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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 생태성, 민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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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 생태성, 민중성

강원돈 (한신대 신학과 교수/민중신학과 사회윤리)

머리말

『농촌과 목회』가 필자에게 준 글의 주제는 “공공성, 생태성, 민중성”이다. 언뜻 보면 서로 연관되지 않는 세 가지 개념들이 하나의 주제에 나열된 듯한 느낌이고, 이 세 개념들을 어떤 방식로든 일관성 있게 엮어서 뭔가를 쓰게 되면 무척 방대한 글이 될 것 같다. 여러 날 궁리를 하면서 이 세 개념들을 관통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그것이 세 가지 개념들로 각기 발현하고 셋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의 이름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생명이 아닐까?
 생명이 관계들의 망상구조를 통하여 그 현실성을 갖는다고 한다면, 생명체가 그 안과 바깥 사이에서 물질과 에너지를 교환하며 자신을 형성하고 발전하는 방식을 고찰하는 생물리학적 고찰로부터 생명의 생태학적 연관과 사회정치적 연관, 그리고 종교학적 연관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다차원적이고 다원적인 관계들을 파악하여야 우리는 생명의 현실성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들의 맥락을 가리고 적절한 맥락에 따라 공공성과 생태성, 그리고 민중성을 논한다면, 생명의 다차원적이고 다원적인 관계들을 바라보는 일관성 있는 안목을 갖고서 이 세 가지 개념들의 연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목을 갖고서 필자는 먼저 생명의 지평에서 공공성과 생태성, 그리고 민중성의 원초적인 의미를 하나하나 음미해 본다. 그 다음, 공공성과 생태성, 그리고 민중성을 서로 연관시켜 생각해 보고, 끝으로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공공성을 어떻게 이루어나갈 수 있을까 전망해 본다.

생명의 지평에서 본 공공성, 생태성, 민중성의 원초적인 의미

 공공성은 흔히 근대에 탄생한 관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뿌리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그 무엇에 의해서도 함부로 건들어지거나 사유화되거나 독점되어서는 안 될 것을 가리키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거룩한 것에 대한 관념 속에 새겨져 있었다. 그 관념의 원초적인 형태인 타부와 토템은 생명 보존의 틀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따로 구별하고 반드시 보존하여야 할 것을 가리켰다. 그러한 관념은 조금 더 발달하여 공동체를 결속하는 의례와 공동체 규약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지켜야 할 규범을 제정할 때 고려하는 원칙을 가리키게 되었다.
 생태성은 생명의 생태학적 연관을 가리키는 개념일 것이다. 생태계는, 생명체이든 무생명체이든, 지구를 이루는 삼라만상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들의 망상구조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생태학적 배치 아래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물질과 에너지의 순환 속에서 생명체들과 무생명체들은 서로 의존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인 동시에 생태학적 배치와 생태학적 관계를 대상화하면서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문명 활동은 생태계로부터 에너지와 물질을 문명계로 끌어들여 변화시키고 그 부산물을 폐기 에너지와 폐기 물질의 형태로 생태계로 내다버리는 과정이다. 이러한 인간의 생태학적 개입은 필연적으로 생태계의 건강성과 안정성을 위협하고 급기야 생태계의 죽음을 가져오기까지 한다. 생태계는 문명 생활의 존립근거이지만, 과도한 문명 생활이 가져올 수 있는 생태계의 죽음은 그 문명 생활의 근거를 붕괴시킬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인간이 생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건들어서는 안 되는 생태학적 개입의 한계를 공개적으로 논해야 할 까닭을 찾아야 할 것이다.
 민중성은 민중이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전개하는 주체임을 가리키는 개념이니 민중주체성이라는 말로 쓰면 더욱더 알기 쉽다. 흔히 민중은 가난한 사람들, 작은 사람들, 정치적으로 억눌리고, 경제적으로 수탈당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소외와 차별과 배제에 직면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니, 민중은 오직 그들을 억누르고, 수탈하고, 소외시키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구조들과 요인들을 제거할 때라야 비로소 그들의 삶을 스스로 형성하고 전개하는 주체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의 현존은 한편으로는 그들을 주체의 자리로부터 밀어내는 힘들과 제도들과 구조들과 요인들이 작용한다는 것을 고발하고 부정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민중의 현존은 바로 그 힘들과 구조들과 제도들과 요인들이 민중의 이름으로 혁파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고 예기하게 한다. 민중은 생명의 정치사회적 연관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이제까지 생명의 지평에서 공공성과 생태성, 그리고 민중성의 원초적 의미를 음미하였지만, 이 세 개념들의 관계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다. 먼저 생태성과 민중성의 관계를 살피기로 하자.

생태성과 민중성의 관계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은 생태성과 민중성을 서로 연관시켜 생각하지 못했고, 둘을 따로 떼어 놓고 고찰하곤 했다. 이러한 경향은 신학이나 철학, 혹은 종교학적 배경을 갖고 생태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데, 근본생태론자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세계관적 태도에 생태계 위기의 뿌리가 있다고 보기에 자연을 파편화하고 대상화하는 세계관을 버리고 생명의 웹을 제대로 보는 생태학적 세계관과 그에 따른 생태학적 윤리를 회복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근본생태론자들의 사고방식은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을 이끌어가기에는 막연하고 추상적이라고 사회생태론자들은 비판한다.
 사회생태론자들은 생태계 위기를 조장한 것이 인류이고, 다른 생명 집단들에서 나타나지 않는 정치적 지배 현상이 유독 인류에게서만 나타난다는 데 주목하였다. 생태계 위기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투영된 것이니, 정치적 지배를 종식시키면 생태계 위기도 아울러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생태론자들은 무정부주의를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고 인류와 생태계의 상생을 이루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생태론자들은 생태계 문제와 정치 문제를 서로 연관지어 생각하고 무정부주의적 실천을 구상하는 데까지 나아갔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은 매우 피상적이었다. 정치적 지배가 무엇을 매개로 해서 나타나고 강화되는가를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상적 관점을 갖고서는 생태성과 민중성을 서로 매개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서 필자는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생태계와 경제계의 관계를 설명하고, 경제계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소비를 지배하는 논리를 분석하여 생태성과 민중성의 연관관계를 체계적으로 해명하려고 한다. 이미 생명의 생태학적 연관을 언급하면서 필자는 생명이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개방계 안에서 형성되고 전개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지구 안의 모든 생태계는, 그 규모의 차이를 불문하고, 시스템 안과 밖에서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이 이루어지면서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개방계이다. 인간이 꾸려나가는 문명 활동의 기초는 경제계이고, 그것 역시 개방계이다. 인간은 생태계로부터 에너지와 물질을 경제계로 끌어들여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가장 적합한 형태로 변형한 뒤에 그 부산물을 폐기 에너지와 폐기 물질의 형태로 다시 생태계에 내다 버린다. 에너지와 물질 순환의 관점에서 보면, 생태계로부터 경제계로 투입되는 에너지와 물질의 양은 경제계로부터 생태계로 배출되는 폐기 에너지와 폐기 물질의 양과 같다. 다만, 투입되는 에너지와 물질의 상태와 배출되는 에너지와 물질의 상태가 다를 뿐이다. 투입 에너지의 엔트로피가 낮다면, 배출 에너지의 엔트로피는 높다. 투입 물질은 응집력이 높지만, 배출 물질은 분산성이 높다. 배출 에너지와 배출 물질이 생태계에 배출되면, 대기권에는 온실가스가 축적되고, 땅과 강과 호수와 바다에는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위협하는 물질이 축적된다. 만일 생태계로부터 경제계로 투입되는 에너지와 물질의 양이 많아지면, 경제계로부터 생태계로 배출되는 폐기 에너지와 폐기 물질의 양이 늘어날 것이고,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은 급속히 악화된다. 지구는 열지옥에 떨어지고 생태계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서로 맞물려 돌아간 지난 몇 십 년 동안 인류는 이미 묵시록적 현실을 향해 문턱을 넘어가고 있다.
 대량생산이 대량소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대량소비를 탓하며 소비 욕망을 자발적으로 줄이라고 권고하지만, 그러한 가르침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대량생산으로 치닫고 대량소비를 부추긴다고 말하는 것이 바른 진단이다. 자본주의가 생산과잉으로 치닫는 이유는 자본의 축적과 팽창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그것은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의 소유권 제도 아래서 노동이 자본에 포섭되고 자본을 의인화한 기구가 제도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잉여가치를 축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의 축적과 가난의 확산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공황과 전쟁, 식민지 쟁탈과 세계대전 등이 일어났지만, 이를 경험한 20세기의 사회적 자본주의는 소득의 재분배 정책과 사회복지정책을 통하여 생산과잉 조건에서 유발되는 대량생산을 대량소비로 대처하는 방식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사회적 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의 축적과 팽창을 억제하는 기제를 결여하였기 때문에 국가가 대량소비를 유지하기 위하여 급기야 터무니없는 부채를 남발하여 미래 세대가 향유할 부와 생활의 기회를 탕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경제계 안에서 생산과 소비를 지배하는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고, 주로 자본주의 국가의 재정정책과 사회복지정책을 매개로 해서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로 인하여 민중의 가난이 나타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활동에 의해 유예되거나 은폐되고, 생태계 위기가 대규모로 발생하는 것이다. 오직 미래 세대의 부와 생활의 기회를 끌어다가 탕진함으로써만 유예되고 은폐되는 가난과 생태계 위기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사회적 가난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것이 생태계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생태계와 경제계의 관계를 에너지-물질 순환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두 개방계에서 이루어지는 에너지-물질 순환의 폭발적 증가를 자본의 축적과 팽창의 논리에서 포착함으로써 필자는 가난과 생태계 위기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였고, 생태성과 민중성이 서로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유기적 연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논리적으로 입증하였다. 이러한 논리적 연관으로부터 이끌어지는 결론은 민중주체성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생태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은 인간의 노동에서 비롯된 산물이니, 노동하는 인간이 자본의 주인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노동하는 인간이 자본의 주인이 되면, 그는 자본을 활용하여 힘든 노동으로부터 벗어나서 더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향유하는 방안을 찾을 것이고, 생태계와 경제계의 관계를 규율하는 데 자본을 활용하여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유지하면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노동하는 인간은 자신이 생산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먹어치워서는 안 된다. 그는 공동체의 안녕을 유지하고 일하지 못하거나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공동체 기금을 형성하여야 하고, 노동을 인간화하고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저축하여야 한다. 그렇게 저축해서 마련한 자본을 주인답게 쓸모 있게 활용하여 더 인간적이고, 더 사회적이고, 더 생태친화적인 삶을 형성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자본을 의인화한 기구가 축적과 팽창의 논리에 따라 노동하는 인간을 예속하고 수탈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인 조건들을 폐지하려고 나설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민중주체성을 실현하는 길이다. 그리고 오직 민중주체성을 회복하여 자본의 축적과 팽창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경우에만 생태계 보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생태계 보전의 권리

 민중주체성의 회복이 생태계 보전의 전제가 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생태성과 민중성이 언제나 서로 행복한 결합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곳곳에서 원전 폐기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원자력발전산업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원전폐기 정책에 저항하면서 민중의 생존권을 내세우는 경우를 보면, 생태성과 민중성이 언제나 같이 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회적 가난이 만연한 곳에서는 생태계 보전에 관한 관심이 적고, 생태계 보전을 위한 비용을 감당할 여력도 없다. 생태성과 민중성은 어찌 보면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생태계 보전의 권리와 민중생존의 권리를 서로 구별하고, 그 권리들을 주장하는 주체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민중생존의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들은 결사의 자유에 따라 정당들, 사회단체들, 시민단체들로 구성될 수 있다. 그런데 생태계의 권리를 주장한다고 해도, 그 권리를 과연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부터 문제이고, 설사 그 권리를 인정한다고 해도 누가 그 권리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를 따져야 한다.
 이 까다로운 문제는 근대 이후로 국가에 의해 보호되는 권리들이 어떻게 확대되어 왔는가를 살피면서 풀어야 할 것이다. 근대 시민혁명에 의해 인정된 권리들은 자유권적 성격을 띠었다. 그 권리들은 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에 사람들에게 부여된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국가는 그 권리들을 침해해서는 안 되고 오직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 국가가 바로 자유주의 국가이다.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소유의 권리 등이 자유권의 핵심 내용이었다. 사회적 분화와 계급적 대립이 첨예하게 나타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참정권이 강력하게 요구되고, 아래로부터 강화되는 압력에 밀려서 국가가 사회적 권리들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노동3권과 만인의 행복추구권 등이 사회권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고, 그 권리들을 보장하고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국가가 바로 사회국가의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사회권의 확립과 더불어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근절시키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고, 문화적 권리들이 폭넓게 보장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권리들을 보장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낱말이 따로 널리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는 문화적 다원주의 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류의 생태계 개입에 의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급기야 전면적인 붕괴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태계가 자신을 보존하고 안정성과 건강성을 유지할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 권리를 인정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생태계 안에서 생명체들뿐만 아니라 들판과 호수와 강과 숲과 바위와 산과 산맥 등등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지킬 권리들을 인정하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권리들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적극적으로 보호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생태계와 그것을 구성하는 생명체들과 무생물체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주체가 국가라면, 그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와 사회국가와 문화적 다원주의 국가를 넘어서는 국가일 것이고 필자는 그 국가를 자연국가라고 지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국가는 헌법에 생태계의 권리과 그 권리 보장의 주체를 명시함으로써 성립될 것이다. 자연국가의 헌법은 생태계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생태계 보전을 위해 인간의 과도한 개입을 규제하는 근거를 마련하고,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에 관련된 권리 목록들을 작성하고, 그 권리들을 주장하는 주체를 구성하는 원칙들을 밝혀야 한다.
 이러한 자연국가로 가는 도상에서는 생태계의 권리를 옹호하는 선도 단체들이 결성되어 시민사회의 지지를 받고 국가와 협치의 길로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단체들은 개헌 발의와 개헌 운동을 통해 자연국가를 탄생시키는 주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도 단체들은 자칫 생태계의 권리를 배타적으로 주장하여, 생명의 다차원적이고 다원적인 연관을 놓치고, 생태성과 민중성을 서로 결합시키는 핵심적인 작업을 소홀히 할 수도 있다. 흔히들 생태계 위기는 계급, 인종, 성별, 연령, 지역 등의 차이를 초과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관련되는 사안이라고 말하면서 생태계 보전 운동의 보편주의를 앞세우기 쉬운데, 생태계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은 생명의 생태학적 연관과 정치사회적 연관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생태계 보전 운동과 노동해방 운동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체제에서는 생태성과 민중성은 고도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공공성을 향하여

 앞에서 필자는 생명의 지평에서 공공성의 원초적인 의미를 간략하게 살핀 바 있지만, 아래서는 공공성 개념을 조금 더 넓은 맥락에서 검토하고,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공공성을 실현하는 방안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히브리 전통에서 공공성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 아래 모인 사람들, 곧 ‘이스라엘 온 회중’이 권력의 독점을 억제하고 땅을 위시한 생활수단의 독점과 사유화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추첨에 의해 지도자를 추대하고 그 역할을 민의 수렴, 재판, 일시적인 의용군 지휘 등에 한정하여 전제정치를 억제하는 정치제도, 대가족 단위로 땅을 경작하고 세습하는 권리를 인정할 뿐 처분권을 인정하지 않는 토지제도 등은 히브리적 공공성의 발현 방식이었다. 이러한 공공성이 무너져 전제정치와 대토지소유가 나타나 민중의 생존권이 위기에 처하자 예언자들이 이에 저항하고, 그 전통을 이어서 로마 제국 체제에서 예수의 민중해방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
 그리스-로마 전통에서 공공성은 오직 노동의 의무로부터 벗어난 자유민 남성들만의 참여를 전제했고, 이 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의 참여를 강조하는 히브리 전통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 공화정에서 자유가 공공성의 기반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정은 자유민의 공화정이었고, 자유는 시민들이 공적인 담론에 참여하여 공동체의 관심사를 함께 심의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에 스스로 따르게 하는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자유민들은 귀족의 전제로부터 자유를 지키고,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여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였다. 공화주의 전통에 대한 현대적 해석에서 시민들의 참여와 공론 형성과 자치의 근거인 자유는 국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의미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임의적 지배로부터의 자유라는 적극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타인의 임의적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할 때, 비로소 사회를 가로 지르는 다양한 억압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를 구상하는 담론이 활성화될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공공성이 공개성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을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공적인 일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든지 자신의 견해와 그 견해를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공개적으로 조리 있게 주장하고 그 주장의 설득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그 주장을 정당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개성이 공적인 심의와 의결의 요건이라는 것은 이성의 공적인 사용을 강조한 임마누엘 칸트 이래로 현대 담론이론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관철되는 논리이다. 공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공개성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시민단체, 사회단체, 정당, 행정부 정책 협의회, 의회 등 공공성 의제를 다루는 모든 담론 과정들과 심급들에서 존중되어야 할 원칙이다.
 그런데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적인 일에 관한 공개적인 논의에 참여하여 개인적인 의견이나 조직화된 의견을 제시하고 함께 결정하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옳은 이야기이지만, 그것만 갖고서는 사회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고, 생태계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사회적 공공성과 생태학적 공공성을 실현하기에는 미흡하다. 이와 관련해서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크게 보아 세 가지이다.
 첫째, 성원권, 대표권, 지위, 재산, 교육, 의료, 사회적 사귐 등 인간의 사회적 생활에 필요한 기본재화들의 분배에 대한 결정에 직접 영향을 받고 그 결정에 종속되는 모든 사람들은 그 결정이 일어나는 과정에 참여하여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공화주의 전통에 따라서 필자는 이를 동등한 참여의 원칙이라고 규정한다. 사회적 기본재화들의 배분에 대한 결정에 종속되는 모든 사람들이 그 결정과정에 참여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지만, 이제까지 제대로 해결된 바 없는 문제이다. 사회적 가치의 배분이나 노동시장 정책, 기업 차원의 경제정책과 인사정책 등등의 영역에서 이해당사자들의 동등한 참여는 거의 보장되어 있지 않다. 거기서는 자본의 독재 혹은 기업 독재 같은 자의적 지배가 일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이슈들에 관련된 결정들이 내려지는 과정들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어 다른 사람들이 내린 결정들에 타율적으로 종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자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자신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민중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둘째, 사회정치적 맥락을 중시하면서 공공성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공적인 논의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회집단에 속해 있고, 사회집단은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 곧 사회구조에 의해 분화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사회구조는 ‘권력의 과정, 자원의 배분, 담론의 헤게모니’를 결정짓는다. 그 사회구조 안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집단과 불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집단이 형성되고 그들 사이에서는 지속적이고 불공정한 지배와 억압의 관계가 성립된다. 이러한 사회학적 현실을 무시하는 공공성 담론은 편협하고 일방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사회집단들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관점들과 입장들과 경험들이 반영되는 조건 아래서 공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절차가 마련되어야 한다.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억압과 차별과 불평등을 지적할 수 있는 집단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주변화되고 차별당하고 배제되고 억눌리고 삶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사회집단의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본격적으로 비판된다. 이러한 폭로와 비판이 활성화될 때, 비로소 더 많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사회변화가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변화를 촉진하는 공론은 사회집단적으로 차별화된 관점을 수용할 때 활성화될 것이고, 그러한 공론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적 공공성이 윤곽을 갖추게 된다. 이 맥락에서 필자는 사회적 공론이 주변화되고 차별당하고 배제되고 억눌리고 생활의 기회를 빼앗기는 사람들, 곧 민중을 우선적으로 편드는 당파성의 원칙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민중에 대한 당파성은 사회적 공공성을 더 많이 실현하고자 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원칙이다. 만일 민중의 관점들과 입장들과 경험들과 권익들을 무시하는 정치적 결정과 그에 바탕을 둔 입법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민중은 그렇게 제정된 법률들에 바탕을 둔 제도들에 저항할 것이다. 제도들에 대한 불만과 불평은 한 동안 사회 저변으로 스며들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임계점을 지나면 저항의 잠재력은 정치적 의사결정의 틀을 근본적으로 변경시키고 기존체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운동으로 폭발할 것이다.
 셋째, 사회적 공공성은 생태학적 공공성과 맞물려야 한다. 생태학적 공공성은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개적인 논의와 모든 사람들의 동등한 참여, 민중을 우선적으로 편드는 일에 더해서 생태계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 권리를 법적으로 위임받은 단체들이 공론의 장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필자는 생태계의 권리 인정의 원칙을 공공성 실현의 셋째 원칙으로 부각시키고 싶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는 생태학적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행 국가체제를 자연국가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어느 정도 논의하였으므로 더 이상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필자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개적인 토론을 통하여 공공성을 실현하는 것을 옹호하지만, 오늘의 사회적 분열과 생태학적 위기를 함께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의 동등한 참여의 원칙, 민중 당파성의 원칙, 생태계 권리 인정의 원칙 등 세 가지 원칙들에 충실하게 공론이 전개되어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공공성을 실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맺음말

 필자는 『농촌과 목회』가 던진 공공성, 생태성, 민중성이라는 세 가지 화두를 서로 연관시켜서 사회적이고 생태학적 공공성을 실현하는 길을 모색해 보았다.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공공성을 최대한 실현하는 체제는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일 것이다.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는 자유주의 국가의 소유권 제도에 의해 강고하게 보장되는 노동의 자본 포섭을 해체하여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본의 주인이 되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이고 생태친화적인 방식으로 경제 활동을 조직하여 생산과 소비의 거시 균형을 이루고,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지키면서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이다.
 필자는 『농촌과 목회』의 독자들이 농촌 현장 경험에 바탕을 두고 민중적 당파성을 갖고서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공공성을 더 많이 실현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인간친화적이고 사회친화적이고 생태친화적인 세상을 만드는 일을 활발하게 논의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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