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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공공성 위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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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공공성 위임에 관하여


강원돈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기독교윤리)

I. 머리말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신학계에서는 교회의 공공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세속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교회는 인간의 내면성으로 퇴각하여 사사로운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그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세상 만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믿는 교회는 그분의 주권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형성해야 할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종교의 사사화 이론과 그것에 대한 비판으로는 W. Huber, Kirche und Oeffentlichkeit(Stuttgart : Ernst Klett Verlag, 1973), 31-45를 보라. 이 주제에 관련된 포괄적인 안내로는 정태식, “현대사회에서의 종교의 사회적 위치와 공공성,” 『신학사상』 142(2008), 195-217을 보라.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가 공적인 영역에서 수행해야 할 일들을 규명하고자 하는 신학자들은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을 전개하며 활발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우리 신학계에서 공공신학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지만, 그 동안 몇 가지 성과가 축적되었다. 독일개신교협의회의 백서들을 분석하면서 독일적 버전의 공공신학을 탐구한 것으로는 정종훈,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공공신학』(1999), 개정쇄(서울 : 한국장로회출판사, 2009)이 있다. 미국의 공공신학자 맥스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의 도전에 대한 한국신학계의 응답으로는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 편,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서울 : 북코리아, 2007);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 편, 『공공신학,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서울 : 북코리아, 2008);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편, 『공공신학 : 한국교회의 사회적 섬김에로의 초대』(서울 : 예영커뮤니케이션, 2009) 등이 있다. 맥스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을 신보수주의적 논리로 비판하고 있는 장윤재, “북미 신보수주의 신학 탐구 : 맥스 스텍하우스의 ‘공공의 신학’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144(2009), 43-72도 주목할 만하다. 가톨릭 공공신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글로는 정희완, “신학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한 성찰,” 『신학전망』 177(2012), 146-195를 보라.

 우리 사회에서도 공공성은 매우 중요한 이슈로 다루어지고 있다.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으로 급속히 재편된 우리 사회에 시장지상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국가 부문의 공적 역할이 크게 침식되고, 사회복지, 의료, 교육, 기간산업, 언론과 방송, 문화 영역, 금융 등 시장의 논리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고 여겨져 왔던 사회 영역들에서 공공성이 희박해졌다. 공공성의 회복이 우리 사회의 과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엄중한 상황을 의식하면서 나는 교회의 공공성 위임이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 주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교회의 공공성 위임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고, 그 위임을 실현하는 방식을 해명하여야 한다. 교회의 공공성 위임을 실현하는 방식과 관련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 측면을 고려하여야 한다. 첫째는 교회가 공론의 장에서 교회의 의견을 어떻게 표명할 것인가를 다루는 것이고, 둘째는 공공성의 구현이 절실한 과제로 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교회가 더 많은 공공성을 구현하기 위해 무엇을 제안할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셋째는 교회의 공적 의견에 대한 신뢰성을 공론의 장에서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교회의 공공성 위임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하여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의 능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를 다루는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교회의 공공성 위임에 관련된 모든 측면들을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교회의 공공성 위임의 근거를 다루고,(II장)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을 구현하는 과정에 교회가 어떻게 참여해서 자신의 의견을 공적으로 밝힐 것인가를 다루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IV장) 이러한 논의를 치밀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대로 이해되어야 한다.(III장)

II. 교회의 공공성 위임의 신학적 근거

 교회의 공공성 위임은 교회의 자기이해에 그 깊은 뿌리를 박고 있다. 교회의 공공성 위임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무수히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여기서 이 주제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그 넓이와 깊이에서 모두 다룰 수는 없다. 나는 루터교 전통과 개혁교회 전통에서 교회의 공공성 위임에 관한 고전적인 논의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큰 윤곽에서 드러내고,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이와 관련해서 어떤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1. 개신교의 역사에서 교회의 공공성 위임에 관한 실마리는 마르틴 루터의 두 왕국론에서 찾을 수 있다. 루터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기 위하여 두 기관을 설립하였다. 교회와 국가가 그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와 국가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는데,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와 국가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는 서로 다르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기 위하여 교회에 맡긴 도구는 복음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양심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하여 그들을 구원으로 이끈다. 또한 하나님은 국가에 율법을 맡겨서 제도적 공동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도록 하여 정의와 평화를 실현한다. 국가는 법을 집행하기 위해 칼(국가폭력)을 휘두르도록 허락받았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복음과 율법에 대한 루터의 해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루터는 복음의 신학적 용법(usus theologicus evangelii)만을 인정하였을 뿐, 복음의 정치적 용법(usus politicus evangelii)를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가 복음을 앞세워 세상을 직접 통치하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율법의 용법과 관련해서 루터는 두 가지 용법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복음의 신학적 용법(usus theologicus legis)이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구원을 갈망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율법의 정치적 용법(usus politicus legis)이다. 이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국가가 세상에 질서를 수립하여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는 일과 관련된 용법이다.
 이러한 논리에 바탕을 두고 루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 세워진 두 기관들이 그 기능상 구별될 뿐만 아니라 서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국가는 복음 선포와 같은 교회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간섭으로부터의 교회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루터가 1523년 “세속적인 공권에 대하여”(Von weltlicher Obrigkeit)를 집필하여 공권력 행사의 한계를 명확하게 밝히고자 한 가장 큰 이유였다. 루터는 국가의 교회 간섭을 허락할 수 없듯이 교회도 국가가 법과 폭력을 갖고 하는 일을 떠맡아 주관하겠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교회가 세상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을 함께 거머쥐어야 한다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쌍검론(雙劍論)을 기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정치적 용법의 사례라 할 만한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적 농민전쟁도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결코 교회와 국가를 서로 독립된 두 영역으로 분리하려는 의도를 갖지 않았다. 그는 교회와 국가가 각각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면서 서로 협력할 것을 강조하였다. 국가는 신도들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질서를 세우고, 교회는 율법설교를 통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국법질서를 스스로 따르도록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게 맡겨진 율법설교는 교회가 국가의 일을 감독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논거이다. 만일 국가권력을 장악한 자가 율법을 무시하고 자의적인 폭정을 일삼을 때 교회는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여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자를 가르쳐야 한다. WA, 51, 422, 7ff.
율법을 가르치는 교회는 국가의 전횡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되고 국가를 비판하는 위치에 서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정치를 바르게 형성하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파수꾼 임무이다. 루터의 율법설교로부터 교회의 파수꾼 임무를 이끌어낸 신학자는 파울 알트하우스이다. Paul Althaus, Die Ethik Martin Luthers(Guetersloh : Guetersloher Verl., 1965), 151.
교회의 파수꾼 임무는 독일의 루터교회와 독일 개신교 협의회(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가 교회의 공공성 위임을 천명하기 위해 활용하는 중요한 신학적 논거이다.

2. 캘빈은 루터의 두 왕국론을 기본적으로 수용하였지만, 그는 정치를 형성하는 데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마르틴 루터는 국가 형태나 헌법을 주제로 다루지 않았지만, 캘빈은 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제네바 공화국을 운영하는 일과 관련하여 많은 자문을 아끼지 않았다. 캘빈은 모든 형태의 절대적인 지배를 불신하였다. 그는 교황이나 군주의 독재를 거부하였고 대중의 독재에 대해서도 경계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들을 적법 절차에 따라 선출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실천할 것을 옹호하였던 것이다. 이에 관한 상세한 연구로는 이은선, 『칼빈의 신학적 정치윤리』(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145ff.를 보라.

 캘빈은 개혁자들 가운데 시민의 저항권을 최초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그는 통치자가 시민을 억압할 때 시민이 그 억압을 회피할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이 국가권력에 맞서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신민이 폭압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민을 가거나 하나님이 복수할 것을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헌법이 허용한다면, 통치자를 감독할 권한을 가진 자는 인민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폭압적인 통치자에게 대항하여야 한다. 이은선, 같은 책, 212ff.
캘빈의 적법 절차에 따른 저항권 사상은 언뜻 보면 비현실적인 주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민의 저항권을 포괄적으로 용인하는 헌법이 제정된 국가들에서는 시민 저항권의 신학적 논거로 활용될 수 있다.
 개혁신학의 틀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한 신학자는 칼 바르트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물의 주로 찬양하는 에베소서 4장 15-16절을 근거로 해서 만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를 강조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내세워 인간의 양심과 신앙까지도 국가의 지배 아래 두려고 했던 히틀러의 전체주의 국가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교회투쟁 과정에서 작성된 “바르멘 신학 선언” 제3조 “기독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로서 현존하며 행동하는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기독교 교회가 용서받은 죄인들의 교회로서 죄 많은 세상의 한복판에서 그 신앙과 순종으로써, 그 메시지와 직제로써 증거하여야 할 것은 그 자신이 오직 그분의 소유이고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오직 그분의 위로와 교훈으로 살고 있고 또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가 마치 그 선포와 직제의 형태를 임의로 정하거나 그때그때의 지배적인 세계관적이고 정치적인 확신들에 맡겨도 좋은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다.”
에 잘 정리되어 있다.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 주권론은 세상 만물이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로 수용되어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제대로 형성하기 위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신학적 주장으로 발전하였다.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는 1937년 옥스퍼드에서 “교회, 공동체, 국가”를 주제로 열린 생활과 노동 세계협의회와 1948년 암스테르담 WCC 창립총회 이래로 에큐메니칼 “책임사회” 패러다임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에 대해서는 K. Raiser, Ökumene im Übergang : Paradigmenwechsel in der ökumenischen Bewegung(München : Kaiser, 1989), 61-82를 보라.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므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기술, 국제관계 등 삶의 모든 영역을 제대로 형성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3.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교회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과 관련해서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교회의 실천을 따라가며 성찰하는 하나의 시도라는 자기이해를 가졌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우선적 선택이라는 원칙 아래서 구조화된 억압과 가난, 불평등, 주변화와 배제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하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세계가 유기적 조화를 이루지 않고 해소하기 어려운 모순들로 인하여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당파적으로 편드는 일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그들을 해방시키는 실천이 바른 실천이라고 한다면, 바른 신학은 그 실천을 성찰하는 데서 탄생할 것이다. Gustavo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 History, Politics, and Salvation, rev. ed.(Maryknoll : Orbis, 1988), 4ff.
해방신학은 보편성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당파적 실천을 통하여 사이비 보편성의 체계를 깨뜨릴 때 비로소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할 관점이라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해방신학의 관점을 수용한 1970년대 초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극을 받으며 한국사회의 민주화·인권 운동과 민중운동을 성찰하는 신학으로 탄생하였다. 민중은 하나님의 계약 파트너이며, 바로 그 민중이 역사의 실질적 주체이다. 이러한 ‘민중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중신학의 출발점이다. 안병무, “새 역사의 주인,” 『현존』 91(1978), 12.
무엇보다도 민중의 관점에서 세계와 역사를 볼 때, 세계의 모순과 구조적 불의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현실의 세계에서 민중은 주체의 자리에서 밀려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민중의 존재 그 자체는 가난과 억압과 주변화와 차별의 구조들을 고발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중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그 구조들을 넘어서고자 하는 갈망이다. 그러나 민중이 갈망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령을 미리 규범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방식으로 민중이 대변(representation)되는 곳에는 민중이 부재(absence)한다. 민중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중이 주체의 지위를 회복하면 그들이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가도 분명해질 것이다. ‘민중의 주체성’을 성찰하는 민중신학은 교회가 세상을 형성하는 일에 참여하고자 할 때 민중의 자리에서 민중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실천할 것을 촉구한다.
 
4.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루터교의 전통과 개혁교회의 전통은 조금씩 다른 강조점과 논리 구성 방식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교회가 세상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고 기여하여야 한다는 데는 똑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 두 교회는 전통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의 틀에서 교회가 세상을 형성하는 데 맡아야 할 공적인 책임을 논의하였다. 에큐메니칼 사회운동이 전개되면서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은 교회와 국가의 틀을 넘어서서 인간의 삶이 펼쳐지는 전 영역을 망라한다는 점이 각인되었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가난한 사람들/민중의 자리에서 그들의 관점을 갖고서 세상을 보고 세상의 문제를 다룰 것을 주문한다.
 어떤 신학적 관점을 취하든지 간에 교회가 세상을 형성하는 데 책임 있게 참여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공적인 입장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다. 교회는 본격적으로 공공의 영역에서 증언하고 실천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 그렇다면 공공의 영역을 성격화하는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III. 공공성에 대한 이해

 공공성은 자명한 개념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공공성은 국가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져 왔지만,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국가 엘리트가 내세우는 공공성은 국가 엘리트 집단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은폐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의 논의에서 공공성은 인민에게 속하는 것, 공공복지에 관련된 것, 공개적인 것을 뜻한다고 하지만, 조한상,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서울 : 책세상, 2009), 21f.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는 공공성이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고 발전하여 왔는가를 해명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나는 공공성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스 전통과 로마 전통을 살피고, 근대 세계에서 공공성이 어떻게 성립되었고 현대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어떤 변용을 거치고 있는가를 개괄하고자 한다.

1. 서양에서 공공성의 뿌리는 그리스의 폴리스 정치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폴리스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행위(praxis)의 제도적 조건이다. 이것이 “인간은 그 본성상 정치적 존재이다.”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가 의미하는 바이다. Aristoteles, Politik, neu uebers. und mit einer Einl. und erklaer. Anm. versehen v. E. Rolfes(Leipzig : Meiner, 1912), 4 (1253a). 또한 a.a.O., 76 (1276b): “그러므로 시민의 덕은 그가 속한 국가의 형태 및 법과 관계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J. Ritter, “Zur Grundlegung der praktischen Philosophie bei Aristoteles,” Archiv fuer Rechts- und Sozialphilosophie 46(1960), 79-199를 참조하라.
폴리스 안에서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도덕적 행위와 정치적 행위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자유민들이다. 그들은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여가(scholē)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 자유는 시민의 덕(arete)을 함양하는 조건이었다. 자유민은 신중한 판단능력(phronesis)을 갖고서 ‘공적인 인정(認定), 화폐, 기타 가치의 분배’에 관련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 관계의 규율’에 관련되는 정의의 원칙에 따라 공동생활을 규율한다. Aristoteles, Nikomachische Ethik, uebers. u. komm. v. F. Dirlmeier, 4. ern. u. durchges. Aufl.(Darmstadt : Wiss. Buchges,  1967), 100 (1130b/1131a).
정의는 애초부터 상대적으로 안정된 공동체 질서(도덕, 관례, 법 등)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시민들의 상호관계와 상호인정을 전제한다. 이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의 행위에 대한 상벌의 의미를 강조한다. Aristoteles, Nikomachische Ethik, 86ff. (1126a).
이런 점에서 폴리스에서 도덕적 행위와 정치적 행위는 상호적이고 합의 지향적인 행위이다. 공동체 생활을 위한 새로운 규범과 법의 제정은 시민들의 합의에 근거한다. 폴리스는 시민들의 정치적 공동체(koinonia politikē)이며, 그 공동체는 시민들의 참여와 토론에 근거한 공화국이다. 그 공화국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는 덕의 함양이 요구되었다. 시민의 덕은 신중한 판단에 따른 의사소통능력, 곧 합의 능력이다. 그리스의 공화주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에 담겨 전승되었고, 한나 아렌트의 해석을 거쳐 오늘에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정치철학과 법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아렌트에게서 정치는 공공적 관심사이다. 그는 정치 영역이 “상호 관계, 곧 말과 행위에 ‘서로’ 참여하는 데서 직접” 발생한다는 그리스적 이념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행위는 우리가 공동으로 거주하는 세계의 공공 부문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공공 공간을 처음으로 창출한 활동이다.” H. Arendt, Vita activa oder vom taetigen Leben(1958), 8. Aufl., Muenchen/Zuerich, 1994, 191.
바로 여기서 아렌트의 일반화 명제가 도출된다. “하나의 현상 공간 아렌트는 연극에서처럼 배우들이 관중 앞에서 배역을 실연한다는 의미로 이 개념(Erscheinungsraum)을 사용한다. H. Arendt, 같은 책, 189ff.를 참조하라.
은 사람들이 행위하고 말하며 서로 관계를 맺는 곳에서 탄생한다. 그러한 공간은 일체의 명시적 국가 건립과 국가 형태에 앞선다. 그 공간은 그때그때마다 국가 건립과 국가 형태로 형성되고 조직된다.” 같은 책, 193.
말하고 행위하는 일은 상호관계, 옹호관계, 배척관계를 갖는 “행위 주체의 자기 계시” 같은 책, 168.
와 관련된다. 바로 이것이 의사소통 행위로서의 정치의 가능 조건이다. 아렌트는 정치의 필요성을 행위 결과들의 “예측불가능성”과 “불가역성” 같은 책, 185.
을 극복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 곧 “권력 현상” 같은 책, 197.
을 통제하는 데서 찾는다. 바로 여기서 아렌트가 구상하는 공화주의 정치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시민들은 인간의 공동생활을 규율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지배의 탈지배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머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을 뒷받침하는 논리적 근거인 행위이론에 대한 아렌트의 해석을 수용하여 J. Habermas, Theorie und Praxis : Sozialphilosophische Studien, 4. durges. und erw. u. neu eingl. Aufl.(Frankfurt am Main : Suhrkamp, 1971), 84 각주 4.
노동과 언어의 이원성을 동일철학적으로 확립한 뒤에, 관료제와 기술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 J. Habermas, Technik und Wissenschaft als ‘Ideologie', 8. Auf.(Frankfurt am Main : Suhrkamp, 1976), 90.
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윤리적 현명성(phronesis)을 어떻게 보존하여 해방적 사회를 향한 길을 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일관성 있게 집중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아래를 보라.

 
2. 로마 공화정은 기본적으로 그리스의 폴리스 전통을 계승하였다. 로마 공화정에서도 공화국 구성원 전체에 관련되는 중요한 일(res publica)은 인민(populus)이 참여해서 공동으로 결정하였다. 공적인 것은 ‘인민의 것’(res populi)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국가론』(파주 : 한길사, 2007), 130-131.
이며, 사사로운 것이나 가계에 속한 것(res privata)과는 엄격하게 구별되었다. 로마 공화국에서 공공성은 인민이 참여하여 공적인 것을 공동으로 결정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물론 공적인 것을 결정하는 명예로운 과정에 참여하는 인민은 시민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다. 오직 자유민의 지위를 갖는 사람들만이 시민으로 간주되었다. 여성, 노예, 외국인은 시민의 범주에서 제외되었다. 시민은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지키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시민은 두 가지 정치적 과제를 수행하여야 한다. 하나는 공화국에서 귀족들의 전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공화국의 자유가 외적에게 침탈당하지 않도록 공화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다. 따라서 로마 공화국의 시민들에게는 공적인 것을 규율하는 판단능력(prudentia)과 헌신이라는 덕이 요구되었다.
 로마 시민들은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호민관을 세웠지만, 스스로 호민관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그들은 귀족계급에서 호민관을 선출하였던 것이다. 거기서는 ‘투표는 시민이, 심의는 엘리트’가 한다는 공화국의 조직원리가 나타난다. 마키야벨리, 『군주론/정략론』(서울 : 동서문화, 2007), 163ff.
바로 이 맥락에서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 폴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와 다른 공공성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로마 공화국에서 공화주의는 대의제의 형식을 갖게 된다.
 로마 공화주의는 르네상스 시기에 마키야벨리에게서 부활한다. 마키야벨리는 시민의 정치참여와 시민군제도를 통해 안전과 평화의 능력을 강화했던 로마를 모델로 해서 공화국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는 시민이 정치에 더 많이 참여하여 공적인 일을 더 많이 결정하고, 시민의 권력이 귀족의 독선과 전제를 견제하는 공화국을 구상했다. John Pocock, The Machiavellian Moment(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5), 151.
그러나 마키야벨리에게서도 ‘투표는 시민이, 심의는 엘리트가’ 한다는 현실주의적 고려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는 시민들이 선동과 귀족들의 자의적 지배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공화국과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군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마키야벨리, 『군주론/정략론』, 102ff.
이 맥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키야벨리의 공화주의에서 시민의 자유가 갖는 성격이다. 공화국의 시민은 로마 시민의 모델에 따라 스스로 무장해서 시민의 자유와 공화국을 수호하여야 한다. 오직 그러한 시민들만이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로부터 벗어난 자유인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 N. Machiavelli, The Art of War, tr. by E. Farneworth(New York: Da Capo, 1%5), 14-43.

 이와 같은 마키야벨리의 주장에는 자유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타인의 자의적 지배로부터의 자유는 근대 이래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해 온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넘어선다. 관대한 주인이 노예에게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노예가 예속상태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주인은 노예를 언제든 제 뜻에 따라 부릴 수 있다. 간섭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주의적 개인은 노동자나 여성으로서 구조적으로 예속된 지위에 놓여 있다. 따라서 자유는 오직 타인의 자의적 지배를 물리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실질적으로 보장된다. 이 측면에 주목한 필립 페팃은 타인의 자의적 지배로부터의 자유, ‘지배의 부재,’ 곧 ‘비지배’가 공화주의의 최고 원리라고 본다. 필립 페팃, 『신공화주의 : 비지배 자유와 공화주의 정부』, 곽준혁 역(서울 : 나남, 2012), 151ff.
시민들의 공동체는, 그것이 어떤 심급에서 조직되든지 간에, 인간에 대한 지배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지배’의 공화주의적 원칙은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예속을 깨뜨리고, 가부장제의 질곡과 예속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고, 소수자 문화 집단에 대한 억압을 분쇄하고, 생명의 존속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생태계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조들과 제도들을 입법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오늘의 세계에서 시민들이 내거는 공공성 요구의 핵심적인 내용일 것이다.

3. 근대에 들어와 공공성은 고대 사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출현한다. 고대 사회에서 공공성이 공적인 것의 이름이었다면, 근대 사회에서 공공성은 사적인 것의 영역에서 태동하여 공적인 것을 혁신하는 방식으로 관철된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처럼 부르주아적 공공성이 정치적 공공성으로 발전하고, 부르주아적 공공성이 사회적 법치국가의 틀에서 어떤 변용과정을 거치는가를 분석했다.
 
3.1 근대 사회에서 공적인 것이 국가와 궁정에 관련된 것이라면, 사적인 것은 가정과 시민사회(상품교환과 사회적 노동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엄격하게 분리되었다. 근대의 공공성은 바로 이와 같은 공사 영역의 구분을 전제하면서 사적인 것의 영역에서 문예적 공론장의 형태로 출현했다. 상품교환과 사회적 노동의 영역에서 교환의 일반규칙을 제정하는 일과 관련하여 시민사회가 공권력에 정치적으로 대결하면서 부르주아적 공론장은 정치적 공론장으로 변화했다. 하버마스는 “이 정치적 대결의 매체는 특유하며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공적 논의”였다고 지적한다.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서울 : 나남, 2007), 95.
공적 논의의 핵심은 공개성이다. 바로 이 공개성이 기존의 공권력에 구현되어 있는 지배의 원칙을 허무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이 점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한 철학자가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다.
 
3.2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라는 논문에서 이성의 공공적 사용에 초점을 맞추었다. 계몽의 프로젝트는 각 사람이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이다. 그러한 용기를 갖게 되면 계몽의 주체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칸트는 스스로 생각하기(Selbstdenken)는 그 생각을 소리내어 옮기는 일(Lautdenken)이라고 본다. 그것은 자립적 사고가 공공성의 공간에서 비로소 실현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공성이 출현하려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I.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이한구 역(서울 : 서광사, 1992), 14: “공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공중에게 자유만 허용된다면 계몽은 거의 확실히 이루어질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자유는 이성을 모든 면에서 공공적으로 사용하는데 꼭 필요한 자유이다. 진리는 바로 이러한 이성의 공공적 사용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진리가 이성으로부터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성적 토론의 절차를 통하여 진리를 창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성의 공공적 사용은 사람들이 이성의 능력에 힘입어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합의한다는 의미의 비판적 공개성을 창설한다. 이성의 공공적 사용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공론장이 펼쳐진다. 공중이 공동체의 관심사에 대해 의사소통을 할 때 정치적 공론장이 형성되는데, 바로 이 공론장에서 구현되는 공개성이 공화주의적 헌정의 틀에서 자유로운 법치국가를 조직하는 원리가 된다. 모든 입법 과정은 공개되어 공중의 비판적 검토를 거쳐야 한다. 비판적 검토는 법이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한다는 일반성의 기준과 법이 바른 것, 곧 진리의 요구에 따라 정의를 확립하여야 한다는 정의의 기준 아래서 이루어진다. 공중의 비판적 검토에 노출되지 않는 법은 보편적이고 정의로운 법임을 주장할 수 없다. 오직 이와 같은 비판적 공개성의 요구 아래서 이루어지는 입법만이 ‘이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인민의 의지’로 소급된다. 왜냐하면 법률은 심의하는 공중의 ‘공공적 합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인민주권의 원칙이 이성의 공공적 사용 아래서 실현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앞의 책, 202f.

 하버마스는 칸트에게서 비판적 공공성과 공중의 의사소퉁 능력이라는 모티프를 받아들여 부르주아적 공공성이 지배 일반의 해체를 지향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

“법의 지배는 지배 일반의 해체를 지향한다. (…) 법치국가에 관한 부르주아적 이념, 즉 가능한 한 빈틈없으며 여론에 의해 정당화되는 규범화 체제에 모든 국가활동을 구속하는 것은 이미 지배도구로서의 국가의 철폐를 목표로 하고 있다. (…) 그 고유한 이념에 따라 볼 때 공론장의 ‘지배’는 그 속에서 지배 일반이 해체되는 질서이다. 권위가 아니라 진리가 법을 만든다.(veritas non autoritas facit legim) (…) 정치적으로 기능하는 공론장은 권력 그 자체를 토론에 부친다. 이 공론장이 의지를 이성으로 전화시키는데, 이 이성은 사적 주장들의 공적 경쟁을 통해 일반이익에서 실천적으로 필수적인 것에 관한 합의로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앞의 책, 167f.


 부르주아적 공공성은 프랑스 혁명 이후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1789) 제11조에서 승인된다. 거기서 사상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로 선언된다. 최초의 부르주아 헌법으로 일컬어지는 1793년 프랑스 헌법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더하여 집회의 자유가 거부될 수 없는 권리로 명기된다.   

3.3 하버마스는 칸트의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의 이념이 부르주아적 구상의 한계 안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칸트가 전제하는 공중은 사적 개인인 동시에 재산소유자인 부르주아이다. 소유가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무산자는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된 공중의 범주에 들 수 없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인간이 재산소유자와 등치된다는 것이 밝혀진다. 칸트는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에서 인간들 사이에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고, 부르주아들의 공론이 진리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적 관념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비판한 이론가가 바로 청년 마르크스이다. 그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적 조건들이 결여되어 있고, 부르주아의 자유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부자유를 강제하고 있으며, 폭력적인 계급지배가 지양되지 않는 한에서 정치적 권위가 합리적 권위로 대체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역(서울 : 이론과실천사, 2011), 24f. 1848년의 ‘공산당 선언’에 앞서서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이와 같은 부르주아 사회의 세 가지 근본 문제들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요청된다는 것을 밝히고,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모든 인간의 해방을 이끌어간다는 것을 장엄하게 선언한다.(같은 글, 28f.)
따라서 마르크스는 오직 생산수단의 사회화의 조건들 아래서만 부르주아적 공론장이 애초에 요구하였던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서의 정치적 지배를 지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한 사회주의적 조건들 아래서 어떤 공론장이 형성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깊이 논의할 수 없다. 그러나 부르주아 공론장의 내적 모순에 대한 청년 마르크스의 지적은 공론장의 재구성을 논의할 때 끝없는 도전으로 남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Oskar Negt/Alexander Kluge, Oeffentlichkeit und Erfahrung : Zur Organisationsanalyse von buergerlicher und proletarischer Oeffentlichkeit, 6. Aufl.(Franffurt am Main : Suhrkamp, 1978)을 참조하라.

 
3.4 19세기 말에 이르러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라는 원칙이 깨어지고, 국가가 시민사회의 영역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지양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국가가 시민사회에 개입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공적인 임무의 민간위탁, 경제활동을 조정하는 기본계획의 수립, 공기업의 설립과 운영, 공공서비스의 확대, 사회복지의 법제화, 노동입법, 재산세와 누진소득세의 도입, 사적 소유에 대한 광범위한 개입과 규제 등이 그것이다. 행정은 급격하게 비대해지고 관료화와 전문화가 자리를 잡는다. 행정부가 시민사회에 개입하여 위험 요인의 예방, 자원의 배분, 관리감독 등의 업무를 도맡게 되면서 입법부는 행정부에 광범위한 재량권을 부여하여 시행령을 제정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입법 상황에서 법적 규범을 제정하기에 앞서서 공적 토론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요구는 힘을 잃는다. 공공영역과 사적 영역이 통합되면서 ‘한때 국가와 사회를 매개하였던 공론장의 해체’가 일어난다.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책, 288.

 이러한 부르주아적 공론장의 위기는 극복되어야 한다. 하버마스는 독일 헌법학자 아벤트로트(Wolfgang Abentroth)에 기대어 자유주의적 법치국가가 사회적 법치국가로 지양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적 공론장의 원리를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아벤트로트는 독일 기본법이 지향하는 것은 ‘실질적인 민주주의 법치국가’라고 해석했다.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평등의 원칙과 참여의 원칙을 결합하여 이를 경제질서와 사회질서에서 구현할 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국가 복지는 더 이상 가부장적 국가의 시민 보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 각자의 행복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의 권리에 대한 응답이 될 것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책, 349.
이러한 사회적 법치국가에서는 기본권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부르주아적 법치국가에서 기본권은 국가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계명으로 이해되었다면, 사회적 법치국가에서는 국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보장하여야 할 인간과 시민의 권리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간섭금지에 의해 간접적으로 더 이상 보장될 수 없는 것은 이제 적극적으로 보장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책, 353.
사회적 법치국가에서 자유권적 기본권은 사회적 시민권에 의해 보강되고, 그 권리들을 실현하는 기본적인 틀은 시민의 참여권이다. 사회적 법치국가의 정치적 환경으로 자리잡은 대중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참여권은 정당과 사회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의 세력균형에 의해 간접적으로 실현된다. 그것은 더 이상 사적 개인들의 느슨한 네트워크인 공중의 의견에 의존하지 않고, ‘조직된 개인들의 공론’에 의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 민주주의가 의사소통의 자유에 근거한 비판적 공공성의 실현이라는 부르주아적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조직된 개인들의 공중 내부에 민주주의가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는 공론장은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조직된 공중의 내부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조건 아래서 생성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책, 355.


4. 담론이론의 틀에서 현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공성은 조금 더 정교하게 구축된다. 공공성의 담론이론적 재구성에서 하버마스의 이론과 이에 대한 아이리스 마리온 영(Iris Marion Young)의 비판은 매우 중요하다.

4.1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공동체를 규율하는 규범들과 제재들의 체계를 공동체적으로 제정하는 단계까지 아직 발전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만일 사회적 법치국가에서 현실적으로 실현된 바와 같이 민주주의가 정치세력들과 사회세력들의 이해관계를 그때그때마다 현실적으로 조절하는 장치에 그친다면, 그것은 권력이나 화폐를 매개로 해서 구축된 체제들의 한 기능으로 축소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체제가 기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지만 그 체제로 축소되거나 그 체제에 병합되지 않는 생활세계를 아우르는 원리여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생활세계는 체제들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세계’는 ‘의사소통 행위가 늘 일어나는 지평’을 의미한다. 이 생활세계는 하부체계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데, 이 하부체계들은 국가조직, 경제체제, 과학기술 등을 가리킨다. 이 하부체계들은 사회조직이 점차 복잡해지면서 발생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이며, 그 나름의 목적합리성에 따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하부체계들에 대한 규율은 생활세계의 구성원들, 곧 자유로운 의사소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합의에 의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인류의 오랜 이상이었지만, 오늘날 하부체계들은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영역으로 등장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더구나 하부체계들의 부분적 합리성이 도리어 생활세계를 이끌어 가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압도하고 이를 지배하는 현상마저 일어난다. 하버마스는 이를 가리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고 규정했다. 이에 관해서는 J. Habermas,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d. 2 : Zur Kritik der funktionalistischen Vernunft(Frankfurt am Main : Suhrkamp, 1981), 182를 보라.
이 맥락에서 중시되는 것은 생활세계적 의사소통을 수행하는 ‘시민사회’(Zivilgesellschaft) 여기서 ‘시민사회’는 더 이상 상품의 교환과 사회적 노동의 영역이라는 전통적인 의미를 벗어난다. 오히려 ‘시민사회’는 국가의 영역과 시장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영역, NGO나 NPO로 조직되는 공중의 영역이다.  
의 역할이다. ‘시민사회’를 통해 ‘공적 의견’을 형성하고, 이와 같은 공적 의견의 압력 아래서 의회에서 법을 제정하는 절차를 통해 ‘의사소통적 권력’이 민주주의적으로 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사실성과 타당성: 담론적 법이론과 민주적 법치국가 이론』, 한상진/박영도 역(서울 : 나남, 2007), 478-511.

 생활세계가 제도들을 규율하는 규범들과 법률들의 타당성을 가늠하는 최종적인 심급이라고 한다면, 생활세계를 매개하여 삶의 의미가 생활세계의 주민들에게 공유되는 의사소통공동체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사소통공동체는 ‘선하고 정의로운 삶’의 원칙들과 그 근거를 최종적으로 밝히는 담론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K.-O. Apel, Transformation der Philosophie, Bd. 2 : Das Apriori der Kommunikationsgemeinschaft (Frankfurt am Main : Suhrkamp, 1973), 410.
하버마스는 이 맥락에서 칸트의 비판적 공개성의 이념을 다시 끌어들이면서 이러한 담론의 주체가 강제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토론하고 진리에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담론공동체는 현실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상적인 공동체이다. 그러나 이 이상적인 담론공동체는 실제의 의사소통공동체에 대해서는 규제적인 역할을 한다. 일찍이 하버마스는 이를 가리켜 실제의 의사소통 과정을 규율하는 데 “꼭 필요한 가상”(konstitutiver Schein)이라고 명명하고, 그 가상은 “사실적인 것을 거스르며”(kontrafaktisch) 작용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J. Habermas, "Vorbereitende Bemerkungen zu einer Theorie der kommunikativen Kompetenz," J. Habermas/N. Luhmann, Theorie der Gesellschaft oder Sozialtechnologie : Was leistet die Systemforschung? (Frankfurt am Main : Suhrkamp, 1971), 140f.
이를테면, 현실의 담화 상황이 특수한 이익의 추구, 거짓말과 복선, 체계적으로 왜곡된 언어, 판에 박힌 구호, 불투명한 폭력 등등으로 심각하게 꼬여 있고 일그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지속적으로 나누기 위해서는 진실하게 표현하고 바르게 행동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또 그것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담론윤리는 제도적인 현실관계들을 규율하기 위해 실제적인 의사소통공동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를 규명하고자 한다. 담론윤리는 실제적인 의사소통공동체에서 진지한 토론과 합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제해결에 대한 연대적인 책임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의사소통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문제해결 과정에서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규칙을 제안한다. K.-O. Apel, Diskurs und Verantwortung : Das Problem des Uebergangs zur postkonventionellen Moral, 2. Aufl. (Frankfurt am Main : Suhrkamp, 1992), 202.
담론이론에서 오랫동안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서로 매개하고, 이상적 의사소통공동체가 ‘점진적으로’ 실제적인 의사소통공동체 안에서 실현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현실적인 제약조건들은 더 이상 괄호 안에 묶일 필요가 없다. 이와 관련해서 아펠은 이상적인 의사소통공동체의 규제적 이념들이 “오직 수많은 실용적인 제약들 아래서만” 인정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Op. cit., 205.
이를테면, 토론시간의 제한, 개개인의 이성능력과 주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의 차이, 체제합리성, 도구적 합리성 혹은 전략적 합리성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현실상황 등등이 그가 말하는 제약들이다. 이러한 실용적인 제약들을 감수하면서까지 아펠이 실제적인 담론공동체의 형성조건들을 탐구하는 까닭은 이와 같은 담론공동체가 형성되어야 사람들의 삶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공론장에 회부하여 제도적인 것을 다루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활성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4.2 담론이론이 전제하는 담론의 주체는 이성적 능력을 갖춘 상호 대등한 개인이다. 이 점에서 그 주체는 현실에서 그 실체를 찾기 어려운 추상적인 주체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로 현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담론이론을 비판하면서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이론을 재구성하고자 한 아이리스 마리온 영의 출발점이다. 각 사람은 사회집단에 속해 있고, 사회집단은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 곧 사회구조에 의해 분화된다. 사회구조는 ‘권력의 과정, 자원의 배분, 담론의 헤게모니’를 결정짓는다. 그 사회구조 안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집단과 불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집단이 형성되고 그들 사이에서는 지속적이고 불공정한 지배와 억압의 관계가 성립된다. Iris Marion Young, Inclusion and Democracy(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08ff.

 이러한 사회학적 현실을 무시하는 ‘선하고 정의로운 삶’에 대한 담론은 구체적일 수 없고 포괄적일 수 없다. 공적인 관심사에 대한 심의(deliberation)가 구체성과 포괄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심의 과정과 절차에 사회집단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관점과 입장과 경험이 반영되는 조건 아래서 공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억압과 불평등을 지적할 수 있는 집단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주변화되고 배제되어 있는 사회집단의 관점에서 비로소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본격적으로 비판된다. 이러한 폭로와 비판이 활성화될 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변화가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포괄적이고 진정한 공공성은 사회집단적으로 차별화된 관점의 수용을 전제한다. Iris Marion Young, 같은 곳.


5. 앞에서 전개한 공공성의 이해로부터 나는 현대 사회에서 공공성 실현의 과제가 공화주의적 원칙과 민주주의의 원칙을 어떻게 결합하고 제도적으로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공화주의적 원칙은 시민들이 공적인 담론에 참여하여 공동체의 관심사를 함께 심의하고 결정할 것을 요구한다. 공화주의는 한편으로는 시민의 덕, 곧 공론화하는 시민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립 페팃이 생각하는 ‘비지배적 자유’의 규범 아래서 다원주의적 요구들을 수용하는 민주주의적 공론의 토대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적 원칙은 이성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심의와 합의를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변화되고 배제되어 있는 사회집단의 목소리를 공적인 심의 과정에 통합하여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의사소통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제도화하는 것이다.

IV. 교회의 공공성 위임을 구현하는 방식

 교회의 공공성 위임을 구현하는 방식은 앞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 공공성 개념을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전제할 때 비로소 제대로 해명될 수 있다. 나는 현대 사회에서 공론의 수행자로 주목되기 시작한 시민사회(Zivilgesellschaft)에서 교회가 공공성 위임을 수행하는 방식을 논의하는 데서 출발하고자 한다.

1. 오늘의 세계에서 시민사회의 발전은 주목되는 현상이며, 교회의 공공성 위임을 실현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를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보다 시민사회가 더 일찍 발전한 서구 사회에서 시민사회는 교회와 국가로부터 독립된 공공성의 영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민사회는 국가, 시장, 시민공동체 등이 직면한 문제들을 공동의 관심사로 삼고 이에 대한 공론을 형성하는 장이다. 시민사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주체로서든, 조직된 개인들의 공중으로서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개인들의 결사체이든, 한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합의를 이끌어가는 담론의 주체들이다. 따라서 자신의 견해를 조리 있게 밝히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자신이 내세우는 의견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기대를 하는 것이 시민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미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87년 체제’의 틀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시민사회가 태동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사회운동의 가장 중요한 노동자운동도 시민사회의 동의와 지지를 필요로 하며, 공공성을 구현하는 한 주체로 시민사회의 공론 형성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오건호는 노동자운동이 공공성을 요구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공공성을 구현하는 주체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주장한다. 오건호, “노동운동의 사회공공성활동에 대한 평가와 제안 : 요구에서 참여로,” 『시민과세계』 11(2007), 77: “사회공공성활동은 새롭게 제기된 노동운동의 의제이다.”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공공성의 재구성을 연구하고 있는 이승훈도 똑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승훈, “계급과 공공성 : 공공성 주체로서 노동계급의 가능성과 한계,” 『경제와사회』 88(2010), 26f.: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이 현대사회에서 공공성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공론 영역을 구성하고 참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는 채장수, “공공성과 ‘계급적 관점’의 상호 배타성,” 『평화연구』(2012), 156: “오히려 사회공공성운동은 총자본의 계급성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공공부문의 강화를 운동적 목표로 주창하면서, 결국 ‘본의 아니게’ 공공부문에 내재된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은폐하고 자본주의적 축적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민사회가 ‘1987년 체제’의 틀에서 시민들의 보편적인 이해관계를 구현하기 위해 공적인 토론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허구로서 거부되어야 한다. 시민운동이 ‘1987년 체제’에서 구축된 민주적 법치국가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그 체제의 민주성의 한계를 보완하여야 한다는 이상돈의 논리에 기대어 기독교의 현실 참여가 바로 그러한 시민운동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민윤영의 주장은 따라서 수용될 수 없다.(민윤영,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시민운동으로서 기독교 사회참여,” 『법학논총』 24/2(2011), 99ff.)
오히려 시민사회는 우리 사회의 구조에서 분화되어 나타나는 사회집단들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과 의견들을 조정하여 우리 사회를 규율하는 데 필요한 원칙과 규칙에 대해 시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시민적 합의에 근거해서 시민사회는 기업과 시장과 국가의 활동을 감시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시민사회와 지방자치단체들, 시민사회와 국가의 협치(governance)의 틀을 형성하여 민주적인 시민정치를 활성화한다. 시민정치는 지역과 국민국가 차원만이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도 조직될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시민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또 수행하여야 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공공성 위임의 주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국가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여야 하지만, 노동, 환경, 가정, 청소년, 교육, 민주주의, 인권, 통일, 문화적 소수자 존중, 다문화, 다종교 상황 등 시민들이 직면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이슈들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서 시민사회에서 공론을 형성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여야 한다.

2. 교회가 시민사회에서 공적인 의견을 밝히는 일은 언뜻 보기에 당연하고 심지어 매우 단순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 작업은 매우 치밀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교회의 언어는 시민사회에서 낯선 언어일 수 있다. 그 낯섬은 교회의 언어가 게토적 성격을 갖는 데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여 추구하는 것이 절대적 성격을 띠는 데 반하여 세상은 상대적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교회는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지만, 세상은 궁극 이전의 것에 속한다.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에 대해서는 D. Bonhoeffer, Ethik, hg. von Eberhard Bethge(Muenchen: Kaiser, 1981), 133ff.를 보라.
세상을 향해 발언할 때, 교회는 세상이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며, 세상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서로 매개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짧은 글에서는 기독교 윤리학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이 주제를 깊이 다룰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강원돈, “책임윤리의 틀에서 윤리적 판단의 규준을 정할 때 고려할 점,” 『신학연구』 41(2000), 특히 349-353을 보라.

 나는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매개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들 가운데 하나가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의 틀에서 제시된 ‘중간공리’ 이론이라고 본다. 교회가 땅 위에 도래하기를 바라는 하나님 나라는 설사 신앙의 빛에서는 명확하더라도 세상의 현실에서는 너무 먼 곳에 놓여 있다. 그래서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이정표가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중간공리’이다. 초기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에서 제시된 ‘중간공리’는 ‘책임사회’였다. ‘책임사회’는 물론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책임사회는 하나님 나라에 투명하게 세상을 형성하기 위해 고안된 잠정적인 구상이다.
 ‘중간공리’의 구상이 세상을 새롭게 형성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에 앞서서 많은 것을 미리 규범적으로 정하고 있다는 비판이 해방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면서 ‘책임사회’ 구상은 ‘정의롭고, 참여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JPSS)의 구상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이 구상은 실천이 먼저이고, 이론은 그 뒤를 따른다는 해방신학의 원칙에 충실하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인 요구를 상대적인 세상에 매개하기 위한 구상이라는 점에서는 ‘책임사회’ 구상과 같은 트랙 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생태학적 위기를 예리하게 의식하면서 가난의 문제와 생태학적 위기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하는 에큐메니칼 구상은 ‘정의와 평화와 피조물의 보전’(JPIC)이라는 구상으로 나타났다. JPIC 구상은 JPSS 구상을 대체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에큐메니칼 사회윤리를 이끌어가는 기본 노선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구상도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 요구를 상대적인 세상에 매개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책임사회’ 구상이나 JPSS 구상과 그 위상이 같다.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의 세 가지 구성에 대한 상세한 분석으로는 강원돈, “에큐메니칼 사회사상의 전통에서 본 노동 이해 - 1937년 옥스퍼드로부터 1991년 캔버라까지,” 『지구화 시대의 사회윤리』(서울 : 한울아카데미, 2005)를 보라.

 이러한 에큐메니칼 구상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국면들에서 세상에 대한 교회의 공적인 발언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기여해 왔음을 기억한다면, 교회의 언어가 시민사회에서 낯설게 여겨지지 않고 도리어 시민사회에서 공론을 형성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하는 방안을 제대로 강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3. 교회가 국가와 사회 전체와 관련되는 이슈들에 대해 공적인 입장을 표명하여 시민단체들과 사회단체들, 정치단체들과 의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독일개신교협의회가 발표하는 백서(Denkschrift)일 것이다. 독일개신교협의회는 국민을 섬기는 교회로서 국민적 관심사에 대해 교회의 입장을 성실하게 표명해 왔다. 이러한 입장 표명은 교회에 맡겨진 공공성 위임의 핵심 내용을 이루는데, 교회의 공공성 위임은 교회가 교회의 주로부터 광범위한 선포와 파견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교회의 자기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세상은 경제적, 정치적, 기술적 발전의 고유법칙들이나 강박들에 맡겨진 것으로 볼 수 없기에, 그때그때 일어나는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발전의 원인들과 조건들과 결과들을 살피고, 그러한 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도를 숙고하고, 제도적 강박들에 대항하면서 책임 있는 결단을 하여야 할 인간의 책임을 고취하는 것이 교회에 맡겨진 윤리적 과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Aufgaben und Grenzen kirchlicher Äußerungen zu gesellschaftlichen Fragen: Eine Denkschrift der Kammer für soziale Ordnung der Evangelischen Kirche in Deutschland, hg. vom Rat der Evangelischen Kirche in Deutschland(Gütersloh: Guetersloher Verlagshaus, 1970), § 32를 보라.

 이러한 과제 앞에서 교회가 국가와 사회 전체를 감독하는 파수꾼 역할을 홀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시민단체들, 사회세력들,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공적인 토론을 불러일으키고 신중하게 고려되고 가다듬어진 공적인 의견을 수렴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다. 교회는 시민사회에서 의식형성과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망각되었거나 은폐된 맥락을 드러내고, 새로운 발상을 할 수 있도록 자극함으로써 특정 문제들에 대한 공적인 토론을 촉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자신의 생존가능성을 주장할 수조차 없는 미래세대들을 우선적으로 편든다.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그들의 변호자가 되고 그들에게 정의로운 참여와 공정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촉구하는 봉사의 본질적인 징표이다.” Das rechte Wort zur rechten Zeit : Eine Denkschrift des Rates der Evangelischen Kirche in Deutschland zum Oeffentlichkeitauftrag der Kirche(Gütersloh : Guetersloher Verlagshaus, 2008), § 44.

 교회가 사회 전체와 관련해서 큰 의미가 있는 현안 문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할 때에는 세 단계 작업을 거치게 되어 있다. 첫째는 현안 문제를 분석하는 단계이다. 둘째는 현안 문제에 대한 사회윤리적 판단의 규준과 이를 위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단계이다. 셋째는 현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는 단계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신학자들이나 교역자들만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전문적인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교역자들과 신학자들, 사회윤리학자들과 인문·사회과학자들, 해당 영역의 전문가들, 정치가들과 공무원들이 참여하는 연구위원회를 조직한다.
 이러한 연구위원회가 현실분석, 윤리적 판단과 신학적 근거의 설정, 문제 해결을 위한 제안 등을 담아 연구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독일개신교협의회는 의사결정 절차에 따라 이를 공식 문서로 채택한다. 이 과정을 통해 독일개신교협의회가 채택하는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일반적으로 매우 방대한 분량을 갖는 백서(Denkschrift)의 형태를 취한다. 일단 백서가 발표되면, 독일 사회는 시민단체들과 사회단체들, 정치단체들에서,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방의회에서 백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여 현안 문제에 대한 교회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밟는다.
 독일개신교협의회가 발표하는 백서는 교회의 의견을 논증적으로 제시하여 공중을 설득하는 방식을 취한다. 교회의 문서이기 때문에 시민사회와 국가가 그 권위를 당연히 인정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교회는 그 어떤 특권도 요구하지 않고, 의사소통공동체가 요구하는 진실성과 진지성에 충실하게 자신이 내거는 의견의 근거를 제시하여 공론장의 동의를 얻고 시민사회와 국가 차원에서 의견형성을 촉진하고자 할 뿐이다.
 교회의 백서는 현안 문제에 대해 사회 전체를 향해 의견을 표명하는 문서인 동시에 교회 회중을 위한 문서이기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중한 성찰과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작성된다. 백서는 교회의 회중이 이를 받아들여 책임 있게 세계를 형성하는 일에 나서거나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책임 있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교역자는 교회가 처해 있는 현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국제적 발전에 무관심할 수 없다. 교회에 모인 회중은 곧 세상의 시민이기도 하기 때문에 교역자는 그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세계 현실의 변화를 깊이 이해하고 교회와 회중이 그 변화에 대해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이바지하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변화의 속도와 그 폭이 매우 빠르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어떤 교역자도 세계 현실과 그 변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전문 지식을 충분히 갖추기 어렵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들은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고 착잡하게 얽혀 있어서 어떤 현안 문제에 대해 교회가 한결 같은 입장을 취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역자가 사회 전체와 관련되는 중요한 현안 문제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여 회중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총회 차원에서 현안 문제에 대해 백서를 마련하여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총회가 우리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국제적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형성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독일개신교협의회의 모델을 참고할 만하지 않을까 한다. 복잡한 현안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제간 대화와 협력에 바탕을 둔 전문가위원회를 꾸려서 교회의 공공성 위임에 따라 활동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총회는 전문가위원회를 선출하고 운영하는 방식, 교회의 공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방법 등과 관련된 구속력 있는 지침을 설득력 있게 마련하여야 한다. 이제까지는 선언서나 성명서를 발표하여 교회의 입장을 권위 있게 표명했지만, 이제는 그런 방식으로 시민사회와 국가를 설득하기 어렵다.
 일선 교역자는 총회의 백서를 읽거나 백서를 중심으로 한 지역연찬회 등을 통해 현안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정리하여 회중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시찰위원회나 노회 차원에서 연찬회를 정례화해서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교역자들의 신학적, 윤리적, 실천적 판단 능력을 드높이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교역자의 전문성을 살리는 한 방도가 될 것이다.
 일선 교역자가 지교회에서 사회 전체와 관련된 현안 문제에 대해 교회의 공적인 입장을 제시하거나 이를 형성하기 위한 지교회 차원의 토론 과정을 촉진하게 되면, 회중은 현안 문제에 대해 신학적 근거와 사회윤리적 규준을 갖춘 판단을 내리고 개인적 차원에서, 지교회 차원에서, 노회 차원에서, 총회 차원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를 숙고할 수 있을 것이다.

IV. 맺음말

 이 글에서 나는 먼저 교회의 공공성 위임의 신학적 근거를 밝히고, 그 다음에 공공성에 대한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이해에 근거하여 교회의 공공성 위임을 실현하는 방식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하지만 나는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에서 공공성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규명하여 그 공공성의 틀에서 교회의 공공성 위임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논하지 못했다. 조선 시대 이후에 국한해서 생각해 보더라도 조정의 공론 과정, 사색당쟁, 서원 중심의 공론, 향약과 향규를 중심으로 한 향촌 공론, 동학농민전쟁 때 설립된 집강소 중심의 공론, 식민지 공공성, 해방 이후의 공공성 형성과 그 변용 과정 등을 분석하면 한국 사람들의 공공성 이해의 특징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직 이에 대한 충분한 연구를 수행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하게 되면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공공성 위임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보다 더 현실적이고 생동적인 이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서 나는 교회의 공공성 위임이 세상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세상을 형성하는 일에 대한 교회의 의견을 공론장에서 펼치는 일이기에 공론장의 규칙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교회가 공론장에 공적 의견을 제시할 때에는 두 가지 계명에 충실하여야 한다. 하나는 교회의 의견을 논증적으로 제시하여 그 의견의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조적으로 주변화되고 배제되어 있는 사람들의 관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계명에 충실하더라도 교회의 공공성 위임은 교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신뢰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 교회의 사회적 신인도가 극도로 낮아진 오늘의 현실에서 교회의 의견은 시민사회에 의해 좀처럼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이다. 교회의 공공성 위임은 교회가 공적인 기관으로서 제 모습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한국 개신교 교회의 큰 과제가 되었다.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은 교회의 공공성 위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교역자 후보를 위한 신학교육과 평신도 교육이 제대로 설계되어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이 교회의 공공성 위임을 소화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전문가들이 나서서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를 기대한다. 이 분야에서 주목되는 연구로는 장신근, “교회의 민주시민교육 : 공교회와 공적 신앙의 관점에서,” 『기독교교육논총』 21(2009), 109-152를 보라.

 마지막으로 나는 교회의 공적인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사학적 기법과 매체를 개발하여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공론장은 이성능력에 바탕을 둔 담론의 장이지만, 담론의 진리는 실천이다. 사람들을 움직여 실천에 이르게 하는 데 이성적 담론만으로는 부족하다. 비유와 이야기가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매체들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매체들의 활용이 교회의 공공성 위임의 수행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기에 교회의 공공성 위임의 수행과 관련해서 수사학 연구와 매체 개발이 절실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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