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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민중신학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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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민중신학의 과제

강원돈


 돌이켜 보니, 나는 2004년 4월에 민중신학회에서 「지구화 시대의 민중신학을 위한 몇 가지 제언」이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한 적이 있다. 그 발제문에서 나는 1) 민중신학의 재고조사를 약식으로 실시했고, 2) 지구화 과정을 제국의 형성과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로 볼 것인가를 검토한 뒤에, 3) 민중 주체성 테제를 재평가하고, 4) 그 당시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이 민중운동에서 갖는 의의를 살피고, 끝으로 5) 민중신학이 당대 현실의 문제들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는 방식에 대해 논했다. 거의 10년이나 되는 긴 시간이 지나간 뒤에 그 발제문을 다시 읽어보니 그 당시 내가 제안하였던 민중신학의 과제들이 여전히 오늘의 과제들로 설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민중신학자들이 처한 상황이 적지 않게 변화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발상과 새로운 과제 설정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지구화 조건 아래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아래서 신자유주의 체제가 한국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린 뒤에 이명박 정권은 한국 사회를 기업사회로 재편성하고자 시도하였고, 부정선거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87년 체제’의 골간이었던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형해화되었다. 주권재민과 국가권력의 국민 통제라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헌법적 가치를 철저하게 짓밟고 등장한 국가권력은 지구적 금융자본과 다국적 독점자본의 요구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국가권력은 최근에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북을 흡수하고 평정하는 기획을 수립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나는 이처럼 변화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민중신학의 긴급한 과제를 몇 가지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 과제 설정의 일부분은 2004년 4월의 「제언」을 업데이트한 것임을 밝혀 둔다.

1. 민중신학의 최근 동향

 나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 진행된 민중신학자들의 논의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안병무, 서남동, 현영학 등 민중신학의 아버지 세대의 신학적 성과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시도는 1990년대에 여러 저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이른바 훈고학적 해석에서 진일보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아버지 세대의 민중신학을 해석하는 패러다임이 새롭게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유물론적 해석, 인식인간학적 해석, 포스트모던적 해석, 과정신학적 해석 등 매우 새롭고 자극적인 해석의 틀이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던적 관점과 방법을 동원하여 민중신학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은 이미 1990년 중반 이후에 시작되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서 주목되는 것은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과 분석에서뿐만 아니라 이에 대응하는 담론의 형성에서도 포스트모던적 방법이 일관성 있게 관철된다는 점이다. 푸코, 들뢰즈, 라캉, 데리다, 바디우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유의 틀이 민중신학적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용되어 그 나름의 이야기거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아버지 세대와 제2세대에 의해 논의되었던 ‘민중’이 더 이상 포착되지 않거나 그 의의가 소멸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유령’으로서의 민중이나 ‘비시민’으로서의 민중을 논의하기까지 한다. 이처럼 민중과 민중의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기존의 인식론적 틀을 깨뜨리고자 하는 것은 물론 참신한 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유감스럽게도 모순적인 관계들의 한 현실로서 이미 저기 있는 ‘작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민중’이 모순적 현실의 내부에서 그 현실을 타파하는 가능한 행위 주체라는 점을 자칫 놓치고 만다. 그 때문에 포스트모던적 민중론은 현실관계 바깥에서 민중을 찾으려고 하거나, 심리학이나 심지어 미학으로 경사된다.
 마지막 하나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민중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신학적-선교학적 담론을 펼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민중신학의 태동기와 80년대 민중신학에 그 깊은 뿌리를 박고 있지만, 민중운동이 퇴조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부터 오랫동안 활성화되지 못했다. 아마도 민중신학이 현학적인 이론의 실험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담론 형성의 동굴에 들어가 웅크리게 된 것도 현실관계들을 변혁하려는 운동의 계기를 신학형성 과정 안에 끌어들이지 못했거나 그럴 의지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민중신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청년 실업 문제, 쌍용차 사태, 용산참사, 강정해군기지, 고공 크레인 농성, 사대강 죽이기 사업 등 우리 시대의 현안으로 떠오른 민중 문제들을 인식하고, 그 문제들의 해결 원칙을 논의하고, 그 원칙들의 민중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그 문제들의 해결 방안을 정책 차원에서 제안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민중신학이 민중의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우리 시대의 현안 문제들은 한 없이 긴 목록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지구화 조건 아래서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적 양극화와 가난의 확산,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 생태계의 괴멸적 파괴 등은 민중의 삶을 끝없이 위협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들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은 문제지향적이고 대안추구적인 논의를 활성화하는 가운데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민중이 스스로 행위 주체로 나서서 펼치는 해방운동에 이바지하는 실천적인 신학으로 발전할 것이다.

2. 지구화 과정의 인식

 지구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은 민중 해방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신학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다. 민중의 삶의 처지는 크게 악화되었고, 민중의 힘을 분산시키고 고립시키는 억압과 배제의 논리는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민중신학에 큰 도전이 되고 있으며 민중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2.1 문제는 지구화 과정에 대한 인식이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지구화를 제국의 형성 과정으로 파악하는 시각도 있고(네그리/하트),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로 규정하는 시도도 있다(매뉴엘 카스텔스). 지구화의 진행이 사회적 이해관계들을 조정하는 국가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국가를 자본의 지배기구로 전락시킨다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는가 하면, 지구화 과정에서도 국가의 권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지구화의 기술적 기반인 정보화가 문화간 이종결합과 대면을 촉진하여 문화의 개방성을 확대하기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정체성 위기는 근본주의를 강화할 수도 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지구화 과정의 인식과 분석은 인문사회과학의 큰 과제이며, 민중신학도 이 과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민중 해방의 진로와 방법은 지구화에 대한 인식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이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지구화 과정을 제국의 형성 과정으로 인식한다면, 제국의 도래는 자본의 실질적 포섭과 외적 팽창이 완성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고, 제국은 그 바깥에 어떤 장소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제국은 더 이상 제국주의 세력이 아니다. 제국은 제국주의 세력 바깥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하는 식민지 민중의 해방 운동을 통해서 타도되지 않는다. 제국은 오직 제국의 내파(內破)를 통해서만 붕괴될 것이다. 제국은 그 내파를 피하기 위하여 제국의 신민들을 고립시키고 분산시키되 공고한 통합의 외관을 취할 것이고, 제국의 내파를 시도하는 민중은 통합의 외관에서 틈을 찾아내고 고립과 분산으로부터 단결과 연대로 나아가려는 대항운동을 조직하려고 할 것이다. 이 대항운동은 민중 연대에 터잡은 자율적인 꼬뮌의 결성으로 매듭지어진다. 제국의 내파는 국가주의의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율적인 해방구의 네트워크를 가져올 것이다.  
 만일 지구화 과정을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로 규정한다면, 지구적 차원의 생산과 유통과 금융 네트워크 안에서 국가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 있다. 국가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자본의 요구에 충실한 지배기구의 구실을 하는 측면도 있지만, 생산성이 급격히 상승하는 조건들 아래서 시장이 포섭할 수 없는 퇴출 노동력을 공공 서비스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공공투자를 확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보장하는 소득재분배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중세 사회’의 다시 도래하는 것을 피하려면 국민경제 차원에서 생산과 소비의 거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조절 기능은 강화될 것이다.
 위에서 본 지구화에 대한 인식의 두 패러다임은 민중운동의 전망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 하나는 민중운동을 제국과 국가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꼬뮌의 길로 이끌고, 또 다른 하나는 국가의 틀에서 여전히 계급타협의 가능성을 견지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 두 패러다임 가운데 어느 것이 지구화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질문은 지구화 과정의 다른 측면들에 대해서도 던질 수 있다.
 지구화가 매우 다양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고, 지구화 과정이 경제, 정치, 문화 등 삶의  여러 측면들을 새로운 연관관계로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에, 지구화 과정에 대한 인식 패러다임은 경제, 정치, 문화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변화들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고, 이 변화들의 상호관계를 입체적으로 해독할 수 있을뿐더러 민중의 관점에서 지구화 과정을 통제할 수 있는 대안을 기획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을 찾는 일이 민중 해방에 기여하고자 하는 당대 학문의 과제이다.

2.2 지구화 과정이 매우 다양하게 인식되고 있기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구화가 기술의 눈부신 발달에 힘입어 자본주의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의 발전, 신소재 기술의 확산, 유전자 조작, 지구적 차원에서 실현된 생산, 유통, 소비의 네트워크 등은 자본주의의 강력한 힘을 웅변한다. 지적 소유권에 근거한 지식기반 경제의 발전은 이미 자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며, 미래 경제에서 ‘물질적 노동’에 대한 ‘비물질적 노동’의 우위를 약속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눈부시게 발전하는 자본주의는 그 이면에 약탈과 억압의 광기를 감추고 있다. 엄청난 몸집으로 부풀어 오른 화폐자본은 1990년대 말의 아시아 금융위기, 2008년의 금융위기 등에서 보듯이 국민경제들을 초토화할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으며, 국가의 전통적인 경제주권을 무력화하고 있다. 지구적 경쟁의 격화는 노동절약적 합리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린 생산의 지구적 네트워크 등을 통하여 노동을 압박하고, 북반구와 남반구의 어느 사회에서나 새로운 사회적 가난을 확산시키고 있다. 지적 소유권에 근거한 신경제는 정보 처리와 획득의 사회적 불평등을 확산시키고, 유전자 자원에 대한 약탈을 제도화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끊어버리고, 사람들을 경쟁관계로 몰아넣고, 서로 고립된 사람들을 개체성에 유폐시킨다. 사람들은 서로 고립 분산되어 있으면서도 멀티미디어의 이미지 조작으로 말미암아 통합된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 빠져 산다. 사람들을 통합시키는 것은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현실을 속인다. 이른바 ‘스펙터클의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양지와 음지는 모두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세계에서 지구와 그 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은 자본의 실질적 포섭과 팽창의 대상으로 완전히 포획된 것처럼 보인다.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는 암세포의 증식논리와 닮아서 자본의 숙주인 인간과 자연을 죽이고 무덤 속에 파묻어 버리고 있는 것 같다.

2.3 민중신학은 자본의 실질적 포섭과 팽창에서 비롯되는 무서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만일 민중신학이 인간과 자연의 생명공동체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완성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한다면, 자본의 팽창과 축적의 논리에서 비롯되는 현실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일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현실 인식과 대안 모색 과정에서 민중신학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재검토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잉여가치의 원천이 인간의 노동에서 기술로, 그리고 지식기반 경제에서는 ‘지식’으로 옮겨져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더 이상 현실에 대한 설명 능력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기술 독점과 지식 독점이 초과 이윤 능력을 가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기에 일리가 있으나, 바로 그 기술 독점과 지식 독점이 국가폭력에 기생해서 초과이윤을 달성하는 장치가 되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을 통해 축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본은 국가폭력이 확립한 지적 재산권 제도에 기대어 축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강남훈)
 자본의 실질적 포섭과 팽창의 논리가 경제의 영역을 가로질러 인간의 신체와 감성과 의지와 생각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정치와 사회와 문화, 그리고 심지어 종교의 영역에서 체계적으로 관철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지구화 과정에 대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인식 패러다임을 정교하게 가다듬는 과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시장경제가 존속하고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여전히 비판적 현실 인식과 실천적 대안 모색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3. 민중 주체성 테제의 재평가

 민중신학은 ‘민중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민중이 경제, 정치, 문화 등 삶의 여러 차원들에서 주체의 구실을 하는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가다듬어 왔다. 그러한 공동체에서 민중은 경제, 정치, 문화 등 삶의 여러 영역들에 참여하여 결정을 내리고, 삶의 여러 관계들에서 정의와 평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민중 주체성과 관련하여 민중신학은 이제까지 세 가지 패러다임들을 제시했다. 첫째 패러다임은 민중의 사회전기 패러다임이다. 이 패러다임은 민족지적 접근(ethnographical approach)을 방법론적으로 전제했다. 민중이 지배와 수탈과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민중의 주체성을 상상하기조차 어렵던 시절에 지식인의 선입견과 편견을 깨고 민중의 주체성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패러다임의 성과이다.
 둘째 패러다임은 계급론적 접근에 근거를 두었다. 민중은 일종의 계급동맹체로서 한국 사회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이끌어가는 운동의 주체로 인식되었다. 이 패러다임은 민중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계급의 문제를 중시하게 하였고, 사회과학적 현실분석과 신학적 성찰을 서로 매개하는 방법론적 실험을 하게 했다.
 셋째 패러다임은 시민운동의 영향 아래서 운동의 탈중심성과 분산성을 인정하되 다양한 운동들의 그물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그물망에서 환경운동, 여성운동, 문화운동, 정치운동, 교회개혁운동 등은 각각의 고유한 과제들을 수행하면서도 서로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들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각각의 패러다임은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갖고 있다. 우선, 민족지적 접근은 민중 현실을 인류학자의 관찰 대상으로 설정하고 관찰자의 인지적 조작 없이 민중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법이 민중의 현실을 인식하는 데 과연 적절한가는 깊이 따져 보아야 한다. 민중이 한 사회를 이루는 관계들의 총체로서 나타난다면, 민족지적 접근은 민중의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 계급론적 접근은 민중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시도여서 그 나름의 장점을 갖는다. 그렇지만 여성운동, 문화운동, 정치운동, 교회개혁운동 등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고, 이 운동들을 전체운동의 부문운동으로 규정하는 데 그쳤다.
 끝으로, 탈중심성과 분산성을 기조로 하는 네트워크 운동은 인간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과 대립의 맥락을 중시하고 다양한 운동들의 수평적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시장의 논리가 관철되는 오늘의 사회에서 현실의 모순들이 어떤 모순을 매개로 해서 재배열되는가를 인식하는 데 철저하지 못하다.
 지구화 과정에서 민중의 주체성을 실현하려는 실천의 패러다임은 위에서 살펴본 패러다임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내용과 형식을 취해야 할 것 같다. 지구화 시대에 민중해방운동은 다양한 운동들의 네트워크 형태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 네트워크는 지구화 과정을 꿰뚫고 있는 노동과 자본의 모순, 그리고 이 모순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표현형태들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할 것이며, 이 모순을 해결하는 가운데 경제, 정치, 문화 등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정교한 전망을 제시하여야 한다. 성차별, 인종차별, 세대차별을 계급차별과 별도로 다루는 입장은 공허하고, 이러한 문화적 문제들을 계급 문제로 환원하는 태도는 맹목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민중 문제가 경제, 정치, 문화 차원에서 매우 다양한 외관을 취하겠지만, 민중이 자본의 실질적 포섭과 팽창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 민중의 주체성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대상의 처지를 극복하고 자본에 대한 주인의 지위를 확보할 때 민중은 역사와 사회와 생명의 주체로 굳게 설 것이다.

4. 우리 시대의 민족 문제

 우리가 겪고 있는 정보화와 지구화는 민족을 의미 있는 토론 주제로 설정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정보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문화간 접촉과 혼융이 지배적인 현상이 되어 가고, 인구의 다수가 지구적인 멀티미디어 문화와 소비문화에 휩쓸려 있는 시대에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또한 지구적 차원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금융자본과 초국적기업들이 국민국가의 주권을 약화시키고 사회적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국민국가의 조정 기능을 마비시키기까지 하는 현실에서 민족을 내세워서 할 수 있는 말이 과연 무엇일까?
 
4.1 정보화와 지구화의 조건들 아래서 민족 담론이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식민지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분단 현실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민족 문제를 더 천착하고 한반도 차원에서 국민형성과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근대적 과제를 우리 시대의 과제로 안고 갈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해양세력인 미국과 대륙세력인 중국이 잠재적으로, 혹은 이미 실제적으로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민족이나 민족국가 문제를 우회하면서 평화의 문제를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캄차카 반도로부터 독도, 이어도, 센카쿠 열도, 남중국해 분쟁도서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는 강대국이 언제든 개입할 수 있는 분쟁지역이 폭발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 조금 더 냉정하게 따져 보면, 우리가 다루고 있는 민족 문제는 근대적인 민족 담론의 틀로서는 해결될 수 없다. 만일 민족을 주어진 실체로 생각하고 그 실체의 정치적 구현체를 민족국가로 간주하는 기존의 통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민족 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고, 그 해법도 찾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민족 담론에서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민족에 대한 실체론적 사고가 불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일민족, 백의민족 등의 개념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는 관념을 조장하고, 심지어 민족이 마치 초역사적인 실체인 양 여기게 만드는데, 그러한 의미의 민족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이다.(임지현) 민족은 사람들 사이에 경계를 짓고 차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 어떤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고자카이 고시아키)
 또 다른 하나는 민족이 근대적인 개념이며, 국민 형성과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근대적 과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민족이 없었던 곳에서 민족주의가 민족을 발명한다는 명제(에르네스트 겔러)나 민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민족 정체성을 창조하기 위해 다양한 요소들이 가공되고 발명된다는 명제(에릭 홉스봄)나 민족이 ‘상상된’ 공동체로서 탄생하였다는 명제(베네딕트 앤더슨)는 민족이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근대적 개념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이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적 정치이기는 하였지만, 바로 그 개념 장치로 인하여 계급문제, 젠더문제, 인종문제 등이 근대 국민국가의 틀에서 제대로 다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세의 지배 아래서 식민지로 전락하였던 우리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4.2 국토와 민족의 분단이 외세에 의해 강제된 뒤에 이남과 이북에서 각기 다른 국가체제가 성립되고 냉전과 전쟁, 상호배제의 긴 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우리에게 민족 문제가 엄연한 현안임을 웅변한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 민족이 정주지 경계에 따라 한반도 전역에 걸쳐 국민국가를 결성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권리의 주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권리 주장이 외세에 의해 묵살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토와 민족이 분단되어 있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보아야 옳다.
 분단 상황은 우리 민족 전체에 엄청난 희생과 부담을 주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고, 전쟁 이후 이남과 이북의 적대관계는 유례없이 강화되었다. 남과 북의 군사·정치적 대결을 빌미로 해서 한반도는 중국과 러시아의 대륙세력과 미국과 일본의 해양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정학적 장소가 되었다. 이것은 냉전 체제가 지속되는 기간에도 그랬고, 냉전 체제가 해소된 오늘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북이 미국의 대북 봉쇄와 적대행위에 대항하여 국가안보를 확립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최근 한반도는 핵 군비가 집중되는,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더욱이 미국은 한반도를 지렛대로 삼아 중국을 견제하는 군사·정치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의 분열은 우리 민족 전체의 생존과 번영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단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미래 과제로 남아 있다. 최근에는 통일 비용이 천문학적이기 때문에 이남과 이북의 분단 상황을 유지한 채 남북 교류를 활성화하고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한반도 분단이 동아시아에서 갖는 군사·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생각이라고 본다. 반면에 최근 한국의 극우 보수세력이 “통일이 대박”이라고 외치면서 통일 담론을 급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본의 요구에 따라 이북을 흡수, 합병하려는 책략이기에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평화 구상과 통일 논의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두 국가체제를 어떤 절차와 과정을 통해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하여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 분단과 관련된 남북 당사자들과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관계를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평화와 통일을 향한 남과 북의 협력과 민족공조가 먼저 활성화되어야, 남북통일에 대한 강대국들의 양해 가능성이 더 커지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적어도 남과 북 사이의 신뢰구축과 상호 안전 보장, 인적․물적 교류의 제도화 등을 통해 평화체제를 우선적으로 구축하고, 남과 북의 정부들이 인민주권을 명실상부하게 실현하여 사회적이고 양성평등적이고 다문화지향적인 국민국가로 통합하는 길로 서서히 나아간다면, 우리 민족은 비록 지체되기는 하였으나 국민 형성과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근대적 과제를 모범적으로 실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통일된 국민국가가 평화국가의 성격을 유지할 수 있다고 기대되고, 또한 이를 강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수 있다면, 한반도에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갖는 강대국들은 남북통일에 반대할 명분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과정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아메리카합중국 사이의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조약 체결을 거쳐 양국관계가 정상화되고 한반도 비핵화에 양국이 공조하는 과정과 병진되기를 기대한다.

5. 대안적 세계에 대한 구상

 나는 민중신학자들이 지구화의 조건들 아래서 고난당하는 민중의 해방을 염두에 두면서 대안적 세계에 대한 구상을 구체적으로 가다듬기를 기대한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네 가지 어젠더를 제시하고자 한다.

5.1 경제 민주주의의 추구

 ‘87년 체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경제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경제 민주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헌정 질서가 근본적으로 도전받고 있고, 법치주의의 골간이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강력하게 조직되어야 할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아래서 구상되는 경제 민주주의는 자본의 노동 포섭과 노동의 소외를 가져오는 시장경제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이다. 경제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의 단결권이 헌법에 의해 보장되고 제도적으로 실현되는 조건 아래서 노동의 권력과 자본의 권력을 제도적 균형 관계에 설정하고자 하는 역사적 실험이다.
 오늘의 세계에서 경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제 활동의 네 가지 차원을 구별하고 각각의 차원에서 명확한 과제들을 설정하여야 한다. 경제 민주주의는 전통적으로 국민경제 차원, 산업관계 차원, 기업 차원을 중시하였지만, 금융의 지구화가 실현된 오늘의 상황에서 지구경제의 차원을 도외시하고서는 경제 민주주의에 관한 그 어떤 논의도 실질적 내용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지구경제 차원에서는 금융의 민주적 규율이 필요하고, 이를 가능하도록 만드는 지구적 거버넌스가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국민경제 차원에서는 사회적 협의 기구의 구성, 금융의 통제와 감독, 국민경제 차원에서 소득분배와 거시 계획의 필요성, 노동시장 정책, 기간산업의 사회화와 공공 서비스 공급의 확대, 기본소득 도입 등을 통하여 경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 산업관계의 차원에서는 산별 노동조합의 제도화를 통하여 경제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 차원에서는 재벌체제를 해체하고, ‘총수’ 독재를 이해당사자 참여에 근거한 공동결정제도로 대체하여 기업지배구조를 혁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권과 소유권의 상호 존중이나 소유권에 대한 노동권의 우위를 출발점으로 삼아 노동과 자본이 ‘대립 속의 협력’을 지속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기업 차원에서 경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관건이다.
 경제 활동의 네 가지 차원에서 경제 민주주의 구상의 대강을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차원에서 경제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경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세력들과 시민세력들이 서로 강력하게 연대하여야 한다. 이러한 연대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세력의 운동을 어떻게 펼쳐 나갈 것인가를 놓고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다. 교회가 이와 같은 고민을 함께 나누고 공동 연구에 나서야 한다면, 민중신학자들이 그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이다.

5.2 복지의 실현

 개발 년대에 구축된 발전주의 복지 체제는 문민정부 이래로, 특히 IMF 경제관리 이후에 급격히 신자유주의적 복지 체제로 개편되어 왔고, 오늘의 노동연계복지 체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다. 복지가 노동 업적에 대응하는 보상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국가에 그 실현을 보장할 것을 당연히 요구하여야 할 권리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는 선별적 복지, 최소한의 복지, 부분적 복지로부터 보편적 복지, 최대한의 복지, 전면적 복지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일찍부터 사회국가의 틀을 만들었던 나라들은 오늘의 우리 사회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낙후되었던 시기에 상해보험, 건강보험, 연금, 실업급여 등의 복지제도들을 도입하였다. 오늘의 한국 경제는 복지를 확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고, 복지의 확대는 가뜩이나 부족한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경제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
 의무교육을 받는 학생들을 위한 무상급식 제공을 둘러싸고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논쟁은 보편적 복지를 향한 사회적 논의의 물꼬를 텄다고 볼 수 있다. 무상급식 실현으로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보편적 복지는 무상보육 실현에서도 그 모습을 보였고, 앞으로는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등에서도 실현될 것이다. 보편적 복지가 실현되는 영역들이 늘어나면, 최대한의 복지에 대한 요구도 유토피아적 요구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며, 전면적 복지를 실현하라는 요구도 거세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시회는 보편적 복지, 최대한의 복지, 전면적 복지를 실현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제도로 여겨지는 ‘기본소득’ 제도의 도입을 놓고서도 진지한 논의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국가시민이나 지역주민 개개인에게 연령, 성별, 노동소득의 유무, 재산의 정도 등에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급여를 지급하는 제도이다.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은 복지가 실현되어 ‘지극히 작은 사람들’의 ‘기본 욕구’가 충족될 수 있도록 책임 있게 행동하여야 할 것이고, 복지에 관한 인간의 권리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교회의 사회봉사를 체계적으로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민중신학자들이 신학적으로 기여할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5.3 지구적 시민권의 확립

 지구적 차원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서 노동력의 ‘노마드적’ 이동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역에 묶인 노동자들은 독수리 같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자본의 공격을 받아서 프로메테우스 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면, 자본이 지구적 차원에서 최적 배분될 수 있는 장치가 빠른 속도로 마련될 것이다. 자본이 집중되어 붐이 일어나는 곳에 노동력이 몰려들어 혼란을 겪는 것보다는 지구적 차원의 마셜 플랜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자본의 대변자들이라고 해서 모를 리 없다.
 인간이 ‘노마드적’ 이동을 그치고 정주하는 곳이 어디이든 바로 그곳에서 시민권을 부여받고 살아간다면, 그리고 그 시민권에 근거하여 ‘기본소득’을 향유하며 살아간다면, 사람들이 동서남북에서 모여든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이런 전망을 갖고서 민중신학자들은 지구적 시민권을 신학적으로 옹호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구현하는 방안에 대해 책임 있는 제안을 내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5.4 소유권 개혁

 프랑스 혁명 이후 채택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에서 소유권이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확립되고, 나폴레옹 헌법에서 소유권이 인간과 시민의 기본권으로 명시된 이래로 소유권은 근대 세계의 기본 제도가 되었다. 그 후 부르주아 헌법을 채택한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소유권은 보호된다.”는 원칙은 소유에 근거한 권리의 행사가 절대적이고 그 권리의 본질이 그 무엇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다는 주장을 법제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르주아 지배의 물적 기반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인데, 부르주아 사회는 이 권리의 신성불가침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이 확립한 소유의 신성불가침 주장은 국가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물적 기반인 소유가 국가의 침탈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자유권적 권리 선언이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영리를 목적으로 조직된 상법상의 단체나 법인이 이 권리의 주체인가를 놓고서는 깊은 법리적 검토를 할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소유권의 문제는 여러 가지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하고, 소유권 정책이 각각의 문맥에서 새롭게 수립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익히 알려진 ‘공유재의 비극’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공유재의 소유 주체를 ‘생태계의 보호와 관리에 적합한 지역공동체’로 설정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소유권 정책의 주요 이슈들 가운데 하나이다. 지적 소유권과 특허의 지나친 세분화와 분산으로 인하여 적절한 기술과 제품의 개발을 억제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공유재의 비극’은 어떤가? ‘글리드락’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지적소유권 제도를 개혁하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국가폭력에 기생하여 확립된 지적 재산권 제도가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장 지배와 초과 이윤의 원천이 되고 있는 현상도 근본적인 검토를 필요로 한다.
 만일 소유권이 사람들 사이의 합의에 의하여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되어야 하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제도라고 한다면, 상법상의 단체나 법인이 행사하는 소유권도 제도 형성과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이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문명사회에서 자본의 다양한 현상형태들이 노동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는 오늘의 세계를 야만의 시대라고 부른다. 야만의 시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동으로부터 자본이 독립해서 노동을 지배하는 일이 극복되어야 하고, 자본지배의 기반인 소유권 제도가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본의 현상형태들에 대한 노동의 통제와 자유로운 접근이 보장될 것이다.
 나는 소유권 개혁과 소유권 정책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 민중신학자들이 수행하여야 할 가장 큰 과제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6. 민중신학자들은 교회와 세상을 향해 어떻게 발언할 것인가?

 민중신학이 앞으로 중시해야 할 과제는 여론 작업이다. 민중신학의 여론 작업은 두 가지 영역을 갖는다. 하나는 교회 안에서 민중신학의 주장을 강화하는 것이다. 민중신학자들은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민중신학이 하려는 일을 분명히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의 보고이고, 평신도는 교회의 중추이다. 그들은 교회와 세계를 잇는 가교이고, 말씀과 성례전의 세계 내 현존을 보증하는 살아 있는 힘이다. 민중신학은 이 힘을 강화하기 위해 민중신학의 전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그 힘이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평신도를 감동시켜야 한다. 민중신학의 영적 능력은 평신도를 움직이는 교역자의 촉매적 능력을 통해 실증될 것이다.
 또 하나는 민중신학이 세상에서의 교회의 증언과 봉사를 명료한 언어로 밝히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계와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이 고백에 근거하여 세상을 보존하고 갱신하고 완성하는 하나님의 일을 증언하고 그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여 세상을 섬기는 일을 하기 위해 오늘 여기에 있다. 교회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와 그 정의에 투명하도록 하는 일에 전념하여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단순한 부정이나 단순한 긍정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보존하고 완성하려는 하나님의 힘겨운 노역의 찬양일 것이다.
 세상에서의 교회의 증언과 봉사에 관련하여 나는 민중신학의 위상과 그에 걸맞는 작업 방식을 조금 명료하게 규정하고 싶다. 민중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과 우주의 주로 고백하는 지식인들, 특히 신학자들의 운동이다. 그 운동의 최고 형태는 민중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꾸리는 포럼이다. 이 포럼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과 그 구조들, 곧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관계 등에서 그때그때 나타나는 의제들과 문제들에 대하여 민중신학의 명료한 입장을 천명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 입장 천명은 급히 작성되는 성명서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지만, 분화된 의견을 신중하게 수렴하여 책임 있게 작성되는 백서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백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문제들이 분석되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기존의 방책들이 평가되고, 새로운 해결 원칙들이 모색되고, 이 새로운 원칙들의 신학적 근거들이 제시되고, 문제 해결의 구체적인 방안들이 정책 제안의 형태로 천명될 수 있어야 한다. 문제 분석과 해결 원칙의 제시, 그 원칙의 신학적 근거의 해명, 실현 가능한 해결책의 구체적 제안은 각기 다른 차원의 작업을 전제하기 때문에 신학의 여러 분과들의 분업과 협력이 필요하고, 신학과 사회과학, 인문과학, 자연과학, 심지어 기술공학 사이의 입체적인 학제간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민중신학자들과 평신도 지식인들 사이의 협력이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협력을 촉진하고자 할 때 민중신학은 민중 신화와 신학주의를 경계하여야 한다. 우선, 민중만이 민중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은 일종의 신화일 것이다. 그러한 신화는 민중을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로서 인식하고자 하는, 역사와 분석을 통일하고자 하는 방법적 사유를 무력화시킨다. 그 다음, 신학주의는 신학자들의 두뇌 속에 세계를 가두고 신학의 언어로 세상을 모두 설명하려는 만용으로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신학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신학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은 신학이 창조되기 이전에 세상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의 인간학적 사실로서 주어져 있었다. 신학은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은 이미 거기 있지만 신학은 그 자연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해석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행위를 나름대로 규율하고자 할 뿐이다. 신학주의는 오직 신학이 사실에 대한 한 해석이고 그 해석이 역사적 맥락을 갖는다는 점을 인식함으로써만 만물의 신학적 이름을 부여하려는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주의와 신학주의에서 벗어난 민중신학은 민중해방운동에서 신학자들이 하는 일을 평신도 지식인들이 수행하는 일과 결합하여야 하며, 포럼의 형태로 신학자들과 평신도 지식인들의 학제간, 다학문간 대화와 협력의 틀을 구축하여야 한다.

7. 발제를 마치며

 나는 지난 10년 동안의 민중신학 운동을 되돌아보면서 민중신학자들이 엄청난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여러 민중신학자들이 그들의 작품을 영어로 출판할 수 있게 하면서 최근의 민중신학의 성과가 세계 여러 곳에서 공유되고 있다는 것도 언급하고 싶다. 나는 민중신학이 새로운 약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처럼 민중신학이 교회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가 또 있을까? 우리는 지구화의 그늘 아래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마치 ‘좀비’처럼 살아가는 것을 일상적으로 보고 있다. 그들을 과연 현실 변혁의 주체로 호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간혹 낙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구화의 조건들 아래서 고립되고 분산된 채 스펙타클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 서로 연대하고 단결하면서 대안을 꿈꾸고 대안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지 못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사실은 변혁의 가능한 주체들이다.
 아무쪼록 민중신학자들이 중심이 되고 전문적 역량을 갖춘 평신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포럼이 결성되어 우리 시대의 과제들과 대결하면서 민중신학적 담론을 정교하게 형성하고, 그 담론이 마침내 현실변혁적이고 현상타파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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