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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0 (14:24) from 211.199.108.150' of 211.199.108.150' Article Number :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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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를 어떻게 자본주의의 포로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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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를 어떻게 자본주의의 포로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강원돈 (한신대 교수, 민중신학과 사회윤리)

머리말

 지난 호 『농촌과목회』에서 “한국교회는 자본주의의 포로가 된 것이 틀림없다.”고 썼더니 편집원장 한경호 목사님이 이번에는 “한국 교회를 어떻게 자본주의의 포로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를 말하라고 한다.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질문은 여러 측면들에 걸쳐 있어서 매우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음이 분명했다. 교회의 자본주의적 포박 상태는 신학과 설교의 수준에서 분석될 수도 있고, 성공과 번영을 바라는 기독교인들의 욕망과 그 충족에 대한 심리분석 수준에서 다루어질 수도 있고, 종교시장의 경쟁 상황의 맥락에서 분석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러한 분석들이 많이 이루어졌고, 그러한 분석들을 한 뒤에는 의례 비판이 뒤따랐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포박상태로부터 교회를 해방하는 방안은 분석들과 비판들의 치밀함과 치열함에 비하면 다소 막연하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이 글에서 나는 위에서 말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서 기독교인들을 자본주의적 포박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방안을 세 가지 수준에서 살피려고 한다. 하나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 사회화 과정에 주목해서 해방의 길을 찾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자본주의적 에토스를 갖게 만드는 교회 담론의 효과를 염두에 두고 해결 방안을 찾는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교회의 제도적 운영 방식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강박을 드러내고, 그 강박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교회가 자본주의적 포박에 더 이상 묶여 있을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담론의 효과에서 벗어나는 길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교육을 받고 교인들과 각종 모임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교인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들은 일상생활의 경험들에 관련되는 경우가 많지만, 신앙에 관련된 경우도 많다. 앞의 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따로 말할 것이 없다. 뒤의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교회에서 듣는 설교나 신앙교육에 직접, 간접 관련되어 있다. 거기서는 설교와 신앙교육의 내용에 동의하고 순응하는 이야기들이 오갈 수도 있고,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한 불만이나 이견이 노출되기도 한다. 설교와 신앙교육의 내용, 그리고 그것에 대한 교인들의 반응들은 모두 교회에서 형성되는 담론들이다. 그 담론들은 담론참여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교회의 담론과 그 효과를 결정하는 장치는 교회의 종교적 사회화 과정이다.
 교회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자본주의적 담론은 그 동안 많은 학자들에 의해 분석되어 왔다. 나는 선교사들에 의해 도입되고 보수주의적 교권세력에게 전달된 반(反)사회주의적이고 친자본주의적인 세계관 담론, 남한에서 헤게모니 세력의 한 축을 이루었던 기독교 지식인들의 자본주의 담론,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기에 맹위를 떨쳤던 자본주의적 축복 담론, IMF 경제신탁 시기 이후에 자리 잡은 청부론 담론과 성부론 담론에 주목한 바 있다.
 이러한 담론들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장치는 교회에 구축된 종교적 사회화 과정이다. 종교적 사회화 과정은 교회에서 생산되는 담론을 소비함으로써 그 담론이 전달하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종교적 사회화 과정은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된다. 교회의 헤게모니 세력은 구원의 수단을 독점한 세력, 곧 치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세력이다. 전통적으로 그 세력은 성서와 교리의 해석, 그리고 성례전 집행권의 독점을 통하여 교인들을 지배해 왔는데, 이는 오늘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톨릭교회 같은 교직제도가 없는 개신교에서는 누구나 성서와 교리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성서와 교리의 해석은 전문적 지식과 능력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의욕이 있더라도 제 풀에 꺾여 성서와 교리의 해석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개신교 교회들에서는 성만찬이 자주 시행되지 않고, - 민망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 심지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까지 하니까 일단 성만찬 문제를 도외시하기로 하자. 문제는 성서와 교리의 해석인데, 그것은 치리회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담임목사의 허락 없이 누군가를 강단에 세운다든지, 교회교육의 교재를 선택한다든지 하는 행위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듣거나 신앙서적이나 신학서적을 읽고 그 내용을 교회에서 공공연히 전파하는 행위는 당연히 불온하게 여겨진다. 이 모든 것은 교회 구성원들의 종교적 사회화가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헤게모니 세력, 한 마디로 교권 세력에 의해 일일이 통제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교권세력은 그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일차적인 물질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고, 그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제도적 안정과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교권세력에 의해 통제되는 종교적 사회화 과정은 교권세력의 이중적 전략, 곧 헤게모니 전략과 제도안정화 전략 아래 배치된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개신교 교회들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담론들은 방금 앞에서 분석한 종교적 사회화 과정을 매개하여 생산되고 소비된다. 그러한 담론들을 소비한 결과, 교인들의 내면에는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이 자리 잡는다. 자본주의적 담론들을 무력화하는 방법은 이론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담론을 비판하는 대항담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담론이 성서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 그것에 대항하는 담론을 뒷받침하는 성서의 가르침들을 제시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예를 들면, 파라오 체제에서 널리 행하여진 착취와 축적의 경제에 대항하는 만나 경제의 옹호(출애 16:1-36), 맘몬 비판(마태 6:24), 물질로 인해 근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라는 가르침(마태 6:31-33),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약속된 안식(마태 11:28-30),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되어야 할 이용할 양식(마태 6:11; 누가 11:3 병행), 많이 일한 사람이나 적게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이야기(마태 20: 1-16),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마태 25:31ff.) 등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사상사에서도 부의 축적을 경계하고 연대적인 나눔의 삶을 강조했던 가르침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 가르침들은 교회 안에서 거의 들리지 않고, 종교적 사회화 과정의 바깥으로 배설되고 만 것 같다. 하나님이 하늘의 곳간을 열어 돈벼락을 내리치게 하라고 기도하라는 조잡한 설교가 횡행하는 데도 교인들은 그것이 설교이기에 비판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일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담론에 맞서는 대항담론을 개교회의 틀에서 형성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대항담론은 교회 바깥에서 교회의 안을 향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될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담론을 생산하는 교역자의 설교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비판의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확산되어야 하고, 그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개신교 교인으로 행세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 담론들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 곧 종교적 사회화 과정을 통제하는 교권세력의 헤게모니 전략과 제도안정화 전략을 폭로하고, 그 전략이 복음의 선포와 많은 경우 어긋난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일이다. 교회 안에서 그 전략을 폭로하는 분파가 조직되어 교회 강단에서 참된 복음을 선포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면 가장 좋은 일인데,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답답하다. 그러나 교회 강단에서 참된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일이 방치된다면, 교회가 복음을 내팽개치고 맘몬을 섬기는 교권세력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다는 비난이 교회 바깥에서 교회를 향해 쏟아질 것이다.

한국 개신교 교회 운영의 자본주의적 강박

 교권세력이 종교적 사회화 과정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자본주의적 담론의 생산과 소비를 조장하는 것은 교회 운영의 자본주의적 강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본주의적 강박은 교회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여서 저축을 하여야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강박은 개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자립적인 재정을 운영하여야 하는 한국 개신교 교회들에서 쉽게 관찰된다. 자본주의적 강박은 한국 개신교에서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양적 성장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영이다.
 우선, 교인의 수를 늘리고 헌금을 늘리는 양적 성장이 개교회의 생존 전략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외적인 크기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나타내는 표지이고 담임목사의 카리스마를 굳건하게 보증하는 장치로 인정되어 왔다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양적 성장은 교권세력의 가장 강력한 욕망이고, 그 욕망이 개교회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촉발한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폭발적인 양적 성장을 보였던 시기에 자본주의적 강박이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그 다음, 신자유주의적 경영은 양적 성장이 한계에 이르고 교회 인구의 고령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요즈음 교권세력이 선택하고 있는 전략이다. 수입이 절대적으로 줄어드는 상황에서 개교회 중심의 재정 운영은 지출을 줄이는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고, 이는 인건비 축소와 선교비 축소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인건비 축소는 아직까지는 담임목사를 제외한 부교역자들에게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영이 노동사회에서 고용조정과 임금삭감으로 나타나듯이, 교회에서도 가뜩이나 불안정한 부교역자들의 지위가 더 불안정해지고,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의 생활 급여는 더욱더 큰 격차를 보인다. 교회지출에서 기왕에 비중이 적었던 선교비는 교회 장부에서 삭제되다시피 한다.
 교회의 자본주의적 강박은 개교회 중심의 재정 운용 제도에서 비롯된다. 교단 차원에서 자원을 모아 교역자들의 급여를 지급하고 교회 관리 비용을 지출하는 가톨릭교회나 유럽의 개신교 교단들은 상대적으로 자본주의적 강박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물론 거기서도 교회의 재정을 맡고 있는 기관이 막스 베버적 의미의 가치합리성보다는 회계합리성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양적 성장이 교역자의 카리스마와 교권세력의 헤게모니를 좌우하는 지표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개신교 교회들이 자본주의적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교단 차원에서 교역자 생활급여를 연대적으로 해결하고, 담임목사들과 부교역자들 사이의 격차를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개척교회 중심의 성장이 한계에 부딪친 오늘의 현실에서는 교단 차원에서 교역자 수급을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교회당의 관리와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도 교단 차원에서 지원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지역 차원에서 교파별로 개교회를 설립하기보다는 교회가 세상에서 수행하여야 할 사업을 중심으로 교회의 인적 자원을 서로 결합시키는 에큐메니칼 선교협력 사업과 에큐메니칼 교구설립 사업을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선교협력과 교구설립에 필요한 자원은 교단 차원에서 확보하여 공급하여야 할 것이다.
 이처럼 개교회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협의체 정신에 바탕을 둔 교회들의 연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교회 재정 운영의 원칙이 새로 수립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해 왔던 것처럼 개교회가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여서 저축을 많이 하기 보다는, 교단 차원의 재정 운영을 위한 개교회별 분담금을 지급하고 남는 자원을 활용하여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고 저축을 한 푼도 남겨두지 않는 방식으로 교회 재정을 운영하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한 원칙에 따라 교회 재정이 운용된다면, 교회의 자본주의적 강박은 차차 불식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강박이 해소되는 사회를 향하여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임노동을 본위로 하는 사회, 곧 노동사회로 구성되었다. 노동사회에서는 각 사람이 시장에서 업적을 발휘하고 그 업적에 따르는 보상을 받아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은 노동사회를 지배하는 업적 원칙을 잘 요약하고 있는 슬로건이다. 노동사회에서 더 많은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사람들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학교에서는 성적 경쟁을, 취업을 위해서는 스펙 쌓기 경쟁을, 직장에서는 업적 평가 경쟁을 한다. 더 많은 업적을 쌓아야 산다는 생각이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바람에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업적 경쟁에 나서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고갈시킨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강박이다.
 노동사회는 자본에 노동이 포섭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의 지배 아래서 사람들이 노동을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움직여 남의 일을 하고 산다. 그런 일조차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노동사회의 현실 때문에,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고, 그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에 턱 없이 모자라는 급여를 감수하고, 심지어 더럽고 위험하고 고달픈 일마저 마다하지 못한다. 이것이 노동 강제가 아니면 무엇이 노동 강제란 말인가? 이러한 노동 강제가 노동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원리이다. 일시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노동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실업급여나 사회급여가 지급되는 경우에도 노동할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게는 일자리를 찾거나 정부가 제공하는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다. 복지는 노동 의무에 대한 반대급무로서만 허락된다는 것이 노동사회를 운영하는 신자유주의적 원칙으로 자리를 잡았다.
 인간이 존엄성 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이러한 자본주의적 강박과 노동 강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나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강박과 노동 강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이 엄청난 규모로 축적되고 기술이 놀라운 수준에 도달하고 노동생산성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자리가 적어지고, 일자리를 얻는 것이 특권이 된다. 그러면 일자리를 얻지 못하여 업적을 발휘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소득을 정부가 보장해 주면 된다. 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일 것이다.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 제도화된다면, 모든 사람은 자본주의적 강박과 노동 강제로부터 해방되어 취직을 하여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일을 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기여하고, 취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건강하게 가꾸고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즐겁게 일을 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돈벌이 노동만 일이고, 삶을 위한 활동은 일이 아니라는 노동사회의 오래 된 편견이 깨질 것이다.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 제도화된다면, 모든 교역자들이 존엄한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기본소득을 향유하기 때문에 교회가 교역자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많은 헌금을 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함께 하기 위하여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필요로 하고, 그 가운데에는 성서와 교리를 제대로 해석하고, 복음을 선포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사람들이 모두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이라면, 자본주의적 업적 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자본주의적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교회가 놓여 있는 세상을 자본주의적 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열심히 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제도화하기 위한 노력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맺음말

 한국 교회를 자본주의적 포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그러나 꼭 해야 할 일이다. 교회가 자본주의에 포박되어 있으면 교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맘몬을 섬기게 된다. 축적을 위해 작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수탈했던 파라오의 체제로부터 그 작은 사람들을 해방시키신 야훼는 축적과 억압과 수탈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작은 사람들을 해방시키셨다. 야훼는 그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기로 작정하고 그 사람들은 야훼를 주로 섬기기로 작정했다. 우리는 바로 이 계약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전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기억이 예수 운동을 관통하고 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은 사람들의 해방 실천을 통하여 전승되고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맘몬을 섬길 수 없다. 맘몬을 섬기는 산당을 불사르고,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나서야 한다.
 나는 그 일을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몇 가지 제시하였다. 교회의 종교적 사회화 과정에 주목해서 자본주의적 담론을 비판하고 대항담론을 형성하는 일, 교회 재정 운용의 자본주의적 강박을 해소하는 일, 자본주의적 강박으로부터 세상을 해방시키는 데 동참하는 일이 그것이다. 더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교회를 자본주의적 포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더 연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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