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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6 (09:18) from 220.66.47.11' of 220.66.47.11' Article Number :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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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윤리학의 학문적 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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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윤리학의 학문적 정위

강원돈 (사회윤리/한신대 교수)


 한국기독교사회윤리학회가 학회 창립 10주년 행사를 기획하면서 한국기독교사회윤리학의 학문적 정위를 주제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하인츠-디트리히 벤트란트가 말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사리를 살피자면, 모든 윤리는 결국 “사회윤리”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할 듯한데, 우리 신학계에서는 사회윤리의 대상과 방법 등을 둘러싸고 여전히 이견이 많기 때문이다. 사회윤리의 대상과 관련해서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 둘을 양자택일적인 것으로 보고 기독교윤리학은 아무래도 개인윤리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가 여전히 강력하게 제시되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사회윤리는 기독교윤리학 바깥에 설정되거나 기독교윤리학의 임계선에 간신히 달라붙어 있는 일종의 부록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한국기독교사회윤리학의 학문적 정위라는 과제를 설정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기독교적 관점을 갖고서 사회윤리를 학문적으로 정립하고 활발하게 전개하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회윤리학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먼저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상을 설정하는 일은 이미 윤리하는 관점과 방법을 암암리에 전제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윤리학이 아니라 굳이 기독교사회윤리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의 적용영역을 기술적으로 통제해 두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앞으로의 논의에서 밝혀지겠지만, 나는 기독교사회윤리학의 대상을 제도적인 것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둘째, 기독교사회윤리학이 제도적인 것을 다루는 데 세상을 보는 기독교 특유의 관점과 방법이 어떤 공헌을 하는가를 따져보는 일이다. 그것은 기독교사회윤리학의 신학적 근거설정의 과제일 터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교의학과 윤리학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끝으로, 기독교사회윤리학의 대상으로 설정되는 제도적인 것의 인문․사회과학적 분석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규명하여야 한다.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기독교사회윤리학이 윤리적 판단의 규준을 정하는 일과 윤리적 행위의 준칙을 정하는 일을 일단 구별하고, 인문․사회과학적 현실분석을 기독교사회윤리학에 매개하는 맥락을 밝히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면 먼저 기독교사회윤리학의 대상을 논하기로 하자.

I. 기독교사회윤리학의 대상

 서양 기독교 윤리사에서 사회윤리는 매우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사회윤리학의 대상에 대한 논의도 결코 새삼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개신교의 역사에 국한해서, 그것도 몇 몇 걸출한 신학자들의 생각을 중심으로 해서 사회윤리학의 대상이 어떻게 논의되었는가를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1. 서양 개신교 윤리사에서 사회윤리의 뿌리는 마르틴 루터의 두 왕국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하나님 통치의 두 방식을 구별하고, 이에 상응하는 교회와 국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율법에 대한 냉정한 이성의 해석에 따라 사람들의 공적인 관계를 규율하는 방식을 논하고자 했다.
 윤리학의 전성시대로 알려진 18-19세기에 슐라이에르마헤르는 기독교 도덕론이 철학적 윤리학의 바탕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철학적 윤리학은 자연에 대한 이성의 행위를 체계적으로 다루는 것을 과제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에 관한 논의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각각 자연을 조직하고 상징화하는 네 가지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것은 자기동일적 조직화, 개별적 조직화, 자기동일적 상징화, 개별적 상징화인데, 슐라이에르마헤르는 집단적-유적 차원의 조직화에 해당하는 자기동일적 조직화로부터 교환, 경제, 법률 등을 망라하는 국가공동체가 비롯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윤리학이 교환, 경제, 법률 등의 제도적인 문제를 다루는 사회윤리의 형식과 내용을 갖게 된다는 통찰로 이어진다. 이성 중심의 철학적 윤리학과 범주적으로 구별되는 기독교 도덕론은 경건에서 비롯되는 행위의 동기를 강화하여 이와 같은 윤리학의 보편적인 과제를 구현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슐라이에르마헤르의 제자이기도 한 리하르트 로테는 기독교적 이상이 구현되기 이전의 세계와 그 이후의 세계를 역사적으로 구별하고, 기독교 세계에서는 교회가 국가로 해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교회에 국한된 특수한 윤리학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고, 그리스도 사랑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져야 할 의무와 책임을 규명하는 윤리학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리하르트 로테의 기독교윤리학은 기독교사회윤리학의 내용과 형식을 취하게 된다.
 서양 개신교 윤리사상사의 맹아기와 준비기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입장들이 갖는 중요성은 사회윤리가 개인윤리와 구별되는 차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다는 데 있다. 개인윤리는 개인의 도덕성과 도덕적 행위능력을 함양하면 공동체 전체의 선과 정의가 증가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사회윤리는 인간이 집단적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 이상이라는 것을 통찰하고 있으며, 공동체를 규율하는 방법은 개인의 도덕적 행위능력을 향상시키는 방법과는 분명 달라야 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2. 20세기에 들어와 사회윤리의 과제를 명료하게 제시한 신학자는 라인홀드 니버일 것이다. 그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서로 날카롭게 대립시키는 방법론적 이원론에 입각하여 도덕과 정치를 구별하는 기독교 현실주의 노선을 제창한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설사 어떤 사회가 도덕적으로 잘 훈련을 받았거나 도덕적으로 성숙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사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힘에 압도적으로 지배받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집단들 사이의 정의로운 관계는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인 설득과 조정에 의해 수립될 수 없기 때문에 정의를 위해 강제력의 사용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버는 이를 가리켜 “정치적” 방법이라고 일컬었다.
 니버가 제창한 “정치적” 방법이 기독교 사회윤리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토대임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한 신학자는 고범서였다. 고범서가 보기에 “‘정치적 방법’이 사회윤리학의 방법론을 위해서 가지는 엄청난 중요성”을 “니버 자신조차 몰랐다”고 한다. “니버의 정치적 방법이야말로 체계적인 사회윤리학 구축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원리였는데, 그것을 기독교 윤리학계가 간과했기 때문에 기독교 사회윤리라는 말은 무성하게 사용되지만 오늘날까지 사회윤리학의 특성을 살린 체계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에 기대어 고범서는 1970년대 초에 이미 개인윤리와 확실하게 구별되는 사회윤리를 정립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필자의 입장에 의하면 사회문제에 관심하고 그것을 다룬다고 해서 반드시 사회윤리는 아니다. 사회문제의 해결을 정책과 제도 나아가서는 사회구조의 레벨에서 추구할 때 비로소 사회윤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사회의 정책과 제도가 합리적이고 정의로울 때라야 비로소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범서가 시도한 기독교사회윤리학의 정위는 오늘의 담론윤리에 비추어 볼 때 다소 일방적인 인상을 준다. 담론윤리는 인류의 생활이 역사적으로 진화하면서 생활세계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하부체계들이 분화되어 나갔지만, 이러한 하부체계들을 규율하는 규범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설득과 동의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득과 동의 과정이 갖는 중요성을 포획할 수 없을 정도로 강제력에 근거한 정책이나 제도를 강조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 윤리이기 이전에 힘을 힘으로 규율하는 정치적 현실주의로 귀착될 공산이 클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고범서가 사회윤리의 논의 수준을 제도로 설정한 것은 여전히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제도는 우리 시대의 사회윤리학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임이 틀림없다. 사회윤리의 대상을 제도 혹은 제도적인 것으로 제안한 우리 시대의 뛰어난 신학자는 에른스트 볼프이다. 그에 따르면, 제도들은 무질서의 힘에 대항하여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삶의 관계들로서 그것들이 없고서는 세상에서 인간이 현존할 수 없다. 볼프는 이처럼 제도들을 인간 현존의 조건으로 규정한 뒤에 곧바로 그 제도들은 결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형성되고 개선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덧붙인다.
 
 3. 이와 같은 볼프의 제도 이해는 아르투르 리히에게서 조금 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났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실존은 관계들의 현실성이다. 리히는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나와 그것의 관계론을 확장시켜 각 개인이 자신의 내면세계와 맺는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 관계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에 어느 하나만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이 관계들의 복합적 총체로서 현존한다. 리히는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는 관계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제도화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우정이나 연인관계처럼 지극히 사적인 영역을 제외하면, 결혼, 가족, 공동체, 이익사회, 국가, 국제관계들은 모두 제도들이며, 개개인은 이 제도들에 다양하게 통합되어 있다.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자연도 무구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자연은 경제활동을 위한 재화로 인식되고 있으며, 생태계와 경제계는 에너지 물질 순환을 통해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었다. 가장 내면적인 영역이라고 인정되어 온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제도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아이덴티티로 규정한다면, 아이덴티티 형성에 미치는 제도의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인간의 아이덴티티는 제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화의 산물이며, 근대 사회에서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 나타난 노동의 소외는 노동자들의 내면성을 규정하다시피 한다.
 아르투르 리히는 인간 실존을 규정하는 이러한 관계들에 대응하는 윤리의 유형을 개체윤리, 상호윤리, 환경윤리로 설정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이 관계들이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 관계들의 제도적인 측면을 다루는 윤리학이 따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사회윤리이다. “사회윤리는 나와 나 자신의 관계, 나와 너/너희의 관계, 너/우리와 그것의 관계의 윤리적 질을 함께 규정하는 사회적 공동생활 제도들을 어떻게 구조적으로 규율할 것인가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한다. 그런 한에서 사회윤리는 간접적인 것의 윤리, 혹은 사회구조와 관련된 윤리이다.”

 4. 이처럼 사회윤리학이 도덕적 행위주체로서의 인간을 직접 다루지 않고 사람들이 삶을 꾸리기 위해 형성하는 관계들의 제도적 측면을 규율하여 선과 정의를 실현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개인의 도덕적 능력을 향상시켜 사회정의와 공동선을 도모하려는 것은 원칙적으로 개인윤리적인 구상이지 사회윤리적인 구상일 수 없다. 사회윤리는 개인윤리와 다른 발상과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윤리학의 방법과 관점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충실하게 답변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사회윤리학이 반드시 고려하여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추려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하나는 제도적인 것을 이해하는 신학적 패러다임을 가다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제도적인 것에 관한 윤리적 판단과 행위의 원칙을 밝히는 것이다.
 아래서는 먼저 제도적인 것을 이해하는 신학적 패러다임을 논하기로 한다. 그러나 신학적 패러다임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의 학문적 정위와 관련하여 교의학과 윤리학의 관계를 규정해 두는 것이 좋겠다.

II. 기독교사회윤리학에서 교의학과 윤리학의 관계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계에서는 윤리학과 교의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신학자들은 윤리학을 신학의 독자적인 부문으로 보지 않고 교의학의 한 분야로 본다. 또 다른 신학자들은 윤리학을 교의학에서 독립된 별도의 신학 분과로 규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윤리학을 교의학의 일부로 보는 입장을 가장 분명하게 대변하는 신학자는 칼 바르트일 것이다. 그는 윤리학을 교의학의 “과제”로 이해한다. 교의학이 먼저이고 윤리학은 그 뒤를 따른다는 식이다. 교의학이 하나님의 은혜의 현실을 먼저 직설법적으로 서술할 수 있어야, 그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계명을 명령법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하는 생각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는 바르트의 이해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바르트가 선택론, 창조론, 화해론의 과제로서 윤리를 설정하며 역설하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인간을 선택하고, 만물을 무화시키는 죄의 권세로부터 지켜주고, 죄인을 용납하여 죄인과 화해하는 현실이 직설법적으로 먼저 확립되었기에 인간에 대는 하나님의 명령법이 성립되고, 하나님의 계명에 대는 인간의 응답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율면, 윤리학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핽는 자유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데 있을 뿐이고, 그 이외의 다른 별도의 근거를 가질 이유가 없다. 이와 같은 윤리학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개인의 인의와 갱신과 성화에 관련될 뿐, 그 인간의 삶이 전개되며 형성하는 관계들의 제도적인 측면들을 직접 다룰 수는 없다. 바로 여기서 교의학적 근거 위에 세워진 윤리학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교의학이 규명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현실로부터 윤리학을 설정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세상의 상실이다. 바르트는 예컨대 창조론에서 인간이 세상에서 형성하여야 할 관계들의 모범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의 현실성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이 하나님 안에서 실현된 삼위일체 관계들을 유비로 해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후자와 같아져야 하고, 같아질 수 있다. 이와 같은 바르트의 주장은 본질과 현상에 관한 모델 플라톤주의의 잔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바르트가 그리스도론에 근거하여 구상하는 윤리학은 하나님의 현실 안에서만 맴돌고 있을 뿐, 세상과 접촉하고 소통할 수 있는 구조가 없다고 말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현실에 조응하는 세상의 현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바르트의 윤리학은 세상 없는 윤리학이고, 세상에 대해 유폐된 윤리학이다.
 
 2. 윤리학을 교의학의 과제로 설정하는 한, 바르트가 빠져든 함정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 묘책은 윤리학을 교의학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윤리학의 과제는 인간의 삶의 관계들을 규율하여 더 많은 선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과 그 삶이 전개되는 장으로서 세상의 상대성을 존중하는 진지한 자세를 갖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윤리학은 상대적인 것의 조건들 아래서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더 바르게 형성하기 위한 관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삶이 형성하는 그때그때의 현실관계들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규범적 판단을 먼저 설정하고 그 규범들을 현실관계들에 덮어씌우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작업이 되기 쉽다. 윤리학은 현실관계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분석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제약조건들 아래서 현실관계들을 대안적으로 형성하는 관점과 방법을 제시하여야 한다. 현실분석을 통한 문제의 인식, 문제가 되는 현실에 대한 윤리적 판단, 문제 해결을 위한 실현가능한 대안의 모색 등으로 이어지는 윤리적 성찰의 특성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윤리학이 교의학과 확연히 구별되는 관점과 방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저절로 분명하다.
 
 3. 물론 윤리학을 교의학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말은 윤리학의 성찰 과정에서 교의학이 불필요하다는 뜻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교의학적 성찰은 윤리적 성찰이 전개되는 결정적인 문맥에서 고려될 수 있고, 또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윤리적 판단의 원칙을 제정할 때, 어째서 이 원칙이어야 하고 저 원칙이면 안 되는가를 교회에 밝혀야 할 경우이거나, 교회가 어떤 윤리적 행위의 지침을 수용하도록 설득하는 경우를 염두에 둘 때, 기독교윤리학의 전개 과정에서 교의학적 진술의 불가피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 분석의 순서에서는 교의학적 설명이 맨 뒤에 오더라도, 서술의 순서에서는 교의학적 설명이 맨 앞에 올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점들을 십분 감안한다 할지라도, 기독교사회윤리학자는 교의학이 설명할 수 있는 것만이 현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기독교사회윤리학에서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신학주의에 빠져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철학적 윤리학과 신학적 도덕론의 관계에 대해 슐라이에르마헤르가 제시한 통찰을 다시 음미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III. 제도적인 것을 보는 신학적 관점

 그렇다면 기독교사회윤리학이 제도적인 것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신학적 관점이 필요한가?
 
 1. 이미 앞에서 조금 다른 논의 맥락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바르트처럼 하나님의 초월적 현실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현실에 압도되어 세상의 상대적 현실을 긍정하기 어렵게 되고, 심지어는 윤리학의 대상이 상실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보다 더 극단적인 경우는 초기 바르트의 교의학에서 엿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이 인륜적 실천을 통해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19세기 부르주아 신학의 환상이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여지없이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바르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면에 부각시킨 바 있다. 이러한 신학적 구도에서는 세상적인 것의 존립이나, 제도적인 것의 형성을 중시하는 입장이 설 땅이 없다. 거기서는 윤리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윤리에 대한 비판만이 가능할 것이다.
 
 2. 그렇다면 제도적인 것의 실정성(Positivitaet)을 긍정하는 관점은 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제도적인 것의 실정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띤 신학자들은 독일 에어랑엔 학파의 파울 알트하우스와 베르너 엘러트, 그리고 변증법적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에밀 브루너일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내지는 보존질서로부터 인간 세상의 제도들을 설명하고자 했다. 가정, 노동과 소유, 국가 등을 창조질서로 간주할 경우, 이 제도들은 인간의 복된 삶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미리 허락한 삶의 여건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이 제도들의 지양은 생각될 수 없다. 이 제도들을 보존질서로 이해할 경우, 이 제도들은 하나님이 제정한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죄의 현실성에 맞서서 무질서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죄가 총체적으로 지양되지 않는 한, 이 제도들의 폐지는 허락될 수 없다. 어느 경우든 이미 주어져 있는 제도들의 유효성을 부정해서는 안 될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만일 베르너 엘러트처럼 하나님의 통치가 두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하나님이 제정한 질서들이나 제도들이 그 자체의 고유한 법칙(Eigengesetzlichkeit)에 맡겨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가부장적 가정 질서나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노동 질서나 히틀러 독재 국가도 하나님의 보존질서에 내장된 고유한 법칙의 발현으로 간주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제도들의 실정성을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신학적 관점은 대단히 위험하다.
 
 3. 기독교사회윤리학이 제도적인 것을 다루지 못하는 신학적 무력 상태에 빠지지 않고 또한 제도적인 것의 실정성에 압도되지도 않도록 하는 실마리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적 통찰에서 찾을 수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세력은 이미 무효화되었지만 세상에서 죄의 지배는 아직 지양되지 않았다는 것을 예리하게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지배와 세상의 관계를 보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을 날카롭게 구별하되, 이 둘을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 연관시키려고 한다. 본회퍼는 “궁극 이전의 것은 궁극적인 것에 의해 완전히 지양되고 무효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속한다.”고 자신의 새로운 통찰을 정식화한다. 궁극 이전의 것은 그 존속 기한이 정해져 있고, 그 기한을 정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오직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재한다. 그 분만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그 분을 통해 세상은 그 종말을 향해 성숙해질 때까지 존속한다.” 이렇게 그 존속이 허락된 피조물은 세상에서 여전히 궁극 이전의 것에 머물러 있다. 본회퍼는 이러한 피조물을 “자연적인 것”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성격화한다. “자연적인 것은 타락한 세계에서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는 생명의 모습, 그리스도를 통한 인의와 구원과 갱신을 고대하는 생명의 모습이다.”
 이와 같이 이해되는 “자연적인 것”은 단지 죄에 물든 것으로 간주되어 철저하게 부정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또 “자연적인 것”은 이미 완성된 것으로 인정되어 무조건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 궁극 이전의 것과 궁극적인 것은 이처럼 긴장관계에 있다. 인간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여야 할 것인가를 묻고 그 대답을 찾아야 할 곳은 바로 이 긴장관계이다.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세상을 형성해야 할 인간의 책임은 한편으로는 궁극적인 것을 통해 궁극 이전의 것을 뿌리로부터 철저하게(radikal)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데서 성립한다. 세상을 형성해야 하는 인간의 책임은 또 다른 한편으로는 궁극 이전의 것과 단순히 타협하여 궁극적인 것을 망각할 수 없게 만든다. 궁극적인 것의 현실성에 비추어 궁극 이전의 것이 참칭하는 고유한 법칙을 비판적으로 까발리지 않고서는 세상을 위해 하나님이 진짜 하고자 하는 일에 따라 세상을 형성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디트리히 본회퍼가 기독교윤리학을 위해 이룩한 업적은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매개하는 장소로서 “자연적인 것”을 설정하고, 궁극 이전의 것이 궁극적인 것을 향해 투명해지도록 인간이 세상을 책임 있게 형성하여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였다는 데 있다. 바로 여기서 제도적인 것을 다루는 신학적 관점도 분명해진다.
 
 4. 이러한 관점은 귄터 브라켈만에게서 더욱 더 예리하게 가다듬어졌다. 그는 “이미 지금”과 “아직 아니”의 종말론적 긴장관계를 주목하면서 세상을 제도적으로 형성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을 “지속적 개혁주의”로 성격화한다. 지속적 개혁주의는 이미 주어져 있는 세상의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나 “비판적 태도”를 취하되, 그것을 “최선을 다해 가장 낫게 형성하기 위한 책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지속적 개혁주의는 “기독교인들에게 질서들을 개혁하고 변혁할 필요가 있는 곳에서 그렇게 하고자 책임 있게 결단할 수 있는 내적인 자유를 준다. 기독교인들은 기존의 구조를 유일무이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는 것으로 볼 수는 더더욱 없다. 기독교인들은 결혼, 가정, 국가, 경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떻게 존재하여야 하는가는 기독교인들의 책임에 맡겨져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종말론에서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의 성공적인 매개 모델을 보는 아르투르 리히는 궁극 이전의 것과 궁극적인 것 사이의 긴장영역에서 “궁극적인 것의 부름”에 귀를 기울일 때 세상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궁극 이전의 것의 절대성 요구를 상대화시키고, 세상을 형성하는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기독교인들이 세계상황의 위기 징후들을 인지하는 곳에서 그들은 “궁극적인 것의 부름”에 귀를 기울이고, 궁극적인 것에 비추어 위기의 해법을 모색하되, 세상에서 실현가능한 것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냉정하게 최선의 대안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와 같은 신학적 패러다임을 전제할 때에만, 기독교사회윤리학은 궁극적인 것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제도적인 것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취하면서 조금 더 선하고 조금 더 정의롭게 제도적인 것을 형성하는 일의 의의를 인정하게 된다.

IV. 기독교사회윤리학에서 윤리적 판단 규준과 행위 준칙의 구별

 기독교사회윤리학은 궁극 이전의 것이 궁극적인 것에 투명해지도록 요구하면서 제도적인 것을 규율하여 더 많은 선과 더 많은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을 그 과제로 삼는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것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제도적인 것의 현실을 투명하게 인식하여 그것의 문제들을 파악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윤리적 구상을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은 제도적인 것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인 분석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인문․사회과학적 현실분석을 어떤 문맥에서 수용하여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충실하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사회윤리학에서 윤리적 판단의 규준과 윤리적 행위의 준칙을 논리적으로 구별하여야 한다.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우선 궁극적인 것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며 제도적인 것과 관련하여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원칙들을 가다듬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이러한 원칙적 판단에 가급적 충실하면서도 역사적 제약조건들을 감안하면서 제도적인 것을 가능한 최선의 것으로 형성하는 데 고려하여야 할 준칙들을 마련하여야 한다. 앞의 것을 가리켜 윤리적 판단의 규준이라 하고, 뒤의 것을 일러 윤리적 행위의 준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윤리학의 전통에서 윤리적 판단의 규준과 윤리적 행위의 준칙을 철학적으로 명료하게 구별한 사람은 임마누엘 칸트였다. 그의 도덕 형이상학은 한 마디로 이성의 명령을 자신의 의지로 삼고 행위하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명제는 절대적 명법이 더 이상 그 뒤를 캐어물덄 이상없는 이성의 원리에 근거한다는 확신을 표현하는데, 이 확신은 선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규준이 그 규준에 따라 행위하도록 이끄는 윤리적 행위의 준칙과 구별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전제한다. 실천이성의 명법과 도덕적 행위의 준칙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지만 둘은 서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실천철학을 둘러싼 오늘의 논의에서도 부브너는 칸트의 확신을 재정식화하면서 행위와 준칙과 규범(규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준칙론은 행위개념과 규범의 근거설정 사이의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 준칙론은 실천을 염두에 두면서 규범들의 탄생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주장하는 규범들의 합리성을 검증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게 하는 과제를 맡는다.”
 
 2. 철학적 윤리학에서 그런 것처럼, 기독교사회윤리학에서도 윤리적 행위의 준칙들은 윤리적 판단의 규준들과 행위 내지 제도 형성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윤리적 규준은 궁극적인 것의 요구에서 비롯되기에 세상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에 투명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당위적인 요구를 담는 명법의 형태로 주어진다. 윤리적 준칙은 세상의 조건들 아래서 이루어지는 행위 혹은 제도 형성과 관련되는 것이기에 그것은 두 가지 요구 아래 놓인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는 윤리적 규준에 담긴 당위적 요구에 충실하고자 하는 태세를 확립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행위나 제도 형성이 이루어지는 세상의 현실적 제약조건들에 대한 투명한 인식이다. 윤리적 준칙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이 둘은 따로 놀아서는 안 된다. 에둘러 표현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도 막연한 일이기에, 그 나라를 향한 긴 도정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이정표를 설정하는 일을 윤리적 준칙의 제정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큐메니칼 사회윤리가 태동하던 시기에 올드햄이 제창한 중간공리(middle axiom)가 여기서 말하는 윤리적 준칙에 해당한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기독교사회윤리학에서 윤리적 규준은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투명해야 한다는 일종의 절대적인 요구를 명료하게 정식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윤리적 규준들로부터 행위의 준칙들이나, 제도 형성의 정책적 구상을 직접 도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윤리적으로 의미 있는 행위도 그렇지만, 제도적 현실의 변혁이나 개혁을 위한 제안 또는 그에 따르는 실천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의 영역, 곧 역사적인 현실관계들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대안정책의 구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은 제도들의 문제들에 대한 분석과 제도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에 대한 평가가 엄밀하게 이루어질 때라야 비로소 착수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대안정책의 구상과 그 실천을 이끌어가는 윤리적 준칙들이 윤리적 규준들과 무관하게 제정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대안정책의 구상과 그 실천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투명하게 지향하여야 할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윤리적 규준들을 존중하여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현실관계들 안에서 보다 나은 삶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을 최선을 다해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3. 이처럼 윤리적 규준들과 윤리적 준칙들을 구별하고 나면, 이 규준들로부터 세상의 일을 조직하는 방략을 직접 도출하거나, 그 규준들을 제시하기만 하면 기독교사회윤리학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윤리적 규준들이 지시하는 행위와 제도 형성의 지향점은 결코 유토피아가 아니다. 윤리적 규준들은 윤리적 준칙들을 매개함으로써 비로소 현실성을 갖는다. 윤리적 규준들이 현실성을 갖기 위해 윤리적 준칙들을 매개하여야 한다면, 윤리적 규준들은 매개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정식화되어야 한다. 윤리적 규준들은 인간의 행위와 제도들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의거하는 원리로서 세상을 형성하는 데 구속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바로 그런 만큼 인간의 행위와 제도 형성을 규제하는 준칙을 구성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윤리적 판단의 규준들을 이러한 정도까지 정식화할 수 있을 때,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윤리적 판단의 규준들을 존중하면서 윤리적 행위의 준칙들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제도 형성을 규율하는 지침 내지 정책 구상의 수준까지 구체화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

V. 제도적인 것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인 분석의 수용

 기독교사회윤리학이 제도적 현실관계들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분석을 필요로 하고, 그 작업이 윤리적 준칙을 제정하는 일과 관련된다는 것은 앞에서 윤리적 규준과 준칙이 맺는 관계를 규명한 바로부터 논리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제도적인 것에 대한 신학적 관점은 제도적인 것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인 접근을 촉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제도적인 것에 대한 신학적 관점이 제도적인 것의 현실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신학의 과제라기보다 인문․사회과학의 과제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기독교사회윤리학이 제도적인 것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인 분석을 수용하여야 한다면, 그 수용의 방법을 상세하게 밝혀야 하겠지만, 지면 관계상 이를 다룰 수는 없다. 여기서는 기독교사회윤리학이 인문․사회과학적인 현실분석에 대해 어떤 관점과 방법을 특별히 주문할 필요가 있는가를 몇 가지 짚고 넘어가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1.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본질서들이나 기본제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들이 자연적 조건들과 문화적 조건들 아래서 역사적으로 형성해 왔던 산물들이다. 제도적 현실관계들을 이렇게 인식할 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제도들 가운데 무엇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하고 무엇이 “마치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가를 구별하는 것이다. 제 아무리 기본적인 제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현실형태가 더 이상 삶에 필요하지 않게 되었는데도 “마치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을 마땅한 것인 양 사람들을 설득하여 이익을 얻는 세력이 있거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종의 강박(Sachzwang)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전통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규율하는 가부장제는 신석기 시대에 이룩된 경제적 잉여를 상속의 형태로 보존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고, 부계 혈통에 따르는 상속 제도는 경제적 잉여의 생산과 그것의 군사적 보존에 더 많이 공헌하였다고 정치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남성의 특권을 유지하는 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생산의 기술화가 고도로 달성되고 정치사회적 안보가 근육의 힘과 무술에 의존하지 않게 된 오늘의 세계에서도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정상적인 제도로 인정될 수 있을까? 가부장제 질서를 이상적인 가족 모델로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세력들은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어떤 이득을 얻는 것일까?
 또 다른 예를 들자면, 근대에 들어와 노동시장이 성립되면서 노동업적에 따른 소득보상이 사회조직 원리로 확립되었는데, 이와 같은 노동사회의 원리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고 고용 없는 경제성장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오늘의 세계에서도 당연하고 필요한 것으로 통용되어야 할까? 오히려 오늘의 세계에서는 근대 노동시장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몸에 새겨진 노동 규율을 불식시키고 사회적 기본소득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아마 이와 같은 예들을 열거하자면, 그 목록은 끝이 없을 것이다.

 어떤 제도가 의사필연성의 모습을 띠면서 당연하고 정상적인 양 등장하는 것은 그 제도를 유지하여야 특정 세력의 이익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을 밝히기 위해 고안된 수단이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이데올로기는 특수한 이해관계를 보편적인 이해관계로 포장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이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제도적 억압과 배제의 현실에 둔감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폭로하여 억압과 배제의 현실을 드러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심리분석과 결합되면서 제도들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원리가 과잉억압에 근거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철학자들은 인간의 문화가 충동을 적절하게 억압함으로써 성립되었다는 것을 밝혀낸 프로이트의 분석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면서 심리분석을 사회사적이고 정치사회학적인 맥락에서 새로 읽어내고자 하였고, 이를 통하여 인간의 충동에 대한 과잉억압에 근거한 제도가 인간의 내적 자연을 어떻게 황폐화시키고, 외적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격성을 어떻게 강화시키는가를 분석하였다. 인간이 몽매와 자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인간과 인간의 화해, 인간과 자연의 화해, 자기자신과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 구상하였던 근대의 계몽주의적 기획이 도리어 인간의 삶을 내면적으로 옥죄고 그 삶의 자연적 기초를 붕괴시키는 파괴적 무기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이론가들의 날카로운 지적은 제도들을 형성하는 작업에서 과잉억압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고 할 것이다.

 2. 제도를 형성할 때, 제도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망각하면, 제도는 인간의 규율로부터 벗어나 자립적 실체인 양 행세할 수 있다. 제도는 일단 성립되면 바꾸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제도가 독립적인 실체인 것 같은 환상이 강화된다.
 본래 제도는 세상에서 인간의 삶을 제대로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인간이 만든 제도가 인간의 삶을 불편하게 하면, 그것을 폐지하거나 바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애초부터 꿈꾸지 못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이 있다. 인간의 사회와 제도를 움직이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는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법칙이 마치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특히 경제 현상을 다루는 학문 분야들에서 많이 나타난다. 경제학이 정식으로 표현하는 여러 법칙들은 경제가 경제법칙에 다라 작동하기 때문에 경제제도를 바꾸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인상을 자아낸다. 경제법칙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주장에 사이비 과학의 옷을 입히기 쉽다.
 그러나 경제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문화적 산물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조직될 수밖에 없다. 고대 사회의 경제는 원시 시대의 경제와 똑같은 원리로 운영되지 않았고, 중세 사회의 경제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를 작동하는 원리를 대부분 알지 못했다. 자본주의만 해도 그것을 운영하는 제도적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각 시기의 경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제도들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그러한 제도들을 움직이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법칙의 신화를 깨뜨리는 것은 제도적인 것을 책임적으로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관점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신화 비판을 통하여 거듭해서 돌아가야 할 진리는 제도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제도가 제도를 규율하는 질서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도 신화적 발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자생적 질서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시장을 시장 원리에 맡기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최저임금제, 사회적 소득재분배, 고용보장 등과 같은 시장 규제는 시장 주체들에게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제아무리 사회적 형평과 연대라는 고상한 가치를 앞세워 시장 규율을 정당화하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에 해악을 가져올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시장을 시장 원리에 맡기라는 주장은 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결론이다. 그러나 시장 원리의 절대화로 치닫기 마련인 이와 같은 주장은 시장의 자생적 질서로 내세워지는 경쟁이나 시장분배나 가격장치에 대한 미신에서 기인한 것임이 분명하다. 제도가 자생적 질서에 따라 움직이게 내버려 두라는 주장은 제도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을 도외시한다는 점에서 역시 신화요, 이데올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인문․사회과학들이 제도의 문제를 다룰 때 오늘 인류가 도달한 기술 능력의 수준을 정확하게 평가하도록 촉구하여야 한다. 인류의 기술 능력은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역사상 유례없이 높은 수준의 복지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통제를 이미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위기의 징후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생태계 위기, 유전자 조작, 원자력 에너지 사용 등은 위기의 징후들을 기록한 긴 목록의 몇 항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기술 능력이 향상되면 향상될수록 인류의 기술적 개입은 인간의 세상과 지구 환경에 장기간에 걸쳐 더욱 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예를 들면, 화석연료를 대규모로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기후 변화는 인류의 문명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고, 그로 인하여 발생할 피해의 규모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오늘 우리가 엄청난 기술 능력을 갖고서 결정하고 실행한 일이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에 가져올 결과들에 대한 책임을 염두에 두고서 기술 능력을 규율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들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인간의 기술적 개입이 먼 미래에 가져올 결과를 지금의 인지 능력으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기술적 개입을 금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의 개입이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에 가져올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기술 개입은 오늘의 세대와 미래의 세대들 사이에서 그 적절성을 다투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세대간의 정의를 제도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정교한 규칙과 이를 뒷받침하는 비용 계산 방법이나 이자율 산정의 방법 등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4.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제도적인 것을 규율하는 규범과 법을 제정하는 제도적 절차를 민주주의적으로 마련할 것을 강조하여야 한다. 제도화된 현실관계들을 규율하는 주체가 그 관계들 속에 들어가 있는 구성원 전체여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요구라면, 제도를 규율하는 절차가 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논리적 귀결일 것이다. 이와 같이 제도의 규율과 민주주의의 관계가 중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적인 제도분석에서 민주주의 이론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분야로 꼽힌다.
 오늘의 세계에서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칙에 따라 제도 문제를 집단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고, 현재의 세계상황에서는 그것이 제도 문제에 관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정치적 합의과정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아직 공동체를 규율하는 규범들과 제재들의 체계를 공동체적으로 제정하는 단계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만일 민주주의가 정치세력들과 사회세력들의 이해관계를 그때그때마다 현실적으로 조절하는 장치에 그친다면, 그것은 권력이나 화폐를 매개로 해서 구축된 체제들의 한 기능으로 축소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체제가 기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지만 그 체제로 축소되거나 그 체제에 병합되지 않는 생활세계를 아우르는 원리여야 한다.
 생활세계가 제도들을 규율하는 규범들과 법률들의 타당성을 가늠하는 최종적인 심급이라고 한다면, 생활세계를 매개하여 삶의 의미가 생활세계의 주민들에게 공유되는 의사소통의 공동체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공동체는 행위를 이끄는 원칙들의 근거를 최종적으로 밝히는 담론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이러한 담론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담론의 주체가 강제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토론하고 진리에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담론공동체는 현실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상적인 공동체이다. 그러나 이 이상적인 담론공동체는 실제의 의사소통공동체에 대해서는 규제적인 역할을 한다. 일찍이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를 가리켜 실제의 의사소통 과정을 규율하는 데 “꼭 필요한 가상”(konstitutiver Schein)이라고 명명하고, 그 가상은 “사실적인 것을 거스르며”(kontrafaktisch) 작용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를테면, 현실의 담화 상황이 거짓말과 복선, 체계적으로 왜곡된 언어, 판에 박힌 구호, 불투명한 폭력 등등으로 심각하게 꼬여 있고 일그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지속적으로 나누기 위해서는 진실하게 표현하고 바르게 행동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또 그것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담론윤리는 제도적인 현실관계들을 규율하기 위해 실제적인 의사소통공동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를 놓고 많은 연구를 거듭해 왔다. 예를 들면, 실제적인 의사소통공동체에서 진지한 토론과 합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제해결에 대한 연대적인 책임이 원칙적으로 전제되어야 하고 그 의사소통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문제해결 과정에서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규칙을 밝혀낸 것이 그 예이다. 담론이론에서 오랫동안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서로 매개시키려고 시도하고, 이상적 의사소통공동체가 “점진적으로” 실제적인 의사소통공동체 안에서 실현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제약조건들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제적펠은 이상적인 의사소통공동체의 규제적 이념들은 “오직 수많은 실용적인 제약들제적인 만”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토론시간의 제한, 개개인의 이성능력과 주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의 차이, 체제합리성, 도구적 합리성 혹은 전략적 합리성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현실상황 등등이 그가 말하는 제약들이다. 이러한 실용적인 제약들을 구차하게 감수하면서까지 아펠이 실제적인 담론공동체의 형성조건들을 탐구하는 까닭은 이와 같은 담론공동체가 형성되어야 사람들의 삶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공론장에 회부하여 제도적인 것을 다루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활성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기독교사회윤리학이 제도적인 것을 규율하는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교회도 자신의 견해를 공론장에서 표명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교회는 공론장에서 어떤 특권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공론장을 이루는 생활세계의 주민들에게 자신의 견해가 어떤 근거에 서 있는가를 조리 있게 설명하여 공중을 설득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교회의 공공 활동을 보여 주는 모범적인 사례는 독일개신교협의회일 것이다. 독일개신교협의회는 국민교회(Volkskirche)라는 자기이해에 입각하여 국민적 관심사에 대해 교회의 입장을 성실하게 표명해 왔다. 이러한 의사표명은 교회가 공공 활동을 통하여 국민적 공동체에 대해 파수꾼의 역할을 수행할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교회의 자기이해, 곧 교회의 공공성 위임(Oeffentlichkeitsauftrag der Kirche)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교회의 공적인 의사표명은 의사표명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 대한 분석, 문제되는 현실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결단, 윤리적 판단과 결단의 신학적 근거의 설정 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통 백서(Denkschrift)의 형태를 취한다. 백서는 교회의 의견을 논증적으로 제시하여 공중을 설득하는 방식을 취한다.

VI. 맺음말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제도적인 것을 규율하여 더 많은 선과 더 많은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진지한 작업이다. 이와 같은 기독교사회윤리학의 학문적 정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한편으로는 교의학과 윤리학의 관계를 규정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인문․사회과학의 제도분석을 기독교사회윤리학에 수용하는 맥락을 드러내고자 했다.
 기독교사회윤리학이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윤리학을 교의학의 과제로 보는 관점과 결별하고 윤리학이 교의학으로 독립된 신학의 독자적인 부문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윤리학이 교의학으로부터 독립된다고 하더라도, 윤리학적 주장의 신학적 근거를 교회 앞에 제시할 때 윤리학은 교의학을 자신의 논리적 회로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사회윤리학은 교의학으로부터 제도적인 것을 다루는 신학적 관점을 배워야 하지만, 제도적인 것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제도적인 것의 현실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대신할 수 없다.
 기독교사회윤리학이 인문․사회과학적 현실분석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오직 윤리적 판단의 규준과 윤리적 행위의 준칙을 논리적으로 구별할 수 있을 때라야 해결될 수 있다. 윤리적 판단의 규준은 세상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투명해지도록 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기에, 윤리적 판단 규준의 신학적 근거를 밝히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윤리적 행위의 준칙은 윤리적 판단의 규준에 내포된 당위적인 요구에 충실하면서도 역사적인 제약조건들 아래서 제도적인 것을 규율하는 행위의 지침이나 대안정책의 구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윤리적 행위의 준칙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것의 현실성을 분석하는 일을 마다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제도적인 것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의 분석을 수용하여야 하지만, 모든 인문․사회과학이 기독교사회윤리학의 관심사를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어떤 원칙에서 인문․사회과학적 분석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는 제도적인 것을 다루는 인문․사회과학을 향해 기독교사회윤리학이 무엇을 주문할 것인가를 몇 가지 짚어 가면서 인문․사회과학적 현실분석을 수용하는 원칙을 간접적으로 밝히고자 했다. 제도강박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 제도 형성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심, 미래에 대한 책임의 제도화, 민주주의와 공공성 원칙의 존중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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