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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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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

강원돈(한신대학교 신학부 교수/사회윤리와 민중신학)

I. 머리말

 한국기독교윤리학회가 필자에게 맡긴 강연의 주제는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이다.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물음을 놓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아주 소박하게는 기독교 경제윤리를 특별히 교회에 적용하자는 뜻인가, 교회를 대상으로 해서 기독교 경제윤리를 가르치자는 뜻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를 규명하는 일은 기독교 경제윤리의 과제와 규범의 근거를 설정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각도를 조금 달리 해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를 고찰할 수도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그 모임을 제도화한 현실 교회는 부동산, 수익용 재산, 수입 등의 물질적 기반에 바탕을 두고 전문가 집단에 의해 운영되는 기구이기에 그 운영은 부분적으로 경제적 성격을 띤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살피는 경제는 세상의 경제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고, 교회 운영의 경제적 측면은 세상의 경제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는 첫째 교회를 향해 서 있는 기독교 경제윤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신학적 관점에서 구상되는 기독교 경제윤리이다. 이런 경우에는 ‘교회를 위한’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내고 그냥 기독교 경제윤리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경제윤리가 윤리적 판단과 실천의 규범적 근거를 설정하기 위해 전제하는 신학적 관점은 결국 교회의 신학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는 교회의 자기이해로부터 교회의 경제를 윤리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그 과제로 삼는다고 볼 수 있고, 그런 한에서는 교회 재산의 귀속과 사용, 교회 회계 제도의 수립, 교회 수입의 사용, 교역자 소득세, 교회 산하 단체와 기업의 경영과 노동권 보장 등의 특수한 주제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경제와 교회의 경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를 논의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교회가 지교회, 노회, 총회, 교회협의회 수준에서 기독교 경제윤리의 주체로서 수행하여야 할 바를 명확하게 밝히는 기독교 경제윤리야말로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면이 극히 한정되어 있는 본 논문에서 필자는 기독교 경제윤리의 규범들과 그 근거들을 살피고, 현대의 지배적인 경제체제인 역사적 시장경제를 규율하는 몇 가지 방안을 강령 수준에서 밝히는 데 집중할 것이다. 교회의 자기이해로부터 출발하는 기독교 경제윤리의 특수한 주제들을 다루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여러 층위에서 실천할 과제를 제시하는 일은 다른 기회에 수행할 것이다.

II. 기독교 경제윤리의 과제

 기독교 경제윤리는 경제의 문제들을 분석하고, 그 배후의 이데올로기를 밝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경제를 규율하고 형성하는 데 필요한 규범들을 제정하고 운영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을 그 과제로 하는 학문이다. 경제는 기독교 경제윤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이기에 경제윤리는 경제를 주어진 현실로 다루는 데서 출발한다. 기독교 경제윤리의 규범들은 경제를 초월하는 근거를 가질 수 있지만, 반드시 경제의 역동적 과정에 접촉점을 가져서 경제를 내적으로 통제하는 효과를 가져야 한다. 기독교 경제윤리는 현실의 경제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지향적이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실현가능성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실천지향적이다.
 이러한 기독교 경제윤리의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 경제윤리의 규범들과 그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제의 기본문제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기독교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경제의 기본 문제들을 푸는 방안을 일관성 있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 기독교 경제윤리의 원칙들

 기독교 경제윤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의 관점에서 경제 문제를 판단하고 경제를 규율하고 형성하는 데 필요한 규범적 장치를 마련하고자 한다. 교회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만물이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다는 신앙을 고백한다. 이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임 당함과 부활의 사건에 대한 기억에 근거한다.(빌립 2:5f.) 그리스도가 죄의 힘에 의해 살해당했다가 그 힘을 이기고 부활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배권의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은 세상을 무로부터 불러내셨다.”(로마 4:27)는 찬미로 표현된다. 부활의 빛에서 창조가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짓고 그 안에 사는 생명체를 지어서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갖는다는 히브리 성서의 고백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무로부터 불러냈으니, 피조물을 무화시키는 힘에 맞서서 피조물을 끝끝내 보존할 것이라는 고백으로 새로워지고 강화된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죄가 피조물을 파괴하고 멸절시키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그 힘은 피조물을 무로부터 건져 올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이길 수 없다. 이처럼 창조를 새롭게 조명하게 하는 부활 사건은 피조물의 미래인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도 확실한 전망을 갖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파괴하고 멸절시키는 죄와 죽음의 힘을 꺾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완성하여 이를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면 하나님은 만유의 주로 영광 가운데 임하게 될 것이고,(고전 15:28)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 생명의 충만함을 누릴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에서 조명되는 창조와 종말의 드라마는 기독교 경제윤리가 경제를 다루고 경제를 규율하고 형성하는 원칙을 구상하는 지평이다.

1.1. 세상을 생명의 질서로 창조하고 보존하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허락한 삶의 방식으로서의 경제는 사회적 차원과 생태학적 차원을 가진다.

1.1.1.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축복한 뒤에 생명을 영위하는 세 가지 방식을 제정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위탁한다. 하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을 채우라는 위탁이고, 다른 하나는 땅을 경작하라(cabash ha’arets)는 위탁이고, 마지막 하나는 하늘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을 다스리라는 위탁이다. 땅을 경작하라는 위탁은 생육·번성의 위탁과 생명체 지배의 위탁 사이에 있고 두 위탁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땅을 경작한다는 것은 생육·번성의 위탁에 의해 늘어나는 인구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경제 활동을 하면서 문화를 형성하라는 뜻이다. 경제는 인간이 생명을 영위하는 기본 방식이며, 하나님의 축복의 질서에 속한다. 이러한 경제 위탁은 무제약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체 지배의 위탁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경제의 위탁을 받은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규정으로부터 밝혀지는 인간의 지위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사람들끼리 소통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맺는 주체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맡고 있는 대리인들이라는 것이다.

 1) 소통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은 사회적 파트너 관계를 맺는 주체이고, 사회적 파트너 관계를 맺는 주체들은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고 함께 책임을 진다. 참여와 책임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규정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관계 형성의 기본 원칙이다.

 2)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에서 할 일은 생명체의 지배이다. 생명체 지배는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늘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을 다스린다는 말로 표현되어 있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한 목적이다. 생명체의 지배는 발로 내리 누른다는 뜻의 히브리어 라다(radah)로 표현되어 있어서 생명체에 대한 폭력적 지배를 암시하는 듯하지만, 생명체 지배의 본래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세상과 생명체를 창조하면서 관철하고 있는 의도로부터 파악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를 공간적으로 분할하고, 각각의 공간에 서식하는 생명체들을 배치하여 서식 공간으로 인한 생명체들 사이의 충돌과 갈등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땅 위에서 살아가는 짐승들과 사람들은 서식 공간을 함께 하여 충돌의 여지가 있으나, 하나님은 창세기 1장 29-30절에 채식 규정을 두어 사람들과 동물들이 먹이를 얻기 위해 서로 살육하지 않게 하는 장치를 만든다. 이렇게 생명체들 사이에 공생의 질서를 수립한 하나님은 사람들을 그분의 대리자로 세워 그 질서를 지키게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맡은 일은 피조물을 임의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사이에 공생과 평화를 수립하는 것이다. 오늘의 세계상에 근거하여 말한다면, 생명체 지배의 위임은 인간이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보전하는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을 것이다.

 3)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워진 인간이 욕망을 충족시켜 삶을 펼치기 위한 방편으로서 수행하는 경제는 사회적 차원과 생태학적 차원에서 두 가지 요구 아래 선다. 경제는 서로 마주보고 소통하는 사람들의 주체성과 사회적 파트너관계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경제 활동은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보전하는 한도 안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기독교 경제윤리의 규범을 제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앞의 요구는 참여의 원칙으로 정식화할 수 있고, 뒤의 요구는 생태학적 규율의 원칙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1.2. 하나님이 성별하고 축성한 안식은 경제를 삶의 방편으로 상대화하고, 피조물 공동체에서 각각의 생명체가 제 자리를 유지할 권리를 갖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안식은 창조의 목적이다. 엿새 일하고 이레째 되는 날에 안식을 취한 하나님은 사람들과 여타 피조물들도 안식으로 초청한다. 하나님은 공생과 평화를 누리는 세상과 온 생명체들이 그분 앞에서 그분을 찬미하기를 원한다.

 1) 안식은 사람이 노동과 경제활동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삶의 목적을 되새기는 거룩한 기회이다. 따라서 안식은 사람의 경제가 삶의 방편일 뿐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킨다.

 2) 또한 안식은 피조물이 인간의 경제 활동에 동원되는 데서 벗어나 각각의 피조물이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나님이 보장하고자 한다는 것을 경축하는 거룩한 시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안식은 각각의 피조물이 하나님이 세운 공생과 평화의 공동체 관계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갖고 있고, 그 자리를 보장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게 하는 날이다.
 이와 같은 피조물의 권리가 인정되어 보호받게 된다면, 경제의 생태학적 규율의 원칙은 자연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적 장치의 도움을 받아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1.2. 경제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전히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는 생명의 위탁들 가운데 하나이며, 정의의 원칙에 따라 형성된다.

1.2.1. 세상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어느 시점인가부터 죄에 의해 침탈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작용하기 시작한 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틈을 벌리고 그 관계를 일그러뜨리고 심지어 파괴하기까지 한다.
 타락사화(창세 3장)는 인간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낙원추방과 땅에 대한 저주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땅이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었다는 것은 땅과 인간의 관계가 적대적인 관계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생명의 질서인 생육과 노동이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저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낙원 추방 이후에도 인간은 생육하고, 노동과 경제 활동을 통하여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생육과 노동은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의 질서에 속해 있다.
   
1.2.2.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경제가 삶을 꾸리는 방식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보존된다고 해도, 그것은 역사의 특정한 조건들 아래서 사람들이 조직한 경제가 하나님에 의해 있는 그대로 긍정된다는 뜻이 아니다. 죄가 지배하는 세상의 현실은 참혹하다. 호세아 4장 1-3절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져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뜨려지니 사람들 사이에 폭력 관계가 끝없이 이어지고, 그 결과 피조물 공동체가 생명력을 잃고 영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호세아는 피조물의 생명력 상실과 영락이 사람들 사이의 폭력 관계가 사람과 자연의 관계에 전가되어 나타난 결과라고 통찰하고 있다.

 1) 죄의 지배 아래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폭력 관계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경제를 꾸리기 위해 사람들이 맺는 관계도 지배와 수탈의 관계로, 배제와 차별의 관계로 일그러진다. 강자가 권력을 독점하고 그것을 가지고 약자를 억눌러 약자에게 돌아갈 몫을 빼앗고 약자를 멸시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경제가 여전히 생명을 꾸리는 방식으로 보존되려면 경제를 지배하는 폭력의 논리가 정의의 이름으로 제어되지 않으면 안 된다. 히브리 성서는 폭력으로부터 세상을 해방시키는 정의의 원형을 하나님의 정의에서 찾았다. 하나님은 약자의 편에 서서 약자가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기회를 주장할 권리를 옹호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지배 없는 사회적 파트너관계로 회복하기 위해 기득권 구조를 해체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이 정의로운 분임을 드러낸다. 이를 보여 주는 실례는 성서에 차고도 넘친다.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의 손아귀로부터 히브리인들을 건져낸 야훼는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파라오 체제를 부정하고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왕이 없는 평등공동체를 구현하고 ‘만나의 경제’를 실현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님의 정의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약자들 편에 서서 정의를 실천할 것을 요청받는다. 작은 사람들을 편드는 정의는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과부, 고아, 이방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십일조 제도로 표현되었고, 작은 사람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안식일 준수, 임금 정시 지급, 저당권 제한, 생계대부에 관련된 이자 금지 등을 명시한 히브리 사회법으로 구체화되었고, 하나님의 땅에 대한 주권을 앞세워 소유권을 제한하여 히브리 사회의 양극화와 채무노예화를 근절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고, 땅과 주택과 신체의 자유 등 인간의 생존과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원상을 회복시키는 희년법 제정으로 나아갔다.
 희년 정신을 계승하는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세금과 지대와 강제노동 등 로마 제국을 지탱하는 세 가지 수탈제도들로부터 작은 사람들을 해방시켜 안식을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마태 11:28-30)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에서는 누구나 ‘일용할 양식’을 보장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사람들이 의식주와 치료, 위로 등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행동하여야 한다.(마태 25:31 이하)
 위에서 말한 바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는 정의가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존하는 경제의 운영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2) 경제가 타락한 세상에서 생명의 위탁으로 보존되기 위해서는 피조물에 대한 폭력적 지배도 줄여야 한다. 죄의 지배 아래서 사람들 사이에 끝없이 이어지는 폭력 관계로 인하여 피조물이 생명력을 잃고 영락한다는 호세아의 통찰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폭력이 인간의 자연에 대한 폭력으로 옮아간다는 것을 시사한다. 강자가 축적을 위해 약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자연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착취하여 부의 형태로 전환하기 위해 자연에 가하는 폭력과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자연의 착취와 지배는 경제가 축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사람들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의 방편으로 자리를 잡을 때 최소화될 것이다. 경제는 인간과 자연의 공생과 평화를 깨뜨리는 방식으로 지속될 수 없다.
 호세아는 피조물이 파멸의 힘으로부터 벗어나 생명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사람들 사이에 폭력관계가 종식되어 정의와 평화가 깃들어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람들을 다시 사로잡아야 한다고 전망한다.(호세 14:1-8) 이러한 호세아의 예언자적 전망은 그리스도 사건을 기억하는 바울에게서 피조물이 그 자신을 파멸시키는 죄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될 날을 고대하고 사람들이 몸의 속량이 이루어질 날을 고대한다는 종말론적 전망으로 표현된다.(로마 8:18-27)
 위에서 논의한 바로부터 자연에 대한 폭력의 최소화는 타락한 세상에서 경제를 운영하는 기본 방침으로 설정되고, 이 방침은 경제의 생태학적 규율의 원칙을 내용적으로 보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 사람은 능력이 있는 한에서 경제 활동에 참여하여 자신의 삶을 책임 있게 꾸리고, 공동체 복지에 기여하여야 하지만, 사람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는 경제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나 경제적 업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는 삶의 방편이지 삶의 목적이 아니다. 사람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는 그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져서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는 데서 창설된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상대로서 하나님 곁에 현존하도록 허락된 존재이다. 비록 그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죄인으로 현존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신실한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죄인을 받아들여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붙든다.
 사람이 존엄한 삶을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것은 자유이다. 사람은 물질적 궁핍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물질적 궁핍으로 인하여 자유를 상실하지 않을 경우에만 존엄한 삶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따라서 물질적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 존엄한 존재인 인간에게 그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한다. 경제 활동에 참여하여 경제적 업적을 쌓지 않은 경우라 해도 모든 사람은 경제적 업적에 무관하게 존엄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무조건 요구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경제적 업적 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경제를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간략하게 인간 존엄성 보장의 원칙으로 정식화될 수 있다.

1.4.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사건에서 조명되는 창조와 종말의 지평에서 기독교 경제윤리가 삶의 방편인 경제를 규율하고 형성하기 위해 구상하는 규범적 장치는 생태학적 규율의 원칙, 참여의 원칙, 정의의 원칙, 인간 존엄성 보장의 원칙이다.

2. 시장경제의 경제과정과 그 기본얼개들에서 비롯되는 문제들

 경제는 사람들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태계로부터 끌어들인 물질과 에너지를 욕망충족에 적절하게 변형하여 소비하고 그 부산물을 생태계에 방출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경제과정은 생태계와 경제계 사이의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 경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소비의 연관,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기본 얼개로 갖는다.
 경제과정과 그 기본얼개들은 역사적 조건들 아래서 사람들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만든 문화의 한 형태이며, 제도로서 세워진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 조건들은 과학기술, 생산력, 소유방식, 교환형식, 권력형태, 권리의식과 이를 실현하고 보장하는 법률형태 등의 발전 수준들이다. 역사적 조건들이 바뀌면 경제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방식이 바뀐다. 경제가 문화의 한 형태인 이상, 자연법칙처럼 경제를 지배하는 법칙은 있을 수 없다. 일각에서 교조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시장질서의 ‘자생성’은 시장질서가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해도 시장 참여자들이 시행착오를 거쳐 시장 질서를 수립한다는 뜻으로 새겨져야 할 것이다.
 노동시장이 국민경제를 관통하는 제도로 자리를 잡는 것을 역사적 조건으로 해서 탄생한 시장경제에서 경제과정과 그 기본얼개들에서 비롯되는 기본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2.1. 경제는 노동력, 자본, 자원의 희소성을 전제로 해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이므로 합리성의 요구에 따른다. 경제적 합리성은 비용을 최소화하여 최대한의 효과를 얻고자 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시장경제에서 경제적 합리성은 경제 영역을 넘어서서 인간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고 모든 것에 앞서는 가치로 절대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경제적 합리성의 핵심은 비용 계산이고, 비용은 가격을 전제한다. 시장경제에서 가격은 경제적 희소성의 표지이다. 노동력, 자본, 자원이 희소성의 지표에 불과한 가격에 의해 제대로 표시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  

2.2. 오랫동안 경제학은 생산, 소비, 시장, 사회, 국가 등 경제계 안에서 작동하는 기제들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최근의 경제학은 경제과정을 생태계와 경제계 사이의 에너지-물질 교환 과정으로 보기 시작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물질 보존의 법칙에 따르면, 생태계로부터 경제계로 투입되는 에너지-물질의 양과 경제계로부터 생태계로 방출되는 폐기 에너지-물질의 양은 동일하다. 역사적 시장경제에서 거뜬히 실현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순환관계는 경제계에서 변형되는 에너지-물질의 양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이로 인하여 생태계에 부존된 에너지-물질이 빠른 속도로 고갈되고, 생태계에 축적되는 폐기 에너지-물질의 양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자원의 고갈과 생태계 오염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된다. 생태계에 축적되는 폐기 에너지와 폐기 물질은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위협하고 임계수준을 넘으면 생태계를 파괴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효과를 갖는다.

2.3. 역사적 시장경제에서 에너지와 물질을 소비에 적합한 형태로 변형하는 과정, 곧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과정은 기업이 관장하고, 기업은 자본을 가진 사람들과 노동력을 가진 사람들의 결합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두 사회세력들 사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대립 속의 협력이지만, 자본의 권력이 노동의 권력을 압도하여 자본의 노동 포섭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생산과정에서 사회세력들 사이의 권력관계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지위를 결정하고, 임금의 수준과 기업 소득의 분배를 규정한다.

2.4.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가 소비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문제는 누가, 무엇을, 얼마큼 소비하는가이다. 역사적 시장경제에서 소비능력은 임금, 이자, 지대 등 시장 소득의 크기에 따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모든 사람이 의식주, 교육, 치료, 사회적 교류, 문화적 향유 등과 같은 기본욕망을 충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과제로 자리를 잡고 있다. 경제가 기본욕망을 초과하는 요구와 탐욕을 충족시킬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2.5. 생산과 소비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경제계에서 생산의 증가는 소비의 증가를 강제한다. 역사적 시장경제에서 생산 능력은 기업의 저축이 빠른 속도로 엄청나게 축적됨으로써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이로써 가능해진 대량생산이 공황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면 대량소비를 조장하여야 한다. 시장경제에서 임금소득이 대량소비를 하기에 충분하게 분배되지 않는 경향을 띠기 때문에 대량소비는 결국에 가서는 소비지출을 지원하는 정부 신용의 팽창을 조장하고, 오늘의 소비를 위해 당겨쓴 빚은 미래 세대의 삶의 기회를 갉아먹는다.

2.6. 생산에서 발생하는 기업 이익의 배당, 정부 신용의 팽창, 보험과 연금 등의 저축에서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화폐자본은 지구적 차원에서 문턱 없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금융시장을 통하여 자유롭게 운동하면서 생산자본을 지배하는 힘을 발휘한다. 금융자본의 권력 아래서 시장경제는 약탈경제로 전환되었다. 금융자본이 생산자본을 약탈하고, 큰 생산자본이 작은 생산자본을 약탈하고, 생산자본이 노동의 성과를 가혹하게 약탈한다. 금융자본이 결코 중립적일 수 없는 달러 화폐를 기축으로 해서 통용되기에 약탈경제는 더욱 더 악화된 형태를 취한다. 달러 기축 통화 제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지구적 차원의 약탈적인 공납체제를 구축한다.

3. 역사적 시장경제의 규율

 기독교 경제윤리는 그리스도 사건에서 조명되는 창조와 종말의 지평에서 구상하는 경제 운영의 네 가지 원칙들, 곧 생태학적 규율의 원칙, 참여의 원칙, 정의의 원칙, 인간의 존엄성 보장의 원칙을 갖고서 역사적 시장경제에서 경제과정과 그 기본얼개들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해결하여 경제를 새롭게 규율하고 형성하는 방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3.1. 기독교 경제윤리는 희소한 자원들을 갖고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경제가 합리성의 요구를 최대한 충족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경제적 합리성이 제한된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합리성을 매개하는 가격 장치가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여야 한다.
 
3.1.1. 경제적 합리성은 희소한 자원의 제약 때문에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고자 하는 경제 활동의 경향이며, 본래는 기업의 타산을 맞추기 위한 장부 기재 방법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시장경제의 치열한 경쟁 조건 아래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경제적 합리성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형성되다보니 경제적 합리성의 추구가 절대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비용 절약적 합리화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라는 주장은 경제적 합리성을 절대화하는 한 예이다.
 경제적 합리성이 절대화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는 참혹하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노동 비용이 자본 비용보다 높을 때 나타나는 고용조정은 대규모 실업과 비정규직 고용의 증가로 나타난다. 기업의 합리성 추구는 한편으로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서 삶의 기회를 박탈하거나 악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또한 기업의 경제 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를 처리하는 비용도 기업에 자발적으로 내부화되지 않고, 많은 경우에 외부화되어 피해를 보는 국민에게 전가된다. 더 나아가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경제적 합리성은 기업을 넘어서서 정부와 대학 등 국가 부문과 문화 부문에서도 지배적인 가치로 자리를 잡아 이 부문들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장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경영마인드를 앞세운 행정으로 인해 부차화되고, 관행과 통념, 이데올로기와 체제 논리 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대학은 시장 논리에 충실한 기능인을 양성하는 곳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경제윤리는 경제가 합리성의 요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경제적 합리성이 절대화의 경향을 띠고 급기야 이데올로기로 경직화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여야 한다. 경제적 합리성이 관철되는 곳은 경제 영역으로 한정되어야 하고, 그 타당성 요구는 제한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경제적 합리성을 관철하는 데서 발생하는 사회적, 생태학적, 정치적, 문화적 문제들을 고려해 볼 때, 경제적 합리성의 관철 방식은 시민적 동의와 정치적 합의에 근거하여 조율되지 않으면 안 된다.

3.1.2. 시장경제에서 경제적 합리성을 표현하는 매체는 가격이다. 비용 대비 효과가 경제적 합리성의 핵심이고, 비용과 효과는 모두 가격으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에서 탈중심화된 경제주체들은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생산과 소비를 조절하기 때문에 가격 장치는 시장경제의 조정 장치로 여겨지고, 가격은 시장경제의 중심 개념이다. 그런데 가격은 재화나 서비스의 본질이나 성질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재화나 서비스의 희소성을 나타내는 표지일 뿐이다. 경제학적 의미의 희소성은 재화나 서비스가 시장에 공급되는 양과 소비되는 양 사이의 관계가 드러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가격은 현상으로서의 희소성을 가리키는 우연한 기호이다.
 가격이 시장경제에서 생산과 소비를 조절하는 중립적인 신호의 역할을 하려면, 그 어떤 생산자나 소비자도 가격을 임의로 조작할 수 없는 이상적인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시장에서 독점이나 과점을 이루는 경제권력은 생산 측면에서나 소비 측면에서 임의로 가격을 조작할 수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보면, 가격의 중립성은 경제권력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제어할 경우에만 달성될 수 있을 뿐이고,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압도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그런 경우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현실의 경제는 가격이 끊임없이 왜곡되는 불완전한 상태에서 운영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격이 시장경제에서 생산과 소비를 조정하는 장치라는 주장은 경제과정에 노동력, 자본, 자원 등과 같이 가격으로 표시되기는 하지만 가격으로 표시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생산요소들이 투입되고 소비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난관에 부딪친다. 노동력, 자본, 자원 등의 가격은 매우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다. 노동력의 가격인 임금은 노동력 상품의 공급과 수요의 양적 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동시장에서 작용하는 자본의 권력과 노동의 권력 사이의 힘겨루기에 따라 결정된다. 자본의 시장 가격은 따지기가 더 어렵다. 기업의 현금 흐름에 관련하여 시장에서 화폐를 조달하는 비용이나 감가상각비용은 시장 이자로 계산될 수 있는 자본비용이니 일단 차치한다고 해도, 자본이 일단 생산자본으로 움직이는 경우에는 자본 자체가 권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자본의 권력이 창출할 수 있는 이윤을 반영하여 자본의 시장 가격을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노동력이나 자본과는 다른 차원을 갖는 자원의 가격은 실로 터무니없이 책정된다. 자원의 가격은 자연자원을 가공하여 경제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투입된 자본비용과 노동비용 등을 원가에 반영한 뒤에 시장에서 나타나는 자원의 희소성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러한 가격에는 경제적으로 동원된 자원 그 자체가 생태계에서 갖는 고유한 가치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자원을 경제적으로 소비하는 데서 발생하는 생태계 교란이 초래하는 천문학적 비용은 아예 감안되어 있지 않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불구하고, 자원의 원가를 공산품의 원가처럼 계산해 온 것은 자연이 경제에 필요한 재화를 변함없이 공급할 것이라는 자연상수의 이데올로기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시장경제가 희소성을 반영하는 가격장치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은 미신에 가깝다. 독과점 가격이나 지대 추구 같은 용어가 가리키듯이 생산물시장에서 결정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은 시장권력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노동력과 자본과 자원에 희소성의 지표인 가격을 매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격을 앞세워서 노동력과 자본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것을 은폐하고, 자원의 가격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 지배관계를 은폐한다는 것을 애써 무시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장경제를 조정하는 가격 장치는 시민적 동의와 정치적 합의에 의해 근본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노동력과 자본을 생산과정에 투입하여 활용한 대가로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에게 돌아가는 임금과 이윤은 결국 노동과 자본의 권력관계에 따라 배분되는 것이므로, 노동과 자본이 대등한 권력관계를 맺도록 법제화하고, 국민경제에서 생산과 소비의 거시 균형을 유지하도록 이바지하는 가운데 기업의 생존 능력과 미래 능력을 보장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노동과 자본이 적정 임금과 적정 이윤에 관해 합의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원의 가격을 굳이 말한다면, 경제과정에 의해 교란되거나 파괴된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회복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자원의 가격에 내부화하는 시민적 합의와 정치적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할 떼 비로소 경제를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으로 규율하는 데 적절한 사회적 가격 장치와 생태학적 가격 장치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3.1.3. 위에서 논의한 바로부터, 기독교 경제윤리는 경제적 합리성이 희소성의 조건 아래서 경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경제적 합리성이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가치이기나 한 것처럼 이데올로기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화를 피하기 위하여 기독교 경제윤리는 첫째 경제적 합리성이 경제의 영역에만 한정해서 적용되어야 하고, 그 적용 방식은 시민적 동의와 정치적 합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둘째, 시장경제에서 경제적 합리성을 매개하는 가격장치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노동력, 자본, 자원의 특성을 가격 장치에 반영할 수 있도록 시민적 동의와 정치적 합의에 바탕을 두고 전면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3.2. 기독교 경제윤리는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보장하는 수준에서 역사적 시장경제의 경제과정과 그 기본얼개들을 규율하고 새롭게 형성하는 데 필요한 방안을 제시한다. 역사적 시장경제의 경제과정과 그 기본얼개들에서 생태계 부존자원의 고갈과 생태계 파괴가 서로 맞물려서 나타나는 생태학적 문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순환을 강제하는 자본의 축적과 팽창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를 그 핵심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시장경제에서 사회 문제와 생태학적 문제는 서로 별개로 다루어질 수 없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그 해법을 모색하여야 한다.

3.2.1. 생태학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급속도로 방대하게 축적되는 것을 억제하여야 하고, 축적된 자본이 생산능력과 소비능력을 확대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하여야 한다.
 전통적으로 자본의 과도한 축적은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로 설명되었고, 그 해법은 축적된 자본의 일부를 임금 항목으로 옮겨서 국민경제 차원에서 생산과 소비의 거시균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생산과 소비의 거시균형은 전쟁이나 재난이 없는 조건 아래서는 확대지향적 거시균형의 경향을 띠기 마련이다. 그 결과, 생산 능력과 소비 능력은 증가하고, 경제과정이 생태계에 주는 부담이 더 커진다.
 오늘의 경제에서는 이미 자연상수의 이데올로기가 깨어졌기 때문에 경제과정에서 손상되거나 파괴된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회복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감안해서 경제를 운영해야 한다는 정도는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위의 3.1.2에서 논의한 바 있는 생태학적 가격 장치를 도입하여 작동시킨다면, 기업이나 국민경제의 계정에서 자본과 노동에 돌아가는 몫은 절대적으로 축소될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활동의 성과가 경제활동에 참여한 노동력과 자본과 자연의 기여에 따라서 노동과 자본과 자연의 몫으로 공정하게 배분되는 제도를 구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노동과 자본과 자연에게 돌아갈 몫을 공정하게 배분하기 위한 기준, 곧 노동력과 자본과 자연의 기여를 측정할 수 있는 공통의 척도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고, 그것을 창출할 가능성은 이론적으로 없다.
 따라서 경제활동의 성과를 노동과 자본과 자연의 몫으로 분배하기 위해서는 결국 노동권력과 자본권력과 자연권력 사이에서 정치적 합의를 하는 방안을 이론적으로 구상해 볼 수 있다. 자연권력은 지구상의 그 어떤 국가에서도 창설된 바 없으나, 세계 여러 나라의 녹색주의자들은 자연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만일 기독교 경제윤리가 신학적 관점에서 옹호하는 바와 같이 생태계의 네트워크에서 각각의 생명체와 무생명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유지할 권리를 창설할 수 있도록 헌법 규정이 마련되고, 자연의 권리를 대변하는 법인을 설립할 수 있다면, 자연은 자신의 권익을 주장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활동의 성과 가운데 자연의 몫을 정치적으로 확보할 수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생태계에서 생명체들과 무생명체들이 갖는 고유한 가치가 경제활동으로 훼손될 경우에 그 가치를 보전하는 방안을 제도적으로 확립할 수도 있다.
 위에서 논의한 생태학적 가격 장치의 창설과 자연의 권리의 창설은 경제활동을 위한 생태학적 비용을 크게 증가시킬 것이다. 경제활동의 성과에서 자연에 할당되는 몫은 생태계에서 자연계로 투입되는 에너지와 물질의 효율을 높이고, 경제계에서 생태계로 방출되는 폐기 에너지와 물질의 양을 감소시키는 기술을 개발하고, 생태계를 돌보는 비생산적 활동을 위해 집중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3.2.2. 경제활동의 성과 가운데 자연의 몫을 크게 떼어낸 뒤에도 자본 축적은 사회적 문제로 남는다. 시정경제에서 한편에서 자본이 축적되면, 다른 한편에서는 가난이 확산되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적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고, 그 최종적 결과는 국가의 재정 수단에 의한 소비의 진작이다. 국가가 미래의 저축을 끌어들여 현재의 소비를 증가시키는 일에 나서게 되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스템은 국가 개입에 힘입어 계속 작동할 것이다. 그 부작용은 여기서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다.
 물론 시장경제에서 자본의 축적은 경제의 생존 능력과 미래 능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자본 축적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숙고가 필요하다. 시장경제에서 자본 축적은 투자를 증가시키는 경향을 갖기 때문에 투자로 인해 확대된 생산 능력이 소비 능력을 초과하는 결과가 빚어지기 마련이다. 시장경제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과잉 투자의 결과는 공황이었다. 따라서 국민경제에서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이루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이를 이루는 가장 확실한 방안은 경제활동에서 창출된 총가치에서 경제활동을 위해 지출한 총비용을 공제하고 남은 잉여를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적절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그 잉여는 자본의 노동 포섭 조건 아래서 자본의 몫으로 돌아갔지만, 만일 자본의 권력과 노동의 권력이 균형을 이룬다면, 그 잉여는 보다 적정하게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분배될 것이다. 따라서 국민경제에서 생산과 소비의 거시균형을 고려하면서 경제적 잉여를 임금과 이윤으로 적정하게 배분하기 위해서는 노동과 자본이 대등한 권력과 위상을 갖고서 공동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공동결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노동과 자본의 사회적 파트너관계가 확립되고, 자본의 중립화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3.3. 기독교 경제윤리가 강조하는 참여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질 일을 함께 하기 위해 대등한 주체로서 서로 소통하고 함께 결정하는 삶의 방식이다. 희소한 자원을 갖고서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펼쳐지는 경제는 각기 다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참여와 책임을 필요로 한다. 시장경제에서 기업은 자본과 노동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함께 협력하도록 강제하는 기구이다. 자본과 노동은 사회적 파트너로서 기업의 생존과 발전에 공동으로 책임을 진다.

3.3.1. 시장경제의 역사를 돌아보면, 자본과 노동은 기업에서 대등한 주체로서 서로 마주 설 수 없었다.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을 구입한 자본가는 노동력을 지배했다. 노동자는 자본가의 지시에 따라 자본가가 의도하는 노동을 했다. 노동자의 노동은 물리적으로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지출하여 수행하는 노동이지만, 법적으로는 자본가의 노동이고, 그 산물은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이것이 바로 노동의 소외이고, 자본의 노동 포섭이다.
 노동소외와 자본의 노동 포섭은 근대 사회에서 성립된 소유권 제도를 전제하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렵다. 소유자의 소유물에 대한 사용권, 수익권, 처분권을 총괄하는 소유권이 제도화된 근대 사회에서 자본가나 그 대리인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고서, 인사정책과 경제정책에 관한 한, 경영전권을 행사한다. 경영전권은 기업에서 자본가의 독재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하며, 경영전권이 관철되는 영역에서 노동의 참여는 부정되고, 노동과 자본의 공동결정은 배제된다. 임금, 노동조건, 노동시간 등을 규율하는 사회정책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약에 따르기에 경영전권이 관철되는 영역이 아니기는 하지만, 노동시장에서 자본가의 권력이 노동자의 힘을 압도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사회정책도 의사(疑似) 경영전권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다. 자본가의 경영전권과 사회적 권력이 노동자의 삶과 기업의 외부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이에 관해서는 기업 저축을 극대화하기 위한 임금 교섭, 노동합리적인 고용조정, 공장이나 기업의 인수· 합병, 매각, 이전 등을 포괄하는 구조조정을 생각하기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3.3.2. 기업에서 노동과 자본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면서도 서로 협력하도록 강제된다면, 기업의 성공은 노동과 자본이 적대적 대립에서 협력적 대립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업을 조직할 때 더 확실하게 보장될 것이다. 그 요체는 기업 경영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 과정에 노동이 참여하여 노동과 자본의 공동결정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기업에서 자본가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그 제도적 기반인 소유권을 사회적으로 규율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자유주의적 입헌국가의 전통에 따라 소유권을 자유권으로 간주하고, 대한민국 민법은 소유권을 로마법 전통의 물권으로 규정하고 있기에 소유권의 사회적 규율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소유권을 자유권의 하나로 규정한다면, 국가는 소유권을 보호하고 보장할 뿐 소유권의 본질을 침해할 수 없게 된다. 근대 국가에서 소유권의 자유권적 성격이 인정된 것은 본래 개인이 자주적인 삶을 형성하기 위한 물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도록 국가가 개인의 재산을 침탈하지 않게 하자는 시민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소유권이 자유권의 위상을 유지해야 한다면, 논리적으로 소유권의 주체는 자연인으로 한정되어야 하고, 소유권의 행사는 타자의 자유와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유권의 주체가 법인으로 확대되고 로마의 물권과 결합하면서 소유권자는 막강한 사회적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소유권이 물권으로 축소되면, 소유권 규정은 소유자의 물건에 대한 배타적 권리만을 담게 되고 사람의 물건에 대한 관계를 매개로 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성립되는 관계를 포괄할 수 없게 된다. 물권은 소유권의 일부인데도 마치 소유권의 전부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고, 바로 그것이 현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소유권의 법리를 제대로 해석하여야 한다. 만일 소유권이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에게 귀속된 물건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는 권한이라면, 소유권은 물건의 사람에 대한 귀속을 그 본질로 하고, 한편으로는 제3자가 그 물건에 관련해서 간섭이나 침해를 하지 않을 의무를 받아들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소유자가 자신에게 속한 물건에 대한 배타적 지배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규범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그 실체로 한다. 한 마디로, 소유권은 사회적 동의에 근거하여 규범적으로 인정되는 권능이다. 따라서 소유권의 행사는 타인의 자유와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공공의 복지를 증진하도록 사회규범과 법률에 의해 규율되어야 한다. 소유가 책임을 진다는 헌법 정신은 바로 이를 뜻한다.
 소유가 책임을 진다는 법리는 기업에서 자본가가 소유권 행사를 통해 노동자의 자유와 이익을 침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자본가의 소유권 행사는 노동자가 동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자본이 노동 포섭의 권력으로 작용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규율되는 것을 가리켜 자본의 중립화라고 한다. 자본의 중립화가 기업의 규범으로 정립되면, 자본가나 그 대리인에게 인정되어 왔던 경영전권은 폐지되고, 기업의 인사정책과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결정하는 곳에 노동과 자본이 대등한 주체로 참여하여 공동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기업에서 자본가 독재는 노동과 자본의 참여와 공동결정에 기반을 둔 기업 민주주의 체제로 탈바꿈한다.

3.4. 기독교 경제윤리는 참여의 원칙에 따라 기업 차원의 경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데서 더 나아가 산업분야와 국민경제와 세계경제를 민주주의적으로 규율할 것을 요구한다. 기업 차원의 민주주의를 창설하는 것이 소유권 주장의 장벽을 넘어서야 하기에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면, 다른 영역의 경제 민주주의를 창설하는 과제는 이론적으로 큰 장애가 없다.
 산업관계의 차원에서는 산별 노동조합을 제도화하여 노동의 권력이 자본의 권력에 강력하게 마주 서게 하고, 산별교섭의 성과가 산업 분야의 모든 사업장에 공유되도록 구속하는 방식으로 경제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경제 차원에서는 노동, 자본, 정부가 대등한 주체로 참여하는 사회적 협의 기구를 창설하여 국민경제 차원의 소득분배와 거시 계획, 노동시장 정책, 기간산업의 사회화와 공공 서비스 공급의 확대, 금융의 통제와 감독 등에 관한 공동결정을 내리고 이를 법제화하는 방식으로 경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자연의 권리를 창설할 수 있다면, 자연의 권리를 대리하는 법인이 사회적 협의 기구에 다른 당사자들과 대등한 자격을 갖는 주체로 참여하여 공동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지구경제 차원에서는 무역과 금융을 규율하는 기관들이 민주적으로 조직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그 기관들이 내리는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 기관들에 대표를 파견하여 무역과 금융에 관한 민주적인 거버넌스를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 그 기관들에 파견되는 대표들은 막연히 정부 대표여서는 안 되고, 그 기관들의 결정에 각기 다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들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기관들에서 결정할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을 인정받는 대표들 가운데서 노동과 자본의 이익을 대리하는 대표들은 어떤 경우에도 동수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자연의 권리가 창설되는 경우에는, 노동과 자본과 자연의 대리자들이 대등한 주체로서 공동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구 경제 차원에서 무역과 금융의 규율에 관한 주요 논제는 중립적인 세계화폐의 창출,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가치를 고려한 IMF의 특별인출권 발행 조건의 개정, 실물경제를 뒤흔드는 화폐자본의 규모와 운동 속도를 축소하기 위한 방안,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지향성을 갖는 무역 규범의 제정 등이 될 것이다.

3.5. 기독교 경제윤리는 작은 사람들을 편드는 정의의 원칙과 인간 존엄성 보장의 원칙에 따라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기회를 보장할 것을 옹호한다.
 시장경제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기회를 보장한다는 것은 노동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보장받는 것을 뜻한다. 삶의 기회는 의식주, 병 치료, 사회적 교제, 문화적 향유 등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기독교 경제윤리가 이러한 삶의 기회를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할 때 참여의 원칙만 고려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여의 원칙 아래서도 작은 사람들의 권력을 강화시켜 기업소득과 국민소득을 적정하게 배분하여 삶의 기회를 확대하는 방식을 논의할 수 있지만, 그 논의는 기업의 의사결정 기구, 산별 노사교섭 기구, 사회적 협의 기구 등에 자격과 권한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전제하고 있다.
 오늘의 시장경제에서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노동생산성이 고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일자리가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소득을 얻지 못하고 삶의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경제윤리는 작은 사람들을 편드는 정의의 원칙과 인간 존엄성 보장의 원칙에 따라 아래의 두 가지를 제안할 필요가 있다.

3.5.1. 시장경제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일할 능력이 있고 일할 의지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자리를 갖게 해야 할 것이다. 일자리 자체가 적어지는 오늘의 시장경제에서 이러한 요구는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여 일자리를 나누는 방식으로 관철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방안은 표준화될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한 노동에서는 보다 쉽게 구현될 수 있지만, 복잡하고 전문적인 통합 노동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실현되기 어렵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일자리들은 정규적인 일자리의 위상을 갖는 것이 당연하지만, 노동자의 사정에 따라 비정규직 일자리나 심지어 파트타임 일자리가 선호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비정규직 일자리와 정규직 일자리에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차별 없이 적용되어야 하고, 노동조건과 보험 지원 등 복지 제공 측면에서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3.5.2. 오늘의 시장경제에서 일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존엄한 인간으로서 생활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원칙은 없다. 존엄한 삶은 최소한 인간의 기본욕망을 충족하면서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기회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의 기회는 노동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기본욕망을 충족하는 데 필요한 소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노동 업적과 무관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면, 존엄한 삶을 지키는 데 필요한 소득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경제윤리는 정의의 원칙과 인간 존엄성 보장의 원칙에 입각하여 무조건적 기본소득을 옹호할 수 있다.

III. 맺음말

 본 논문에서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의 관점에서 기독교 경제윤리의 과제와 그 규범적 근거를 제시하고, 역사적 시장경제의 기본문제들을 분석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시장경제를 규율하고 새롭게 형성하는 방안을 강령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역사적 시장경제의 기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안을 구체화하려면 엄청난 논의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는 교회의 자기 이해로부터 교회의 경제를 규율하는 원칙들과 구체적인 규율 방식을 제시하는 것은 교회를 위한 경제윤리의 주요 과제로 남아 있다. 필자는 다른 기회를 얻어 이에 대한 논의를 곧 펼치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개교회, 노회, 총회, 교회협의회 등 교회의 다양한 층위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과제를 논의하는 것도 다른 기회로 미룬다. 교회가 기독교 경제윤리의 과제와 그 규범적 근거, 그리고 시장경제를 규율하는 방안을 학습할 수 있도록 교회를 위한 경제윤리 교육을 디자인하는 것도 그 과제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독교 윤리학자와 교육학자가 서로 협력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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