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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5 (18:21) from 61.75.60.154' of 61.75.60.154' Article Number :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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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萬民)에서 개인(individual)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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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萬民)에서 개인(individual)으로

강원돈 (한신대 신학부 교수/사회윤리)

I. 머리말

 필자가 숭실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 사업단으로부터 받은 “만민(萬民)에서 개인(individual)으로”라는 연구 주제는 우리나라의 사회문화사와 정치사에서 만민이 개인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그 과정을 촉진시킨 요인들을 분석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분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항을 예비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만민(萬民)에 대한 간략한 고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연구 주제에 명시된 개인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만민은 군주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집합 개념이었다. 만민은 단순히 백성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는데, 성씨를 달리 하는 사람들이 가족과 씨족 단위로 군주의 지배 아래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신분과 직분이 분화되어 있었던 신분제 사회에서 만민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이 경우에는 사람들의 신분과 직분이 하늘의 뜻에 따라 정해져 있다는 관념이 작용했다. 유교의 정명(正名) 관념이 그것이다. 지배자들에게 순응하는 백성은 양민으로 불렸지만, 지배체제에 저항하고 봉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홍길동 같은 호민(虎民)에 호응하는 원민(冤民)으로 지칭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만민이나 백성 대신에 민중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민중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제폭구민(除暴救民)의 변혁 주체로 등장한 사람들을 가리켰다. 따라서 필자에게 부여된 연구 주제에서 ‘만민’(萬民)은 우리나라의 정치사와 민중저항사의 경험을 전제하면서 그 의미를 비판적으로 살펴야 할 개념이다.
 개인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만민 개념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흔히들 개인이라는 개념은 관계중심의 사고가 지배적인 동양에는 없었고, 서양에서 건너온 개념이라고 한다. 우리의 사회문화사와 정치사에서 개인은 가족적 집단주의나 민족의 과잉으로 인해 지체되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 우리 사회에는 이기주의나 개인중심주의는 있어도 개인이 탄생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개인에 관한 모종의 관념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전통과 공동체적 유대로부터 벗어난 독립된 행위 주체로서의 개인의 개념이 그것이다. 그러한 개인은 서양에서 특정한 맥락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이념형이다. 국가의 폭력이나 군주의 자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을 형성할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는 개인은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가정된 시장경제와 시민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이었다. 서양의 시민사회와 시장경제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한 자유주의는 자주적인 개인의 이념을 그 핵심으로 삼았고, 그 개인의 이념은 필연적으로 무연고적 자아로 귀착되는 경향을 띠었다. 만일 이와 같은 개인의 관념을 전제하고서 우리나라의 정치사와 사회문화사에서 개인의 계보를 추적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시도는 실패할 공산이 크다. 서양에서 발달한 자유주의적 이념형으로서의 개인은 논리적으로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 있는 사람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사회문화적 전통과 정치적 전통을 부정할 때에만 발견될 수 있는 관념이고, 실제로도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부정적 방식으로 발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서양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발달한 이념형으로서의 개인을 전제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정치사와 사회문화사에서 개인의 계보를 추적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다만 개인을 자주적인 판단과 행위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위에서 말한 바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으로서 필자는 만민이 개인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분석할 때에는 신분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의식이 태동하는 측면과 각 사람이 자주적인 판단과 행위의 주체라는 의식이 등장하는 측면을 동시에 포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주장과 개인이 자주적인 판단과 행위의 주체라는 의식이 조선 시대의 민초들에게서 어떻게 해서 나타났는가를 밝힐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민초들이 남긴 자료가 거의 없다 보니,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연구를 시도하기 어렵다. 그 대안은 만민에서 개인으로 전환(메타모르포시스)하는 과정을 사상적으로 선취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사유 과정을 분석하는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서 형성된 개인의식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만민이 개인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만족할 만하게 설명할 수 없겠지만, 그들의 사상이 당대의 민초들이 요구했거나 민초들에게 요구되는 바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다.
 만민의 평등과 자주적 개인을 사유의 중심에 설정한 사상가들은 개항 이전에도 있었다. 필자는 천주학과 서양 문물의 도전을 받으며 조선 사회의 개혁을 꿈꾸었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 혜강 최한기(惠崗 崔漢綺, 1803-1879) 등에게서 개인의식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항 이후 서양 문물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구당 유길준(矩堂 俞吉濬, 1856-1914), 송재 서재필(松齋 徐載弼, 1864-1951), 좌옹 윤치호(佐翁 尹致昊, 1865-1945)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박영효나 김옥균 같은 개화파 지도자들을 선택하지 않고 유길준을 택한 것은 인물의 비중을 고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구한말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관해 가장 체계적인 논의를 남겼기 때문이다. 서재필과 윤치호를 택한 것은 그들이 만민에서 개인으로 메타모르포시스(metamorphosis)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종교적 세계관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평양대부흥회에 참여한 무수한 개신교인들이 보여주는 개인의식을 함께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필자는 우선 개항 이전에 다산, 혜강, 수운 등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의식을 분석하고, 그 다음에 개항 이후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등과 개신교 개종 평신도들에게서 등장하는 개인의식을 분석하고자 한다.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에, 이 글에서 필자는 각각의 사상가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의식의 특성을 드러내는 만큼의 심도를 유지하면서 조선의 사회문화사와 정치사에서 개인의식의 탄생과 발전을 개관할 것이다.  
  
II. 개항 이전 천주학과 서양 문물의 도전에 대한 조선인의 세계관적 대응에 나타난 개인의식

 천주학이 조선에 전래된 시기는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조선 사회dml 경제적 기반이 크게 피폐해지고 신분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하였던 때이다. 신분질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하였던 성리학이 그 권위를 잃기 시작하자, 일부 식자층은 경세에 이바지하고 백성의 복지를 향상하는 데 쓸모 있는 지식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서 성리학을 비판하고 서학의 이름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천주학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신분질서의 질곡에 묶여서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신분질서 바깥으로 배제당하여 천민으로 낙인찍혔던 백성들은 천주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천주학의 가르침에 고무되었고, 조선의 전통적인 경천신앙의 틀 안에 천주를 받아들여 일종의 혼합종교인 동학을 창출해 내었다.
 천주학을 받아들여 소화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또렷하게 의식하게 되었고,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인에게 개인의식이 탄생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여주는 현저한 예는 물론 다산 정약용과 수운 최제우이겠지만, 천주의 가르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양으로부터 근대 정치사상과 과학사상을 받아들인 혜강 최한기가 독특한 기학(氣學)의 틀에서 인간의 개체성과 평등성을 포착하고 오륜(五倫)을 재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래서는 다산의 사천학(事天學), 수운의 시천주 고아정(侍天主 顧我情) 사상, 혜강의 수평적 오륜 이해에서 개인의 의식이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가를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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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산 정약용의 사천학(事天學)

 다산은 천주학을 접하면서 조선인에게 깊이 뿌리내린 경천사상의 틀에서 천주의 개념을 소화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성리학의 천리(天理) 개념을 비판적으로 숙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리학 이전의 유교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중용』의 신독(愼獨) 개념과 공자의 인(仁)과 서(恕) 개념을 재해석해서 새로운 인간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조선인에게 하늘은 까마득한 옛날로부터 숭배의 대상이었고, 세상 만물을 살리는 힘의 원천이었으며, ‘하나님 맙시사’라는 구어(口語)에서 드러나듯이 사람의 삶을 주재하는 주체로 인식되었다. 기우제는 사제가 하늘과 교감하여 하늘이 비를 내리겠다는 의지를 발동하게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의식이기에 경천 의식과 주재천 관념이 결합된 조선인의 전형적인 천 관념의 실례라 하겠다. 이러한 천 관념은 하늘님(하눌님, 한울님, 하느님 등으로도 발음)이나 상제라는 의인화된 표현으로 나타났거니와, 이와 같은 인격적인 주재신 관념이 조선인에게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에 조선인은 천주(天主) 관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것은 하늘을 섬김의 대상으로 인식한 다산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는 천을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이법(理法)으로 이해하는 주자학 전통의 천리(天理) 개념에 비판적 거리를 취한 채 사천학(事天學)을 전개하여 천을 섬기는 이치를 규명하였다.
 다산에게서 천은 사람에게 마땅히 할 도리를 명령하는 존재이니 사람은 하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늘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삼가는 마음으로 그 명령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바로 여기서 천명(天命)과 신독(愼獨)이 서로 만나고, 경천(敬天)과 수양(修養)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결합된다. 중용의 신독을 해석하면서 다산은 양심의 문제를 또렷하게 부각시켰다. 양심은 단순히 선량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아무도 몰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조차 나 아닌 다른 존재가 굽어 살핀다는 것을 의식하는 마음이니, 본래 함께 본다는 뜻의 그리스어 쉰에이데시스(syneidēsis)가 양심이라는 뜻으로 새겨져 서양 사상사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일리가 있다. 『중용』이 말하는 군자신독(君子愼獨)은 군자가 홀로 있을 때 스스로 삼가 생각을 바로 하고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은 내 생각과 행동을 지켜보는 내 속의 양심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산은 신독을 두 가지 측면에서 더 날카롭게 벼렸다. 하나는 두려워하고 마땅히 섬겨야 할 하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신독의 주체라는 측면이다. 이미 천주학을 소화한 다산은 천주 앞에 서 있는 사람(coram Deo)의 내면성을 포착하고, 그 내면에 자리 잡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것은 조선 사상사에서 획기적인 통찰이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내면적 자아를 의식한 다산에게서 근대적 개인의식의 단초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다산이 신독의 주체를 영명(靈明)한 존재로 간주하였다는 점이다. 다산은 만유의 본성이 하나라는 주자학의 원칙을 거부하고 인간의 본성과 인간 아닌 금수나 사물의 본성을 서로 구별하였고, 오직 인간만이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본성으로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람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으로써 천명을 받아들이고 그 천명에 따라 살아가도록 자신의 의지를 통제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늘의 명령을 받아들여 그 명령에 따라 살아가려는 마음을 갖기도 하고 그 명령을 알면서도 이를 거스르려는 마음을 품기도 한다. 다산은 이를 가리켜 “사람의 본성은 그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르기 마련이다.”(性者心之所嗜好)고 말한 바 있다. 사람은 다양한 동기와 욕구에 따라 자유롭게 발동하는 의지를 갖고 있는 자주적인 존재이기에 그 의지를 다스려 하늘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것이 도의적인 삶이다. 이 점에서 다산은 이성의 절대적 명법과 의지의 준칙을 구별하고, 절대명법에 따라 의지를 발동하도록 규율하는 준칙을 제시하고자 한 칸트의 자율적 도덕 이론과 매우 흡사한 윤리 사상을 펼치고 있다. 다산의 윤리에서 행위의 주체는 자유의지를 갖는 자주적인 개인이다.
 다산은 사천학을 정립하여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넘어섰고, 주자학 이전의 원시유학으로 돌아가 공자와 맹자가 가르친 인과 서를 독자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인은 본래 사람 둘이 함께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니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애초부터 전제한다는 뜻이다. 공자는 인을 성덕(成德)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능력을 다하여 바른 관계를 세우는 것을 뜻한다. 공자와 맹자는 인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인을 마음의 중심에 새기는 것과 이를 실천하는 것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았다. 인을 마음의 중심에 새기는 것을 가리켜 충(忠)이라고 하고, 인을 사람들 사이에서 세우는 방도를 서(恕)라 하였는데, 본래 서는 같은 마음(如心)을 품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서로 공감을 하고 마음을 같이 하는 서(恕)는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헤아려 베푸는 일이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이다. 유교경전 연구를 통하여 원시유교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파악한 다산은 충을 다지고 난 뒤에 서를 행할 수 있다는 식으로 충과 서를 선후관계로 파악하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충과 서가 같은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게 결합되어 공동체 윤리의 바탕을 이룬다고 인식했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다산은 주자학을 넘어서는 사천학의 틀에서 천주 앞에 서 있는 개인의 양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자주적인 개인의 도덕적 판단능력을 중시하였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의 실천을 통해 공동체 관계를 수립하는 윤리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필자는 다산에게서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상이 움텄다고 생각한다. 다산 사상이 조선인 특유의 경천사상의 영향사 안에 있다고 한다면, 하늘님 앞에 선 개인의 내면성과 자율성을 강조한 다산의 사상은 사람의 마음에 깃든 하늘을 섬기는 시천주(侍天主)의 삶을 강조한 수운에게서 다른 형태로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동학의 시천주와 사인여천

 수운은 삼정문란과 서세동점이 겹쳐 위기로 치닫고 있었던 19세기 초의 조선을 변화시키고 민중을 고난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개벽의 비결을 찾기 위해 조선에 전래된 유불선(儒佛仙) 삼교와 무교, 정감록 등의 비기도참사상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마침내 천주학에도 접하게 되었다. 천주학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일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천주 앞에 서 있는 자녀들 사이의 평등과 사랑을 강조했다. 경천과 천인감응에 익숙한 조선인들에게 천주를 두려워하고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상이 구별되고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는 조선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평등과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천주학의 가르침은 수운에게 가장 큰 도전이었다.
 수운이 천주학의 도전에 대응하여 그 나름의 독창적인 사상을 펼칠 수 있게 된 계기는 그가 32세 되던 해에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비기(秘記)를 얻어 수행을 거듭한 끝에 36세에 이르러 천주의 강림을 경험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겪은 뒤에 수운은 천주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삶을 숙고했고, 마침내 자신의 깨달음을 시천주(侍天主) 사상으로 응축하였다.
 수운의 시천주 사상은 조선인에게 뿌리 깊은 경천과 천인감응 사상을 전제할 때에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수운은 경천의식과 천인감응에 익숙한 조선인들에게 하눌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하눌님을 자기의 마음에 모시는 사람의 존엄성을 부각시켰고, 각 사람이 하눌님을 모신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하면서, 다른 사람 역시 하눌님을 모시고 있으니 그를 존중하고 사랑할 것을 가르쳤다. 수운에게서 시천주(侍天主)와 고아정(顧我情),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시천주는 초월적인 신의 내재성에 관한 강령이고, 고아정은 수양의 원칙이다. 오심즉여심은 모든 사람이 하눌님을 마음에 모시는 사람들이니 서로 존중하고 공경하라는 실천 지침의 근거가 된다.
 하눌님이 강생하여 마음에 내주하는 것은 각 사람이 ‘지극한 기운’(至氣)으로 임하는 하눌님을 맞이하여 마음에 모시는 일이니, 하눌님이 마음에 임하는 것을 자각하는 일과 뗄 수 없다. 따라서 시천주는 반드시 하눌님의 임재를 자각하는 주체를 전제하게 되는데, 그 주체가 바로 나(我) 자신이다. 수운에게서 천주 강생과 천주 내주의 체험은 시천주의 주체인 개인을 정립한다. 개인이 시천주의 주체이기에 수운은 각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하눌님을 모시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 마음을 닦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쳤다. 그 가르침이 바로 고아정이라는 수양 원칙이다.
 수운은 각 사람이 하눌님을 모시는 마음을 닦는 과정에서 주문을 외우게 했는데, 선생주문(先生呪文)에 이어지는 제자주문(弟子呪文)은 초학주(初學呪), 강령주(降靈呪), 본주(本呪) 등 크게 셋으로 이루어졌고, 차례대로 외우게 했다. 초학주는 ‘위천주 고아정 영세불망만사의(爲天主 顧我情 永世不忘萬事宜)’이고, 강령주는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이며, 본주는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이다. 초학문은 “천주를 위하고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임을 영영토록 잊지 않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초학문의 고아정은 각 사람이 천주를 모시고 천주를 지극히 위하는 그 마음을 지키고 있는가를 스스로 되돌아보라는 요청이다. 수운이 말하는 마음은 정(情)인데, 이 점에서 수운과 다산이 확연하게 갈라진다. 다산은 천주의 뜻(天命)을 헤아리는 기관을 영명한 이성으로 보았고, 인간의 기질과 성향에 해당하는 정은 이성의 규율 아래 놓여야 한다고 본 데 반해, 수운은 정이 하눌님으로 표현되는 지기(至氣)가 임할 때 이에 공명한다고 보고, 그 정을 통하여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영명한 이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도 정(情)은 누구에게나 깃들어 있으니, 하눌님은 누구에게나 임하여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런 점에서 수운은 마음을 가진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하눌님을 모시는 주체임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초학문 다음에 이어지는 강령주는 “지극한 기운이 지금 내 마음에 크게 강림하소서.”라는 뜻인데, 마음이 지극한 기운을 받아 그에 공명하는 경지에 이르기를 간구하는 기원문인 셈이다. 강령주에 이어지는 본주는 수운 자신이 특별히 논한 바 있는데, 시천주의 ‘시’(侍)는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자야’(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로 새겨지니, 문자적으로는, “마음에 신령이 깃들면 그 기운이 바깥으로 작용하게 되며, 한 세상을 살아가는 각 사람은 그 마음을 변함없이 간직하여야 함을 깨닫는다.”(필자 사역)는 뜻이다. 수운은 계속해서 본주를 해석하기를, 그러한 변치 않는 마음으로 살면 억지를 부리거나 강제하지 않아도 세상일이 조화롭게 풀릴 것이니 한평생 그 풍부한 지혜를 깨우쳐야 한다고 했다. 수운은 천주가 강림하여 마음에 거주하는 경지를 가리켜 ‘내유신령’(內有神靈)이라고 했는데, 마음에 모신 천주, 곧 지극한 기운을 갖고 있는 신령은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을 통해 바깥으로 작용하여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기운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른다. 수운은 이를 가리켜 ‘외유기화’(外有氣化)라고 했다. 따라서 천주 강림과 내주는 시천주의 주체로서 개인을 정립시키는 동시에 그 개인을 타인을 향해 개방시켜 사람들 사이에 소통하는 관계를 창설한다. 본주(本呪)는 이렇게 지극한 기운에 공명하는 마음을 갖고서 타인과 소통하는 관계에 들어서는 사람이 품는 실천의 의지를 가다듬는다. 따라서 본주는 “천주를 모시는 마음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조화를 이루게 하시고 영원토록 이를 잊지 않게 하셔서 그 큰 도를 깨닫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수운이 가르친 초학주, 강령주, 본주는 한편으로는 천주를 마음에 모시는 사람이 그 누구에게도 주체성을 빼앗기지 않는 독립된 개인임을 강조하면서도, 그 사람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바로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공명하며 연대하는 주체임을 가르치고 있다.
 수운은 모든 사람이 천주의 마음을 품는 주체들임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수운이 천주 강림을 체험할 때 하눌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也)였는데, 그 뜻은 하눌님의 마음이 그분을 품는 사람의 마음이니, 모든 사람이 하눌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시천주의 주체인 내가 하눌님의 마음을 품는 존엄한 주체임을 자각한다면, 천주를 모시고 있는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존엄한 주체이다. 이렇게 해서 오심즉여심은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근거가 되고, 모든 사람이 하눌님을 마음에 모신 주체로서 서로 평등하다는 주장의 논거가 된다. 신분제의 굴레에 매인 조선인들에게 수운의 시천주 사상은 사람에게 귀천과 상하가 없으니, 모든 사람이 마음을 다하여 상대방을 존엄한 주체로서 존중하고 서로 공경하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수운의 시천주 고아정 사상은 해월에게서는 향아설위(向我設位)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으로 심화되고,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에게서 마침내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한다. 향벽설위(向壁設位), 곧 벽을 향해 제사를 지낼 것이 아니라 하눌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나를 향하여 제사를 지내라는 뜻의 향아설위(向我設位)는 하눌님을 모시고 있는 개개인의 존엄성을 한없이 높게 보라는 가르침이니, 이 가르침은 마침내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는 사인여천의 가르침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사인여천의 가르침은 다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의 가르침으로 응축되었으니, 인내천은 하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그 뜻에 따라 사람의 도리를 다해 살아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그 극한에서 표현하고 있다.

3. 혜강 최한기의 오륜론

 혜강 최한기가 살던 시대는 순조 이후에 극성을 부리던 세도정치의 시대였다. 세도정치는 한편으로 왕권을 위축시켰고, 또 다른 한편으로 공권력의 사유화를 광범위하게 촉진시켜 백성들의 가렴주구를 극에 달하게 했다. 조선 사회가 적폐로 가득 차게 되자, 이에 저항하는 민중봉기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혜강은 조선 사회의 지배구조를 혁신하고 백성들이 평화 속에서 풍요롭게 사는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혜강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른 유학자들과 구별된다. 첫째, 그는 성호 이익의 제자들이 형성한 여러 학파들 가운데 북학파 계열에 속하는 후기 실학자로서 18세기 후반부터 본격화한 화폐유통과 시장확대를 중시했다. 그는 사람과 물산이 교류하고 세상 만방의 문화가 서로 만나는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혜강은 어린 시절부터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남대문 시장 근처인 창동(倉洞)에서 살았는데, 그곳 시전과 칠패 상인들이 이익을 추구하려는 적나라한 욕망을 합리적 계산에 따라 충족시키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그가 눈에 보이고 실질을 갖는 것을 중시하고 사람의 생활을 꾸려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참된 학문이라고 본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혜강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통해 서학에 접한 선배 실학자들과는 달리 1820년대에 중국에서 번역된 근대 영미의 사회과학 서적들과 자연과학 및 기술과학 저서들을 접하였다. 그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지의 정치제도를 깊이 이해하였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위시한 근대 천문학과 물리학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으며, 서양의 기술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식들과 정보들에 접한 혜강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인 사유를 버리고, 경험과 효용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과 실증주의적인 학문이론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혜강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기학(氣學)이라고 불렀다. 혜강에게는 기(氣)가 먼저이고 이(理)는 그 뒤를 따른다. 기를 전제하지 않는 이(理)는 맛을 보지 않은 채 맛을 규정하는 것과 같이 허망한 일이다. 이(理)는 기의 운행에 대한 경험과 그것에 바탕을 두고 추측을 하는 면밀한 사유를 통해 추후적으로 얻어지는 지식일 뿐이다. 따라서 이(理)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본유관념이라는 통념은 뿌리로부터 부정된다. 혜강은 이(理)의 기에 대한 선험성과 규제능력을 앞세운 주자학과 성리학을 뒤집어엎고, 사물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사물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현실을 개혁하는 진취적인 사유를 자유롭게 전개하였다.
 혜강에게서 기는 사물에 형체를 부여하고 삼라만상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만물에 두루 퍼져 만물을 변화시킨다. 혜강을 이를 가리켜 기의 활동운화(活動運化)라 일컬었다. 기는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을 관통하고 만물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니, 우주만물과 세상과 개인에 이르기까지 기의 활동운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없다. 기는 우주만물의 생성, 변화, 발전을 일으키고,(大氣運化)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며,(統民運化)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형성하고 사물을 인식하게 하고 사람으로서 이치에 맞는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一身運化) 기의 본성은 통(通)이니 우주만물과 세상과 개인이 서로 소통하는 세계가 좋은 세계이다. 혜강은 기학을 전개하면서 개인과 사회와 생태계를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셋을 통전적인 관점에서 인식하는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통찰에 기대어 혜강은 당대의 신분제와 과거제도, 전제왕권제도 등 소통을 가로막는 요인들과 구조들을 철폐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 애썼고, 대기운화에 대한 지식에 기대어 인간과 자연이 소통하며 무궁 발전하는 세계를 꿈꾸었다.
 혜강은 기학의 틀에서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였다. 혜강은 인간의 개체성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평등성과 사회성을 조리 있게 설명한다. 혜강은 각 사람이 천지의 기를 자신의 몸에 받아 뼈와 근육, 혈관과 오장육부, 감각기관과 인지능력 등을 구비하고, 감각적 경험과 이에 바탕을 둔 추측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학습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며 행동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혜강은 기가 사람에게서 형체를 이루고 그 사람을 형성, 발전, 변화시키는 과정을 나타내기 위해 일신운화(一身運化)라는 표현을 선택하여 인간의 개체성을 부각시켰는데, 이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다. 더 나아가 혜강은 경험에 터를 잡고 학습을 하여 지식을 형성하고 인륜적 삶을 꾸려나가는 주체를 자아(自我)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였으니, 이 또한 살아가면서 스스로 물리를 터득하는 주체의 개별성을 중시하는 용법이다. 모든 사람은 천지의 기를 받아 일신운화의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똑같고, 따라서 평등하다. 혜강에게서 인간의 개체성과 평등성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일신운화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활성화하여 공동체 관계를 이루게 하기에 각 사람이 일신운화의 주체로서 개체성을 띠지만, 그 사람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관계 안에 있는 개인이다. 인간의 개체성과 사회성은 혜강의 인간이해에서 통합적인 관점에서 고찰된다. 혜강은 사람마다 배우고 익히는 능력이 다르고 스스로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이 다르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위계질서를 세워서는 안 되고, 도리어 능력과 역량에 따라 사람들이 수행하는 기능과 역할을 달리 하여 서로 협동하는 삶을 살아가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혜강은 유교의 정명(正名) 개념으로써 신분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옹호하려고 들지 않고, 각 사람이 사회에서 맡는 지위와 역할을 기능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일신운화의 개체성과 평등성에 근거하여 사회적 위계질서를 부정한 혜강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여 마침내 세상의 평화를 이루는 이치를 제시하고자 한다. 혜강이 통민운화로부터 군주와 백성이 함께 통치하는 정치제도를 논한 내용을 여기서 깊게 들여다 볼 겨를이 없지만, 사람의 평등성과 사회성을 중시하는 혜강의 독특한 오륜 해석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혜강의 오륜(五倫) 해석에서 독특한 것은 삼강(三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혜강은 삼강오륜이 아니라 ‘삼강이 없는 오륜’을 말한다. 삼강은 군신, 부자, 부부 사이의 위계를 전제하는 질서 이데올로기이다. 임금과 아버지와 지아비는 위에 있고, 신민과 자식과 지어미는 아래에 있다. 위와 아래의 지배관계에 바탕을 두고 왕에 대한 신민의 충(忠)과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효(孝)와 지아비에 대한 지어미의 순종이 규범화되었고 사회통제의 기제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혜강은 이러한 수직적 위계질서를 당연시하는 삼강을 배척하고,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歸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등의 오륜이 각기 다른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서 파트너관계를 맺으며 호혜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이치라고 역설한다. 유가가 전통적으로 강조해 왔던 정명과 오륜은 혜강에게서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인 공동체 윤리로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혜강은 이처럼 재해석된 오륜에 조민화합(兆民和合)을 더하여 오륜의 정신에 따라 세계만방의 인민들이 서로 화합하는 이치를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혜강이 당대 현실에서 가장 앞선 서구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및 기술과학에 접하면서 조선 사상사의 한 축을 이루는 기론을 혁신하여 일신운화, 통민운화, 대기운화를 아우르는 통전적인 기학을 제시하고, 그 틀에서 인간의 개체성과 평등성과 사회성을 파악하였다는 것은 조선 사상사가 이룩한 빛나는 성취이다. 유감스럽게도 혜강 사상은 제도권 지식인 사회에서 거의 수용되지 못했고, 개항 이후에 조선 사회의 개혁과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엘리트들이 벌이게 될 논쟁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III. 개항 이후 서구 문명에 대한 조선인의 세계관적 대응

 개항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서양 문명과 정치 제도를 직접 접하게 만들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본 방문과 1883년 보빙사의 미국 방문에서 시작하여 조선인들이 세계 각국의 문물에 접할 기회가 늘어났고, 유학이나 망명 등으로 해서 일본이나 미국에서 장기적으로 체류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것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저서들과 번역서들을 통하여 서양의 사상과 정치제도와 기술문명 등을 접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말로만 듣던 인간의 권리, 민주주의와 참정권, 과학문명, 합리주의 등이 서양에서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 여러 제도들에 무르녹아 있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면서 조선인들은 조선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방안을 놓고 고민했다.
 그러나 서구의 도전은 엄중한 것이기도 했다. 아편전쟁 이후에 서세동점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정부와 엘리트들은 국가의 존립을 걱정하여야 했다.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기치가 개항으로 인해 꺽인 이후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변화시키자는 엘리트들은 조선인의 사상적 전통을 살리면서 서양의 문물을 개화의 방편으로 삼자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담론을 거쳐 사상과 제도를 근본적으로 고쳐 국가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변법자강(變法自疆)의 담론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조선인이 서양 문물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도입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조선인의 세계관이 개항 이전에 비해 더 큰 폭으로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고, 이미 싹텄던 개인의식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적 변화와 개인의식의 심화과정은 구당 유길준, 송재 서재필, 좌옹 윤치호, 평양대부흥회에 참여한 무수한 개신교인들에게서 확인된다.

1. 구당 유길준의 권리 이론

 조선사상사에서 구당 유길준은 서양의 ‘권리’ 개념을 받아들여 이를 본격적으로 성찰한 첫 세대 지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서양의 자유권 개념과 유학의 정명(正名) 사상을 서로 결합하여 그 나름의 독특한 권리 이론을 전개했고, 민의 자유와 책임이 어우러지는 법치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조선에서 권리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880년대 초였지만, ‘권리’라는 문자보다는 자주지권(自主之權)이라는 어구가 더 자주 쓰였다. 권리의 ‘리’(利)는 이익을 뜻하였기에 공공연한 이익의 추구를 금기시한 유교 전통에서 권리라는 낱말은 기피되었다. ‘권리’라는 낱말이 ‘자주지권’이라는 어구와 나란히 사용된 것은 1883년 11월 10일자 「한성순보」(漢城旬報)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다.

“인민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 정부가 그들이 하는 일을 금지할 필요가 없고, 각 사람의 뜻과 취향에 따라 의논하게 하니 이를 가리키는 적절한 명칭이 자주지권(自主之權)이다. 자주지권에 바탕을 두고 상하 협력하여 일을 하니 모든 사람이 이롭게 된다. 크게는 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작게는 한 사람의 권리(權利)를 보호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이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권리의 주체가 ‘일신’(一身), 곧 개인으로 설정된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개인의 권리 신장과 국가의 부강이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점이다. 「한성순보」가 정부 주도로 창간된 정부 기관지임을 감안한다면, 1883년 당시에 정부와 친정부 지식인들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국가부강의 관건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성순보」의 창간에 관여하고 발행 실무를 맡았던 유길준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유길준은 1881년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간 뒤에 1년여에 걸쳐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화 이론가인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문하에서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압축적인 근대화를 추진한 과정을 연구하였고, 1883년 조미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뒤에 갑신정변 직후인 1885년 1월까지 미국에 체류하며 기독교 문화, 인권, 민주주의와 참정권, 과학문명, 합리주의 등이 미국 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살폈다. 미국을 떠나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힌 뒤에 1885년 9월에 귀국한 유길준은 갑신정변 연루자로 몰려 연금 생활을 하던 중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여 1889년에 이를 탈고했다.
 『서유견문』의 집필자인 유길준은 천부불가양의 권리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국가에 의해 침탈될 수 없는 기본적 권리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의 자유가 무제한한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생각을 “인민의 권리는 자유와 통의를 말한다.”는 정식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권리를 개념적으로 정리한 뒤에 유길준은 곧바로 이를 쉽게 풀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는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이 좋아하는 대로 따라서 하되, 생각이 굽히거나 얽매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결코 자기 마음대로 방탕하라는 취지는 아니고, 법에 어긋나게 방자한 행동을 하라는 것도 아니다. 또 다른 사람의 형편은 돌보지 않고 자기의 이익이나 욕심만 충족시키자는 생각도 아니다, 나라의 법률을 삼가 받들고 정직한 도리를 굳게 지니면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인 직분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는 권리이다.”

인용문에서 유길준은 자유가 타인의 간섭이나 지배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사대로 행위할 수 있는 권리이지만, 세 가지 전제를 달았다. 하나는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법률의 규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정직한 도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입장은 자명해서 더 덧붙일 것이 없다. 둘째 입장은 그 취지가 분명하기는 하지만, 약간 애매한 구석이 있다. 자유롭게 산다고 해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함께 살기 위해 제정한 법을 자의로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일리가 있지만, 만일 법이 자유의 본질을 침해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고찰이 나타나지 않는다. 셋째 관점은 유길준이 말하는 통의(通義)에 따라 자유가 행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니 그 주장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조금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는 통의를 한 마디로 ‘당연한 정리’(正理)라고 규정한 뒤에 “천만가지 사물이 당연한 이치를 따라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상경(常經)을 잃지 않고, 거기에 맞는 직분을 지켜 나아가는 것이 통의의 권리이다.”고 설명했다. 삼라만상이 서로 연결된 유기적 질서에서 각각의 사물과 사람이 처해 있는 위치와 몫이 있으니, 각 사람이 그 질서 안에서 맡아야 할 직분에 충실한 것을 가리켜 통의라 한 것이다. 이것은 유길준의 통의 개념이 유학의 전통적인 정명(正命) 개념을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길준은 통의를 논하면서 ‘천연’의 통의와 ‘인위’의 통의를 나누고, ‘무계’의 통의와 ‘유계’의 통의를 구별했다. 천연의 통의는 자연히 생겨난 것이니 그것을 뒤흔든다고 바뀌지 않는다. 인위의 통의는 법률의 규율 아래서 각 사람이 누리는 권리를 말한다. 무계적 통의는 타인과 관계없이 각자 누리는 권리이고, 유계적 통의는 사회적 관계에서 각 사람이 누리는 권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유길준은 각 사람이 천부불가양의 권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속해 있는 사회적 관계에서 법률의 지배를 받으며 권리를 주장하고 보장받을 것을 강조한 셈이다. 유길준이 자유와 책임을 논하는 것은 바로 이 맥락이다.
 그는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논하기 위해 자유에 관한 고찰을 심화시킨다. 우선 그는 자유를 ‘타고난 자유’와 ‘처세적 자유’로 구별했다. ‘타고난 자유’는 ‘천지의 올바른 이치’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 이외에 그 누구에게 속박을 받거나 침해되지 않는 자유이다. 그는 토마스 홉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이러한 자유를 행사하게 되면 상호 갈등과 분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였고, ‘타고난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법률의 규율을 받아 모든 사람의 이익을 도모하도록 하는 ‘처세적 자유’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자유가 권리라면, 그 자유는 통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법의 규율이 없으면 자유를 지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유길준은 “법률이라는 기능이 없었다면 권리도 존재하기가 반드시 어려웠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렇게 생각을 펼친 다음에 그는 자유를 ‘좋은 자유’와 ‘나쁜 자유’로 구별하였다. 좋은 자유는 하늘의 이치를 정직하게 따르는 자유이고, 나쁜 자유는 사악하고 변벽된 인간 욕심에 내맡겨진 자유이다. 앞의 것은 ‘유식한 사람의 자유’로서 사람의 욕심을 억제하고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여 정직한 방법으로 사람의 권리를 간직하는 자유이지만, 뒤의 것은 ‘새나 짐승의 자유’요 ‘야만인의 자유’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좋은 자유’는 각 사람이 하늘이 정한 질서를 존중하며 하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응하여 공동의 복지에 이바지하는 자유이니,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책임을 다하는 자유이다. 이것은 철저히 유교의 정명 개념의 틀에서 기획된 자유 개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평등에 관한 논의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는 모든 사람이 천부불가양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고,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사람 위에도 사람 없고, 사람 아래에도 사람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만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현실 세계에서 사람마다 지위가 다르고, 직분과 계급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생의 권리’는 모든 사람이 ‘안에 간직한 권리’로서 누구나 차이가 없지만, ‘지위의 권리’는 ‘밖으로부터 온 세력,’ 곧 제도에 의해 부여된 것이기에 각 사람이 처한 지위와 계급에 따라 다르다. 그는 각 사람이 지위와 계급에 따라 받은 직분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조화로운 인륜공동체를 형성할 것을 꿈꾸었는데, 그것은 유학의 정명(正名) 개념에 따라 신분적 위계질서를 인정하면서 신분들 상호간의 협력과 조화를 꾀하는 사회이다. 이렇게 보면, 유길준은 아직 신분제에서 해방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통치를 하는 신분과 통치를 받는 신분을 엄격하게 구별하였기에 인민이 정치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인민의 참정권 제한이 자신의 자유주의적 성향과 모순을 이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길준의 자유주의가 갖는 특성은 그가 작성한 인권 목록과 인권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인권 목록의 맨 앞에는 신체와 생명의 자유가 나오고, 바로 그 다음에 재산의 권리가 이어진다. 그 뒤로는 순차적으로 영업의 자유,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명예의 통의 등이 명시된다. 이 권리들의 주체는 당연히 개인이다. 이 권리들에 대한 유길준의 해석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개인의 신체와 생명과 재산에 대한 법률적 보호가 가장 중시된다는 점이다. 우선, 유길준은 법에 의해 인신의 자유와 생명을 보호받는 데에는 만인이 평등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권력과 지위를 가진 자가 인명을 경시하고 자의적이고 사적인 형벌을 자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당대 현실에서 “불법적인 행동으로 사람의 머리털 하나, 손가락 하나라도 해치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이치를 어기는 것”이요, 그 누구도 남이 자신에게 그런 일을 행하도록 좌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법에 의하지 않은 형벌의 집행은 허용해서는 안 되며, 군주라도 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사형은커녕 남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다. 그 다음에, 유길준은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여 남의 재산을 빼앗는 일이 흔히 일어났던 조선 말기에 국가의 책무가 인민의 재산을 법으로 보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서 재산의 권리는 법률에 저촉되지 않을 경우에만 법에 의해 보호될 수 있고, 국가나 군주나 타인에 의한 침탈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 그는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재산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취득, 점유, 증여, 상속 등이 법률에 어긋나지 않을 경우, 그 재산은 법률에 의해 보호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재산권에 관련하여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유길준은 개인의 신체와 생명과 재산에 대한 법률적 보호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사람들은 당대 현실에서 전제군주의 자의적인 구속과 처형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축적한 재산의 몰수를 피할 수 있는 방편을 찾았던 신분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신분제도에서 상층 엘리트였다. 이런 점에서 유길준의 자유주의적 권리 이론은 기득권층이 필요로 하는 언어를 제공하였다고 평가될 수 있고, 유학의 정명 개념에 근거한 신분제와도 충돌하지 않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유길준은 서양으로부터 개인의 자유권 개념을 받아들여 이를 소화한 뒤에 유학의 정명 사상과 결합시켜 독특한 권리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공동체적 관계 속에 있는 개인을 염두에 두고 자유주의 사상을 펼쳤기에 오늘의 담론 지형에서는 공동체주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유길준은 개인의 자유권을 옹호하고 이를 법률로써 보장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인민의 대다수에게 참정권이 허용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인민이 우매하기에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민이 정치에 참여하여 인민의 권익을 보장하는 입법에 나서는 것은 하늘이 정한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것이 유길준이 구한말에 표방한 자유주의의 한계이다. 유길준이 옹호한 신체의 자유와 생명의 보장과 재산의 권리는 그가 살던 시대에는 법률에 의해 보장되지 않았고, 그러한 법률의 제정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아래로부터 조직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지도 않았다. 조선 정부는 『서유견문』이 발행되었던 1895년에 갑오경장을 시도하였으나 자유권을 보장하는 입법은 지지부진하였고, 1899년 고종 암살 미수 사건 이후에 황제의 절대권이 강화되자 법에 의한 통치는 다시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근대적 형법과 재산권 법제가 전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의 신체와 생명과 재산을 법률로써 보호하여야 한다는 유길준의 주장은 한갓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

2. 송재 서재필과 좌옹 윤치호의 개인의식

 유길준이 조선 사회의 전통을 중시하여 서양의 권리이론과 유학의 정명 사상을 절충하는 입장을 취했다면, 서재필과 윤치호는 조선의 전통과 단절하는 방식으로 서양의 권리 사상을 옹호하고 이를 민중에게 계몽시키고자 했다. 유길준이 동도서기의 입장에 가까웠다면, 서재필과 윤치호는 변법자강의 노선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조선의 전통과 결별하도록 한 결정적인 계기는 기독교로 개종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서재필과 윤치호를 아래서 함께 다룬다.

1) 서재필

 서재필은 구한말에 「독립신문」 발행과 독립협회 활동을 통하여 개인과 국민의 권리를 계몽하는 데 앞장서고 변법자강의 기치를 높이 치켜든 인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대부분의 개화파 인사들과는 달리 그는 조선의 전통과 제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서양의 권리 장전에 충실한 국가의 형성을 옹호하였는데, 그러한 입장은 갑신정변 참여와 가문의 몰락, 미국 망명, 기독교 개종, 미국 사회의 체험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에서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바 있는 서재필은 갑신정변에서 무력을 조직하고 행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을 거쳐 1885년 5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건너갔다. 그는 갑신정변에 가담한 역모죄인으로 몰려 그의 양친과 처는 자결하였고, 손아래 동생은 처형당했으며, 두 살배기 아들은 굶어죽었다. 조국과 가족으로부터 절연되어 있었던 서재필은 미국에 홀로 살면서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극한의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그 참혹한 지경에서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그의 정치적 실패와 가정적 참극은 그가 조선에 대해 극도의 반감과 비판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기독교 개종은 그의 신념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조선의 유교적 세계관과 전통적 가치관에 대해 결별하게 만들었다.
 2년 동안의 일본 유학 시절에 서양의 사상과 문물에 이미 눈을 떴던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참여할 때부터 이미 조선의 개혁에서 무엇이 결정적으로 중요한가를 인식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후대에 작성한 자서전에서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갑신정변 둘째 날인 12월 5일 오전에 발표한 새 정부의 정책들 가운데 과세, 사법, 교육 분야에서 정부행정기관의 개혁, 자질에 따른 관리 선발, 편파주의와 미신적 관행에 따른 정부예산의 낭비 제거, 신분차별의 철폐 등을 주요 정책으로 꼽고, 특히 “인민의 평등·자유권을 제정”한다는 정책이 폐정개혁안에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을 중시했다. 이에 관련해서 그는 “오랫동안 압박과 착취에 신음하던 민중들이라 평등·자유라는 말만 들어도 기뻐서 피가 끓어오를 일이어늘, 지금 그것이 정령화되었으니 기뻐서 뛰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고 썼다. 이미 서재필은 자유와 평등의 실현이 조선인의 당대 최고의 과제라고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더욱 더 첨예하게 가다듬게 한 것이 서재필의 기독교 개종이다. 아주 오래 전에 서재필의 개종이 상징체계의 재구성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박영신은 서재필이 개종을 통해 궁극적 실재와 만남으로써 ‘전통적 질서의 타당성을 근원적으로 흔들어’ 놓는 원점을 확보하였다고 지적한다. 서재필이 만난 개신교의 하나님과 신념체계는 조선의 전통과 제도를 총체적으로 비판하는 초월적 거점이 되었다는 뜻이다. 조선 사회를 정치적으로 규정하는 지배적인 세계관이 유학이고, 유학의 핵심이 정명 사상이고, 정명 사상이 신분제에 바탕을 둔  위계적인 사회질서를 정당화하고, 위계적인 사회질서가 권력과 지위를 매개로 한 억압과 착취와 관료적 부패의 온상이고 인권유린과 생명경시의 바탕이고 민중을 자포자기와 나태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라는 인식은 서재필에게서 일관성 있는 구도를 갖춘 완결된 논리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서재필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서양의 권리장전을 구현하는 법치국가를 조선의 미래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서재필의 신념은 조선 정부의 압력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인 1898년 5월 7일에 「독립신문」에 쓴 논설에 잘 나타난다. 그는 이 논설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박해를 이기고 마침내 세계 종교를 이루어 선진 국가들의 인구의 대다수를 신도로 거느리고 있는 것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신령한 지식’을 지키는 ‘옳은 사람’과 ‘사람이 만든 잡념과 구부러진 학문’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대비하고, 세계 각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옳은 의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이기고 번번이 승전하였다고 말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거의 근본주의적인 확신을 가졌던 서재필은 1896년 12월에 귀국했다. 그 당시에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에 동도서기 담론이 무너지고 갑오경장이 시도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변법자강의 기치를 들었다. 그는 조선 사회의 적폐를 낱낱이 비판하고 인민의 권리를 보장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한다는 노선을 천명했다. 그는 그 누구도 하나님이 인민에게 부여한 권리를 빼앗기거나 침탈당하지 않는 제도를 만들고자 하였다. 오직 그러한 권리 의식을 갖고 있는 인민이 산과 같은 기세로 일어서야 나라를 지키고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서재필은 개신교에 입문한 이래로 한 평생 동안 종교적 신념을 갖고서 개인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민권을 확립하여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것은 한 줌도 안 되는 정치적 엘리트의 힘만 갖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가 한 일은 민중을 계몽하는 것이었다. 그는 계몽된 민중의 힘이 없다면 조선을 공화주의적으로 개혁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우민관에 빠져 있는 지식인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민중을 계몽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재필은 고루한 유교적 세계관과 갖가지 미신에 사로잡힌 조선의 야만과 기독교적 서양의 문명을 거의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있었기에 그가 설정하고 있는 조선과 서양의 간격을 메우려면 상당한 기간을 두고 민중을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에 민중이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은 경계되어야 했다. 그는 농민봉기가 외세에 의해 처참하게 진압되고 위로부터의 개혁인 갑오경장이 추진되던 시기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법의 지배를 외치고 입헌군주국을 수립하기 위해 애썼지만, 민중이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실질적인 힘을 갖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 자신이 1919년의 독립시위를 전해 들으며 회고했듯이, 그는 구한말에 개인의식과 민권의식이라는 ‘좋은 씨’를 뿌리다가 추방당한 조선계 이방인이었다.

2) 윤치호

 윤치호는 많은 점에서 서재필과 닮았다. 일본 유학, 갑신정변 이후의 망명과 기독교 개종, 미국 유학, 갑오경장 이후의 귀국, 「독립신문」 발간 및 독립협회 활동 등이 그렇다. 그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1883년 4월까지 머물며 후쿠자와 유기치를 만나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살폈고, 일어와 영어를 익혔다. 그는 영어를 터득한 덕분에 1883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뒤에 조선에 부임한 최초의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의 통역으로 일했고,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들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갑신정변 실패 뒤에 푸트의 추천서를 들고 1885년 1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오랜 방황 끝에 1887년 4월 3일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888년 상하이 주재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약 5년 동안 머물며 밴더필드대학교와 에모리대학교에서 신학, 영문학, 정치학 등을 섭렵하였다. 미국 유학 기간에 그는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였고, 경제, 사회, 정치, 국제관계 등에서 힘이 곧 정의라는 관점을 취했다. 미국은 그에게 기독교 문명과 민주주의, 그리고 과학문명이 융합된 이상적인 사회였다. 그는 미국을 모델로 해서 조선을 개혁하여 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중국 상하이를 거쳐 1895년에 귀국한 그는 정부 관료로서 외교 업무를 맡았고 독립협회를 창설하는 데 앞장섰다.
 윤치호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개종이었다. 세례를 받기 직전인 1887년 3월 23일에 작성한 신앙고백문에서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던 교만한 태도를 버리고, 자신이 불의한 자요, “어떠한 인간의 힘으로도 진정한 의미의 죄없는 생활이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사랑이심과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믿는다고 썼다. 그는 개종을 하면서 자신이 태어났던 나라를 이교(異敎)의 나라로 규정했고, 자신이 지난  날에 쌓았던 학문이 이교의 경전에 터 잡고 있음을 고백하였다. 이것은 기독교를 통해 초월적 실재를 만남으로써 그의 ‘이념적 상징체계’가 근원적인 변형 과정을 거쳤음을 의미하고, 그가 기독교적 관점에서 조선을 지배해 왔던 유교적 사유체계와 가치관을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이를 타파하고자 마음을 먹었음을 뜻한다. 이 신앙고백문에서 윤치호는 자신이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것은 “나의 시간과 재능을 다하여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신앙을 증진하여,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자신과 내 형제를 위하여 쓸모 있는 생을 살려고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천명했다. 신앙고백문은 이미 윤치호가 신앙적 확신과 윤리적 실천을 통합적으로 사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접한 윤치호는 비록 미국이 인권을 철두철미하게 보장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였으나 개인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제도를 운영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미국이 강대한 국가로 발전한 원동력은 기독교 사상에 있다고 믿었다. 조국에 돌아온 뒤에 그는 미국과 같은 강대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조선 사회가 세계관적 전환을 이루고 변법자강의 길로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각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사람의 권리’를 인식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계몽 활동을 하여야 한다고 확신했다. 서재필이 급진화된 독립협회 일로 인하여 조선 정부의 추방 명령에 따라 미국으로 떠나면서 윤치호에게 「독립신문」을 계속 맡아달라고 했을 때 이를 승낙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확신과 개인이 천부불가양의 권리의 주체라는 윤치호의 확신은 서재필로부터 「독립신문」을 인수할 때 그가 쓴 글에 아래와 같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같은 확신을 갖고서 민중을 계몽하여 인권 의식과 사민평등 사상을 갖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독립신문」을 인수한 유일한 이유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하여 오직 그 발행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 국문판을 통하여 그(=서재필)는 압박받는 한국인들에게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사실 – 그것이 앵글로색슨이나 라틴 민족의 이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천부(天賦)의 것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진리인 사실 – 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그들이 국왕과 양반을 위하여 짐을 지는 가축과 같이 부림을 당하는 우마(牛馬)가 아니며, 양보할 수 없는 권리와 번영은 우연히 길에서 줍는 것이 아니라 오랜 노력과 연구와 투쟁을 통하여 획득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그들이 만일 이러한 권리와 번영을 향유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이를 위하여 일해야 하며, 아니 투쟁해야 하며, 아니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 서재필 박사는 이제 떠나야 한다. 「독립신문」도 떠나야 할 것인가? 그러나 「독립신문」의 필요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절실히 느끼는 한, 우리는 「독립신문」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윤치호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천부불가양의 권리이고 모든 인간이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 평등하다고 믿었다. 그것은 윤치호에게는 종교적 확신이기도 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선물로 받았다는 종교적 확신이 윤치호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불굴의 의지를 갖게 만들었다.
                                                  
4. 개신교 회심체험의 개인주의적 특징

 앞에서 분석한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등의 개인의식이 조선 시대 말에 활동한 개화파 엘리트들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개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라 한다면, 1907년 평양대부흥회에서 벌어진 조선인 개종자들의 회심 간증은 평민들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 제임스 게일은 평양대부흥회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에서 1907년 1월 14일 저녁 집회가 ‘성령의 놀라운 임재가 임박한 것 같이’ 보이는 분위기였다고 묘사하고, “연합된 통성기도가 회중을 덮었고, 모인 사람 전체가 열광하였다. (…) 한 명 한 명 차례로 일어나서 그들의 죄들을 고백했다. 그들은 깨어졌고 통곡했다. 새벽 두 시까지 집회는 계속되었고, 회개와 통곡, 그리고 기도가 이어졌다.”고 기록했다.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들이 열광적 분위기를 연출한 평양대부흥성회의 압권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거룩한 분 앞에서 그는 자신의 온 존재를 뒤흔드는 두려움과 떨림을 체험하고, 그분의 눈초리와 붙잡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게일은 부흥성회에 참석한 한 장로의 말을 실명으로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그곳에는 탈출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않은 죄에 대한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우리 위에 덮쳤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떨쳐버리고 도망칠 수 있을까가 질문이었습니다. (…) ‘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만약 제가 지옥에 제 침상을 둔다면 당신은 그곳에 계십니다. 만약 제가 새벽 날개를 치며 도망간다면, 심지어 그곳에도 당신은 나를 따라오십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정익로라는 사람이 간증한 말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서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고, 그가 은밀하게 생각하고 감추고 있는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 있다는 자의식을 생생하게 전한다. 바로 이 자의식은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되돌아보는 종교적 의식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성찰하는 도덕적 의식이기도 하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의 깊은 내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이 자리는 가장 원초적인 개인의식이 드러나는 자리이다. 그러한 내면성을 확립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신다는 마음으로 그 자신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이를 고백하기에 이른다. 평양대부흥회에서 나타난 특이한 점은 이러한 죄책고백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일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들이 휩쓸려 들어간 열광적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차례대로 일어나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였다. 어떤 사람은 청일전쟁 때 도망을 치기 위해 아이를 버려 죽게 한 죄를 고백했고, 다른 사람들은 강도질한 죄, 빚을 성실하게 변제하지 않은 죄,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예전에 저질렀던 나쁜 행실을 버리지 못한 죄 등등을 고백하였고, 선교사들과 길선주 목사도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였다. 회중 앞에서 죄를 고백한 사람들은 죄의 짐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와 기쁨을 느꼈다.
 게일이 수집한 회개와 죄의 고백에 관한 간증 사례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문제의 죄들이 개인의 내면적인 죄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깨뜨린 인륜적 죄과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륜적 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마음에 숨겨두는 기간 동안에 겪었을 가책과 내면적 고통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인륜적 죄과를 저지른 사람들은 양심의 칼이 자신의 내면을 찌르는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일이 수집한 간증들에는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행세하는 교만에 사로 잡혀 있었다는 취지의 가장 내면적인 죄에 대한 고백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인들에게 스스로 하늘을 자처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하늘이 정한 뜻을 내세워 신분제를 정당화하는 일이 얼마나 교만한 일인가를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조선인들에게 아직 낯설었고, 자신도 얼마든지 그런 교만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되짚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평양대부흥회가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갔기에 그 분위기에 사로잡힌 사람들 사이에 이참에 죄를 고백하고 털고 가자는 마음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 너도 나도 구체적인 인륜적 죄책을 고백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인륜적 관계를 깨뜨린 죄를 회중 앞에서 고백하고 죄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것은 의미가 있다. 게일은 평양대부흥회 이후 평양의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 종은 지금 꼭 해야 할 일, 곧 회개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스스로를 회복하여 올바르게 사는 일에 사람들이 유의하게 만들고 있었다.” 평양대부흥회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가 동시에 회복되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증언이다. 그러나 게일 자신도 개인의 내면에 도사린 교만의 죄에 대해서는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지 않다. 평양대부흥회에서 신도들이 주로 인륜적 죄과를 고백하였다는 것은 한편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는 유교의 영향력이 그 당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여전히 강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 인륜적 죄과를 회중 앞에 고백한 뒤에 해방감과 기쁨을 느꼈다는 전언이 암시하듯이 죄와 용서의 기계장치가 개인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죄를 고백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기에 그것으로 다 되었다는 생각이 심어졌다는 뜻이다. 개인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죄와 용서의 기계장치는 쉽사리 사회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빚어낼 가능성이 크다. 어떤 면으로 보나, 그것은 성숙한 신앙의 자세가 아니다.
 평양대부흥회에서 벌어진 죄의 고백에서 인륜적 죄과에 대한 고백이 두드러졌을 뿐 개인의 내면적 죄에 대한 성찰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초기 개신교인들의 개인의식이 더 성숙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게일은 조선인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그분은 여러분을 자기로부터, 슬픔으로부터, 죄악으로부터, 그리고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고 선창하면, ‘할렐루야’라고 화답한다고 전하고 있다. 게일의 전언은 조선인들이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 ‘자기’는 한 사람의 깊고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죄에 묶인 ‘자기’이기보다는 그 낱말 뒤에 묘사되어 있는 슬픔과 죄악, 질병과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일 것이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에 조선의 평민들에게 싹트기 시작한 자기의식의 정체를 게일은 다음과 같이 슬픈 어조로 전하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는 ‘자치’나 ‘자기 방어’와 같은 지식이 없다. 그들은 과거 여러 세대에 걸쳐 전제군주의 통치 아래서 살아왔고, 자신들을 보호하는 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왕도 없고, 보호자도 없다는 생생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이 평양대부흥회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며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은 죄를 회중 앞에서 고백한 사람들일 것이다.

IV. 결론

 조선인들에게 개인의식은 개항 이전에 이미 싹트고 있었다. 만민의 평등과 자주적 개인을 사유의 중심에 설정한 사상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주학과 서양문물의 도전을 받아들인 다산 정약용과 혜강 최한기 같은 유학자들이 성리학적 세계관을 내재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주적인 개인을 정립하고 수평적인 공동체 윤리를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수운 최제우는 시천주(侍天主) 고아정(顧我情) 사상을 통하여 매우 높은 수준의 개인의식을 확립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윤리를 정립했다.
 개항 이전에 조선을 지배하던 유교 이데올로기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의식이 태동하였다면, 개항 이후에는 서양 문물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구당 유길준 같은 인물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체계적인 사유를 전개하고, 개인의 자유권을 법률로써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특히 개인의 신체와 생명과 재산을 법률로써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큰 책무라고 주장하였다. 송재 서재필과 좌옹 윤치호 같은 기독교 개종 인사들에게서는 유교적 세계관과 조선의 전통적인 관습과 제도를 버리고 변법자강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고, 모든 개혁의 출발점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고 보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강력하게 나타났다. 개신교로 개종한 평민들에게서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내면의식이 싹트고 각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났다.
 이러한 개인의식이 태동하기는 하였지만, 조선 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법률로써 보장하는 근대적인 법치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때까지 전제군주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개인의 신체와 생명과 재산은 권력과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침탈되었다. 식민지 주민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은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입법의 길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참정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0년대에 식민당국은 보안법을 도입하여 공안통치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니,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근대적 법제로 보장하겠다는 의사는 거의 없었다. 식민당국이 같은 시기에 도입한 근대적 재산권 법제는 조선인들의 전통적인 재산점유권 제도를 무력화시켜 일본인들의 재산권을 확대하고 공고화하려는 시책이었고, 대부분의 조선 민중은 반봉건적인 지주-소작 제도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 의식이 몸을 입을 수 있는 기회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 부여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인들에게 개인의식이 태동하였지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체제가 사실상 부재한 식민지적 상황이 조선인들을 개인으로 성숙하는 것을 방해했다.
 개인이 국가에 의해 보호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인을 보호하는 기구는 가족이었다. 조선인들이 가족의 틀에서 개인의 존립을 보장받을 수밖에 없었기에 조선인들에게는 개인주의보다는 가족적 집단주의가 강하게 발현되었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만이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 상황이었고, 한국에 사회국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극히 최근에 와서야 가족적 집단주의가 퇴조하고 개인주의가 강력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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