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신학아키브 논문자료실
Kang Won-Don's Social Ethics Article Archive

2015/08/20 (16:41) from 211.106.190.92' of 211.106.190.92' Article Number : 287
Delete Modify Won Don Kang (kwdth@dreamwiz.com) Access : 1097 , Lines : 121
민중이 참여하는 정의 포럼의 구성 문제
Download : 민중이 참여하는 정의 포럼의 구성 문제 (인터넷).hwp (48 Kbytes)
민중이 참여하는 정의 포럼의 구성 문제

강원돈

I. 머리말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는 근본적으로 그 질문들을 던지는 사람들의 처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한 대답을 갖는다. 예를 들면, 정의는 초월적 법칙이나 신의 요구에 부응하는 태도라는 주장으로부터 힘 있는 사람들의 의지라는 답변을 거쳐 시민적 합의의 대상이라는 견해에 이르기까지 정의 개념의 내용은 매우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인다. 정의 개념의 역사를 추적해 볼 때, 민중의 관점에서 정의가 구상되었던 전례는 매우 드물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정의는 공동체 질서와 평화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구상되었고, 그것이 정의론의 전통에서 주류를 형성하는 정의 담론의 특징이다. 그러한 정의 담론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색채를 띤다. 최근에 아래로부터 정의를 구상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한 구상들은 현대 정의론의 지형에서 거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나는 민중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면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고 믿는 사람이다.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이 민중의 관점에서는 ‘거꾸로 뒤집어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의 이 확신은 민중의 관점에서 성서와 세계를 봄으로써 ‘해석학적 혁명’을 추구했던 민중신학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민중의 관점에서 정의를 구상한다면, 그러한 정의 구상은 기존의 정의 구상들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만일 민중의 관점에서 비롯되는 정의의 구상이 사회를 규율하는 정의의 원칙들과 기준들을 정하고 구체적인 지침들과 정책들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사회를 대안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민중의 관점에서 정의를 논의하고 그 논의가 정의에 대한 정치적 합의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정의를 논의하는 포럼에 민중이 참여하여야 한다. 나는 민중이 참여하는 정의의 포럼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정의론이 해결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서 나는 이 글에서 첫째 민중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둘째, 민중의 관점에서 정의를 구상하는 예들을 참고하기 위해서 성서의 민중전통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탄생하고 실현되어 갔는가를 살핀다. 셋째 민중의 관점에서 현대 정의론의 핵심 문제, 곧 정의론의 민중배제적 구성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II. 민중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개념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극구 거부해 왔다. 민중신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국내외 학자들은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에 대해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이 살아있는 주체라는 것을 일관성 있게 주장해 왔고, 이에 근거하여 민중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반대하는 두 가지 논거들을 제시했다. 첫째, 민중을 개념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민중을 대상화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민중의 주체성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둘째, 민중을 알기 위해서는 민중 바깥에서 민중을 관찰하고 분석하지 말고 민중이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민중에 대한 개념적 규정을 거부하는 민중신학자들의 주장에는 여전히 많은 방법론적 시사점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민중을 대상화하지 말고 민중을 살아있는 주체로 대하라는 제안은 지식인이 민중을 대변할 수 있다는 오만을 경계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민중이 대변되는 곳에서 민중은 부재한다. 이러한 지적은 가야트리아 스피박이 “서브얼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서브얼턴을 대변하거나 그들을 대상화하는 화법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표명한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Cf. Gayatri C. Spivak, "Can the subaltern speak?,"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Houndmills, Basingstoke, Hampshire : Macmillan Education, 1988), 295f.

 그 다음, 민중이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은 방법론적으로 많은 과제들에 직면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민중의 언어와 이야기는 민중의 삶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당연히 민중의 언어는 지배자의 언어와 다르고, 지식인의 언어와 다르다. 민중은 그들이 기억하고 전달하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 자신의 삶을 증언한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 성취와 좌절, 즐거움과 고통, 희망과 절망, 배제와 차별과 억압과 수탈에 대한 기억과 분노 등등이 그들의 이야기에 담겨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이야기가 순수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이 지배의 대상이 되고 배제와 차별과 주변화의 대상이 되어 있는 한, 그들의 이야기는 지배 이데올로기들에 오염되고, 민중이 차별과 배제와 주변화를 내면화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코드들이 민중의 이야기들을 가로지른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들과 코드들로 인하여 딱딱한 표면구조를 이루고 있기에 그 표면구조를 깨뜨리고 그 알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야기 분석이 필요하고, 그 이야기의 컨텍스트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서남동, “두 이야기의 합류,”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 한길사, 1983), 43, 73.
이러한 분석들은 민중과 연대하고 민중해방에 동참하는 지식인들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식인들의 언어분석과 컨텍스트 분석은 민중이 스스로 말하는 것을 대체하거나 그것을 부차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분석들은 오직 민중이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민중 자신과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더 분명해지고 누구에게든지 더 명료하게 전달되도록 돕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보기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인데, 민중의 실재는 지배담론을 뒤흔들고 지배담론의 틀을 깨뜨린다. 지배담론이 헤게모니 세력에 의해 정교하게 구성된 상징들의 질서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 안에 폐쇄되어 있고 높은 수준의 통합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우주이다. 민중은 기득권 구조의 바깥 경계에서 억눌리고 그 구조 바깥으로 배제된 실재이다. 그러므로 민중은 헤게모니적 상징질서 안에서 ‘좀비’로 나타나거나 그 외부에 위치한다. 물론 진리가 담론의 효과라고 믿는 사람들 미셀 푸코, 『담론의 질서』, 이정우 해설·옮김(서울 : 중원문화, 1993).
에게는 담론의 외부에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담론의 외부가 담론에 의해 구성되어 담론 안으로 통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관념론적인 망상이다. 민중의 실재는 담론 과정을 통해 구성되지 않는다. 민중은 폐쇄된 담론의 외부 경계에 있거나 그 외부에 있다. 그러한 담론의 외부가 담론 안으로 들어가면 담론의 내부가 붕괴된다. 민중의 실재는, 담론의 질서가 내파되거나 담론의 외부로부터 깨뜨려질 때, 비로소 드러난다. 한 마디로, 민중은 지배담론 내부로 완전히 통합되지 않고 그 바깥으로 배설된 잉여이다. 민중은 담론의 경계에서 담론 자체를 성가시게 하고 담론의 외부에서 담론의 틀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고 마침내 담론을 와해시키는 실재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배담론을 갖고서는 민중을 파악하거나 민중을 규정할 수 없다.
 나는 민중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민중신학자들의 주장에 담겨 있는 실천론적인 함의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는 것으로 이 절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민중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기득권 구조의 안과 바깥으로 분열되어 있고, 그 분열의 벽은 투명하지만 그 벽을 투과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기득권 구조는 성원권, 대표권, 권력, 소유권, 자본, 특허권 등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짜여 있다. 이러한 기득권 구조의 안과 밖을 아우르는 공동체는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없다. 국가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시민사회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심지어 노동조합 같은 사회단체들도 그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구실을 다 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기득권 구조를 유지하는 데 동원되거나 기득권 구조로부터 배제된다. 그들의 몸에는 훈육의 코드들이 새겨지고, 그들의 몸과 마음, 감정과 정서, 욕구와 의지 등등은 심부에 이르기까지 통제되고 있다. 기득권 구조의 바깥 표면이나 그 외부로 밀려난 사람들은 고립되고 분산되어 있으며, 기득권 구조의 안에서 벌어지는 스펙터클을 구경하고, 환상을 소비한다.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 역(서울 : 현실문화연구, 1996), 52: “스펙타클에 의해 공언되는 비현실적 통일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현실적 통일성이 의존하고 있는 계급분리를 은폐한다.”
그들의 일상적인 삶은 배제와 차별과 소멸에 직면해 있기에 그것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그들의 기본 정조이다. 공포와 불안은 그 자체만 놓고 볼 때에는 부정적인 감정들이다. 그 감정들에 휩싸이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거나 퇴행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고 끌어당기는 긍정적인 힘을 갖는다. 그들은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세계의 통합적 외양에 근본적인 회의를 표명하고, 분열되어 있는 세계 속에서 수많은 동류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직시한다. 그들은 그러한 세계와 그들 자신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배제와 차별과 소멸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를 분열시키는 바로 그것을 체계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분열된 세계로부터 통합된 공동체로 나아가고자 하는 민중의 운동은 그러한 인식에서 싹튼다.

III. 하느님의 정의의 탄생 맥락과 실현 맥락

 성서의 민중전통에는 하느님의 정의가 세상에서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다. 성서에서 민중전통은 기존 체제를 정당화하는 헤게모니 전승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이에 대해서는 Paul D. Hanson, 『성서의 갈등구조 : 신학적 해석』, 이재원 역(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6)를 보라.
성서의 민중전통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하느님이 작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편들고 그들을 압제와 수탈, 배제와 차별로부터 해방시키는 사건들을 통해 드러난다. 성서의 민중전통에서 그 사건들의 전형은 출애굽 사건과 예수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의 출발점은 하느님이 고대 이집트의 견고한 동양적 전제체제 아래서 억눌리고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던 하층민들, 곧 하비루의 외침을 듣는 것이었다. 하비루가 외치고 하느님이 그것을 듣고 거기 응답한 것이다. 하느님은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을 파라오의 손아귀로부터 건져내어 광야로 탈출시켰다. 이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정의는 작은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체제에 대한 부정과 심판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이다.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기억을 전달하는 공동체, 곧 출애굽 공동체를 이루었다. 출애굽 공동체는 야훼가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받아들였다고 믿었고, 오직 야훼만이 그들의 신이라고 고백했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이것이 시나이 계약(출애 19:5-6; 신명 7:6)과 그 이후 끊임없이 반복된 계약갱신(여호 8:30-36; 24 등)의 핵심정신이다. 오직 야훼만이 그들의 하느님이라는 고백(Mono-Yahwism)을 중심으로 한 출애굽 공동체는 가나안의 하층민들과 연합하여 가나안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야훼의 뜻에 따라 권력의 독점과 재산의 축적과 사유화를 부정하는 원시 이스라엘을 형성하였다. N. K. Gottwald, The Tribes of Yahweh : A Sociology of the Religion of liberated Israel, 1250-1050 B.C.E.(New York : Orbis, 1979), 273.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mishpat)를 구체화한 율법(mishpatim)에 근거하여 공동체를 구축하였고, 율법은 작은 사람들의 권리를 압제와 수탈로부터 보호하는 장치였다. 아주 오래 전에 멕시코 해방신학자 Jose Porfirio Miranda가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하느님의 정의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 대한 심판(mishpat)과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mishpatim)을 통해 구현된다. Jose Porfirio Miranda, Marx and the Bible : A Critique od the Philosophy of Oppression, Tr. by John Eagleson(New York : Orbis, 1974), 112.

 여기서 원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자세하게 분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측면만큼은 부각시킬 필요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원시 이스라엘이 왕과 상비군과 관료조직을 갖춘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대가족과 지파를 중심으로 한 지방분권적인 느슨한 결속이었다는 것이다. 원시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들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장로들이나 재판관들로 불렸는데, 그들은 소속 집단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로서 “지혜가 있고 분별력이 있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신명 1:12-15) 출애굽기 18:17-23에서도 재판관들은 백성 가운데서 뽑힌 “능력과 덕을 갖춘 사람,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적인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는 선출의 주체가 누구인가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정된 사람들이 뽑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것은 민수기 11장 16절, 24-25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집단 구성원들에게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고 그들에 의해 선출된 것이다. 지도자들은 율법과 관습에 따라 공동체를 규율하고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였다. 이러한 규율 전통은 판관 시대에도 줄곧 유지되었다. 판관은 지파 단위의 지도자였고, 평시에는 분쟁을 조정하고 재판하는 역할을 맡았다. 외적이 침략했을 때 판관은 지파 단위로 동원된 농민군을 이끌어 전투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원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오직 야훼의 뜻에만 충실할 것을 다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던 총회이다. 이 총회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켜 “이스라엘 온 회중”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같이 사는 이방사람들”도 포함되었다.(여호 8:33-35) 이스라엘 온 회중에는 연령, 성별, 인종의 차별이 없었다. 신명기 23:1-8에는 야훼의 총회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유형별로 열거되어 있다. 이 유형들은 주의 깊게 분석되어야 한다. “신낭이 터진 사람들”과 “사생아들”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사람들이다. 이방신을 위해 신체의 일부, 특히 성기를 훼손한 사람들이나 성전 창기나 창남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은 야훼의 총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은 출애굽 공동체를 저주해서 출애굽 사건에서 드러난 야훼의 뜻에 거역한 사람들이다. 그 밖의 사람들은 심지어 에돔 출신이나 이집트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야훼의 총회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야훼의 총회에 참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야훼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는 야훼의 뜻이 담긴 율법에 따라 살겠다는 결의만이 중요했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서는 장로들과 재판관들과 지도자들의 위치도 부차화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공동체를 규율하는 율법의 도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원시 이스라엘은 야훼와 이스라엘 온 회중을 갈라놓는 권력 장치가 없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은 권력을 독점하는 세력의 자의적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강조할 것은 원시 이스라엘에서 땅이 제비뽑기 방식으로 지파별로 분배되고, 각 지파에게 할당된 토지는 지파를 구성하는 대가족들에게 다시 분배되었다는 것이다. 야훼가 모세에게 제비뽑기 방식으로 땅을 분배하도록 직접 지시하였다는 성서의 보도(민수 26:55; 여호 14:2 등)는 생존의 근거가 되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재화의 분배가 야훼의 관심사이고, 그 재화는 야훼의 뜻에 따라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기득권도 허용하지 않는 제비뽑기는 하느님의 공정한 뜻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배분된 땅은 그들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노예로 전락되고 타인의 자의적 지배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야훼의 정의에 어긋난다. 따라서 작은 사람들에게서 땅을 빼앗도록 허용하는 토지 소유권 제도는 야훼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 제도의 배경을 이루는 축적 경제는, 만나 사건에서 보듯이, 원천적으로 부정되었다. 만나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출애굽 공동체가 이집트의 축적 경제에 대항하여 추구하고자 했던 대안적인 삶의 상징으로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Jürgen Ebach, Ursprung und Ziel: Erinnerte Zukunft und erhoffte Vergangenheit: Biblische Exegesen, Reflexionen. Geschichten(Neukirchen-Vluyn : Neukirchner Verl., 1986), 141을 보라.

 출애굽 사건의 기억을 전승한 예언자 집단은 그들 가운데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계약법전에 나열된 약자보호 규정들(출애 21:1-23:19)은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해방시킨 하느님의 위대한 사건을 역사적으로 회상하고 그 하느님의 정의에 부응하여 작은 사람들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왕국 시대에 접어들자 출애굽 사건의 전승 집단은 왕권과 대토지소유, 우상숭배에 저항하였고, 원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몇 가지 예들을 들자면, 예언자 사무엘은 왕권의 확립이 파라오 체제의 도입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경고했고,(삼상 8:10-18) 예언자 엘리야는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탈취한 아합 왕과 그의 처 이세벨을 저주했다.(열상 21:19-24) 대토지소유제가 확립되어 자유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채무노예로 전락하는 현실에 맞서서 출애굽 사건의 전승 공동체는 토지소유제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레위 25:23) 빼앗긴 토지와 자유민 신분의 회복을 골간으로 하는 희년법을 선포했다.(레위 25:8-19) 출애굽 사건의 전승 공동체는 작은 사람들이 제국들의 지배 아래서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로서” 살아갈 때 야훼를 중심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고,(다니 11:31) 야훼가 온 세상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여 제국들의 지배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날이 올 것이라는 묵시적 희망을 품었다.(다니 7:13-27; 12:2-3)
 예수는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전달하는 민중전통에 충실하게 로마 제국의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통치가 임박했다고 선포하고 회개하라고 촉구했다.(마가 1:14-15) 여기서 회개는 제국 질서에 순응하는 기존의 삶을 버리고, 삶의 지향을 180도 전환하여 하느님의 통치에 참여하라는 촉구이다. 한 마디로, 그는 로마 제국과 거기에 종속된 예루살렘 지배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하느님의 정의가 구현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호응해서 몰려든 무리를 향해 예수는 오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 6:33)고 선포했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근심하는 작은 사람들을 향한 선포였다. 그 선포는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근심하는 작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주체임을 천명하고 있으며, 작은 사람들에게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빼앗아가고 그들을 강포하게 억압하는 지배질서를 심판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 이 점에서 나는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천안 : 한국신학연구소, 1990), 111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안병무에 따르면, 예수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을 때 그의 주변에 몰려든 무리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출애굽 사건의 전승 궤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실마리들은 마태복음 11:28-30과 마가복음 10:42-43이다. 마태 11:28-30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으리라. 내 멍에는 가볍고 내 짐은 가볍다.”

인용문에서 수고는 강제노역을 뜻하고, 무거운 짐은 세금과 지대를 가리킨다. 루이제 쇼트로프, “착취당하는 民衆과 勞動,” 『새로운 성서해석 - 무엇이 새로운가?』, 김창락 편(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258.
이 세 가지는 로마 제국 체제를 떠받치는 물질적 토대였다. 예수는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세금과 지대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이 세 가지로부터 해방된 삶을 약속하고 그러한 삶을 성서의 안식일 전통과 연결시켰다. 그런 다음에 곧바로 예수는 자기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소개함으로써 세상의 지배자들과 뚜렷하게 구별하였다. 온유와 겸손은 강포와 자기주장, 곧 지배와는 대척점에 선다. 예수는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에서는 권력을 가진 세력의 자의적 지배가 설 땅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그것은 마가복음 10:42-43과 일맥상통한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예수는 세상의 권력이 마치 그들의 소유물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세력이 자의적 지배를 일삼는 것을 지적하고 이를 뿌리로부터 부정하고 있다. 예수가 제시하는 대안은 스스로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것이다. 스스로 낮아진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관철시키려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비운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을 비우고 그 빈 자리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다른 사람과 사귀고 그를 섬기려는 마음이 싹틀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자의적 지배를 넘어서서 친교와 봉사의 공동체 관계가 탄생한다. 예수가 생각하는 대안적 세계에서는 작은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땅 위에 세우려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IV. 정의를 논의하는 포럼에 관련된 전통적인 견해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대안의 제시

 성서의 민중전통에서 확인되는 정의의 모티프들로부터 우리 시대의 정의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직접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성서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고 삶의 모든 차원들에서 엄청난 구조적 차이들과 복잡성의 격차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의 민중전통은 오늘도 살아있는 전통이다. 출애굽 사건과 예수 사건 등을 통해 하느님이 하시고자 한 일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전달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세계에서 하느님이 민중과 더불어 하고자 하는 일을 분별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하느님은 오늘의 세계에서 민중을 우선적으로 편들고, 민중의 권리들과 삶의 기회들을 침해하는 체제들을 심판하고, 민중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도록 민중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하느님의 해방하고 구원하는 행위가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 출발하였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분은 작은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들을 침해하고 존엄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들을 그들에게서 빼앗아가는 체제들과 구조들을 심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분은 작은 사람들에게 대안적인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고 작은 사람들을 그 세상을 형성하는 주체로 삼았다. 이런 방식으로 하느님의 정의는 실현되는 것이다.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고 일관성 있게 주장해 왔다. 그 누구도 민중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정의에 대해 논의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민중의 편에 서서 정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정의의 이슈들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먼저 들어야 한다. 정의에 대한 담론에서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일은 민중이 참여하여 아무런 제약 없이 말하는 정의의 포럼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제는 서양 정의론의 역사에서 거의 다루어진 바 없다. 최근에 이르러 이 주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변으로 밀려나 있을 뿐이다. 왜 그런가? 아래서는 이 문제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1. 플라톤에게서 정의는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신분들의 역할들과 이를 수행하는 능력들을 규정하고 신분들 사이의 조화로운 질서를 이끌어가는 이념으로 표상되었다. 그 이념은 현상의 표면을 꿰뚫고 불변의 실재를 직관하는 철학자에게 알려진다. 철학자는 이렇게 인식한 정의의 이념을 시민들에게 가르치고, 각각의 신분이 정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함양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따라서 정의가 무엇인가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토론하여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시민들의 공동체 외부에 위치하면서 시민적 통치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와 같은 플라톤적 사유 모델은 자연법사상의 전통에서 그 나름의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영원한 법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인식되며, 인간 공동체에서 정의와 질서와 평화를 규율하는 법은 그 영원한 법에 따라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가능한 것은 선험적인  정의의 법을 사람들이 그때그때 직면하는 문제 상황들에 케이스별로 적용하는 일이다. 이처럼 보편적 법을 케이스별로 적용하는 casuistics를 가장 정교하게 발전시킨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보편적 이념을 전제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제자였지만, 공동체 안에서 명예, 재화, 안정된 삶의 기회 등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특수한 정의의 이론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는 사람들이 맺는 관계들의 다양성에 주목하고 그 관계들을 유형화했고, 각 유형에 해당하는 정의를 개념화했다. 사람들 사이의 자발적 교환관계를 규율하는 교환적 정의(justitia commutativa)와 형법상의 징벌을 필요로 하는 비자발적 거래를 규율하는 교정적 정의(justitia correctiva)는 서로 구별되어야 하고, 공동체 안에서 각 사람에게 ‘공적인 인정(認定), 화폐, 기타 재화의 배분’를 규율하는 분배적 정의(justitia distributiva)는 앞의 두 가지 정의 개념들과 구별되는 정의 개념이다. Aristoteles, Nikomachische Ethik, übers. u. komm. v. F. Dirlmeier, 4. ern. u. durchges. Aufl.(Darmstadt : Wiss. Buchges,  1967), 100 (1130b/1131a).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중요한 것은 정의가 시민적 토론과 합의의 대상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이다. 시민공동체는 공동체에서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규범들과 법들을 심의하고 제정하는 정치적 결사이다. Aristoteles, Nikomachische Ethik, 86ff. (1126a).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 정치적 결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가(scholē)를 갖고서 신중한 판단력(phronēsis)을 함양할 수 있는 사람들, 곧 자유민들로 제한되었다. 수공업자들을 위시하여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은 정치공동체에서 배제되었다.
 
 3. 이처럼 민중을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하는 전통은 고대 그리스 공화주의만이 아니라, 로마 공화주의에서도 나타났다. 그리스 공화주의는 자유민들의 직접적인 의사결정을 원칙으로 하는 이상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로마 공화주의는 공화국의 자유를 위해 무장하고 귀족전제로부터 시민적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대표들을 뽑고 그 대표들이 공동체를 규율하는 규범과 법을 제정하는 현실주의적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 공화국을 구성하는 사람들 가운데 무장 시민의 지위를 갖춘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여성, 노예, 외국인 등 대다수 민중은 공동체를 규율하는 규범들과 법들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로마 공화정을 이상적 모델로 삼고 있는 마키야벨리는 공화국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시민들의 덕을 중시하고, 자의적 지배로부터 시민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공화국의 가장 주요한 과제로 설정하였다. 그가 옹호하는 공화국은 시민적 덕을 갖춘 사람들의 무장공동체이며, 따라서 공동체의 내부와 외부를 엄격하게 가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N. Machiavelli, The Art of War, tr. by E. Farneworth(New York: Da Capo, 1990), 14-43.


 4. 상품교환과 사회적 노동이 전면화된 근대 사회에서 정의의 원칙을 논의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공론장에 맡겨진 과제였다. 시민사회는 공권력에 정치적으로 대결하면서 ‘공적 논의’의 틀을 발전시켰다.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서울 : 나남, 2007), 95.
이 공적 논의의 핵심은 공개성이며, 공개성은 기존의 공권력에 구현되어 있는 지배의 원칙을 허무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이 점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한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였다.
 칸트는 진리가 이성으로부터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성적 토론의 절차를 통하여 진리를 창출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이성의 공공적 사용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이성의 공공적 사용은 두 가지를 전제한다. 하나는 각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각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I.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칸트의 역사철학』, 이한구 역, 개정판, 제3쇄(서울 : 서광사, 2014), 15: “그렇지만 민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민중에게 자유만 허용된다면 계몽은 거의 확실히 이루어질 수 있다.”
이성의 공공적 사용은 비판적 공개성을 창설한다. 사람들은 이성적 능력에 힘입어 모든 것을 공개적 토론의 장에 올려 놓고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참되고 바른 것에 대해 합의할 수 있다. 이처럼 이성을 공공적으로 사용하면서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공중이다. 그들은 공동체의 관심사에 대해 의사소통을 하면서 정치적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데, 바로 여기서 구현되는 공개성이 공화주의적 헌정의 틀에서 자유로운 법치국가를 조직하는 원리가 된다. 모든 입법 과정은 공개되어 공중의 비판적 검토를 거쳐야 한다. 비판적 검토는 법이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한다는 보편성의 기준과 법이 진리의 요구에 따라 정의를 확립하여야 한다는 정의의 기준 아래서 이루어진다. 공중의 비판적 검토에 노출되지 않는 법은 보편적이고 정의로운 법임을 주장할 수 없다. 오직 이와 같은 비판적 공개성의 요구 아래서 이루어지는 입법만이 ‘이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인민의 의지’로 소급된다. 왜냐하면 법률은 심의하는 공중의 ‘공공적 합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인민주권의 원칙이 이성의 공공적 사용에 토대를 두고 실현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앞의 책, 202f.

 그런데 칸트의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의 이념은 부르주아적 구상의 한계 안에 있다. 칸트가 전제하는 공중은 사적 개인인 동시에 재산소유자인 부르주아이다. 소유가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믿어졌던 부르주아 사회에서 무산자는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된 공중의 범주에 들 수 없다. 칸트의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에서 민중은 자신의 권익을 주장할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청년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부르주아 사회의 민중배제적 성격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적 조건들이 결여되어 있고, 부르주아의 자유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부자유를 강제하고 있으며, 폭력적인 계급지배가 지양되지 않는 한에서 정치적 권위가 합리적 권위로 대체될 수 없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역(서울 : 이론과실천사, 2011), 24f.를 보라.


 5.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성의 공공적 사용이라는 칸트의 모델을 받아들여 담론 이론을 정교하게 전개하였다. 그의 핵심 아이디어는 사람들이 억압과 강박 없는 의사소통공동체에서 진리에 대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사소통공동체는 이상적이고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적인 의사소통공동체는 실제의 의사소통공동체를 규제하는 기능을 갖는 필수불가결한 가상이다. J. Habermas, "Vorbereitende Bemerkungen zu einer Theorie der kommunikativen Kompetenz," J. Habermas/N. Luhmann, Theorie der Gesellschaft oder Sozialtechnologie : Was leistet die Systemforschung?(Frankfurt am Main : Suhrkamp, 1971), 140f.
정직성, 진실성, 성실성은 현실적인 의사소통공동체에서 시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의사소통공동체가 반드시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행위 이론에 근거하여 생활세계 구상을 가다듬었다. 생활세계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공동체를 규율하는 규범들과 규칙들이 신중하게 심의되는 지평이다. 그런데 삶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생활세계로부터 다양한 하부 체제들이 분화되었는데, 정치체제, 경제체제, 과학-기술체제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하부체제들이 생활세계로부터 독립하고 급기야 생활세계를 식민지로 만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J. Habermas,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d. 2 : Zur Kritik der funktionalistischen Vernunft(Frankfurt am Main : Suhrkamp, 1981), 182.
하버마스는 이러한 위험이 개입주의 국가에서 점점 더 증가하는 관료적 지배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자유주의적 원칙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국가가 시민사회 영역에 광범위하게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입주의 국가가 파시스트 국가나 개발주의 국가로 전락하지 않고 사회적 법치국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들이 충족될 필요가 있었다. 하나는 시민적 자유와 권리들의 보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민 참여의 확장이다.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에서 기본권이 국가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계명으로 이해되었다면, 사회적 법치국가에서는 국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보장하여야 할 인간과 시민의 권리로 해석된다.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 353: “왜냐하면 간섭금지에 의해 간접적으로 더 이상 보장될 수 없는 것은 이제 적극적으로 보장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법치국가에서 자유권적 기본권은 사회적 시민권에 의해 보강되고, 그 권리들을 실현하는 기본적인 틀은 시민의 참여권이다. 사회적 법치국가의 정치적 환경으로 자리잡은 대중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참여권은 정당과 사회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의 세력균형에 의해 간접적으로 실현된다. 그것은 더 이상 사적 개인들의 느슨한 네트워크인 공중의 의견에 의존하지 않고, ‘조직된 개인들의 공론’에 의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 민주주의가 의사소통의 자유에 근거한 비판적 공공성의 실현이라는 부르주아적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조직된 개인들의 공중 내부에 민주주의가 자리 잡아야 한다.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책, 355.
그렇지 않다면, 대중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참여는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선출되지 않고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관료들과 전문가들의 지배가 일상화될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가 정치세력들과 사회세력들의 이해관계를 그때그때마다 현실적으로 조정하는 장치에 그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권력이나 화폐를 매개로 해서 구축된 체제들의 한 기능으로 축소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에서 의사소통 행위를 다시 활성화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시민사회’ 여기서 ‘시민사회’는 더 이상 상품의 교환과 사회적 노동의 영역이라는 전통적인 의미를 벗어난다. 오히려 ‘시민사회’는 국가의 영역과 시장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영역, NGO나 NPO로 조직되는 공중의 영역이다.  
가 생활세계의 기능을 맡아서 권력과 화폐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의 논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공적인 의견을 형성할 것을 기대한다. 이와 같은 공적 의견의 압력 아래서 의회에서 법이 제정된다면, ‘의사소통적 권력’이 민주주의적으로 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위르겐 하버마스, 『사실성과 타당성: 담론적 법이론과 민주적 법치국가 이론』, 한상진/박영도 역(서울 : 나남, 2007), 478-511.
하버마스가 이와 같은 시민사회적 의사소통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은 이성적 능력을 갖춘 상호 대등한 개인들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한 시민사회적 의사소통의 주체는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도록 호명된 칸트적 의미의 예지적 개인을 그 모델로 한다. 그런데 그러한 주체는 현실에서 그 실체를 찾기 어려운 추상적인 주체가 아닐까? 인간이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관계들의 총체로 현상한다면, 그러한 관계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사회적이고 시민적인 의사소통이 과연 실질적인 것일 수 있을까? 그러한 의사소통공동체에서 민중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의사소통공동체는 민중의 현실에 대해 무차별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6. 현대 정의론의 주요 얼개들을 제시했다고 여겨지는 존 롤즈도 하버마스에게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난제에 봉착한다. 존 롤즈는 칸트의 의무론적 틀 안에서 사회적 기본재화들을 분배하는 공정한 원칙들을 미리 제정하고 난 뒤에 그 원칙들에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기본 원칙들은 따라서 선험적 성격을 띤다. 이러한 선험적 원칙들은 자연법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신의 의지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롤즈는 그 원칙들이 일종의 사회계약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기본재화들을 분배하는 원칙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 소집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롤즈에 따르면, 그 사람들은, 일단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사회적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한 개인들이다. 그러한 개인들이 편파적이지 않게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분배의 원칙들에 합의하기 위해서는 그 원칙들이 무엇보다도 공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들은 그들의 선택이 편파적이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요인들로부터 초연하여야 한다. 이를테면 사회 안에서 자신의 지위, 계급적 위치나 계층, 천부적 능력, 지능, 체력 등에 의해 합리적 선택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고, 자신의 선의식, 구체적인 생활계획, 심리적 특성 등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경제적, 정치적 상황, 문명과 문화의 수준, 세대 귀속성 등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롤즈는 이러한 초연한 자아를 ‘무지의 베일’을 뒤집어 쓴 개인이라고 보고, 그 개인들이 모여 사회적 분배의 원칙들을 제정하는 원초적 상황을 가정했다. John Rawles, A Theory of Justice, Revised Edition(Cambridge : Harvard Univ. Press, 1999), 118.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원초적 상황에서 개인들이 사심 없이 만장일치로 합의하는 정의의 원칙들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유 우선의 원칙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는 조건 아래서 최소수혜자 최대 이익 보장의 원칙이다. John Rawles, op.cit., 266f.
바로 이 두 원칙들 때문에 롤즈의 정의론은 강력한 평등주의적 지향을 지닌 사회적 자유주의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롤즈의 정의론은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수혜자 집단에게 고무적이고, 그런 만큼 수긍할 만한 점이 있다. 그러나 민중의 관점에서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정의론은 몇 가지 점에서 불만스럽고 부적절하다. 무엇보다도 롤즈가 정의의 원칙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기 위해 호명한 사람들은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근대 자유주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는 원자화된 추상적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은 환상이지 실재가 아니다. 정의의 원칙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로 나뉘어져 있고 서로 다른 헤게모니적 위치들에 서 있고 각기 다른 성향과 특질과 능력과 세계관적 지향을 갖고 있는 구체적인 인간들의 투쟁과 조정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롤즈가 가정하는 ‘질서정연한’ 사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모순과 갈등과 대립을 기본 질서로 갖는 사회가 전제될 때, 민중이 기왕의 분배 구조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담론의 틀을 뒤흔들고 깨뜨리면서 정의의 원칙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7. 마이클 센델은 칸트의 의무론과 계약이론에서 출발한 롤즈의 정의론을 비판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 전통으로 되돌아가서 공동체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정의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롤즈가 정의의 원칙들에 대한 합의의 주체로 설정한 합리적이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개인을 ‘본질적으로 무연고적인’ 자아로 규정하고, 그러한 자아는 없다고 단언한다. Michael J. Sandel,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New York : Cambridge Univ. Press, 1982), 87.
그가 설정하는 ‘연고적 자아’는 공동체 전통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공동체에 대한 애착을 갖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과 서로 인정하고 인정받는 관계를 맺고, 그들과 자발적인 상호호혜의 관계를 맺는다. 한 마디로, 공동체는 자아를 구성한다. 따라서 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없다. Op.cit., 172f.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 전통에 따라, 센델은 공동체를 규율하는 규범들을 제정하는 것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과제들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공동체의 정치적 합의에 앞서서 공동체를 규율하는 정의의 선험적 원칙들을 설정할 수는 없다. 정의의 원칙들에 대한 정치적 토론과 합의는 언제나 그 끝이 열려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는 센델의 한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가 설정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한계를 피할 수 없다.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의 권리들과 생활을 꾸려나갈 기회들은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 안에서 특정한 집단과 신분의 헤게모니가 작용하는데도 샌델은 헤게모니적 위치의 문제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렇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 공동체 안에 공간적으로 위치하지만 공동체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사람들, 한 마디로 민중의 권익을 실현하는 방안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발상이다.

 8. 이제까지 분석해 온 바와 같이, 전통적인 정의론과 현대 정의론은 민중이 참여하는 정의의 포럼을 구성하는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관점과 이론을 갖추지 못했다. 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한 두 가지 해법들을 제시하고 싶다.
 하나는 성원권, 대표권, 지위, 재산, 교육, 의료, 사회적 사귐 등 인간의 사회적 생활에 필요한 기본재화들의 분배에 대한 결정에 직접 영향을 받고 그 결정에 종속되는 모든 사람들이 그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참여하여 제 목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다. 공화주의 전통에 따라서 나는 이를 동등한 참여의 원칙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정의의 문제들에 대한 결정에 종속되는 모든 사람들이 그 결정과정에 참여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지만, 이제까지 제대로 해결된 바 없는 문제이다. 사회적 가치의 배분이나 노동시장 정책, 기업 차원의 경제정책과 인사정책 등 정의의 핵심 문제들이 쏟아지는 경제 영역에서 이해당사자들의 동등한 참여는 거의 보장되고 있지 않다. 거기서는 자본의 독재 혹은 기업 독재 같은 자의적 지배가 일상화되어 있다. 정의에 관련된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지는 과정들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어 다른 사람들이 내린 결정들에 타율적으로 종속된다면, 다른 사람들의 자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자신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공화주의 전통에서 자의적 지배로부터의 자유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필립 페팃, 『신공화주의 : 비지배 자유와 공화주의 정부』, 곽준혁 역(서울 : 나남, 2012), 151ff.를 보라.
민중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회적 기본재화들을 배분하는 것과 관련된 사회적 토론과 정치적 결정이 진행될 때에는 그 토론과 결정의 틀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은 민중과 연대하는 지식인들의 과제가 된다. 지식인들은 사회적 토론과 정치적 결정의 틀이 포괄하지 못하고 도리어 배제하고 있는 사람들의 실재를 드러내야 하고, 그 실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틀을 철거하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 틀을 구성하는 논리가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그 논리를 해체하는 작업 또한 치밀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해법은 정의의 포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사회집단에 속해 있고, 사회집단은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 곧 사회구조에 의해 분화된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사회구조는 ‘권력의 과정, 자원의 배분, 담론의 헤게모니’를 결정짓는다. 그 사회구조 안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집단과 불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집단이 형성되고 그들 사이에서는 지속적이고 불공정한 지배와 억압의 관계가 성립된다. 이에 대해서는 Iris Marion Young, Inclusion and Democracy(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08ff.를 보라.
이러한 사회학적 현실을 무시하는 ‘선하고 정의로운 삶’에 대한 담론은 구체적일 수 없고 포괄적일 수 없다. 공적인 관심사에 대한 심의(deliberation)가 구체성과 포괄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심의 과정과 절차에 여러 사회집단들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관점들과 입장들과 경험들이 반영되는 조건 아래서 공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억압과 불평등을 지적할 수 있는 집단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주변화되고 배제되어 있는 사회집단의 관점에서 비로소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본격적으로 비판된다. 이러한 폭로와 비판이 활성화될 때, 비로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변화가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포괄적이고 진정한 공공성은 사회집단적으로 차별화된 관점의 수용을 전제한다. Iris Marion Young, 같은 곳.

 만일 민중의 관점들과 입장들과 경험들과 권익들을 무시하는 정치적 결정과 그에 바탕을 둔 입법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민중은 그렇게 제정된 법률들에 바탕을 둔 제도들에 저항할 것이다. 제도들에 대한 불만과 불평은 한 동안 사회 저변으로 스며들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임계점을 지나면 저항의 잠재력은 정치적 의사결정의 틀을 근본적으로 변경시키고 기존체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운동으로 폭발할 것이다.

 9. 지구화 시대에 민중이 참여하는 정의의 포럼을 구성하는 것은 조금 더 복잡한 과제가 되었다. 바뵈프(François-Noël Babeuf)의 반란 이래로 국가는 사회적 재화를 정의롭게 배분하는 책임 있는 기구로 설정되었고,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회국가는 개입주의적 수단들을 통해 그러한 과제를 수행해 왔다.
 문제는 경제의 지구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자본의 운동이 영토국가의 주권 영역을 넘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주권은 베스트팔렌적 틀을 유지하고 있으나, 자본의 운동은 탈베스트팔렌적 스케일을 갖게 된 것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의 운동은 국가와 지역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그들은 국가와 지역사회 차원에서 자본의 파괴적인 영향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자본의 운동을 규율하는 중요한 결정들은 영토국가를 초월하는 IMF, World Bank, WTO, BIS, G7 국가들의 재무장관 회의 등에서 내려진다. 그리고 그 기구들은 본질적으로 자본친화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동등한 참여’를 정의의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는 낸시 프레이저는 이 질문에 대해 시사적인 답변을 했다. 그는 이러한 초국적 기구들의 의사결정들에 ‘종속된 모든 사람들’이 그 의사결정 과정들에 참여하여 그들의 입장들과 요구들을 관철하는 주체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Nancy Fraser, 『지구화 시대의 정의 :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김원식 옮김(서울 : 그린비, 2010), 117ff.
그것은 민중이 참여하는 정의의 포럼을 탈베스트팔렌적 스케일로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초국적 정의의 포럼이 초국적 기구들을 규율하는 입법적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우리 시대의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낸시 프레이저는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서 지구적 스케일을 갖는 민중 포럼의 예를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에서 찾는다. Nancy Fraser, Alfredo Gomez−Muller, Gabriel Rockhill, “Global justice and the renewal of critical theory : A dialogue with Nancy Fraser,” EUROZINE, www.eurozine.com(2009.04.21.). 문제는 이 포럼이 입법에 구속력 있는 영향을 미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V. 맺음말

 민중의 관점에서 정의를 논한다는 것은 매우 방대하고 복잡한 작업이다. 민중은 기득권 구조의 경계에서 억눌리거나 기득권 체제의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민중의 실재는 기득권 구조의 존재를 전제하지만 동시에 그 해체이기도 하다. 민중의 실재는 기득권 구조가 그 자체로서는 더 이상 존립할 정당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득권 구조를 정당화하는 지배담론의 틀은 민중의 실재와 거기서 비롯되는 요구들을 담지 못하기 때문에 허물어진다.
 민중은 기득권 구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을 때조차도 그것을 허무는 힘으로 등장한다. 경우에 따라 민중은 그람시적 의미에서 기동전을 벌일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진지전을 지루하게 벌일 수도 있다. 진지전을 벌일 경우에 민중은 그들의 관점에서 정의의 이슈들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고, 정의의 요구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사회적 기본재화들을 배분하는 규칙을 제정하는 데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민중이 이러한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데 민중과 연대하는 지식인들의 역할은 매우 크다.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