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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 Won-Don's Social Ethics Article Archive

2004/10/14 (20:54) from 211.237.213.188' of 211.237.213.188' Article Number :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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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민중 - 제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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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민중
- 제국은 없다

강원돈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윤수종 역, 이학사 2001)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뒤에 한국 인문사회학계는 이 문제작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지난 9월 초에 열린 맑스코뮤날레의 쟁점토론회에서는 오늘의 세계를 제국주의의 침략과 약탈이 강화되는 단계로 볼 것인지, 제국의 탄생과 발전 단계로 볼 것인지를 놓고서 손호철과 정성진을 한편으로 하고 조정환과 윤수종을 또 다른 한편으로 하는 두 의견 집단들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만일 앞의 견해를 취한다면, 오늘의 민중운동은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국지적 투쟁으로 전개되어야 마땅하고, 이 경우 영토국가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거꾸로 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제국의 지배는 대중을 “훈육”하고 “통제”하면서 지구적 차원에서 실현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민중운동은 제국의 내파를 위한 지구적 차원의 저항으로 전개되어야 하고, 영토국가를 전제하는 저항의 전략은 공허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나는 ‘제국’을 둘러싼 논쟁이 민중운동의 진로와 민중주체성 구성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글에서 우선 『제국』의 논점들 가운데 몇 가지를 검토하고, 그 다음 ‘제국’의 탄생을 운위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민중해방의 전망과 주체 문제를 나름대로 제시해 보려고 한다.

I.

 네그리와 하트의 핵심 논점은 오늘의 세계에서 제국주의는 끝났고 ‘제국’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제국’은 자본의 대외적 팽창과 실질적 포섭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고, 이 과정의 완성에 대응하는 ‘주권’ 형태이다. ‘제국’은 금융, 생산, 분배, 소비의 지구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네트워크 권력’이다.
 
 1. 이 네트워크는 자본의 이윤을 위해 작동하는 일종의 자동기계이다. 이 자동기계는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자연히 자본과 노동의 결합을 전제하지만, 경제의 지구화가 실현된 오늘의 네트워크 경제에서 노동력은 그 이전 시대와는 다른 형태와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포드주의 이전의 숙련노동력도 아니고, 포드주의 시대의 기계화된 노동력도 아니다. 네트워크 경제에서 노동력은 생산 부문과 재생산 부문을 통합한 ‘사회화된’ 노동력이고, 정보 기술의 발달로 인해 고도로 ‘정보화된’ 노동력이다. 네트워크 경제의 중심은 발전된 기술체계이며, 그 주변에 노동력이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유연하게 배치된다. 그리고 네트워크 경제가 자동기계처럼 작동할 때 한편에서는 엄청난 부가 축적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가난과 비참이 축적된다. 네트워크 경제에서 배제되어 생존의 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는 네트워크 경제의 “훈육”과 “통제”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강박을 낳는다.
 
 2. 자본의 논리에 따라 형성된 네트워크 경제는 단지 자본의 요구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네트워크 경제는 포드주의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자본의 전략에서 비롯되었고, 이것은 포드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항에 대응하는 자본의 반작용이었음을 의미한다. 노동의 저항과 이로 인한 축적 위기에 대한 자본의 대응은 오직 국가를 자본의 권력으로 못을 박는 신자유주의적 개혁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실효를 거둘 수 있었다. 국가는 네트워크 경제의 요구에 따라 자본시장의 자유화와 상품 무역의 자유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법제화하는 데 앞장섰고, 노동 권력을 무력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를 통해 네트워크 경제에 상응하는 주권의 합성을 실현했다. ‘제국’은 바로 이러한 주권 합성의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진 네트워크 권력이다.
 
 3. ‘제국’의 주권은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다. 피라미드의 최상층에는 지구적 차원에서 군사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초강대국과 그 동맹세력인 G8 강대국들, 그리고 이들의 규율을 받으며 지구적 차원에서 군사, 정치, 경제, 금융, 무역 등을 지배하는 초국적 네트워크 기구들(이를테면, NATO, IMF, WTO, WB, 국제결제은행 등)이 있다. 이들이 ‘제국’의 통합을 실현하는 세력이며, 그들을 움직이는 정치원리는 “군주제”이다. 피라미드의 중간에는 네트워크 경제의 핵심 에이전트인 초국적 기업들과 지역경제블럭 등이 있다. 이들은 ‘제국’의 허리이며, ‘제국’의 명령을 전파하고 구현한다. 이들을 움직이는 정치원리는 “귀족제”이다. 피라미드의 하층을 이루는 것은 ‘제국’의 명령을 전파하는 국민국가들, 국민적 차원의 미디어와 종교 기구들, 시민단체들이다. 이 기구들은 국가시민을 대변하고, 그 자체로서는 민주주의적 정치원리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제국’의 명령과 국가시민의 ‘요구’ 사이에서 심각한 분열을 경험하는 국민국가를 제외하고서 미디어, 종교기구, NGO 등은 지역, 국가, 세계를 넘나드는 담론을 형성할 능력도 있다. 그러나 이들 장치들이 포섭하는 것은 국가시민의 지위를 가지는 사람들이지, 네트워크 경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들을 people로 규정했다. 여기서 용어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네그리와 하트는 people이 국가에 포섭된 국가시민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와 구별해서 자본의 포섭 대상이 되는 무리를 지칭하기 위해 proletariat 개념을 설정하고, 노동조합이나 좌파 정당에 의해 조직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가리키기 위해서 multitud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말 번역본 『제국』에서 people을 “민중”으로, multitude를 “다중”으로 옮기고 있는데, 나는 people을 그냥 국민으로 번역하고 multitude를 무리 내지는 민중으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내 글에서 “민중”이라는 용어는 『제국』의 우리말 번역본과는 다른 뜻으로 쓰인다.)

 ‘제국’의 주권은 따라서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의 중층적 혼성과 절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고대 로마 제정의 권력 구조를 빼박은 것처럼 닮았다. 문제는 ‘제국’의 현실에서 군주의 명령과 귀족의 이익에 대항하는 평민들의 민주적 요구를 국민국가 차원에서 실현할 수 없다는 데 있다.

 4. 자본의 외적 팽창과 실질적 포섭을 완성한 네트워크 경제와 이에 상응하는 ‘제국’은 더 이상 바깥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당연히 중심도 없다. ‘제국’은 제국주의 세력으로 인식될 수 없다. 따라서 ‘제국’은 제국주의 세력 바깥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하는 식민지 민중의 해방 운동을 통해서 타도되지 않을 것이다.
 ‘제국’이 포드주의 체제에 대한 노동의 저항과 축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창설되었다는 것이 분명한 것처럼, ‘제국’이 네트워크 경제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항에 의해 해체될 것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제국’이 시작을 갖는다면 그 끝도 있을 것이다.
 ‘제국’이 외부를 갖지 않는다면, 그 ‘제국’은 내파(內破)를 통해서만 붕괴될 것이다. ‘제국’은 그 내파를 피하기 위하여 ‘제국’의 신민들을 “훈육”하고 “통제”할 것이다. 노동의 규율을 신민들의 몸에 새겨 넣어서 “생체권력”(M. Foucault))을 강화할 것이고, 판옵티콘(panoptikon)을 방불케 하는 통제장치를 정교하게 만들어낼 것이다. 신민들을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분산시키되 서로 통합되어 있다는 이미지를 연출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스펙타클 사회”(Guy Debord)의 정치이다. 따라서 ‘제국’의 내파를 시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통합의 외관에서 틈을 찾아내고 고립과 분산으로부터 단결과 연대로 나아가려는 대항운동을 조직해야 한다.
 그 대항운동이 조직되는 곳은 ‘제국’의 지배가 나타나는 모든 곳이다. ‘제국’은 중심을 갖지 않지만, 지구 전체에 미만해 있다. '제국'은 특정한 장소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어디에도 없는 곳”(utopia=non-place)에 있고, 신민들이 그들의 적을 식별하지 못하도록 분산시켜 놓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항운동은 지구적 차원을 갖는다. 제국의 상층부를 통하여 지령되는 위로부터의 지구화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하는 아래로부터의 지구화로 인해 분쇄되고, 저항운동은 저항의 지구적 네트워크로 나타난다.
 이러한 저항운동을 조직할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도 오늘의 노동력이 “사회화”되고 “정보화”되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저항운동이 공장 중심의 프롤레타리아트 운동과 그 정치적 조직화 운동으로만 전개될 수 없고, 생활세계적 요구를 수렴하는 사회적 차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이 신민들을 “훈육”하고 “통제”하는 장치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훈육”과 “통제”를 무력화하는 구호와 실천이 필요하다. “전지구적 시민권”, “사회적 임금권”, 기술체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주권이 그것이다. 자본의 전능성에 대항해서 노동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자본의 착취에 대항해서 노동자들의 협동을 구현하고, 자본의 소유권 주장에 대항해서 소유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요구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II.

 위에서 살펴본 네그리와 하트의 주요 논점들은 많은 점에서 시사적이지만, 나는 ‘제국’이 완성된 실재라고 보지 않는다. 나는 ‘제국’이 네트워크 경제에 대응하는 주권 합성의 한 경향을 그리고 있는 하나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밝히면 다음과 같다.

 1. 네그리와 하트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 논자들은 ‘제국’이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뒤에 매우 빠른 속도로 형성되고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군사정치적 헤게모니가 지구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가운데 금융, 생산, 분배, 소비의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짜이고, 이를 관장하는 지구적 지배 체제가 성립되고 있는 것을 보고서 ‘제국’의 도래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라크, 이란, 북한을 가리켜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의 2002년도 연두교서나 9·11 테러 이후에 진행된 이라크 전쟁 등은 ‘제국’의 탄생을 속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웅변한다. 이라크 전쟁이 이 지역 석유를 지배하고 약탈하기 위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탈이라고만 규정하는 것은 사태의 전모를 보지 못한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중동 석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유럽연합의 패권 형성을 좌절시키는 열쇠를 얻고자 했다고 분석하는 것이 더 정확한 인식일 것이다. 미국의 북한 정책은 미국의 군사정치적 패권과 경제적 패권에 대한 중국의 잠재적 도전을 봉쇄하고자 하는 계획과 맞물려 있다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란과 러시아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하면, 이란에 대한 미국의 적대 정책이 어떤 이유에서 추진되는가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미국의 군사정치적 패권이 심각한 도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미사일방어 체제 구축 강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천문학적 군사비를 퍼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미 군사력이 이라크, 이란, 북한 등과 같은 약소국을 침공할 정도에 불과하다는 냉소적인 지적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에마뉘엘 토드). 이라크와 이란과 북한은 그 배후에 있는 거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본의 팽창과 실질적 포섭이 자본의 권력에 의해 자동적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자본이 진출해서 활동하는 바로 그 자리에 그 자본을 보호하는 폭력이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자본의 외적인 팽창과 실질적 포섭의 완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완성된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군사정치적 패권이 지구제국의 기반으로서 현존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의미의 지구제국이 아직 성립되지 않았다고 본다.

 2. 지구적 차원에서 군사, 정치, 경제, 금융, 무역 등을 관장하는 초국가적 기구들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움직이고 있다. 물론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질서에서는 그 이전에도 강대국들 사이의 정치적 합의가 괴력을 발휘하곤 했다. 1985년의 플라자 합의 이후 환율절하를 강제당한 일본이 미국에게 약탈당한 부가 약 8조 엔에 달한다는 것은 그 좋은 실례이다. 1990년대에 들어 와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더 두드러진다. 1990년대 초에 국제결제은행의 은행건전성 기준 변경으로 인해 일본의 금융 시스템이 붕괴될 정도에 이르렀다든지, 1995년 WTO가 발족한 이후에 국제 무역 규범의 제정을 통해서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과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자, 농민이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또 다른 본보기이다. 외환위기에 직면한 국가들에 IMF가 신자유주의적 네트워크 경제를 위한 개혁조치들을 강제한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초국가 기구들 안에서 국민국가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조정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네그리와 하트가 인정하듯이, 국민국가는 한편으로는 지구적 네트워크의 명령을 관철시키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시민들의 대의 기구로 작동한다. 이로 인해서 국민국가의 대표들은 국제기구들에서 분열적 사고와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분열은 지구적 지배 체제를 안정시킬 수 없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지구적 네트워크 권력에 대한 저항에서 국민국가적 차원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설사 지구적 명령 체계에 순응하는 국가가 이에 저항하는 민중을 폭력에 의해 잔인하게 억압한다 할지라도, 민중에 대한 억압은 항시적인 장치일 수 없다. 지구적 네트워크 경제에 편입된 사회들에서는 경제논리가 정치의 자율성을 구축하는 현상이 극심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경제적 이해관계들을 조정하기 위한 정치의 필요성은 그 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다.

 3. 만일 ‘제국’이 지구적 네트워크 형성에 상응해서 형성되는 주권 형태의 한 경향이고, 아직 ‘제국’이 완성된 실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제국’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은 그 실체가 없을 수 있다. ‘제국’으로부터의 “탈주”와 “노마드적” 생활양식에 대한 관심은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지구적 네트워크 안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자본과 노동의 갈등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생활세계의 미시 정치에 몰입하도록 만들 수 있다.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 조직되고 있는 세계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문제로부터도 쉽게 관심을 돌리게 할 수도 있다. 나는 자본의 권력이 추구하는 “훈육”과 “통제”에 대한 저항이 생활세계에서 다양하게 전개되고, 개개인의 차이와 욕망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포스트 사회의 형성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포스트 사회가 ‘유토피아’(non-place)에 대한 헛발질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도리어 지구 네트워크와 그 지령을 관철시키는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 첨예하게 갈등하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해결할 때 의미 있게 실현된다는 것이다.

III.

 오늘의 세계에서 거칠고 폭력적인 제국주의적 지배와 침탈이 자취를 감추고 ‘제국’의 세련된 지배와 통제가 실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지구적 네트워크 경제가 그것의 안정적인 작동을 위해 지구적 지배 체제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도 확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사회적이고 보다 생태친화적인 생활세계를 꾸리고자 하는 민중운동의 전략을 모색하고, 운동주체의 구성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1. 오늘의 세계에서 미국의 군사정치적 패권을 저지시키기 위한 반전 평화운동은 위로부터의 지구화를 억지하는 매우 중요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에 대한 반대 캠페인은 ‘제국’의 출현을 봉쇄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반전 평화운동은 자본의 팽창과 포섭 수준이 대외적인 군사정치적 폭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분명한 지향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군사정치적 폭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네트워크 경제는 침략국가와 피침탈국가 모두에서 민중의 삶을 피폐시킨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2. 만일 ‘제국’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고 한다면, 그 형성 과정을 저지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지구적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규범들이 결정되는 곳에서 의사결정 과정에 압력을 가하여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결정을 좌절시키고, 지구적 차원에서 민중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대안적 지구화의 구상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된 민중투쟁의 기록은 매우 길다.
 위로부터의 지구화에 대항하는 민중의 투쟁은 1995년 멕시코 사파티스타 봉기에서 선도적인 형태를 취했고,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총파업, 1996/97년 한국에서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항해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주도한 총파업, 1998년 MAI(다자간투자협정) 저지투쟁 등으로 이어졌다. 1999년 시애틀에서는 WTO 각료회의에 맞서서 전세계 노동자-민중의 연대투쟁이 벌어져 뉴라운드 출범을 저지했다. 시애틀 투쟁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제적 동원투쟁의 전형을 창출하였다고 평가되며, 2000년 워싱턴, 멜버른, 프라하, 서울, 2001년 퀘벡, 제노바, 2002년 바르셀로나 등지에서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WTO 각료회의 결정에 반대해서 자결한 이경규 씨의 투쟁은 이러한 운동의 연장선장에서 파악될 수 있다. 지구적 네트워크의 핵심 에이전트들의 모임인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에 대항해서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개최된 세 차례의 세계사회포럼은 대안적 지구화를 구상하는 중요한 장이 되었고, 2002년 유럽사회포럼, 2003년 아시아사회포럼과 아프리카사회포럼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운동들에서 우리는 지구적 차원에서 네트워크 경제가 하나의 추세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자본의 논리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지구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민중의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경제논리는 사회논리와 균형을 맞추어야 하고, 이러한 균형을 위해 정치가 복원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위로부터의 지구화에 맞서는 양보할 수 없는 구호이다.

 3. 따라서 지구화 과정의 필연성을 전제하면서 지구적 차원의 지배 기구들의 강화에 맞서는 투쟁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배척하고, 심지어 국민국가를 중심에 설정하려는, 근대성에 매몰된 운동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지구적 네트워크 경제를 규율하는 기구들을 민주화해서 민중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민중적 국민국가를 형성하고 이 국가를 움직여서 민중의 이익을 국제기구들에 반영하고자 하는 것이 민중운동의 전략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국가주의적 발상이 아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국제기구들을 구성하는 국민국가들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은 허황된 일이다.
 국민국가의 민중 통제는 국가 기구를 통하여 지구적 네트워크의 명령을 관철시키는 것을 저지시킬 수 있는 강력한 장치이다. 유럽의 좌파 정권들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대행자로 전락한 것은 국가가 민중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독립적 실재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되고, 민중의 정치는 고사한다. ‘제국’의 형성을 좌절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을 고립시켜야 하고, 이를 위한 가장 강력한 기제는 민중 정치의 활성화이다.

 4. 민중 정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고립·분산시키는 장치들을 철거하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 네그리와 하트의 논점들 가운데 네트워크 권력이 “훈육”을 잔존시키는 가운데 “통제”를 강화한다는 지적은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의 민중은 개인화의 압력 아래 놓여 있고, 생활세계와 그 하부체계들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개별적 차원에서 풀고자 하는 경향을 시나브로 갖기에 이르렀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하는 개개인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나타나고, 연봉제를 통해서 직장내 노동시장이 분단되고 노사교섭의 개인주의화가 진행되는데, 민중이 이 문제에 개인적으로 대처할 뿐, 제도와 구조를 변경하고자 하는 집단적 운동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은 민중의 개인화 경향을 알려주는 작은 실례에 지나지 않는다.
 민중의 개인화 경향은 멀티미디어를 통해 현실을 이미지로 경험하게 만드는 “체험사회”에서 더욱더 강화된다. 실제로 고립·분산되어 있는 개개인들은 이미지 조작을 통해서 통합되어 있다는 환상을 갖는다. 이것이 “스펙타클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화 현상의 특징이고, 그 본질은 타자로부터의 소외, 자기로부터의 소외이다. 나는 예컨대 붉은 악마의 함성을 들을 때, “얼짱”, “몸짱” 등의 기호를 볼 때, 이미지를 통한 사이비 통합이 우리 사회에서 매우 크게 진척되었다는 것을 인식한다.
 사이비 통합으로부터 진짜 통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미지와 환상(illusion)에 대한 문화 투쟁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지와 환상을 통해 현실이 거꾸로 뒤집어져서 나타났다고 가르치는 인지적 의식화 교육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생활세계와 그 하부체계들에서 나타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고 다같이 조금 더 큰 이익과 편익을 나누는 실천을 다양하게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실천은 교육과 입시, 미디어, 여성 권익의 신장과 가부장제 문화의 해소, 환경보호, 도농간 협력과 교류, 지역사회 운동, 작은 것을 함께 나누는 운동, 인종차별 철폐 등 이제까지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것 뒤에 숨어 있는 비정상성을 시정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으로 표출될 것이다. 민중의 공동체적 성격은 이러한 실천 과정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될 것이다.

 5. 네그리와 하트가 제안한 아우또노미아 운동은 설사 ‘제국’의 미완성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다. 전지구적 시민권을 요구하고, 사회적 임금을 제도화하고, 기술체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주권을 실현하는 것은 ‘제국’의 성립 여부를 떠나서 언제든 요구되어야 한다.
 지구적 차원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서 노동력의 “노마드적” 이동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역에 묶인 노동자들은 독수리 같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자본의 공격을 받아서 프로메테우스 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면, 자본이 지구적 차원에서 최적 배분될 수 있는 장치가 빠른 속도로 마련될 것이다. 자본이 집중되어 붐이 일어나는 곳에 노동력이 몰려들어 혼란을 겪는 것보다는 지구적 차원의 마셜 플랜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자본의 대변자들이라고 해서 모를 리 없다.
 자본의 축적을 위해 노동절약적 합리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적어지는 일자리를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의 처지를 함께 나누는 것도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노동 능력이 있고 노동 의욕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최적 분배하는 제도가 만들어져야 하고, 생산노동에 종사할 기회를 가졌거나 단지 재생산 노동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노동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조차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본 소득(* 네그리와 하트는 이를 가리켜 “사회적 임금”이라고 했다.)이 부여되어야 한다.
 자본이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문명사회에서 자본의 다양한 현상형태들이 노동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늘의 세계를 야만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야만의 시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동으로부터 자본이 독립해서 노동을 지배하는 일이 극복되어야 하고, 자본지배의 기반인 소유권 제도가 개혁되어야 한다. 시장 지배와 초과 이윤의 원천이 되고 있는 지적 재산권 제도를 철폐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야 자본의 현상형태들에 대한 노동의 통제와 자유로운 접근이 보장될 것이다.
 문제는 네그리와 하트의 이러한 선진적인 제안들이 모두 국민국가를 전제하고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6. 앞에서 말한 것에 근거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지구적 네트워크 경제가 발전되고 국민경제와 기업이 지구경제와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중 주권을 강화하는 일이고, 그 핵심은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은 시장이 존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시장경제의 이 기본 문제를 은폐하거나 이 문제의 뇌관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무모하고 무익하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규율하기 위해서는 기업, 지역경제, 국민경제, 블록경제, 지구경제 차원에서 자본과 노동이 대등하게 참여하여 함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고 이를 제도화해야 한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민중은 각각의 경제 수준에서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추구하고, 각 수준에 맞는 연대 운동을 유연하게 조직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기술적인 연구는 여기서 다 서술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노동과 자본의 결정이 생활세계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투쟁이 경제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자본의 공세에 힘 있게 맞설 수 있으려면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 생활세계와 그 하부체계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민중 운동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네트워크는 생활세계와 그 하부체계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들이 노동과 자본의 해소될 수 없는 모순을 매개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지구화 과정에서 민중 주권을 실현하려는 운동 패러다임은 다양한 운동들의 네트워크이다. 그러나 그 네트워크는 지구화 과정을 꿰뚫고 있는 노동과 자본의 모순, 그리고 이 모순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표현형태들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할 것이며, 이 모순을 해결하는 가운데 경제, 정치, 문화 등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정교한 전망을 제시하여야 한다. 성차별, 인종차별, 세대차별을 계급 차별과 별도로 다루는 입장은 결실을 맺을 수 없지만, 이러한 문화적 문제들을 계급 문제로 환원하는 태도는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운동 노선을 정립할 수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민중 문제가 경제, 정치, 문화 차원에서 매우 다양한 외관을 취하겠지만, 민중이 자본의 팽창과 실질적 포섭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 민중의 주체성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대상의 처지를 극복하고 자본에 대한 주인의 지위를 확보할 때 민중은 역사와 사회와 생명의 주체로 굳게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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