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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주의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비판과 그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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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주의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비판과 그 대안

강원돈

1. 머리말

최근 과학과 신학의 대화나 통섭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해 세계와 인간의 삶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자, 세계와 삶에 대한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성찰을 그 나름대로 담론화하는 신학이 과학과 기술을 논의의 한 주제로 설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와 통섭을 향한 시도는 그 역사적 뿌리가 워낙 깊어 신학이 플라톤주의로부터 아리스토텔리즘으로 말을 갈아탈 때 이미 그 두드러진 모습을 보였거니와, 근대과학의 세계관이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에는 과학과 신학의 통섭이 이신론의 형태로 구현되기도 하였다. 해석학이 발달하면서 설명의 논리와 해석의 논리가 서로 대체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교의학이 자연신학과 결별하는 수순을 보일 때에는, 신학은 신학이고 과학은 과학이라는 주장이 큰 힘을 발휘하였으나, 떼이야르 데 샤르뎅이나 존 캅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과학을 신학의 담론 구조 안으로 끌고 들어오거나 신학의 관심사를 과학의 얼개로 표현하는 진화론적 신학이나 과정신학이 어느덧 대륙을 횡단하면서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같은 교의학자들조차 ‘피조물의 진화’ 같은 개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진화론과 창조론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로 과학과 신학의 통합은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것 같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나 통섭, 더 나아가 둘의 통합을 향한 시도를 접할 때마다 나는 과학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과학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과학주의’는 과학의 논리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만용으로 나타나거나, 과학의 논리로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맹목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되면 과학은 제 주제를 모르고 만물을 아우르는 통합학문을 자처하거나 과학이 머물러 있어야 할 영토를 넘어서서 의미의 세계와 초월의 세계를 침략하고 그 세계들을 식민지로 삼게 될 것이다.
 이 짧은 발제에서 나는 먼저 신학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를 서로 구별하고, 그 다음 학문이론적 관점에서 ‘과학주의’를 비판하고, 마지막으로 신학적 성찰에 근거한 해방의 논리에 따라 기술의 과학화와 과학의 기술화가 구현된 오늘의 세계에서 과학과 기술을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2. 신학의 언어

 신학의 언어는, 많은 경우, 신조로 표현된다. 그런데 그 어떤 신조도 시간과 역사에 무관하지 않다. 신조에 담긴 뜻은 그것의 역사적 전승으로부터 해명되어야 한다. 일찍이 게르하르트 폰 라드는 “이스라엘의 신앙은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하고 있으며, 야훼의 손이 그 속에서 움직인다고 믿어졌던 사실들에 의해 형성되고 재형성되어 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가 일어났음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형태를 취했다는 것이다. 폰 라드는 이를 ‘로고스에 대한 사건의 절대적 우위’라는 명제로 요약했다. 역사 안에서 생생하게 일어난 일이 신학적 성찰보다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역사적 사건의 경험을 신학적 성찰에 끌어들이고자 한 폰 라드의 해석학적 시도는 디트리히 리츌의 언어이론과 이야기 신학을 통해 첨예하게 가다듬어진다. 이야기는 “한 인간이나 한 집단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적절한 형식, 아니 가장 적절한 형식”이다. 한 인간이나 한 집단의 정체성은 그가 혹은 그들이 전달하는 이야기를 통해 가장 잘 알려진다.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담지한다. 유다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그들이 전달하는 이야기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이야기와 그것에 어울리는 삶의 태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고, 그 이야기에 담긴 관점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있음을 뜻한다.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그 이야기를 함께 기억하고 전달하면서 그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며 계속 풀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해석공동체는 전승공동체이다. 리츌은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전달하는 개별적 관점과 여러 이야기들이 함께 어우러져 형성하는 총체적 관점을 구별한 뒤에 신학은 개별적 관점들의 수순을 맞추어 상호관계를 정하는 포괄적인 규칙들을 명시하여 신앙의 ‘총체적인 문법’을 작성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하나님 경험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행위는 대상과 거리를 취한 채 관찰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에 당파적으로 가담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그 이야기들을 해석하고 전승하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 삶과 세계를 형성하는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가 전하는 이야기들과 그것에 담긴 관점의 진리는 그 공동체가 살아가는 삶의 진정성에 달려 있다.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경험으로 인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는 신앙공동체의 언어는 찬미적이고, 고백적이고, 은유적이다. 그 경험과 관점을 성찰하는 신학적 언어는 직접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지 않고, 도리어 세계에 대한 계몽에 이바지한다. 만일 이러한 신학적 언어가 신조의 형태를 취한다면, 하나의 신조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경험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서 그때그때 탄생하는, ‘끝’이 열려 있는, 산물일 뿐이며, 이러한 신조를 역사적인 하나님의 경험으로부터 분리하여 따로 독립시키는 일은 성서에 전혀 낯선 일로 간주되어 폐기되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한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주도한 출애굽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기억하고 이야기로 전달한 집단은 오랜 기간 광야를 편력하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원이스라엘을 형성하였다. 그 뒤에 원이스라엘이 해체되고 왕국의 역사가 이어졌다. 왕국이 분열되고 분열왕국들은 차례로 이방 제국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들은 예수 시대에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이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출애굽 사건의 기억을 전달하고 평등공동체 원이스라엘을 설립한 경험이 있었던 공동체는 왕국에서 나타나는 억압과 수탈과 무질서에 대항해서 예언자 운동을 전개했고, 이민족의 지배 아래서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묵시적 기대를 표명하였고, 이민족의 창조신들에 대항해서는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창조주 하나님 신앙을 발전시키며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삶의 거점을 확보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과학주의 비판이라는 오늘의 주제에 빨리 뛰어들어 본격적인 토론을 하기 위해 여기서 아주 길고 자세한 신학적 논의를 생략해도 좋다면, 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적 행위들에 관련된 이제까지의 고찰 이외에 세 가지 신학적 명제를 압축된 형태로 더 말하는 것으로 신학의 언어에 대한 성찰을 마무리하고 싶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임당함과 부활의 사건에 대한 경험과 그것의 기억과 전승이 있었기에, 십자가에 달린 자가 높이 올리어져 하나님 우편에 앉아 세상을 통치한다는 신앙이 성립될 수 있었을 것이다. - 둘째, 성령 강림의 사건이 일어났기에, 만물과 구별되지만 만물 가운데 거하여 그 고통과 희망을 함께 나누는 성령의 활동에 대한 고백과 찬미가 이어졌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기독교 신학의 가장 난해한 신조들 가운데 하나인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구원 행위들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에서 비롯된 하나의 해석학적 관점이다. 경륜적 삼위일체가 하나님의 역사적 구원행위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한 해석학적 관점이라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논리적 근거를 추후적으로 마련하고자 하는 사변의 산물일 것이다. 이렇게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인식순서와 존재순서를 정확하게 구별하면, 두 삼위일체 공식의 추상수준과 타당성 요구의 영역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게 된다.

3. 과학의 언어

 과학의 언어는 신학의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른 궤도를 타고 있다. 과학 역시 세계의 경험에 대한 하나의 성찰이고 설명이다. 과학적 사고는 개별적 현실 경험, 곧 현상을 관찰하고 그 현상에 내재하는 동인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세계가, 영원불변의 실체가 어른거리며 나타나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면, 거기서는 그 실체에 대한 신비주의적 직관이 중시될 뿐, 과학이 탄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플라톤의 신비주의를 뒤집고 엔텔레케이아(entelekeia) 실재론을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 과학의 논리적 토대를 놓은 철학자로 여겨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우리 시대에 이르러 ‘과학’이라는 말로 총괄하는 사고방식은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지음받았다는 베이컨의 세계관에 그 바탕을 둔다. “지식이 곧 권력”(scientia potentia)이라는 베이컨의 명제는 세계를 속속들이 알아야 그 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근대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베이컨의 세계관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데카르트는 의식철학을 확립했다. 그는 세계를 인간의 의식 바깥에 놓인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 대상의 속성을 연장(extensa)으로 규정함으로써 세계 만물을 분석과 분해의 논리 아래 놓았다. 미분과 그 논리적 귀결인 적분은 근대적 세계관의 기본논리로 자리 잡았다. 의식철학의 전통을 이어간 임마누엘 칸트는 대상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인식론적 틀을 완성하였다. 그의 선험적 감성론과 선험적 오성론은 인간의 대상구성적인 권능을 선언하고 확립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알프레드 존-레텔은 이와 같은 칸트의 인식론이 대상을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정교하게 구축되었다고 인식비판적 관점에서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바로 이러한 인식비판의 통찰을 이어받아 위르겐 하버마스는 과학적 사고를 이끌어가는 관심이 대상에 대한 기술적 통제라는 것을 학문이론적으로 밝히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인식비판이 베이컨적 세계관을 구현한 근대 과학에 국한되어야지 현대 과학에까지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근대 물리학의 사유 모델이었던 주객도식을 갖고서는 현대 과학의 인식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 그런 경우이다. 실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근대 과학의 인식론적 틀을 깨뜨리고 과학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시간과 공간의 절대 좌표가 부정되고, 수학적 추론과 확률적 패턴 연구가 전통적인 관찰과 실험을 대체한 것이다. 우주의 생성과 운동에 대한 최근의 과학적 탐구는 과학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려 부순다. 우주의 기원과 운동은 상상력과 수학적 추론의 대상이 된 것 같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추론을 극한에까지 밀고나가고, 그 추론을 입증하는 근거를 찾기 위해 무한히 작게 쪼개진 시간 단위에서 공간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 물질의 존재를 찾아 나선다. 그것은 실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다. 과학자들의 연구 과정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도 매우 흥미진진한 결과를 보여준다. 과학자들은 이미 확정된 공리에 근거하여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고 확장하기보다는 관찰과 실험 등을 통하여 새로 수집한 데이터들을 배열하고 상호관계를 설정하면서 데이터들을 해석하는 틀에 관해 합의하고, 그 틀에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의 오류 여부를 가리는 고단한 작업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학’과 ‘해석학’의 경계가 그렇게 명확하게 설정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과학의 탐구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패러다임의 변화와 방법론적 혁명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탐구를 이끌어가는 관심이 무엇인가를 계속 물어야 한다. 예컨대, 미립자 세계에 대한 연구가 정역학에 근거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통계학적 패턴 분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 연구 방법의 변화에 대한 지적은 미립자 연구가 미립자 제어와 미립자 에너지 방출 기술의 과학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덮지 못한다. 과학적 탐구는 여전히 대상을 기술적으로 통제하려는 관심에 이끌리고 있다. 이러한 과학적 탐구의 프레임은 국가 권력과 자본 권력에 의해 과학의 기술화와 기술의 과학화가 높은 수준에서 구현되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공고하게 제도화되고 있다.
 물론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에서 인식의 모델로 여겨졌던 뉴턴의 물리학을 광학의 논리로 비판하였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 기대어 “자기 바깥으로부터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것의 진리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방식으로 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는 마이어-아비히의 주장은 뭔가 낯설고 새로운 통찰을 담고 있다. 그런 식으로 세계를 인지하는 것은 사물을 향해 명령하기 위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렇게 세계를 인지하는 사람은 사물로부터 퍼지는 빛의 군무를 향유하고 그 속에서 함께 춤을 추면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물의 진리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투명한 시선이다. 그러한 시선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과학’은 오늘의 세계에서 구축된 대상구성적이고 대상지배적인 과학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방념 (Gelassenheit) 속에서 즐기는 세계 놀이로서의 예술일 것이다.

4. 과학적 언어의 타당성 요구의 제한

 앞에서 나는 신학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가 서로 다른 궤도를 타고 간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나는 과학의 언어를 갖고서 신학을 할 마음도 없고, 신학의 언어를 갖고서 과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창조론과 진화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다른 하나를 폐기하라고 말하는 것은 지적 야만일 것이다. 신의 우주적 예지에 따라 세상 만물이 설계되었다는 주장까지 서슴없이 펼치는 창조과학에 대해 나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나는 세상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꾸고 인간의 몸과 마음과 의지와 감정 깊은 곳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과학이 제 분수를 모르고 신학의 영역에까지 들어와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주장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대상에 대한 기술적 통제가 추구하는 합리성은 당연히 기술적 합리성이다. 기술적 합리성은 대상의 지배를 목적으로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들을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도구적 합리성 혹은 목적합리성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시장경제가 역사적으로 구현된 오늘의 세계에서 목적합리성은 이익을 최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는 수익합리성으로 나타난다. 기술적 합리성과 목적합리성과 수익합리성은 각기 다른 맥락을 갖지만, 적어도 역사적 시장체제에서는, 동일한 것의 서로 다른 현상형태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유형의 합리성이 제 영토를 벗어나서 생활세계를 침범하여, 의미를 해석하고 공동생활의 규범을 제정하는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쫓아내기에 이른다는 데 있다. 하버마스는 이를 가리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고 지칭한 바 있다.
 생활세계가 식민지화되는 곳에서 준동하는 이데올로기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과학주의이다. 그것은 과학의 이름으로 세계에 대한 전일적 설명의 체계를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다. 그것은 경험적-분석적 과학들의 세계 설명 이외에 다른 일체의 세계 해명을 넌센스나 픽션으로 간주하여 진리를 다투는 영역 바깥으로 아예 몰아내기에 지적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과학주의에 포섭된 과학과 기술이 설사 ‘과학’과 ‘기술’의 이름을 내건다 할지라도, 그러한 과학과 기술은 자신의 주장이 어떤 맥락에서 진리와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가를 알지 못한 채 속절없이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만다.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과 기술은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해방의 잠재력을 억누른다. 이와 같은 과학주의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
 일찍이 하버마스는 인류의 자연사에 바탕을 둔 언어와 노동이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삶의 두 방식임을 동일철학적으로 정식화한 적이 있다.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고, 상호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반면에 노동은 물질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대상을 통제하고 가공한다.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서로 분화된 언어와 노동은 어느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를 연역할 수 없고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로 대체하거나 통합할 수 없다. 하버마스는 이처럼 서로 엄격하게 구별되는 삶의 방식들로부터 각기 다른 지향을 갖는 학문들이 발생하였다고 본다. 하나는 경험적-분석적 학문들이며, 이 학문들은 대상을 기술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관심에 이끌려 작업을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적-해석학적 학문들이며, 이 학문들은 의미 이해의 지평을 확대하려는 관심에 의해 유도된다. 하버마스는 언어와 노동을 두 축으로 전개되는 삶을 제도적 강제와 심리적 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관심에 이끌리는 비판적 사회과학을 별도의 학문 유형으로 설정한다. 이처럼 하버마스는 인식과 관심의 관계를 인식인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다양한 학문들의 인식론적 행정을 인식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검토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학문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경험적-분석적 학문들, 흔히 ‘자연과학’으로 일컬어지는 학문들은 오직 대상을 기술적으로 통제하여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효과적으로 충족시키는 도구로서 소임을 다하고 그렇게 활동하도록 허락된 영토에 머물러 있을 때 비로소 그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자연과학’의 타당성은 그 영토 안에서만 인정되기에 그 타당성 요구는 엄격하게 제한된다. ‘자연과학’이 인간의 삶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재갈이 물려져야 하고 생활세계에서 제정되는 규범에 따라 공동체적으로 규율되어야 한다.  
 역사적 해석학이 전달하는 지식은 신중한 판단에 바탕을 둔 지혜에 가깝다. 의미의 해석과 전달을 가능하게 만드는 지평들이 서로 융합되어 자신을 성찰하고 타자를 이해하는 가능성이 확대되고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이처럼 행복한 활동을 촉진하는 역사적 해석학은 ‘자연과학’을 대신할 수 없다. 역사적 해석학이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영토는 제한되어 있다. 더구나 역사적 해석학이 전통의 영향사에 머물러 선입견과 독단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점, 상징에 의해 매개되는 의미의 해석이 심리적 강박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비판적으로 음미되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바로부터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분명하다. ‘자연과학’도 그렇지만, 역사적 해석학도 세계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통합과학(Einheitswissenschaft)을 추구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과학주의의 폐단이 크다고 해서 역사주의가 아무런 유보조건 없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5. 과학을 신학에 매개하는 하나의 실천적 대안

 최근에 생태학적 신학을 기획한 적이 있는 위르겐 몰트만이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같은 신학자들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공식으로부터 세계 해명의 열쇠를 끄집어내고자 했다. 몰트만은 셋으로 분화된 하나님의 하나됨(Einigkeit der Dreieinigkeit)을 어렵사리 표현하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공식인 ‘상호교류와 상호내주’(pherichoresis)로부터 직접 세계 현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삼위의 페리코레시스로부터 만물 속의 영의 페리코레시스를 당연한 듯이 이끌어내어 범재신론의 얼개를 만들어 낸 뒤에 몰트만은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지극히 작은 단위로부터 자기 조직과 자기 복잡화를 통해 생명이 진화하는 전 과정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생성과 존립과 진화를 만물 가운데 내주하는 영의 작용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바로 여기서부터 ‘피조물의 진화’라는 몰트만의 스펙터클한 주장이 전개되고, 그의 야심찬 생태학적 창조론이 견고한 듯한 윤곽을 드러낸다. 그러나 몰트만의 주장은 한 마디로 넌센스이다. 그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추상수준과 적용영역에 적합한 신학적 사변을 펼치지 못 했다. 내재적 삼위일체의 타당성 영역은 하나님의 역사의 가능성 조건들을 설명하는 데에만 한정되어야지, 내재적 삼위일체의 공식으로부터 세계에 대한 직접적 해명을 하는 데까지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오류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에게서도 거의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구별과 상호관계가 실현되도록 하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원리를 ‘구별과 다름’(Andersheit)으로 명명한 뒤에, 이 원리로부터 곧바로 ‘피조물의 다양성을 생성하는 원리’를 도출해 낸다.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사변 역시 앞에서 말한 바와 똑같은 의미에서 넌센스이다.
 앞에서 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건을 기억하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고 재해석하는 전승공동체는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하고자 하는 일에 충실할 때에만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전승공동체가 전달하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담긴 관점의 진리는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미래에 투명하게 삶과 세계를 형성할 때 인정받을 것이다. 만일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관한 이야기들에 담긴 부분적 관점들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관점을 제시한다면, 이러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조건들 아래서 하나님의 미래를 위해 일하라는 엄숙한 요구 앞에 서게 만든다. 찬미와 고백의 형태로 정식화된 삼위일체론이 실천을 그 본질적 구성요소로 갖는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신학은 사변과 추상의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신학의 가장 치명적인 위기라고 규정하고 싶다.
 세계 현실에 대한 분석은, 하나님의 미래에 투명해지도록 삶과 세상을 형성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을 통하여, 비로소 피조물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계몽에 매개될 수 있다. 과학적인 세계 분석과 삼위일체론적 세계계몽은 서로 엄연히 다른 논리회로와 타당성 맥락을 갖기에 서로 직접 결합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에서 둘이 서로 매개될 수 있다는 뜻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는 세계 인식과 세계 계몽이 어떤 맥락에서 매개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그 지혜는 삶의 실천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경험적 지식에 대해 개방적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경험에 입각해서 그 경험적 지식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상은 하나님의 해방 사건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 고백, 곧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을 매개하여 독특하게 해석되어 창세기 1:1-2:4a의 창조보도에 그 흔적을 남겼다. 그 창조보도는 고대 이스라엘이 인식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친다. 그 가르침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행위에 대한 기억을 전달하는 공동체에 의해 오늘도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상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필요불가결한 일부가 아니지만,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에 대한 주권을 행사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 세계상을 수용하고 소화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세상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지하게 하는 삼위일체론적 관점 아래서 기독교인들은 과학적인 세계분석을 받아들여 삶과 세계를 새롭게 형성하는 데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이 맥락에서 기독교인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발생연관과 적용연관을 학문이론적으로 철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의 진리를 운반하고 증언하는 공동체는, 자기 주제를 모르고 참람한 주장을 일삼는 학문들의 포로가 되어, 세상에서 동서남북을 가리지 못한 채, 제대로 된 실천을 펼칠 수 없을 것이다. 자연과학들과 역사적 해석학과 비판적 사회과학은 모두 기독교인들의 실천을 위해 나름대로 공헌하겠지만,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은 각기 다른 실천 맥락에서 가장 적절한 학문적 도구를 선택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6. 맺음말

 나는 신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는 오직 하나님의 미래를 위한 기독교인들의 실천을 매개하여 이루어질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대화는 신학의 정체성과 과학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구별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신학과 ‘사회과학’의 대화를 시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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