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강의실
Kang Won-Don's Social Ethics Class

2004/11/18 (19:44) from 211.237.213.58' of 211.237.213.58' Article Number :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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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입장에서 바라본 소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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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시대의 정치윤리" 세미나 발제문               

신학적 입장에서 바라본 소유권                        


김희란(한신대학교신학전문대학원)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은 내 것이다’라는 말이다. 내 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내 맘대로 하는 것이 바로 그것(물건)에 대한 지배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건에 대한 지배는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로 이어진다. 사람이 물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다.
    지배-피지배의 구조에서 지배는 피지배(억압)로부터의 자유이다. 사람은 본성상 자유롭게 되기를 갈망한다. 소유를 확대하려는 욕망 속에는 지배를 통해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소유에 집착할수록 사람은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맘몸에 예속되는 노예가 되어버린다. 지배하는 사람도 물건에 예속되어 있어 결국 그것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래서 소유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은 소유로부터 벗어나야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성서에서는 종종 사람을 하나님의 종이나 소유물로 표현한다. 이 말은 서구의 남성적 신학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군림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소유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고 간주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손바닥에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남성적 지배구조를 확고히 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없다.  
    종살이 하던 히브리인을 탈출시켰던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 노예적으로 복종시키기 위해서 구원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면서 계약을 맺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법에 자발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청하셨다. 그래서 이 계약의 근본 입장은 소유의 질서가 아니라 상호존재의 질서이며 삶을 함께 나누는 질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말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물건(또는 system)에 예속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1. “땅”의 신학

    신명기에 나타난 여호와는 가나안 땅만을 지배하는 국지적인 신이 아니라 온 땅을 지배하는 주인이시다. 세상의 땅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하셨다. 그러나 온 땅의 지배자로서 권위를 과시하는 여호와의 방법은 다른 제국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가나안 땅을 차지했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인들이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나라를 이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살이 하던 히브리인들을 택하셔서 가나안을 점령하게 만드심으로서 그의 지배권을 세계에 드러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택하신 백성을 통하여 이 세계 역사에 들어오신 것이다(노만 C. 하벨, 『땅의 신학』, 54-56).
    하나님은 그 자신의 법을 세상에 실현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 들어가서 땅을 소유하게 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침입해서 차지한다. 그래서 그 땅의 주민을 일소하고, 박탈한다. 신명기 저자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스스로 쫒겨남을 초래하였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가나안적인 어떤 것을 부정하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땅에 정주해서 적의 위협으로부터 안식을 얻게 된다. 안식은 토지 증여의 완결을 표현하는 것이다. 증여(주다)는 소유권이나 권리의 이전이 실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57-59).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부터 땅을 선물, 즉 공짜로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빚지게 된다. 여기서 선물 개념은 땅의 증여자에 대한 전폭적인 의존의 태도를 갖게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으로 차지한 척박한 땅에서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땅을 아름다운 것으로 본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신명기8:7).

    이스라엘은 이 아름다운 땅(good land)에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도록 선택된 민족이었다. 이집트는 비록 풍부한 먹을 것이 있으나 종으로서 사는 땅이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해방하고, 땅을 소유한 분에 대한 의존을 배우게 될 땅이다. 가나안이라는 분배받은 땅을 보유한다는 것이 땅의 소유자가 제시한 계약을 준수한다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은 여호와 자신이 만든 정치체계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현하기 위한 공간이 되어졌다(60-61).
    그런데 하나님의 정치가 실현되어야 하는 곳은 거룩한 땅이어야 했다. 그곳은 외부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했다. 외부 문화가 줄 수 있는 대안적 이상이나 다른 신들이 줄 수 있는 오염에 더럽혀지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과 어떤 관계, 계약, 혼인 등을 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그들의 신을 접촉하거나 숭배해서도 안 된다(신7:1-6). 그 땅에서 하나님의 정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곳이 외부의 영향에서도 자유로워야 하고, 그 초점을 단일화되어야 했다(64).
    거룩한 땅은 하나님의 법이 실현되는 곳이다. 따라서 신정정치를 위해서 가나안 땅이 선택되었지만, 어떤 땅이라도 선택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땅과의 관계가 아니라 땅을 다스리는 자인 여호와의 관계이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준 자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때 땅의 기업을 잃게 된다. 땅이 아니라 언약이 우선적인 것이다(64-65).
    이 언약은 그 땅에서 번영된 생활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준수해야 할 법과 절차의 정치를 규정하고 있다. 이 언약을 범하는 것은 그 땅에서의 추방이나 멸망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언약은 땅의 법(lex terrae)인 것이다(73).   
    언약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은 땅의 소유권이 이스라엘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땅의 법에 순종해야만 그들의 미래가 보장받는 계약을 맺은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경작하는 땅의 주인이 아니라 우거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우거자로서 땅 자체에 대한 영속적인 소유권을 가지지 못한다(125-6).

레위기 25-27장에서 여호와는 땅의 주인이다. 누구도 그것을 팔거나, 바꾸거나, 영속적인 소유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함으로써 여호와 소유의 땅의 어떤 부분도 함부로 할 수 없다. 땅의 이용, 소유, 임차, 이용 조건 및 칠년 단위의 순환경작 등을 여호와가 관리한다. 여호와는 땅의 소유자이며 관리자이다(125).

    우거자들이 땅주인을 대신하여 보유하고 있는 땅은 씨를 뿌릴 밭이요, 돌보아야 할 포도원이며, 수확할 산물이다. 이 땅은 그것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생명과 양식을 제공하는 농토인 것이다. 땅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할 수 있을 뿐이다(126).
    그래서 땅을 사고파는 것은 소유권을 양도한다기보다 농사지을 수 있는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었다. 희년이 되면 팔렸던 땅은 원래의 사용자에게 되돌아가게 된다. 매매가 되는 것은 희년까지의 땅의 이용과 그 산물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초에 땅을 분배받은 자는 땅을 잃었을지라도 그 땅의 원래의 보유권을 상실하지 않는다.
    
땅은 아주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 25:23).

    땅은 사고파는 대상이 아니다. 농민들은 나그네와 식객처럼 그 땅에 붙어산다. 그 땅은 그들에게 개인의 소유로서가 아니라 그저 사용하라고 양도 된 것뿐이다. 인간은 그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매7년마다 안식년이 실행되어야 한다. 땅을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밭을 갈거나 씨를 뿌리지 않고 포도원에서 포도를 따지 않으며, 수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이제 쇼트로프, 「성서의 주인공은 평범한 남자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정용섭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9), 126)

    땅에 안식을 주는 것은 사람이 그 땅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땅의 소유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소유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약에 명시된 대로 땅의 휴식은 결코 방해받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땅은 사람의 수단으로 전락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땅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땅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숨을 쉬고 증기를 내뿜고 휴식을 필요로 한다.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다만 인간에게 빌려 주었을 뿐이다.(* Ibid., 127-8)

    그런데 안식년과 희년은 땅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쉬게 한다. 그 시간이 땅에 대한 노동을 중지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안식년을 7번지나 희년이 되면 종들이 풀려나고 모든 빚이 탕감된다. 사람들이 경제적 예속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년과 희년은 물에 대한 지배가 사람에 대한 지배로 가는 것을 차단하는 장치이다. 예속의 굴레를 끊는 해방의 정신이 표현된 법이라고 볼 수 있다.

2) 소유는 사람을 지배한다.

    사람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을 업신여긴다. 가지지 못한 사람에 대한 존재무시가 있다. 사람은 가진 게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람은 가진 자를 사랑한다. 가진 자의 가진 것을 사랑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없다.
    사람은 무가치하지만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치가 있다. 노동시장에서는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것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활용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치 있다.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진다. 사람자체는 사라지고 거래될 수 있는 인간만이 남는다. 사람이 사용되어지면 그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진다. 그나마 요즘은 일할 곳이 없어서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산업 기술의 발달로 계속해서 보다 적은 사람을 통해서 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새로운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은 채 재빨리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여기에서 학력 차별, 성 차별, 기타 각종 차별이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의 경험은 좌절과 억압과 고독이다. 곧 우리의 일상 경험은 노예화이다. 업적이나 성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여 내야 한다. 일에 대한 기쁨이 사라지고 단순히 일할 자리를 차지하고서 눈에 보이는 성과물을 위해 자신과 다른 사람을 기름을 짜듯 비틀어버려야 한다.
    자본주의의 소유의 구조가 비인간화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소유란 “사람(人)과 물(物)과의 직접적인 관계, 즉 사람에 의한 물의 지배 관계로 이해하고, 표현하고, 정당화하며 그 관계에 다양한 제도적 편성을 부여하는 법 이데올로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는 그 사회관계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유가 물의 지배 자체인 동시에 사람의 지배가 되는 것이다. 소유가 다른 사람과 떨어진 개별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람을 묶는 방식이 된다(갑비도태랑, 「소유권 사상의 역사」, 16).
    자본주의란 간략히 말하자면, 상품의 소유자가 등가 교환에 의해서 노동력 상품을 취득하고 자기가 소유하는 여러 가지 노동수단과 그것을 결합시켜서 그 가치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는 한 사람의 소유자와 그의 소유물이 있을 뿐이다. 그 소유자와 함께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소유의 차원에서 파악되는 세계이다(21).
    그렇다면 근대 소유권 사상은 ‘비인간화’ 자체를 초래하기 위한 생각에서 발생한 것인가? 예링은 로마법 정신에서 소유권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소유권이 신성불가침하다는 사상이 로마 물권법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Cf. 강원돈, “노동권과 소유권”, Http://socialethics.org.)
여기서 소유권은 단순히 물건에 대한 처분권과 침해를 받지 않을 권리였다. 사람에 대한 지배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소유권이 사람의 노동력을 사서 결국 사람을 지배하는 방식이 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사람의 노동력은 정당한 소유의 근거를 제시해 준다. 예를 들어 땅 주인이 그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사회는 그 소유자에게 경작을 명령하고 그래도 하지 않는다면 보다 유익하게 토지를 이용할 만한 사람에게 그것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다(142-3).
   기에르케는 소유권을 물건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논리적으로 부정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물권법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여러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는 의무를 갖는 지배형태로 이해되어진다(147). 더 나아가 맹거는 착취가 없는 근로소득을 얻을 권리에 대해 고민하지만, 시민적 사법질서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설정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153-4). 따라서 소유권의 사회성에 대한 고찰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근대의 소유권 사상을 형성시킨 헤겔의 생각에서도 소유권의 사회성에 대한 이해가 나타난다. 그는 생산 양식이 사유화되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한다. 생산 양식의 사적 소유는 타인에 대한 지배를 낳기 때문이다.(* 김수연, 『헤겔의 소유권 사상 이해와 비판』, (석사논문,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2,000), 4.)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화’운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하였다. 그것은 사적 소유권을 폐지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독일은 폐전 후 경제부흥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사회주의는 ‘수정된 자본주의’와 비슷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사회화 사상에 영향을 받아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된다. 사적 소유에 대해서 “경제재의 부흥과 분배를 공동 경제적으로 분배”하는 것을 법으로 규정하였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공동 경제’라는 말이다. 공동경제는 국유화가 아니다. 그래서 국가는 단지 일반적인 복지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159-161).
    외국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정법에서도 “소유”에 대한 불합리함을 지양할 수 있는 길은 이 시대가 선택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논리 속에서 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여진다. 비합리적인 일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당장의 구조의 해결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서에 근거해서 ‘소유권’을 이해하고 실정법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희년의 이념이 제한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깃든 해방의 정신이 우리의 생활에 나타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의 희년 경제가 안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지주 농민 경제이었고, 50년 후에서야 그 종들을 놓아주는 법이었지라도 말이다. 그 종이 고향에 돌아갈 때는 그의 노동력이 다 상실된 늙은이가 되었을 때일지라도...또한 가부장적 입장에서 성서의 이야기가 (평범한) 한 남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 작은 남자 옆에서 함께 노동한 평범한 부인이 있었고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평범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주목하고 계셨다. 사람에게는 이 평범한 그녀와 그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항상 이름 없는 작은 자에 있었다. 이 작은 자가 억압받을 때 함께 아파하시고 그녀를 구원하기 위한 행동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안식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을 제정하셨다. 이 땅에서 노동하는 여자와 남자를 잘 살도록 법을 제정하신 것이다. 일하는 평범한 사람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땅의 법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나가면서....

    사적 소유는 경제적 이윤추구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남을 돕기 위해서라도 넉넉히 벌어야 할지 모른다. 소위 자선이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자선은 부유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취급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의 방식이 가부장적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식이다. 구제 받는 사람의 입장에 대한 고려는 없다. 소유가 낳은 질서는 근본적으로 작은 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윤추구를 위해서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살아남는 자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성공한 사람을 칭찬한다. 자본주의에서 ‘칭찬받는’ 사람은 재산을 많이 늘린 자이다. 성공이 그 사람의 불의를 정당화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잡초처럼 살아가는 방법만 터득하고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은 생존의 공간에서 없애 버린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던 이스라엘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이었다. 안식년과 희년법을 지키기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표시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사적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만을 인정하는 믿음은 요구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맘몸이든지 하나님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사랑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결국 사람은 그녀가 사랑하는 것에 의존하게 되고 지배당하게 된다. 조금 더 분명히 표현하자면,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제1계명)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무소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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