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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 Won-Don's Social Ethics Article Archive

2003/02/11 (00:19) from 61.74.144.229' of 61.74.144.229' Article Number :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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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신학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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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머리말

 올해로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가 탄생한 지 50주년이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신학적 지형에서 기장이 갖는 독특한 위치와 역사적 의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장 신학의 어제와 오늘을 살피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돌이켜 보면, 기장 신학은 역사적으로 몇 단계에 걸쳐 심화되고 발전되어 왔던 것 같다. 필자는 세 시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 기장 신학의 성격이 형성되는 시기, 개발독재와 권위주의에 맞서 투쟁하면서 정치신학적이고 현실참여적인 민중신학을 정립한 시기, 다원적 시민사회의 전개 과정에서 기장 신학을 재정립하고자 노력하는 시기가 그것이다.
 아래서는 이러한 시기 구분에 입각하여 각 시기의 기장 신학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2. 기장 신학의 성격 형성

 많은 사람들은 기장 신학을 규정하면서 역사참여 신학의 특성을 띠고 있다고 말하고, 이를 자유주의 신학이나 근본주의적 보수 신학과 구별한다. 이러한 유형론적 구별은 한국 기독교 지형에서 기장 신학이 갖는 특성을 어느 정도 드러내기는 하지만, 아주 엄밀한 것 같지는 않다. 기장 신학의 성격을 조금 더 명료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 신학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왔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기장 신학은 무엇보다도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 교회에 이식되고 신학적 정통으로 옹립된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저항과 정통을 내세워 교회를 지배한 교권 세력에 대한 투쟁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교회헌법상 교회의 참된 가르침과 이와 다른 가르침을 구별하고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권한이 최종 심급에서 총회에 부여되어 있었던 시기에 총회를 주도하는 세력은 교회를 신학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고, 신학은 교권세력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교권세력이 허용하는 것과 다른 의견을 갖는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든지, 침묵을 깰 경우에는 교권세력의 박해를 받거나 심지어 이단으로 낙인찍힐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애빙돈 성서 주석 번역 사건, 여권 옹호와 관련된 필화 사건 등). 교권세력이 모든 이견들을 억압하고 교회의 신학적 통일을 이룩하여 난공불락의 성채를 더 굳게 쌓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운 것은 교권신학이었으며, 그 신학은 장로회 총회를 인적, 물적 수단으로 지배하였던 선교사들이 전수한 신학, 곧 근본주의 신학이었고, 근본주의 신학의 핵은 축자영감설이었다.
 근본주의 신학에 대해 이의를 제공하는 것은 곧바로 교권세력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는 일이었고, 교권세력에 의해 "바빌론 포로"로 잡혀있었던 신학적 의견 형성의 자유를 획득하는 일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장로회 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근본주의 신학 논쟁은 교권세력의 해체를 위한 교회 투쟁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근본주의를 금과옥조로 모시는 교권세력이 총회를 장악하여 연명하는 한, 이 신학 투쟁과 교회 투쟁은 장로회의 신학적, 교회적 분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전개되었다.
 기장 신학은 교권신학의 생산과 분배를 담당한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반대 결의와 관련하여 문을 닫고 미일전쟁의 여파로 선교사들이 소개되는 상황에서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의 전신)를 세움으로써 그 정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김재준, 송창근 등, 기장 신학의 아버지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에 의해 자주적으로 신학을 수립할 것을 천명함으로써 선교사들의 신학 지배에서 비롯되었던 교회우민화와 권위주의적 맹종을 극복하고, 교권으로부터 해방된 신학의 자유와 신앙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였으며, 세계 신학과 개방적 대화를 유지하며 세계적 수준의 신학을 추구할 것을 표방하였다.
 해방 이후 선교사들이 되돌아오고, 총회를 장악한 세력이 근본주의 신학을 교권의 정통신학으로 재옹립하자, 새로운 신학을 추구했던 세력은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축출되었다. 그들은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재결합하여, 조선기독교장로회(오늘의 한국기독교장로회)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자유로운 신학의 이념을 가지고 교단을 창설한 유례 없는 일이다.
 축자영감설과 그것에 입각하여 성서의 단편들을 짜깁기하듯이 만든 교리들이 지배하던 한국 기독교에서 역사적-비판적 방법으로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애초부터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성서의 하나님을 교리주의의 유폐로부터 해방시켜 역사의 하나님을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신앙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서로 연관지어 생각하도록 만드는 촉매가 되었다. 기장 신학의 아버지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의 완성으로 인식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실현되는 우주만물의 사랑의 공동체(김재준)에 대한 비전을 갖고 역사의 어두운 구석을 밝히고, 역사를 변혁하며 새롭게 형성하는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예리하게 의식하였다. 이것은 기장 신학이 애초부터 책임의 신학, 형성의 신학으로서 분명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책임사회"라는 에큐메니칼 사회사상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에큐메니칼 선교 사상이 세계 교회 차원에서조차 아직 명료한 개념으로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기장 신학은 이미 역사 변혁과 사회 변혁의 에큐메니즘을 천명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기장 신학의 성격은 김재준이 1945년에 쓴 "기독교의 건국 이념"이라는 글에서 가장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3. 기장 신학의 발전과 민중신학

 기장 신학은 세계 신학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유수한 신학자들을 배출하였고, 그들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한국인에 의한 자주적인 신학의 모색은 아카데미즘의 개화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장 신학이 표방한 자주적인 한국신학의 정립은 이 땅의 현실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하고 그것을 새롭게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형성의 신학, 책임의 신학으로 그 방향을 정립한 기장 신학이 이미 예고한 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역사 현실을 새롭게 형성하고자 하는 기장 신학은 1960년대 초 이래로 한국 사회를 억눌렀던 군부독재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 저항의 신학, 혁명의 신학, 정치신학의 특성을 띠게 된다. 한국의 군부 독재는 수출주도의 압축 성장 모델을 달성하면서 자본의 조달, 축적, 배분 과정에 아주 깊이 개입했다.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 파병 등은 자본의 조달과 관련된 중요한 조치였고, 저곡가 저임금 정책은 자본 축적의 주요 수단이었으며, 산업연관을 깨뜨리고 국토의 불균형 발전을 초래한 수출 기업과 재벌의 육성은 국가의 금융 지배 조건 아래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전개된 자본 배분 과정이었다. 당연히 이에 대한 노동자, 농민, 소규모 자영업자, 도시 빈민, 지식인 등의 저항이 일어났고, 국가는 이를 철권으로 억눌렀다. 군부는 3선 개헌 등의 조치로 장기 집권을 획책하고, 마침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종신 총통제를 방불하는 유신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1961년의 군사 쿠데타로 인해 명맥만을 유지하던 한국 민주주의는 사멸하고, 인간의 기본권은 철저하게 유린되었고, 민중의 생존권은 부정되었다.
 기장 신학은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고, 3선 개헌에 맞서는 과정에서 저항의 신학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기장은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위해 파견된 교회의 책무를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고 완성시킨다는 신념에 따라 자본의 권력과 독재에 맞서 투쟁하였던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 차원에서 명료하게 정립된 미씨오 데이 사상은 이미 태동기부터 그와 같은 지향을 뚜렷이 하였던 기장 신학에 의해 옹호되었고, 기장의 신앙고백서에 그 자취를 남기기에 이르렀다.
 유신 독재가 시민의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인권을 유린하고 민중의 생존권을 박탈할 때, 모든 사람이 침묵을 지키면 돌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것이라고 외치며 유신 독재에 항거하기 시작한 것은 기장 신학의 세례를 받은 목회자들과 전도자들, 그리고 신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유신 독재에 대한 투쟁의 첨단에 섰고, 당연히 고난을 당했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만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민중의 참담한 삶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그들이 역사적으로 당하는 고난을 함께 당했다.
 한국 자본주의의 온갖 모순들이 응축되어 정치적으로 표현된 유신 독재 아래서 참담한 민중현실을 경험하면서 기장 신학자들은 민중신학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지배의 역사에서 언제나 억눌리고 빼앗기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주변화되어 온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이었고, 그 생명력에 바탕을 두고 끊임없이 역사적 초월을 실현하는 민중의 힘이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명제로 요약되는 신학자들의 민중 발견은 자유와 정의와 친교와 평화의 메시아 왕국을 실현시켜 가는 메시아적 실천의 주체도 역시 민중이라는 신학적 인식에 이르게 된다.
 민중의 메시아적 성격이 신학적으로 언명되자, 민중의 역사 경험, 민중의 삶의 이야기, 아니 한 마디로 민중의 언어는 이제까지의 역사와 이념의 형식과 내용을 뒤집어엎고, 특히 지난날의 주류 신학들이 역사적으로 헤게모니 세력들과 동맹관계를 맺으며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이데올로기적 의혹을 강력하게 제기하게 하였다. 해석학의 혁명은 필연적인 것으로 되었고, 이에 따라 신학하기의 관점과 방법도 혁명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수 전승의 모체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루어진 구약과 신약의 민중 전승에 대한 사회사적 주석(안병무)은 그 민중전승의 현재적 재현을 통해 현실 변혁을 꾀하고자 하는 매우 강력한 실천적 함의를 띠게 되었다. 주류 신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의혹을 명료하게 표현한 반신학, 현실변혁을 위해 신학의 껍질을 깨고 사회과학과 제휴하는 가운데 민중해방 전통의 합리적 핵심을 보존하고자 한 탈신학은 민중신학의 한 이름이 되었다(서남동).
 1980년의 광주 학살과 더불어 국가 폭력을 장악한 신군부의 등장은 한반도 분단 현실과 한반도 전체에서 관철되는 미국의 군사정치적 헤게모니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고, 민중의 해방과 민주주의의 실현은 한반도적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파악되기 시작했다. 민중이 역사적 주체라는 선언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전면에 나서서 한반도에 중첩되어 나타나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해결하는 전략과 전술을 마련하지 않으면 헛된 구호에 그칠 것이라는 생각이 급속하게 퍼지기 시작하였다. 맑스주의의 여러 유형들이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각기 다른 뉘앙스를 갖는 계급동맹론적 시각들을 갖고서 여러 민중운동체들은 민중해방의 전략과 전술을 다양하게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기장의 젊은 민중신학자들은 한국의 민중해방 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의 운동에 그 형식과 내용을 부여하고자 하였으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학적 언어를 개발하려고 시도했다. 이른바 "운동의 신학"(박성준)과 "물의 신학"(강원돈)은 이러한 요구에 응하는 하나의 실험으로 나타났다.

4. 오늘의 기장 신학

 1990년을 전후하여 현실 사회주의는 곳곳에서 몰락하였고, 그것이 시장경제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실현되었고, 다원적 시민사회가 갑자기 팽창하기 시작했다. 아직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우리 사회를 내적으로 분단하고 있음이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고, 화폐 자본이 몰려들어 단군 이래의 최고 호황을 만들어주고 있을 때, 민중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는 듯한 착각에 사람들이 빠져들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신학은 그 동안의 역사적 업적을 평가받는 훈고학이나 서지학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이런 취미에 역겨움을 느낀 젊은 사람들은 다원적 시민사회의 팽창과 더불어 몰려들기 시작한 갖가지 문화이론들과 포스트 논의들을 의식하면서 민중신학을 좀더 세련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 세련화 전략은 민중신학의 방법을 한 단계 더 전진시키는 귀중한 성과를 낳았다.
 기장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일찍부터 민중신학이 정치신학 일변도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하는 학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팽창하는 다원화 시민 사회에서 신앙 양심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구가하며 아주 개방적인 문화신학과 종교신학을 실험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화와 세계화를 통해 자본의 권력이 엄청나게 강화되고, 다양하기 짝이 없는 자본의 문화 전략들이 사람들을 현혹하여 현실과 환상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게 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기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며 역사를 책임 있게 형성하는 신학을 제시하기 위해 과거의 신학 전통을 냉철하게 음미하면서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 자유롭고도 개방적으로 토론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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