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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1 (00:48) from 211.41.223.62' of 211.41.223.62' Article Number :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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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실천철학의 노동 개념에 대한 기독교 노동윤리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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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실천철학의 노동 개념에 대한 기독교 노동윤리의 평가

강원돈

 사회생활의 조직원리로서 노동과 의사소통을 분리하는 관점은 그리스 철학의 고전 모델에서 비롯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나 아렌트와 위르겐 하버마스에까지 이어진다. 노동과 의사소통의 분리는 이론적으로 훌륭한 이유를 내걸고 구상될 수 있으나, 많은 경우 특정한 사회형태에서 나타나는 노동의 특정한 현상 형태를 반영하거나 이를 일반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분리적인 사고 유형은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으로부터의 노동의 소외를 제도적으로 고착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고, 그 소외에서 비롯되는 노동 위기의 본질을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노동과정을 인간화하고, 노동하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의 주체로 나서기 위해서는 노동과 의사소통의 분리에 터를 잡은 실천철학의 전통이 비판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 나는 1) 노동과 의사소통을 분리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을 분석하고, 2) 한나 아렌트가 시도한 실천철학의 현대적 버전을 분석하고, 3) 위르겐 하버마스에게서 정교하게 체계화된 노동과 의사소통의 동일철학적 이원화를 분석한다. 그 다음에 나는 4) 기독교 노동윤리의 판단 규준들을 갖고서 노동과 의사소통의 실천철학적 분리 모델을 평가한다.

I.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타난 노동과 의사소통의 실천철학적 분리

 그리스 철학에서 발전된 노동과 의사소통의 고전적 분리 모델을 규명하기 위해서 나는 이 주제와 관련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에 집중할 것이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 유형을 분석함으로써 한나 아렌트와 위르겐 하버마스가 발전시킨 실천철학의 핵심적인 근거를 해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1. 노동 문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찰은 자유와 필연성의 대립을 지양하려는 그리스 종교의 뿌리와 맞닿아 있으며, 인간이 덕을 추구하는 전제조건으로서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한 철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노동(ponos)은 개개인의 생존을 보장하고 정치 공동체의 물질적 유지를 위해 필요하고 유용하다. 그러나 노동은 도덕적인 생활과 정치적인 책임에 필수불가결한 자유의 부정에 불과하다. 도덕과 정치는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인식하고 현명성(phronesis)에 근거하여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생활로 나아가는 자유로운 행위(praxis)를 필요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을 자유의 전제조건으로 설명함으로써 이와 같은 자유와 필연성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한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자유가 노동의 필연성 너머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자유민은 노동 활동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민이 생활에 필요한 노동 활동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그 노동 활동은 비자유민들, 곧 노예들에게 부과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시민들의 자유는 이론적으로 다른 인구 집단의 자유가 시민들의 자유를 위해 희생될 경우에만 가능하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이 노예제 사회를 그 본질적 구성부분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2. 자유 시민들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행위(praxis)는 노동(ponos) 일반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제작(poiesis)과도 구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의 구별은 기예(techne)와 현명성(phronesis)의 구별만큼이나 중요하다. 기예는 대상에 관련된 정확성을 요구하고 물건을 정확하게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과제를 달성한다. 제작은 수공업자가 설정한 목표를 기술적으로 달성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제작은 그 목표를 그 자체 안에 갖고 있지 않다.
 기예와는 달리 현명성은 행위를 이끌어 가는 원칙들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목표로 한다. 제작과는 달리 행위는 인식과 삶이 서로 통일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 목표는 행위 바깥에 있지 않고, 행위 안에 있다. 목표가 행위 안에 있다면, 행위는 도야과정이며, 목표 또한 과정적 성격을 갖는다. 회페에 따르면, 바로 이 차이가 “구조적으로 상이한 두 활동들의 근거가 된다. 하나는 물건을 만드는 기술적 활동, 곧 제작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활동하고 있음 그 자체에 그 의미를 갖고 있는 활동, ‘내재적 활동’(actio immanens), 탁월한 방식으로 행위라 일컬어지는 활동이다.”
 
 3. 노동 및 제작과 구별되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의 제도적 조건은 정치공동체(polis)이다. 거기서 자유 시민의 행위는 상호 인정의 요구 앞에 선다. 폴리스 안에서 시민들은 “공적인 인정(認定), 화폐, 기타 가치의 분배”에 관련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 관계의 규율”에 관련되는 정의의 원칙에 따라 공동생활을 규율한다.
 인정과 정의의 요구로부터 이끌어지는 결론은 도덕적 행위와 정치적 행위가 이미 주어져 있는 활동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적이고 합의 지향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공동체 생활을 위한 새로운 규범과 법의 제정은 시민들의 합의에 근거한다. 도덕과 정치의 가능근거는 폴리스의 틀 안에서 시민들이 발휘하는 의사소통 능력, 따라서 합의 능력이다.

 4. 이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 생활을 의사소통에 근거하여 규율하는 데 노동과 기예가 차지하는 몫을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은 생활의 필요에 묶여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기술은 그 자체의 도구적 성격 때문에 도덕과 정치의 의사소통 공동체로부터 배제된다.
 따지고 보면, 기예를 의사소통 공동체에서 배제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 합리성이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원칙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언은 기본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노동은 인간적인 것(humanum)의 표현으로서 의사소통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동물이 아니라, 행위주체로서 함께 일하고 함께 의사소통을 나누는 인간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외시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주어진 노예 소유제 사회를 인정하고 거기서 나타나는 노동 형태에 그 어떤 도덕적, 정치적 의미도 부여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노동자가 노동과 제작을 통하여 사회 전체의 결속을 위한 물질적 근거를 창출하는 데 이바지한다는 것을 최소한 인정한다면, 사람들은 노동자가 자신의 공헌을 인정받기 위해서, 그리고 재화의 정의로운 배분에 참여하기 위해서 도덕과 정치의 의사소통 공동체에 당연히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논리를 따른다면, 사람들은 노동자를 완전히 도외시하고 정의의 원칙을 제정하고 그 원칙에 따라 공동체를 규율하는 방안을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논의하여야 한다는 데서 이론적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실로 노예 소유주를 위한 아름다운 정의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여가를 즐기면서 노예를 부리는 소수의 귀족들이 한편으로는 농민들의 해방에 대항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수공업자들의 정치적 세력화에 대항해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현실정치적인 수단이었다. 노동하는 노예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일단 제쳐 둔다 할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수공업자들조차 경멸조로 “예술 감각이 없는 속물들”이라고 불렀던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사람들은 여기서 “노동에 대한 모든 지배 계급의 원초적 불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II. 생물학적으로 축소되고 의사소통과 분리된 한나 아렌트의 노동 개념

 기이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한나 아렌트의 사회철학에서 현대적 버전을 얻는다. 그녀는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대어 무엇보다도 맑스의 노동 철학과 공업적 노동사회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식에 따라 노동, 제작, 행위를 서로 구별한다.

 1. 그녀가 보기에 노동은 “자연과의 신진대사”, 곧 “생활의 생산”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로서의 노동과정을 인간학적으로, 더 나아가서는 부분적으로 생태학적으로 인식한 맑스와는 달리, 아렌트는 이를 단지 생물학적으로 해석한다. “생물학적 신체 과정과 성장과 사멸의 세계 과정에서 공통적인 것은 둘 다 자연의 순환과정의 일부분이고, 따라서 영원한 반복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이 자연과정에 맞서야 할 필연성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활동은 따라서 자연의 순환과정에 묶여 있다.”
 그녀에 따르면, 노동은 이 생물학적 생활과정을 위해 생산물을 조달하고 소비하는 영원한 반복이다. “이 순환과정은 무엇인가를 먹어치움으로써 보존된다. 이 소비의 수단을 조달하는 것을 일컬어 노동이라 한다.” 노동은 생활과정의 필연성에 묶여 있는 “일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의 과제이다. 이 일하는 동물의 노동 활동을 이끌어 가는 모티브는 생산성이다.

 기이하게도 아렌트는 노동에서 사물의 보존이라는 모티프를 보지 않고 사물의 파괴라는 모티브만을 본다. “노동은 소비와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는 먹어치움이다. 거기서는 물질이 변화되지 않고 파괴된다. 노동이 ‘물질’에 각인하는 형태는 단지 임박한 멸절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그녀는 서비스 활동을 일단 제쳐 둘 경우 노동과정이 종결되면 노동이 생산물에 응결된다는 점을 무시한다. 노동과 소비 사이에는 생산물에 상대적 지속성을 부여하는 노동의 대상화라는 본질적 과정이 있는데도 말이다.

 2. 그러나 아렌트는 이와 같은 “객관적 대상성”을 노동과 결코 연결시키지 않고, 오직 제작과 연결시킬 뿐이다. 노동과는 달리 제작은 사물의 대상적 지속성을 이용하거나 예술가적으로 향유하기 위하여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염두에 두는 제작인(homo faber)의 몫이다. 생활의 곤궁을 염려하고 생산성 추구에 의해 이끌리는 노동자와는 달리 수공업자는 앞에 놓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서 무엇이 유용한가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작을 이끌어 가는 모티브는 유용성이다. 그러나 제작은 “자기목적”을 자기 안에 갖지 않으며, 활동의 “자기목적”이 어디 있는가도 제작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술관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들임으로써 현대 사회에서 기술적 합리성 원칙을 지향하면서 공리주의적 유용성 계산을 보편성으로 관철시키는 어떤 기준을 비판하고 있으며, 그 비판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당연히 목적에 이바지함 자체도 아니고,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의 사용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제작자에게 타당한 경험들의 일반화이다. 이 일반화에서 유용함과 유용성은 인간의 삶과 세계를 규율하는 본래적인 기준이 된다.”

 3. 아렌트에게서 정치는 노동과 제작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공공적 관심사이다. 그녀는 정치 영역이 “상호 관계, 곧 말과 행위에 ‘서로’ 참여하는 데서 직접” 발생한다는 그리스적 이념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행위는 우리가 공동으로 거주하는 세계의 공공 부문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공공 공간을 처음으로 창출한 활동이다.” 바로 여기서 아렌트의 일반화 명제가 도출된다. “하나의 현상 공간은 사람들이 행위하고 말하며 서로 관계를 맺는 곳에서 탄생한다. 그러한 공간은 일체의 명시적 국가 건립과 국가 형태에 앞선다. 그 공간은 그때그때마다 국가 건립과 국가 형태로 형성되고 조직된다.” 노동과 제작과는 달리 말하고 행위하는 일은 상호관계, 옹호관계, 배척관계를 갖는 “행위 주체의자기 계시”와 관련된다. 바로 이것이 의사소통 행위로서의 정치의 가능 조건이다.
 아렌트는 정치의 필요성을 행위 결과들의 “불가 예측성”과 “불가역성”을 극복하고, “권력 현상”을 통제하는 데서 찾는다. 그러나 정치의 이 두 과제들은 규범과 법의 제정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와 아이덴티티와 미래를 보증하는 “약속”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다.  행위 주체의 주권성과 인간의 자유는 이를 통해서 보장된다. 그러므로 아렌트가 “서로간의 약속”을 뜻하는 일관성을 정치생활의 최고 덕목으로 선언하는 것은 논리적이다.

 4. 아렌트는 정당하게도, 그리고 훌륭한 이유들을 내걸며, 생산성의 추구와 유용성의 기준에 의해 각인된 공업사회에서 상실될 위험에 처한 정치의 복원을 요구했다. 현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윤리적 행위와 기술적 지식의 분리이고, 이로 인하여 정치적 공간이 점차 좁아지고 있다는 그녀의 진단은 날카롭다. 정치가 생산성 향상, 유용성 계산, 기술적 합리성의 원칙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의사소통 행위의 원칙들에 의해 구성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기본 명제는 근본적으로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모조리 배제하고서 공동체를 함께 규율하는 정치는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범에 따르는 아렌트는 이 모범을 다소 수정해서 노동, 기술, 의사소통을 서로 구별하지만, 그녀의 이론은 이 셋을 올바르게 결합시키는 데 실패한다. 왜냐하면 정치 행위는 언어와 행위를 통해 계시되는 중간 공간에서 전개되지만, 그녀의 규정에 따르면 이 중간 공간은 노동과 기술을 증발시킨 다음에야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적에 대한 수단의 효율적 조직을 목표로 하는 기술 절차가 의사소통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노동이 본질적으로 의사소통과 무관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노동과 의사소통의 분리는 아렌트가 노동을 생활의 필연성에 의해 인도되는 노동하는 동물의 반복적인 활동으로 생물학적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것은 전적으로 오류이다. 내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며 말했던 것이 아렌트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아렌트는 노동이 행위 주체로서 등장하여 말하고 행위하는 인간에 의해 수행된다는 노동의 인간학적 차원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노동을 할 때 개개인이 “노동 집단”으로 해소된다는 그녀의 서술은 한편으로는 노동자 집단과 노동자 운동에 대한 냉혈한(冷血漢)의 평가이다.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집단으로 결성하지 않고서 자본의 권력에 맞서서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길이 있기나 한가? 또 다른 한편으로, “노동 집단”에게서 개인의 주권적 행위가 결여되었다고 꼬집는 아렌트는 노동자들이 압도적인 자본 관계가 강제한 테일러 방식의 노동 분업에서 노동하는 동물로 비하되지 않을 수 없었던 노동과정의 역사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테일러 방식의 노동 분업은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서, 곧 그 당시의 미국에서 널리 시행된 노동과정이었다. 그녀는 역사에 의해 규정되고 사회에 의해 강제된 이 노동 형태를 노동 자체로 일반화했다. 아렌트의 노동 이해는 이러한 불행한 일반화에서 비롯되었다. 이 노동 이해 때문에 그녀는 노동에서 정치 능력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노동하고 말하는 인간의 이름으로 요구되고 오직 이 이름으로만 전진할 수 있는 해방적 정치를 수행하는 노동의 능력을 보지 못했다.

III. 동일철학에 근거한 위르겐 하버마스의 노동과 의사소통의 이원성

 위르겐 하머마스를 노동과 언어의 동일철학적 이원화로 이끌어 간 기본 모티브는, 그 자신이 술회하고 있듯이, 한나 아렌트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 Georg Gadamer)를 거쳐서 제작과 행위, 기술과 현명성을 구별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사회철학 체계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을 거쳐서 형성되었지만 인간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기술적 합리성 아래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윤리적 현명성(phronesis)을 어떻게 보존하여 해방적 사회를 향한 길을 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일관성 있게 집중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 제기는 당대 현실에 대한 그의 진단과 맞물려 있다.

 1. 하버마스의 당대 진단은 오늘의 자본주의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렀다는 단계 규정에서 출발한다. 이 사회에서는 한편으로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개입이 제도화되어서 “경제로부터 정치의 고전적 독립”이 폭파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화된 문명”이라는 말로 본질적으로 표현되는 기술적 합리성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한다.

 1) 이러한 사태의 발전과정 배후에서 하버마스는 서로 결합된 두 가지 위험성을 본다. 하나는 “‘소외 속에서 잘 산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사회, 다시 말하자면, 자극된 복지 감정에 휩쓸려 위생적으로 완벽하게 처리된 소외에서 그 찌르는 침을 의식으로부터 완벽하게, 지속적으로 구축하는 사회의 위험들“이다. 전체 체계를 조직하는 업적 원칙의 지배 아래서 소외를 의식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버마스가 이 소외를 더 이상 노동과정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소외로 해석하지 않고 문화적, 정치적 소외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고유한 위험인데, 그 위험은 “과학화의 과정이, 기술공학적으로 한정된 합리성의 성찰 수준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채, 기술적 문제들의 한계를 넘어설 때, 발생한다.” 기술과 과학이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이 둘이 정치적 토론의 대상에서 벗어나 독립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과 정치가 기술의 관료적 지배에 의해 구축(驅逐)되고 대체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위험스러운 발전과정에서 그는 “주민 대중의 탈정치화”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 표현은 “업적 원칙과 기술 지배로 나타나는 체제 논리가 공동생활의 조직, 한 마디로 상호행위 일반의 규범적 규율을 정당화하는 규준들로부터 분리되고 ... 그것을 대신해서 목적합리적 행위라는 하부 체계의 기능들에 고착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2) 이러한 위험들을 염두에 두고서 하버마스는 정당하게도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발견하고 수행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러한 삶의 가능 조건을 숙고하면서 그는 첫째, 노동이 이러한 과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국가개입주의에 의해 조직된 복지사회에서 “계급의식, 특히 혁명적 계급의식은 오늘 노동자 집단의 핵심 부분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 명제는 나중에, 비록 약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후기 자본주의의 위기들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도 확인된다.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정치가 정교하게 가다듬어지고 억압된 체제 위기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계급의식이 단편화되고 연정(聯政)이 되풀이 교체되는 한에서, 계급타협의 조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논쟁들이 언제나 벌어진다.” 그것은 결코 “정치적 계급투쟁”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이러한 사태 발전은 노동이 오늘 더 이상 해방의 잠재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것은 노동 문제를 다룰 때 하버마스가 상황을 고려하며 내린 사전 결정이다.
 둘째, 후기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의 정치적 중요성을 일관성 있게 부정하게 한 이러한 사전 결정을 내린 뒤에 하버마스는 기술적 합리성의 지배로 인해 내몰린 공공 부문을 재건하고 강화하여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향한 해방의 잠재력을 동원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그가 기술과 현명성, 제작과 행위의 아리스토텔레스적 구별을 끌어들여 자신의 사회철학 체계를 구상하고자 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2. 자신의 사회철학적 기본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버마스는 청년 헤겔이 예나 시대에 동일철학적으로 발전시킨 “정신의 철학”의 체계를 해석하면서 언어, 노동, 상호행동을 범주적으로 구별한다. 여기서 나는 그의 헤겔 해석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깊이 다루지는 않겠다. 그의 해석에서 무엇보다도 그리고 일차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상호행동을 노동으로 환원하거나 상호행동으로부터 노동을 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명제이다. 이 명제는 물론 해명을 필요로 한다.

 1) 상호행동은 하버마스에게서 “의사소통 행위”이다. 그것은 언어를 매개하는 문화 전승 속에서 상호주관적으로 일어나는 상호 행위 혹은 “보완적” 행위이다. 이에 반해서 노동은 자연의 인과성에 대한 지식을 매개로 해서, 그리고 투입된 도구를 가지고 자연적 대상들을 기술적으로 통제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본질적으로 그 목표로 하는 “도구적 행위”이다. 그는 이 도구적 행위를 “고독한 것”, “독백적인 것”으로 성격화한다. 비록 “도구 사용의 고독한 행동이 이미 상징들의 활용에 의존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노동이 상징을 이용한 묘사에 의존한다는 것은 단지 노동과정에 앞서서 노동 대상들이 명명을 통해 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그친다. 이러한 본래적 의존성을 일단 제쳐 두면, 노동이 상호행동과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하버마스는 강조한다. 왜냐하면 노동은 대상들을 기술적으로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청년 헤겔과 더불어 의사소통 행위로서의 상호행동과 도구적 행위로서의 노동에 대한 규정에서 다음과 같은 개념적 결론을 이끌어낸다. “기술적 규칙들은 처음에는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으로부터 형성되지만, 상호행동의 의사소통 규칙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2) 도구적 행위로서의 노동은 사회적 노동이라는 형태를 취할 때 비로소 상호행동의 영역에 들어선다. 하버마스에게서 나타나는 노동과 상호행동에 대한 이 이해는 매우 주의 깊게 분석되어야 한다. 헤겔을 해석하면서 그는 청년 헤겔이 사회적 노동을 단지 노동 분업과 교환관계의 관점에서만 “보잘것없이” 관찰했다고 비난했다. 그가 나중에 노동세계의 동기 위기를 주제로 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하머마스는 확실히 사회적 노동의 다른 측면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노동이 오직 사회적 노동으로 구성되어서 노동 분업과 교환, 그리고 법인에 기반을 두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주장할 경우에만 상호행동의 본질을 이루는 인정(認定)의 대상이 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청년 헤겔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노동의 생산물이 시장 기구를 통해서 상호행동에 관련을 맺고 인정투쟁이 노동의 생산물들을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과 상호행동은, 상호 인정의 조건들을 충족할 경우에만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공동체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의사소통 규칙들에 따라, 함께 규정하고 제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3. 하머마스는, 일단 노동과 언어의 발생사적 의존성을 괄호 안에 놓고 생각한다면, 노동이 의사소통 규칙들로부터 곧바로 독립하여 도구적 행위로 구조화된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노동은, 스스로를 사회적 노동으로 구성할 때에만, 간접적으로 상호행동에 통합되고, 의사소통 규칙들에 따라 정치적으로 다루어진다.
 이러한 사고 유형은 매우 추상적이다. 그 추상성은 노동이 사회적 노동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가를 물을 때 곧바로 드러난다. 만일 사회성이 노동의 규정으로서 애초부터 함께 부여되어 있는 것이라면, 사회적 노동으로부터 분리시킨 노동은 단지 사유의 추상물에 불과하다. 그러한 추상의 기괴함은 나무에서 껍질을 벗겨내어 놓고 나무속과 나무껍질이 별개의 사물로 분화되어 존재하는 듯이 생각하는 것의 기괴함에 비유될 수 있다. 하버마스와는 달리 나는 노동의 사회성에서 출발하며, 언어를 매개하는 상호행동이 노동의 사실(Faktum)에 근본적으로 귀속되어 있는 것이지 노동에 추후적으로 부가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노동과 상호행동의 하버마스식 분리는 매우 인위적이고 그렇게 분리시켜 생각할 만한 마땅한 근거도 없다고 본다.
 바로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 노동을 왜 하필이면 기술적 규칙들의 지도를 받는 도구적 행위로 분류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하버마스는 인간이 자기보존의 명령에 따라 자연의 힘에 맞서고 자연을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이 자연사적으로 형성되었다는 말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기술적 통제가 곧 노동의 본질이다. 바로 여기서 노동이 기술에 의해 인도되는 도구적 행위라는 하버마스의 논리적 결론이 이끌어진다. 그러나 노동과 도구적 행위의 단순한 등식은 곧바로 큰 딜레마에 빠진다.
 나는 무엇보다도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자연사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하는 하버마스의 해석이 단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하버마스는 인간이 자연을 어쩌면 기술적으로 통제할 수 있기 이전에 자연에 둥지를 틀고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조건들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자연 연관에 대한 인류의 생태학적 의존을 존중할 때에만 삶이 가능하고, 따라서 그 삶이 자연과 의사소통 관계에 있다는 것은 실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인류의 지혜이다. 이 지혜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사소통적 접촉은 자연에 대한 이른바 기술적 통제에 대해 우위를 지닌다. 무엇이든 기술을 가지고 만들 수 있다는 사유 유형이 근대를 지배하기 이전에 인류는 이 지혜를 대체로 간직해 왔다. 자연에 대한 기술적 통제를 문명의 원리로 처음 선언한 사람은 프랜시스 베이컨이었고, 자연을 지배하고 수탈하는 실험은 근대 문명의 특성이었다. 숨을 앗아가 버릴 정도로 거창한 이 근대의 실험에 직면해서 사람들은 근대 이전의 수공업자들이 단지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데 사용했을 뿐인 기술을 이제는 거대한 체계로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을 도구적 행위로 보는 하버마스의 해석은 이 근대적인 기술 이해를 바깥으로부터 끌어들여 노동 이해에 뒤집어씌운 것이다.
 물론 현대의 노동세계는 기술적 노동세계이다. 거기서는 노동과정이 기술화된다. 노동과정의 기술화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노동이 기술화된 노동세계로 인하여 도구적 행위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하버마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노동과 도구적 행위의 등식 혹은 노동과 의사소통의 상호분리이고, 그러한 생각이 아무런 근거 없이 개념적으로 고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고정화에 묶인 하버마스는 노동과 기술을 범주적으로 혼합하고 기술 아래 종속된 오늘의 노동과정을 일반화하거나 심지어 재가한다. 하버마스는 노동이 어떻게 기술의 지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는가, 그리고 기술에 대해 또 다시 주권을 회복하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를 포착하지 못한다.

 4. 만일 노동을 도구적 행위로 단정하는 입장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으로부터 노동의 소외를 주제로 다룰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노동은 그 규정상 기계의 노동처럼 독백적으로 수행되어야 하고 수행되어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노동의 본질로부터 비롯되는 자연적 과정처럼 여겨질는지 모른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노동에 대한 자신의 규정에 매인 나머지 그는 결코 노동의 소외를 제대로 주제로 설정할 수 없다. 실제로 그는 사회문화적인 삶의 관계, 곧 동기 문제의 틀에서 소외를 주제로 다룰 뿐이다. 동기 위기는 정치로부터 대중을 기술지배적으로 배제한 데서 비롯된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적 의사 결정에 대중을 참여하게 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노동세계의 인간화를 위해 참여를 강조하는 것이 마땅하고 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여를 통한 노동세계의 인간화는 노동이 노동과정의 기술화 조건들 아래서 소외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제기되는 요구이다. 이 주제가 하버마스에게서는 아예 주제로 설정되지 않는다. 사정이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분명하다. 그의 노동 이해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을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게끔 형성하는 문제를 다루는 데 적합하지 않다. 노동을 도구적 행위로 규정한 다음에 남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투입된 노동의 양을 가지고 가능한 한 가장 많은 소출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단 하나의 문제일 뿐이다. 이것을 유일한 문제로 설정하는 사람 앞에서 소외된 노동을 탄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노동 문제를 이런 식으로 다루게 만드는 사유 형태는 노동자에 대한 관심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한다.

IV. 실천철학의 노동 이해에 대한 기독교윤리학적 평가

 여기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 한나 아렌트, 위르겐 하버마스에게서 나타나는 노동과 의사소통의 실천철학적 분리가 노동을 숙명으로 파악하는 그리스적 관념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 관념은 노동이 하느님에 의해 긍정되고 축복된 것이라고 보는 성서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한나 아렌트, 위르겐 하버마스의 입장에 대해 앞에서 서술한 바 있는 비판적 논평을 더 반복하지도 않겠다. 나는 이러한 비판을 전제로 해서 노동과 의사소통의 분리가 왜 기독교 노동윤리의 규준론적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기독교 노동윤리의 규준론 체계에는 노동 문제를 판단하는 여러 원칙들이 제시되어 있다. 노동의 인간학적-사회적 측면에 관련해서는 노동의 인간주체성의 원칙, 노동의 사회성의 원칙, 정의의 원칙, 노동의 보완성의 원칙, 노동의 통전성의 원칙 등이 중요하고, 노동의 생태학적 측면에 관련해서는 노동의 자기제한의 원칙, 자연의 보존적 활용의 원칙, 노동의 생태학적 적응성의 원칙 등이 강조된다. 물론 노동의 특정한 문제들을 놓고 윤리적으로 판단을 내리고자 할 때, 이 모든 원칙들을 모두 다 동원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원칙을 갖고서 윤리적 판단을 내릴 것인가는 사안의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 결정할 문제이다.
 노동과 의사소통의 분리 문제를 다룰 때, 나는 동료인간성이 노동의 구성요소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것이 노동의 사회성 원칙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노동의 사회성 원칙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협동이다. 협동은 노동의 본질을 이루며, 의사소통을 통하여 매개된다. 협동은 시장이 제도적으로 구성되지 않았던 때에도 노동의 본질적 징표였다. 따라서 노동이 사회적 노동으로 구성된 뒤에야 비로소 노동이 상호행동의 영역 안으로 편입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청년 헤겔, 하버마스의 생각은 단견이다. 또한 협동은 동시대인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대인의 업적을 계승하고 후대인들에게 노동의 성과를 물려주는 과정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동시대인들과 세대 간에 이루어지는 협동은 의사소통을 떠나서는 실현될 수 없다. 협동의 형태로 진행되는 노동은 인간이 대화적 주체로서 노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노동의 사회성 원칙에 입각해서 나는 하버마스와는 달리 노동과 상호행동이 서로에게 귀속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노동은 노동의 대상을 분화시키기 위해서 상징을 필요로 하는 것만이 아니고, 함께 일하기 위하여 상징을 필요로 한다. 노동 문화는 상징을 매개로 해서 형성되고 전승된다.
 물론 노동은 간접적으로, 다시 말하면, 교환을 매개로 해서, 사회적 노동으로 형성될 수 있다. 이 경우 사람들은 사회적 노동의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문제, 말하자면, 노동 생산물의 정의로운 할당(인정)과 분배의 문제를 정의의 원칙 아래서 다루어야 하고, 사회적 노동의 제도적 관계들을 인간적이고, 사회적이고, 생태친화적으로 형성하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의의 원칙은, 서로 기대하는 행동으로서의 상호행동이 본질적으로 노동 생산물의 사회적 인정에 대한 노동의 요구에 속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결코 제정될 수 없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노동과 의사소통을 분리하는 것은 극히 주관적인 것으로서 노동의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또한 노동의 행위주체성의 원칙에서 볼 때, 노동을 도구적 행위로 축소시키는 관점은 노동이 의사소통으로부터 소외되는 기술지배적 노동과정을 재가할 위험이 있다. 노동의 기술적 지배를 위하여 노동을 규격화하고 파편화하여 노동 공정 분할의 대상으로 만드는 기술지배적 노동과정은 노동하는 인간이 행위의 주체로서 몸과 마음, 영혼과 육체, 자기와 이웃 인간 사이의 통전적인 의사소통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고, 노동을 할 때에나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나 노동자가 행위의 주체로서 엄연하게 존재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노동의 생태학적 적응성의 원칙에서 보더라도, 노동을 의사소통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관점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하버마스를 비판하면서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노동이 도구적 노동으로 축소되어 대상에 대한 기술적 통제를 목표로 움직이기 이전에 노동은 그것의 환경과 개방적이고 무제약적인 의사소통을 나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하며, 환경의 제약과 생태학적 임계조건에 대한 존중과 적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노동과 그 노동을 통한 생명의 보존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노동을 의사소통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실천철학의 노동 이해는 기독교적 노동 이해의 관점에서는 지지될 수 없다.
 노동과 의사소통의 실천철학적 분리에 대한 이제까지의 분석과 기독교 노동윤리의 관점에서 시도된 비판적 평가로부터 앞으로 다루어져야 할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어떻게 하면, 그리고 어떠한 제도적인 틀 안에서 오늘의 노동세계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의사소통으로부터의 노동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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