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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구상의 기독교윤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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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구상의 기독교윤리적 평가

강원돈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기독교윤리)

I. 머리말

 최근 몇 년 동안에 기본소득 구상은 위기에 직면한 사회국가를 개혁하기 위한 급진적인 강력한 대안으로서 큰 주목을 받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찬반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본소득의 본래 개념은 ‘무조건적인 기본소득’(bedingungsloses Grundeinkommen)이다. 이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들이 노동업적이나 노동의사, 가계 형편과 무관하게 정치공동체로부터 개인적으로 지급받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획기적인 소득분배 장치를 도입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누리고, 자본이나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발전과 공동체 형성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기본소득 구상은 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를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으며, 2006년에는 『기본소득 연구』(Basic Income Studies)라는 전문 잡지가 창간되어 이 구상에 대한 논의를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독일에서는 2004년 기본소득 네트워크(Netzwerk Grundeinkommen)를 위시하여 수많은 온라인 토론장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지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민주노총의 지원을 받아 기본소득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바 있으며, 2010년 1월에는 서울에서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기본소득 구상은 그것이 갖는 무조건성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논거들이 제시되고 있다. 한국 교회도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제도의 운영에 관심을 갖고 있고, 이 제도의 개혁과 맞물려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 구상에 대해 공적인 입장을 천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 구상의 신학적·윤리적 정당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서 나는 이 글에서 먼저 기본소득의 개념과 그 내용, 기본소득 구상의 역사적 발전, 사회국가 개혁에서 기본소득 구상이 갖는 의의,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 주장 등을 따져 기본소득 구상의 개요를 전반적으로 밝히고, 그 다음에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을 기독교윤리학적 관점에서 검토해 보려고 한다.

II. 기본소득 구상의 개요

1. 기본소득의 개념과 그 내용

 기본소득은 논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규정되고 있으나, 기본소득 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한 반 빠레이스의 규정이 표준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자산조사나 근로조건부과 없이 모든 구성원들이 개인 단위로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소득이다.” 이 규정에는 기본소득이 충족시켜야 할 다섯 가지 규준들이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1) 기본소득은 원칙적으로 현금으로 지불되고, 2) 정치공동체에 의해 지불되고, 3) 정치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개인적으로 지불되고, 4) 곤궁함에 대한 심사 없이 지불되고, 5) 그 어떤 반대급부 없이 지불된다는 것이다.
 반 빠레이스는 이 규준들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설명한다. 우선 현금 지불 원칙은 현물 지급이 갖는 용도의 제한이나 사용 기한의 제한을 피하기 위한 것이지만, 교육, 의료, 기타 공공서비스 차원의 인프라 구축과 같은 현물 제공은 보편적인 복지를 향상시키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현금 지급의 액수는 각 개인이 가난의 문턱을 넘어설 정도는 되어야 하지만, 각 개인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충분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애초부터 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둘째,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정치공동체는 많은 경우 국민국가를 뜻하지만, 국민국가보다 하위에 있는 지방정부나 국민국가를 초월하는 유럽연합이나 UN 같은 기구에 의해 기본소득 제도가 운영될 수도 있다고 본다.
 셋째,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은 국적시민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고, 국가 영토에 체류허가를 받고 살거나 납세의 의무를 다하는 외국인까지 포함하여야 한다고 본다. 교도소 수감자들은 그들을 위해 이미 수감 비용이 지불되고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 지급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의 지급 액수는 수급자의 연령이나 지역 생활비 편차 혹은 수급자의 건강상태나 장애 정도에 따라 차등화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수급자가 혼자 살든지 가족과 함께 살든지 엄격하게 개인 단위로 지급된다.
 넷째, 기본소득은 곤궁함에 대한 심사 없이 지불된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이다. 이 점에서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기존의 기초보장 제도와 다르다. 이와 같은 제도들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각 가구유형에 따르는 최저소득수준을 먼저 정하고, 노동소득, 기타 사회급부, 부동산 소유로 인한 수입, 연금 등으로 구성되는 각 가구의 총소득을 조사한 뒤에 최저소득 기준에서 총소득을 공제한 차액을 지급하게 되는데, 기본소득은 이와 같은 자산 조사나 소득 조사 없이 무조건 지불된다.
 다섯째, 기본소득은 근로조건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이다. 기초보장 제도는 노동연계복지 개념(workfare concept)에 따라 수급자에게 일자리를 찾거나 일자리를 제공받을 경우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노동 강제를 조건으로 급여를 지급하지만, 기본소득은 노동의지와 무관하게, 그리고 노동수행과도 무관하게 지급된다. 이것은 기본소득이 노동과 소득을 분리시키고 정치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 혹은 앞서 말한 경제적 시민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소득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 점에서 반 빠레이스는 앤소니 앳킨슨이 제안한 바 있는 ‘참여소득’ 구상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참여소득은 영아 보육, 노인 수발, 장애인 보조, 공인 협회를 매개로 한 자원봉사 등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사회적 기여일 터인데, 이러한 사회적 기여를 조건으로 한 급여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행정당국이 그 기여를 일일이 체크하여야 하기 때문에 행정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사생활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사회적 기여는 주로 명예직 활동의 영역인데, 참여소득은 명예직의 영역을 빼앗을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기본소득 구상은 역사적으로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 구상은 참신한 제안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오래된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기본소득 구상의 역사적 배경

 기본소득 구상이 역사적으로 발전한 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그 자체만 해도 매우 방대한 연구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이 구상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상세하게 다룰 수 없기에 오늘의 기본소득 논의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지는 몇 가지 맥락을 짚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 구상의 주요 규준들 가운데 하나는 국가가 모든 시민들에게 소득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를 주장한 최초의 사상가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고전적 유토피아 이론가인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였다. 요한네스 루도비쿠스 비베스(Johannes Ludovicus Vives, 1492-1540)는 공적인 손에 의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이유들을 조목조목 밝힘으로써 기본소득 보장 제도를 선구적으로 주창하였다.
 미국의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은 가난을 퇴치하는 수단으로서 지대를 분배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를 시민들의 당연한 청구권으로 인정하였다. 프랑스의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와 그 제자 빅톨 꽁시데랑(Victor Considérant, 1808-1893)은 국가시민들에게 최저보장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고, 조셉 샤를리예(Joseph Charlier, 1816-1896)는 이러한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방책으로 “토지수익배당” 제도를 제안하였다.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도 푸리에의 사상을 받이들여 노동업적과 무관하게 최저보장을 실시하고, 최저보장을 위한 몫을 공제한 나머지 국민총생산을 지대, 임금, 이윤으로 분배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기본소득 이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영제국에서 노동당에 의해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 논의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었다. 버트란드 러쎌(Bertrand Russell, 1872-1970)은 1918년에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를 종합하면서 노동과 소득을 분리시키고 노동강제를 배제하는 원칙에 입각하여 기본소득 구상을 제시하였다. 같은 해에 데니스 밀너(Dennis Milner, 1892-1956)는 생존보장의 틀에서 국가가 국민총소득 가운데 일부를 가난 퇴치를 위해 국가 보너스(State Bonus)로 내놓는 방안을 제시하였고, 클리포드 더글러스(Clifford H. Douglas, 1879-1952)는 전쟁 뒤에 마비된 소비를 끌어올리기 위해 사회적 신용(Social Credit)을 창출하여 국민배당(national dividend)을 실시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1929년 죠지 콜(George D. H. Cole)은 반대급부 없이 국가가 모든 시민들에게 지급하는 이전소득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고 이를 사회배당(social dividend)이라고 규정하였다. 1943년 자유주의자 줄리엣 리스-윌리엄스(Juliet Rhys-Williams, 1898–1964)는 사회배당 개념을 다소 수정하여 기본소득 개념으로 가다듬고, 이를 ‘새로운 사회협약’의 핵심 내용으로 삼자고 제안하였으며, 이 구상을 갖고서 비버리지 계획(Beveridge Programme)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은 마이너스 소득세(Negative Income Tax) 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마이너스 소득세를 도입할 경우, 복잡하기 짝이 없는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를 단순화하면서도 시장이 마찰 없이 제 기능을 수행하리라고 확신하였다. 로버트 테오발드(Robert Theobald, 1929-1999)와 제임스 토빈(James Tobin, 1918-2002)은 마이너스 소득세를 도입하여 소비를 안정시키고 가난을 퇴치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토빈은 모든 시민들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시민보조금(demogrant)을 구상하였다. 이 이론가들의 논의에 힘입어 미국 행정부는 1968년부터 마이너스 소득세를 시행하는 실험을 단행하였다.
 1984년 요아힘 미츄케는 마이너스 소득세 개념을 도입하여 독일의 복잡한 조세제도와 사회보장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시민수당(Buergergeld)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개념은 사회국가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막 시작되는 시점에서 자유당과 기독교 보수당 일각에서 사회국가의 대안개념으로 수용되었다. 1984년 최저소득 방안과 최저임금 문제를 다룬 『잘못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발간되면서 좌파 대안 세력과 녹색당 세력은 국가가 보장하는 최저소득 구상을 놓고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이론가들은 미하엘 오필카와 게오르크 포브루바였다. 특히 포브루바는 ‘노동과 소득의 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기본소득 제도를 구상하였다. 이와 유사한 논의는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약간의 시차를 두고 프랑스에서도 전개되었다.
 기본소득 구상의 역사적 맥락을 간략하게 살피더라도, 이 구상의 핵심이 국가(나 정치공동체)에 의한 보장, 소득과 노동의 분리, 소득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인정하는 데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3. 사회국가의 급진적 개혁 방안으로서의 기본소득 구상

 20세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기본소득 구상은 주로 이론가들 사이에서 논의되었을 뿐, 정치적이고 시민적인 공론의 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이르자 기본소득 구상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국가의 강력한 대안으로 부각되었고, 예컨대 독일에서는 유력한 시민단체들과 거의 모든 정당들이 기본소득에 관한 구상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최근에 신자유주의적 노동연계복지 모델에 입각하여 운영되는 사회국가의 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노동연계복지 모델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 것일까?

1) 신자유주의적 노동연계복지 모델에 대한 비판

 노동연계복지 모델은 본래 케인즈주의적 복지 모델에 근거한 전통적인 사회국가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강구되었다. 완전고용의 이상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게 된 1970년대 초 이래로 고용과 사회보장을 서로 결합시켰던 케인즈주의적 사회국가는 대량실업으로 인한 실업급부의 증가와 세수감소로 인해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1980년을 전후로 영국과 미국에서 집권한 대처와 레이건은 이와 같은 사회국가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케인즈주의적 사회국가의 복지(welfare) 개념을 신자유주의적 사회국가의 노동연계복지(workfare) 개념으로 전환시켰다.
 노동연계복지 모델은 기본적으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강령에 근거하고 있고, 그 운영 원칙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복지 급여와 노동 의무를 결합하는 것이다. 복지가 국가로부터 모든 시민들에게 보장되는 권리라면, 그 권리에는 반드시 반대급부가 따라야 하고, 그것은 노동의 의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앞의 원칙에서 도출되는 원칙으로서 복지 수급자의 자격을 엄격하게 규정하여 무임승차자를 철저하게 가려내는 것이다. 복지 수급자의 자격은 노동 의지가 있고 노동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제한되는데, 이것은 복지 수급이 시민의 지위에 따르는 무조건적인 권리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의 계약에 따르는 조건부 권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노동연계복지 모델은 미국과 영국만이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같은 전통적인 사회국가에도 도입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말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생산적 복지”에 근거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연계복지 제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노동연계복지는 논리적으로 완전고용을 전제하기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대량실업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일 수 없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대량실업은 자본 투입을 늘려서 노동력을 절약하기 위한 노동합리화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대량실업은 급속한 노동생산성 향상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현상이다. 노동합리화 전략은 정보화와 금융의 지구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 이윤의 극대화와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실현하는 중요한 장치로 자리를 잡았다. 그 결과는 ‘고용 없는 경제성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노동연계복지의 강령은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생존에 대한 불안을 확산시킨다.
 둘째, 노동연계복지는 복지 수급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노동의 의무를 요구하기 때문에 복지 수급자들은 임금 수준이나 고용형태 혹은 노동조건 등을 따지지 않고서 굴욕적이고 위험하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찾게 하고, 그러한 일자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한다. 노동연계복지가 자리를 잡은 나라들에서는 행정당국이 알선한 ‘적절한’ 일자리를 받아들일 것을 약정하게 하고, 알선된 일자리를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적인 손에 의해 마련된 노동기회 혹은 일자리가 제공되며, 이러한 노동기회 혹은 일자리 역시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거부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노동연계복지 모델은 공공연한 노동강제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직업선택의 자유(대한민국 헌법 제15조)를 침해하는 매우 심각한 인권 유린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노동연계복지는 가난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노동연계복지 모델은 기초보장 제도와 결합되기 마련인데, 기초보장 급여는 최저임금보다 적어야 한다는 계명이 통용되기 때문에 그 급여 수준은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정도에 머문다. 공적인 손에 의해 마련되는 일시적인 노동기회 혹은 일자리의 소득효과는 매우 미미하다. 게다가 기초보장 수급자가 일자리를 얻어 노동소득을 취할 경우, 늘어난 소득만큼 기초보장 급여가 삭감되기 때문에 수급자는 기초보장 급여 수준 이상의 삶을 향유할 수 없다. 따라서 수급자는 가난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난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는 경우는 수급자가 기초보장 급여를 훨씬 상회하는 노동소득을 얻는 경우뿐인데, 이는 오늘의 고용 상황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넷째, 노동연계복지와 결합된 기초보장 제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행정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 기초보장 수급 자격이 있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수급 대상이 되는 개인이나 가구의 재산과 소득원을 일일이 조사하여야 하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행정 비용이 불가피하다. 독일의 경우, 이러한 제도를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행정비용은 연간 1천 억 유로에 달한다고 한다.
 다섯째, 앞서 말한 번거로운 자산 조사와 소득 조사를 한다 할지라도 기초보장의 수급 자격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권한이기 때문에 차상위계층처럼 수급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더라도 수급을 받지 못하는 광범위한 사각지대가 발생하기 십상이다. 또한 가족 부양 의무가 복지제도 운영의 전제로서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수급 자격이 있는 사람조차 기초보장으로부터 배제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자식의 부양을 전혀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자식과 연락이 끊겨 이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에는 수급 자격이 부여되지 않는 경우가 그 한 예일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노동연계복지 모델은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보장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다. 기본소득 구상은 이와 같은 노동연계복지 모델을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힘을 얻고 있다.

2) 사회국가의 급진적 개혁을 위한 기본소득 구상의 의의

 기본소득 구상은 사회국가의 급진적 개혁을 위한 방안이다. 오늘의 사회국가는 케인즈주의적 복지 모델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노동연계복지 모델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기본소득 구상은 이 두 가지 모델들을 넘어서는 의미 있는 방안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기본소득 구상은 노동연계복지가 전제로 하는 국가와 개인의 계약에 근거한 조건부 복지 수급권이라는 개념을 깨뜨리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적당한 생활수준을 위해 충분한 수준의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를 시민의 무조건적 권리라는 데서 출발한다. 정의로운 국가는 이러한 시민의 무조건적 권리를 보장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를 시민권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론하겠지만, 나는 이것이 사회국가의 급진적 개혁을 위한 기본소득 구상의 핵심이라고 본다.
 둘째, 엄청난 규모로 자본이 축적되고 노동생산성이 급속히 향상되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노동시장이 흡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들이 일자리를 포기하는 대신에 기본소득을 받아 생활하도록 하는 ‘노동과 소득의 분리’는 현실에 부합하는 방안이다. 이것은 노동시장에 투입되는 노동력의 양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시장에 걸리는 부하를 획기적으로 완화할 수 있다.
 셋째, 기본소득은 소득을 위해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에 노동력을 ‘탈상품화’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취약계층이 매력적이거나 발전가능성이 있는 일자리와 형편없는 일자리를 구분할 수 있도록 협상력을 확산시킬 수 있다.”
 넷째, 기본소득 구상은 기본소득 수급자가 노동소득이나 부동산 소유에서 비롯되는 수익을 별도로 취득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기본소득 수급자는 ‘가난의 함정’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다섯째, 기본소득은 사회국가의 억압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통제로부터 시민들을 해방시키고, 사회국가 운영을 위한 천문학적인 비용을 절약할 수 있게 한다. 만일 전통적인 사회보험, 의료보험, 연금 등을 기본소득으로 통합하여 운영한다면 사회국가를 매우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고, 사회국가의 관료주의적 비대화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모든 시민이 기본소득의 수급자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복지 급여 제도의 고질이었던 낙인 효과가 사라진다.
 여섯째, 기본소득은 개인별로 지급되기 때문에 케인즈주의적 복지 모델이나 노동연계복지가 전제하는 가부장적 복지의 굴레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킨다. 가정에서 여성의 경제적 의존은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여성의 자율성은 신장된다. 또한 개인별 지급 방식은 “공동생활을 장려하고 기족해체 함정을 없앤다.” 왜냐하면 다수가 공동으로 가계를 꾸리는 것이 혼자 가계를 꾸리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일곱째, 노동과 연계되지 않은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시민들은 돈벌이 노동에 묶이지 않는 자유시간을 활용하여 자신의 발전을 도모하고 공동체에 참여하여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칠 수 있다. 임노동에 바탕을 두고 조직된 노동사회는, 일찍이 랄프 다렌도르프가 예견했던 바와 같이, ‘생존을 보장하는 활동사회’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데, 다렌도르프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활동사회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논하고 있다.
 여덟째, 기본소득은 급진적인 노동시간 단축 정책이나 일자리 나누기 정책을 용이하게 도입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일할 능력이 있고 일할 의사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필요한 총노동시간을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대량실업을 극복하는 유력한 방안이다. 그러나 고용에 따르는 사회비용이 크기 때문에 이 구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기업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저항을 누그러뜨려서 고용을 촉진시키는 효과를 가질 것이다.
 이처럼 기본소득 구상은 사회국가의 위기에 대응하면서 사회국가를 급진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중요한 방안들을 담고 있다. 그 방안들은 오늘의 현실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실용적인 판단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 구상은 노동과 소득의 분리라는 주장과 권리와 의무의 비대칭성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입증하여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아래서는 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살피고자 한다.

4.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 주장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은 시민권의 실현이라는 측면과 정의의 요구라는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아래서는 먼저 모든 시민이 기본소득에 대한 당연한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을 검토하기로 한다.

1) 소득에 대한 시민의 권리

 이미 기본소득 구상의 역사적 맥락을 검토할 때, 많은 선구자들이 기본소득을 시민의 권리로 주장하였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지만, 이 점을 분명하게 천명한 우리 시대의 사상가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득이 보장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들이 ‘불안’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되며, 이로 인하여 몸밖에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자본이 제공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강제 아래 있다고 분석하였다. 프롬은 소득의 보장이 자유를 실현하는 전제조건임을 분명히 하고, 소득 보장의 요구가 인간의 권리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소득이 보장된다면, 자유는 현실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서구의 종교적 전통과 휴머니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원칙, 곧 인간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 권리가 있다는 원칙이 옳다는 것이 실증될 것이다. 생명, 음식, 주택, 의료, 교육 등에 대한 이 권리는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이며, 이 권리는 그 어떤 상황 아래서도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사회에 '쓸모'가 있는가를 보고서 그 사람의 권리를 제한해서는 결단코 안 된다.”

프롬은 근대 세계에서 확립된 자유권적 기본권을 사회적 기본권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실현하고자 하였다. 프롬은 사회적 기본권의 핵심을 소득 보장이라고 보았으며, 어떠한 반대급부도 전제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소득 보장을 옹호하였다. 이런 관점에서는 ‘노동과 소득의 분리’나 ‘권리와 의무의 비대칭성’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소득 보장의 요구가 무조건적인 시민의 권리라는 프롬의 사상은 기본소득 구상을 가장 명료한 형태로 가다듬은 반 빠레이스에게 계승되었다. 그는 근대 사회에서 확립된 자유는 안전과 자기자신에 대한 소유를 그 핵심적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그 자유가 실질적 자유(real freedom)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엇을 하려고 하든 그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그 실현 수단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확보하고 있는 내적인 자원과 외적인 자원이 얼마나 확보되어 있는가에 따라 그가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판단할 수 있다. 인간은 ‘좋은 삶’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몫의 자원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좋은 삶’에 대한 구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되 모든 시민들에게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동등한 자유를 보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각 사람이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자원을 얼마큼 차지할 권리가 있는가는 정의의 원칙을 세워 정밀하게 따져야 할 일이겠지만(추후 상론), 여기서는 반 빠레이스가 실질적 자유의 실현을 각 시민이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반 빠레이스는 기본소득을 실질적 자유의 실현을 위한 자원으로 간주하고, 기본소득의 요구를 시민의 권리로 주장한다. 캐롤 페이트만은 이러한 반 빠레이스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완전한 시민권의 상징이고, 그러한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안전을 보장한다. 달리 말하면, 민주적 권리로서의 기본소득은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는 자치와 같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 필요하다.”

 기본소득이 개인의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이라면, 모든 시민은 국가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시민들에게 실질적 자유의 기회와 그 수단을 동등하게 부여하는 것이 정의로운 국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2) 정의의 요구

 기본소득 구상은 정의의 관점에서도 정당성을 갖는가?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을 논하는 정의론의 관점들은 이제까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어 왔다. 하나는 평등주의적인 관점(egalitarian perspective)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비평등주의적 관점(non-egalitarian perspective)이다.
 평등주의적 관점을 대표하는 학자는 반 빠레이스인데, 그는 존 롤즈의 차등의 원칙을 원용하여 사회적 분배의 원칙을 제정한다. 존 롤즈가 가장 나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것을 분배하여 자원 향유의 격차를 줄이게 하는 평등지향적인 차등의 원칙 혹은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원칙(maximin principle)을 정의의 원칙으로 제시하였듯이, 반 빠레이스는 열악한 사회 계층들의 순서를 정하고 이를 사전의 순서처럼 엄격하게 따르면서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차등 배분하여 자원의 격차를 줄이는 차등의 원칙을 제시한다. 반 빠레이스는 이와 같은 ‘사전적 순서에 따르는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원칙’(leximin principle)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것이 기본소득이라고 본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정의의 요구에 가장 충실한 제도라는 것이다.
 반 빠레이스는 실질적 자유의 실현과 관련하여 각 시민이 어떤 자원을 얼마큼 요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한 가지를 명확하게 해 두고 있다. 사회적 분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누구의 것으로 돌릴 수 없는 자원들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자연자원이다. 자신에게 우연하게 속한 능력이나 성질에서 얻은 결과들이나 선물, 상속, 토지소유, 희귀성을 갖는 일자리에서 얻은 결과들도 사실은 그 누구의 것으로 돌릴 수 없는 자원들이어서 사회적 분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그 누구의 것으로 돌릴 수 없는 자원들을 몽땅 분배하여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갖가지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장애보상 비용, 경찰, 법원, 군대, 정치기구 등과 같이 모든 시민의 형식적 자유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기구들의 운영비용, 실질적 자유를 증진시키는 사회경제적 인프라와 문화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비용, 인간의 삶의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키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 등을 공제한 다음에 남는 자원들만이 사회적 분배의 대상이 된다.
 반 빠레이스는 노동하는 사람의 소득을 노동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전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오늘처럼 일자리가 희귀한 자원이 된 세상에서 일자리를 갖는 특권을 차지한 사람들은 그 일자리를 임대하였다고 생각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데서 발생하는 고용지대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고용지대는 노동을 하는 데 드는 비용을 훨씬 상회하는 소득을 얻기 때문에 발생하며, 그 크기는 노동소득에서 그 비용을 뺀 차액이다. 고용지대는 자기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므로 이를 사회적 분배로 돌려서 비자발적 실업자들의 기본소득을 위한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이 정의의 요구에 부합한다. 이와 같은 반 빠레이스의 고용지대론은 복지 수혜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노동 의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관철시킬 수 있는 논거들 가운데 하나이다. 비자발적 실업자들은 도리어 고용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타인에게 임대하였기 때문에 임대료를 받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토마스 슈라메와 앙엘리카 크렙스 같은 비평등주의자들은 평등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논리로 기본소득 구상을 지지한다. 비평등주의자들은 평등주의자들처럼 정의를 비교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정의의 절대적 기준을 제정할 것을 제안한다. 사람들이 지닌 자원이나 기회의 차이를 비교해서 자원과 기회를 가급적 같게 하는 것이 정의의 실현이라고 보는 평등주의자들은 “평등은 그 자체가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평등이 정의의 내재적 가치라는 뜻이다. 비평등주의자들은 평등주의자들이 평등을 보편성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정의론의 과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정의의 기준들을 찾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와 같은 보편적인 정의의 기준들을 찾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절대적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볼 때, “정의의 필수적인 기준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의 조건들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음식, 주택, 의료 혜택, 개인적인 자율성과 정치적인 자율성의 보장, 사회적 참여, 프라이버시와 친밀한 이웃관계의 유지 등을 누릴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포함된다. 만일 이처럼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하는 원칙, 곧 기본보장의 원칙을 정의의 한 원칙으로 확립한다면, 그 다음에는, 마이클 왈쩌의 정의의 영역이론이 주창하는 바와 같이, 업적의 원칙, 자격의 원칙, 교환의 자유의 원칙과 같은 다원적인 정의의 원칙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본보장의 원칙이 다양한 정의의 원칙들에 앞선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qua Menschsein)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논거는 기본소득에 대한 만인의 권리를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정당화한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비평등주의자들의 정의론적 근거설정은 시민권 이론으로 수렴된다.

IV.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에 대한 기독교윤리학적 검토

 기독교윤리학적 관점에서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신학적·윤리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가를 살피고, 그 다음에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한 인의론적 이해로부터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 끝으로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주장할 있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노동과 소득의 분리’의 정당성

 ‘노동과 소득의 분리’는 개신교인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창세기 3장 19절의 가르침이나 “일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의 가르침이 엄중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교개혁 이래로 역사적 개신교에 깊이 뿌리를 내린 직업윤리와 노동윤리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이나 개신교 직업윤리와 노동윤리에 기대어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거부하는 것은 졸속적인 판단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과 소득의 결합’을 기본원리로 해서 하나의 경제체제가 전반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세기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노동과 소득의 결합’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는 사회를 노동사회라고 한다면, 노동사회는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도록 국가가 강제하고, 노동이 토지나 화폐처럼 상품으로 팔릴 수 있다는 “허구”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근대 세계에서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노동사회는 근대의 발명이다. 노동사회가 확립되면서 어떤 노동은 시장에서 그 업적을 인정받아 임금을 그 대가로 받았지만, 집에서 수행하는 돌봄 노동이나 살림 노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돈벌이노동을 위시하여 이 모든 노동들은 모두 인간의 삶을 위해 인간이 수행하는 노동이지만, ‘노동과 소득의 결합’은 오직 돈벌이노동에만 해당되었다. 돈벌이 노동을 제외한 삶을 위한 다양한 노동은 삶을 위한 활동으로 범주화될 수 있는데, 이 삶을 위한 활동은 근대 사회에서 애초부터 소득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이었다.
 돈벌이노동과 삶을 위한 활동을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는 근대 사회의 원리는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예를 들면 마르틴 루터는 욥기 5장 7절을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새들은 높이 떠서 날아간다.”고 옮겨서 인간은 천부적으로 노동의 위임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지만, 그가 생각한 노동은 근대 사회가 발명한 돈벌이노동이 아니었다. 루터에 따르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이다. 이를 위해 인간은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느님의 부름을 받지만, 그 직무가 높건 낮건, 그 직무 수행이 돈벌이노동이든,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는 가사노동이든, 공동체를 위한 명예직 활동이든,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긴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이 존귀하다. 루터는 사람의 일을 “생산성이나 수확이나 소득이나 노동업적에 따라 평가”하지 않았고, 도리어 하느님과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노동의 봉사적 성격’을 강조했다. 루터가 강조한 직업이 돈벌이노동으로 굳어진 것은 근대 사회가 들어선 뒤의 일이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창세기 3장 19절의 말씀은 인간의 노동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에 의해 허락되었음을 뜻하며, 따라서 인간의 노동이 여전히 하느님의 축복 아래 있음을 강조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 노동은 삶을 위한 활동으로 넓게 해석되어야지 근대적 의미의 돈벌이노동으로 해석될 수 없다.
 “일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의 말씀은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종말론적 열정에 휩싸여 일상적인 생활 활동이나 생업을 멀리하는 것을 경계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 말씀을 옛 소련의 스탈린 헌법에서처럼 노동의 의무를 뒷받침하는 구호로 사용하거나 노동연계복지 모델에서처럼 돈벌이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성서의 말씀에 대한 견강부회적 해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개신교인들이 성서의 가르침이나 직업윤리와 노동윤리를 내세워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 1장 28절의 가르침에 따라 노동이 삶을 위한 활동으로서 하느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개신교인들은 도리어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과 소득의 분리’는 삶을 위한 활동을 돈벌이노동으로 축소시키는 근대적 관점을 깨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2.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한 인의론적 이해와 기본소득 구상

 인간의 존엄성은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 논거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지만, 나는 인의론(認義論)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 된다고 본다. 인간은 업적이 있든 없든 그것과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고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존재이다. 이 인의를 통해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나고, 인간의 존엄성이 확립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가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해방된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삶에 대한 권리를 의식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인의의 핵심적 메시지”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과 삶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같은 동전의 두 측면이다. 삶에 대한 권리를 신학적으로 명석하게 규명한 신학자는 본회퍼이다. 그는 인의론의 관점에서 ‘자연적인 삶’이라는 개념을 창안하였고, 이 ‘자연적인 삶’의 권리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본회퍼에게서 “자연적인 것은 타락한 세계에서 하느님에 의해 보존되는 생명의 형태, 그리스도를 통한 인의와 구원과 갱신을 고대하는 생명의 형태이다.” 바로 이 생명의 형태가 '자연적인 삶'인데, 본회퍼는 이 ‘자연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육체적인 삶과 정신적인 삶으로 구별하고, 인간은 육체적인 삶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삶에서도 자기 목적으로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육체는 그 무엇인가의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고,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오직 육체의 온전함이 유지되고, 정신의 자유가 보장될 때 실현된다. 이를 위해서는 육체적인 삶의 자연적 권리들과 정신적인 삶의 자연적 권리들이 보장되어야 한다. 육체적인 삶의 권리들은 자의적인 살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 생식의 권리, 강간, 착취, 고문, 자의적 체포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등이다. 정신적 삶의 자연적 권리들은 판단의 자유, 행동의 자유, 향유의 자유이다. 본회퍼의 권리 장전은 나치 독재가 판을 쳤던 어두운 시대의 산물이지만, 그의 인의론적 권리 이론의 관점과 방법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사람은 ‘자연적 삶’의 권리를 심화하고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대량실업과 사회적 양극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육체의 온전함과 정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권리장전에 추가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업적 이전에, 업적과 무관하게 확립된다는 인의론의 가르침은 사회적 인정과 복지의 향유를 업적에 직결시키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업적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안목을 열어준다. 물론 인간은, 가능한 한에서, 공동체를 위해 업적을 제공하여야 하고 업적능력을 갖추어야 하지만, 업적이 인간의 존엄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는 업적능력이 없는 사람도 업적 능력이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인정받는 사회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적 권리들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권리와 의무가 대칭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인간의 권리로 인정되는 사회에서는 복지를 향유할 권리의 보장을 노동 의무나 업적의 의무와 결부시킬 수 없다.
 따라서 인의론의 지평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삶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는 신학적·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기본소득 구상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3. 하느님의 정의와 기본소득 보장

 기독교윤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의 정의로부터 기본소득 구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서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어떤 개념이나 어떤 객관적인 척도로 주어져 있지 않다. 하느님의 정의는 오직 하느님의 구원하고 해방하는 행위로부터 인식되고, 그 인식은 하느님의 행위에 부합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무리들 편에 서서 그들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야훼임을 알린 출애굽 사건 이래로 성서를 관통하는 기본 모티프이다. 하느님의 정의로운 행위를 통해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서도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정의는 관계론적 개념이다.
 하느님의 정의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처절한 삶과 그 종살이로부터 해방시킨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행위를 기억하는 데서 출발한다. 계약법전에서 강조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책임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회상에 터를 잡고 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에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지 않았느냐?”(출애 22:20) 이와 같은 약자 배려의 정신은 과부와 고아에 대한 보호(출애 22:21f.), 떠돌이꾼에 대한 보호(레위 25:35) 등으로 이어지며, 타작이나 수확을 할 때 이삭을 남겨 두거나 열매를 남겨 두어 “가난한 자와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 먹도록 남겨 놓으라.”는 분부로 나타난다. 출애굽 전승의 핵을 이루는 약자 배려의 정신은 사회기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 제도로 발전되었으며,(신명 14:28-29) 예언자들에게도 계승된다.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지식과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같은 동전의 양면이었다.(예레 9:23f.; 예레 22:15; 이사 58:10 등) 이러한 예언자 정신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는 예수의 선언으로 이어진다.(루가 6: 20-21)
 이처럼 하느님의 정의를 가난한 사람들의 배려와 보호에 직결시키는 성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소득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여러 모티프들을 제공한다. 만나 이야기(출애 16:1-36), 주기도문(마태 6:11; 누가 11:3 병행),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 1-16), 최후심판의 비유(마태 25:31-46)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이 성서 모티프들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할 겨를이 없지만, 무엇보다도 만나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출애굽 공동체가 이집트의 축적 경제에 대항하여 추구하여야 했던 대안적인 삶의 상징으로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자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하느님이 아무런 전제 없이 제공한 ‘일용할 양식’을 받았다. 그들은 ‘일용할 양식’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배분되어야 하고,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은 것을 챙겨서 축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했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임을 인식하여야 했다.
 만나 모티프는 주기도문 제2항목 첫째 기원(“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에 다시 등장한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루터의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일용할 양식’은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옷,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현금, 순수하고 선한 배우자, 순박한 아이들, 착한 고용인, 순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자, 선한 정부, 좋은 날씨, 평화, 건강, 교육, 명예, 좋은 친구, 신용 있는 이웃 등”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것이다. 이 ‘일용할 양식’은 나 혼자 차지해서는 안 되고,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어야 한다. ‘우리’가 모두 “똑같은 기본적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 필요를 집단적으로 충족시킬 때 우리는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도 자명할 것이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사회정의와 직결된 문제임을 뜻한다. 로호만은 하느님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햇빛을 비추고 비를 내리는 것처럼 이 “양식은 수고하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허락된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의는 그 근본에서 효용성이라든가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은혜 충만한 공의이다. 이 점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 사회적 결과를 지향한다는 점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업적에 따른 정확한 분배’를 뒤집어엎는 ‘하느님의 기이한 의’를 묘사한다. 하느님의 정의는 노동의 업적과 무관하게 삶의 필요에 따라 재화를 나누어 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업적과 보상을 서로 분리하고, 보상과 삶의 필요를 직결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이다. 그것이 기이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업적과 보상을 서로 결합시키는 일이 마치 하늘이 정한 법인 양 생각하는 통념이 그만큼 강력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노동할 기회가 전혀 없거나 노동 업적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른 분배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개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궁핍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최후심판의 비유는,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기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율적으로 증언한다. 최후의 심판자가 의로운 사람들에게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는 것이다.(마태 25: 35-36) 의로운 사람들이 의아한 마음으로 최후의 심판자에게 그들이 언제 그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그는 “네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고 대답한다. 의로운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은 “양식, 주거, 의복, 건강, 자유(존엄성)”과 같이 “인간의 경제적·정치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웃의 기본 욕구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가 결정되고 우리의 미래의 삶이 결정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하느님의 정의는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전제 없이 그것을 부여할 것을 요구한다. 루터가 해석한 ‘일용할 양식’의 내용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기본소득과 맥이 통한다. 수고한 사람이나 수고하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주어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하고 해방하는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다.

V. 맺음말

 이 글에서 나는 기본소득 구상이 위기에 처한 사회국가를 급진적으로 개혁하는 설득력 있는 방안임을 평가하고, 기본소득 구상이 시민권 이론과 정의론의 관점에서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나는 신학적·윤리적 관점에서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을 검토하였는데, 기본소득 구상을 둘러싼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노동과 소득의 분리나 권리와 의무의 비대칭성 문제를 수용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여 기본소득 구상을 지지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 글에서 나는 기본소득 구상을 제도화하는 데 꼭 다루어야 할 재원조달 가능성을 검토하지 못했고, 기본소득 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논하지 못했다. 또한 기본소득 구상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마르크스의 대안 사회 구상과 결합될 수 있는가도 논하지 못했다. 이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빌어 상세하게 논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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