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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3 (19:59) from 221.158.115.236' of 221.158.115.236' Article Number :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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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와 치유 - 상담과 사회윤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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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와 치유
- 상담과 사회윤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강원돈 (사회윤리/한신대 교수)

 오늘 한국기독교상담심리학회의 초청을 받아 기조강연을 맡게 되어 한없이 기쁩니다. 저를 초청하여 주신 학회장과 총무, 그리고 임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처음 상담과 사회윤리를 연계하는 강연을 해 달라는 학회 총무의 제안을 받았을 때, 제가 과연 그러한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염려하여 며칠 동안 말미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숙고하면서 상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삶이 정신적 차원과 육체적 차원을 가지고 있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적 차원을 갖고 있고, 바로 이러한 다차원적인 인간의 삶이 사회윤리의 관심 영역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상담학과 사회윤리는 문제에 접근하는 관점과 방법이 다르겠지만, 사람이 삶의 다양한 차원과 맥락에서 겪는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증진하고 통전적인 삶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도우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통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 끝에 저는 상담학과 사회윤리학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서로 배울 수 있는 논제를 정하고자 했고, 그것이 바로 트라우마와 치유입니다. 트라우마는 외부로부터 느닷없이 침입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처럼 꿰뚫어 이제까지 유지해 왔던 자아의 통전성을 깨뜨리고 언어와 기억의 질서를 뒤흔들고 일상적인 삶의 틀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드는 충격적인 사태를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트라우마는 몸과 마음에 새겨져 의식과 의지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채 계기가 주어질 때마다 느닷없이 재현되어 당사자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다시 겪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가리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태와 징후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몸과 마음의 건강을 누리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트라우마가 외부로부터 침입하여 인간의 방어기능을 무능력하게 만든다는 것인데, 바로 이 트라우마의 외부성이 심리학을 넘어서서 사회과학적 분석과 설명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고, 사회윤리학이 개입해야 할 영역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저는 상담학과 사회윤리학이 서로 분기되고 수렴되는 지점들을 살피면서 상담학자들과 사회윤리학자들이 생산적인 대화와 협력을 할 수 있는 길을 넓히는 데 조금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인간의 심리 상태에 대한 관심

 그 동안 저는 현상의 총체적인 변경을 위해 사회과학적 현실분석과 신학적 성찰을 서로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제 신학을 정립해 왔고, 그 신학에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현실 문제 해결의 심리학적 축소주의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상담학과 사회윤리학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 상담학의 바탕이 되는 심리학을 논의하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심리학적 축소주의에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이지만, 그것은 현실의 복잡한 문제 연관으로부터 인간의 심리를 따로 떼어내어 살필 수 있기나 하는 것처럼 여기는 어떤 태도를 경계한다는 뜻이지, 인간의 심리나 그 건강함에 관심이 없다든지 그러한 심리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마련하는 데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기독교 사회윤리학을 연구해 오는 동안에 심리학은 저에게 많은 관심을 끌었고 도전적인 이슈들을 던져 주었습니다.
 제가 심리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을 연구할 때 주어졌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창시자들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W. 아도르노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서로 결합시켜 자본주의 문명 비판의 관점과 방법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철학자들은 인간의 문화가 충동을 적절하게 억압함으로써 성립되었다는 것을 밝혀낸 프로이트의 분석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면서 심리분석을 사회사적이고 정치사회학적인 맥락에서 새로 읽어내고자 하였습니다. 호르크하이머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이성의 일식』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인간 본성에 대한 억압이 외부를 향한 공격성을 증대시키고 마침내 자연에 대한 광범위한 억압과 착취를 가져와 문명이 자연의 반란에 직면할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 야만적인 파시즘의 대두와 생태학적 위기를 인간의 내적 자연에 대한 억압에 연결시켜 해석한 호르크하이머의 관점은 심리학과 사회과학을 서로 연계시키는 훌륭한 모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사고 모델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전제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의 가상을 깨뜨리고, 인간의 심리 현상을 사회적인 문맥에서 살펴야 한다는 통찰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우스의 한 일화를 해석하면서 자본주의 문명의 억압성을 폭로하는 탁월한 기법을 선보입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과 함께 배를 타고 사이렌이 노래를 부르는 해협을 지나갑니다. 사이렌의 노래를 들은 선원들이 물에 뛰어들면 괴물들에게 먹히고 말 것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이 위험한 해협을 빠져나가기 위해 부하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틀어막고 자신의 몸을 마스트에 묶게 한 뒤에 선원들을 지휘하여 사이렌이 노래하는 해협을 무사히 빠져 나갑니다. 이 흥미진진한 일화를 해석하면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사이렌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마스트에 몸을 묶은 오디세우스와 귀를 밀랍으로 막은 선원들의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유혹에 저항하기 위해 본능을 억압하는 인간의 모습이고, 그 모습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을 억압하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합니다. 조금 더 일반적으로 말을 한다면, 사이렌에 저항하는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의 모습은 문명을 형성하기 위해 쾌락을 억압하여야 한다는 문명의 원리를 체화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프로이트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때까지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문명을 고도화하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자본과 기술, 그리고 지식을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 인간의 본능을 필요 이상의 억압 상태, 곧 과잉 억압 상태에 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프로이트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쾌락의 추구를 억압하여야 한다고 했고, 이를 가리켜 현실원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잉억압은 생명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것을 훨씬 초과하는 억압입니다. 바로 이 과잉억압을 정상적인 억압인 양 제도화하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이기에 자본주의 문명은 내적인 공격성이 끊임없이 증대하는 불안정한 체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자본주의 문명의 불안정성을 날카롭게 파헤치기 위해 사용한 방법론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에 의해 더 날카롭게 가다듬어졌고, 마르쿠제는 과잉억압에 바탕을 둔 문명의 원칙을 업적원칙이라고 지칭한 바 있습니다. 마르쿠제는 과잉억압이 제도화된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에로스와 문명이 통일되는 대안적인 세상을 꿈꾸었고, 현대의 문명 능력에 기초하여 그러한 세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세운 바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더 연구하면서 저는 심리학과 사회과학을 결합하여 해방적인 사회과학을 구상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가졌고, 그 때문에 위르겐 하버마스의 학문이론을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젊은 하버마스가 추구한 해방적인 사회과학의 모델은 이론과 실천을 통일하는 정신분석학이었습니다. 무의식의 영역으로 쫓겨난 것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도래로 인한 징후로부터의 해방, 곧 지식과 해방실천, 이론과 실천이 서로 통일되는 경지에 대한 하버마스적 황홀이 석사학위 논문을 쓰는 젊은 신학도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물론 해방적 사회과학을 정신분석학의 모델에 따라 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석사학위 논문을 쓴 뒤에 곧 떨쳐버리게 되었지만, 심리학과 사회과학의 결합에 대한 관심은 그 이후에도 저를 놓아주지 않는 학문적 관심사들 가운데 하나였고, 최근 몇 년 동안 저로 하여금 라캉, 들뢰즈, 가타리, 지젝 등을 연구하도록 이끌어온 동인이었습니다.

트라우마의 자연사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트라우마는 그것을 겪은 사람들에게 의식과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트라우마적 경험을 반복해서 겪게 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고, 이런 점에서 정신적 장애나 징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노이로제, 히스테리, 불안, 강박, 망상, 분열증 등 정신적 장애나 징후는 내적인 요인들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트라우마는 예외입니다. 트라우마는 인간의 몸과 마음 바깥으로부터 인간에게 느닷없이 꽂힌 충격적 사태이고, 그 본질은 폭력일 것입니다. 트라우마는 그것을 당하는 사람에게 납득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트라우마의 충격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트라우마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트라우마의 경험에 대해 소통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합니다. 그것은 외부의 위협에 더 이상 대응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언어와 기억, 몸과 마음, 의지 등 외부의 위협에 대한 인간의 대응 기제가 전면적으로 붕괴된 상태입니다.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인간의 대응체계가 어떻게 발달하였는가를 자연사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파충류와 포유류가 발생하기 시작한 중생대 이후의 자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의 위협에 접한 생명체는 그 위협에 대응하여 도망치거나 공격적으로 대응하였다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협적인 대상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아예 죽은 것처럼 얼어붙어 꼼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위협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가 도피, 공격, 유화, 부동 등의 반응을 촉발하는 것은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친 인류에게서도 똑같이 관찰됩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트라우마를 촉발하는 외부적 위협의 성격을 일단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파악할 때, 트라우마를 예방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책을 강구할 때 무엇을 고려할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사에서 인류가 접해온 외부의 위협은 다양했습니다. 화산폭발, 해일, 홍수, 가뭄, 독충 등 적대적 자연에 의한 위협, 먹이사슬에서 한정된 자원을 놓고 투쟁하는 종간 경쟁의 위협, 생활영역, 먹거리 획득, 짝짓기 등을 둘러싼 종내 경쟁의 위협, 애착관계와 사회적 관계의 발달 이후에 개체에게 가해지는 발달 외상이나 관계 외상,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갖가지 위험들이 그것입니다.
 인류의 자연사에서 종내 경쟁의 두 가지 양상인 집단 간 경쟁과 집단 내 경쟁은 트라우마의 발생지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집단 간 경쟁은 흔히 전쟁의 양상을 띠곤 하였고, 전투로 인한 살상, 학살, 상해, 신체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 납치와 감금, 학대, 강간, 성폭력 등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고 말로 옮기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을 남기곤 하였습니다. 내전과 테러, 대량살상무기의 발달 등등이 가져오는 위협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집단 내 경쟁은 전쟁과 같은 거대한 폭력 행사를 연출하지는 않지만,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쟁투의 폭력성은 아무리 세련된 양상을 취한다 하더라도 그 강도나 파괴적 효과가 적지 않습니다.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는 폭력과 범죄, 자원의 공정한 배분을 왜곡하는 차별과 배제, 타인을 향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억압과 지배,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폭력 등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가해지는 위협입니다. 그 위협이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애착관계와 사회적 관계의 형성은 인류의 자연사에서 이루어진 위대한 성취이지만, 애착관계와 사회적 관계의 파괴는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두드러진 요인들입니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신뢰감과 안전감을 붕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유아동기에 발생하는 양육자의 상실과 방임과 학대는 그것을 겪은 당사자에게 자존감 결여, 위축, 사회성 결여,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성향, 정서 장애, 성격 장애 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심지어 호르몬 이상이나 해마나 편도체 등 뇌 기관의 발달 장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소속 집단에서 배척, 고립, 거부 등 따돌림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정서적 안정이 깨어지고 우울감에 시달리고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 사람들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발생할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문명의 발달로 인한 위험 요인들의 증가는 인류에게 새로운 양상의 트라우마를 겪게 만듭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인위적인 환경에는 자연 재해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위협 요인들이 있습니다. 도시의 발달과 익명적 개인들 사이의 유대감 상실과 범죄, 공업사회의 발전에서 비롯되는 각종 재해, 자동차, 선박, 항공기 사고, 교각과 건물의 붕괴, 새로운 전염병의 발생과 빠른 확산, 대기오염 등 생태계 파괴, 컴퓨터와 인터넷 확산에 동반되는 프라이버시 침해, 비방과 모욕, 거짓 정보와 왜곡된 정보로 인한 폐해, 급증하는 위험에 대처하는 국가적 차원의 대응 능력의 저하 혹은 결여 등과 같이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우리 시대에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위협들이 등장하였습니다. 그 만큼 예기치 않은 위협으로 인해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자연사에서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위협 요인들의 변화와 증가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요인들을 안다고 해서 트라우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트라우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협 요인들에 대응하거나 반응하는 방식을 깊이 있게 살펴야 합니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위협에 즉각 반응하면서 공포에 빠지게 되고, 그 공포가 신체를 마비시키고 언어 기능을 상실시킵니다. 만일 트라우마로 인해 기절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사에서 파충류가 획득하였던 뇌의 능력, 곧 간뇌의 기능이 활성화되어 심신이 얼어붙어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트라우마를 가리켜 공포에 휩싸여 말을 잃어버리는 상태라고 묘사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언어를 관장하는 대뇌피질이 충격으로 인해 그 기능을 일시적으로 잃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일 것입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해마의 기능이 교란되면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언어와 기억의 장애가 나타나고 마비나 과도한 정서적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은 뇌의 비언어적 영역과 감각-정서 영역이 활성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파충류의 뇌, 곧 뇌간의 반응이 활성화되고, 감각-정서를 관장하는 편도체가 과도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트라우마는 언어와 기억의 중추에 그 흔적을 남기기 이전에 인간의 신체에서 내분비계통을 관장하는 간뇌를 건드리고 언어와 정서 이전의 감각과 정서 영역에 먼저 새겨집니다. 그러한 트라우마의 흔적은 인간의 뇌에서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지만, 제대로 기억되지 않고 언어화되지 않습니다. 트라우마의 흔적은 트라우마 사건의 전모로 남지 않고, 냄새, 맛, 촉각, 이미지 등 트라우마 사건의 파편화된 잔해로 남게 되고, 트라우마가 동반하는 공포, 불안, 공포 등 강렬한 신체적-정서적 형태로 저장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무심코 냄새나 맛이나 촉각이나 이미지를 접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격렬한 공포나 불안이나 고통을 느끼곤 하는 것입니다. 교감신경계와 뇌의 비언어적 영역인 감각-정서 중추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면서 악몽, 플래쉬백(flashback), 무서운 이미지의 엄습, 과도한 신체생리적 반응 등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트라우마 증세가 의식이나 의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발현하는 기제를 파악한다면, 트라우마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와 기억이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다루는 데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구석기 시대는 주목할 만한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인류의 언어 능력과 정신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정신 능력의 현저한 진화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겠지만, 현생 인류가 구석기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복잡한 의사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 효과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의 애착관계와 사회적 관계가 발달하고 감정이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언어의 발달은 사고를 정교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고, 사람들은 시간의 계열에 따라 변화하는 세상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기획하고,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와 정서와 사고의 발달은 생리학적으로는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는 중추인 변연계와 신피질의 발달을 촉진하였고, 문화적으로는 세계의 상징적 구성과 대상의 기술적 지배, 그리고 공감과 협력에 바탕을 둔 사회적 관계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와 정서와 사고의 발달은 트라우마의 경험에도 심원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자신에게 직접 엄습하지 않은 위협을 상상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임한 위협을 목격하고 간접적으로 경험하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언어와 정서와 사고의 발달이 트라우마의 경험에 가져온 변화에 주목한다면, 트라우마를 무의식적인 감각적 반응의 차원만이 아니라 언어와 정서의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안목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전형적인 대응 방법

 트라우마에 대한 자연사적 지식은 트라우마를 다루는 두 가지 전형적인 방법을 창안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이 그 트라우마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소화하여 통합적인 자아를 유지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의식과 의지의 제어를 받지 않은 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트라우마의 충격을 회피하거나 완화하거나 해소하거나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트라우마의 성격과 발현 방식을 고려해 보건대, 이 두 방법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함께 활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에 관해서는 여기 계신 분들이 전문가들이고, 그 기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고 계시기 때문에 제가 긴 말을 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직 진화심리학과 심층심리학에 바탕을 두고 상담학이 전개하는 이론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그러한 상담학 이론이 사회윤리학과 어떤 점에서 수렴하고 어떤 점에서 분기하는가를 말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이 트라우마의 경험을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직시하고 인지해서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전략은 정신분석학의 진단과 치유 전략을 기본 모델로 삼은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인지 치유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지 치유 모델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으로 하여금 납득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트라우마의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하게 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트라우마의 충격을 회피하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망각의 전략을 채택한 사람이, 잊혔지만, 결코 사라진 적이 없는, 트라우마를 되살리게 될 때 그 사람이 받을 몸과 마음의 충격은 헤아릴 길이 없을 것입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상담과 치유에 나서는 분들이 익히 알고 있는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의 단편소설 「아듀」는 트라우마 사건의 재구성에 기반을 둔 인지 치유 모델의 어려움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트라우마 사건의 기억이 되풀이되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 트라우마 사건이 되풀이되는 것은 더더욱 끔직한 일일 것입니다. 냄새나 맛이나 감촉, 혹은 이미지나 장면 등을 무심코 접했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의식과 의지의 제어를 받지 않은 채 트라우마 사건이 되돌아와 뇌 중추와 감각을 활성화시키고, 견딜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실제로 되풀이해서 겪을 수 있다고 하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알고 있는 이상,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건을 되풀이해서 겪지 않도록 하는 전략을 강구하고 기술적 조치를 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트라우마 사건에 대한 기억의 경우에는 그 기억이 되풀이되어도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실제로 위협에 접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그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시점에는 지극히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트라우마 사건이 되돌아오는 경우에는 그러한 인지적 대응 전략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경우에는 트라우마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을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완화시키고 그것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기술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트라우마가 인간의 몸과 마음에 각인하고 새겨놓은 흔적을 삭제해서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바로 그것이 자연사가 인간에게 얹어놓은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트라우마 사건이 되풀이된다고 하더라도, 그 사건을 겪는 사람이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건을 되풀이해서 겪는 사람도 그 나름대로 통합된 자아를 재건하고 일상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습니다. 유·아동기에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몸과 마음이 기형화된 딱한 사람들도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 통합되어 살아가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트라우마 사건과 그 사건이 가져온 엄청난 충격이 그것을 겪은 사람의 삶에서 국지적인 일이었음을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이웃들이 확인하고, 트라우마 사건의 단편들을 모아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 이야기를 그 사람의 생애의 역사 안에 기입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이웃이 나서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사람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환대한다면, 무척 좋은 일일 것입니다. 트라우마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지만, 그 상처를 달래며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공동체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 사건을 자신의 생애의 역사에 기입하는 바로 그 사람이 그 역사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엮어가는 이야기는 그 사람의 삶의 틀을 구성하고 세계를 인지하고 세계에 대응하는 틀을 형성하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 이야기는 끊임없이 해석되고 재구성되어 새로운 이야기로 생성됩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는 트라우마 사건이 재구성되고 기왕의 문맥에서 벗어나 다른 문맥에 배치되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해석될 것입니다. 트라우마 사건은 각 개인의 삶의 역사에서 획을 긋는 사건으로 남아 있겠지만, 그 사건은 삶의 이야기의 줄거리와 맥락들을 무너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트라우마 사건 이후의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치유적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트라우마의 사회적 맥락과 정치적 맥락

 앞에서 저는 트라우마 사건을 다루면서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 짧게 언급했습니다. 공감과 인정, 그리고 공동체적 지원은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언어 능력과 사고 능력, 사회적 능력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간접적으로 겪게 되었는데, 이 간접 트라우마도 각 사람이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겪는 트라우마 못지않게 심각한 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접 트라우마는 한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이 곳곳에 널려 있고 그 위험의 규모와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초(超)위험사회이기 때문에 거대 사고가 가져 오는 트라우마는 개인적-직접적 성격을 넘어서서 집단적-간접적 성격을 강력하게 띠게 되었습니다. 대형 사고에 대한 반복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영상보도는 트라우마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간접 트라우마를 겪는 개인을 대상으로 해서도 반드시 진단과 치유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다룰 때에는 개인적인 차원의 임상조치를 일일이 실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에게는 집단적으로 생활하는 공동체가 안전에 대비하고 있고, 사고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하고, 그러한 안전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확실한 느낌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적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경우에는 반드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위험을 관리하는 최종적인 책임자인 국가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고, 사건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그 이름을 기억하는 공적인 절차와 과정을 진행하여야 합니다. 특히 트라우마 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기억이 공동체의 존속과 안정,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는 효과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위협 요인들에 대한 자연사적 지식으로부터 우리는 이미 집단 간 경쟁과 집단 내 경쟁, 그리고 애착 관계 안에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무수한 위협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전쟁, 학살, 상해, 납치와 감금, 고문, 강간, 차별, 배제, 억압, 수탈, 따돌림, 방임과 학대 등 갖가지 형태와 강도를 갖는 폭력이 그것입니다. 그 폭력이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꽂혀서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고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 트라우마입니다. 개인이 그러한 위협에 대응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아니, 개인은 많은 경우 속절없이 그냥 당한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공동체도 개인이나 집단에 엄습하는 트라우마를 방지하고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갖출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공동체는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의 바깥에 트라우마를 배치하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그 방어의 틀 안에 머물도록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공동체의 방어벽 바깥에 트라우마를 배치하는 것은 공동체를 경제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이지만, 그러한 공동체는 깨뜨러지기 쉬운 유리 그릇 같은 것이 아닐까요?

트라우마를 대하는 사회윤리학자의 관점

 바로 앞에서 던진 삐딱한 질문은 상담학자의 질문이라기보다는 사회윤리학자의 질문일 것입니다. 저는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전체로서 표상하는 관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구성과 기능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라캉의 상징계 이론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에 여기서 그 이론을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 이야기를 계속하는 데 꼭 필요한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간다면, 인간이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기표 아래서 구성되는 상징계 안으로 들어서야 합니다.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근친상간의 욕망을 포기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규칙들과 규범들의 지배를 수용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온갖 규제와 규율이 촘촘하게 엮여 있는 질서의 체계는 아버지를 예외적 존재로 인정하고 나서야 성립되는 세계입니다. 그 아버지는 팔루스를 소유하고 있는 원초적인 아버지이고, 상징계의 법을 초월한 절대적 존재입니다. 이 예외적인 아버지는 근친상간의 금기를 적용받지 않는 자로서 모든 여성들에게 접근하여 무제한적인 성적 희열을 독점합니다. 어머니와 아내와 딸들을 범하는 괴물 같은 그 아버지는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장본인입니다. 그 아버지는 거세를 당하는 대신에 아들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는 아버지의 법으로 원초적 아버지가 불러일으킨 트라우마를 덮어버리고, 그 트라우마가 마치 없는 것처럼 차단하고 나서야 성립한 질서와 규범의 체계입니다. 상징계 안에는 트라우마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되돌아옵니다. 그것은 상징계를 끊임없이 동요시키고 상징계에 틈을 내어 마침내 상징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상징계가 성립하면서 상징계가 포괄하지 못하게 된 것, 마치 상징계의 외부처럼 상징계에 알려지지 않는 것을 가리켜 라캉은 실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라캉은 상징계가 전부가 아니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실재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상징계로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라캉은 유명한 성차의 도식에서 상징계에 매몰된 나머지 상징계를 전체로 보는 주체를 남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전체로 설정되는 상징계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로 배제되는 영역을 여성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여성적인 것은 상징계 안에서 ‘낯선 것’일 수밖에 없고,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징계를 지배하는 전체성의 논리에 균열을 내고 그 틈으로 새로운 것을 실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젖힙니다. 그렇게 해서 여성적인 것은 상징계의 구조와 법에 갇혀 있는 주체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여성적인 것은 상징계의 법을 제정하는 원초적인 아버지, 라캉이 대타자라고 명명했던 바로 그것을 결여하고 있는 주체의 자리에 섬으로써 실재를 향한 문을 여는 것입니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은 문명의 불만을 인지하고 문명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관점과 원칙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상징계를 닫혀 있는 전체로 고집한다면, 인위적인 질서들과 규칙들과 법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배제와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삶의 전망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지배질서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내쫓김으로써 보이지 않게 되고, 언명할 수 없게 되고, 설명할 수 없게 된 실재는 징후로서 출몰할 뿐 그것이 가리키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 해결이 끝없이 지연될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희생양을 끊임없이 불러내고, 그 희생을 포장하는 상징적 장치가 얼마나 매끈하게 만들어지고 견고하게 유지되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었지 않습니까? 오늘의 세계에서 균열과 대립의 현실을 가리고 그 현실이 가져오는 참상의 실재를 보이지 않게 하는 상징적 질서들은 여전히 큰 효과를 발휘하고 지배질서를 강고하게 유지하는 헤게모니 효과를 보여줍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라캉이 언급하고 있는 상징계가 우리가 안주하고자 하는 세계의 이데올로기적인 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이데올로기가 완벽하고 강고한 외양을 띠면 띨수록 그 이데올로기의 표면 바깥으로 안온한 세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은 더 말끔하게 배설될 것입니다. 근대에 등장한 ‘국민’이라는 상징은 계급차별과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트라우마가 마치 현존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게 하고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공동체가 현실적인 세계로 등장하고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유대인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하는 반유대주의가 ‘사회적 적대라는 견딜 수 없는 실재를 은폐하는 실재’라고 개탄한 지젝의 지적은 정곡을 찌르고 있는 분석이라고 할 만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트라우마를 대하는 사회윤리학적 태도를 말하고 싶습니다. 트라우마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실재이기에 언어를 매개로 하여 견고하게 짜인 상징적 질서에서는 ‘낯선 것’으로 여겨지고, 그 낯섬이 가져다주는 견딜 수 없는 불편 때문에 상징적 질서 바깥으로 쫓겨나거나, 아니면 상징적 질서에 적합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마치 포박당한 것처럼 배치됩니다. 저는 트라우마를 쫓아내는 것과 포박하는 것이 모두 생존에 필요한 전략이라고 보지만, 트라우마가 돌아와 우리가 견고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때면, 일단 그것을 그렇게 내버려 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는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그것이 가리키는 문제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해 보자는 뜻입니다. 연인과 만날 것을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병든 어머니를 애처로워하고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장에 가는 사람들, 아니 온갖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이 지하 터널을 달리는 열차 안에서 산 채로 타 죽는 사건을 접하며 겪는 트라우마를 덜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 트라우마를 생생하게 되풀이 경험하면서 그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킨 위험한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더 큰 의미가 있을 법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윤리학은 거칠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윤리학은 견고하게 굳어진 체제와 그 체제를 흠결 없는 것으로 에워싸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의 효과를 분쇄하기 위해 힘을 조직하고 행사하는 전략적 행위에 나서야 하고, 트라우마에 의해 끊임없이 동요하는 세상의 질서를 대안적 질서로 탈바꿈하는 운동을 조직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분명 힘든 일이지만, 자연사가 우리에게 선사한 언어와 정서와 사고의 발달에 힘입어 서로 공감을 나누고 함께 상상하면서 우리가 바라는 세상에 대한 구상을 함께 정교하게 가다듬는 즐거운 과제이기도 합니다.

 강연을 마치며 저는 소설가 한강의 주옥같은 단편 「노랑무늬영원」에서 주인공이 남긴 말을 여러분과 함께 음미하고 싶습니다. 그는 도마뱀의 잘려나간 앞발에서 새로운 앞발이 돋아난 것을 보고 말합니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 안의 죽은 부분을 되살려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부분은 영원히 죽었으므로. 그것을 송두리째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당대의 현실에서 여러 가지 위협요인들로 인해 겪은 트라우마를 ‘내 몸에 박힌 가시’로 묘사하면서 그 가시가 자신의 교만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새롭게 체험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여러 가지 엄청난 계시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두고 이것이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2: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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