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1999/12/23 (19:37) from 164.124.80.188' of 164.124.80.188' Article Number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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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난의 확산과 "생산적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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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난의 확산과 "생산적 복지"

강원돈

저물어가는 밀레니엄

이제 한달 가량 지나면 천년의 세월이 바뀌게 됩니다. 연대기적인 밀레니엄의 전환에 큰 의
미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사람들은 지구에서 옛 밀레니엄의 마지막 햇살을 보고 새 밀레니
엄의 첫 햇살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멀리 여행을 떠날 만큼 들떠 있기도 합니다. 한
해가 저물고 새 해가 시작되는 순간을 각별히 축하하는 풍습을 가진 민족들은 아마 이번 실
베스터 축제를 매우 성대하게 준비하고 요란하게 새 밀레니엄을 맞이할 것입니다.
 여러 나라 지도자들은 새 밀레니엄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인류의 진보와 문명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새 천년에는 정보기술과 생명공학의
비약적 발전을 통해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고 인류의 기본욕망을 넉넉히 충족시키고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인류가 해방되리라는 것입니다. 기업들은 이 두 분야를 황금들판으로 여기고
엄청난 투자를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매일 매일의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혹시나" 하는 기대를 불러일으키
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시름을 잊게 해 줍니다. 그런 면에서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새 천년
전망은 분명히 커다란 사회심리학적 영향력을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밀레니엄이 이 시대의 약자들이 놓여 있는 삶의 처지를 당장 바꿀 것 같지
는 않습니다. 이미 1980년대 초 이래로 "새로운 가난"의 확산을 겪었던 선진경제들에서 사
회적 약자들은 기존의 계급 분류에 끼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처지에 떨어지고 말았습니
다. 특히 국가복지를 급격히 축소시킨 영국과 미국에서는 시민사회로부터 단절되고 배제된
계급, 이른바 "언더클래스"(underclass)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인도에만 "불가촉
천민"이 있는가 하였더니, 선진경제로 여겨져 왔던 나라들에서조차 새로운 천민들이 형성되
고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은 더더욱 나쁩니다. IMF의 간섭과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구조조정에 나선 나라들은 새로운 빈곤층의 확산과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로 인해 몸살
을 앓고 있습니다. 농업 지역에서의 혹심한 가난과 절망을 피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더
러운 빈민지역을 형성하고, 실업과 저임금으로 고통받고, 인신매매와 매춘 등 범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선진경제들로부터 자본이 몰려 들어와 붐을 이루었던 아시아 태평양 지
역에서도 지난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로 "새로운 가난"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가 곧 역전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추세는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지구화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소득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임금소득이 제 자리
걸음을 하거나 심지어 감소하는 신자유주의 상황 아래서 사회가 "20대 80의 사회"로 양극화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국가의 경제개입이 축소되어 자본이 보다 용이하게 수
익추구에 나서고, 거기에 더하여 국가의 소득재분배 정책이 약화되면, 사회적 약자의 삶은
훨씬 더 고달파지게 마련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얼마 전에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신
자유주의적 지구화를 대신할 수 있는 "제3의 길"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저물어가는 밀레니엄 끝자락에 지구 곳곳에서 우울한 풍경들을 접하는 것은 정말 씁쓸합
니다. 이 점에서는 우리 나라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상황을 알리는 몇 가지 통계들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나라의 외환위기는 끝났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여러 경제 지
표들은 분명히 대통령의 선언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재정경제부가 지난 11월 18
일에 발표한 "통계로 본 IMF 2년"에 따르면, 97년 말 현재 외채가 1천5백30억 달러, 외환보
유액이 39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우리 나라는 지난 9월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에서 빌린 돈
보다 받을 돈이 더 많은 순채권국으로 전환했고, 11월 현재 외환보유액이 6백84억 달러로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마이너스 5.8%에서 올 상반기에 7.3%로 반전했
고, 연간 성장률은 8~9%로 전망된다고 합니다. 산업생산 증가율도 98년에는 마이너스 7.3%
로 크게 떨어졌으나, 지난해 11월 이후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면서 최근 20%대로 높아졌다
고 합니다. 제조업 가동률도 98년 68.1%에서 최근 80%로 거의 정상가동 수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비록 올해의 각종 플러스 성장치는 비교기준연도인 작년의 마이너스 성장치를 감안해서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여러 지표들은 우리 나라 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개선된 지표들 뒤에는 우울한 통계 자료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최근 통
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소득분배와 소비성향에서 계층간 격차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올해 3분기 중 도시 근로자 가구 상위 20%의 월 평균 소득은 4
백37만9천9백원으로 최하위 20%의 82만8천4백원의 5.3배나 되었습니다. 환란 이전인 97년 3
분기에는 이 비율이 4.5배였습니다. 또한 소득 상위 20%의 자가용 구입-유지비, 잡비, 교양
오락비 등 세 가지 소비지출액은 81만4천1백원으로 하위 20%의 소비지출 총액인 83만원에
육박하였습니다. 소득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소비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
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국내 학자들에게 의뢰한 "외환위기 후 한국의 빈곤실태와 빈곤
감시시스템" 프로젝트 보고서에 따르면,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모범적으로 수행한 우리
나라에서 각종 거시지표들이 호전되었지만, 빈곤계층은 지난 2년간 8.6%에서 19.2%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인구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빈곤계층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정부가 정한 1인당 법정 최저생계비 23만3천 원에 미달하는 빈곤계층의 수효가
최고 1천30만 명에 달한다는 프로젝트 보고서의 내용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프로젝트 연구진의 견해에 따르면, 지난 2년 동안 빈곤의 확산에 기여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 정부에 강요된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입니다. IMF는 고용조정을 통해 생산비
용을 감소시키면 경제성장이 일어나 고용확대와 빈곤극복의 선순환이 이어진다는 공식에서
출발하였지만, 이 공식을 내걸고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던 영국과 미국에서조차 이러한 일
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IMF 구조조정 아래서 우리 나라 취업인구 가운데 불완전 고용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
지 않은 사람들의 수효를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3월 현재 임시직과 일용직 근로자의
비율은 각각 33.1%와 17.4%를 차지하여 취업인구의 50.5%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9월 통계
청이 발표한 "9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이 비율은 53%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 통계 수치
가 의미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노동자들의 생활기회가 좁아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업의
소득분배에서 노동에 돌아갈 몫이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 연구 결과에 따
르면, 시중은행의 경우 정규직 근로자의 임금을 100으로 할 때, 비정규직 근로자의 임금은
고작 4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일 회사가 부담하는 복지후생비와 각종 수당 등 임
금 외 비용까지 감안한다면 이 비율은 100대 11로 늘어납니다. 이것은 정부가 IMF 구조조
정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로 도입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 우리 사회의 소득분배를 얼
마나 심각하게 왜곡하고, "새로운 가난"의 확산에 이바지했는가를 잘 말해 줍니다.

새롭게 부각되는 "생산적 복지" 개념

위에서 대충 살펴 본 통계들은 우리 나라 정부가 IMF 경제관리 아래서 외환관리와 금융제
도 정비 등 국민경제의 하드웨어 차원에서 어느 만큼 성과를 거두긴 하였지만, 고용, 소득분
배, 복지 등 국민경제의 소프트웨어 개선을 위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 주고 있
습니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정부가 그 동안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경제의 하드웨어
와 소프트웨어의 개선을 위해 기본구상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소프트웨어 개선과 관련해서 정부는 이른바 "생산적 복지" 개념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 개념은 지난 8월 15일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반영되었고, 지난 10월 25일 아시아 태
평양 민주지도자 회의에서 한 대통령의 연설에서 다시 한번 부각된 바 있습니다. 김 대통령
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자유, 인권, 경제발전을 위해 필수 불가결하지만 그것만으로 완
전하다고 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경제가 발전할수록 빈부격차 등으로 사회적 안정이 흔들
려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생산적 복지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생산적 복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진경제들에서 실천된 국
가복지의 실패와 그 대안을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덤에서 요람까지"라는 말로 상징
되는 서유럽 복지국가의 이상은 1970년대 말에 국가재정의 파탄과 복지행정의 관료화, 그리
고 국가에 의존하는 시민들의 무기력으로 인해 막다른 골목에 빠져들었습니다. 1980년대 초
이후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여러 나라들에서 법인세와 이자소득세가 감면되고 국가재정에 근
거한 복지지출의 절대적 규모가 급격히 줄어들자 개인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
들이 각자 제 삶의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업이나 불완전고용, 질병이나 장애 등 개인의 힘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습니다. 사회적 가난이 확산되고 사
회적 단절과 배제가 날로 심각해져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개념이 이른바
"생산적 복지"입니다.
 "생산적 복지"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국가가 각 사람이 먹을 음식을 마련하여 제
공할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음식을 장만하여 먹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국가가 지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각 사람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살필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제 나름대로 삶을 형성하고 삶의 처지를 주도적으로 개선할 수 있
도록 측면에서 지원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개인의 주도권을 활성화하는 국
가"(ein aktualisierender Staat)라는 개념입니다.
 영국의 경우, "생산적 복지" 정책은 크게 보면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기본생활
보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직업교육, 나머지 하나는 공동체적 유대의 강화입니다. 기본생활
보장은 노동능력을 상실하였거나 노동능력을 아예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부조의 일
환으로 이제까지 시행되어 온 것이니 따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직업교육의 강화는 실업정
책이 소극적 정책에서 적극적 정책으로 바뀌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실업수당을 최소한의 생
존 수준으로 감축하면 각 사람은 일자리를 자발적으로 찾아 나설텐데, 국가는 이 사람들이
직업능력을 갖추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양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
이 장래성 있는 부문에서 직업능력을 갖게 될 것이고, 저숙련 노동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들
이 고숙련 직업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적 유대 강화와 관련해서 가정과 지역
사회의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부각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 성공 여부는 아직 속단할 수 없
습니다.

"생산적 복지" 개념에서 불분명한 점

국가복지의 실패와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성을 경험한 나라들에서 "생산적 복지" 개념은 사회
국가를 재건하려는 몸부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의 한계는 아주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 그 한계는 신자유주의적 성장정책이라는 하드웨어에 손을 대지 않고 복지의 사회
적 조직이라는 소프트웨어에만 손을 대는 데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성장정책은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절대적 불균형을 가져옵니다. 이 소득분배의 불균형을 그대로 놓아둔 채 고용안정과 복지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본측이 엄청나게 축적한 이윤을 가지고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투자에 나서면, 일자리를 줄이는 노동합리화 과정이 진행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렇게 되면 실업이 증가하고 실업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재정지출이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태발전을 막기 위해서는 일할 능력이 있고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사회적으로 보장할 뿐만 아니라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강력한 노력이 국가와 시민사회에 의해 조직되어야 합니다.
 지구화로 인해 국민경제의 균형성장이 갖는 의미가 크게 줄어든 판국에 소득분배 정책을
강조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고 반문할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시각은 너
무나도 근시안적입니다. 지구화가 인간의 얼굴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시민사회에 의해 주
도되는 소득분배 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합니다.
 소득분배 정책 이외에 소득재분배 정책의 중요성도 강조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농업이나
제조업 분야에서는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성이 급격하게 향상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이고, 이 두 부문들에서 퇴출되는 노동력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큽니
다. 이 퇴출노동력이 고용시장에서 다시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서비스산업 분야가 발전되어
야 합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제조업 분야에서 축적되는 이윤을 적절하게 퍼내어 서비
스산업 분야의 육성에 투입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처럼 국민경제의 구조를 바꾸어 나가
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위해 각 경제주체들에게 인센티브를 가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국가입니다. 국가가 조세정책과 재정정책을 조합하여 서비스산업 분야 육성을 지원하는 길
은 무궁무진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과 자연을 돌보는 일이 이제까지 시장경제에서 별 볼 일
없는 영역으로 치부되어서 그렇지, 이 일을 제대로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야말로 "할 일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는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질 것입니다.
 할 일 많은 세상에서 그 일을 할 사람을 확보하려면, 모든 사람이 적어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본소득과 고용의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를 놓고 새 밀레니엄을 맞는 우리는 깊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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