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2000/01/22 (03:04) from 134.100.43.168' of 134.100.43.168' Article Number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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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여행에서 떠오른 몇 가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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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여행에서 떠오른 몇 가지 단상


강원돈(www.socialethics.org; kwdth@chollian.net)

은사의 공부방에서

최근에 저는 경제의 지구화가 노동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들을 모으기 위해 보훔 지역의 대학교와 연구소들을 방문하였습니다. 98년 여름 잠시 보훔을 찾았으니 1년 반만의 방문인 셈입니다. 제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해 준 브라켈만 교수와 그 사이에 제 은사의 후계자가 된 오랜 친구 예니헨 교수를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노동 문제를 기독교 사회윤리 차원에서 오래 동안 연구해 온 전문가들이기에 이번 만남과 토론이 저에게는 매우 유익했습니다.
 사흘간의 보훔 방문 동안 저를 위해 여러 가지 중요한 모임이 주선되었지만, 저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큰 기쁨을 준 것은 은사를 그 분의 거실에서 다시 만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거실은 브라켈만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거나 쓴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을 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미리 정한 주제를 놓고 열심히 토론을 한 후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며 즐겁게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도 저는 가끔 그 거실을 떠올리며 정신적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곤 했습니다.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엮었던 토론공동체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거실에서 브라켈만 교수는 탁자에 과자와 커피를 준비해 놓고 먼 곳에서 찾아온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 이야기 끝에 요즈음 어떤 연구를 하느냐는 제 물음에 브라켈만 교수는 저를 2층에 있는 그 분의 작업실로 안내했습니다. 거기에는 새로 장만한 컴퓨터와 프린터가 있었습니다. 은퇴 후 비서와 연구지원 인력 없이 작업을 하다보니 컴퓨터가 필요했다고 교수는 설명하고는 "인터넷에도 곧 연결할 거요." 하고 덧붙였습니다. 컴퓨터에는 그 동안 브라켈만 교수가 시대사 연구를 위해 모은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얼른 보기에도 그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4년 전에 은퇴한 늙은 교수가 쉬지 않고 열심히 연구하고 책을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우리는 지구화된 경제에서 노동의 미래가 어떻게 전망되고 미래의 노동이 어떻게 조직되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실업률이 10 퍼센트 안팎을 오르내리는 완숙한 공업사회에서 실업을 최대한 줄이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노동과 삶의 기회를 얻도록 노동시장정책과 사회정책, 재정정책, 경제정책을 어떻게 조합해야 하는가에 교수의 관심은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브라켈만 교수는 이미 발생한 실업자들의 생계를 위해 국가재정을 사용하기보다는 일자리의 수효를 늘리고 이를 사회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국가가 재정을 효율적으로 지출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오래 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는 이 단순해 보이는 논리를 관철하는 데 얼마나 치밀한 윤리적 고려와 정책적 선택이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관해 토론하였고, 독일 모델과 덴마크 모델, 네덜란드 모델을 비교했습니다.

독일 사회의 엄청난 변화

독일 사회는 요즈음 매우 빠른 속도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독일은 안정되고 급격한 변화가 없는 사회로 유명했지만, 몇 년 동안의 시차를 두고 독일을 관찰하는 사람들은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두 가지 예를 들면, 제 가족이 사는 곳에서 전철로 한 정거장 떨어진 바렌휄트에 열 개의 극장이 한꺼번에 들어선 키노막스(KinoMax)가 작년에 세워졌는데, 그곳에서는 극장 구경과 CD 구입, 전자오락, 식사 등을 한번에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번 보훔 방문 기간에 저는 인구밀집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거대한 쇼핑 복합 단지가 들어서고 그곳에 갖가지 엔터테인먼트 마켓(여흥시장)이 번창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그런 시설과 시장이 들어서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쇼핑 복합 단지와 엔터테인먼트 시장은 요즈음 독일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유통산업과 여흥산업에서 나타나는 변화 이외에도 이동전화의 확산, 주식투자 열풍, 거대기업들의 합병도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90년대 중반에도 물론 그 조짐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런 현상은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지, 아직 일상화된 현상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독일 방문 기간에 저는 보수적인 독일 사회에서조차 "이례적인 일"이 "범상화"되고 있다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광고에서도 주식투자와 이른바 재테크를 앞세운 은행 광고가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육감적으로 생긴 여인이 카지노에서 칩을 몰아들이는 화면이 나온 뒤에 매우 축축한 목소리로 "지난밤에 저는 카지노에서 밤새도록 돈을 땄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와서 무슨 도박장 선전인가 했는데, 잠시 뒤에 화면에는 코메르츠 은행 광고가 떠올랐습니다. 독일 제2공영방송(ZDF)의 저녁 7시 뉴스와 날씨 예보 사이에 나온 광고 내용입니다. 요즈음 흔히들 카지노 자본주의를 말하는데, 제가 ZDF에서 본 코메르츠 은행의 광고는 거대 초국적 은행이 카지노 자본주의에 고객을 동원하기 위해 어떤 환상을 불러일으키는가를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동통신시장에서 영국의 보다폰과 독일의 만네스만이 적대적 기업인수를 놓고 벌이는 신문광고 또한 볼 만합니다. 독일의 거의 모든 신문들에 전단 광고를 내고 있는 이 초대기업들은 적대적 기업인수를 둘러싸고 공격측과 방어측으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습니다. 보다폰 쪽이 적대적 기업인수를 통해 주식소득이 60퍼센트 늘어날 것이라고 선전하면, 만네스만 쪽에서는 작년 일년 동안의 주식가치 증가율이 이미 60퍼센트를 훨씬 넘어섰다고 주식동향 도표를 제시하며 응수합니다. 두 진영의 신문광고에는 뚱뚱하게 생긴 여성이나 남성이 등장하여 엄청난 부의 증가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저는 독일에서 이런 광고들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독일인 특유의 투박함과 천박함, 그리고 야비하고도 도발적인 여성의 몸짓이 은행광고나 초대기업들의 선전에 동원된 것은 저로서는 처음 보는 일입니다. 경제의 지구화로 인해 거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난 자본이 가치증식과정에 사람들을 동원하는 데에는 인간의 그런 속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일까요?
 거대한 쇼핑 센터와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화려한 불빛, 주식을 통해 갑자기 부자가 된 "댄디들"과 "레이디들"의 겉치례를 제외하면 독일 거리는 어쩐지 더 황량해 진 듯한 느낌을 줍니다. 손님을 빼앗긴 구 상가 거리들은 어두침침하고, 인적이 끊기다시피 했습니다. 거리청소를 책임지는 지방 정부의 예산이 줄어들다 보니 많은 거리들이 쓰레기로 지저분합니다. 은퇴한 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적은 노동인구가 점점 더 많은 은퇴자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연금제도가 붕괴할까 걱정을 하고 있고, 젊은 세대들은 연금을 둘러싼 세대협약을 더 정의롭게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 12시간 근무에 월 630 마르크(한화로 약 37만원)를 받는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공급해야 한다는 정부의 정책은 많은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노동계약을 통해 정해진 임금이 너무 적을 때에는 국가가 임금을 보전해 주자는 논의도 기업들의 임금착취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노동임금 수준을 계속 아래로 내리 누르려는 기업가들의 "일상적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노동자들은 반발하고 있습니다.
 독일 사회의 엄청난 변화는 이처럼 노동시장정책과 사회정책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변화는 경제의 지구화가 독일 사회에 남긴 여러 흔적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세계시장에서 독일 기업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독일의 산업입지를 기업친화적으로 만들어야 하고 노동시장을 훨씬 더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먹혀들면서 사회적 평화가 심각하게 위협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글로벌 가버넌시

경제의 지구화가 노동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 자료들을 모으면서 저는 지난 2년여 동안 독일 학계에서 지구화를 주제로 한 책이 2백 권 넘게 출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단행본들 이외에 여기 저기 흩어진 연구소들과 연구집단들에서 작성된 논문들의 목록은 끝도 없이 깁니다. 이 주제를 놓고 사회과학, 철학, 신학 등 학문의 각 분야에서 박사학위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때쯤이면 도서관 사서들이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기 위해 손을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경제의 지구화에 관한 논의에서는 지구적 차원에서 경제를 규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토론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제까지 경제의 지구화를 뒷받침해 온 것은 신자유주의였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국가적대적인 성향을 감추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국가가 경제에 간섭하는 것은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확고한 신념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따라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나 규제를 최대한 제거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했습니다.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영토국가의 경제주권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은 것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나타난 지구경제의 불안정성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이제까지처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화폐자본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실물경제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투기열풍을 가져왔습니다. 어디든 돈이 몰리기만 하면 물건의 내재가치와 상관없이 물건값이 폭등하고, 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여기저기서 거품이 터지고 맙니다. 고수익을 노리고 여기저기로 몰려다니는 거대한 화폐자본과 파생상품 기술이 지구경제에 어느 만큼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가는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러시아에서 불거진 금융위기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금융위기에 몰린 나라들이 환율안정을 위해 이자율을 높이자 기업도산이 꼬리를 물고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쳐 났습니다. 달러를 끌어들이기 위해 공공자산이나 사적 자산을 가리지 않고 해외매각을 한 결과 국부의 해외유출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의 희생을 통해 축적된 자산이 거대한 해외자본의 손에 넘어가고 그것이 다시 노동자들의 삶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어 돌아옵니다. 사회적 가난이 확산되고, 자본소득자들과 노동소득자들,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사이의 격차가 빠른 속도로 커집니다. 제가 지금 표본추출하듯이 묘사한 것은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바로 이 현상들이 경제의 지구화가 가져온 현실의 일부입니다.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경제에 대한 정치의 규율을 무력화한 결과 나타난 현실입니다. 이 점을 인식한 사람들이 지구적 차원에서 경제를 정치적으로 규율하는 방안, 곧 글로벌 가버넌시(Global Governancy)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그 방안을 찾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시장의 정글법칙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시장근본주의가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역 차원의 구조정책과 과정정책의 중요성

제가 문헌 수집을 하면서 또 하나 주목한 것은 경제의 지구화에 직면하여 지역경제 차원에서 경제정책과 사회정책과 환경정책을 효과적으로 조합하는 방안이 꾸준히 모색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지역경제가 변화된 경제환경에 적응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지역 경제구조를 개혁하고 그 개혁과정을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독일에서는 이 두 과제를 구조정책과 과정정책 차원에서 수행하는데, 지역 정부가 구조정책과 과정정책을 어떻게 조합하여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정의, 생태학적 안정을 실현할 것인가를 학자들은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석탄산업과 철강산업의 중심지였던 루르 지역에서 경제구조의 개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는 매우 중요한 사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거대산업 중심의 지역경제가 서비스-지식산업 중심의 지역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투자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해나가고, 실업 문제를 극복하고, 직업전환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사회적 동요를 최소화하는 복잡한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들에게도 타산지석이 될 것입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독일이 자랑하는 노사공동결정제도가 엄청난 구조변화에 직면하였던 이 지역에서 사회적 비용과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이 역사적 과업을 달성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보훔 대학교에서 공동결정 제도와 조직이론을 가르치는 발터 뮐러-옌취 교수의 연구 결과입니다. 지구화된 경제에서 신자유주의의 공격을 이겨내고 노사공동결정제도를 어떻게 계속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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