에서 노동가치론은 본래 시장에서 등가교환을 보장하기 위한 가치 척도를 규정하기 위해 구상되었다. 경제학자들은 하나의 상품이 쓸모가 있을 때에만 교환관계에 들어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용가치가 상품 교환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쓸모가 있는 물건들을 어떤 척도 아래서 서로 교환하여야 하는가? 교환되는 재화의 등가성(等價性)을 객관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정밀한 척도가 있어야 한다. 그 척도는 과연 무엇인가?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담 스미드였다.
 스미드는 시장 가격이 독점이나 교환 강제 혹은 사기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 이상적인 상태를 전제하고서 "모든 재화의 교환가치를 측정하는 진정한 혹은 사실상의 척도"는 노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적 분업과 공정 분업의 조건들 아래서 "보통 노동"의 동등성을 출발점으로 삼고,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하여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고 수고한 보통 노동의 양을 기준으로 해서 교환가치를 규정했다.
 스미드에 따르면, 가치를 결정하는 데 고려되는 것은 오직 노동, 더 엄밀하게 말하면, 양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형태의 노동뿐이다. 자연의 생산성을 강조한 중농주의자들(Boisguillbert, Vantillon, Petty, Quesney 등)과는 달리, 자연은 스미드의 가치 결정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스미드는 자연이 자유재 형태의 원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고, 따라서 자유재로서의 자연은 경제학에서 어떤 가치도 갖지 않는다고 전제했다. 자연 자원은 오직 인간의 노동에 의해 가공되어 노동 소재로 소유될 때에만 그 가치를 갖는다. 자연 자원의 가격은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공하는 데 들어가는 생산비용에서 비롯된다.
   
3. 데이비드 리카아도는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을 두 방향에서 철저하게 다듬었다. 우선, 그는 스미드의 자유재 개념을 자연상수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상품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외적인 자연은 모든 생산과 모든 가치형성의 항구적인 전제조건이다. 이 자연은 경제의 영원한, 고갈되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무제한한 조건이다. 그 다음, 리카아도는 자연상수를 전제한 순수 노동가치론을 정식화했다.
 그는 노동의 두 측면에 주목했다. 첫째, 노동은 가치생산적이라는 것이고, 둘째, 노동은 또한 상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두 주장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시장에서 상품들 간의 가치 관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리카아도는 "인간의 노동에 의해 증식되지 않는 것을 예외로 치면, 노동은 모든 물건들의 교환가치의 근거"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두 상품들의 가치 관계가 인간이 각각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수행한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이와 동시에 리카아도는 노동이 상품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했다. 만일 상품들의 가치 관계가 지출된 노동의 양에 의존한다면, 노동이 상품으로서 갖는 가치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모든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출발점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노동의 가치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하고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지출하는 비용으로 귀착한다. 바로 여기서 리카아도식 가치 분석의 난제가 발생한다.
 만일 가치형성에서 자연의 몫을 절대적으로 배제하여야 한다면, 생산비용을 공제하고 난 뒤에 남는 가치의 잉여는 노동에게 귀속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리카아도는 노동이 가치창조적이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카아도의 자본주의에서는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했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임금은 생산비용에 속하며 임금 지불을 통하여 가치형성에 기여한 노동자들의 몫은 인정되고 보상되었다. 따라서 가치의 잉여가 노동자들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더 이상 없다. 가치의 잉여는 당연히 자본가에 의해 전유(專有)된다. 그런데 가치의 잉여가 자본가에게 전유되어야 한다면, 자본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가치의 형성에 참여하였음을 증명하여야 한다. 바로 여기서 리카아도는 하나의 딜레마에 직면하였음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노동이 가치생산적이라고 전제하였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리카아도는 상품의 생산을 위해, 다시 말하면, 가치의 생산을 위해 지출한 노동량을 산 노동의 몫과 죽은 노동의 몫으로 나누었다. 산 노동은 노동자의 생산적 노동이고, 죽은 노동의 집적은 고정 자본, 곧 생산수단의 형태로 나타난다. 리카아도의 눈에는 산 노동과 죽은 노동이 아무런 차이 없이 가치생산에 참여한다. 자본가가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 가치의 잉여를 전유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죽은 노동의 가치창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가의 잉여가치 전유를 정당화하는 리카아도의 궤변은 노동과 노동력을 서로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그 때문에 노동력의 가치의 크기는 노동자가 노동력 지출을 통하여 공정에 투입한 노동의 가치의 크기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리카아도는 몰랐다.

4. 위에서 본 부르주아적 노동가치론에 대해서는 최소한 다음 네 가지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로크는 고전적인 노동가치론의 기본 윤곽을 그렸다. 그는 가치이론의 틀에서 교환의 정의를 다루지 않았지만, 가치 계산에서 자연을 배제해도 무방하다는 점만은 분명히 했다. 둘째, 스미드로부터 리카아도에 이르는 노동가치론은 상품 생산을 위해 지출된 노동량이 교환가치의 척도가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환의 정의를 확립하고자 했다. 셋째, 이러한 노동가치론은 자유재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가치 계산에서 자연을 절대적으로 배제하였고, 노동가치론을 주장하는 모든 이론가들에게서 물리적 자연이 부의 창조자임을 부정하도록 만들었다. 넷째, 노동과 노동력을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부르주아적 노동가치론은 자본가의 잉여가치 전유를 정당화했다.

III. 마르크스에 의해 수정되고 비판된 노동가치론

 노동가치론의 역사에서 마르크스가 이룩한 공헌은 두 가지이다. 그는 한편으로 부르주아적 노동가치론이 자연을 망각하고 있음을 밝혔고, 또 다른 한편으로 가치창조에 대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분석에 내적 모순이 있음을 폭로하였다.

1. 마르크스는, 흔히 오해되듯이, 리카아도적 노동가치론을 계승하여 이를 정교하게 가다듬은 이론가가 아니다. 그는 리카아도에게서 완성된 부르주아 노동가치론의 비판적 극복자였다.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자신의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슈미트-코바르치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가지고 비판적 경제의 근거를 설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로 그는 가치 법칙에 근거한 일체의 정치경제학을 철저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노동가치론을 가지고서 경제학의 근거를 긍정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설정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는 사회적 생산이 가치 법칙을 지향하도록 하기 위하여 가치 법칙을 긍정적으로 끌어들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모든 작업은 자본주의적 정치경제학의 기초들을 뒤따라가며 표기하여 그것의 뿌리에 놓여 있는 내적인 모순을 증명하는 데 이바지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고전적 노동가치론의 분석적 불충분성을 보완했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과 가치실현과정을 내부로부터, 실상에 맞게, 철두철미하게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분석적, 비판적으로 정식화한 노동가치론의 명제들을 놓고서 그가 자기 나름대로 노동가치론의 기본원칙들을 정립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비판을 위하여 마르크스는 고전 경제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경제법칙의 영원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을 극복하였고, 사물들의 역사적으로 규정된, 다양한 현상 형태들의 내적 연관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는 연구 방법을 고수하였다.

2.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가치법칙에 대한 비판에서 마르크스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추상적 노동의 탄생이다. 추상적 노동은 사회적 노동분업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으로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노동력과 노동을 구별하는데, 이 때 노동은 시간 단위의 관점에서 계량화되고 계산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 규정 아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이 상품 교환의 등가 형식을 규정하기 위한 가치 단위로서 기능한다고 정식화한다. "한 마디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양 혹은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이 그것의 가치 크기를 규정한다."
 이렇게 개념을 명료하게 한 다음에 마르크스는 고전적 노동가치론의 기본 명제를 철저하게 가다듬는다. 그 기본 명제는 이렇다.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이 가치창조적이라고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철저한 성격을 갖는다. 우선, 노동가치론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자연이 가치생산자라는 관념을 철저하게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 죽은 노동도 가치생산에 참여한다는 당대의 자명한 통념도 불식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의 생산수단이 노동 과정에서 자신의 사용가치를 상실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물에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3. 마르크스는 노동 개념과 노동력 개념을 구별하였는데,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자본가가 노동시장에서 구입하여 노동 시간 동안에 자신의 지배 아래서 가치창조과정에 투입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다. 생산과정에서 소비되는 노동력의 가치 크기는 "이 특별한 품목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노동력의 교환가치이다. 그것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불한 임금과 동일하다. 이제 가치생산과정에서 노동력 지출을 통하여 형성된 가치는 자본가의 소유가 된다. 이 가치는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사용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본래 노동력의 사용가치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노동력의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는 전혀 동일하지 않고, 그 속에 깃들어 있는 가치의 양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적 가치생산과정에서 이 둘의 "가치 차이", 곧 "잉여가치"는 이윤의 형태로 자본가에게 귀속되고 그에게 축적된다.

4. 마르크스의 기본 관심사는 교환가치 개념에 터 잡은 경제 형태는 자본가들 사이의 투쟁으로 인하여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증가시키고 경제위기와 혁명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치생산과정과 가치실현과정에서 비롯되는 생태학적 위기를 주목하기도 했다.
 자연상수 개념을 자명하게 전제한다면, 가치창조과정은 원칙적으로 그 한계와 끝을 모른다. 가치생산과정과 가치실현과정에서 탄생하고 실현되는 잉여가치는 이 두 과정들을 확대하여 넘쳐흐르는 가치를 전유하는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가는 가치실현의 열광주의자로서 아무런 고려 없이 인류를 생산을 위한 생산으로 몰아넣는다." 이것은 자본이 원칙상 무제한적으로 확대되고 자신의 지배력을 끝없이 강화시킨다는 뜻이다. 확대된 가치생산과정과 가치실현과정은 더 많은 자연 원료들을 집어삼키고 점점 더 많은 쓰레기들을 배출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노동자와 자연을 무덤에 집어넣는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중요한 해석이며, 경제계와 생태계의 순환 과정에 대한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분석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5. 마르크스는 교환가치 개념을 고집하고서는 새로운 사회를 열 수 없다고 믿었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강령적 구상이 나타나고 있는 1875년의 "고타 강령 비판"에서 그는 상품 생산의 코드로서의 가치 개념과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경제 형태의 기반으로서의 부의 개념을 서로 구별했다. 이 두 가지 개념들을 구별한 다음에, 그는 "노동이 모든 부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자연도, 그 자체로 보아서는 자연 능력인 인간의 노동력의 외화인 노동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들(그리고 실제의 부는 사용가치들로 구성되어 있다!)의 원천이다."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영원한 물질대사로 이해하였는데, 바로 이 노동 이해에 기대어 그는 가치법칙에 터 잡은 모든 종류의 경제 형태들을 넘어서는 사회 형태의 한 윤곽을 그린 것이다. 이 사회에서 자연은 인간과 그 자신 사이의 물질대사에서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등장한다. 인간의 노동 과정에서 자연의 형태는 질료적으로 변화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가치 증식을 위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을 통한 자연의 형태 규정에서 자연은 사용가치의 형태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보존한다. 자연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모든 부의 원천으로서 인간의 인간적인 욕망의 충족에 기여한다.    

6. 이제까지의 논의를 되짚어 보면, 마르크스는 노동 개념과 노동력 개념을 구별함으로써 자본주의 해부의 무기를 발견하고,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를 밝혀냈다.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가난을 불러일으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생태계 위기를 가져온다. 사회 문제와 생태계 문제의 밑바닥에는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 그는 단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결사체가 의식적으로 이성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규율하는 사회에 대한 어렴풋한 윤곽을 그렸을 뿐이다.
 그 윤곽을 정교하게 다듬어 새로운 사회의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일은 별도의 과제가 된다 하더라도, 마르크스의 역사적-분석적 관점에 따라 시장경제가 역사적 시작을 갖고 있기에 역사적 끝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시장경제는 역사적인 경제제도이지 경제의 영원한 형식이 아니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역사적 청산을 위한 진보적 기획은 언제나 의미가 있고, 또 그러한 기획의 실현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역사를 진보적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실천의 핵심 과제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생명력은 아직 고갈되지 않았고, 상당한 기간 동안에 쉽게 고갈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경제의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을 역사적 현실로 전제하고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 비판에 담겨 있는 사회적 관점과 생태학적 관점을 살리며 시장경제를 규율하는 원칙들을 세워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시장경제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일찍이 오타 쉬크에 의해 시도된 바 있고, 그의 작업은 자본주의 경제의 조절방식을 제시하였던 케인즈주의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에 좌초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 초 이래로 케인즈주의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서 세계적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오타 쉬크의 이 특이한 작업은 아르투르 리히에 의해 평가된 적이 있다.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가 인간과 자연의 생명과 생존을 위협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사회적 관점과 생태학적 관점을 통합하는 시각을 갖고서 시장경제를 제대로 규율하는 방책을 모색하는 것은, 설사 시장경제의 청산이라는 역사적 기획에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당대의 과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는 이 과제의 핵심이 잉여가치의 분배에 있다고 생각하며, 아래서 기업 차원과 국민경제 차원에서 잉여가치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놓고서 몇 가지 원칙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IV. 기업 차원에서의 잉여가치의 분배

1. 기업 차원에서 잉여가치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 잉여가치 개념을 한번 더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잉여가치는 지불되지 않은 노동의 가치이다. 그것은 가치생산과정에서 지출된 노동력의 사용가치, 달리 말하면 상품생산과정에서 지출된 노동력의 가치에서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뺀 가치의 잉여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이 가치의 잉여는 이윤의 형태로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이윤은 상품 생산과 상품 가치의 실현 과정을 통하여 발생하고, 통속적으로는 기업의 총매출에서 총비용을 공제한 가치의 양이다.
 
2. 상품생산과정에서 노동만이 가치창조적이라고 가정하면, 흔히들 이윤이 상품생산과정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주장은 한 때 대세를 이루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1875년 고타에 모인 독일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의 강령이다. "고타 강령"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이윤의 전유를 위해 투쟁하여야 하고, 그것이 정의라고 했다. 왜냐하면 오직 산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하고, 죽은 노동은 감가상각보전 비용만큼 가치를 상품에 이전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생산결사체, 곧 동직자조직의 형성을 위해 공헌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동직자조직에 의해 생산된 노동의 산물은 노동자들에 의해 모두 삼키어질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노동의 산물이 기업의 생산 활동과 비생산 활동을 위하여 적절하게 배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기업의 생산 활동을 위해 설치되어야 할 항목은 사용된 생산수단을 보완하기 위한 기금, 생산확대를 위한 추가 투자, 자연에 의한 재해나 고장을 제거하기 위한 예비금 등이며, 비생산 활동을 위해 설치되어야 할 항목은 생산에 직접 속하지 않는 일반적인 행정비용, 학교나 보건시설 등 욕구의 공동체적 충족을 위한 기금,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기금 등이다. 이러한 항목들을 위한 지출을 공제하고도 남는 노동의 산물만이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복지 향상을 위해 소비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3. 잉여가치의 분배에 관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기업 경영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잉여가치의 일부가 기업의 생산적 활동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잉여가치의 일부가 생활세계의 공동체적 형성을 위해 지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역사적 조건들을 고려하면, 마르크스의 첫째 견해는 이윤의 상당 부분이 기업의 생존 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은 시장의 가격 신호에 따라 자원할당의 효율성을 추구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생산적 투자의 확대를 통하여 경쟁능력을 강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기업의 생존과 경쟁력 향상을 위한 활동은, 그것이 어떻게 조직되든지 간에, 기업의 핵심 기능이며, 이 핵심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오늘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경영"이다. 경영 기능은 노동 기능과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설사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발적 의사에 따라 결성한 생산공동체라 할지라도, 그 생산공동체는 시장경제의 역사적 조건들 아래서 경영과 노동의 기능적 구별을 존중하고, 기업의 생존과 생산적 활동을 위해 잉여가치를 처분하는 일에 관하여 합의를 도출하여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둘째 견해는 기업의 잉여가치가 생활세계의 공동체적 형성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시장경제에서 기업 이윤의 일부가 법인세의 형태로 징수되어 국가 재정의 원천이 되고, 국가가 사회정책과 복지정책을 통해 소득 이전 활동을 하는 것도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가치 배분의 한 역사적 형태일 수 있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훈련을 위한 지출, 노동 생산성이 향상되는 조건들 아래서 잉여 노동력의 보유를 위한 다각적 노력, 생활세계를 위한 기업의 다양한 직접적 공헌 등도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생활세계적 정당성은 이러한 일련의 기업 활동과 기여를 통해 확인된다.

4. 문제는 경영과 노동, 그리고 생활세계가 어떤 절차와 원칙을 가지고 잉여가치의 배분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는가 이며, 이것은 오늘의 시장경제에서 기업의 지배구조를 조직하는 일과 관련된 핵심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잉여가치의 집적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기업 조직의 민주화가 이 문제에 대한 한 해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업 조직의 민주화는 생산자산의 소유자가 이윤의 직접적 전유를 목표로 기업 활동을 조직하는 것을 포기하는 데서 시작된다. 오늘의 경영 환경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 경영과 노동의 구별은 기업 조직의 근간이다. 개별 기업의 창업 과정에서 생산자산의 출자자가 기여한 공헌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기업의 성장은 잉여가치의 집적에서 비롯된 것이고, 집적된 잉여가치의 운영은 고도의 사회적 책임과 생활세계적 정당성 요구를 회피할 수 없다.
 만일 생산자산에 대한 소유자의 개인적 지배를 제한하거나 배제한다면, 바로 이러한 자본의 중립화 조건 아래서 기업의 잉여가치를 배분하기 위한 절차와 원칙을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다. 여기서는 상법상의 대기업(종업원 300인 이상의 기업)에 국한하여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정리하고자 한다.
 역사적 시장경제가 자본과 노동의 대립과 협력을 강제하는 제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본과 노동이 적어도 대등한 사회권력으로서 잉여가치의 배분에 관한 원칙에 합의하기 위하여 마주 앉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경제가 기업간 경쟁을 통해 기업의 생존을 강제한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설사 기업의 의사결정 기구에서 노동이 자본보다 더 많은 대표권을 장악한다 할지라도, 잉여가치의 배분을 둘러싸고 경영측의 합리적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리라는 법이 없다. 만일 기업의 생존과 생산적 활동을 위해 배분되어야 할 잉여가치의 몫이 결정된다면, 이 잉여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지분으로서 인정되어야 하고, 이 지분은, 기업이 존속하는 한, 분할되어 매각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기업 외부에 따로 지주회사를 설립하여 이 지분을 지주회사의 소유로 만들고 이 지주회사가 생산기업에 자본금을 대어 주는 형태로 관리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그렇게 하면, 생산기업은 지주회사의 출자금에 대한 적정 이자를 지급하여 출자자본의 실체를 보존하고 기업 회계 결산 때 새로 발생한 잉여가치를 지주회사에 생산공동체의 지분으로 새로 등록할 수 있을 것이다.

5.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생활세계적 정당성 실현을 위해서는 기업의 의사결정 기구에 생활세계의 대표를 참여시켜서 잉여가치의 적절한 분배에 관한 합의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잉여가치의 배분에서 여전히 남는 문제는 기업의 생존과 경쟁력 유지를 위하여 배분하여야 할 잉여가치의 크기를 어느 정도 규모로 결정하는가 인데, 이 문제는 오직 국민경제 차원에서 성장의 속도 조절 정책과 생태계 안정 정책에 관한 민주적 결정이 있을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

V. 국민경제 차원에서의 잉여가치의 분배

1. 경제의 지구화 조건들 아래서 국민경제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시각이 늘어가고 있지만, 국민경제는 개별기업들의 지역별, 산업별, 금융적, 국제적 네트워크의 중추기구로서 여전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과정에서 국가가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는 경향이 뚜렷하고, 이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오늘의 국민경제에서 국가는 시장 규율의 책임자로서, 공익의 실현자로서, 신용제도의 마지막 보증자로서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2. 국민경제 차원에서 잉여가치는 총소득에서 총비용을 공제한 몫으로 나타난다. 관례적인 국민소득계정은 가계와 기업의 소득을 합산해서 국민총소득을 표시하지만, 나는 기업의 매출에서 노동비용과 자본비용을 공제한 몫을 따로 합산하여 국민경제 차원의 잉여가치를 계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이 몫을 가리켜 국민저축이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는 시장경제에서 잉여가치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증발시키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노동소득에서도 저축이 발생하고 이 저축이 국민저축의 일부를 구성한다고 생각하지만, 노동소득의 저축은 미래의 교육 소비, 주택 소비, 내구재 소비, 퇴직 후 소비 등 비생산적 활동을 위해 지출되는 것이 시장경제의 현실이기에, 국민경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투자의 중추를 이룬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늘의 시장경제에서 보험이나 연금 등을 운영하는 금융기구들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기구들은, 생산적인 직접 투자로 진출하지 않는 이상, 자본 시장에서의 시세 차익 실현이라는 논리에 충실하기 때문에 생산적 활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국민경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총투자의 양은 기업의 잉여가치를 합산한 총저축의 양이라고 보는 것이 사리에 맞다. 케인즈가 말하는 저축률=투자율이라는 등식은 오직 잉여가치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감안할 때에만 국민경제 차원에서 설명능력을 갖는다.

3. 국민경제 차원에서 잉여가치는 오직 국민경제의 재생산 과정에서 투자와 소비의 균형을 유지하는 소득분배 원칙이 결정될 때 가장 이상적으로 배분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총생산이 자본재 생산과 소비재 생산의 두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전제하고서 재생산 도식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통하여 국민경제 차원에서의 잉여가치의 배분 원칙을 제시했다. 재생산에서는 단순재생산, 확대재생산, 축소재생산 등을 상정할 수 있다. 축소재생산은 시장경제에서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일단 이를 도외시하면, 단순재생산은 다음과 같은 등식으로 표시될 수 있다.

 Pr1 = C1+V1 (Pr1=자본재 생산, C=고정자본, V=가변자본)
 Pr2 = C2+V2 (Pr2=소비재 생산)

 이 두 등식은 Pr1=C1+C2, Pr2=V1+V2라는 등식으로 변용되고, Pr2=C2+V2=V1+V2라는 등식 이항을 통하여 C2=V1이라는 등식을 얻게 된다. 이 등식을 해석하면, 소비재 생산의 고정자본은 자본재 생산의 가변자본과 같아야 단순재생산에서 투자와 소비의 균형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만일 자본재 생산에서 고정자본의 비율을 증가시켜서 가변자본의 양을 줄이게 되면, 소비재의 일부는 팔리지 않을 것이고, 국민경제 차원에서 생산과 소비의 균형은 깨질 것이다. 거꾸로 만일 자본재 생산에서 고정자본의 비율을 줄이고 가변자본의 양을 늘린다면, 소비재의 부족이 심화될 것이다.
 그 다음, 확대재생산의 도식은 다음과 같다.

 Pr1 = C1+V1+M1 (M=잉여가치)
 Pr2 = C2+V2+M2

 이 경우, 확대재생산을 위해 고정자본을 구입하는 데 들어간 잉여가치를 mC, 가변자본을 구입하는 데 들어간 잉여가치를 mV, 자본가의 비생산적 활동을 위해 지출한 잉여가치를 mR로 표시하면, M1=mC1+mV1+mR1, M2=mC2+mV2+mR2의 등식이 성립한다. 이제 위의 재생산 도식을 변용하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등식들을 얻을 수 있다.

 1) Pr1=C1+V1+M1(=mC1+mV1+mR1)=C1+C2+mC1+mC2
 2) Pr2=C2+V2+M2(=mC2+mV2+mR2)=V1+V2+mV1+mV2+mR1+mR2
 3) V1+mV1+mR1=C2+mC2

 등식 3)은 자본재 생산에서 발생한 가변자본과 그 증가분, 그리고 자본가의 비생산적 지출이 소비재 생산의 확대를 위한 고정자본 및 그 증가분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한다. 만일 자본재 생산의 확대를 위해 이 부문에서 가변자본을 줄이고, 잉여가치의 비생산적 사용을 줄인다면, 소비재는 팔리지 않을 것이고,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가치 실현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소비재 생산 부문의 붕괴로부터 시작되어 급기야는 공황이 나타날 것이다. 거꾸로 자본재 생산 부문에서 고정자본이 증가하지 않고 가변자본과 비생산적인 잉여가치 사용이 증가하면 소비재는 부족해지고 물가는 폭등할 것이며, 귀중한 잉여가치는 물가에 의해 잠식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국가의 경제 활동을 고려하여 확대재생산 도식을 음미하기로 한다. 오늘의 경제 현실에서 국가는 경제 주체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경제적, 사회문화적 인프라의 구축을 위한 국가 활동은 말할 것도 없고, 재화와 서비스 제공을 위한 국가의 투자 활동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소득의 재분배를 위한 국가의 활동은 사회국가의 핵심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간부문에서 생산적 투자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오늘의 경제 상황에서 국가의 생산적 투자 활동은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서는 국가 재정이 오직 공공 서비스를 위한 지출로 소비된다고 가정하고 마르크스의 재생산 도식을 변용해서 살피기로 한다. 먼저, 약어를 설명한다.

 Pr1 = 생산된 생산수단의 총가치
 Pr2 = 생산된 소비재의 총가치
 V1 = 자본재 생산 부문에서 발생한 순임금(저축 이전의 임금)
 V2 =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발생한 순임금(저축 이전의 임금)
 R1 = 자본재 생산 부문에서 발생한 자본가의 비생산적 지출
 R2 =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발생한 자본가의 비생산적 지출
 S1 = 자본재 생산 부문에서 발생한 노동자와 자본가의 저축
 S2 =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발생한 노동자와 자본가의 저축
 C1 = 자본재 생산 부문에서 소비된 생산수단
 C2 =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소비된 생산수단
 J1 = 자본재 생산 부문에서 발생한 저축에서 이루어진 추가 투자
 J2 =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발생한 저축에서 이루어진 추가 투자
 St1 = 자본재 생산 부문의 노동자와 자본가가 지불한 세금
 St2 = 소비재 생산 부문의 노동자와 자본가가 지불한 세금
 D = 제3부문을 위한 국가의 총지출(국가의 투자 활동은 배제하고, 세금에 의해 충당되는 것으로 전제함)

 이제 마르크스의 확대재생산 도식을 변용하면 다음과 같다.

 1) Pr1=C1+C2+(S1+S2=J1+J2)
 2) Pr2=V1+V2+R1+R2+(St1+St2=D)
 3) Pr2=C2+V2+J2+R2+St2=V1+V2+R1+R2+(St1+St2), 따라서 V1+R1+St1=C2+J2이다.

 그런데 일단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발생하여 소비재 구입을 위해 지출하는 소득 전체를 Q2로 표시하고, 소비재 생산 부문의 소득에 의해 구매되지 않는 소비재의 가치를 U2로 나타내면, Pr2=C2+V2+R2+St2+J2이고, Q2=V2+R2+St2, U2=C2+J2이기 때문에 결국 Pr2=Q2+U2의 등식이 성립된다. 또한 균형 조건 아래서는 소비된 생산수단에 해당하는 가치도 교환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소비재가 남김 없이 구매되었다고 가정할 경우에는 U2=C2+J2=V1+R1+St1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제 다시 자본재 생산 부문에서 발생하는 소득이 생산수단을 위해 지출되지 않고 소비재를 위해 지출된다고 가정하고 이를 Q1으로 표시하면, Q1=V1+R1+St1이고, 따라서 Q1=U2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제 조금만 더 꼼꼼하게 따져 보기로 하자. 위와 같은 조건들 아래서 소비재 생산 부문은 Q1의 가치만큼 자본재 생산 부문으로부터 생산수단을 구입하여 소비된 생산수단을 대체할 수 있다. 이것은 소비재 생산 부문이 J2 만큼의 추가 투자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자본재 생산 부문에서는 C1+J1, 곧 U1으로 표시되는 가치만큼의 생산수단이 자본재 생산 부문 내부에서 교환된다. 자본재 생산 부문의 기업들은 동일 부문의 다른 기업들에 생산수단을 팔 수 있는데, 그 가치의 양은 U1에 해당할 것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자본재 생산 부문의 기업들은 고정자본 C1을 대체하고 J1 만큼의 추가 투자를 행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U1=C1+J1, 따라서 Pr1=U1+Q1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마르크스의 재생산 도식을 이렇게 변용하여 해석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Q1=U2라는 등식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등식은 조세에 근거한 국가의 비생산적 활동, 보험, 연금, 은행의 금융활동 등 다양한 변수를 모두 이입하여 재생산 도식을 복잡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한 마디로, 자본재 생산 부문에서 발생하는 소득의 증가와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이루어지는 투자 확대가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시장경제에서 소비와 투자의 거시균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재생산 도식에 대한 해석을 요약하면서 오타 쉬크는 거시소득분배 차원에서 잉여가치 가운데 소비재 구입을 위한 지출의 총량을 X, 추가 투자를 위한 지출의 총량을 S로 표시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시생산구조와 거시소득분배 사이의 객관적인 연관, 그리고 거시소득분배 내부에서 잉여가치가 X와 S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 (배분의) 필요 비율을 지키지 않는 데서, 특히 결정적인 거시균형조건, 곧 V1+X1=C2+J2를 지키지 않는 데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시장 교란의 고유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4. 문제는 시장경제에서 자본의 이해관계와 노동의 이해관계, 곧 투자와 소비의 균형을 이룩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자본의 권력이 노동의 권력을 압도하여 자본의 이해관계를 관철한다면, 자본재 생산 부문이나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고정자본의 비율은 턱없이 높아질 것이며, 더욱이 자본 상호간의 삶과 죽음을 건 투쟁 속에서 고정자본의 증가가 노동절약적 합리화로 치닫게 되면, 실업의 증가는 피할 수 없고, 국민경제 차원에서 투자와 소비의 균형은 완전히 깨지고 만다. 정반대의 상황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만일 노동의 이해관계가 관철되어 잉여가치의 상당부분이 비생산적 활동을 위하여 지출되면, 확대된 수요에 대한 재화의 공급 능력은 턱없이 부족해져서 경제는 침체되고 인플레이션은 심화될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상황을 회피하는 길은 노동의 이해관계와 자본의 이해관계가 상대방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며 관철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 두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투자와 소비의 거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시균형을 위해 고려할 원칙은 다음의 몇 가지이다.
 첫째, 잉여가치의 분배를 둘러싼 노동과 자본의 갈등은 국민경제의 적정 성장률을 제시하는 조건 아래서 조정되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Q1=U2의 등식은 확대재생산 조건 아래서 소비의 확대와 투자의 증대를 균형 상태에 놓아야 한다는 것을 예시한다. 국민경제의 적정 성장률은 국민경제의 성장을 조율하는 국가 기구의 지도 아래서 노동의 대표기구와 자본의 대표기구가 대등한 사회권력으로서 마주 앉아 합의하고, 이를 국민의 대표기구인 국회를 통해 추인할 수 있다. 물론 잉여가치의 배분을 둘러싼 노사정 합의와 국회의 추인은 결코 시장 활동을 대체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는 없고, 시장을 보완하는 기능을 맡아야 할 것이다. 만일 잉여가치의 배분과 관련하여 성장률이 가이드라인으로 책임 있게 제시되면, 기업 차원에서의 잉여가치 배분도 적절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 오늘날과 같이 민간경제 부문에서 잉여가치의 집적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국가는 투자 활동에 나서기보다는 소비 확대를 위한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여야 한다. 민간 부문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투자는 시장 경쟁 조건들 아래서 필연적으로 노동비용 감축를 위한 합리화로 귀결될 것이며, 투자를 통한 노동생산성 향상은 거의 모든 산업 부문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노동력의 퇴출을 강제할 것이다. 가치생산과정에서 퇴출되는 노동력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는 잉여가치의 상당 부분을 세금의 형태로 퍼내어서 시장소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생계비를 지원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는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여야 한다. 예컨대 의료와 교육, 문화 창달과 자연 보호를 위한 국가 활동의 강화와 이를 위한 증세는 고용 문제와 소득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안일 수 있다.
 셋째, 국민경제 차원에서 잉여가치를 배분할 때 경제성장의 속도를 조율하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생태계 안정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다. 시장의 가격장치나 가치법칙을 갖고서 생태계 위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장의 가격 기제나 가치 법칙은 이 분야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 생존의 자연적 기반들과 경제의 생태학적 기반들을 보호하기 위한 비용은 오직 가격과 가치 개념을 뛰어 넘는 방식으로 조달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생태계 안정을 위한 정치적 합의에 기초하여 잉여가치의 상당 부분을 생태계 안정을 위해 소비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태계 안정은 국민경제의 적정 성장을 설정할 때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생태계 안정을 위해 투자와 소비의 규모를 줄일 수도 있어야 한다. 오직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될 때에만, 소방 활동에 비교할 수 있는 임기응변식의 자연 보호 활동이 지양되고 생태계 안정을 위한 국가의 체계적이고 예방적인 활동이 조직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활동의 강화는 생태계 보전을 위한 공공 서비스 부문을 확대하여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VI. 글을 마치며 -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 비판에 대한 기독교윤리학적 평가

1.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 비판은 기독교윤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적 노동가치론을 비판하고자 했으며, 그 비판에는 사회적 관점과 생태학적 관점이 간직되어 있다. 사회적 가난과 생태계 위기가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에서 비롯되고, 이 둘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음을 밝힌 마르크스의 통찰은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것을 시사한다.
 기독교윤리학은 노동 문제와 생태계 위기 문제에 접근하는 신학적 관점을 그 나름대로 설정할 수 있고, 그 신학적 관점에 기대어 노동과 자연의 문제에 관한 윤리적 판단의 원칙들을 정교하게 가다듬을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윤리학이 윤리적 판단의 원칙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학적 관점을 어떤 식으로 설정하던 간에, 적어도 역사적으로 주어진 시장경제와 대결하면서 이 두 가지 문제들을 제도적으로 풀기 위한 실천의 방책을 고려할 때에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 비판에서 하나의 현실 분석 도구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의 제도적 해결을 위한 윤리적 구상은 역사적 제도의 현실에 대한 분석과 이에 바탕을 둔, 역사적으로 실현가능한, 제도적인 해법을 포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제는 문제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원칙들을 제시하는 과제나 그 원칙들의 신학적 근거를 설정하는 과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 다음, 기독교윤리학이 현실을 책임 있게 형성하고 현실의 대안을 정책 제안의 수준에서 제시하고자 할 때 마르크스의 재생산 도식에 담긴 도전도 회피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주류 경제학은 잉여가치의 존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잉여가치 개념은 기업 개혁과 국민경제 개혁의 실마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기독교윤리학도 시장경제의 역사적 조건들 아래서 기업윤리, 경제윤리, 환경윤리의 틀을 짜는 데 잉여가치 개념을 도구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2. 물론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적 노동가치론을 비판하였지만, 새로운 사회의 운영 원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천재적인 사회과학자가 자본주의 사회의 해부에 자신의 역량을 쏟아 부은 나머지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기독교윤리학은 생태계 안정과 만인의 복지를 다함께 구현하는 생명의 경제와 공생의 사회를 책임 있게 구상하고자 하기 때문에 부르주아적 노동가치론과 시장경제의 핵심적인 조정기구인 가격 기제 이론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사회의 운영 원리를 밝혀야 할 큰 과제를 안고 있다.
 
3. 이 글을 되돌아보면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 비판에서 얻을 수 있는 실마리를 붙잡고 기업 차원과 국민경제 차원에서 잉여가치를 분배하는 방안과 관련된 나의 몇 가지 구상이 오늘의 지구 경제에서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자본이 생산과 유통과 금융의 지구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노동을 지배하고 약탈하는 상황에서 기업 차원과 국민경제 차원에서 잉여가치의 배분 원칙을 따지는 것은, 철 지난 논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낼 수도 있지만, 결코 간과할 만한 과제가 아닌 것 같다. 금융시장을 통하여 화폐자본이 시세차익을 실현하고 자신의 권력을 끝 갈 데 없이 강화시키는 데 대해서는 별도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잉여가치의 민주적 배분을 위한 제도가 확립되면 기업과 국민경제에 대한 화폐자본의 공격은 약화되거나 배척될 수 있다. 설사 주식 보유를 통한 생산자산의 통제가 실현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잉여가치의 민주적 배분을 위한 제도는 기업과 국민경제의 적정 성장을 위하여 주식 배당의 적정 수준을 강제하는 제도를 구축하고, 이를 강화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을 지배하고 약탈하는 지구적 네트워크에 대한 대안은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논의의 계속을 위해 나는 우선 지구경제가 지역경제와 국민경제의 발전을 교란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 둘을 보완하여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지역경제와 국민경제는 자기 안에 유폐되어서는 안 되지만, 내포적 발전가능성을 부정당해서도 안 된다. 경제의 개방성과 내포적 발전가능성이 모두 보장될 때에만 기업과 국민경제의 적정 성장을 이성적으로 통제하면서 생태계 안정과 세계 만민의 복지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러한 관점은 우리나라 경제의 미래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구호는 오늘의 지구경제에서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에너지와 물질의 무모한 낭비에 기초를 둔 수출경제는 재조정되고, 내수와 수출이 균형을 이루도록 경제운영의 틀이 새로워져야 한다. 사회적이고 생태학적 관점에서 정상적인 경제 운영은 에너지와 물질의 자급과 효율적 활용을 기술적으로 실현하면서 국민경제 차원에서 생산과 소비의 거시균형을 이루고 잉여가치의 배분을 위해 기업이 민주적으로 조직될 때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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