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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와 현실주의 -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적 평화이론에 대한 재검토에 근거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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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와 현실주의
-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적 평화이론에 대한 재검토에 근거하여

강원돈 (한신대학교 신학부 교수/사회윤리)

I. 머리말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오래된 질문은 여전히 절박한 질문으로 남아 있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각도에서 추구되어 왔다. 1980년대 중반 이래 자주적인 민족대단결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를 수립하고 통일을 성취하자는 논의가 강력하게 대두되었지만, 이러한 민중적 평화·통일 담론을 뒷받침하는 세력은 우리 사회에서 크게 약화되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영향을 주는 권력 변수들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힘의 균형에 근거한 현실주의적인 안보담론에 쏠리는 경향이 여전히 강하다.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적대적인 세력들 사이에는 권력 균형을 이룰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은 적대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여 평화관계를 구축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담론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러한 평화 담론은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최근에 이북은 이남과 미국을 향해 한반도 비핵화와 이북 체제보장을 동시에 추진하자고 제안하여 한반도 평화 구축에 관한 논의가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북의 핵무장은 199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최근에 이북은 다수의 핵폭탄을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핵폭탄을 미국 본토까지 운반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도 개발하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북의 핵무장은 재래식 전력을 갖고서는 체제 안보를 군사적으로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해진 군사·정치적 전략이었다. 남북전쟁 이후에 미국이 취한 집요한 대북봉쇄와 안보 위협에 대항해온 이북은 미국을 압박하여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전략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미국이 북미관계 재정립에 관심을 갖고 관여할 수 있도록 압박하기 위해 힘을 구축하는 현실주의적 전략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은 이북의 전략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그 동안 이북에 대해 취해 왔던 태도를 되돌아보면 획기적인 사태이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대북 봉쇄 정책과 적대시 정책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것은 냉전체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냉전체제는 미국과 소련이 모두 핵무장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권력 균형을 유지하여 각각 체제 안보를 유지하는 현실주의적인 전략의 산물이었다. 미국은 한반도 남북에 구축된 견고한 분단체제를 활용하여 한반도 전역에 강력한 군사·정치적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대북, 대소, 대중 봉쇄망을 구축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하고, 소련에 대한 힘의 우위를 강력하게 추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대소 포위망을 견고하게 하였고, 그 일환으로 대북 적대시 정책을 강화했다. 미국의 군비 확장에 대응할 수 없었던 소련이 붕괴되고,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잇따라 무너져 세계적 수준에서 냉전체제가 와해된 이후에도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은 종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북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여전히 견고한 사회주의 국가로 남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 세계적인 단일 패권국가로서 군사력 증강의 현실주의 전략을 추구할 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미국의 적들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그 적들에 ‘악의 축’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미국이 마치 악을 제거하고 선을 실현해야 할 세계사적 사명을 갖고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그것은 군사·정치적 패권 추구를 감추는 정치적 신학의 화법에 지나지 않는다. 냉전체제가 종식된 이후에 이북은 미국에 의해 ‘불량국가’나 ‘악의 축’으로 명명되었고, 가혹한 적대 정책과 봉쇄 정책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북미 정상회담에서 이북의 비핵화와 미국의 이북 체제보장을 연계하는 합의가 도출된 것은 놀라운 일임이 틀림없다.
 권력 균형이나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두고 안보와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현실주의 전략은 한반도 평화 수립에 기여할 수 있을까? 기여한다면, 그것은 충분하고 필요한 만큼의 기여일까? 그보다 더 적절한 대안은 없을까? 기독교 사회윤리적 관점에서 이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해 필자는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1892-1971)의 현실주의적인 평화이론을 분석하고 그 한계와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니버는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미국이 파시즘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도록 촉구하고 냉전체제에서 권력 균형에 바탕을 둔 현실주의적인 군사·정치 전략을 추구하도록 강력하게 주장하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매우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다. 니버의 현실주의 정치이론과 평화이론은 냉전체제가 한창이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어서 냉전 체제가 해체된 오늘의 세계 상황에 맞지 않는 측면이 분명히 있으나 그의 현실주의는 세계적 패권국가인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을 만큼 고전적인 프레임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 홍수원 옮김(서울: 랜덤하우스, 2006), 265.

 아래서 필자는 우선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적 평화이론을 분석하고 그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한 뒤에, 한반도 평화 체제를 뒷받침하는 평화주의 담론의 문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적 평화이론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는 네 가지 점에서 깊이 들여다 볼만한 가치가 있다. 첫째, 그는 인간의 본성과 역사에 대한 깊은 신학적 통찰에 근거하여 권력과 권력정치에 대한 현실주의적 접근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로부터 권력 균형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옹호하는 입장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니버의 통찰은 그것에 대한 찬반을 떠나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둘째,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리 잡은 냉전체제를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타협 없는 대립으로 성격화하고, 미국의 지도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신학적으로 제시했다. 니버의 반공주의는 미국의 패권 추구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프레임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비록 냉전체제가 해체되었다 하더라도, 패권 추구를 정당화하는 신학적 논리 구성은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 문제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셋째, 니버는 세계 정부의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권력 균형에 근거한 현실주의적 평화론을 전개하였고, 미소 쌍방이 핵무장을 하고 있는 조건 아래서 평화공존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다.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 핵무기를 앞세운 공포의 균형에 바탕을 둔 평화공존론은 이미 낡은 프레임이 되었지만, 현실주의적인 군사·정치 전략은 여전히 국가간 관계를 규율하는 유력한 방책이기에 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넷째, 니버는 자기의(自己義)에 빠지곤 하였던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를 지적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급부상한 미국이 세계적 차원에서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할 것인가를 조언했다. 이러한 니버의 조안은 미국이 마치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미국의 적을 ‘악’으로 규정하는 오만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면 아래서는 위에서 말한 네 가지 논점을 차례차례 살피기로 한다.

1. 권력정치와 민주주의

 라인홀드 니버는 개인의 삶과 공동체 생활에서 권력의 집요함과 권력 행사의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이를 신학과 기독교윤리학의 핵심 문제로 제기했다. 그는 권력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그러한 권력 본질론은 사회와 정치에서 나타나는 권력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의적인 지배를 위한 폭력 행사에 맞선 대항 폭력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파악할 수 없게 한다. Reinhold Niebuh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New York: Charles Scriber’s Son, 1932), 179.
권력은 생명의 한 표현이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힘이고, 타인의 의지를 꺾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지배의 능력이다. 니버의 권력 개념에 대해서는 Ronald H. Stone, Reinhold Niebuhr: prophet to politicians(Nashville: Abingdon Press, 1972), 특히 176-180을 보라.
이러한 권력의 쓰임새와 그 효과를 놓고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의적 지배를 위한 폭력이다.
 니버는 자의적 지배를 위한 폭력이 인간 본성의 깊은 뿌리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인간은 피조물이지만, 독특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 당시 독일에서 발전한 철학적 인간학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니버는 인간의 자기초월 능력에 주목하였고,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배 욕망의 원천이 된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여 자기 바깥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정신 능력으로 인하여 세계개방성과 자유를 향유하는 존재이지만, 그 정신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물의 유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시나브로 무한성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 보여주는 패러독스이다.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가당치 않은 욕망은 블안을 조성하지만, 인간은 그 불안을 불식하기 위하여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둔갑시켜 자신의 판단을 만물의 척도로 내세우는 허세를 부리고,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관철시켜 타인을 지배하고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기심에 포획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니버는 인간의 이기심이 권력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1: Human Nature(New York: Charles Scriber’s Son, 1941), 179. 인간의 오만이 권력의 오만, 지적 오만, 도덕적 오만, 종교적 오만으로 나타난다는 니버의 분석은 매우 예리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의 뿌리로 지적한 ‘교만’이 라인홀드 니버에게서는 ‘자기주장’으로 포착되고, 그 자기주장이 자기신격화와 지배로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신학적 인간학의 틀에서 권력 현상과 인간의 본성을 연계시켜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이전에도 니버는 권력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바 있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그는 이기심이 개인과 공동체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서로 구별했다. 개인의 경우, 이기심은 교육과 설득을 통하여 제어될 수 있고, 따라서 개인은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러나 집단의 경우에는 다르다. 개인들의 이기심이 서로 엉켜서 집단적으로 발현될 때, 집단적 이기심은 개개인의 양심을 향한 호소나 도덕적 설득을 통해서 통제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성숙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집단적 이기심을 도덕적으로 훈육하여 제어할 수 없기에 비도덕적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집단적 이기심의 발현 형태인 권력 행사와 지배는 오직 그것에 맞서는 권력을 조직하여 권력 균형을 이룰 수 있을 때 비로소 제어될 수 있다. 따라서 니버는 공동체에 선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방법에 호소해서는 안 되고 ‘정치적 방법’ Reinhold Niebuh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24.
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버는 윤리학에 강제력의 요소를 도입하여 개인도덕과는 그 차원과 방법을 달리하는 사회윤리를 제창한 것이다.
 니버는 인간 공동체 안에서 권력 균형에 바탕을 두고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제아무리 진지하게 노력한다고 해도 인간의 역사적 성취는 하나님의 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벽한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 완벽한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형태로 실현되었을 뿐이고, 그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 생활에서도 구현된 바 없고 구현될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존재론적 차이가 있듯이, 하나님 나라와 역사 사이에도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다. 인간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삼고 나아가는 도상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단들을 갖고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세계대전들 사이의 시기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가 처한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세계를 책임 있게 형성하고자 했던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전형적인 예는 조지프 호울즈워스 올드햄(Joseph Houldsworth Oldham, 1874–1969)이 제시한 ‘중간공리’(middle axiom) 구상일 것이다. 올드햄은 ‘책임사회’를 중간공리로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이정표에 불과할 뿐,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올드햄의 중간공리에 대해서는 H.-J. Kosmahl, Ethik in Oekumene und Kirche: Das Problem der "Mittleren Axiome" bei J. H. Oldham und der christlchen Sozialethik(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0), 55-58을 보라. 이러한 사고방식은 라인홀드 니버의 근사치적 윤리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1937년 옥스퍼드 에큐메니컬 협의회에서 행한 「세속 시대의 기독교 교회」라는 강연에서 자신의 근사치적 윤리를 천명했다. Reinhold Niebuhr, “The Christian Church in a Secular Age,” Christianity and Power Politics(New York: Charles Scriber’s Son, 1940), 211.
역사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지 못하듯이, 정의는 사랑을 목표로 하지만, 역사 안에서 사랑을 성취하지는 못한다. 정의는 죄 가운데서 사랑을 근사치적으로 성취할 뿐이고, 그 근사치적 성취조차도 사랑에 의해 부정되고 심판된다. Reinhold Niebuhr, An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35), 36;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2: Human Destiny(New York: Charles Scriber’s Son, 1943), 69, 246f.
니버는 사랑이 정의의 완성인 동시에 정의에 대한 심판이라는 명제를 내세움으로써 사랑을 지향하지 않는 정의의 추구가 갖는 위험성에 경종을 울렸다. 니버는 근사치적 윤리의 관점에서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토피아주의를 경계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질서한 세상을 어찌해 볼 길이 없다고 보는 비관주의적 태도도 물리쳤다. 양심과 이성에 호소하면서 윤리적 완벽주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입장을 감상주의로 규정하여 단호하게 거부하였고, 현상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농성하는 은둔적 고립주의도 배격했다. 니버는 인간의 역사적 성취가 상대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정의와 사랑의 관계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전진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니버의 입장은 전망을 갖는 현실주의로 성격화될 수 있을 것이다.
 루즈벨트의 사회국가 실험에 따라 노동조합을 통해 결집된 노동자들의 권력이 자본가들의 권력과 균형을 이루면서 계급타협이 이루어지고 미국 민주주의가 내실화되면서 니버는 초기의 급진주의적 성향을 버렸다. 니버는 디트로이트에서 목회를 하던 기간에 포드주의에 맞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대항 폭력의 조직을 옹호하였지만,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경험하면서 미국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변혁하려는 노선에서 이탈했다. 그는 공동체의 유기적 질서와 전통을 중시하고 상식과 경험을 존중하는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고, 민주주의적 질서 안에서 세력간 타협에 바탕을 둔 점진적 개혁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에서 니버는 “정의를 향한 인간의 능력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부정의로 기우는 인간의 경향이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Reinhold Niebuhr, 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New York: Charles Scriber’s Son, 1944), 13.
고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집요한 권력 충동을 인식한 니버는 오직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만이 정의의 가능 조건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밖에 없다고 보았다. 니버는 국가 권력에 의해 침해되지 않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 피지배자들의 동의에 바탕을 둔 정부의 수립,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 상식과 경험에 근거한 실용주의 등을 토대로 할 때에만 건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에 대한 신학적 확신을 갖고서 니버는 무정부주의와 전제의 위협에 노출된 당대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전투적인 사상가로 등장하였다.

2. 공산주의 비판

 사회주의적인 급진 노선으로부터 민주주의적인 개혁 노선으로 선회한 니버는 맑스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강화했다. 니버는 산업사회가 발전하면서 사회적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을 불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산업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극복하려는 맑스주의적 기획이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니버는 공산주의 혁명 과정과 세계의 공산화 전략에서 서구 민주주의와 문명을 파괴하는 재앙적인 요소들을 보며 반공주의로 돌아섰고, 이를 인간의 본성과 역사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근거하여 정교하게 전개했다. 그 논거는 대략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공산주의는 사유재산 제도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보고 이를 철폐하면 역사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니버는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 직면하는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 보았다. 사유재산 제도는 산업사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 한 문제일 뿐이고,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역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유재산 철폐는 인간과 개인을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으로 해방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국가의 노예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형성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근거 없이 자유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Reinhold Niebuhr, 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 98f., 115f.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는 사유재산 철폐를 통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져 있다. Reinhold Niebuhr, Christian Realism and Political Problems(New York: Charles Scriber’s Son, 1953), 46.

 둘째, 공산주의자들은 사회 계급들이 이데올로기적 오염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은 예외라고 주장했다. Reinhold Niebuhr, Christian Realism and Political Problems, 78ff.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이데올로기적 오염에서 벗어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인간의 이성이 권력의지의 하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는 니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독단적인 주장이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마치 하나님처럼 진리의 척도를 장악하고 있기나 한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교만한 주장이다. 이러한 독단과 허세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독재를 정당화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메시아주의를 등장시킨다. 이 점에서 니버는 공산주의가 일종의 종교적 성격을 띤다고 진단했다.
 셋째,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혁명의 주체라고 주장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지도하는 당이 권력을 독점하고 국가기구와 경제기구를 지배하는 전일적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견제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전제 체제이다. Reinhold Niebuhr, The Structure of Nations and Empires(New York: Charles Scriber’s Son, 1959), 27.
이 때문에 니버는 공산주의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넷째, 니버는 공산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적에 대한 증오심을 증폭시키고 무자비한 혁명 과정을 전개했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당의 무오류성 신화에 사로잡혀 당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당의 방침을 거역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고, 사회주의 사회의 사상적 통일이 금과옥조로 여겨졌다. Reinhold Niebuhr, Christian Realism and Political Problems, 38ff.
사회주의 사회의 사상적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은 세뇌를 일삼고 전체주의적인 경찰국가 체제를 구축했다. 이로써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가 질식되었고,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개인과 인간의 권리가 허용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급속하게 구축되었던 냉전체제에서 니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이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 진영에 대항하여 헤게모니 동맹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고, 그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신학적 논거를 제시했다. 니버가 제시한 반공 이데올로기는 아주 오랫동안 이른바 자유 진영에 속한 지식인들과 시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미지를 주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현실주의적인 군사·정치 전략의 옹호

 라인홀드 니버는 한때 평화주의자였지만, 국가들 사이에 질서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세계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평화주의가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히틀러의 주데텐란트 합병을 승인한 1938년 9월 30일의 뮌헨 협정에 접한 뒤에는 현실주의적인 군사·정치 전략을 단호하게 옹호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국제적 무질서를 조장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 휩쓸려 들어간 것을 경험한 니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안정된 국제질서가 구축되기는커녕 파시스트 국가들이 등장하여 국가간 이익 분쟁이 첨예화되는 것을 보고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이 터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이성적 합의와 국가간 계약에 입각하여 평화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입장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감상주의적인 것임이 판명되었다. 니버는 국제적인 무정부상태와 파시스트 독재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선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것이 현실주의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완벽한 사랑을 내세워 히틀러의 전제에 맞서는 전쟁조차 거부하고 평화를 위한 기독교인들의 헌신을 주장하는 평화주의자들이 결국 전제 체제의 희생자들에게 무관심을 조장하고 전제 체제를 무책임하게 용인하는 결과를 빚어낸다고 비난했다. Reinhold Niebuhr, Why the Christian Church is not Pacifist(London: Student Christian Movement Press, 1940), 41.

 니버의 현실주의는 세계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국가는 무정부주의와 전제정치를 피해 민주주의적인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국제관계에서는 국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세계 정부가 수립될 수 없다. 국가는 공동체를 응집시킬 수 있는 유기적 요인들과 인공적 요인들을 갖고 있다. 국가 공동체를 응집시키는 유기적 요인들은 인종적·혈통적 결속력, 언어, 지리적 통합, 전통과 관습의 공유, 공통의 적에 대한 공포 등이고, 인공적 요인들은 헌법과 그것에 근거한 권력 장치들이다. Reinhold Niebuhr, The Structure of Nations and Empires, 149.
니버는 그 어떤 국가도 인공적인 요인들만 갖고서는 수립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공적인 요인들은, 국가 공동체를 응집시키는 유기적 요인들이 이미 있을 때, 그것들을 강화하고 안정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니버는 이러한 생각을 두 가지 명제로 표현했다. 첫째, 정부는 명령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둘째 정부는 공동체 통합에 제한된 효율성을 가질 뿐이다. Reinhold Niebuhr, “The Illusion of World Government,” Christian Realism and Political Problems, 17. 니버는 미국의 건국도 이 두 가지 명제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국은 헌법을 통해 탄생한 국가가 아니라, 뉴잉글랜드에 수립되어 있었던 청교도 공동체들과 대영 독립전쟁의 공통적 경험 등을 매개로 하여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미합중국 헌법은 국가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Reinhold Niebuhr, The Structure of Nations and Empires, 262를 보라.
세계 정부는 국가간 합의나 협약과 같은 인공적 요인들을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을 내적으로 결속시키는 유기적 요인들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세계 정부는 성립될 수 없다. UN도 세계 정부와는 거리가 먼 기구이다. 니버는 NATO, SEATO(동남아시아협약기구), 유럽공동체 등과 같이 특정한 군사적 이익이나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국가들 사이에서 지역 동맹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것은 국가 이익을 중심으로 한 잠정적인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정부를 수립하여 국가간 평화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니버는 국가들 사이의 질서를 결정하는 것은 역학 관계라고 보았고, 국가들 사이에 권력 균형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전쟁이 억제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Reinhold Niebuhr, The Structure of Nations and Empires, 28-31.
이것이 니버의 현실주의이다. 니버의 현실주의는 냉전체제에서 미국이 취한 군사·외교 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그는 한스 요아힘 모르겐타우(Hans Joachim Morgentau), 죠지 프로스트 캐넌(George Frost Kennan) 등과 같이 미 국무부 고문으로 활동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현실주의자 니버는 냉전체제에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서로 적대적이지만 공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미국과 소련이 상대방을 멸절시킬 수 있는 가공할 핵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에 대한 공포와 상대방의 대량살상 무기를 사용 불능 상태에 놓을 수 없다는 인식은 전쟁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Reinhold Niebuhr, The Structure of Nations and Empires, 280f. 니버는 멸절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미국과 소련의 공존을 ‘경쟁적 공존’이라는 개념으로 성격화하기도 했다. Reinhold Niebuhr, “The Nuclear Dilemma,” Chicago Review(Fall 1963), 31.
또 다른 하나는 UN 안전보장이사국에 부여된 거부권 때문이다. Reinhold Niebuhr, The Self and the Drama of History(London: Faber and Faber, 1955), 221ff.
미국은 UN의 틀에서 소련의 군사·정치적 이익을 배척하거나 짓밟는 결정을 주도할 수 없고, 그것은 소련도 미국에 대해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니버는 미국이 소련과 ‘경쟁적 공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소련이 교육의 효과로 인한 의식의 변화나 더 나은 삶에 대한 요구 등과 같은 내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개혁되거나 붕괴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가간 관계를 규율하는 장치가 권력이라고 생각한 니버는 상대 국가들에 의해 주권과 생존권을 침해당하지 않기 위하여 무력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국가를 방어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것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그는 정당전쟁론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는 핵무기와 수소폭탄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는 것에 대해 찬성했고, 핵폭탄을 사용하는 것도 용인했다.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는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고 인명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군사적 방편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는 소련이 재래식 무기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려 미국의 이익을 국지적으로 침해하는 경우에도 전술 핵무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핵무기의 가공할 파괴력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핵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원칙을 천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그러한 선언은 소련에 대항하여 미국의 이익을 방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미국이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Reinhold Niebuhr, “Christian conscience and atomic war,” Christianity and Crisis 10/21(Dec. 11, 1950), 161.

 니버는 냉전체제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국지적인 전쟁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반도 남북전쟁이 그 실례가 되었다.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국지전에 미국이 관여하는 일과 관련하여 니버는 철저한 공리주의적 계산을 할 것을 옹호했다. 그는 미국이 아시아에 개입하여 유럽의 방어 능력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아시아 없이도 별 문제가 없지만, 유럽을 상실하는 것은 미국에 사활적 이익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버는 미국이 한반도를 미국의 방어선 바깥에 놓는 애치슨 선언에 주저 없이 동의했고,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서 속히 발을 빼야 한다고 생각했다.

4. 미국에 필요한 겸손과 인내

 니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 최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에 겸손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논거를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끌어냈다.
 아이러니는 비애나 비극과는 다르다. 자연재해로 인하여 희생당한 사람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 비애라면, 비애는 이유도 없고 그것에 대한 책임도 물을 수도 없다. 선을 위하여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그것은 비극적인 상황이다. 아이러니는 인간의 본성이 발현될 때 나타나는 패러독스를 닮았다. 그것은 사태의 긍정적인 측면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요인들로 인하여 부정적인 측면으로 바뀌는 것을 인지할 때 나타나는 반응이다. 니버는 미국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아이러니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만일 덕이 그 안에 감추어진 결함에 의해 패덕이 된다면, 만일 강함이 강력한 사람이나 국민을 허영에 빠뜨려 약함이 된다면, 만일 안전이 그것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인하여 불안전이 된다면, 만일 지혜가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여 어리석음이 된다면, 이 모든 경우에 아이러니한 상황이 나타난다.” Reinhold Niebuhr, The Irony of American History(New York: Charles Scriber’s Son, 1962), viii.

 청교도 공동체들로부터 건국의 아버지들이 이어받은 섭리적 역사관은 미국이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해야 할 거룩한 사명을 갖고 있다는 인식을 미국인들에게 심어주었다. 미국은 오랫동안 그럴 능력이 없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 최강대국이 된 미국은 비로소 세계사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 니버는 압도적인 기술력과 경제력, 그리고 이에 뒷받침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미국이 세계에 대한 책임을 수행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를 반복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미국은 인간이 역사적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는 서구 문명 특유의 잘못된 환상을 강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고, 미국의 사명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세력들에 히스테리 반응을 보여 곧바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경향을 보이곤 했다. Reinhold Niebuhr, The Self and the Drama of History, 229.
경우에 따라, 미국은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골치 아픈 세계 문제에 등을 돌리는 고립주의 경향을 보이기도 했고, 미국의 역사적 성취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니버는 공산주의자들이 세계적 차원에서 계급투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고립주의와 현실 안주를 경계하고, 적극적 관여정책을 지지했다.
 니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이 공산주의의 도전에 대항해서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군사·정치적 힘을 갖춘 것은 좋은데, 미국의 그 힘을 분산시키거나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는 데서 오는 문제들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의 막강한 힘은 미국을 오만에 빠뜨릴 수 있고, 미국의 이상을 가로막는 세력들을 일거에 제압하고 제거하는 예방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유혹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니버는 미국의 힘이 어디까지나 자제되어야 하고 신중하게 행사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미국에 필요한 것은 겸손과 인내이다. Reinhold Niebuhr, The Irony of American History, 76f.
미국은 자신과 다른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는 나라들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그 국민들의 문화적 특성과 역사적 전통을 존중하는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미국의 힘은 국가 이익보다 더 큰 이익에 이바지하여야 하고, UN 같은 기구를 통해 표현되는 국제 여론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Reinhold Niebuhr, The Irony of American History, 145f.
그러나 니버는 미국이 마지막 순간에 국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5. 소결

 일세를 풍미한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 정치이론과 평화이론은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많은 점에서 시대착오적인 측면을 보이고 있다.
 첫째, 니버가 시도한 민주주의의 신학적 옹호는 그 나름의 설득력을 갖지만, 그 전제가 되는 권력과 집단적 이기심에 대해서는 주의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 권력 현상이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고 보는 한, 그리고 집단적 이기심을 성찰하고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집단에 없다고 보는 한, 권력 현상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니버가 말한 대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인간의 공동체 생활이 복잡하게 발달하는 과정에서 분화되어 형성된 하나의 체제이지 공동체 생활의 전부는 아니다. 이에 관련해서 생활세계와 체제를 개념적으로 구별하고 체제의 논리가 생활세계의 합리성을 침해하는 과정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입장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J. Habermas,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d. 2: Zur Kritik der funktionalistischen Vernunft(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1), 182를 보라.
만일 정치가 인간의 공동체 생활에서 파생된 하부체제라면, 그 하부체제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논리가 분석되고, 그에 따라 권력을 제어하는 규범적 장치와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권력 현실에 대한 분석이 권력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앞서야 한다는 뜻이다.
 권력에 대한 니버의 이해보다 더 심각한 오류는 집단적 성찰 능력에 대한 니버의 편견에서 나타난다. 집단이 자기초월 능력을 결여하고 있어서 집단적 이기심의 포로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니버의 주장은 의사소통공동체의 비판 능력과 성찰 능력을 과소평가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의사소통공동체가 권력과 자본을 제어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지 못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지만, 의사소통공동체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는 권력 행사와 자본의 운용이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위르겐 하버마스, 『사실성과 타당성: 담론적 법이론과 민주적 법치국가 이론』, 한상진/박영도 역(서울: 나남, 2007), 478-511.
의사소통 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인하여 집단지성이 활성화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집단지성에 대해서는 강장묵/이원태, “네트워크와 정치의 관계: 네트워크 정치의 이론적 모색,” 『21세기정치학회보』 20/1(2010), 27-46; 홍태영, “지식과 권력 그리고 지식인: 집단지성 시대 지식인의 새로운 상을 위하여,” 『현대정치연구』 6/1(통권 11)(2013), 205-232를 보라.

 둘째, 니버의 공산주의 비판은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화 과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라기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입각한 일종의 외삽적(外揷的) 이미지 묘사에 가깝다. 스탈린 시대의 교조적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은 소비에트 권력과 결합된 이데올로기적 사유 장치로서 내재적으로 비판되어야 하고,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관철한 스탈린의 방식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특수한 경우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경찰국가가 탄생되고 강화되어간 과정도 역사적으로 체계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분석한다면, 스탈린주의가 보여준 심각한 문제들 때문에 맑스주의와 사회주의가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니버는 러시아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체계적인 분석 작업과 설명 작업을 결여한 채 신학적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논리를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패권 논리를 강력하게 뒷받침한 니버의 반공 논리는 그것의 신학적 성격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셋째, 니버의 현실주의적인 군사·정치 전략이 전제하는 국가와 세계 정부에 대한 이해는 근대 국가와 베스트팔렌 체제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니버가 국가 공동체를 응집시키는 유기적 요인들로 지적한 인종적·혈통적 결속력, 언어, 전통과 관습의 공유 등은 근대적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의 개념에서 널리 거론되는 것이지만, 이러한 논리는 근대의 국민 개념을 근대 이전의 민족체(nationality)에 뒤집어 씌워 국민이 마치 까마득한 옛날부터 영속적 통일체로 존재한 것처럼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한 국민은 근대 이전에는 없었다. 그것은 국민국가를 형성하던 시기에 국민주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고 ‘상상된 공동체’이다.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윤형숙 역(파주: 나남출판, 2006), 23.
국민국가를 응집시키는 ‘유기적’ 요인들로 일컬어지는 것들이 그 본질상 ‘인위적’ 요인들이라고 한다면, 세계 정부를 응집시키는 ‘유기적’ 요인들이 없기 때문에 세계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니버의 견해는 적절하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창설하기 위하여 국민 개념과 국민 의식, 언어와 도량형의 통일, 법률, 헌법 등이 창설되었듯이 세계 정부를 수립하고 응집력을 강화시키는 요소들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니버가 세계 정부의 수립을 불가능한 기획으로 본 것은 국민을 실체화하는 모더니즘적 사고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따진다면, 그가 베스트팔렌 체제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국가를 주권의 담지자로 보고 주권의 수호를 국가의 절대적 과제로 설정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베스트팔렌 체제의 틀에서 사고한 니버는 베스트팔렌 체제를 넘어서는 세계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세계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노력이 현실주의적 감각을 결여한 이상주의와 감상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경계했다. 그러나 지구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대 세계에서는 영토국가의 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영토국가를 넘어서서 지역적 수준과 지구적 수준에서 협치를 조직해야 할 일들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은 낸시 프레이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김원식 옮김(서울: 그린비, 2010), 117ff.에 잘 나타나 있다.
포스트-베스트팔렌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가 된 우리 시대에 니버의 국민국가 중심적인 현실주의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니버는 현실주의적 군사·정치 전략의 틀에서 적대 국가들에 대항하는 군사력을 확보하고 정당전쟁론의 전통에 따라 안보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과 불신에 근거한 현실주의는 끊임없는 군비증강을 추구하면서도 안보에 대한 불안을 불식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안보 딜레마’에 갇히고 만다. 더 중요한 물음은 원자탄과 수소폭탄 등 대량살상 무기가 대량으로 비축되어 있는 세계에서 과연 정당전쟁론이 성립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설사 전쟁 수행의 주체가 합법 정부이고, 방어를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이 있고, 전쟁상태의 종식이라는 전쟁의 목표가 뚜렷하더라도,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이 회복할 수 없는 대량파괴와 대량살상을 결과한다면, 그러한 전쟁이 정당한 전쟁일 수 있을까? 바로 이 점에서 니버의 현실주의는 무책임하다. 이 때문에 현실주의적인 군사·정치 전략은 상호 불신과 적대 관계를 상호 신뢰와 평화 관계로 전환시키는 평화구축 전략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다섯째, 니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 최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이 세계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미국 역사에서 반복되었던 오만과 조급성을 떨쳐 버리고 겸손과 인내의 덕을 갖고서 힘을 행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겸손과 인내는 미국의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해서 세계의 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꼭 필요한 덕이다. 그것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온건한 방책이다. 그러나 미국의 국익이 침해될 때에도 미국이 겸손과 인내의 미덕을 지킬 수 있을까? 그것은 니버 자신도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국의 국익은 누가 결정하고,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여기서 이 까다로운 질문에 대해 충분한 답변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가지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서 국가들 사이에 안정된 관계가 실현되는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는 미국의 이익을 군사·정치적으로 보장하는 체제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이 점에서 성신형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제국주의적 논리에 따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성신형, “라인홀드 니버의 『정치학』에 드러난 “미국정신”에 대한 연구,“ 『기독교사회윤리』 38(2017), 71: “미국이 국제사회를 향해서 그들의 운명과 책임을 역설하면서 군사력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적인 힘의 사용을 포기하지 않는 한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현재 가장 큰 제국으로서 그 역할에 대한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세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국민경제에서 군산복합체가 엄청난 비율을 차지하고 연방정부 예산에서 국방비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전쟁국가가 되었고, 따라서 전쟁의 명분과 정당성을 정교하게 뒷받침하는 담론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강원돈, “신자유주의와 문명충돌론, 그리고 기독교의 역할,” 『지구화 시대의 사회윤리』(서울: 한울아카데미, 2005), 353-356을 보라.


III. 한반도 평화 구상에서 몇 가지 고려할 점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는 한반도 평화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참고할 만할까? 니버의 현실주의는 초기 냉전 시대에 공산진영을 전면적으로 봉쇄하고 공산주의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저개발국들과 개발도상국들에 침투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을 목표로 삼은 트루만 행정부 이래의 적극적인 관여정책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헤게모니 동맹을 구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치열하게 전개하는 시기에 니버는 자신의 정치이론과 평화이론을 갖고서 미국의 군사·외교 전략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그 동안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냉전체제는 해체되었다. 냉전체제 이후에 미국은 유일 최강대국으로서 자신의 패권에 대한 도전을 허용하지 않았고, 전쟁국가로서 전쟁의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의 패권과 전쟁을 뒷받침하는 담론은 더 이상 반공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 자리에는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나 네오콘의 불량국가론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체제의 끝자락에 남아 있다. 한반도 전쟁 이후 남과 북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이북에 대한 미국의 적대시 정책과 봉쇄 정책은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1990년대 초 이래로 이북의 핵무기 개발과 탄도 미사일 개발은 한반도에 전쟁과 평화에 관련된 매우 복잡한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적 군사·정치 담론을 구성하는 여러 내용들은 이러한 상황 변화를 염두에 두고 검토되어야 할 것이고, 한반도 평화 구상을 위해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한반도에 전쟁을 회피하고 평화를 촉진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니버의 현실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역발상의 계기로 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1. 현실주의의 수용 가능한 측면과 수용 불가능한 측면

 라인홀드 니버가 주장하는 현실주의적 군사·정치 전략은 수용될 수 있는 측면도 있고, 수용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첫째, 수용 가능한 측면을 놓고 말하자면, 니버의 현실주의는 국가들 사이의 권력 균형이 최소한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가정은 한반도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이남과 이북의 경제력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이남의 재래식 군사력이 이북의 그것을 압도하자 이북은 핵무기와 같은 비대칭 전력을 확보하여 이에 맞서는 전략을 선택했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이북과 미국의 군사력 격차는 엄청나게 크지만, 이북은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로 미국의 적대시 전략과 봉쇄 전략에 맞서고 있다. 이북이 핵무기 전력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전력을 갖고서 미국의 군사력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도 자신의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서 이북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이북이 1990년 대 초에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은 이북의 핵시설에 대한 정밀한 선제타격을 고려하였지만, 그 방침을 철회하고 말았다.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은 이북의 대남 공격을 촉발시켜 서울을 위시한 수도권과 산업 시설을 초토화시키고, 감당할 수 없는 인적 손실과 물적 손실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북을 ‘악의 축들’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고 이북에 대한 선제공격을 안보지침으로 설정한 조지 부시 2세 행정부의 네오콘도 선택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북의 핵무기 개발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은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에서처럼 약소국이 강대국에 대항해서 군사력의 열세를 만회하고 권력 균형을 추구하고자 하는 현실주의의 특수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둘째, 현실주의의 수용 불가능한 측면을 말한다면, 현실주의적 군사·정치 전략은 상호 불신과 적대관계가 지배적인 국가들 사이에서 ‘안보 딜레마’를 해소하기 어렵고 평화관계를 구축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이북의 핵무기 개발과 특히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은 세계적 패권을 확립하고 강화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시키고자 하는 미국에게는 호기였다.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구축 전략은 적대국가의 미사일 공격 능력을 무력화하고 미국의 공격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어 왔다. 미국이 ‘불량국가’(클린턴 행정부)로, 혹은 ‘악의 축’(부시 행정부)으로 규정한 이북이 쏜 탄도미사일이 미국 본토에 도달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을 둘러싼 논란을 가라앉히고 그 정당성을 강화시켰다.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은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하여 맞대응 조치를 취하게 하여 동아시아 안보 환경은 극도로 악화되기에 이른다.  
 현실주의는 평화관계를 촉진하기 위한 방책으로서는 더더욱 적절하지 못하다. 설사 비대칭 전력을 갖고서 가까스로 군사력 균형을 이룩하여 전쟁을 회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평화관계의 수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대목에서는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를 구별한 요한 갈퉁의 이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소극적 평화는 전쟁이나 폭력행위의 부재를 뜻한다. 그러나 전쟁이나 폭력행위가 없다고 해서 사람들이 평화롭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생하고 상생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법치를 확립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인간의 자기실현의 기회를 보장하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평화가 적극적 평화이다. J. Galtung, Strukturelle Gewalt: Beitrāge zur Friedens- und Konfliktforschung(Reinbek bei Hamburg: Rowohlt, 1982), 100f.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이북을 봉쇄하고 적대시하면서 한반도에서 유지하는 전쟁 없는 상태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특수한 발현형태일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이북이 세계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인민 생활을 향상시켜 복지를 실현하고 사회를 안으로부터 개혁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전면적인 압박 조치는 초강대국 미국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로 여겨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현실주의적 군사·정치 전략의 용인 가능한 측면과 수용 불가능한 측면을 놓고 판단해 보건대, 현실주의적 방책이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이북의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이남이나 미국의 대북 군사 행위를 억지하기 위한 방어용 무기로 활용되는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남이나 미국의 군사력이 이북의 핵무기 공격을 억지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할 경우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도, 현실주의적인 군사·정치 전략은 남북과 북미 사이의 상호불신과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평화관계를 촉진시킬 수 없다. 따라서 이북의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폐기하고 남북과 북미가 평화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현실주의를 넘어서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2. 정의와 평화

 현실주의를 넘어서는 관점에서 평화관계를 촉진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정의를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다. 그렇다면 평화를 맺는 정의는 어떤 정의인가?    정의는 라인홀드 니버에게서도 중요한 주제였다. 그의 정의론이 갖는 특색은 정의를 사랑과 연관시켜 사유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이 세상에서 정의는 사랑의 근사치적 실현이고 사랑은 정의의 역사적 성취를 심판한다고 생각했다. 정의는 더 많은 선과 더 적은 선을 가리고 더 나쁜 악과 덜 나쁜 악을 판별한다. 정의는 더 나쁜 악을 피하고 더 많은 선을 이룩하기 위해서 가능한 수단들을 합리적으로 선택하기 위해 계산한다. 이와 동시에 정의는 세상에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다. 정의의 정신은 사랑의 정신과 다른 것일 수 없다. 바로 그렇기에 정의는 자신의 성취에서 사랑의 부족을 느끼고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니버는 정의를 건너뛰어 사랑으로 직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감상주의’로 보고 이를 극도로 경계했지만, 사랑을 지향하지 않고 정의를 융통성 없이 적용하게 되면 ‘율법주의’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Reinhold Niebuhr, Christian Realism and Political Problems, 109-111.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니버는 정의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인 ‘징벌적 정의’를 논하면서 ‘용서’의 의미를 음미한다. “용서는 징벌적 정의의 완성이기도 하고, 폐기이기도 하다.” Reinhold Niebuhr, Christian Realism and Political Problems, 164.
징벌의 목적은 복수가 아니라 교정이다. 교정은 회복을 지향하고 상상한다. 정의의 정신이 사랑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징벌적 정의는 불의에 의해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시키는 정의로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니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승전국들이 자기 정당화에 빠져 패전국들에게 분노의 복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도쿄 전범 재판과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대해 니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징벌적 정의가 없는 용서는 감상으로 타락한다. 그러나 용서가 없는 징벌적 정의는 실패한다. 국가들 사이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왜냐하면 국가들은 진정 불편부당한 정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국가들이 불가능한 불편부당성을 취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허세를 부린다면, 그 국가들이 수행할 수 있는 정의는 구원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국가들 자체는 용서의 복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국가들은 본성상 자기의에 사로잡혀 보복을 일삼는다.” Reinhold Niebuhr, “What is Justice?”(1948/1949), Love and Justice: Sections from the Shorter Writings of Reinhold Niebuhr, ed. by D. B. Robertson(Gloucester: Peter Smith, 1976), 230f.
그것은 복수의 악순환을 불러올 것이다. 따라서 최선의 방책은 적대국가들을 ‘용서’하고 그 나라들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분법적 진영논리와 봉쇄논리에 바탕을 둔 현실주의적 군사·정치 전략이 관철되는 냉전체제에서 니버가 가다듬었던 회복적 정의는 큰 빛을 보지 못했다. 권력 현상이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던 니버로서는 국가들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균형을 통해 공존의 길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현실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니버의 정의론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회복적 정의는 우리 시대에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다. 회복적 정의는 성서의 정의론에서 핵심을 이룬다. 성서에서 정의는 바른 관계이다. 이러한 성서의 관계론적 정의 이해는 그레꼬-로만 전통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고전 시대에 정의는 교환적 정의, 교정적 정의, 분배적 정의 등으로 규정되었고, 각각 재화의 교환, 형벌, 명예와 지위, 재화의 배분 등 업적에 따른 보상을 규율하는 원칙으로 통용되었다. 이에 관한 고전적 규정으로는 Aristoteles, Nikomachische Ethik, übers. u. komm. v. F. Dirlmeier, 4. ern. u. durchges. Aufl.(Darmstadt: Wiss. Buchges, 1967), 186ff. (1126a)를 보라.
태초에 하나님이 그분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세운 바른 관계는 죄가 그 사이에 침입함으로써 일그러지고 깨어졌다. 그렇게 일그러지고 깨어진 관계는 하나님이 죄를 누름으로써 사람들을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과 관계를 다시 맺음으로써 회복된다.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고 의롭다 칭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 화해에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수난은 삼라만상이 바른 관계들 가운데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행위이다. 따라서 니버가 정곡을 찔러서 말을 했듯이, “수난을 받는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의 최종적 일관성이다.” Reinhold Niebuhr, Christian Realism and Political Problems, 184.

 정의를 바른 관계로 이해한다면, 평화는 바른 관계들 속에서 누리는 생명의 충만한 상태이다. 정의가 없는 곳에 평화는 깃들지 않는다. 정의를 깨뜨리는 죄의 발현형태는 성서에서 우상숭배와 폭력으로 파악된다. 호세아 4장 1-3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온갖 폭력들이 난무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깃든 생명체들이 영락한다고 지적했다. 호세아가 지적한 폭력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신뢰관계와 상호존중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땅과 재물을 빼앗고, 생명 그 자체를 파괴하고, 학살과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정의는 자기주장을 절대화하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고 폭력을 포기하는 곳에서 실현된다. 정의가 실현되는 곳에 바른 관계들 속에서 누리는 삶의 충만함을 향유하는 평화가 동튼다. C. Westermann, “Frieden (Schalom) im Alten Testament,” Studien zur Friedensforschung I, G. Picht/H. E. Toedt (Hg.) (Stuttgart: Klett, 1969), 148.

 예언자적 전통을 이어받은 예수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지배하는 제국의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선언했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 황제가 제국의 정점에서 제국의 통일을 이루고 속주들로부터 공납을 받는 체제이다.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제국의 통일을 교란하고, 공납을 바치지 않는 속주들은 ‘공포와 전율’의 전략에 따라 로마 군단에 의해 유린되었다. 팍스 로마나는 평정의 질서요, 폭력에 의한 지배 체제이다. 예수는 팍스 로마나 체제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그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하나님의 통치로 방향을 전환하라는 권고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하나님의 정의가 지배하는 나라이니, 그 나라에 참여하라는 것은 로마 제국을 거부하라는 선언이었다. 그것은 로마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예수는 “이방인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마가 10:42-43)고 말했다. 예수는 로마 제국에서 당연시되었던 폭력에 의한 지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클라우스 벵스트는 이로써 ‘궁극적인 실재라고 주장하는 억압적인 폭력의 자기주장’이 ‘의문’에 붙여졌다고 본다. 클라우스 벵스트, 『로마의 평화: 예수와 초대 그리스도교의 평화 인식과 경험』, 정지련 역(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4), 126.
그리고 머리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스스로 낮아져서 남을 섬기라고 분부했다. 그것은 자기주장을 버리고 상대를 겸손하게 받아들여 바른 관계를 수립하라는 촉구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사람들 사이에 정의와 평화가 깃들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는 정의에 바탕을 둔 평화이다.
 정의에 바탕을 둔 평화는 가정과 학교와 기업에서, 시장과 시민사회에서, 국가 공동체 안에서, 국가들 사이에서 건강하고 충만한 삶을 누리기 위해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정의에 바탕을 둔 평화는 권력의 분산과 견제에 바탕을 둔 민주적인 질서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자유주의적 기획 이상이어야 하고, 소극적 평화 이상의 기획이어야 한다. 정의에 바탕을 둔 평화의 기획은 개인과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장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의 기회와 소득을 부여하고, 사회 기구들과 국가에서 일어나는 결정들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동등한 참여의 원칙에 따라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교류와 문화적 교류, 전쟁과 평화를 규율하는 기구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최소한의 과제로 설정하여야 한다.

3. 한반도 평화 수립을 향하여

 앞에서 현실주의를 논하면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북과 이남, 그리고 미국의 군사·정치 전략이 현실주의에 묶여 있는 한, 안보 딜레마를 해소할 수 없고, 적대관계를 해소할 수 없다. 한반도에 평화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현실주의적 발상을 뛰어넘어야 하고 정의에 바탕을 둔 평화의 원칙에 따라 첫 단추부터 잘 끼어 맞추어야 한다.
 한반도에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첫 조치는 이남과 이북, 이북과 미국 사이의 불신과 적대관계를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에 대한 스테레오타입화한 적 규정을 버리고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적 패권을 행사하는 전쟁국가로 등장한 미국은 이북을 자유세계의 적으로, 불량국가로, 테러지원국으로, 인권탄압국으로,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적대시 정책과 봉쇄 정책을 지속적으로 강화했고, 한반도에 군사·정치적으로 개입할 명분을 확보해 왔다. 이북은 이북대로 미국을 ‘철천지 원쑤’로 규정하고 미국의 군사적 압력에 대항하여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판에 박힌 적 규정들은 각 나라의 대내적 통합을 강화하고 동맹 세력을 결속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겠지만, 적대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들을 이데올로기적 경직 상태에 빠뜨려 상대방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들고 히스테리에 휩싸인 공격 본능에 쉽게 따르게 만든다. 이로 인해 평화 능력이 현저하게 약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내적인 자원을 고갈시켜 장기적으로는 복지 능력도 파괴된다. 한반도 전쟁이 끝나고 65년이 지났는데 왜 이북과 미국은 여전히 적대관계를 유지하는가? 그럴 필요가 있는가? 이북이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필요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패권 국가 미국이 먼저 진지하게 제시해야 한다. 이북에 대한 적대관계에 있는 이남도 이 질문에 대해 똑같이 진지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반공분단국가에서 이북과의 적대적 공존 관계에서 기득권을 형성한 세력들과 그 방계 세력들이 이북에 대한 스테레오타입화한 적 규정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의에 바탕을 둔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둘째 조치는 상대방을 공격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상대방이 그것을 신뢰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근에 이북의 최고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전면적 폐기와 이북에 대한 미국의 체제 보장을 연계하자고 제안한 것은 한반도 평화 구축 과정을 획기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제안을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미국을 군사적으로 공격할 뜻이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이북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과 봉쇄 정책의 철회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난 6월 12일 두 정상 사이에서 싱가포르 합의가 성립되고, 이북과 미국 사이에서 실무 협상이 진행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비핵화와 대륙간 탄도미사일 폐기에 착수하면서 이북이 미국에 종전선언을 우선 요구한 것은 신뢰 구축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를 내건 신중한 조치이다. 물론 한반도 비핵화와 이북 체제보장에 관한 실무 협상은 많은 난관에 직면할 것이다. 이북이 대북 체제보장의 첫 조치로 요구하는 종전선언에 대해서조차 미국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이남이 이북을, 이북이 이남을 침공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이를 가시화하는 군사적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셋째, 핵무기 개발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빌미로 해서 미국이 주도한 대북제재들, 특히 경제제재와 금융제재는 이북의 조치가 시작되는 것을 신호로 해서 즉각 신속하게 철폐되어야 한다. 대북제재 철폐는 이북의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발전을 촉진시키고 이북의 복지 능력과 평화 능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대북 적대시 정책과 봉쇄 정책이 지속되는 동안에 자원이 고갈된 이북은 자본을 확충하고 기술을 축적하고 시장을 활성화하여 인민의 복지를 향상시켜야 할 절실한 요구를 외면할 수 없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대량으로 보급되어 결핍에 대한 인민의 불만이 급속하게 확산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북 당국은 이 절실한 요구의 충족을 늦출 수 없다. 대북 제재의 철폐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종식되고 이북의 체제보장을 위한 실질적 조치가 시작되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남북 교류와 협력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이남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이바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남 당국은 대북제재 철폐를 위해 국제 협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넷째, 상호불신과 적대관계를 종식시키는 과정이 촉진되기 시작하면, 한반도 전쟁의 당사국들은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키고, 이북과 미국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정상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전쟁당사국들 사이의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 관계 정상화가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이 두 가지 과정은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평화협정 체결과 동시에 혹은 평화협정을 전제로 해서 남북과 북미 사이에 전쟁 방지를 위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평화협정과 불가침협정의 법적 성격에 대한 연구로는 장수련, “남한의 「불가침협정」과 북한의 「평화협정」 제의에 대한 고찰: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서,” 『북한학집』 30(2005), 91-95. 평화협정은 전쟁당사자들이 전후처리의 원칙을 정하는 협정이고, 불가침협정은 완전한 국가 형태를 갖춘 두 개 이상의 정치체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협정이다.
이북의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이 단계에 이를 때까지는 완전히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대북제재가 완전히 철폐되는 단계에서 폐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섯째, 베스트팔렌 체제의 프레임을 넘어설 필요가 있는 현대 세계에서는 불가침조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에 다자간 안보협력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남과 이북, 중국과 미국, 일본과 러시아 등 한반도에 지정학적, 군사·정치적 이해관계를 갖는 국가들이 동북아에서 집단적인 안보협력 기구를 창설하고자 할 때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모델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W. 후버/H. R. 로이터, 『평화윤리』, 김윤옥·손규태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507-518. 1975년 8월 1일 유럽안보협력회의가 채택한 「유럽안보의 기초와 국가간 관계의 원칙에 관한 일반선언」은 주권 평등 및 존중, 무력 사용 및 위협의 금지, 국경불가침, 영토존중, 분쟁의 평화적 해결, 내정불간섭, 기본적 자유 및 인권의 존중, 국민의 평등권 및 자결권, 국가간 협력, 국제법 의무의 성실한 의무 등 10대 원칙을 천명했다.
동북아 차원에서 창설될 공동안보협력체제는 강대국들의 패권 행사를 억제하고, 약소국들의 안보를 증진시키고, 경제, 과학, 기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간 협력을 증진하여 평화의 기반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유럽안보협력 모델이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 적용 가능한가를 연구한 이철기, “동북아다자간안보협력의 가능성과 필요성: 동북아안보와 한반도문제간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28/2 (1995/5), 특히 827ff.를 보라.

 여섯째, 남북 통일은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시아 안보협력 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서는 이 논문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기에 여기서는 더 다루지 않는다.  

IV. 맺음말

 이 글에서 필자는 한반도 평화를 구상하는 데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적 평화이론이 얼마큼 기여할 수 있는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한반도 평화 구상에서 반드시 고려할 점들을 제시하고자 했다. 한반도 평화 구상 모색과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적 평화이론의 검토는 각각 별개의 연구 과제로 설정될 수 있을 만큼 큰 주제인데, 이 두 주제를 한 편의 논문에서 다루는 다소 무리한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신학과교회』 편집위원회가 필자에게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평화 문제를 살펴달라는 과제를 부여하지 않았다면, 필자로서는 이와 같은 작업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는 라인홀드 니버의 현실주의적 평화이론이 1) 권력 현상에 대한 현실주의적 인식과 민주주의 옹호, 2)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적인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3) 세계 정부 수립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에 근거한 현실주의적인 군사·정치 전략, 4) 미국의 세계적 리더십 등 네 가지 기둥 위에 세워져 있다고 분석하고 비판했다. 니버의 민주주의 이해와 반공주의에 과도한 신학주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 니버가 표방한 현실주의적 군사·정치 전략이 근대 국가의 신화와 베스트팔렌 체제의 프레임에 갇혀 있고, 안보 딜레마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점, 미국의 리더십 발휘에 겸손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니버의 조언이 미국의 패권 추구를 온건하게 지지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점 등이 비판의 초점이었다.
 필자는 니버의 현실주의적 평화이론이 한반도 평화구상을 위한 역발상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도, 정의와 사랑의 관계에 대한 니버의 발상에서 ‘회복적 정의’의 모티프를 부각시키고, 이를 정의에 바탕을 둔 평화 개념으로 가다듬어 한반도 평화 구상의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글에서 필자는 현실주의적 군사·정치 전략을 넘어서서 정의에 바탕을 둔 평화 개념에 입각하여 남북과 북미가 상호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관계를 형성하기 위하여 고려할 점들을 밝혔는데, 이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추후 과제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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