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논단
Kang Won-Don's Column

2015/07/30 (12:15) from 221.158.115.206' of 221.158.115.206' Article Number :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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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현실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내가 짚고 넘어간 것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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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현실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내가 짚고 넘어간 것들 (1)

강원돈 (한신대/민중신학 + 사회윤리)

요즈음 이론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언어의 틈새에 숨어든다. 그들은 언어의 틀 안에 갇혀서 언어의 독재에 머리를 숙인다. 그들은 주둥이가 막힌 언어의 호리병 안에서 병 밖의 풍경을 보고는 있지만, 그 풍경을 이루는 소떼와 목동,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흙의 풍성함과 그 냄새를 실감하지 못한다. 언어는 호리병의 경계 안에서 움직인다. 호리병은 언어적 상징질서이다. 호리병 안에서 움직이는 언어가 호리병 바깥으로 나올 수 있을까? 그 언어가 그 자신을 제약하는 것의 외부를 하나의 현실로 가질 수 있을까? 호리병 안의 언어를 감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호리병 안에 있을까? 없다. 담론의 외부는 담론의 내부이거나 기껏해야 그 경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리병을 깨기 위해서는 호리병 바깥에 그것을 깨는 힘이 있어야 한다. 호리병 바깥에서 호리병을 때려 부숴 그것을 산산조각 냄으로써 호리병 안의 것을 호리병 바깥의 빛나는 빛 아래 노출시켜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 보면, 푸코의 담론 이론은 어쩔 수 없이 관념론에 빠져들고, 그 때문에  순응주의를 프로그램화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푸코의 순응주의가 어떤 기제를 갖고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그가 담론의 외부를 내부화함으로써 언어적 상징질서의 억압을 어떻게 내면화하는가를 입증하면 될 것이다.

나는 왜 이런 방식으로 푸코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푸코가 탁월한 이론가로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고, 그 다음 푸코의 사유가 갖는 허약함 때문이다.

푸코의 허약함이 가장 치명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그가 설정하는 담론의 효과가 그 담론의 외부를 허락하지 않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그는 탁월한 고고학자이고 계보학자이지, 고고학적 지층과 계보학적 맥락을 넘어선 것을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다. 사유는 당연하다고 여겨져 온 것이 갑자기 무너질 때, 당연하다고 여겨진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진 이유가 더 이상 납득될 수 없을 때, 그리고 당연하다고 여겨져 온 것의 너머를 지시하는 단서가 당연하다고 여겨져 온 것의 부정을 예고할 때 싹 튼다.

언어와 상징의 세계에 묶이게 되면, 언어와 상징의 질서 외부의 실재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을 수 없고, 실재에 대한 감응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산다. 푸코는 한 시대가 갖는 상징의 질서를 고고학적으로, 계보학적으로 분석하였지만, 그러한 분석에 바탕을 둔 푸코의 이야기는 회고적이고, 오늘의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는 그들이 마치 실재에 대한 충실성을 상실하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코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푸코를 경계하고 멀리하는 이유이다.

민중 담론은 민중의 실재를 포착하지 못한다. 그것은 도를 도라 하면 그것은 더 이상 도가 아닌 것과 같다. 민중의 실재는 민중 담론의 경계를 언제든 넘어선다. 민중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갖고서는 민중을 발견할 수 없다. 거꾸로 민중의 타자성을 설정하고 민중에 접근하는 매체로서 고통을 설정하는 관점도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시도되는 민중 탐구는 타자성의 담론에 말려들어 민중을 그 담론의 내부에 묶어 둠으로써 민중을 비실재로 전락시킨다. 고통의 현상학은 고통을 의식화하고, 관념화하고, 언어화한다. 나는 이와 정반대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중을 담론의 틀 안에 넣어서 타자화하려고 한다고 해서 민중이 타자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중은 담론의 외부에 자리 잡고 담론을 뒤흔드는 실재이다. 이 점에서 민중은 주체이다. 민중은 고통 가운데서 실재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고통이 언어적 상징질서를 깨뜨리고 그 외부를 향하게 하는 힘을 갖는다는 점이다. 고통의 구체성은 그것의 물질성이다. 고통을 매개하는 것은 물질적 실재이고, 고통 그 자체가 물질의 절규이다. 만일 이 점을 포착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사유는 우리의 육체와 그것의 물질적 현실성을 비껴가면서 고통의 언어적 표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침내 실재를 환상으로 둔갑시킨다. 그렇게 되면 육체와 물질의 도발과 절규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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