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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0 (10:31) from 220.66.47.13' of 220.66.47.13' Article Number :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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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평화윤리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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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평화윤리적 접근

강원돈 (한신대 신학과/사회윤리)

I. 머리말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지난 한 세기를 고통스럽게 회고한다. 왕조의 멸망과 식민지화, 해방과 분단, 전쟁과 냉전, 남북관계의 불안정과 외세의 간섭 등으로 인해 우리 겨레는 큰 고통을 겪었고, 비싼 대가를 치루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남북정상이 두 차례 만나 남북간 교류·협력을 확대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를 제도화하는 과정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북에 대한 미국의 적대정책과 이에 반발하는 이북의 핵 정책 등도 한반도 평화와 더 나아가 남북통일을 가로막는 중대한 변수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한반도에 평화를 수립하고 남북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몇 가지 구상을 기독교 평화윤리의 관점에서 논의해 보려고 한다. 나는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남북 분단을 고정시키는 결과를 빚지 않고 통일을 촉진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나는 먼저 평화에 대한 성서의 비전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성서의 평화 비전으로부터 평화 형성을 위한 평화윤리의 몇 가지 규준들을 강구하고, 끝으로 이와 같은 평화윤리의 규준들에 입각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수립하고 더 나아가 남북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점들을 밝혀보려고 한다.

II. 평화에 대한 성서의 비전

 성서는 평화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이 비전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평화를 추구하여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그 평화는 오늘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와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을 먼저 살피면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 평화에 대한 예비적 고찰

 흔히 평화는 전쟁의 반대 개념으로 여겨지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기를 꼽으면 얼마 되지 않을 정도이다. 전쟁은 정상상태로 여겨지고, 전쟁이 중단된 상태가 오히려 예외적인 상태였다. 토마스 홉스는 인류의 자연상태를 가정하면서 이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으로 규정한 바 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정치학이나 윤리학의 과제는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제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전쟁의 과학화와 기술화가 급진전한 20세기에 들어와 전쟁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에 이르자 평화는 생존조건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쟁의 부재로서의 평화는 인종들과 민족들과 국가들 사이에서 추구하여야 할 목표가 된 것이다.
 그러나 평화를 전쟁의 부재라고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과 대립과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요인들과 구조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평화는 이룩되지 않을 것이다. 요한 갈퉁은 이와 같은 평화를 적극적 평화로 규정하고, 이를 전쟁이나 폭력행위의 부재를 뜻하는 소극적 평화와 구별하였다. 적극적 평화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법치를 확립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인간의 자기실현의 기회를 보장하는 일련의 역동적 과정을 통하여 실현된다. 국가들 사이의 평화도 군사적 조치나 군비확충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ica),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등등은 무력을 앞세운 평정의 질서였지, 진정한 평화라 할 수는 없다. 진정한 평화는 각 나라가 보다 낫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고 그러한 나라들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거쳐서 달성될 수 있는 목표이다.
 제3세계의 평화이론가들은 요한 갈퉁보다 더 절실한 평화 개념을 제시한다. 그들은 인구의 대다수가 생존 수준 이하의 가난에 처하고,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배제와 차별, 절망과 불안에 처해 있는 사회에서 평화가 구현될 리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평화를 구현하는 운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삶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근본적으로 바꾸는 과정이요, 장기적이고 집요한 실천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2. 평화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평화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측면에서 평화를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평화를 정의의 열매로서 강조하는 측면이다.
 우선, 야훼의 전쟁들에 관한 구약의 기록을 읽는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의 신 야훼가 매우 호전적이라는 인상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야훼의 전쟁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야훼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전쟁이 국가 형성 이전의 현상이었고, 국가가 수행하는 전쟁을 신의 전쟁인 것처럼 묘사하는 대목은 왕이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조직한 전쟁을 야훼의 전쟁에 투사하여 마치 그것이 신의 전쟁인 양 보이려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국가 형성 이전에 형성된 야훼의 전쟁이라는 관념도 전쟁이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 신의 소관이라고 못을 박아두는 장치였다고 한다. 이것은 전쟁에서 잡은 포로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전쟁 참여자들이 노획물을 임의로 배분하지 못하게 한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포로들과 노획물은 야훼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훼의 전쟁은 전쟁이 생존투쟁의 형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판관 시대에서조차 인간이 임의로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는 기능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국가가 형성된 이후에 왕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세계제국의 건설이 “야훼의 보편적 해방행위”라고 주장하고자 하였으나, 힘으로써 적을 굴복시키는 이와 같은 제국의 평화는 예루살렘 어용신학자들에 의해서만 정당화되었을 뿐, 8세기 이래의 예언자들, 특히 이사야는 “신과 군사력 사이의 원칙적 단절”을 철저하게 주장하였고, 군사강국과의 전략적 동맹 같은 군사력에 대한 의존이 야훼에 대한 신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예언자 전통은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거쳐 후대에 이어지며, 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프를 이룬다.
 그 다음, 평화에 대한 성서의 비전에서 중요한 것은 정의와 평화의 밀접한 관계이다. 성서에서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고, 정의는 바른 관계이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맺고 있는 관계가 바를 때 정의가 이루어진다. 이 관계들을 깨뜨리는 장본인이 바로 죄이다. 성서는 죄의 현상형태를 우상숭배와 폭력으로 본다. 호세아는 이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죄가 지배하는 곳에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폭력으로 점철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파괴된다는 것이다.(호세 4:1-3) 정의는 이렇게 깨진 관계들을 극복하고 그 관계들을 바르게 형성하는 과정이며, 평화는 바른 관계들 속에서 누리는 삶의 충만함을 일컫는다.
 평화에 대한 성서의 비전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에서 더욱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이니 그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모든 관계들이 바르게 형성될 것이다. 예수는 로마 제국의 변방을 이루는 팔레스타인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선포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것은 세상 주권에 복종하는 삶에서 180도 전환하여 하느님의 주권 아래 들어가라는 요구이다. 세상 주권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모색은 제자들의 권력 추구에 대한 예수의 경고에 암시된다. 세상의 왕들과 관리들은 폭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내리누르지만, 예수를 뒤따르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낮아져서 남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마가 10: 42-43) 이 말로써 예수는 로마의 평화가 운위되는 당대의 현실에서 당연시되었던 폭력에 의한 지배를 부정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는 타인에 대한 폭력적 자기주장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 형성의 원리를 제시한다. 예수에게서 섬김과 사귐은 사람들 사이에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는 원리이다.
 하느님의 주권 아래서 살 것을 강력하게 호소한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안식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은 강령적 선언을 하고 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본문에서 수고는 강제노역을 뜻하고, 무거운 짐은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과 인두세, 성전세 등의 각종 세금과 지주에게 바치는 지대 등을 의미한다. 로마 제국과 팔레스타인의 성전체제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세금과 지대, 강제노역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예수의 말은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였다. 하나는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서 ‘안식’을 누리게 하리라는 약속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본문의 ‘온유와 겸손’이 암시하듯이 세상 권력자들의 폭력과 압제로부터 해방하리라는 약속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예수가 말하는 평화의 바탕이다. 그의 평화는 정의에 기초한 것이다.
 평화에 대한 성서의 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주 전체를 아우를 만큼 포괄적인 전망을 보여준다. 바울이나 요한묵시록 저자가 보여주는 평화의 비전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이에 대한 논의를 생략한다. 본 논문의 주제를 전개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성서의 평화 비전을 살피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III. 평화 형성의 윤리적 규준들

 나는 앞에서 논의한 평화에 대한 성서의 비전을 실마리로 삼아 세상에서 평화를 형성할 때 고려하여야 할 몇 가지 규준들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이 규준들은 많은 점에서 당위적 요청의 성격을 띠겠지만, 세상의 현실을 규정하는 역사적 조건들을 감안하면서 평화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략과 지침을 강구할 때 방향타의 역할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평화 형성을 위해 고려할 첫째 규준은 정의이다. 성서가 말하는 정의는 관계 개념이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할당하는 것이 정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은 오늘의 세계에서도 물론 큰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만 갖고서는 성서의 정의 개념을 모두 포괄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배분적 정의는 명예나 지위나 지분이나 업적 등이 이미 주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것에 적절하게 재화가 나누어졌는가를 따진다. 거기서는 명예나 지위나 지분이나 업적 자체가 그렇게 상수로서 주어져 있는 까닭을 묻지 않는다. 이에 반해 성서적 정의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할당하는 관계 자체가 바르게 설정되어 있는가를 묻는 데서 출발한다. 그 관계가 바르게 설정되어 있지 않는 한, 그 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재화의 배분이 공정하거나 정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서로 마주 서 있는 당파들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서 실현되며, 오직 그런 경우에만 당파들 사이에 평화가 깃들 것이다.
 둘째 규준은 약자를 편드는 일이다. 예수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불러서 안식을 약속한 것은 하느님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의 종살이를 하는 히브리인들을 자유의 땅으로 이끌어낸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약자의 편에서 약자를 위해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현존 방식이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과 문화권력이 엄연한 현실에서 이 권력들에 희생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지 않고서 그 권력들에 의해 일그러지는 현실관계들을 인식하고 그 관계들을 바르게 세우는 일에 나서기는 어렵다. 약한 사람들을 편드는 실천을 통해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평화가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셋째는 균형의 규준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든다는 것은 오늘의 현실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힘 있는 사람들이 현실관계들을 왜곡하고 파괴하여 그 관계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하지 않도록 하려면 그 사람들이 가진 힘을 효과적으로 억누르는 힘을 조직하여야 한다. 어느 한편의 권력이 일방적으로 강하여 권력의 경사가 심한 곳에는 정의가 깃들 수 없고, 평화가 실현될 수 없다.
 넷째는 전쟁을 적극적으로 배제하여야 한다는 규준이다. 전쟁을 갈등 해결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은 인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고, 전쟁이 하느님의 소관이라는 성서의 기본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전쟁이 하느님의 소관이라는 성서의 주장은 인간이 전쟁을 임의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전쟁 배제의 규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만큼, 신학적으로 볼 때, 전쟁은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여겨져서도 안 되고, 평화를 구현하는 방법이라고 주장되어서도 안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정당한 전쟁(bellum justum)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당한 전쟁을 신학적으로 정식화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평화가 없는 세상에서 기독교의 평화주의를 실현하는 방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정당전쟁론은 전쟁을 제한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정당전쟁론의 골자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합법 정부(legitima potestas)에 의한 전쟁일 것, 또 하나는 법치질서가 손상되거나 위협받을 때가 아니면 전쟁을 선택하지 말 것(causa iusta), 나머지 하나는 전쟁의 목적이 법에 의한 평화의 회복에 있는 것이지 전쟁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는 것(recta intentio)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당전쟁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다소 보완되어 후세에 전해졌고, 마르틴 루터는 방어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전쟁종사자도 지복에 이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루터는, 그 전쟁이 정당한 전쟁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요한네스 칼빈도 루터의 정당전쟁론을 수용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국민국가들 사이의 전쟁이 빈발하면서 개신교 신학은 정당전쟁론을 확대하여 전쟁을 국가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기독교의 정당전쟁론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난제들을 여기서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적어도 대량살상무기가 발달하여 인류의 멸절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어떤 전쟁이 정당하고 어떤 전쟁이 불의한가를 다루는 것은 매우 한가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만큼은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전쟁은 그 어떤 이유로든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 부시행정부가 들어선 이래로 세계 여러 나라들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미국이 지목한 이른바 ‘악의 축’ 국가들에 대한 선제공격까지 주장하는 새로운 전쟁 이데올로기가 선보였는데, 이것은 정당한 목적이 있으면 그 목적에 따른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정당전쟁론의 매우 위험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여러 점들을 고려할 때, 전쟁의 적극적 배제를 강조하는 성서적 규준은 오늘의 세계에서 크게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IV.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평화윤리의 제안

 그러면 위에서 정리한 평화윤리의 몇 가지 규준들을 갖고서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을 구현하기 위한 방안을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에 관한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에 대한 고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서로 맞서는 지역이기 때문에 세력간 갈등과 대립이 격렬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 대륙세력의 해양진출을 봉쇄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해양세력의 대륙진출을 위해서도 한반도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의 한반도 병탄, 외세에 의한 한반도의 분단, 분단 이후의 격렬한 남북 대결과 외세 개입 등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늘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문제로 설정할 때,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 정립된 서로 다른 체제의 두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미국은 한반도에 지정학적, 군사정치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예전에는 한반도 분단과 민족 분단이 민족의 계급적 분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 등의 외세가 우리 민족의 의지에 거슬려 강제한 것이니 온 겨레가 하나가 되어 외세를 물리치면 통일이 이루어지고 평화도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념에 근거해서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당위적 요구라고 역설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당위적 통일론은 역사 과정에서 원인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자동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치를 놓치고 있다. 설사 외세의 개입에 의해 민족과 국토가 분단되었다고 해도, 분단 이후에 이북과 이남에서 각기 다른 체제가 형성되어 발전하면서 그 체제들이 서로 격렬한 대립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를 단지 외세의 배격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 세워진 두 국가들은 앞으로 적대적 대립 관계를 청산하고 대립적 공존 관계를 거쳐 평화적 공존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두 국가들의 합의에 입각해서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길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남과 이북이 주도권을 쥐고 바른 관계를 형성하려고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남과 이북의 주민들도 각각의 정부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남과 이북의 관계정상화는 한반도에 지정학적, 군사정치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고, 장차 한반도에 세워질 수도 있는 국가연합이나 통일국가가 주변 국가들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주변 국가들의 지원이나 동의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2. 한반도에서 평화관계를 형성하는 과제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고려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정의의 규준에 입각하여 한반도에서 이남과 이북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규율하여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남북통일을 향한 길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남과 이북의 관계를 규율하는 지침을 강구하여야 하는데, 나는 1972년 7월 4일에 발표한 「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원칙, 곧 자주의 원칙, 평화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남북관계를 정의의 규준에 따라 규율하는 기본지침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3대원칙은 1992년 2월 19일에 발효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약칭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해 계승되고, 2000년 6월 15일의 역사적인 남북정상간 합의에 기초한 「6·15 남북 공동선언」과 2007년 10월 4일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의 저류를 이루고 있는 원칙이다.
 그러나 1972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북관계가 이 원칙들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고 볼 수는 없다. 「남북공동성명」의 3대원칙은 오래 동안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었고,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해 되살아나기는 했어도 합의에 따른 실효성 있는 조치들이 취해지지 않은 채 제1차 ‘북핵’ 사태를 겪으며 유야무야되었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에는 ‘햇볕정책’의 이름으로 경제, 문화적 교류 차원에서 남북공조가 강화되었고, 남북교류의 규모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기는 했지만, 남북간 군사적 신뢰구축에 근거하여 평화관계를 수립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남북관계에서 나타나는 부분적인 진전과 부분적인 교착은 남북관계가 남북공조에 의해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서 엄청난 군사정치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제1기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뒤에 미국의 대북정책은 전례 없이 강경한 기조를 띠기 시작했고,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에는 이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재선에 성공한 부시 대통령은 2005년 연두교서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자유의 확산”과 “폭정의 종식”으로 선언하고,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의 입을 빌어 이북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강경한 미국의 대북정책은 미국과 군사안보동맹을 맺고 있는 우리나라의 입지를 크게 좁히는 효과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의 일환으로 제정한 2004년 ‘북한인권법’이 남북관계에 끼치는 영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북한인권법’을 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엔 차원에서 이북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일을 주도하였다. 미국의 ‘북한인권법’은 오늘의 세계를 자유사회와 공포사회로 양분하는 독특한 세계관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 세계관을 정교하게 가다듬은 샤란스키(Nathan Sharansky)에 따르면, 공포사회의 지도자들은 외부의 적을 만들어야 내부의 안정을 기할 수 있기에 끊임없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기 마련인데, 이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공포사회를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전제하는 인권과 자유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형화된 것이기에, 이를 앞세워 '체제 전환'(regime change)을 도모하겠다는 미국의 ‘북한인권법’과 그 뒤를 이어 2005년에 제정된 ‘민주주의증진법안’에 대해 이북이 체제에 대한 부정이요, 이북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반발한 것은 이북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형편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2006년에 이르러 우리나라 정부는 미국이 ‘인권’과 ‘자유’를 내세워 벌이는 이북에 대한 공세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하였다. 2008년 11월 23일에 유엔 제3위원회에서 채택된 대북 인권결의안에 우리나라는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남북공동성명」이 명시한 상대방 체제에 대한 존중의 원칙을 부정하는 효과를 갖기 때문에 우려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사정 가운데서도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은 통일지향적인 평화체제의 수립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거로 계속 활용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원칙은 이남과 이북 사이에 신뢰구축과 평화체제 수립, 남북통일의 성취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합의사항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원칙에 굳게 서서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이남과 이북이 노력을 할 때, 그 동안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놓고 다양하게 논의되었던 평화협정, 불가침선언, 이북과 미국의 관계정상화, 동북아 집단안보체제 형성 등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과 관련하여 남북전쟁의 당사자들인 남과 북, 중국, 미국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켜 전쟁 종결에 따른 후속작업을 완료하고 상호간 관계정상화의 길을 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전쟁을 적극적으로 배제하여야 한다는 규준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중요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전쟁 책임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일은 4개국 사이의 관계를 바르게 형성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다루어져야 할 것이고, 필요한 경우에는 평화협정과 병행해서 혹은 평화협정을 전제로 해서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 방지 장치를 해 두는 것도 중요하다. 평화협정이나 불가침협정과 관련해서는 당사자들 사이에 매우 현저한 입장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이 문제에 접근할 때 정의의 규준과 균형의 규준을 항상 고려하여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정의의 규준은 한반도에서 전쟁과 평화, 분단과 통일에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이 바른 관계를 맺을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이남이 정전협정의 조인에 빠졌기 때문에 평화협정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이북의 오랜 주장은 형식 논리에 사로잡힌 주장이기도 하지만, 정의의 규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는 점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균형의 규준은 한반도에서 서로 대립관계를 갖는 세력들의 균형이 현저하게 기울어져 있는 상태에서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대해 느끼는 엄청난 안보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요구한다. 이남과 이북 사이에, 이북과 미국 사이에 불가침 협정을 맺고 한반도에 지정학적, 군사정치적 이해관계를 갖는 모든 국가들이 이를 보장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서는 한반도에서 세력 균형을 제도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의의 규준과 균형의 규준에 입각하여 평화협정과 불가침협정을 체결한다면, 이북과 미국의 관계정상화와 국교 체결을 방해하는 결정적 요인들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균형의 규준에서 볼 때, 남과 북, 중국과 미국, 일본과 러시아 등 한반도에 지정학적, 군사정치적 이해관계를 갖는 국가들은 앞서 말한 평화협정과 불가침협정을 집단적으로 보장하는 데서 더 나아가 동북아에서 집단적인 안보협력 기구를 창설하는 일에 착수하여야 할 것이다.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형태의 다자간 안보협력회의는 동북아시아에서 오래 동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른바 ‘북핵’ 처리를 둘러싸고 2004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에 걸쳐 전개되어 온 6자회담은 헬싱키에서 시도되었던 다자간 안보협력회의가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평화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유력한 모델로 검토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6자회담은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여러 나라가 공통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달성을 위해 협력과 타협, 양보 등을 제공한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되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동북아 차원에서 다자간 안보협력회의가 활성화되어 공동안보협력에 관한 기본합의가 도출되고 이에 바탕을 두고 공동안보협력체제가 형성된다면, 이 지역에서 강대국의 패권 행사가 제도적으로 억제되고 약소국의 안보가 증진되고, 경제, 과학, 기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간 협력이 증진되어 평화의 기반이 더욱 더 강화될 것이다.
 오늘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반도의 핵 무장이다. 최근에는 이북의 핵무기 보유설이 크게 불거져 있다. 미국이 일본과 한국과 군사동맹을 맺고서 엄청난 군사력으로 이북과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이북의 핵무기 개발은 체제보존을 위한 방어권 행사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자원의 절대적 고갈에 직면한 이북이 재래식 무기 증강을 통하여 체제를 유지하는 값비싼 방법보다는 핵무기와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통하여 체제를 유지하는 값싼 방법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해석될 수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전쟁을 통하여 이북의 핵무기 보유설에서 비롯된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이북에 대한 선제적 군사공격은 극히 짧은 시간 안에 한반도를 초토화시키는 가공할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에 전쟁을 적극적으로 배제하여야 한다는 규준 아래서 이북의 핵무기 보유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본다면, ‘한반도 비핵지대화 원칙’ 아래서 관련당사국들이 ‘북핵’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이북에 대한 지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화와 통일은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였는데, 요즈음 이 주제를 갖고서 말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북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통일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이래로 이북을 지원하는 이른바 ‘햇볕정책’을 ‘북한 퍼주기’로 매도하면서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그러나 우리는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서 이북을 다방면에서 지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이북 주민들이 우리의 동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이후 이북이 중국의 지원에 다소간 의존하면서 미국의 봉쇄에 대항하여 체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자원이 고갈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북의 경제적 파탄은 한반도 평화와 남북통일을 역사의 진보적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주동으로 해결하여야 할 과제가 된다. 나는 적어도 약자를 편들어야 한다는 규준을 원용해서 이 과제를 풀어나가는 지침들을 강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북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개혁·개방을 유도하여 이른바 이북의 체제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발상은 이북을 이남의 내부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자본의 지배 아래 놓겠다는 계산과 통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은 이북이 결코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북에 대한 지원은 일차적으로는 이북 사람들이 자원 고갈 상태를 극복하고 자주적으로 그들의 경제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다는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이를 위해서는 무상원조나 장기 차관 형태로 지원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자원은 필요한 경우 이북 사람들이 경제체제를 혁신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북의 경제체제를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놓고서는 이남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전문가들이 많은 자문을 할 수 있겠지만, 이에 대한 판단도 이북 당국과 주민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남과 이북의 비교우위에 근거하여 이남의 자본과 이북의 노동력, 이남의 기술과 이북의 자원 등등을 서로 결합하여 쌍방이 경제적 이익을 최적화하는 방식의 경제특구 운영도 생각할 수 있다. 조율된 합작투자를 위한 법적, 제도적 정비에 나서는 것도 이북의 경제발전을 위해 고려할 만하다. 이 경우에는 사회비용과 환경비용 등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자본의 이익을 최적화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남과 이북의 정책당국이 한반도 경제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대륙철도 연계사업, 송유관 및 가스관 설치 사업 등에 나서는 방안도 그 동안 많이 구상된 바 있다. 민족공조에 바탕을 두고 경협을 진행하다 보면, 어떤 단계에 가서는 이남과 이북이 한반도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물리는 보다 큰 경제권에서 한반도 경제공동체의 이익을 구현하는 방안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남이 분명한 원칙과 목적을 갖고서 이북 경제의 자주적 발전을 지원하고 호혜적인 협력 관계를 맺을 때, 단기적으로는 남북관계를 평화·교류·협력 관계로 발전시키고, 중장기적으로는 통일비용을 줄이면서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이북 주민들의 자존심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통합과정일 것이다.

V. 맺음말

 이 글에서 나는 성서의 평화 비전을 실마리로 삼아 오늘의 세계에서 평화를 형성하는 데 고려하여야 할 윤리적 규준들을 가다듬었다. 정의의 규준, 약자 편듦의 규준, 균형의 규준, 전쟁의 적극적 배제의 규준 등이 그것이다. 나는 이 규준들에 입각해서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 이루는 일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하였다. 분단 현실을 규정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감안하면서 나는 1972년 「남북공동성명」 이래로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의 「남북공동선언」, 2007년의 「남북 정상선언」의 바탕을 이루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입각하여 남북관계를 통일지향적 평화관계로 발전시킬 것을 제안하였고, 한반도에 지정학적, 군사정치적 이해관계를 갖는 국가들의 다자간 안보협력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남북전쟁 당사자들 사이에 평화협정과 불가침협정, 그리고 국교정상화 절차를 밟아나갈 것을 제안하였다. 이북의 주체적인 경제회복과 경제발전을 지원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남이 남북 경제협력을 활성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한반도 경제공동체 형성에 능동적으로 기여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국가들 사이의 외적인 평화는 관련 국가들의 내적인 평화 없이는 달성되기 어렵다. 한반도에 정립된 두 국가들이 각각 내적인  평화를 이루려면 정의가 수립되고 민이 정치적 결정의 주체로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두 국가들 사이에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관계를 수립하는 일이 탄력을 받고 민의 이익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두 국가의 관계가 규율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일본과 미국, 중국과 러시아 등이 내부적인 모순들을 견디지 못하고 외부에 적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 내부의 강압적 통합으로 도모한다면, 한반도와 동북아에 치명적인 결과가 빚어지지 않겠는가? 나는 이 중요한 문제를 지면관계로 이 글에서 다루지 못했다. 다른 기회를 얻어 이를 다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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