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1999/12/23 (19:42) from 164.124.80.188' of 164.124.80.188' Article Number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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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밀레니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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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밀레니엄

강원돈

새 천년의 아침

새 천년의 아침이 동텄습니다. 물론 이 아침이 여느 아침과 달라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늘도
겨울 나무들 너머로 펼쳐진 거무스름한 능선과 그 위로 퍼지기 시작하는 아침 노을이 선명
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둑했던 마당이 밝아오며 사물의 윤곽이 점차 또렷해집니다.
사위는 아직 조용합니다. 아침이 오는 시골 겨울의 정경은 늘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새 천년이 시작되는 이 아침은 여느 아침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새 천년에
거는 기대와 희망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달력 한 장을 떼어냄으로써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압니다. 그러나 지나간 세월을 되짚어 음미하는 사람들은 새 천년의 도래와
더불어 인류가 이 지구에서 이루어야 할 과제들을 꼽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고 새 천년의 아침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새 천년의 아침에 제
가 한번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환경 문제입니다.

일산을 다녀오며 생각한 것

지난 연말에 저는 일산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동료 한 사람이 일산 근처 한강 하구에 집
을 짓고는 집들이 잔치를 한다고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동생네가 일산으로 이사해서 한번
찾아보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잘 되었다 싶었습니다. 어떤 분이 자동차로 태워주어 자유로
를 타고 가며 일산 신시가지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30년쯤 전에 한가로운 들판
길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보던 풍광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강으로 흘
러가는 지천에서 물고기를 잡고 주막집에 매운탕을 끓여달라 부탁하고는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한강 너머로 떨어지는 저녁 해를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
껏 간직하고 있는 고등학교 시절의 한 추억입니다. 저는 부드러운 옛 일산의 구릉지대를 밀
어내고 빼곡하게 들어선 고층 아파트들을 보고 가슴이 무척 답답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백마역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백마, 능곡, 화전, 수색을
거쳐 천천히 달려가는 기차의 창문을 통해 저는 이 지역 전체가 파헤쳐지고 콘크리트로 도
배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가좌를 지나 신촌을 거쳐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 저는 산꼭
대기까지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남겨놓지 않고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고 위압적이기까지 한
고층 아파트들이 굴 근처의 비탈길마다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옛
날 경의선을 타고 문산으로 가며 보던 풍경은 이제 옛 기억에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아마 그걸 처음 보는 모양이지 하고 묻고 싶을 것입니
다. 네, 처음 봅니다. 마포와 여의도 쪽으로 이어진 고층건물들과 가좌동 쪽으로 끝없이 뻗
으며 산등성이를 덮은 주택들도 일산을 가기 위해 홍제동 근처에서 순환도로를 타고 가며
처음 보았습니다. 그것은 겨울 오후의 흐린 시계 속에서 녹색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회
색 덩어리였습니다.
 지금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제가 본 그 광경이 너무나도 익숙하겠지만, 사실 1950
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 인구의 80퍼센트는 신석기 시대 이후 계속되어 왔던 농업적 생
활방식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도시와 무관하게 주로 경작과 가축사육에 종사하며 산 것이지
요. 제가 사는 시골은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여전히 신석기 시대였습니다. 물론 그 때에도
철기 농기구가 사용되긴 하였습니다만,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곳까지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고, 아이들이 방에서 심하게
장난을 치면 "얘, 호롱불 꺼진다"고 꾸지람을 듣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는 아주
빠르게 전기시대로 옮겨갔고, 텔레비젼과 냉장고, 모터 펌프가 시골 구석구석까지 빠르게 보
급되었습니다. 이제는 시골에서도 핸드폰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아이들이 인터넷 게임을 즐
기는 전자 디지털 시대가 열렸습니다. 불과 20년 동안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우리 나라 시골에서 다소 늦게 경험되었지만 약 한 세대 혹은 한 세대 반전에 시작된 이
엄청난 변화는 지구의 얼굴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서울에 살았던 사람들은 1960년대
중엽이래 빠른 속도로 진행된 도시팽창을 통해 서울의 얼굴이 환골탈태(換骨奪胎)되다시피
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경기도는 서울을 둘러싼 거대한 위성도시권
으로 변화되고, 복잡하게 얽힌 고속도로들과 전철들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일산을 오가며 본 것은 이러한 변화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극단의 세기"였던 20세기

에릭 J. 홉스바움은 얼마 전 독일 언론재벌 베르텔스만이 조직한 베를린 강좌에서 20세기를
가리켜 "극단의 세기"라고 일컬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20세기를 하나의 공통분모 위에 올
려놓을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분열된 세기라고 분석하고 몇 가지 예로 아우슈비츠와 디
즈니랜드의 공존, 날로 심화되는 남북문제, 한 사회 안에서 점점 더 커지는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격차 등을 들었습니다. 이 시대의 뛰어난 역사가인 홉스바움의 20세기 회
고를 여기서 모두 옮겨 적을 수는 없지만, 지난 해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200명이 소유한
자산규모가 수조 달러에 달하여 중국 GDP에 육박하는 데 반해, 아직도 수억의 인구가 하루
1달러의 생활비조차 벌지 못한다는 지적은 20세기의 극단적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의 극단성은 환경파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1950년대 이후 인구폭발과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환경이 지구적으로 어느 만큼 심각
하게 파괴되었는가는 경기도 일원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따로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이 시기에 경제개발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파괴된 열대 우림의 규모만 따져본다
해도, 그것은 멕시코 면적에 달합니다. 외채상환의 강제 아래 80년대 중반 이후 광물채굴과
커피농장 건설로 파괴되기 시작한 아마존의 열대 우림 지역에서는 이미 빠른 속도로 사막화
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거기 더하여 화석연료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기후온난화가 진행되
어 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습니다. 산성비는 지구 곳곳에서 산림을 황폐화시키
고 있습니다. 독일이 자랑하는 흑림의 65퍼센트는 고사 직전에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도시
와 공단 주변의 하천과 호수는 생물학적으로 죽은 것으로 판정되고 있습니다. 발틱해와 황
해는 획기적인 바다정화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대한 죽음의 바다
가 되고 말 것입니다. 환경파괴와 관련된 목록은 그러나 끝없이 계속됩니다.

욕망의 확대충족의 논리

지구 환경이 이처럼 파괴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환경파괴의 원
인들을 밝혀왔기에 여기서 이를 되풀이할 까닭이 없습니다. 오늘 저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
고 있는 이유 한 가지만을 되짚어 보려고 합니다. 늘어나는 인구의 욕망을 팽창시켜야 제대
로 작동하는 성장경제의 논리가 환경을 가장 치명적으로 파괴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경제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생태계로부터 에너지와 물질을 끌어들여 인간의 욕망을 충족
시키는 데 적합한 형태로 변화시켜 소비하고 그 부산물을 생태계에 방출하는 과정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경제는 생태계를 두 가지 차원에서 이용합니다. 한편으로는 경제활동을 위
한 에너지와 물질의 원천으로 이용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활동의 부산물인 쓰레기
(폐기물과 폐기가스)를 버리는 퇴적장으로 이용합니다. 인간이 욕망충족을 위해 경제활동을
하는 한, 경제계와 생태계의 이와 같은 관계는 피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경제계와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생태계의 안정을 지속시키면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
는가가 중요합니다.
 인구가 증가하면,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재화와 서비스의 양을 늘려야 하기 때
문에 경제성장이 필요합니다. 이미 인구가 많거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저개발국가들을
향해 경제성장을 포기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나라 시민들을 보고 인간다운 삶을 포기
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1992년 리우에서 열린 환경정상회의 이후에 이산
화탄소 배출량을 전세계적으로 감축하자는 논의가 저개발국가들(과 개발도상국가들)의 반발
에 부딪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의 수준을 선진경제들의 풍요한 삶으로까지 격
상시킬 수 없다손 쳐도, 생활필수품의 확보, 의료, 교육, 사회보장, 연금 등의 문제를 해결하
기 위해 저개발국가들의 경제성장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저개발국가들의 적정 경제성장을 용인하면서 인구안정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
울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미 풍요한 선진경제들의 성장강박(Wachstumszwang)이 문제해결을 가
로막는 장본인입니다. 선진경제들의 국민경제는 여전히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경제순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개인소득이 높아지면서 욕구가 날로 다양하게 분화되어 포드식 대량
생산 시스템만을 가지고서는 부족하고 고급상품을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시장에 공급하
여야 한다는 신경영이 벌써 오래 전부터 도입되긴 하였지만, 신경영은 욕망의 확대충족이라
는 성장논리에서 벗어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경영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결합시켰던
1950년대 이래의 선진국형 경기이론의 틀에 안주하고 있는 세련된 경영방법에 불과합니다.  
 욕망의 확대충족은 선진경제들의 기본논리이고, 축적경제의 필연적인 요구입니다. 이윤축
적을 통해 확대생산이 가능한 조건 아래서 소비증가를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소
비가 증가하여 시장규모가 커지면 이윤기회는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경제는 생태계의 안정을 극도로 위협할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선진경제들의 성장강박은, 좀 심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시장경제의 한 운영방
식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정신병입니다. 시장경제의 운영과 관련해서 치열한 경쟁이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한다는 견해를 함부로 부정할 생각이 없습니다마는, 저는 그 견
해를 곧이곧대로 읊조릴 마음도 없습니다. 경쟁이 결국 독점으로 끝나고 마는 시장경제에서
경제적 효율성을 최대화하는 이상적인 경쟁조건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
습니다.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장경제에서 축적은 기업의 사활
적 이해가 걸린 문제입니다. 축적이 이루어져야 기술개발을 위한 지식 헌팅에 나설 수 있고,
기술독점이 이루어져야 시장지배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축적능력이 곧 성장능력을 의미하
는 시장경제에서 성장강박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강박은 파국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기업의 효율성이 수익성을 의미하는
요즈음 기업의 효율성이 향상되었다고 해서 국민경제가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현실이
잘 말해줍니다. 기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용조정을 일삼는 오늘날 노동시장에서 퇴출
된 사람들을 위해 국민 전체가 부담해야 할 사회비용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장강박 아래서
기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해도, 경제활동이 생태계에 가하는
부담을 도외시한 채 경제적 효율성을 생각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가 아닙니까?

녹색 경제를 위한 성서의 교훈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저는 녹색 경제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녹색 경제는 말할 것
도 없이 경제계와 생태계의 균형을 중시하는 경제입니다. 녹색 경제는 환경이 사람들에게
주는 용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경제주체들이 환경보전 비용을 제각기 알맞게 부담해야 한다
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서는 녹색 경제의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
니다. 생태계와 경제계 사이의 에너지-물질 대사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환경용익의 주관성을
넘어설 수 있는 발상의 대전환을 요구합니다. 만물이 서로 결합하고 의존하면서 거대한 생
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생태계가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생태계와 경제
계의 관계를 규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생태학적 용어를 아직 몰랐던 성서가 우리들에게 이미 가르쳐 준 것입니
다. 창세기 1장을 보십시오. 하느님은 처음 지음받은 사람들을 축복하며 그들에게 삶의 가능
성을 열어 주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인구가 늘어나면 땅을 경작하며 살아나가되, 사람
들과 모든 피조물들 사이의 공생 관계를 중시하여야 한다는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창세
기 1장 28절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 이래로 땅의 지배(dominium terrae)로
잘못 새겨졌던 카바쉬 하아레츠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땅을 밟으며 그 소산을 취하는 경작행
위로 새겨집니다. 경작행위로 표현된 인간의 경제활동은 인간창조의 목적을 규정한 창세기
1장 26절에 의해 다시 한번 제한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에 사는 모든 생명을 다스
리라는 말씀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모든 생물들의 공존을 위해 애써야
한다는 뜻이지, 생명을 함부로 다루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정말 유토피아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창세기 1장 29-30절에서 하느님은 생활공간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과 짐승
들에게 모두 채식을 규정함으로써 먹거리를 위한 살륙마저도 금지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
은 하늘과 바다와 땅을 짓고 그 속에 사는 생물들이 공존관계에 있도록 하고는 그 세계를
보고 "참으로 좋다"고 한 겁니다. 참으로 좋은 이 세상은 안식을 향한 생명공동체인 것이지
요.
 성서의 첫 장을 이렇게 읽으며 저는 생태계와 경제계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생태학적
정치이성이 확립되기를 염원합니다. 생태학적 정치이성 아래서 성장과 축적의 논리는 공생
과 공존의 논리로 전환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녹색 밀레니엄을 여는 길이라고 믿고 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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