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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21:30) from 210.91.50.188' of 210.91.50.188' Article Number :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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鷗山 高在植이 구상한 해방실천의 선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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鷗山 高在植이 구상한 해방실천의 선교윤리학

강원돈(한신대 신학과 교수/기독교윤리학)

머리말

 鷗山 高在植을 기억할 때마다 나는 해방, 실천, 선교, 당파성, 이데올로기, 방법 등의 낱말들을 떠올린다. 오늘 강연의 제목을 “鷗山 高在植이 구상한 해방실천의 선교윤리학”으로 잡은 것도 이 개념들의 연관성을 체계적으로 밝히고자 하기 때문이다. 구산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해방을 위해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곧 선교라고 생각하였고, 이와 같은 교회의 실천을 성찰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라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구산의 윤리학을 해방실천의 선교윤리학으로 성격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산이 기독교윤리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방법이다. 그는 윤리학의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서 윤리학의 방법을 제대로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도 현실의 문제들과 대결하면서 윤리하는 방법(methods of doing ethics)의 엄밀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한 마디로 그는 한국 기독교윤리학계에 방법론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천명한 선구자들 가운데 한 분으로 꼽힐 만하다.
 구산이 방법에 깊은 관심을 가진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의 현장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산업선교 활동을 하면서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행위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기독교인들의 정당한 행위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었다. 기독교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기준을 정해야 하기에 구산은 윤리적 판단기준에 대한 방법론적 연구를 자신의 과제로 설정하고 그 과제를 풀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구산이 미국 유학 시절에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미국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구산은 1970년대 말 이후에 기존 체제를 타파하고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한국 민중운동의 현장에서 기독교윤리학의 관점과 방법을 더 날카롭게 벼리면서 매우 생산적인 학문 활동을 하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 압제와 착취에 저항하면서 행사할 수 있는 대항폭력의 신학적·윤리적 정당성 문제, 교회와 국가의 관계, 다국적 기업 문제, 한국 경제 개발 과정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평가 문제 등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해방신학을 한국 기독교윤리학과 접목시킨 중요한 업적을 쌓았고,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을 기독교윤리학의 관점에서 비교․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나는 구산이 한국 기독교장로회의 현실 참여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 김재준, 정하은 등으로 이어지는 한신의 사회윤리학 전통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구산의 윤리학을 태동시킨 한신의 사회윤리학의 전통을 간략하게 살피고, 그 다음으로 구산이 구상한 기독교윤리학 방법론을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구산이 펼친 선교윤리학의 얼개를 드러내고자 한다.

II. 한신의 사회윤리학 전통

 한신과 기장의 저변을 흐르는 사회윤리학의 전통은 장공 김재준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며, 정하은, 고재식, 손규태 등을 거쳐 오늘의 한신 강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래서는 김재준과 정하은의 사회윤리학을 살핌으로써 구산의 기독교윤리학이 태동한 맥락을 조명하고자 한다.

1. 김재준의 참여의 윤리

 김재준은 구약학자로 많은 업적을 쌓은 분이지만, 기독교윤리학을 대학에서 직접 가르친 경험이 있고, 또 기독교윤리학과 관련된 책을 여러 권 번역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윤리학의 태동과 발전에 공헌한 학자로 간주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매우 스케일이 큰 윤리적 구상을 제시하였고, 매우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신학과 윤리를 전개한 분이다.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주제는 김재준의 신학과 사상을 꿰뚫는 주조음(cantus firmus)이었고, 사회참여의 신학과 윤리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구체적인 현실 속에 구현하는 방편으로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45년에 발표한 “기독교의 건국 이념”이라는 글에서 김재준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기독교인의 최고 사상은 하나님 나라가 인간사회에 여실히 건설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초세간적(超世間的)인 내세적인 소위 천당이라는 말로서 그 전부를 의미하는 것인 줄 알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 생활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의 전 부문을 지배하는 때,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며 이것이 전 사회에 삼투되며 사선(死線)을 넘어 내세에까지 생생 발전하여 우주적 대극의 대낙원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전모일 것이다.”

이 글은 하나님 나라가 내세천당의 관념으로는 포착될 수 없고, 성령의 활동하는 임재를 통해 현 세상에서 구현될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큰 평화로 실현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실현된 우주적 대극의 대낙원에 참여하는 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인용문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 생활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의 전 부문을 지배하는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미 하나님 나라의 구현 과정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여 활동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김재준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다.

 김재준에게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속 역사를 하나님 나라 역사로 변질시키는 운동”이요, 이 역사에 대한 관심은 교회가 현실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여 하나님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도록 현실변혁의 주역으로 등장하도록 촉구한다. 김재준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긴장관계를 고려하면서 현실참여의 신학과 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김재준은 해방 이후에 점철되었던 독재와 부패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혀 왔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 집필한 “역사참여의 문제와 우리의 실존”이라는 글에서 그는 한국 교회가 “이 시대를 자기의 베개로 삼고 안면하는 수면병”에 빠졌다고 질책한 바 있다. 박정희 정권의 성립 이후 김재준은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 회담 반대, 독재를 합법화하기 위한 삼선 개헌 저지, 유신독재에 대한 항거, 캐나다 망명 이후 한국 민주화 지원과 통일 운동 등에 참여하였고, 이 과정에서 현실참여의 신학과 윤리에 대한 많은 글들을 썼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한국 민주주의가 죽임을 당했던 어두운 시기에 김재준은 교회의 예언자적 책임을 강조하고, 혁명을 고려하면서 정치참여에 나서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재준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현실참여를 뒷받침하는 윤리학 방법론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62년에 집필한 “한국교회 윤리생활의 재검토”라는 글에서 그는 윤리적 이상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를 위한 어떤 추상적, 원칙적 가치를 내세우고, 그것이 적용될 경우에 산출될 어떤 이상적 사회 형태를 상정한 다음에, 현존 사회상을 이에 맞도록 끌어올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보다는 정황 분석을 정직하게 하는 일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기독교윤리학의 규준과 준칙의 형성과 관련해서 김재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도덕적 행위에 원칙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하나님과 나, 나와 이웃의 상호관계됨에서 보고 그 관계됨에서 진행시키는 것입니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사회과학의 데이터에서 그것들의 내적 역사적 의미...를 포착하고 거기서 윤리적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내가 ...말한 (1) 기독교적 계시와 신앙 (2) 자아의 분석 (3) 사회적 구조와 과정에 대한 이해를 기독교 윤리 결단의 삼 요소로 지적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김재준은 라인홀드 니버, 리처드 니버, 죤 C. 벤네트 등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기독교윤리학의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장공의 기독교윤리학이 한신의 사회윤리학 전통의 초석을 깔았다고 평가하고 싶다.

2. 정하은의 결단의 윤리

 정하은은 미국에서 기독교 사회윤리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이 분야에서 기독교윤리학의 방법을 명확히 밝히고, 당대의 과제였던 근대화 문제를 기독교윤리학적 시각에서 다루고자 시도하였던 학자이다.
 그는 기독교 사회윤리학이 성서학과 사회과학을 매개하는 중간학(interdisciplinary science)이고, 그 목적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윤리적 결단을 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보았다. 기독교윤리를 신의 의지에 따르는 행위라고들 말하지만, 정하은은 설사 신의 의지를 안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히 지식의 문제에 머물 수 있다고 본다. 윤리적 행위를 이끌어 가는 결단은 지식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사회윤리학을 “결단의 학”으로 보는 그의 주목할 만한 견해를 더 들어 보자.

“우리가 성서신학이나 사회과학을 통하여 신의 의지를 규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역시 한갓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단을 일으켜 주지 않는다. 그러한 지식은 신앙 결단의 자료를 제공해 줄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이용하여 결단하는 데까지 이르게 지도하는 것이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과제요 사명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기독교 사회윤리학은 여러 상황 속에서 신의 의지를 찾고 그것에 따라 결단에 이르는 과정을 취급하는, 이른바 ‘결단의 학’인 것이다”.

 결단의 학으로서의 기독교 사회윤리학은 그 나름의 방법적 절차를 갖는다. 신의 의지를 인식하는 것과 현실관계들 속에서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몇 가지 단계의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알베르트 라스무쎈의 사회윤리적 결단의 단계를 참고하고 본회퍼의 이론을 원용하며 (1) 상황 관찰, (2) 상황 판단, (3) 정책 결정, (4) 행동 결단의 네 단계를 설정하였다. 이 네 가지 단계들을 거쳐 윤리적 결단과 행동을 하는 주체는 물론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인들의 사회윤리적 결단의 첫 단계인 상황 관찰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회를 보는 눈”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상황 관찰이 비기독교인들보다 “더 성실하고 정확한” 상황 관찰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데올로기나 민족 이익 혹은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히지 않는 눈을 가질 때, 기독교인들은 사회학적 게토를 넘어서서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하은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우리가 사회를 진단하는 데 사회학적인 조사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거기서 얻은 데이터들을 사회학자들처럼 하나의 통계학적인 숫자나 현미경으로 보지 않고, 그 데이터를 통하여 ‘신의 행위’, ‘신국의 현재성’을 들여다보면서 신의 혁명적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정하은이 말하는 사회윤리학의 네 단계를 여기서 상술하지는 않겠지만, 그의 사회윤리학적 특징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정책 결정 부분이다. 그는 현실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법이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엇갈려 있을 경우 어느 원칙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중간 공리”(middle axiom)를 활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보다 높은 정의는 보다 평등한 정의”라는 라인홀드 니버의 비교급의 윤리 혹은 기독교 현실주의에 따라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의 방법론적 지침인 “중간 공리” 개념을 재해석하는 정하은은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한량 없는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 그의 사랑은 한량 없다. 그러나 결코 센티멘털하지 않다. 문제를 단순히 센티멘털한 감정이나 값싼 사랑의 눈물로 해결하려 하지는 않는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이 보다 평등하게 다같이 사랑하고 공존공영하기를 원하신다. 결코 정의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사랑-정의’의 긴장 관계를 내용으로 한 중간 공리를 가지고 정책을 수립할 때 보다 신의 의지에 접근해 나아갈 것으로 생각한다. (...) 특히 크리스천의 정책 결정은 이상론이 아니고 성령의 말씀을 현실화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 기독교 현실주의의 성립 근거가 있다.”

 위의 인용문이 잘 말해 주고 있듯이, 정하은은 기독교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신의 의지를 현실에 구현하는 기독교 실천 이론으로서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사회윤리학적 관점과 방법을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적용하여 기독교인들의 결단과 행위의 내용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3. 소결

 한신의 사회윤리학 전통에서 김재준은 미리 정해진 윤리적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는 연역법적 윤리를 거절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구현하는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간직하면서 상황분석에 입각하여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일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바 있다. 정하은은 기독교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상황 관찰, 상황 판단, 정책 결정, 행동 결단 등 윤리적 행위의 네 단계를 방법론적으로 밝힘으로써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틀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한신의 사회윤리학 전통은 구산이 윤리학 방법론을 구상하는 데 그 배경을 이루었다고 본다.

III. 구산의 기독교윤리학 방법론     

 구산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기독교윤리학이 무엇인가’를 그 내용과 방법론적 측면에서 바르게 소개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기독교윤리학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기독교윤리학의 내용을 규명하기에 앞서서 그 내용을 규명하는 방법을 제대로 가다듬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구산이 기독교윤리학의 방법론을 확립하기 위해 미국 유학 시절에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그 당시 패러다임 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 있었던 에큐메니칼 책임사회론과 남미의 해방윤리였다. 그는 이 두 가지 유형의 기독교윤리학을 각각 세밀하게 분석하고, 이 둘을 서로 비교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이끈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청년기부터 품어왔던 물음, 곧 기독교인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는 두 가지 유형의 기독교윤리학 가운데 어떤 윤리학적 패러다임이 더 적절한 대답을 주는가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의 연구는 분명히 개인적 관심에서 촉발되었지만, 그의 연구는 엄격한 학문적 방법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윤리학의 두 패러다임들에 대한 비교 작업을 “메타 윤리” 차원에서 진행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은 한국 기독교윤리학의 역사에서 메타 윤리 수준에서 방법론의 문제를 의식적으로 다룬 학자는 구산이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구산의 기독교윤리학 방법론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방법론적 문제 제기의 두 가지 맥락을 편의상 구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나는 윤리적 판단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묻고 대답하는 맥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신앙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서로 매개할 것인가를 규명하는 맥락이다. 이 두 가지 물음들은 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논의의 추상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구별하는 것이 적절하다. 나는 이 두 가지 물음들이 구산의 행동주의적 성향에서 나왔다고 보기 때문에 먼저 이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피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1. 구산의 행동주의 윤리

 구산은 일평생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실현하려는 크리스챤의 행위를 천명하고 분석하는 것”이 기독교윤리학의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어찌 보면 이것은 기독교윤리학의 과제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규정인 듯한데, 구산은 이 목적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하여야 하는가가 미리 결정되어 있는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은가를 물어야 한다고 보았다. 구산은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해 행위의 판단 기준이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설사 하나님의 사랑이 기독교인들에게 행위의 목적이고, 그 사랑을 이행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의무라 할지라도, 그러한 목적과 의무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 방안은 인간의 상상력에 맡겨져 있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절대적 요구라 할지라도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구체적 방안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방편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절차를 구산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크리스챤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지 식별하여, 거기에 따라 행동하고 나서 그 전체과정을 숙고해 봄으로써 새로운 행동의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작업이 윤리의 종합적 숙고 작업인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윤리적 행위의 기준을 논의하는 구산의 입장은 결의론적 윤리보다는 상황윤리에 가깝고, 의무론적 윤리보다는 목적론적 윤리에 더 가깝다.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라는 목적과 이를 위한 수단 - 곧 목적과 수단의 관계가 갖는 정합성을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판단하는 것이 윤리적 숙고의 핵심 내용이 된다는 뜻이다. 위의 인용문은 또한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성내지는 선차성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구산의 윤리학적 관점은 행동주의 윤리학의 특성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행동주의적 특성은 구산의 개인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산업선교 현장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업선교 현장에서 매우 한정된 자원을 갖고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때그때의 상황에 적합한 최선의 행위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작업에 필요한 윤리적 숙고의 패턴이 마련되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이 패턴을 행동주의 패턴으로 명명하고 싶다.

2. 기독교인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 기준을 도출하는 방법

 구산은 이와 같은 행동주의 윤리의 관점을 갖고서 “크리스챤의 행위의 윤리적 판단기준을 이끌어내는 방법 문제”를 제기한다. 구산은 이 문제를 다룰 때 행위의 목적과 수단을 따로 떼어놓고 논의하는 것을 지극히 부적절하다고 보았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메타윤리 차원에서 행위공리주의의 틀이나 법칙공리주의의 틀에서 시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구산의 윤리학적 입장을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단서인데, 그는 의무론적 윤리학의 문제의식을 십분 인정하면서도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 해답은 공리주의적 계산의 틀에서 모색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그는 기독교윤리학의 두 접근방법을 논하면서 월터 뮬더의 책임사회론이 법칙공리주의에 가깝다면 호세 미구에즈 보니노의 해방윤리는 행위공리주의에 가깝다고 보기까지 한다.
 구산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정하는 것은 기독교적 가치의 보편성과 역사적 실재의 특수성을 서로 매개시키는 일이고, 이 둘을 어떻게 서로 매개하는가를 따지는 것이 윤리적 숙고의 핵심 과제이다. 구산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크리스챤들은 영적인 이상인 사랑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려고 노력한다.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역사 현실에 대한 분석적, 객관적 연구가 수반되어야 하고 따라서 법, 질서, 권력과 같은 제요소들과의 상호 관계에서 그 실현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현실적 실재와 기독교 가치 개념을 상호 연결시켜서 크리스챤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데 있어서는 어떤 성찰이 따라야 한다. 이 성찰을 우리는 윤리적 숙고라고 부른다. 윤리적 숙고는 역사 현실과 크리스챤의 가치의 상호 교호작용에서 행위의 판단기준을 창출해 내는 일이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윤리적 숙고 작업은 최소한 세 가지 절차로 진행된다. 하나는 기독교의 절대적 가치(인용문에서는 사랑)를 역사적 현실과 접촉할 수 있는 근사치적 가치(인용문에서는 정의)로 번역하는 일, 또 다른 하나는 역사 현실에 대한 학제간 분석을 진행하는 일, 마지막 하나는 학제간 분석을 통해 인식된 현실과 근사치적 가치를 서로 매개시켜 행위의 판단기준(헉은 원칙)을 제시하는 일이다.
 구산은 행위의 판단기준을 창출하는 윤리적 숙고 작업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보편적 도덕법의 체계를 전제하고서 이를 윤리적 판단의 지침으로 활용하는 입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결단에 따른 행위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판단기준이 추후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보는 입장이다. 구산에 따르면, 전자를 대표하는 윤리학자는 월터 뮬더(Walter G. Muelder)이고, 후자를 대표하는 윤리학자는 호세 미구에즈 보니노(Jose Miguez Bonino)이다. 뮬더는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의 중간 공리인 책임사회의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윤리학을 전개하였고, 보니노는 “실천이 먼저이고 성찰은 그 뒤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실천과 성찰의 순환 방법(praxis-reflexion methods)에 입각하여 윤리하기(doing ethics)에 관심을 기울인 해방신학자이다.
 그러면 먼저 뮬더의 방법에 대한 구산의 분석과 평가를 살피기로 하자.
 
1) 뮬더의 방법

 구산이 보기에, 뮬더는 이상주의적이고 당위적인 가치 개념에 입각하여 연역적인 절차에 따라 행위의 지침을 강구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사회질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보편타당한 도덕법이 먼저 있고 그 도덕법의 요구에 따라 현실을 규율하는 일이 그 뒤를 따른다는 뜻이다. 뮬더에게서 세계 현실을 규율하는 도덕법의 역할을 하는 것은 중간공리이다. 그는 이 중간공리의 규율을 받으며 신학, 철학, 사회과학 등 여러 학문들의 학제간 작업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일관성 있는 행위의 표준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산은 책임사회라는 중간공리 아래서 이루어지는 뮬더의 윤리적 숙고 작업이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장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결정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윤리적 숙고를 위한 여러 학문들의 “교호작용은 자유 행사-질서 유지, 권력 행사-인간 복지라는 책임 사회의 한계 영역의 틀 내에서 되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 틀 내에서 책임 사회를 이룩하려는 크리스챤의 신앙적 행위는 행위의 선택의 기준이 되는 도덕법 체계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책임사회의 틀”에 대한 구상이나 “그 사회를 이루기 위한 행위의 지침 원리”는 뮬더 자신의 가치론에서 연역된 것이지, “역사 현실의 구체성”에 발을 디딘 것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구산은 책임사회 패러다임이 갖는 실천적 한계도 지적한다. 책임사회의 전제는 책임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인간의 공동체적 책임의식이다. 공동체는 협동을 향한 인간의 내적 의지에 근거하고, 인간의 자기실현은 공동체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공동체는 인간 존재의 틀이라고 본다. 이것은 공동체에 대한 뮬더의 규범적 판단인데, 이와 같은 규범적인 공동체 이해를 전제할 경우에는 설사 혁명적 행위가 필요한 경우라 해도 혁명적 행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실천적 한계는 사회를 유기체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이다.

2) 보니노의 방법

 해방윤리의 패러다임을 발전시키는 보니노는 이론과 실천에 관계에 대한 해방신학의 관점에 충실하게 실천이 먼저이고, 이론은 그 뒤를 따른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진리의 정당성이나 객관성은 역사적 사건에 개입하는 행위로부터 창출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학은 이미 잘 가다듬어진 진리들의 우주적 체계가 아니다. 신학은 오직 구체적인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행위,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행위를 분석적으로 숙고하는 일이기에 신학은 오직 신학하기(doing theology)의 형태로만 진행될 수 있다.
 구산은 보니노가 신학하기의 틀에서 윤리하기를 하는 방법에 주목하면서 보니노가 “개념적 주제와 역사적 주제와의 교호작용에 대한 신학적 숙고”를 전개한다고 분석한다. 이 압축적인 표현 속에 해방신학자 보니노의 윤리하기의 방법이 요약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서 메시지에 대한 해석과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오늘의 해방실천에 매개하여 행위의 틀과 지침을 마련하기 위해 윤리적 숙고 작업을 진행한다는 뜻이다. 이 때 주목할 것은 행위의 틀과 지침이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해방실천을 위한 윤리하기는 어디까지나 “프락시스에 대한 성실하고 정직한 성찰”이며, 오직 이러한 성찰을 통하여 행위의 틀이 “잠정적으로” 마련될 뿐이다.
 
3) 구산의 입장

 구산이 갖고 있는 행동주의적 성향에 미루어 볼 때, 그가 해방윤리의 패러다임에 더 큰 공감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보니노의 해방윤리가 혁명적인 현실에서 사회변혁을 위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젖힌다는 점을 평가한다. 기독교윤리를 규범의 틀 안에 묶어 혁명적 실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입장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시한 셈이다. 그러나 구산은 해방윤리가 “행위의 윤리적 판단기준을 창출해 내는 윤리 이론적 측면에서는 논리의 혼돈을 야기시킬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아마도 이러한 판단은 보니노의 해방윤리를 메타윤리의 관점에서 행위공리주의로 분류하는 구산의 관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산은 뮬더와 보니노로 대표되는 기독교윤리학의 두 방법을 서로 비교하면서 기독교윤리학 방법론과 관련되는 주목할 만한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린다.

“잠정적인 보편성을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는 규범적인 측면에 관심을 갖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되고 규범적인 사고에는 역사적 특수성이 항상 전제되어야 한다.”

이 인용문은 구산의 윤리학 방법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여기서 구산은 윤리적 규범의 선험적 완결성을 부정하고 역사적 특수성을 매개하여 윤리적 규범의 잠정적 보편성이 생성되어 가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때그때의 상황 속에서 그 나름대로 최선을 추구하는 직접적인 행위가 정당한 행위에 대한 규범적 판단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취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3. 이데올로기와 신앙

 기독교윤리학의 방법에 대한 구산의 연구는 이데올로기와 신앙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을 통해 훨씬 진전된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는 후안 루이스 세군도의 “해석학적 순환” 이론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면서 이데올로기와 신앙의 관계를 규명하였다.
 구산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데 신앙의 절대성은 신학이 가다듬은 교리가 절대적 진리이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추상적 가치에 대한 신념이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구산은 세군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교육 과정”을 염두에 두고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 의해 계시된 계몽과 교육의 과정 속에 우리의 삶을 맡김으로써”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교육 과정은 출애굽 사건처럼 역사 현실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객관적인 교육 과정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교육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친다는 신뢰와 신앙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절대성이다.
 신앙의 절대성에 대한 구산의 해석은 바로 그 신앙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적 교육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기에 그때그때의 역사적 상황에서 재현되면서 구체적인 모습을 띠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신앙이 자신을 표현하는 상대적 형식을 갖는다는 뜻이다. 구산은 혁명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신앙이 현실을 변혁하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상대화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구산은 세군도를 인용한다. 세군도는 성서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이 절대적인 요구를 담고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은 오늘의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얻은 하나님 사상”과 “변화무쌍한 역사에서 우리에게 밀려드는 문제들” 사이에 큰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 가로 놓여진 “거리”를 예리하게 의식하는 사람은 이 둘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으려고 할 것이다. 세군도는 이 다리를 “목적과 수단의 체계”로 규정했고, 바로 이 체계를 이데올로기로 명명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인간의 능력과 자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산은 하나님의 통치를 역사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에는 바로 이러한 신앙이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피할 수 없고, 따라서 “신앙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의 필연성”을 말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구산이 이데올로기와 신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던 1983년에는 이데올로기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현실 변혁의 힘을 갖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고 이데올로기의 선택을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은 거센 저항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군도가 말한 “목적과 수단의 체계”를 전략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였다면, 기독교 신앙과 혁명적 실천의 관계를 기독교 사회윤리의 틀에서 논의하기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기독교인들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전략적으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는 성서의 해석학적 매개를 통하여 드러나는 신앙의 요구에 대한 규명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고, 마지막 하나는 실천 주체와 실천의 대상이 갖고 있는 역량과 자원에 대한 냉정한 평가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서 실천 주체로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전략적으로 판단하고 행위를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할 때, 구산은 신앙의 이데올로기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전략이라는 표현을 썼다.

IV. 해방실천의 사회선교

 구산은 사회선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사회윤리학자였다. 이러한 관심은 그가 청년기에 헌신했던 산업선교의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사회선교는 역사 현실 속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선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선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당파적 선택을 피할 수 없고, 엄혹한 현실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판단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구산이 생각한 사회선교는 해방실천의 사회선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구산에게서 사회선교와 기독교윤리학은 실천과 이론의 관계를 갖는다. 기독교윤리학은 사회선교의 실천에 대한 이론적 성찰이다. 사회선교의 실천이 먼저이고, 기독교윤리학의 이론적 성찰이 그 뒤를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구산의 기독교윤리학은 해방실천의 선교윤리학으로 규정될 수 있다.
 아래서 나는 구산의 윤리학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갖는 사회선교론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피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구산이 사회선교를 논할 때 심각하게 고려했던 교회의 지정학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 교회의 지정학

 구산이 교회의 지정학을 심각하게 고려했던 까닭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나라 사상에 입각하여 현실을 변혁하고자 하는 장소가 국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사회선교를 다루기 전에 반드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검토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다룰 때 그가 사용한 방법은 신학적 방법이 아니라 종교사회학적 방법이었다.
 교회의 지정학은 “한 국가 안에 처해 있는 교회의 사정”이다. 하나님 나라의 사상을 세상에 실현하고자 하는 교회는 인권, 정의, 평화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국가와 충돌하기 쉽다. 1960년대 초 이후에 세계 곳곳에서 나타났던 권위주의 국가들에서 교회는 심각한 안보 딜레마에 봉착했다. 교회는 제도적 기구로서 자신의 존립과 성장에 일차적인 물질적 이해관계를 갖기 때문에 국가에 저항함으로써 제도적 안정을 잃고자 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헤게모니를 구사하는 세력은 이런 점에서 정치적 헤게모니 세력의 전략적 동맹자가 되기 쉽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선교의 자유를 승인받는 대가로 권위주의 국가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이렇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이들에 동조하는 하층 성직자들과 교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상층 성직자들은 서로 극렬하게 분열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구산은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사회선교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진정한 교회의 지정학”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제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은 교회를 주시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가 어떤 지정학적 선택을 할 것인지를 주시하고 있다. 결국 교회의 생존권은 가난한 자들의 판단에 달려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국가권력자들은 없어질 수 있지만 민중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 결국 교회는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켜야 하는 필연성 때문에 교회 기구를 보존하려는 본능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처한 지리적 여건이 진정한 교회의 지정학을 획득하게 한 셈이다.”

“진정한 교회의 지정학”은, 지배와 착취로 인해 선명하게 갈라진 현실에서 교회가 가난하고 억눌리는 사람들 편에 서는 당파적 선택을 하고 그들을 해방시키는 선교를 수행할 때, 국가 권력의 탄압을 받고 생존의 위협을 당하는 현실을 가리킨다. 오직 이러한 교회의 지정학적 현실을 무릅쓰는 교회만이 민중과 더불어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교회의 지정학적 현실에 압도되는 교회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사회선교로부터 은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당파적 선택

 교회의 지정학에 대한 고찰에서도 이미 시사되었지만, 구산의 사회선교 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당파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사회선교의 당파성은 오늘의 현실이 정치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이러한 분열을 반영하는 이데올로기도 지배 이데올로기와 저항 이데올로기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다. 이렇게 분열된 현실에서 교회가 사랑의 보편성을 내걸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만인을 위한 정의가 가능하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는 관점은 “불의”를 은폐할 수 있다. 구산은 지배와 착취로 인해 깊은 분열의 고랑이 패어 있는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이 있고난 뒤에야 비로소 “모두를 위한 정의”를 말할 수 있지, 기존 체제 안에서 모두를 위한 정의를 말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구산은 교회가 사랑과 정의를 온전하게 이루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실천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출애굽 전통을 이어가는 예수의 변혁운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주장일 수 있다. 특히 구산은 예수의 선교전략이 그 당시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룩하고자 했던 만큼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을 도모하는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예수의 선교는 철두철미하게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위해 당파적으로 투쟁하는 것으로 점철되었다.  

“예수는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은 유대의 지배체제하에서 고통당하던 백성들의 편에 서서 몸소 정의를 실천하다가 희생당한 장본인이다. 예수의 선교의 대상은 거의 대부분이 기본권을 탈취당했던 오클로스였다. 그는 한번도 권력층과 불의의 편에 서 본 적이 없으며, 오로지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서서 정의를 위한 당파적 투쟁에 전념했던 분이다.”

 그러나 구산은 오늘의 사회선교가 예수의 선교전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예수의 변혁운동과 오늘의 사회선교 사이에 가로 놓인 간격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오늘의 사회선교가 당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오늘의 현실에서 교회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며, 그러한 선택을 뒷받침하는 사회과학적 현실분석과 전략적 판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산은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가난하고 억눌리는 사람들이 억압과 착취의 체제를 아래로부터 변혁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변혁을 통하여 억압과 착취 없는 세계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분열된 세계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제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편에 서는 당파적 선택과 그들을 억압자들과 착취자들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당파적 실천을 통해서만 역사적 구체성을 갖출 수 있다.

3. 사회선교의 목표와 사회과학적 현실분석, 그리고 전략적 사고

 구산이 생각하는 사회선교는 사회체제의 변혁을 그 과제로 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맺는 관계들은 거의 대부분 제도화되어 있고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제도와 사회구조 안에서 삶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 사회제도와 사회구조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형성되면 바꾸기가 쉽지 않다.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누르고 수탈하는 사회제도와 사회구조는 인간을 비참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만일 이와 같은 비참과 불행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서 인간의 존엄성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체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기독교의 사랑이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의 것이며 또한 구조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인의 절규가 정의, 인권, 평등, 자유라고 한다면 이러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구조를 떠나서는 크리스천의 사랑이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사회구조적인 투쟁이 없이는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사랑이 정치·경제적 구조, 제도, 노조 등 다양한 사회 집단과 구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과 사회구조의 변혁을 위한 투쟁은 같은 동전의 두 면처럼 결합되어 있기에, “선교의 초점”은 “보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구조를 만들고, 정의롭지 못한 세계를 정의로운 세계로 변혁시키는 일”에 맞추어져야 한다. 구산은 이와 같은 선교의 과제를 “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개념화하기도 하였는데, 이와 같은 투쟁은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전략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
 구산은 기독교윤리적인 관점에서 사회선교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사회과학적 현실분석과 전략적 사고의 중요성을 가장 명료하게 부각시킨 학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정의를 위한 투쟁이 사회과학적 분석에 철저하지 못할 때 두 가지 오류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하나는 체제의 문제와 악의 근원, 그리고 세력들의 역학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벌이는 투쟁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회과학적 분석을 결여한 투쟁은 감상적 사고와 무모한 행동주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총체적 비전”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 분석과 인식”에 근거해서 “정의를 수립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전략”을 갖추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정의를 위한 투쟁의 결과까지 내다보면서 책임 있게 정의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그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구산은 사회선교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현실을 분석할 때 어떤 성격의 사회과학을 사용하여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려하였지만, 이에 관한 학문이론적인 글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는 경제현실을 분석하는 작업과 관련해서 발전이론과 종속이론 가운데 종속이론을 선택하는 까닭을 밝히면서 어떤 관점과 방법을 갖춘 사회과학을 수용하여야 하는가를 단편적으로 밝히고 있을 뿐이다. 그에 따르면, 종속이론은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서 수탈과 희생을 강요당하는 후진국 사회에서 “불평등과 사회적 불안의 근원을 파헤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에 경제현실을 분석하는 가장 적절한 파라다임이라는 것이다. 종속이론은 “가장 약한 자의 몫을 되찾아주기 위해 어떤 억압으로부터도 해방시키는 것을 구원사업의 초점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윤리관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산은 발전이론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채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일삼는 사회과학을 경계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고 대안적 전망을 열어주는 사회과학을 수용하여 기독교 사회선교를 뒷받침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해방의 관심을 갖고 구상되는 사회과학의 현실분석을 기독교윤리학적 성찰에 통합하여야 한다는 매우 적극적인 주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4. 이데올로기의 선택과 폭력 사용의 문제

 구산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하는 사회선교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이데올로기의 선택과 폭력의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산의 기독교윤리학에서 이데올로기의 선택이 갖는 의의는 이미 앞에서 밝혀진 바 있거니와, 구산은 사회선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회주의를 이데올로기로서 선택하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물론 구산은 기존의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경직된 형태로 자리를 잡은 기성의 사회주의적 해답을 수용하여 사회선교의 이데올로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소한의 기본 요건을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세계를 수립하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산이 이러한 의미의 이데올로기로서 선택한 것이 바로 사회주의인데, 그것은 “생산수단의 공동소유, 공정한 교환과정을 통한 가장 적절한 부의 부배, 그리고 공동참여를 근간으로 한 정치 참여”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경제민주주의이다. 구산은 이러한 사회주의를 돔 헬더 카마라의 말을 인용하여 “정의(공정한 분배)를 근간으로 한 사회주의”로 규정하기도 했다. 교회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경제의 주체로 세우는 민주적 경제체제를 수립하는 일을 지원하여야 하며, 그 방향으로 신학적 사고의 대전환을 이룩해야 한다고 구산은 생각했다.
 사회주의를 사회선교의 이데올로기로 선택한 데서 구산의 전략적 사고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듯이, 사회선교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폭력 행사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구산의 전략적 사고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사회선교에서 폭력의 사용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논하면서 폭력에 대한 규범적 판단이나 형이상학적 규정을 일단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적 판단을 먼저 내려놓고 폭력의 문제에 접근할 필요도 없고, 폭력은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규정하고서 폭력을 멀리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가치판단을 배제하는 관점에서 폭력을 다루고자 했고, 그것도 사회 현실에서 나타나는 폭력 현상을 갈등이론적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갈등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폭력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구조로 인하여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것은 지배세력이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원초적인 폭력이다. 그들이 구축한 불의한 체제가 곧 구조화된 폭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민중은 억압과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구조화된 폭력에 저항하면서 폭력의 사용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를 가리켜 대항폭력이라고 한다. 지배세력은 다시 저항세력의 폭력을 진압하기 위해 억압적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사회사회적 갈등과 대립으로 인하여 폭력, 대항폭력, 진압이 순환을 이루고 서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에서 억압과 수탈에 저항하는 세력의 폭력 사용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구산의 질문이었다.
 구산은 불의한 체제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을 비판하지 않고, 그 불의한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의 대항폭력만을 문제로 삼고 도덕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폭력에 대한 “빗나간” 접근이라고 보았다. 폭력을 “상관변수”로 파악하는 관점에서는 이 상관변수를 중심으로 한 모든 요소들의 역학관계에 의해 현상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폭력의 문제에 접근할 때 던져야 할 질문은 폭력의 사용이 과연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이다. 바로 이 점에서 구산은 폭력을 철저하게 도구적 개념으로 파악했다. 만일 원초적 폭력에 저항하면서 대항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더 큰 폭력이 나타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거꾸로 대항폭력의 행사가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불의한 체제를 더 강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예상된다면, 폭력의 행사는 자제되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폭력의 행사에 관한 윤리적 판단은 폭력 행사의 결과에 대한 공리주의적 계산과 무관할 수 없다. 대항폭력의 적절성은, 해방신학자 보니노가 세웠던 윤리적 기준을 원용해서 말한다면, 인간의 보편적 가능성을 최대화하고 인간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원칙에 따라 판단할 문제이다.

V. 맺음말

 구산은 한신과 기장의 저변을 이루는 사회윤리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기독교윤리학자로서 특별히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해방을 초점으로 하는 사회선교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구산의 기독교윤리학은 사회선교의 실천을 이론적으로 성찰하는 선교윤리학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윤리학의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서 그 방법을 따져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방법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 나름대로 일관성 있고 견고한 기독교윤리학의 방법론을 확립하였다. 구산의 기독교윤리학이 사회선교의 목적과 이를 달성하는 수단에 관한 논의에 집중되었기에 사회과학적 현실분석과 전략적 사고는 그의 윤리적 성찰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여 해방의 실천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요구를 이데올로기적 선택의 형태로 상대화해야 한다는 구산의 주장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구산은 행동주의적 성향이 강한 기독교윤리학자였다. 그는 사회선교에 헌신하는 기독교인의 실천을 따라가며 윤리를 하고자 했고, 기독교인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 기준을 명료하게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규율하는 윤리적 규범의 선험적 완결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역사적 특수성을 갖는 윤리적 규범의 잠정적 보편성만을 인정했다.
 그런데 만일 기독교 사회윤리가 인간의 삶이 전개되는 제도를 규율하고 형성하는 일을 그 과제로 삼고자 한다면, 윤리적 규범을 제정하는 일과 관련해서는 조금 더 많은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 일과 관련해서는 제도를 변혁의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제도의 변혁에 이바지하는 행위의 판단기준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제도를 규율하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 할 원칙과 이를 관철하기 위한 지침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과 지침을 설정하는 관점과 방법을 생각하면서 나는 더 이상 그 배후를 캐어물을 수 없는 자리에서 윤리적 규범의 근거를 밝히고 윤리적 규범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가는 어떤 과정을 염두에 두고 싶다.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방법론을 모색하면서 윤리적 판단의 규준과 윤리적 행위의 준칙을 그 추상수준과 타당성 요구의 영역에 따라 서로 구별한다면, 나는 구산의 행동주의 윤리학이 갖는 강점과 치열함을 살려나가면서도 규율과 형성의 관점에서 제도적인 것을 다루는 사회윤리학의 비전 있는 현실주의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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