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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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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와 교회

강원돈 (한신대/민중신학과 사회윤리)

I. 머리말

신촌포럼이 기획한 첫 심포지엄의 주제가 ‘한국 그리스도교와 정치 현실’로 설정된 것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한국 그리스도교가 정치를 제대로 형성하는 데 이바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절박한 문제의식을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치는 현실 세계에서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는 이해관계들을 조정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인간의 최고 행위라고 지칭되지만, 오늘의 한국 정치는 계급독재의 수단이나 정파투쟁의 장으로 전락하고 만 것 같다. ‘1987년 체제’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었어도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와 의회는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정치를 보장하지 못한다. 사회적 민주화나 경제적 민주화가 요원하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정치를 극복하고 정치 본연의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한국 그리스도교가 기여할 점이 있을까?
나 역시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기에 신촌포럼에서 발제를 맡아달라고 의뢰하였을 때 이를 흔쾌히 허락하고, 내친 김에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와 교회’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준비하겠노라고 포럼 측에 즉각 전달한 바 있다.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를 논하고자 한 것은 오늘의 민주주의가 대의제의 덫에 빠져 있다고 판단하였기에 그 덫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는 의지의 천명이고, 이러한 정치를 형성하는 데 ‘교회’의 역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하느님의 세계 통치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이 발제에서 나는 먼저 정치를 형성하는 데 고려하여야 할 몇 가지 윤리적 원칙들을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제시할 것이다. 그 다음, 나는 대의제 정치의 형해화, 행정에 대한 정치의 식민지화, 반어적 프레임 정치, 국가를 종속시키는 기업독재 등에 초점을 맞추어 오늘의 정치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역사적-구조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끝으로, 나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고전적 규정에 기대어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를 대안으로 제안하고, 이러한 정치를 위해 교회가 기여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할 것이다.

II.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제시하는 정치윤리의 원칙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을 어떻게 조직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정치는 권력을 행사하여 사람들 사이의 지배관계를 규율하는 행위이다. 막스 베버의 정의에 따르면, 권력은 다른 사람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사회관계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다. 따라서 권력은 지배의 기회이다. 지배는 어떤 사람들에게 특정한 명령에 복종하게 하는 일이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과 명령에 복종하는 의무를 두 축으로 해서 성립된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그 자체로 보면 많은 문제점들을 갖기 마련이지만, 공동체의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은 권력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지배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어떤 원칙을 강구하고 있는가? 공동체에서 질서와 정의를 수립하는 데 정치가 불가피하다면, 정치는 어떻게 규율되어야 하는가? 나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 권력 행사의 정당성과 한계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1. 구약에 나타나는 국가의 정당성 요구의 한계

구약성서에는 권력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이해가 있다. 하나는 지배자의 권력을 옹호하는 전통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를 비판하는 예언자적 전통이다. 이 두 흐름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성서 말씀은 사무엘상 8장이다.
사무엘상 8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하였고, 하느님이 이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백성이 왕을 요구한 까닭은 두 가지이다. 첫째,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통치체제가 필요하다는 것, 둘째, 강력한 왕이 있어야 외부의 적에 맞서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치안과 국방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왕의 지배를 정당화한 셈이다. 이러한 왕권 옹호 전통은 성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사무엘하 7장 16절은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는 말을 전하는데, 이것은 왕이 된 다윗에게 나단이 전해 준 하느님의 계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똑같은 사무엘상 8장에서 예언자 사무엘은 왕을 옹립할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이스라엘에 왕권을 수립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그는 왕권이 확립되면 백성이 왕과 관료, 그리고 상비군을 위해 공납을 바쳐야 하고, 백성이 군역과 강제노역을 담당하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짚었다. 그렇게 되면 백성이 왕의 종이 되어 괴로움을 호소하게 될 터인데 하느님은 그 호소를 듣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권체제는 가나안에 수립되어 있었던 자치적인 부족동맹체를 대체하는 것이었는데, 예언자 사무엘은 왕권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바로 여기에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 이해의 단서가 담겨 있다.
예언자들이 권력집중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출애굽 전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출애굽은 BC 13세기 중반에 전제군주국 이집트에서 강제노역과 압제 아래 살던 하비루 계층의 일부가 모세의 영도 아래 시나이 광야로 탈출하여 자유를 찾은 사건을 말한다. 이집트 땅에서 압제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하비루에게 모세를 파견한 분은 바로 그 하비루 편에 선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 독점되고, 왕이 강력한 관료조직과 군대조직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고, 이와 같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하비루를 위시한 생산계급에게 공납과 군역, 노역을 강제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래서 전제군주국 이집트에서 하비루를 해방시킴으로써 전제군주체제를 부정했다.
이집트 탈출 집단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가나안에 정착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갓월드(N. K. Gottwald)에 따르면, 그 사회는 사회적 악폐의 원천인 토지소유제를 부정하고 확대가족 단위로 토지의 세습적 사용권만을 갖는 자급자족 공동체들의 연대체였고, 공납과 군역, 노역을 강제하는 강압적인 국가권력을 부정하였다고 한다. 권위와 지혜를 인정받아 추대된 부족장은 관습법에 따라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부족회의에서 전쟁과 평화에 관련된 결정을 내릴 뿐이었다. 이런 점에서 원시 이스라엘은 소유와 권력 집중에서 해방된 민주적 공동체들의 연대체였다.
이러한 출애굽 전통을 이어받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 군주체제가 성립된 이후 권력독점과 거기서 발생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을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2. 신약의 국가 이해와 예수의 대안

권력에 대한 신약성서의 이해에도 크게 보면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국가권력을 인정하는 흐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가권력의 폐해를 비판적으로 보는 흐름이다.
로마서 13장 1-7절은 국가권력을 세계의 한 질서로 인정하는 흐름을 대표한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세상에서 선을 이루고 악을 징벌할 목적으로 하느님이 국가권력을 세웠다고 말하고, 신도들은 하느님에 의해 세워진 제도인 국가권력과 그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또한 신도들은 국가에 조세와 관세를 바치고 권력과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의 이 가르침은 국가를 하느님의 질서로 간주하여 국가에 대한 신도들의 무조건적인 복종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하였지만, 로마서 13장 1절에 나오는 “모든 권세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규정은 이러한 해석을 제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든 권세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씀은 권력에 대한 최종적인 주권이 하느님에게 있다는 뜻이고, 따라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권력이 행사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만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의적으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제적으로 권력을 행사한다면, 그러한 권력 행사는 하느님의 뜻에 부합할 리 만무하다.
베드로전서 2장 13-17절은 로마서 13장보다 국가권력의 현실을 좀 더 중시하는 입장에 서 있다. 베드로전서 2장 13절은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종하십시오. 주권자인 왕에게나, 총독들에게나,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권면한다. 이 구절에는 로마서 13장 1절의 제한 규정이 빠져 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로마 제국의 국법질서를 일단 현실로 인정하고 신도들이 그 질서에 거역하지 말 것을 가르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수는 권력 현상에 대해 바울이나 베드로전서의 저자와는 매우 다른 입장을 취했다. 마가복음 10장 43-44절에서 예수는 이방 통치자들이 행사하는 권력을 비판했다. 그는 지배를 위한 권력을 폭압으로 규정하고, 스스로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사람들이 스스로 낮아져서 종처럼 남을 서로 섬긴다면, 공동체의 큰 문제들 가운데 하나인 지배 현상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낮아지기 위해서는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제거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마음은 남을 남으로서 그대로 인정하고 남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에서 나와 너의 진정한 사귐(koinonia)이 이루어지고, 그런 사귐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diakonia)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사귐과 봉사는 공동체에서 권력과 지배의 문제를 극복할 것이다. 바로 여기서 예수는 대안적인 정치 개념을 제시하고, 지배 없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3. 하느님의 통치와 국가

사귐과 봉사의 원칙에 따라 지배 없는 정치를 추구한 예수의 대안을 실현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기에, 나는 인간 공동체를 유지하고 대립과 갈등을 조절하여 질서와 평화를 수립하는 국가가 제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현실주의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 할지라도, 권력 독점체로서 국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따져 묻는 것은 중요하다.
이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국가권력을 위임받은 자가 국방과 내치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국방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부연할 것이 없다. 문제는 내치인데, 사도 바울은 내치의 원칙을 잘 정리했다. 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국가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그것이 국가 공동체에서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국가 공동체가 관장하는 선과 악이 과연 무엇인가를 규명하려면, 여전히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그 개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를 위해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 선이고, 그 반대가 악이다. 통치자에게는 악을 징벌하기 위한 강제력이 부여되었다.
그런데 만일 통치자의 권력 행사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울은 그러한 질문을 던진 바 없지만, 그러한 질문을 닫아놓은 것도 아니다. 바울의 국가 이해는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와 캘빈의 국가 이해에서 각기 다른 강조점을 갖고서 되살아났고, 오늘의 정치신학에서도 중요한 모티프로 재해석되곤 한다.
바울이 국가가 할 일을 능동적인 어법으로 말했다면, 예수는 이를 부정적인 논법으로 말했다. 우선 그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유지되던 당대 세계를 향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선포했고, 회개하라고 외쳤다. 이제 곧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터인데, 그 통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지배체제에 순응하는 삶을 버리고 180도 방향을 전환하여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라는 뜻이다. 지배의 대전환을 고지하고 그에 대응하는 결단과 행위를 요구한 예수의 선포는 로마의 평화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예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안식을 약속했다. 예수 당대에 ‘수고’는 강제노역을 뜻했고, ‘무거운 짐’은 세금과 지대의 부담을 의미했다. 로마 제국과 그 봉토인 팔레스타인에서 이 세 가지는 로마의 평화를 제도적으로 떠받치는 주춧돌이었다. 예수는 이 지배와 수탈의 체제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시켜 안식을 누리게 하겠다고 말했고,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 소개함으로써 세상의 통치자들이 보이는 폭압적인 모습과 대비시켰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인용한 마가복음 10장 43-44절에서 예수가 말한 바와 상통한다. 그는 폭압적인 지배를 부정하고 온유와 겸손의 원칙에 입각하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를 위해 구성원들이 짊어져야 할 ‘멍에’와 ‘짐’을 가볍게 할 것을 주장했다. 하느님의 통치 아래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며 공동체를 꾸릴 때,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기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기여는 폭압적인 지배 기구와 수탈 체제를 유지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을 것이다.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기여는 공동체에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고,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곳에 충만한 삶의 향유가 이루어진다. 예수는 그것을 ‘안식’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예수는 민중이 ‘안식’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하느님의 통치에 투명한 공동체의 과제이다. 그 공동체는 폭압과 수탈 너머에 있다.

4. 하느님의 정의와 국가

국가가 하느님의 통치에 투명하여야 한다면, 그 국가가 수행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정의의 개념은 히브리 성서 전통을 거쳐 예수 운동에서 가장 날카로운 형태로 부각되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정의이다.
하느님의 정의는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편드는 하느님의 선택과 그들을 위한 배려에서 드러난다. 하느님의 정의는 오직 하느님의 구원하고 해방하는 행위로부터 인식되고, 그 인식은 하느님의 행위에 부합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어진다. 하느님의 정의로운 행위를 통해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서도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고, 피조물과도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관계론적 개념이다.

1) 역사 회상과 실천

히브리 성서에서 공동체가 하느님의 정의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인식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처절한 삶과 그 종살이로부터 해방시킨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행위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했다. 계약법전이 강조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공동체적 배려는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회상에 터를 잡고 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지 않았느냐?”(출애 22:20) 이와 같은 약자 배려의 정신은 과부와 고아에 대한 보호(출애 22:21f.), 떠돌이에 대한 보호(레위 25:35) 등으로 이어지며, 타작이나 수확을 할 때 이삭을 남겨 두거나 열매를 남겨 두어 “가난한 자와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 먹도록 남겨 놓으라.”는 분부로 나타난다. 출애굽 전승의 핵을 이루는 약자 배려의 정신은 사회기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 제도로 발전되었으며,(신명 14:28-29) 예언자들에게도 계승된다.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지식과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같은 동전의 양면이었다.(예레 9:23f.; 예레 22:15; 이사 58:10 등) 이러한 예언자 정신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는 예수의 선언으로 이어진다.(루가 6: 20-21)

2) 하느님의 정의와 ‘일용할 양식’

하느님의 정의를 가난한 사람들의 배려와 보호에 직결시키는 성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모티프들을 제공한다. 만나 이야기(출애 16:1-36), 주기도문(마태 6:11; 누가 11:3 병행),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 1-16), 최후심판의 비유(마태 25:31-46)가 그것이다.
만나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출애굽 공동체가 이집트의 축적 경제에 대항하여 추구하여야 했던 대안적인 삶의 상징으로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자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하느님이 아무런 전제 없이 제공한 ‘일용할 양식’을 받았다. 그들은 ‘일용할 양식’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배분되어야 하고,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은 것을 챙겨서 축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했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임을 인식하여야 했다.
만나 모티프는 주기도문 제2항목 첫째 기원(“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에 다시 등장한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루터의 해석은 주목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일용할 양식’은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옷,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현금, 순수하고 선한 배우자, 순박한 아이들, 착한 고용인, 순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자, 선한 정부, 좋은 날씨, 평화, 건강, 교육, 명예, 좋은 친구, 신용 있는 이웃 등”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것이다. 이 ‘일용할 양식’은 나 혼자 차지해서는 안 되고,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어야 한다. ‘우리’가 모두 ‘똑같은 기본적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 필요를 집단적으로 충족시킬 때 우리는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도 자명할 것이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사회정의와 직결된 문제임을 뜻한다. 로호만은 하느님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햇빛을 비추고 비를 내리는 것처럼 이 “양식은 수고하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허락된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의는 그 근본에서 효용성이라든가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은혜 충만한 공의이다. 이 점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 사회적 결과를 지향한다는 점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업적에 따른 정확한 분배’를 뒤집어엎는 ‘하느님의 기이한 의’를 묘사한다. 하느님의 정의는 노동의 업적과 무관하게 삶의 필요에 따라 재화를 나누어 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업적과 보상을 서로 분리하고, 보상과 삶의 필요를 직결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이다. 그것이 기이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업적과 보상을 서로 결합시키는 일이 마치 하늘이 정한 법인 양 생각하는 통념이 그만큼 강력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노동할 기회가 전혀 없거나 노동 업적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른 분배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개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궁핍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최후심판의 비유는,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기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율적으로 증언한다. 최후의 심판자가 의로운 사람들에게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는 것이다.(마태 25: 35-36) 의로운 사람들이 의아한 마음으로 최후의 심판자에게 그들이 언제 그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그는 “네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고 대답한다. 의로운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은 ‘양식, 주거, 의복, 건강, 자유(존엄성)’과 같이 ‘인간의 경제적·정치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웃의 기본 욕구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가 결정되고 우리의 미래의 삶이 결정된다.

3) 하느님의 정의와 보편적 복지

위에서 살핀 성서의 여러 모티프들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인 선택과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에서 구체화된다.
예언자 집단이 요시아 왕에게 개혁을 요구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목록을 제시한 데서 암시받을 수 있는 바와 같이, 나는 하느님의 정의에 투명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과제는 일차적으로 국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세계에서 ‘일용할 양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하여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보장해야 할 과제도 역시 국가에 있다. 나는 그것을 국가의 보편적 복지 구현의 의무라고 말하고 싶다.

5. 생태학적 정의와 국가

만일 국가 권력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사되어야 한다면,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어야 할 영역이 어느 곳인가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영역은 인간과 인간의 공동체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까지도 망라한다.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지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깨지고, 그 결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파국에 직면한다고 증언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히브리 성서는 창세기 3장과 그 모티프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호세아 4장 1-3절이다. 히브리 성서의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정치를 확립하지 않고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온전할 수 없다.
창세기 1장 26-27절은 하느님이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지어 생명체를 지배하도록 위임했다고 말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땅 위에서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을 대행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한 뒤에 각각의 생활영역에서 살아갈 생명체들을 만드시고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하셨다. 생명체들 사이의 바른 관계를 가리켜 정의라고 한다면, 그 정의 가운데서 살아가는 뭇 생명체들의 충만한 삶을 평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보고 ‘참 좋다!’고 외친 정의와 평화의 피조물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서 안식을 누릴 권리를 인정했다. 인간은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 피조물 공동체에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여 만물을 살리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구현할 책임을 가졌다. 창세기 1장 28절은 인간이 세상에서 삶을 꾸려나가는 살림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땅을 발 아래 두라.”는 말씀은 땅을 경작하며 살아가라는 뜻으로 포괄적인 의미의 경제위임인데, 그 경제위임은 경제 활동의 대상이 되는 세계에 대한 폭력적 지배와 착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경제는 피조물 공동체에서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하느님에 의해 허락된 생명 영위 활동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피조물 공동체에서 모든 생명체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로 상징되는 생명의 집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된 관계의 망상구조를 이루고 있다. 각각의 생명체는 이러한 생태학적 연관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분이며, 각 생명체의 환경을 이루는 생태학적 공간은 그 생명체의 생명 활동을 구성하는 틀이다. 따라서 뭇 생명과 그 생명의 환경이 다중적, 다층적 연관을 맺고 있는 생태학적 네트워크를 뒤흔들거나 심지어 파괴하고 각 생명체가 그 네트워크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빼앗는 것은 하느님이 세운 생명의 질서에 대한 위협이고, 피조물 공동체에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여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다.
나는 피조물 공동체에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는 것이 생태학적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태학적 정의는 생태계를 이루는 만물이 바른 관계들을 맺으며 공생과 상생을 이루는 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과 관련된다.

6. 정치윤리의 원칙들

나는, 앞에서 약술한 바, 성서의 가르침과 오늘의 현실을 서로 매개하는 해석학적 성찰의 내용들로부터 정치윤리의 몇 가지 원칙들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첫째, 예수 운동에서 날카롭게 제시된 지배 없는 정치의 비전으로부터, 하느님의 통치에 투명한 공동체는 타인에 대한 지배를 극복하고 사귐과 봉사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역사적인 삶의 조건들 아래서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단 현실주의적으로 인정한다면, 국가에 허락된 폭력은 오직 질서와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 법에 따라 행사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역사적 산물이기에 그 시작이 있었던 만큼 그 끝도 있을 것이다. 국가는 영원한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세워진 잠정적인 제도이다. 그 질서가 문란해지고 정의가 짓밟히고 평화가 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국가에는 폭력의 독점이 허락된다. 국가의 폭력은 법치의 원칙에 의해 규율되어야 한다.
셋째, 하느님의 나라가 땅 위에서 벌어지는 수탈과 폭압의 부정이라면, 하느님의 나라에 투명한 국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삶의 기회와 소득을 정의롭게 분배하고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여야 한다. 나는 이를 가리켜 정의로운 분배의 원칙과 민주주의의 원칙이라고 말하고 싶다. 수탈과 폭압은 국가 권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하부 체제들에서 경제권력, 사회권력, 문화권력, 교육권력, 종교권력 등등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국가는 공동체의 다양한 하부 체제들에서 지배와 수탈 관계가 나타나지 않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넷째,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편들고 그들을 배려하는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국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차별 없이 ‘일용할 양식’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이 원칙을 보편적 복지 구현의 원칙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다섯째, 성서가 가르치는 생태학적 정의를 염두에 둔다면, 국가는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각 생명체가 각자 부여받은 자리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고 생태계의 건강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며 경제활동을 규율하여야 할 것이며, 나는 이를 가리켜 생태학적 정의의 원칙이라고 말하고 싶다.

III.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정치의 실패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해 온 일들을 되돌아보면, 정치의 실패를 보여주는 무수한 사례들이 정권의 패악들과 겹쳐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고소영,’ ‘강부자’라는 시쳇말로 표현되는 특권적이고 배타적인 지배세력의 등장, 부자 감세, 미국 쇠고기 협상, 용산 참사, 쌍용차 분규, 법을 앞세우며 기본권과 생존권 실현을 위한 저항운동에 자행한 광범위한 탄압, 세종시를 위시한 국가사업을 둘러싼 대통령의 식언과 기회주의적 망발, 4대강 개발사업과 국가복지의 축소, 정권이나 재벌 혹은 금융기관에 대한 비판을 억누르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의 광범위한 인권 침해, 방송통신위원회와 낙하산 인사를 통해 KBS, MBC, YTN 등 주요 공중파 언론사들의 장악, 공중파 종합편성권 배정을 통해 친정부매체들에 대해 특권적 혜택 부여, 법안과 예산안의 거듭되는 날치기 통과, ‘함바 비리’에서 짐작할 수 있는 토건세력과 권력집단 사이의 광범위한 유착과 부패고리,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 같은 독소조항이 들어 있는데다가 이익균형이 깨졌다고 비판되는 한미 FTA의 졸속 인준, 동북아 평화질서를 교란시킬 것으로 우려되는 서귀포 해군 기지의 막무가내식 건설, 대통령 친형과 ‘영포 라인’을 중심으로 선출되지 않고 감독되지 않는 지하 권력의 암약과 부패 커넥션, 정권 차원의 민간인 불법 사찰, 대선을 앞두고 정권 핵심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는 매카시즘 공작 등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이명박 정권에서 권력 행사가 실체적 정당성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경우 절차적 정당성마저 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가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정부라고 주장하고, 또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정당성을 결여한 어처구니없는 권력행사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고구조와 합리성 구조를 갖고 있는 듯하다.
나는 ‘경제대통령’ 혹은 ‘CEO 대통령’을 자처한 이명박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래로 한국 사회는 군부 집권 시대의 국가주도적인 개발독재의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고 국가종속적 기업독재 사회로 전환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가 몸에 새기고 있는 CEO 특유의 합리성 멘탈리티가 한국 정치를 기업에서나 볼 수 있는 권위주의적 독재와 현실기만적인 언어정치의 프레임에 묶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정치의 실종이며, 현실 사회의 다양한 맥락들에서 나타나는 대립들과 갈등들을 해결하는 정치적 과정의 기능 상실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정치의 기능 상실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아래서는 박정희 독재체제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의 기능 상실을 역사적-구조적으로 분석한다.

1. 박정희의 국가주도적 개발독재 모델과 그 합리성 구조

박정희는 국가와 자본의 동맹을 기반으로 해서 국가주도형 개발독재 모델을 구축하였다. 그것은 한 마디로 경제성장을 국시(國是)의 지위에 올려놓고, 이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들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기업국가 모델이었다. ‘주식회사 한국’이라는 시쳇말은 이 모델을 성격화한다.
이 모델을 작동하는 원리는 목적합리성이다. 효율성과 업적은 이 모델의 성공을 측정하는 기준이다. 경제성장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왜 한 나라의 지상목표가 되어야 하는가 하고 의문을 품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격을 의심받을 만한 짓이었다. 경제성장을 국시로 정하는 데 민주적 동의 절차가 있었을 리 만무하니, 민주주의는 기업 국가 모델에서는 부차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경제성장을 효율적으로 달성할 능력이 있는 엘리트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절차적 민주주의가 방해된다면, 그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이 달성될 때까지 유보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자 “정치가 실종되고, 오로지 행정적 효율성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가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실종은 1969년 삼선개헌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정치가 실종된 효율적인 국가는 1972년의 유신체제로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국가주도형 개발독재에서 국가가 모델로 삼은 것은 군대였다. 군대는 주어진 목표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나 이의제기 없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그 수단들을 효율적으로 조직하는 기계이다. 이러한 군대의 합리성 모델은 시장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목적합리성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면서 자원 할당의 최적화를 꾀하는 기업 모델과 논리적으로 본질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군대에서 목적합리성의 추구를 몸에 새긴 박정희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난 뒤에 경제성장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기업국가로 효율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장악한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제성장을 강력하게 추진하였고, 경제성장은 민중 부문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때만 해도 자본 투입이 늘어나면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성장이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고 긍정적인 개념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이러한 경험이 공유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국가주도적 개발독재 체제의 위기와 그 체제의 신자유주의적 개조

박정희의 국가주도적 개발독재 체제는 1970년대 말에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쳤다. 하나는 1970년대 초부터 강력하게 추진된 중화학 공업 육성전략에 따라 이 분야에 중복 투자된 과잉자본의 문제였다. 중화학 분야의 채산성은 급격히 떨어졌고, 사태를 더 악화시킨 것은 투자 자원의 주요 구성이었던 외채의 상환 부담이 엄청나게 컸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수출입국형으로 조직된 한국경제의 체질이 약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는 수출경제와 내수경제의 이원화 구조를 취했기에 장기간에 걸친 노동 수탈이 가져올 파국적인 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중후반 이후로 세계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나 중화학 공업 제품을 위시한 상품 수출이 둔화되자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는 급격히 위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국민경제 차원에서 생산과 소비의 거시균형 조건을 마련할 수 없었던 개발독재 체제는 이 위기를 쉽게 타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위기 요인들이 서로 작용하면서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붕괴되고 말았다.
1980년대 초에 등장한 신군부는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 과잉자본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고, 공급자 중심 경제로 알려진 레이거노믹스를 받아들여 강력한 재정 긴축에 나서서 박정희식 개발 독재의 고질병이었던 연 10%대의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대의 변화된 국제경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경제안정화와 경제자유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전두환 정권이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바탕을 두고 박정희의 개발독재 체제를 수정하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1987년 6월 신군부체제는 강력한 민주화 운동의 압력에 밀려서 직선제 개헌에 타협하였고, 이로써 이른바 ‘1987년 체제’가 성립되었다. 아래로부터 분출한 시민세력과 사회세력의 권력은 군부체제를 타도하는 데 미치지 못했기에 ‘1987년 체제’는 집권 신군부세력과 야권의 정치세력과 시민·사회세력이 타협을 하여 얻은 산물이었다. ‘1987년 체제’의 핵심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보장하되, 보수적 정치세력들의 연합의 틀에서 사회세력들의 진출을 억지하여 사회경제적 민주화 요구의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87년 체제’에서 사회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는 진전을 보지 못하였고, 정치적 민주주의는 경제의 지구화 조건들 아래서 손쉽게 신자유주의와 결합하였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승리한 노태우는 한국경제의 구조를 민주적으로 개혁하라는 시민․사회세력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도리어 자본 주도적인 경제운영에 물꼬를 터주고자 했다. 노태우 정권의 국가 엘리트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에 한동안 지속된 이른바 ‘3저 호황’을 이용하여 경제자유화와 경제개방화 정책을 더욱 진전시켰던 것이다.
1993년에 들어선 문민정부는 1995년 WTO 체제가 출범하자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전략적 개입에서 후퇴하여 ‘세계화’를 구호로 내세웠고, 금융시장의 자유화를 추진하면서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개조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재벌의 방해와 노동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는 IMF의 경제관리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1997년 말에 발생한 외환위기에 직면한 한국 정부는 IMF에 긴급인출권을 요청하였고, IMF는 긴급인출권 제공을 위한 네 가지 이행조건들을 내걸면서 한국 경제구조의 개혁에 깊이 개입하였다. 네 가지 이행조건들은 노동시장의 유연화, 기업의 구조조정, 공기업 민영화, 금융시장의 완벽한 자유화 등이었다. 김대중 정권은 IMF의 경제신탁 아래서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금융시장의 자유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였고, 국민적 저항이 큰 일부 망산업(網産業)을 제외하고는 공기업 민영화를 진행하였으며, 기업지배 구조의 개혁에도 착수하였다. 김대중 정권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가 목표로 설정하였으나, 민주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사회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얻지 못했다. IMF의 독재 아래서 사회세력이 궤멸적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권이 사회적 조합주의의 틀에서 노사정위원회를 꾸리기는 하였지만, 노사정위원회가 노동자들의 손발을 묶고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통로가 된다고 생각한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를 곧바로 탈퇴하였다. 외환위기 이후에 조성된 이와 같은 세력관계의 틈바구니에서 김대중 정권은 수출지향적 경제개발 연대에 급격하게 성장한 재벌체제를 해체하고 기업지배구조를 민주화하는 데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시대에 한국 사회는 빠르게 신자유주의적으로 개조되기 시작하였다.
참여정부 시대에 이르러 신자유주의는 굳건한 뿌리를 내려 한국 사회를 극단적으로 양극화시켰다. 노동소득배율의 악화, 비정규직의 확산, 노동빈곤의 심화, 청년 미취업의 악화 등에서 확실하게 파악되는 사회적 양극화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을 좌절과 실망의 덫에 빠뜨렸다.

3. 참여정부가 추진한 정치실험의 실패

참여정부 시기에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정치 아닌 것에 의한 정치의 위축과 포획이다. 정치는 위축되어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이해관계들의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는 기능을 거의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고, 정치가 있어야 할 바로 그 곳에 검찰 수사나 판사의 판결, 언론의 여론몰이, 관료와 전문가의 지배 등이 자리를 잡고 정치를 포박하고 정치를 대체했다. 정치가 위축되고 정치 아닌 것에 의해 정치가 포획되면서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와 혐오, 심지어 무관심이 기승을 부렸다.
문제의 시작은 정부와 여당을 인위적으로 분리시키는 당정분리였다. 당정분리는 대통령이 정부의 수장과 여당의 당수를 겸임하면서 나타나는 권력 독점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여당으로부터 퇴각하여 청와대를 정점으로 하는 정부의 수장으로 남음으로써 한국 정치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당정분리는 집권여당의 실질적인 폐지를 의미하고, 그것은 그 자체가 정치의 위기이며, 민주주의의 기능 마비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은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조정하는 정치적 방안을 마련하고 그 방안을 구현하기 위해 정치세력들의 관계를 조율하고 그에 바탕을 두고 법과 제도를 만들어 최적의 사회통합을 이루어가도록 설치된 기구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당은 대중의 요구를 시시각각 파악하여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고 그 요구를 정부의 정책에 반영하거나 입법을 통해 제도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참여정부에서 시도된 당정분리로 인해 정치적 조정의 정점에 서 있어야 할 대통령은 정당정치적 기반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참여정부에서 정치는 대중으로부터 유리되고,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을 조직할 수 없었다.
참여정부가 설정한 정치적 의제들도 정치를 위축시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역통합과 부패 척결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갈등의 해소에 올인 하다시피 하였는데, 문제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지역갈등이 계급갈등, 세대갈등, 젠더 갈등 같은 보다 깊은 대립과 갈등을 은폐하는 정치적 수사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정치에는 이러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부패 척결이라는 정치적 의제도 정치의 지평을 협소하게 만들고, 정치를 검찰과 언론의 무대로 내어주는 결과를 빚어냈다. 지구당 운영, 여론조사 등 바닥에서 정치를 하는 데 비용이 들기 때문에 정치자금을 둘러싼 부패는 언제든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법이 정한 절차와 한도를 넘어서는 정치자금 수수가 적발된 정치인은 영락없이 부패한 족속으로 낙인 찍혔다. 정치자금 = 부패의 등식이 통용되는 상황에서 정치인의 정치자금 수수는 검찰 수사와 재판의 대상이 되었고, 언론의 단골 메뉴로 떠올랐다. 부패척결이라는 도덕적, 법적 요구를 빌미로 삼아 검찰과 언론은 민주주의 정치를 포박할 수 있었다.
현실정치의 대중적 기반을 상실한 참여정부는 결국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하고 있으되 민주적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는 기득권 세력들과 타협하거나 전문가 집단이나 시민단체들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정책 개발은 주로 정부 관료 집단에게 맡겨졌으며, 관료적 효율성과 성과주의가 정책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대신하였다. 관료들은 정책에 대한 정치적 조율이라는 성가시고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조하여 정책의 합리성을 주장하였다. 정치인들은 무능한 비전문가로 치부되고, 언론 역시 정치인들이 정책 개발에 관여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정부의 각 부서에는 전문가 집단이 형성되어 다양한 위원회들이 꾸려졌으며, 정부와 시민단체의 공치(共治)라는 명분 아래 시민단체들이 정부위원회들을 통하여 힘을 발휘하였다. 이렇게 해서 정부의 활동은 엘리트 중심의 전문가주의에 의해 포획되고, 대중의 요구를 담아내는 정당정치적 조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와 혐오가 확산되었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커졌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보수언론은 재벌, 자본소득자, 부동산 투기세력, 고위 관료, 고소득 전문가 집단, 불투명한 연줄 네트워크, 사학 등 기득권 카르텔의 이익을 위해 대중이 정치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정치 과정은 ‘원숭이 극장’처럼 희화화되고, 혐오스러운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정치는 ‘부패’, ‘무능’, ‘아마추어리즘’, ‘난장판’이라는 수식어와 결부되어 소개되었고, 기득권 카르텔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정치적 담론에는 영락없이 ‘좌파’라는 딱지가 붙여졌다. 이와 같은 보수 언론의 집중적인 포화는 참여정부이기 때문에 더 심하게 퍼부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국가의 축소와 심지어 퇴각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과정에서 이익을 보는 세력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이었고, 따라서 정치는 이미 시대착오적인 유물로 치부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4. 국가종속적 기업독재와 그 합리성 구조

이명박 씨는 참여정부의 정치실험이 실패한 바로 그 지점에서 정치를 대체하는 전문가주의의 화신으로 등장하였다. 그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10년 통치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경제대통령’으로서 나라살림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집권 기간 동안 7%의 경제 성장을 이루고, 대한민국이 일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의 7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성장 공약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명박 씨가 이를 약속하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했다. 그는 재벌에서 잔뼈가 굵은 성공한 CEO였고, 청계천 정비와 버스전용차선 설치 등의 목표를 내걸고 이를 달성함으로써 CEO형 서울시장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는 목적합리성의 구현자로서 받아들여졌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과단성 있게 경제성장의 목표를 정하고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하여 이를 이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경제 대통령’ 이명박이 해마다 7%의 경제성장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본래부터 성장을 위해 복지를 포기하겠다고 말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그는 경제 규제를 최소화하고 국가 부문에서 낭비되는 자원을 절약하여 잠재성장력을 5%에서 7%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잠재성장률을 7%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생산요소의 투입이 증가하여야 할 것이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자본 투입이 크게 증가하여야 한다. 자본 투입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저축률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그것은 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이 줄어들고 자본소득이 크게 늘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바로 이와 같은 국민적 내핍을 통해 이루어진 경제성장의 성과가 국민 복지를 향상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국민경제가 영토국가의 주권 아래서 높은 수준의 상대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을 때에는 ‘한강의 기적’을 통하여 그럴 수도 있었지만, 경제의 지구화 조건 아래서 금융자본에 의한 수탈이 가혹하게 진행되는 현대 경제에서 경제성장이 국민복지의 향상을 저절로 가져올 수 없다. ‘고용 없는 경제성장’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경제성장이 고용의 증대와 소득의 증가를 동반하지 않는 상황에서 경제성장은 자본의 지배와 수탈을 은폐하는 현혹의 수사에 불과했다. IMF 경제신탁 이래로 사회적 양극화의 10년을 보낸 작은 사람들은 혹독한 시절을 보내게끔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60% 이상의 지지를 받고 ‘경제대통령’이 당선되자, 그는 자신이 내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업친화적인 정책을 일관성 있게 수립하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기업친화적인 국가’라는 세련된 슬로건까지 내세우며, 규제 최소화, 세율 최저화, 서비스 산업 글로벌화, 법 지배 원칙 확립 등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패키지로 묶은 ‘기업환경 조성 4대 원칙’을 제시했다. ‘경제 대통령’은 지구화 시대에 기업을 위해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기업에 좋은 것은 사회에도 좋고, 국가에도 좋다고 믿었다. 따라서 국가가 기업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마련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국가는 기업을 위한 도구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더 이상 국민 국가 내부에서 다양한 집단들과 계급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해관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하는 정치의 장이 아니라, 효율성과 업적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의 하위 영역으로 편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를 경제의 하위 영역으로 편제하는 관점은 생활세계를 그 하위체계인 경제에 종속시키는 관점과도 통한다. 경제적 합리성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나 담론의 비효율성을 비웃으며 생활세계를 유린하고, 설정된 목표의 의미와 정당성을 따지는 이성은 단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들을 조직하는 데 골몰하는 ‘도구적 이성’에 가려진다. 그 동안 경영 마인드가 낯설게 여겨지기만 했던 생활세계의 여러 영역들은 경영 마인드에 따라 재편성되고, 생활세계는 그 하부체계에 불과했던 경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생활세계를 통해 형성되었던 주체성은 생활세계적 합리성을 덮치는 이질적인 합리성의 지배 아래서 왜곡되고 분열된다. 공동체 관계에서 좋고 바른 삶을 추구하는 분별력은 시장에서 경쟁하여 성공을 거두려는 기민성에 자리를 내어 주고, 공동체 관계와 무관하게 ‘웰빙’을 추구하는 개인중심의 모나드적 쾌락주의로 대치된다. 시장에서 경쟁하여 성공을 이루는 데 유용한 것이 참된 것이라는 시장실용주의는 생활세계의 규율을 무력화한 새로운 사회의 철학으로 자리를 잡는다.
‘경제대통령’은 이렇게 경제적 합리성에 따라 행동하고 서로 경쟁하는 개인을 이상화하고, 그러한 개인들이 계약에 따라 조직하는 법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회의 이상적 모델은 기업이다. ‘경제대통령’은 기업의 모델에 따라 사회의 모든 영역을 재조직하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국가 자체를 기업 모델에 따라 재편하려는 의지를 분명하게 천명했다.
‘경제대통령’은 자본과 국가의 관계를 확실하게 자본주도적 관계로 설정하고자 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일하면서 국가가 자본의 요구에 종속된 채 기업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세계가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국가종속적 기업 독재의 세계이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기업사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업총수가 경영전권을 행사하며 생산요소들의 적절한 배합과 투입을 통하여 생산 공정의 합리성을 극대화하듯이, ‘경제대통령’은 경제성장을 위해 국민을 동원하고 명령을 내리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을 국민에게 주입하고자 하고, 확신에 가득 찬 채 결정한 국가사업을 국가 폭력을 동원하여 일사천리로 추진한다. 대통령의 결정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절차나 과정은 흔히 생략된다. 따라서 ‘경제대통령’에게 정치는 없다. ‘여의도 정치’라는 폄하적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정치는 ‘경제대통령’의 합리성 멘탈리티와는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시장 성공에 이바지하는 것이 진리라는 시장실용주의는 정치를 대중의 눈에서 지워버리고, 정치를 국가 활동에서 영영 배제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동원되는 이념적 도구이다. 따라서 소통의 부재 혹은 배제는 CEO형 대통령 이명박이 체화하고 있는 합리성 구조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이다.

5. 이명박 정치의 실패를 응축하는 4대강 개발 사업

‘경제대통령’ 이명박이 체화하고 있는 목적합리성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내쫓고 정치를 경제성장을 위한 공작으로 퇴행시켰다. 나는 4대강 개발 사업에서 ‘경제대통령’ 이명박의 합리성이 초래한 실패를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개발 사업이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한정된 국토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 착안하고 이를 최우선적인 국가 목표로 설정했다. 토건사업가의 마인드를 갖고 있는 그에게 4대강 개발 사업을 하는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정부의 지출을 늘려 토건업자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고 그 이익은 결국 경제성장의 주요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을 증가시킬 것이다. 한정된 정부 예산에서 토건사업을 위한 지출이 늘어나서 어느 곳에서인가 예산을 줄여야 한다면, 경제성장에 별로 이바지하지 못하는 영역, 예산 축소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가장 약한 영역에서 예산을 과감하게 줄여야 할 것이다. 사회복지 영역이 바로 그곳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생태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심지어 물류학적 관점에서 4대강 사업의 무모성을 지적하는 여론이 빗발치고 국민의 3분지 2 이상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나왔어도, 이명박 대통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 4대강 사업은 합리적인 사업이기에 이를 알지 못하는 국민은 계몽의 대상이 될 뿐이다. 4대강 사업에 대한 정치적 판단이 설 자리는 없었고, 따라서 이 의제를 놓고 대통령과 의회,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정치적 토론이나 소통을 벌이는 일은 아예 없었다. 여당이 국회의원 정수의 3분지 2 가량을 차지하는 의회에서 4대강 사업을 국가사업으로 추진하는 법을 제정한 뒤에는, 4대강 개발 사업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들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작전의 형태를 취하며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눈에는 이 사업에 대한 반대와 저항이 쓸데없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합리성으로 인해 정치는 죽었고, 한반도 생태계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4대강은 장차 무수한 보와 콘크리트 옹벽으로 단절된 거대한 죽음의 호수가 될 공산이 커졌다.

6. 현실기만적 언어정치

이명박 정권이 신흥 지배세력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하여 가장 중시한 것은 언론 장악이었고, 가장 큰 업적을 이룩한 분야는 단연 현실기만적인 언어정치의 영역이었다.
마케팅에 관심을 두고 있는 CEO는 반복되는 광고의 효과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설사 광고의 내용이 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거나 심지어 기만하는 것이라 해도 광고가 발휘하는 설득력은 소비자로 하여금 지갑을 열도록 결단하게 한다. 언어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은 현대 언어학의 결론이지만, 그 이론을 전혀 모르는 전체주의 국가의 선전․선동가들조차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괴벨스는 독일 대중으로 하여금 ‘땅과 피의 신화’를 진리로 믿게 하고, 그 진리의 이름으로 아리아 종족의 생존권을 정당화하고서는, 이를 인종차별과 주변 국가 침공의 근거로 삼았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은 언어가 어떻게 인간의 의식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인간의 행위를 통제하는가를 전율적으로 그려낸다. 그 소설의 무대를 이루는 오세아니아에서는 전쟁을 관장하는 부서가 ‘평화성’으로, 사상범죄를 포함한 모든 범죄를 캐기 위해 고문을 서슴지 않는 부서가 ‘애정성’으로, 배급량 감소와 가난을 강제하는 부서가 ‘풍요성’으로,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부서가 ‘진리성’으로 불린다. 거기서는 전쟁이 평화라 일컬어지고, 자유는 예속으로, 무지는 힘으로 불린다. 『1984년』은 반어법적 현실기만과 의식통제의 전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명박 정권은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시도한 바 없는 반어법적인 언어정치를 통해 대중의 의식을 헤게모니 레토릭에 묶어두는 기술을 즐겨 사용한다. 물론 기만은 그람시적 의미의 헤게모니 개념에서도 대중을 설득하는 기제로 인정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서로 대립하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만, 자본가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은 계급 타협과 계급간 이익의 균형을 실현하여 사회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상대 계급을 포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주장에는 분명히 기만적인 요소가 있지만, 대중을 설득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하는 역사적 블록의 ‘유기적 지식인들’은 그런 식의 정치적 레토릭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 살필 수 있는 바와 같이 ‘대형’(大兄)의 지배를 위한 반어법적 현실기만과 의식통제는 그람시적 의미의 헤게모니적 설득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언어의 프레임에 인간의 의식을 가두어 놓고서 인간에 대한 총체적 지배를 실현하려는 공작이다.
이명박 정권이 시도하는 언어정치는 조지 오웰류의 반어법적 현실기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명박 씨는 집권을 위해 ‘좌파 정부의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프레임을 구축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좌파 정부’이기 때문에 10년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는 것인데, 그 10년 동안 ‘좌파 정부’가 있기나 했는가? 또 누가 10년 동안 잃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10년 동안 얻은 사람들도 있었을 터인데 그들은 누구인가? 10년 동안 잃었다는 사람들에게 이명박 씨는 무엇을 약속했는가? 그가 내세운 언어 프레임 안에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그러나 ‘좌파 정부의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프레임은 대중적 설득력을 발휘하였고, 상대 진영을 그 프레임에 가두어 무력화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4대강 살리기’라는 언어는 또 어떤가?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 생태계에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 거의 분명한 4대강 개발 사업을 ‘4대강 살리기’로 호명하는 것은 현실기만적인 언어정치의 극치일 것이다. ‘고소영,’ ‘강부자’라는 시쳇말로 표현되는 신흥 지배세력의 이익을 실현하는 기구로 전락한 것 같이 보이는 이명박 정권이 ‘서민 중시 정책’을 수립하겠다고 주장하고, 한정된 자원을 특권 세력에게 배분하는 불공정한 사회를 혁파할 의지가 전혀 없으면서도 ‘공정사회’를 내세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명박 정권의 현실기만적인 언어정치를 확산시키는 것은 흔히 ‘조중동’으로 함께 묶여 표기되는 보수 언론 매체들이다. 이 매체들은 친미 반공주의, 성장주의, 업적주의, 시혜적 복지주의, 가부장적 온정주의 등으로 대중을 포박하고,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일체의 도전을 ‘좌파’ 혹은 ‘사회주의’로 낙인찍어 대중의 정치적 상상력을 싹부터 잘라낸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정권 옹호적인 인사들을 KBS, MBC, YTN 등의 공중파 방송사들의 사장으로 임명하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보수 언론사들에게 종합편성권을 부여한 오늘의 현실에서, 현실기만적인 언어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IV.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정치의 실패를 극복하고, 정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나는 앞에서 제시한 정치윤리의 몇 가지 원칙들을 염두에 두면서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의 가능성과 이를 위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오늘의 구체적인 삶의 조건들 아래서 예수가 꿈꾸었던 대안 정치, 곧 사귐과 봉사의 원칙에 바탕을 둔 지배 없는 정치를 당장 이룩하지 못한다고 해도, 정치는 하느님의 통치에 투명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법치의 원칙에 따라 시민공동체를 유지하고 질서를 수립하는 데 일차적으로 이바지하여야 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것도 없다. 그러나 정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정치는 인간의 삶을 매개하는 관계들을 바른 관계들로 형성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정치는 민주주의의 원칙, 정의로운 분배의 원칙, 보편적 복지 구현의 원칙, 생태학적 정의의 원칙에 따라 시민공동체와 그 하부체제들을 규율하여야 할 것이다.

1.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상하여야 한다는 것은, 1970년대와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성과였던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당연한 요구라고 할 것이다. 한국 정치는 ‘민주주의의 덫’에 걸려 있다. 2007년 12월 대선에서 ‘경제 대통령’을 선출한 작은 사람들은 이명박 정권의 실패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뽑은 정치 엘리트가 국가를 기업 지배의 도구로 활용할 뿐, 국가 권력을 활용해서 자본의 독재를 제어하고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들이 선출한 ‘대표’가 그들을 배반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위기이며, 여기에 한국 정치의 치명적인 문제가 도사려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1987년 체제’를 해체하고 한국 민주주의를 다시 설계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구현하면서도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충실한 민주주의 정치,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과 대립의 현실을 인정하고 이해관계들의 조정을 통하여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정의, 더 많은 연대를 실현하는 민주주의 정치여야 할 것이다. 계급갈등, 세대갈등, 젠더갈등, 인종갈등, 정체성 갈등 등등의 현실은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매우 다원적인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며, 그 어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우리 사회의 제도적인 틀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기에 오늘의 정치는 급진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이다. 만일 우리 사회에 다양한 계급들과 계층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본질적인 갈등과 대립을 단지 법과 질서의 힘으로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무지일 것이고, 그러한 대립과 갈등이 마치 없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역사의 종말’이 마치 실현된 것처럼 여기는 독선일 것이다.
한국 정치의 치명적인 문제인 ‘민주주의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표’를 선출하여 행정권력이나 입법권력을 맡기는 제도를 본격적으로 문제시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여야 한다. ‘대표’는 ‘대리’(Vertretung)하는 자이고, ‘대리’는 ‘대리’의 대상이 부재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전제한다. 국민을 ‘대리’하는 자는 그가 ‘대리’하는 국민이 부재한 상태에서 국민을 ‘대표’하여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대의제 정치는 엄밀한 의미에서 책임을 질 대상이 없는 정치이다. 더구나 국민의 ‘대리인들’이 그들의 직책을 유지하는 데 일차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그들만의 배타적인 집단을 형성하여 그 집단의 이해관계에 충실할 때, 국민의 ‘대리인들’은 국민으로부터 실체적으로 독립되기에 이른다. 국민이 호출될 때에는 오직 선거가 있을 때뿐인데, 유권자들의 눈에는 그들을 ‘대리’하였던 ‘대표’가 현존하지 않고 오직 그의 ‘이미지’가 어른거릴 뿐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대의제 민주주의도 시민이 주체가 되는 정치를 담을 수 없다. 시민의 주체적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는 오직 선출된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가능할 때에만 싹이 튼다. 당원과 시민들에 의한 ‘대리인’ 후보의 선출, 선출된 권력에 대한 시민사회의 실효성 있는 감시, 선출된 권력의 소환, 권력의 주체인 시민과 그 ‘대리인’ 사이의 끊임없는 소통 등이 그 전제조건이다.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계급, 계층들과 사회세력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사회 통합과 사회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양심과 신앙의 자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펼칠 수 있는 권리 등 자유권적 시민권을 옹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의 위기와 위험을 혼자 감당할 수 없게 된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더 많은 연대와 더 많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사회적 시민권을 옹호하는 것도 그 만큼 절실하고 당연한 요구이다. 민주주의는 법치를 필요로 하지만, 서로 대립하는 이해관계들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단지 부르주아적 소유권 주장을 절대화하는 경향을 띤 법의 지배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 바로 이 맥락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를 단호하게 옹호하고, 소유권 주장에 의하여 노동권이 부정되는 것에 타협 없이 저항하여야 한다. 오직 그럴 경우에만 사회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를 향해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2. 대항담론의 개발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국가주도적 개발독재로부터 국가종속적 기업독재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정치적 상상력과 정치적 실천을 위축시켰던 합리성 담론부터 깨뜨려야 한다.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이상화했던 ‘합리성’은 사실상 비용 대비 효과를 계산하는 합리성, 도구적으로 계산하는 이성의 합리성이었다. 물론 자원이 한정된 조건들 아래서 더 많은 사람들의 욕망을 더 많이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합리성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도구적 합리성’이 자신의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서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도구적 이성’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 합의하는 과정을 이끌어가는 ‘정치적 이성’을 대체할 수 없고, 대체하려고 들어서도 안 된다. ‘정치적 이성’이 추구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이해관계들의 차이에 의해서만 촉발되지 않고 사람들을 서로 구별하는 가치관들과 정체성들에 의해서도 촉진되는 현대 사회의 특성 때문에, 더욱더 필요하다. 설사 국가의 안보나 질서유지 혹은 국가가 설정한 잠정적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 기구가 ‘전략적 합리성’의 준칙들을 따라야 할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정치적 이성의 재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합리적이어서 무조건 좋고 바른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합리성인가를 반드시 묻는 것! - 그것이 ‘합리성’ 담론으로 무장하고 있는 오늘의 기업독재 체제에 대해 대항담론을 구축하고자 하는 ‘정치적 이성’의 첫 걸음이다.
이명박 정권이 끊임없이 시도하는 현실기만적인 언어정치에 대해서는, 그것이 주권자의 현실 인식을 왜곡시키고 정치적 결정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에 대항하는 정치세력들은 이와 같은 언어 프레임을 해체하고, 그 언어 프레임에 담긴 집권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폭로하고, 이를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대항 언어를 개발하여야 한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언론이 자본과 권력의 영향력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독립되어야 할 것이고, 보수 언론사들에 대한 시민적 통제가 활성화되고, 그들에게 배타적으로 허용된 공중파 종합편성권을 회수하는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이다.

3. 정의로운 분배, 보편적 복지의 실현, 생태학적 정의의 구현

1)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검찰권력, 경찰권력, 관료권력, 재벌, 토건세력, 부동산투기세력 등으로 구성된 지배 블록의 일방적인 독재체제가 구축되었고, 그 결과 자본과 권력을 가진 세력의 지배가 공고화되고 민중부문에 대한 광범위한 야수적 수탈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분배의 원칙에 따라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한 정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지구경제의 시대에 국가와 정치가 정의로운 분배를 실현하리라고 기대할 여지가 없다고 속단한다. 그러나 나는 지구경제의 시대에도 정치는 소멸되지 않고, 우리 사회의 모든 대립들과 갈등들이 집중되는 정치 투쟁의 중요성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의 지구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국가가 자본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불투명한 강박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이지 정확한 현실 인식일 수 없다.
인구 4천 5백만 명이 살고 비교적 높은 수준의 사회경제적 인프라와 문화적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고 내수 시장의 규모 역시 적지 않은 우리나라가 자본의 매력을 끌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우리나라가 얼마만큼 더 자본 친화적인 제도들을 갖추어야 자본이 투자에 나선다는 것인가? 지금은 오히려 선행 정권들이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기 위해 제도 개혁에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우리 경제의 발전 단계와 규모를 볼 때, 이제는 도리어 내수 경제와 수출 경제의 비중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두 경제의 연관을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적정 잠재성장률은 어느 정도이고, 그 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한 최적의 국민저축률은 어느 정도일까?
이 중요한 의제들을 놓고서 정치적 결정이 제대로 내려질 때 비로소 국민소득을 자본의 몫과 노동의 몫으로 배분하는 비율을 정할 수 있을 것이고, 사회를 구성하는 각 주체들에게 적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분배정책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명박 정권이 시대착오적으로 고집하는 시혜적 복지 패러다임은 무수한 복지 사각지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복지경찰제도를 연상하게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회적 안전망은 국민복지를 지속적으로 향상시키지 못하고 복지수혜자들을 가난의 덫에 빠뜨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타파되어야 한다. 현대 세계에서 국가복지는 국가가 수급자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시민이 국가에 당연히 요구하도록 인정되는 권리이다. 그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시민이 국가 앞에서 어떤 의무를 짊어질 필요도 없고, 복지수급에 따르는 반대급부를 제공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이것이 진보적인 복지국가의 원칙이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노동연계 복지 패러다임에 따라 선별적 복지 제도를 구축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이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노동연계적인 선별적 복지 개념은 모든 시민의 복지권을 인정하는 보편적 복지 개념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복지를 제도화하는 것이 현대 정치의 중요한 과제이다.
히브리 성서 전통과 예수 운동에서 확인하는 “일용할 양식”의 의의를 되새긴다면, 오늘의 정치는 기본소득 제도가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제도적 방안임을 인정하고 이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생태학적 정의의 원칙에서 볼 때, 토건세력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 생태계를 뒤흔드는 4대강 개발 사업이 급속도로 추진되는 것처럼 어이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생태계의 건강과 안정을 위해 마련된 환경 규제 장치들을 무력화시키면서 자본의 이익을 실현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생태학적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생태계의 구성부분들이 생태학적 연관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지킬 수 있도록 보장하고, 생태계의 건강과 안정을 유지하는 조건 아래서만 경제활동을 허용하여야 할 것이고, 이를 자연국가의 헌법에 명토를 박아 넣어야 한다. 이것이 현대 문명이 필요로 하는 생태학적 정치의 핵심이다.

4. 정당정치의 활성화

나는 우리 시민들이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의제들에 대해 정치적 결정을 제대로 내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의제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고, 정치 세력을 조직하여 정치적 결정을 이끌어가는 데 정당정치가 중심적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정치를 위해 정당정치를 시민들의 ‘직접행동’으로 대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민들의 ‘직접행동’은 다양한 욕구들과 갈등들을 노출시키는 효과가 있고, 그것들의 정치적 해결을 촉구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정치적 해결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파시즘을 불러들인 전례가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정당정치는 시민사회에 의해 대체될 수 없다. 사회단체들이 정당정치를 대행할 수도 없다. 물론 시민사회와 사회단체들도 넓은 의미에서 정치를 수행하는 주체이다. 시장과 국가를 감시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시민사회가 다양한 정치적 의제를 제시하고, 나름의 전문가적 견해를 정치적 의사소통공동체에 유통시키는 것은 정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노동단체들과 고용단체들이 상황과 과제에 따라 그들의 이해관계를 명료하게 밝히고 정책 대안을 구현하기 위한 정치적 연대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정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와 사회단체들의 역할을 제아무리 강조한다 할지라도,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이 국가 권력의 향방을 놓고 다투는 정당정치에서 가장 치열하고 첨예하게 표출되고 조정된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여는 정당은 생활상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앞서서 조직하는 정당일 것이다. 그러한 정당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서 조작의 대상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던 작은 사람들을 정치의 주체로 서게 하는 정당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작은 사람들이 아래로부터 모은 힘을 기반으로 해서 움직이는 정당은 시민사회와 사회세력들의 정치를 매개로 해서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를 실험하게 될 것이다.

V.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교회의 과제 - 결론을 대신하여

글을 마치면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를 활성화하는 데 교회가 기여하기 위해 몇 가지 유념할 점을 말하고자 한다.

1. 히브리 성서와 예수운동의 해방적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는 무엇보다도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에 대해 예언자적 감시와 비판에 철저하여야 하고,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의 실천을 통하여 예수가 제시한 지배 없는 정치의 비전을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오직 그러한 교회만이 사회적 신뢰와 정치적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신뢰의 바탕이 마련될 때, 비로소 교회는 법치의 원칙, 민주주의의 원칙, 정의로운 분배의 원칙, 보편적 복지 구현의 원칙, 생태학적 정의의 원칙에 근거하여 우리 사회를 재구성하는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의 한 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2. 다원적이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정치를 촉진하기 위해 교회는 교회의 공공성 임무에 충실한 활동을 해야 한다. 우리 사회와 국가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교회의 입장을 밝혀서 종교의 정치세력화를 막기 위해서는 교회와 같은 종교 기관이 국가와 시민사회에서 의견을 형성하는 데 어떤 특권도 부여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교회가 시민사회와 국가를 향해 발언을 할 때, 교회의 공적인 발언은 의사소통공동체의 문법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자신의 견해를 밝힐 때 그 논거들을 조리 있게 제시하여 시민사회와 국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이 확립되면, 교회는 자기중심적인 억지 주장을 늘어놓을 수 없을 것이고, 교회의 이름으로 의견을 제시하기만 하면 그 의견이 당연히 권위 있는 견해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교회가 시민사회적 정당성이나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한 주장을 늘어놓고 지배세력을 옹호하는 정치종교로 등장한다면, 시민사회는 교회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매들과 형제들의 모임인 교회는 개신교 일각에서 나타나는 종교의 정치세력화를 극복하여야 한다. 종교의 정치세력화는 종교 내부에서 종교권력이 자리를 잡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 개신교에서 종교권력이 확립되어 ‘장로대통령’을 선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한국 개신교의 종교권력이 보여주는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시대의 흐름에 동떨어진 냉전적인 사유, 남북한 평화체제 구축에 반하는 반북 선동과 미국 네오콘 이데올로기의 수용, 다문화․다종교 사회에서 공존과 상생에 역행하는 종교문화적 배타성, 타종교에 대한 정복주의적 접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용인과 옹호, 대형교회를 위시해서 거의 모든 개신교 교회들에 만연한 성공주의와 물질주의 등 그 폐해의 목록은 끝이 없는 것 같다. 한미 쇠고기 협상 결과를 옹호하고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를 찬양하였던 개신교 지도자들의 언행은 정치화된 종교가 어느 정도까지 추해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종교권력은 반드시 해체되어야 한다. 오래 전부터 교회개혁을 위한 실천연대가 꾸려져 대형교회의 지배구조, 세습, 재정, 선교 방식, 정치지향성, 목회윤리 등등을 의제로 해서 많은 비판을 가했고, 이와 관련해서 시민사회적 통제를 조직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종교권력은 쉽사리 해체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종교권력을 해체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평신도들이 제도 교회 안에서 권력을 구축하고 이에 기반을 두고 정치권력과 헤게모니 동맹을 추구하는 종교 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인정을 철회하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의 권위를 둘러싼 인정투쟁에서 평신도들이 이길 수 있다면, 교회의 민주화는 매우 빠르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민주화는 성서의 가르침(고전 12장)에 따라 교회를 구성하는 각 지체의 은사가 동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기 다른 은사들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협의체적 공동체를 형성할 때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