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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4 (21:23) from 211.41.250.47' of 211.41.250.47' Article Number :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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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노동 이해와 그 윤리적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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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노동 이해와 그 윤리적 함의

강원돈

머리말

 이 글에서 필자는 성서의 노동 이해를 밝히고, 그것에 내포된 몇 가지 원칙들을 정리하여 인간친화적, 사회친화적, 생태친화적인 노동의 형성을 위한 실마리를 얻고자 한다. 성서의 노동 이해는 노동이 하느님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데서 출발한다. 하느님에 의한 노동의 제정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두 가지 위임을 부여하였다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한다. 하나는 하느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동료피조물을 위해 청지기 노릇을 해야 한다는 위임이고, 또 다른 하나는 피조물의 살림살이를 보장하는 조건들 아래서 자기 의식을 갖고 창조적으로 삶을 꾸려가야 한다는 위임이다. 이러한 두 가지 위임의 의미는 이 세상이 투명하게 마주 서야 할 하느님의 영원한 안식의 빛 아래서 명료하게 파악될 것이다. 필자는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투명해야 한다는 명제를 종말론적 의미에서 이해한다.
 하느님의 영원한 안식을 향한 도정에서 동료피조물을 위한 인간의 청지기 노릇에 주목하여 노동의 형태를 그리기 위해 필자는 우선 제1장에서 인간과 동료피조물들 사이의 개방적이고 무제약적인 의사소통의 틀에서 생태학적 지향을 갖는 노동의 윤곽을 더듬을 것이다. 그 다음, 제2장에서 필자는 이 윤곽을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하면서 노동을 하느님에 의해 긍정된 생활활동으로 이해하고, 생활상의 곤란을 회피하는 수준으로 노동을 제한해야 할 필요성을 밝힐 것이다. 끝으로, 제3장에서 필자는 위에서 논의한 바로부터 노동을 인간친화적, 사회친화적, 생태친화적으로 형성하는 데 고려해 봄직한 몇 가지 원칙들을 이끌어낼 것이다.

I. 동료피조물을 위한 인간의 청지기 노릇과 생태학적 노동

 여기서 필자는 우선 하느님의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게 하는 안식일의 빛에서 노동을 규명하고, 그 다음 안식공동체를 향한 도정에서 인간과 동료피조물 사이의 개방적이고 무제약적인 의사소통으로서 전개되는 노동의 형태를 그리고자 한다.

1. 안식과 노동

 하느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였다는 점을 고려하고 하느님의 영원한 안식에 대한 희망이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서 필자는 피조물 전체가 하느님의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게 하는 안식일을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영원한 안식은 안식의 축제들(안식일, 안식년, 희년)에서 지향목표로 남아 있으며, 이 세상은 이 지향 목표에 투명해야 한다. 안식을 누리면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이 삼위일체의 역사를 통해 이룩하였고 지금도 이루고 있는 위대한 행위들을 회상하며 영원한 안식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하느님 앞에(coram Deo) 서 있다는 것은 그 분에게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거기서 하느님의 통치가 경험된다.
 그렇다면 인간과 피조물이 하느님 앞에 서 있으라는 안식의 촉구는 인간의 노동과 이에 관련된 피조물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1 노동과 행위 주체의 불가분리성

 1) 안식일은 노동일들로부터 분리되고 하느님을 위해 성별된 날이다. 안식일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축성(祝聖)에 근거한다(창세 2,3). 안식일은 인간의 개입 없이 오직 하느님에 의해 거룩한 날로 정해졌다. 인간의 노동 이전에 안식일은 이미 거룩하며 인간이 노동을 수행한 뒤에도 여전히 거룩하다. 인간의 노동과 그 업적에 무관하게 안식일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 현존하도록 축성되었다.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게 하는 안식일에 인간은 삶을 꾸리는 수단으로서의 노동과 노동업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 하느님 앞에 서도록 허락되었다. 인간이 하느님의 상대로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노동과 그 업적 때문이 아니라, 피조물 가운데 현존하는 하느님의 신실성 때문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현존에 참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을 통하여 펼쳐지는 그 분의 지배에 복종하는 것은 인간의 노동과 그 업적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갖는다.

 2) 안식일은 인간이 노동과 업적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복귀하고 하느님을 위하여 휴식하는 날이다. 안식과 업적으로부터 벗어난 휴식 가운데서 인간은 하느님의 상대로서 하느님의 면전에 서 있다. 노동과 업적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에서도 “자기목적”일 수 없다. 성서는 노동을 위한 노동을 알지 못한다. 인간의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휴식”이다. 따라서 라차드슨처럼 “인간은 그 본성상 노동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근시안적인 견해이다.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규정되기 이전에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상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인간은 노동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서 하느님의 대화 파트너가 되도록 창조되었다.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취하면서 인간은 하느님 앞에 선다. 휴식 가운데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의 의지에 복종한다. 노동의 의미는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뜻에 자유롭게 복종할 때에만 드러난다. ‘기도와 노동“(ora et labora)의 전통은 휴식과 노동이 본래 서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서로 결합된 것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하느님 앞에서 취하는 휴식은 노동을 ”기도에서 비롯되는 일“(laborare ex oratione)로 이해할 수 있는 장소이다.
 
 3) 기도하는 자세로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행위의 주체(person)로 선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만 인간이 행위 주체로 현존하고 노동을 할 때에는 행위 주체이기를 그친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큰 잘못이다. 인간은 노동 안에 있을 때에나 노동 바깥에 있을 때에나 주체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노동과 행위의 주체성을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행위 주체로서 인간은 일하고 노동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관계 속에 있다는 것, 관계에 충실하고 관계 속에서 책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다.

 첫째,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하고 휴식한다. 그는 하느님의 의지를 경청하며 일하고 그가 노동을 통해 수행하고 얻은 것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선다. 인간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하느님 앞에서 계산을 하여야 하고 따라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의 업적을 가지고 하느님과 바른 관계에 설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계산과 책임은 인간이 그리스도 사건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신실성 덕분에 하느님의 파트너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둘째, 인간은 행위의 주체로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이웃 인간과도 관계를 맺는다. 행위 주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웃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는 것을 뜻한다. 공간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시간적으로도! 인간은 선조들의 역사적 업적에 기대어서만 일할 수 있다. 이 선행 노동이 없다면 진보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종류들을 서로 나누고 파트너 정신을 갖고서 이 노동들을 조직한다. 사회적 노동과정과 공장의 노동 과정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형성하지 않고서는 노동 유기체 안에 파트너 관계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또한 후손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상속한다. 인간의 노동은 언제나 함께 하는 노동이다. 각기 다르고 다양하기 짝이 없는 노동의 사회적 유기체에 참여하는 동시대인들과 함께 하는 노동만이 아니고, 세대들 사이에서 서로 함께 하는 노동이다.
 함께 하는 노동은 인간이 주체적이고 공동체 능력이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노동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이 유적 존재(Gattungswesen)임을 안다. 노동 속에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연대를 맺고 자신이 연대적 존재임을 실증한다. 인간의 노동은 연대적인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보존하는 데 참여하고 그것을 위해 기여한다. 인간은 이웃과 함께 연대적인 생활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책임을 진다. 인간이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해서도 안 되고, 노동의 사회적 유기체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배제되어서도 안 된다.
 노동의 의무와 노동의 권리는 사회적으로 성취되고 보증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인간적인 생활공동체가 실질적 기반을 가질 수 있다. 노동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업적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업적의 결실들은, 노동능력이 있든 없든, 사회적으로 조직된 노동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든 얻지 못했든,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생활을 영위하고 공동체를 바르게 형성하기 위하여 이웃과 더불어 나누어져야 한다.

 셋째. 인간은 노동업적을 통하여 공동체 생활에 기여해야 하지만, 노동의 업적이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은 하느님 앞에 그가 서 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그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근거한다.

 넷째. 인간 존재는 구원사적으로 그리스도 사건에 뿌리를 박고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 관계는 바로 이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의 주체성은 사회적으로 조직된 노동과정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 노동의 사회적 유기체를 평가하는 기준은 그것이 인간의 주체성을 지켜주는가일 것이다. 이것은 노동과정의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조직을 평가하는 원칙들 가운데 하나이다.

1.2 피조물의 고유한 권리

 1) 하느님 앞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분부를 받은 것은 사람들만이 아니다. 온 피조물도 그 분부를 받았다. 안식일에 피조물 전체는 하느님의 얼굴 앞에 서기 위하여 인간의 노동을 위한 봉사로부터 해방된다. 안식일은 피조물 전체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 분에게 속하고 그 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에 대한 회상이다. 인간에 대한 지배의 위임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은 인간의 처분권 아래 있지 있다. 피조물에 대한 처분권을 갖는 것은 신실을 다해 생명을 보존하고 만물의 안식공동체에 정의와 평화를 세우는 하느님뿐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자연을 다루는 인간 노동을 형성하기 위해 고려하여야 할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해 피조물이 갖는 고유한 권리이다.

 2) 하느님이 피조물 전체를 그 분 앞에서 안식하도록 부른다는 것은 피조물이 하느님 앞에서 그 분의 통치 아래 서도록 규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에 의해 생명으로 불러 세워진 피조물은 피조물들에 대해 항상 신실하고 피조물을 보존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활동하는 하느님에게 속한다. 바로 이것이 피조물의 현존 일반의 근거이며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 피조물이 존속할 수 있는 근거이다.
 안식 전통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피조물이 하느님의 소유물이고 어떤 사람도 피조물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레위 25,22). 피조물이 인간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가지는 까닭은 그것이 하느님의 통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고유한 가치는 그러나 하느님에 대항해서 주장될 수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느님의 영원한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고유한 가치는 그들이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속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 피조물의 속성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지배 위임과 도미니움 떼레의 위임에 피조물을 소유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하다. 획득 대상에 대한 “지배”(dominium) 혹은 절대적 처분권을 의미하는 로마법의 소유권 개념은 성서에 전혀 낯설다. 인간의 지배 위임은 안식을 위해 피조물의 세계를 보존하고 다스리라는 하느님의 위임일 뿐이다. 지배의 위임은 본래 공생적인 안식공동체를 형성하고 규율하는 것과 관계가 있지, 동료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소유권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도미니움 떼레는 하느님이 그것을 인간에게 허락하여 삶을 꾸려가도록 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뿐이다. 동료피조물은 인간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지키고 경작하여야” 할 공간이다(창세 2,15). 이 점에 대해 에른스트 볼프가 한 말은 정곡을 찌른다. 피조물의 세계는 인간에게 “차지(借地)로 맡겨진 생활공간”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꾸려온 죄악사의 핵을 이루는 인간의 폭력행위는 그리스도 사건에서 심판을 받았다. 그리스도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지칭한다. 필자는 그리스도 사건에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죄의 권세가 종말론적으로 심판되고 그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사건에서 죄의 노예화하고 파멸시키는 지배는 하느님의 해방하고 살리는 지배로 전환되었다. 죄에 종살이하는 인간의 행위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폭력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참조 호세 4,2-4),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인간에게 개방되는 길은 폭력의 포기일 것이다.
 이제까지 경제활동을 위해 자연을 아무런 사려 없이 지배하고 착취해 온 인간의 행실도 이러한 심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군적 지배권을 물리치는 폭력의 포기는 그리스도론적 근거를 갖는다. 따라서 동료피조물을 위한 인간의 살림살이는 그리스도 사건의 지평에서 볼 때 폭력의 포기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그것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연에 대한 소유권의 포기로 나타날 것이다.

 3)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연을 바르게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피조물이 하느님의 주권 아래 영원히 서 있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안식일에 하느님은 인간의 노동을 위한 봉사로부터 자연을 해방시킨다. 매 칠 년마다 땅은 경작되지 않은 채 내 버려 두어야 한다(레위 25,1-7). 희년이 오면, 땅과 토지를 사유화(私有化)하는 왜곡된 질서는 폐지되고 본래의 질서가 회복되어야 한다(레위 25,8-55). 왜냐하면 땅에 속하는 만물은 피조물공동체에 바른 질서를 창조하여 생명을 북돋고자 하는 하느님에게 궁극적으로 속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바를 종합하자면, 자연의 고유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안식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의지에 따라 노동을 조직할 때 반드시 고려하여야 할 원칙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노동과 경제의 차원에서 자연과 인간의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다.

2. 동료피조물과 나누는 개방적이고 무제약적인 의사소통으로서의 노동

 인간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현존 권능에 힘입어 동료피조물과 개방적이고 무제약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부름을 받았고 이러한 의사소통은 영원한 안식공동체를 향한 도정에서 인간과 자연이 형성하는 고난공동체와 희망공동체의 본질적 측면이다(참조 로마 8,18-27). 여기서는 동료피조물과 나누는 개방적이고 무제약적인 의사소통의 틀에서 인간의 노동을 해명하고자 한다.

2.1 유대교-기독교 전통에서 인간은 영이 깃들어 있는 몸이다. 그는 욕망을 지닌 생명체이며, 이 욕망은 인간에게 욕구 충족 수단을 마련하도록 강제한다. 노동은 인간이 땅 위에서 이러한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에 복종하더라도 이러한 삶의 조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종말론적인 구원의 확신에서 비롯되는 열광주의에 휩싸인다 해도, 또는 모순 아래 있는 이 세상에서의 실존을 날카롭게 인식한다 할지라도, 사람은 먹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 이것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데후 3,10; 참조 데전 4,11f.)고 바울이 한 말의 진의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서도 인간이 노동과정에 들어가서 노동수단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노동력을 지출하여 노동소재들의 형태를 바꾸는 일을 계속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인간이 노동과정에서 유용한 사물을 생산하여 욕구를 충족하여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지배 아래서 노동과정이 조직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진다.

2.2 유대교-기독교 전통에서 노동 개념은 하느님이 피조물을 지었다는 데서 출발한다. 피조물은 하느님에 의해 그 분의 피조물로 세워졌고, 인간은 피조물의 세계를 공생적 안식공동체로 형성하고 규율하도록 하느님의 위임자로 세워졌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핵심적인 위임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에게 땅을 차지로 맡겼다. 그것은 땅을 가꾸고 경작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노동은 인간이 하느님의 제정 의지를 고려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땅 위에서 의식적으로 삶을 형성하라는 하느님의 위임으로서의 도미니움 떼레의 의미이다.
 하느님의 제정의 전체적인 틀에서 볼 때, 피조물들 사이에서 생활영역이 구별되고 역할이 나뉘어졌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피조물들 사이의 대립과 차별을 전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틀에서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피조물들 사이에,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공생적 파트너관계를 수립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야훼문서의 창조와 낙원 이야기에는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다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 에피소드에서 명명(命名)은 인간에 의한 세계의 자의적 구성을 뜻하지 않고 하느님이 모든 피조물들의 관계를 공생적 파트너 관계로 규율하기 위해 제정한 질서에 대한 응답이다. 명명은 인간이 이 질서의 틀에서 놀고 있는 자신의 상대방들에 의해 건들어지고 피조물 세계의 전체적인 질서 연관의 진리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는 위의 각주 9의 졸고를 보라.


2.3 성서의 인간 이해의 틀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영과 육은 인간에게서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얽혀 있다. 인간은 영이 깃들어 있는 몸으로서 산다. 영은 육에 대해 우위에 있지 않으며 그 반대도 아니다. 둘은 기능적으로 구별되지만, 전체의 필수 불가결한 구성부분이다. 인간의 육체성은 그가 땅에 속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인간의 육신은 땅과 동일한 질료이다(창세 2,7). 하느님이 인간에게 피조물의 세계에서 특수한 지위를 부여했지만, 그리고 명명 에피소드에서 시사되듯이 사물의 전체적인 연관을 인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재능을 주었지만, 인간은 역시 땅에 속해 있다. 그는 땅 위에 살아가는 피조물 전체의 일원이다. 육적인 존재로서 그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의 육체성은 그가 땅에 속한 땅의 일원임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바로 그 땅으로 만들어진 모든 생명체들은 하느님의 숨에 의해 살아 움직인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노동할 수 있는 영적인 재능과 육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무기체와 유기체와의 사귐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에 속하고 그것 안으로 들어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생명의 숨이 깃들어 있는 몸으로서 인간은 동료피조물들에 대한 우위와 지배를 주장할 권리가 없다. 인간은 그의 환경을 이루는 동료피조물들과 대화를 나눈다. 이것이 환경과 의사소통을 나누는 생명의 기본형태이다. 그리고 의사소통의 상대가 되는 그 환경은 피조물공동체의 전체적인 질서연관의 부분시스템이다.

2.4 오늘날 사람들은 유기체와 그 환경 사이에서 에너지-물질 순환이 이루어지면서도 고도의 “평형”을 이루는 현상이 생명의 기본현상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물론 이 개념 하나만 갖고서는 생명의 본질을 규명할 수는 없지만, 유기적 생명체와 무기적 환경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평형”은 자연이 유기체와 무기체로 분화되어간 자연사 과정을 전제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평형”은 무엇보다도 유기체의 생명이 그의 환경을 이루는 것의 구조화된 전체성에 적응하고 그 전체성 안에 받아들여져 환경과 에너지-물질 대사를 수행할 때에만 가능하다. 유기체와 그 환경 사이의 적합한 관계는 둘 사이의 에너지-물질 대사를 위해 무조건 전제되어야 한다. 유기체가 환경 안으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짐은 능동적인 생명활동의 필수 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순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유기체의 자기보존은 그 환경과 순전히 맞설 때에는 가능하지 않고, 그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적합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 생명의 기본원칙은 열린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과정을 염두에 두면 자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열린 시스템의 기본논리를 상세하게 다루지 않더라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열린 시스템에서 시스템과 환경 사이에서 에너지-물질 대사는 끊임없이 진행되지만, 시스템 자체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환경과의 에너지-물질 대사를 통하여 한 유기체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환경과 의사소통을 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여기서 자기초월은 유기체가 생명보존 시스템에 통합되었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기체는 이 생명보존 시스템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고 자기발전을 계속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기체와 그 환경 사이의 의사소통 과정이다. 생명보존 시스템 안에서 자기보존과 자기초월을 하면서 유기체가 유지하는 생명의 형태는 유전자 정보로 재생산되어 저장된다.
 각각의 유기체는 환경을 생명보존 시스템으로서 가지며, 이 생명보존 시스템은 생명공동체의 부분 시스템이다. 각각의 생명공동체는 다시 부분 시스템으로서 훨씬 더 큰 시스템에 속한다. 그리고 이 모든 부분 시스템들은 에너지-물질 대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열린 시스템으로서의 생태계 안에서 제각기 기능한다. 달리 말하면, 미소 수준에서 한 유기체는 자신의 생명보존 시스템에 깃들어 자신의 환경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하나의 생명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살림을 조직한다. 중간 수준에서 모든 생명공동체들은 균형 시스템을 이루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거대 수준에서 생태계는 에너지-물질 대사의 전체적인 틀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가 에너지-물질 대사의 전체적인 질서의 틀이며, 그 안에서 생명체와 무생명체가 서로 결합되어 상호영향 관계를 맺으며 거대한 정보공동체와 의사소통공동체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생태계에서 만물은 정보교환과 의사소통을 통하여 서로 결합되고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는데, 바로 이 관계가 생명의 기본논리이다. 생명은 만물이 맺는 관계의 현실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의 전체적인 살림살이를 고려하면서 인간의 삶을 책임적으로 형성하기 위해 신학은 열린 시스템 이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신학적 해석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고안하기 위해 열린 시스템 이론을 신학적으로 소화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화보다 더 의미 있고 더 절실한 과제는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적 노역을 통해 피조물의 세계를 안식공동체로 형성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하면서 생태학적 요구들에 부응하는 삶을 형성하기 위한 실천의 근거를 제시하고 이를 사회적,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 신앙은 열린 시스템 이론을 좋은 보조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2.5 피조물의 세계에서 인간은 땅 전체를 생활공간으로 맡은 유일한 생명체이다. 다른 생명체들이 상대적으로 작은 생활공간을 자신의 환경으로 삼고서 거기에 깃들어 사는 데 반해 인간은 자신의 환경과 나누는 전면적이고 무제약적인 의사소통에 기대어 산다. 인간의 환경은 미소 수준이나 중간 수준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거대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생활을 꾸리기 위한 인간의 활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환경과 전면적이고 무제약적인 의사소통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전체적 연관을 행위계획 안에 끌어들일 때 인간은 피조물의 살림살이에 책임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책임적으로 삶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의식은 생태계 위기를 바라다보면 더욱더 커질 것이다. 생태계 위기는 자연의 살림살이에서 균형이 파괴되었다는것, 곧 생태계의 모든 수준들에서 에너지-물질 대사가 교란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생태계 위기는 인간이 자연의 전체적 연관을 고려하지 않은 채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을 조직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에 발생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더 첨예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생태계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태계의 모든 단계들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을 계획하고 이를 구현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인간이 크고 작은 생명보존 시스템으로서의 환경에 얽혀 있음을 인식하고 이에 수동적 자세로 임할 때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개방적이고 무제약적인 눈을 가지고 인지하고 살아 있는 만물의 상호의존성에 적합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2.6 사물에 각각의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인간은 사물을 그것의 각각의 자리와 각각의 운동 속에서 인지할 수 있다. 이러한 인지는 이른바 선험적인 세계 구성과는 엄격하게 구별되며, 사물이 자신의 자리에서 보여주는 생동적인 역동성 속으로 방념적(放念的)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인지를 통해 인간은 바깥으로부터 오는 사물들의 운동에 자기 자신이 건들어지게 허락하고 이 건들어짐에서 자기 자신을 경험한다. 이러한 인지 속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전체적인 질서의 틀을 이루는 구성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의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들이 각각의 자리에서 보이는 운동에 대해 감수성을 갖고 만물의 상호결합과 상호의존 관계에 대해 개방성을 취하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인지를 통해서만 인간은 상호간 의사소통을 나누는 만물이 이루는 관계의 현실성, 곧 생명을 인식한다.

2.7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라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인간은 환경과 개방적이고 무제약적인 의사소통을 나누도록 부름을 받았고, 이 의사소통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건들어지는 존재임을 안다. 그는 학대받는 동료피조물의 모습에 의해 건들어진다. 그는 동료피조물의 고난에 의해 충격을 받는다. 피조물이 그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자연의 전체적 연관에서 균형이 깨지고, 자연의 살림살이에서 에너지와 물질 대사가 교란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료피조물의 운명에 실제로 얽혀 있는 자신의 몸을 본다. 그 몸은 이 세상의 삶의 조건들 아래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몸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몸과 의사소통을 나누는 영도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을 갖는 인간은 전면적으로 개방된 감응능력을 갖고서 동료피조물들에 의해 건들어지도록 허락하고, 그것들의 고난을 함께 나눌 용의를 갖게끔 해방된다. 그는 동료피조물의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받아들이고 속량을 향한 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실존하는 인간은 몸의 속량에 대한 희망을 동료피조물들과 함께 나눈다.

2.8 환경을 인지하고 환경과 의사소통을 나누는 노동은 모든 수준의 생명보존 시스템에서 만물이 상호 결합되어 있고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 노동은 더 이상 수동성에 대한 능동성의 우위를 주장하지 않고, 생명보존 시스템으로의 통합을 뜻하는 수동성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러므로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의 계획과 조직은 아래의 세 원칙들을 고려하여야 한다. 첫째,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의 계획과 조직은 생태계의 모든 수준에서 환경과 에너지-물질 대사와 친화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자연의 상태와 재고(在庫)에 대한 개입은 자연의 연관 속에서 생명의 깨지기 쉬운 균형을 파괴하지 않는 조건 아래서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자연 활용이 자연의 전체적인 살림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을 고려한다면, 인간의 책임을 현재에만 국한해서는 안 되고, 미래에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II. 인간의 의식적인 생활영위로서의 노동

 노동의 생태학적 측면을 강조하고 노동 및 생산과정을 생태학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예나 지금이나 노동이 땅 위에서 인간이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이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노동은 놀이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의 필연성이다.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인간은 유용한 사물을 생산하여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이 삶에 필요한 노동을 염두에 두고서 필자는 아래서 세 가지 점을 세밀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노동은 고역의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하느님에 의해 긍정되고 축복된 생활영위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둘째, 인간의 생활영위는 생활상의 곤란을 회피하는 수준에서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 하느님에 의한 인간 노동의 긍정과 축복

 신학의 전통과 철학의 전통을 되돌아보면 노동을 멸시하는 견해들이 매우 많다. 저주로서의 노동, 죄인들에게 하느님이 부과한 훈련으로서의 노동, 생활의 필연성 때문에 자유를 희생시키는 노동 등이 그것이다. 유대교-기독교 전통의 노동 이해는 이러한 전통적 견해들과 크게 대조된다.

1.1 사제문서(창세 1,28)의 도미니움 떼레에 대한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오직 인간만이 땅 위에서 노동을 통하여 의식적으로 삶을 형성하라는 하느님의 위임을 받았고, 바로 이 노동이 하느님의 축복 아래 있다는 것이다. 야훼문서의 낙원 이야기와 타락 이야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노동이 타락 이전이나 이후에나 - 비록 타락 이후에는 노동과 고역, 기쁨과 고통이라는 양면성을 띠게 되었기는 하지만 - 생명을 수립하고 보존하는 하느님에 의하여 언제나 긍정되었다는 점이다.
 성서는 삶을 형성하는 노동의 의미에 주목하고 있으며,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발전이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지혜 전통이다. 그러나 성서는, 카인의 후예들의 계보(창세 4,17-24)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활동이 생존을 위해 노동 분업적으로 조직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러한 노동 현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지배와 착취와 배제로 얼룩지게 한다. 성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성서는 하느님에 의해 축복되고 긍정된 노동을 위협하고 노동자들을 노예화하는 세력들에 대해 “아니”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사회사에서 우리는 노동을 저 세력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중요한 입법을 통해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세력들에게서 노동을 보호하고자 하는 성서의 관심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성서가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을 분리시킨 바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성서는 하느님에 의해 긍정되고 축복된 노동이 전인적 인간의 노동, 곧 영이 깃들어 있는 몸의 노동이라는 데서 항상 출발한다.

1.2 그리스도 사건의 지평에서 인간의 생활영위는 단 한번도 소홀히 다루어진 바 없다. 속량에 대한 열광적인 확신을 가졌던 원공동체는 그들이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고 이 세상에서의 삶의 조건들 아래서 그리스도인들도 노동을 통해 생존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었다. 바울은 노동을 꺼려하는 열광주의로의 도피에 대해 경고한 바 있고(데전 4,11; 데후 3,11f.), 그 역시 종말론적 속량을 고대하고 있었지만 노동을 통한 생활의 영위가 이 세상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방식임을 인정했다.
 바울은 선교사로서 수공업자의 직업 활동을 수행하면서 제 손의 노동을 통해 생활을 꾸려나갔다(사도 18,3; 20,34).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을 권고하면서 바울은 노동을 책임 있는 생활을 위한 의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기독교적 생활방식의 종말론적 특성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유대교 노동윤리의 전통에서 헬레니즘 선교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던 노동 천시를 비판한 것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헬레니즘의 노동 천시는 여러 가지 관념들과 결부되어 있었다. 헬레니즘에서 노동은 종교적으로 신에 의해 인간에게 선고된 운명으로 해석되기도 했고, 철학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덕(德) 있는 삶은 오직 노동(ponos)을 통해 살림을 꾸리는 필연성으로부터 해방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관념이 살아 있었다. 또한 헬레니즘의 노예소유제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종류들은 노예들에게 부과되어 있었기에 노동은 자유인이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이와 같은 헬레니즘적인 노동 천시를 목격하면서 바울은 노동의 의무를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생활방식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만일 이방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을 위해 선교 활동을 벌였다면, 노동의 의무를 그처럼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노동을 삶의 자명성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비네르트가 한 말은 경청할 만하다. “그리스도 신앙이 유대교의 세계로부터 헬레니즘 세계로 밀고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노동의 의무를 언급할 필요가 생겼다.”
 노동에 대한 바울의 입장에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헬레니즘의 윤리적, 정치적 사상체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포노스(ponos)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수공업 노동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교 활동을 표현하기 위해 헬레니즘에서 경멸적으로 사용되던 코포스(kopos; 본래적 의미는 “육체 노동”)라는 낱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데전 2,9; 3,5; 데후 3,8; 고전 3,8; 고후 10,15; 11,23.27). 바울은 코포스라는 말로 교회봉사를 지칭하기도 했다(로마 16,12; 고후 10,15). 그는 코포스(노동과 고역)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길 때 “썩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기도 했다(고전 15,58).
 위의 성서 구절들이 시사하듯이, 바울에게서 코포스는 삶을 영위하고 주를 섬기는 활동들을 아우르는 총괄개념으로 승격되어 있다.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이 이분법적으로 엄격하게 분리되는 헬레니즘의 관념세계를 염두에 두면, 헬레니즘에서 힘든 노예노동을 가리켰던 코포스가 선교 활동이나 교회 예배의 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지칭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특이한 어법은 바울이 그 당시에 통용되었던 코포스 개념의 의미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취하고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바울에게서 코포스는 주 안에서, 그리고 주를 섬기는 일을 통하여 긍정되고 적극적으로 평가된다. 코포스에 대한 이와 같은 긍정과 평가를 전제하고서 바울은 힘든 노동을 하면서 기쁨을 누린다고 말했다(사도 20,24). 노동의 고역과 노동의 기쁨이 서로 얽혀 있는 엄연한 현실에서 그는 하느님의 축복이 임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왜냐하면 노동의 고역은 오직 하느님의 축복에 힘입어 삶의 성취에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하느님은 자라게 하셨다"(고전 3,6)는 바울의 말은 이를 잘 말해 준다.

1.3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서의 기본사상은 영이 깃들어 있는 몸으로서의 인간이 의식적으로, 책임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으로서의 노동이 하느님에 의해 긍정되고 축복되었다는 것이다. 유대교-기독교 전통에서 이와 같은 적극적인 노동관은 노동을 인간의 생활형성의 본질적인 구성부분으로 인정하도록 했다. 인간을 노동을 함으로써 삶을 유지하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 노동이 없다면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의 실현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자라게 할 수 있고 또한 기꺼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축복 아래서 인간은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며 노동을 한다.
 성서의 노동관에서 주목되는 점은 자신을 위한 노동과 돈벌이 노동의 구별을 부차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성서의 역사 가운데 한 단락을 차지하는 자급자족 지향적인 사회형태에서 교환관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생활활동은 당연히 돈벌이 노동에 대해 우위를 차지한다. 그러한 사회에서 노동은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공동체에서 협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활동이다. 성서에서 이러한 노동은 평등지향적인 사회에서 이루어졌다(참조: 출애굽기 21장 이하의 계약법전). 물론 이러한 노동형태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노동과정의 발전과 교환관계의 확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본래적인 노동형태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성서는 노동분업적인 사회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인간의 노동은 돈벌이 노동으로 조직되어 지배 및 착취관계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노동 업적의 산물로부터 노동자를 배제하는 것은 성서가 주목한 현실 문제의 핵심이었다. 성서는 자신을 위한 노동이 타인의 손에 의해 도둑질 당하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하고 돈벌이 노동은 지배와 착취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서는 자신을 위한 노동과 돈벌이 노동이 하느님에 의해 긍정되고 축복된 노동의 분화된 형식들로서 삶에 이바지하고 인간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에 의해 긍정되고 축복된 노동은 다음 세 가지 원칙들을 시사한다. 하나는 자신을 의한 노동과 돈벌이 노동을 통하여 삶을 꾸려나갈 인간의 권리를 승인하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의 손과 세력들로부터 노동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끝으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2. 생활상의 곤란을 회피하기 위한 노동

 노동을 통한 삶의 영위가 하느님에 의해 긍정되고 축복되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생활활동은 특정한 한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성서는 그 한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2.1 사제문서의 창조보도에 근거하여 필자는 이미 동료피조물을 위한 인간의 청지기 노릇은 노동을 통한 의식적인 생활영위로서의 도미니움 떼레에 대해 우위를 갖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로부터 이끌어지는 결론은 노동과정을 위한 자연의 활용은 피조물공동체의 질서의 틀을 손상시키지 않는 임계조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2.2 도미니움 떼레는 본래 증가하는 인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자신의 노동과정을 합리적으로 조직하여야 한다. 그것은 노동력 지출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고 노동 소재들의 사용을 가급적 줄이고 노동수단의 감가(減價)를 가급적 적게 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미니움 떼레는 인간의 욕망을 합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도미니움 떼레는 그 자체로서는 자기목적일 수 없다.

2.3 인간의 욕망은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생존을 위해서는 생물학적 욕구들이 무조건 충족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의식주가 해당한다.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욕구들이 존중되고 충족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자기발전과 사회적 친교, 상호간의 돌봄, 깨끗한 환경과 같은 더 큰 쾌적함, 더 많은 노동의 의미, 사회적으로 조직된 노동과정과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서의 더 많은 주체성 등이 속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원칙상 한계를 모른다. 인간의 욕망구조는 고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발명가적 정신은 전면적으로 발전하고 인간의 탐욕은 무한히 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것을 원할 수 있고 자신의 전면적인 탐욕을 충족하려고 들 수 있다.

2.4 만일 피조물공동체의 질서의 틀을 주목한다면, 무한한 탐욕을 충족시킬 수도 없고 충족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탐욕을 충족하려면 이론적으로 더 많은 부가 있어야 한다. 자연과 더불어 부의 원천을 이루는 노동과정의 속성을 감안한다면, 부의 증가를 위해서는 더 많은 노동력과 더 많은 자연이 활용되어야 한다. 노동력의 더 많은 지출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노동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의 더 많은 활용은 더 큰 문제거리이다. 왜냐하면 다른 생명체들의 생활공간들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자원의 용량과 자정 능력을 뜻하는 자연의 저장량은 급속히 고갈될 것이기 때문이다.

2.5 인간의 욕구를 지속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희소성의 개념을 고려하여야 한다. 노동력뿐만 아니라 노동수단도 희소하다. 자연도 원칙상 희소한 재화로 간주되어야 한다. 목적으로 달성하는 수단의 상대적 희소성에 주목한다면, 욕구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어떤 욕구들이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욕구들이 포기되어야 하는가?
 노동생산성을 상승시키고 자원을 절약하고 쓰레기와 배기가스를 감소시키는 기술 발전의 조건들 아래서 더 많은 욕구들을 인간존엄성에 부합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여지가 창출될 수 있다. 그러나 미래 세대를 위한 수단의 희소성을 고려한다면, 기술적 진보의 도움만으로는 점점 더 커지는 욕구를 지속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희소성의 조건들 아래서 욕구 충족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문제를 피할 수는 없다. 이 문제를 고려할 때 경제는 생활상의 곤란을 회피하는 수준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생활상의 곤란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욕구가 충족되고, 위에서 그 윤곽을 그린 바 있는,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조직된 노동과정 안에서, 그리고 환경파괴의 징후 아래서 삶이 위협받고 있음을 주목할 때,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욕구들의 충족은 사치가 아니라 생활상의 곤란을 회피하기 위한 절박한 과제이다.

2.6 이미 살펴보았듯이, 노동을 인간적으로 형성하고 경제를 생태학적으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생활상의 곤란을 회피하는 수준으로 제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으로 인간은 생활상의 곤란을 회피하는 데 아무 소용도 없는 재화들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노동을 함으로써 지칠 대로 지쳐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도록 노동을 형성하는 데 고려해야 할 원칙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재화를 생산하기 위하여 자연을 탕진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경제를 생태학적으로 형성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원칙이다. 경제의 목적을 욕망과 바람의 충족으로 규정하는 것은 추상적이다. 수단의 현재적인 희소성과 잠재적인 희소성을 염두에 두고서 경제의 목적이 구체적으로 규정되고, 분화되어야 한다.

III. 인간친화적이고, 사회친화적이고, 생태친화적인 노동의 형성을 위한 윤리적 원칙들 - 결론을 대신하여

1. 앞에서 논의된 바에 근거하여 생태학적 노동 개념의 기본 명제를 정리한다면, 하느님은 땅 위에서 자신을 대리하는 파트너로서의 인간에게 세계를 안식공동체로 규율하고 형성하려는 그 분의 의지를 존중하면서 삶을 위하여 의식적으로, 창조적으로, 책임적으로 노동할 것을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노동은 하느님에 의해 제정되고 긍정되고 축복된 인간의 생활 영위 방식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위하여 이러한 삶의 제도를 타락 이전에 제정하였고, 타락 이후에도 그것의 양가성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를 인간성의 기본적 표현으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노동을 수행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현존 권능 안에서 그 분의 통치 아래서 이루어지는 형성과정과 갱신과정에 있으며, 이 과정은 그가 속량되어 안식공동체의 일원이 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노동의 본질적인 징표는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 속에서 드러난다.

2. 인간적이고,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지향을 갖는 노동의 형성을 위한 원칙들을 제정한다는 것은 하느님에 의한 노동의 제정에서 밝혀지고 이 세상에서 노동과정을 형성하고 갱신하고자 할 때 조준해야 할 지향목표를 설정한다는 뜻이다. 이 지향목표로부터 노동 문제들을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규준들을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윤리적 판단 규준들을 밝힌다고 해서 특정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한 행위의 준칙들을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안식공동체를 향한 도정에서 노동이 취하는 형태들을 규명한 앞 절에서 필자는 이미 몇 가지 원칙들을 밝힌 바 있다. 이 원칙들은 두 가지 범주들로 나눌 수 있다. 한 범주는 인간의 노동과정과 관련되고, 또 하나의 범주는 자연과 관련된다.

3. 인간의 노동과장에 관한 한, 이 원칙들은 비록 부분적으로 중첩될는지 모르지만 다음과 같이 분류되고 정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3.1 노동은 인간이 주체로 존재한다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물론 노동한다는 것과 인간이 주체로 존재한다는 것이 동일한 뜻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주체성은 노동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받아들여 그 분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였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느님 앞에 설 때 성립된다. 이러한 인간의 주체적 지위는 노동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노동과정에서 중시되어야 할 인간주체성의 원칙이다.

3.2 인간의 주체성을 표현하는 노동은 함께 하는 노동이다. 함께 하는 노동의 본질은 동시대인들의 노동분업적인 협력에만 국한되지 않고 노동 업적의 피상속과 상속에까지 확장된다. 함께 하는 노동이 없다면 공동체 생활의 유지는 불가능하다. 개개인의 노동은 함께 하는 노동에 참여할 권리와 공동체의 유지에 이바지해야 할 의무를 포함한다. 노동 능력이 있고 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함께 하는 노동은 노동과정에 함께 영향을 미치고 공동으로 결정하고 함께 형성하는 원칙에 따라 조직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노동의 사회성 원칙이다.

3.3 하느님에 의해 긍정되고 축복된 바 땅 위에서 인간의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으로서의 노동은 인간의 생존을 확보하는 전제조건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실현할 권리는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 이 기본권리는 타인에 의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의 업적은, 공동체 생활과 협동적인 노동조건들의 발전을 위한 기여를 공제한 다음에는, 그 업적을 수행한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을 위한 정의의 원칙이다.

3.4 노동은 삶을 꾸리기 위한 인간의 활동이다. 발전된 경제에서 이 활동은 교환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 활동의 산물은 교환관계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바로 그러한 교환관계를 지향한다. 그러나 삶을 위한 활동으로서의 노동은 돈벌이 노동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돈벌이 노동이 노동분업적인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이 분명한 바로 그 만큼 돈벌이 노동이 교환관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생활활동의 모든 영역들을 덮을 수 없다는 것도 명료하다. 자기를 위한 노동의 고유한 가치는 노동분업과 교환관계의 보편성 때문에 인간의 활동 영역으로부터 추방되거나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 이 둘은 서로 보완되어 다양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삶의 각기 다른 상황들에 대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의 보완성의 원칙이다.

3.5 삶을 꾸리는 방식으로서의 노동은 몸과 영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전인적 인간의 활동이다. 성서의 인간학에서 보면,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의 분리, 손노동과 두뇌 노동의 분리는 허용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노동의 통전성의 원칙이다.

3.6 인간이 노동의 업적을 통해 삶을 꾸리고 공동생활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이 분명한 것처럼 인간이 노동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도 그 만큼 명료하다. 인간의 노동 업적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근거일 뿐이다. 노동 업적의 목표는 욕망의 충족이며,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생활상의 곤란을 회피하는 수준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의 자기제한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점점 더 희소해지는 환경의 역량을 고려해 볼 때 생태학적 의의를 갖는다.

4. 노동과정과 자연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앞에서 언급했던 몇 가지 원칙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되고 재정식화될 수 있다.

4.1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연은 영원히 하느님의 소유이며, 그 분의 주권 아래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삶의 근거로서 보존하고 활용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이 보존적 활용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절대적 지배권을 부여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자연은 하느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주장한다. 자연의 고유한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안식공동체의 형성과 규율에 참여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에 신실하게 머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보존적 활용의 원칙이다.

4.2 개방적이고 무제약적인 눈으로 볼 때 인간은 자연과 무한한 의사소통적 관계에 있다. 자연은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Mitwelt)로서 에너지-물질 대사를 통하여 서로 결합되어 있고 상호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은 다양한 생활공동체들의 광범위한 연관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 자연이 인간의 삶을 지속적으로 꾸릴 수 있게 하는 근거이다. 물론 자연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자연의 전체적 연관은 인간의 개입에 의해 쉽게 교란되고 손상된다. 경제와 노동과정을 조직할 때 인간은 쉽게 파괴될 수 있는 생태계의 다양성과 쉽게 교란될 수 있는 생태계의 균형을 의식하고 이에 적응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적응성의 원칙이다.

5. 이 두 가지 범주들은 그 목표에 따라 세 가지 집단으로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인간주체성의 원칙과 통전성의 원칙은 노동과정의 인간적 형성을 위한 원칙들로 볼 수 있으며, 이를 인간적인 것의 원칙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사회성의 원칙, 정의의 원칙, 보완성의 원칙은 노동과정의 사회적 형성을 위한 원칙들로 볼 수 있으며, 이를 가리켜 사회적인 것의 원칙이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자연의 보존적 활용의 원칙과 적응성의 원칙은 노동과정의 생태학적 형성을 위한 원칙들로 볼 수 있으며, 이를 생태학적인 것의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노동의 자기제한의 원칙은 인간학적 함의와 생태학적 함의를 함께 갖고 있다. 이 원칙의 양면적 성격은 이 원칙이 노동 문제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원칙들의 체계에서 특수한 지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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