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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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시장경제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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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시장경제의 위기


강원돈

독일 경제의 위기 징후

지난 번 독일 여행에서 저는 경제의 지구화 추세 아래서 독일 경제가 여러 방면에서 위기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국가 신인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일본 다음으로
경상수지 흑자가 많고, 올해의 경제성장률이 3 퍼센트 안팎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물가상
승률이 1 퍼센트 안팎으로 안정되어 있는 독일 경제가 위기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말하
면,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입니다. 아마 실업률이 지난 90년대 내내 10-12 퍼
센트를 오르내리는 현상을 놓고 말하는가 보다 하고 지래 짐작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
다. 물론 대량실업은 "문명 사회의 최대 스캔들"로 인식되고 "자본의 테러"로 규정될 정도로
독일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는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대량실업만이 아니라 사회적 부의 불평등한 분배도 이미 정도를 넘어선 것처럼 보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노동임금은 실질적으로 1.5 퍼센트 상승에 그친 반면, 자본소득자의 수익은
작년 1년 동안에만 40 퍼센트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개인자산의 증가를 보면, 1970년 현재 4
천9백4십억 마르크에 달했던 것이 1980년 현재 약 1조4천9백억 마르크, 1990년 현재 약 3조
2천억 마르크로 증가했고, 1995년에는 4조6천5백억 마르크에 이르렀습니다. 독일 총 자산의
50 퍼센트는 독일인구의 10 퍼센트의 수중에 있다고 합니다.
 사회적 부의 분배가 양극화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독일 기업인들이 가차없이 추구
하는 비용경쟁과 규모의 경제는 더 심각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독일 기
업인들은 경제의 지구화가 세계시장에서 비용경쟁을 첨예화시키고 기업의 몸짓을 부풀리지
않으면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이 강박증 아래서 기업의
경제정책을 결정하도록 강제되고 있기 때문에 한번도 비용경쟁과 규모의 경제가 오늘의 경
제 조건 아래서 필연적이고 현실에 부합하는 것인가를 물을 겨를이 없습니다.
 강박증적인 비용경쟁은 무엇보다도 가차없는 고용조정과 임금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
들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5년 이상 한 직장에서 근무하면 함부로 해고할 수
없도록 규정한 고용안정법이 도마에 오르는가 하면, 장기 근속자가 사정에 의해 직장을 떠
나면 그 자리는 영영 메워지지 않습니다. 미국과는 달리 아직까지는 경영여건에 따른 대량
해고가 사회적 타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러한 타부가 깨지는 것도 시간 문제인 것처
럼 보입니다. 이미 여러 산업 분야들에서는 법제화된 최저임금과 연계되어 있는 파트타임
일자리와 파견근로제가 "정상화"되고 있습니다. 독일 헌법과 독일 노사협약법에 규정된 산
별 노사협약 제도를 파기하고 개별 작업장 단위로 노사협약을 체결하거나 노동자들과 노동
계약을 개별적으로 체결하자는 기업가 연맹의 주장은 비용경쟁의 강박증이 독일 노사관계의
기본 틀을 뒤흔들고 있는 좋은 증거입니다.
 규모의 경제를 향한 강박증은 도이췌 텔레콤(통신), 도이췌 방크(금융), 볼크스봐겐, 다이
믈러 벤츠(자동차) 등 거대 콘체른의 국제적인 기업 인수 합병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독일
자본이 대외적으로 야수적 공격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독일 통일과 독일 기업의 동유럽 진
출, 그리고 지난 몇 년 동안의 금융위기 이후 아시아 진출에서도 드러났지만, 세계경제에서
독과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독일 자본의 투쟁은 기업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만큼 무
시무시한 데가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기업 인수 합병은 노동 측에 고용조정 등 악영향이
우려되고, 이질적인 기업문화들의 충돌로 인해 자본측에조차 큰 손실을 가져 올 수 있습니
다. 또 시장에서의 거대한 독점 형성을 통해 궁극적으로 소비자들이 큰 손실을 볼 수도 있
습니다. 독일 지식인들과 노동조합총연맹은 기회가 닿는 대로 이와 같은 사태발전을 경고했
지만, 시민들은 물론이고 지방정부나 연방정부는 국경을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거대 인수 합
병을 보고 우두망찰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식 수익의 엄청난 향상에 기대를 거는 소수 주주
들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독일에서 1백년의 기업 역사를 지닌 만네스만이 영국의 보다폰에 의해 꿀꺽 먹힌 다음에
독일인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외 금융기관의 거대한 손에 의해 국민경제에
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대 콘체른의 주인이 하루 밤사이에 바뀐 것을 경험한 독일인들이
초국적 기업들 사이의 거대 인수 합병 물결을 막기 위해 새로운 궁리를 할 수 있을까 - 저
는 이것이 매우 궁금합니다.
 오늘의 독일 경제에서 관찰되는 이러한 몇 가지 현상들은 독일 경제가 복합적인 위기의
징후를 보이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위기의 징후가 경제의 지구화 추세 아
래서 진행되는 사회적 시장경제의 침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본령

본래 사회적 시장경제는 경제적 효율성의 추구와 사회정의의 실현을 제도적으로 결합시키려
는 시장경제의 한 스타일입니다.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고, 경
제활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적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이 사회적 시장경제의 기본방향입니
다. 이 단순해 보이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시장경제
의 세 가지 요소들을 잘 조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장경제에서 경제적 효율성은 오직 최적 경쟁 조건 아래서만 달성될 수 있기 때문에 국
가는 경쟁질서를 규율하는 제도를 확립하여 이 틀 안에서 시장주체들이 자유롭고 합리적으
로 행위하도록 유도하여야 합니다. 이 말은 국가가 시장주체들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되
고 시장교환에 참여하는 이해당사자들의 합리적인 판단과 결정을 대신할 수도 없고 대신해
서도 안 되지만, 시장주체들이 권력을 형성하여 공정한 교환질서를 왜곡하지 못하도록 규율
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국가는 시장에 자의적으로 개입하는 대신에, 규율정책을 세
우고 경쟁법, 공정거래법 등을 법제화하여 시장의 질서를 확립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국가는 규율정책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경제정책의 방향을 공개하여
모든 기업인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투자 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보장하여야 한다고 생
각됩니다. 시장경제에 참여하는 이해당사자들은 단기적인 이익을 실현하기 위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국가가 장기적인 안목에서 사회적, 문화적 기반구조를 확립하
기 위하여 방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회적 시장경제에서는 시민사회의 주역인 기업인연맹과 노동조합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
니다. 시장경제에서 노동과 자본이 대립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개별경제적인 이익의 추구로 인해 전체경제적인 최적 성장이 위협받기 쉽다는 것도 잘 알려
져 있습니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기업인들과 노동조합이 국민경제의 최적 성장을 고려하면
서 각각의 이해관계를 최대화하는 것을 권장하고 두 이해당사자들이 책임의식을 가지고 자
율적으로 노사협약을 체결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독일 헌법은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고 기
업인연맹과 노동조합에 노사협약 체결의 배타적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산별 노사협약을 법제
화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습니다. 독일이 자랑하는 산별 노사협약 제도 아래서 노동과 자본
은 오래 동안 사회적 파트너로서 사회적 평화와 경제적 효율성을 동시에 달성하는 데 이바
지할 수 있었습니다. 산별 노사협약은 단위 사업장에서의 노사협약이 산별 노사협약 수준
아래로 체결될 수 없도록 "법률에 버금가는 구속력"을 가지고 관철되기 때문에, 이 제도는
임금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산업별로, 더 나아가서는 전국적으로 평준화하는 데 지대한 공
헌을 하였습니다.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시장을 통한 소득분배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국가가 조세정책과 재정정책, 그리고 노동사회정책을 조합한다는 것입니다. 소득재분배
정책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 이 정책조합은 1920년대 말의 경제대공황과 히틀러 독재를 경험
한 독일 사회에서 사회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적인 법치국가의 틀 안에
서 모든 개인의 자유와 인격을 보호하는 동시에 사회정의를 실현하자는 사회국가의 정신은
인격의 자유와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기독교 사상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기도 합니다. 사
회적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사회국가의 정신은 노동능력이 없거나 노동능력을 상실한 사람들
을 위한 사회적 부조, 일시적으로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원, 노동시
장에서 물러난 사람들의 노후 보장, 평균적인 임금소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부
의 다양한 보조 등으로 구현되었습니다. 여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은 모든 소득에 대한
엄정한 세금징수와 누진세의 도입을 통해 마련되었습니다.

사회국가의 침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장기적으로 경험한 번영과 사회적 평화는 이와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 사회적 시장경제에 힘입은 것입니다. 독일 연방정부는 강력한 산업정책과 구조
정책을 통해 경제부흥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고, 질서자유주의에 근거한 시장규율 정책과 강
력한 소득재분배 정책을 통해 사회적 시장경제를 구축했습니다. 사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국
민경제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소화하기 위하여 연방정부는 노동시간의 단축, 최저생계비를
훨씬 상회하는 임금상승, 사회보장제도의 구축, 교통, 수송, 통신시설 등의 사회적 기반구조
구축, 교육, 연구, 학문장려 등 문화적 기반구조 구축을 정책적으로 펼쳐 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공급능력과 수요능력이 확대되자, 이 두 요소는 고용을 촉진시키는 혁신과 투자로 이
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심각한 경제위기와 1980년대 초에 정점에 도달한 "침체 속의 인플레이
션" 아래서 독일 경제는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이탈하고 점차 신자유주의로 기울기 시작했습
니다.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지구적인 차원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 아래서는 공급자 능력
이 강화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시장 정책, 사회보장 제도, 규율정책, 구조정책, 과
정정책 등 국가의 규제가 철거되어야 하며, 시장의 논리가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
약됩니다. 공급자 능력이 확대되면 투자가 그 뒤를 잇고 그 다음 자동적으로 고용이 증대된
다는 것이 스태그플레이션에 직면한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독일
사회에 전해진 신자유주의의 복음이었습니다.
 헬무트 콜 정권 아래서 신자유주의가 실천되기 시작하면서 소득과 자산 배분이 양극화되
기 시작하였지만, 신자유주의가 약속하였던 투자증대와 고용증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것도 그럴 것이 미국의 자본수지 균형을 위해 1980년대 초이래 국제금리가 끊임없이 높아지
자 축적자본의 상당부분은 실물경제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 화폐자본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거기에 더하여 실물경제에 투입된 자본은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임금비용을
줄이는 노동합리화 정책을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집착증적인 비용경쟁"의 틀 안에
서 대량실업과 초기산업화 시대의 노동관계, 그리고 불안정한 고용관계가 다시 나타나기 시
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에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새로운 가난"의
확산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부의 가속적인 축적과 공공자원의 고갈, 그리고 사
회적 곤궁의 확산이 유기적 연관을 이루는 가운데 아동노동과 매춘이 확산되기에 이른 것입
니다.
 이제 국경을 넘나드는 거대 금융자본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세계적인 기업 인수 합병
물결 아래서 사회적 시장경제의 기본 틀인 경쟁법과 공정거래법은 거의 실효를 상실하고 만
것 같은 느낌입니다.

또 한번 문명으로부터 야만으로 퇴행할 것인가?

사회적 시장경제에 근거한 "문명화된 시민사회"가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야만상태"로 퇴행하
고 있다고 독일 지식인들과 노동조합총연맹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독일의 소시민들
은 그러나 지금 기업인들과 은행가들이 "강박증"에 사로 잡혀 추진하는 경제의 지구화가 어
떤 미래를 가져올 것인지 잘 알지 못한 채 고작 자신의 일자리가 없어지지나 않을까 전전긍
긍하고 있습니다. 지식인들과 노동조합이 내 놓고 있는 제안들은 언론에 의해 무시당하고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거부되고 있습니다.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트
들은 노동시간의 단축이나 일자리 재분배, 사회적 연대를 위한 공정한 조세와 소득재분배,
노사협약의 자율성 존중 등을 "이미 유행이 지난" 이야기 거리쯤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
다.
 물론 독일에서 독일 경제의 미국화에 맞서 싸우는 세력들은 늘어날 것이고, 사회적 위기
가 커 질수록 그들의 주장은 정치적 정당성을 얻어갈 것입니다. 지금 진행되는 경제의 지구
화가 임금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파국을 의미한다는 것을 독일 소시민들이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면 시장경제를 새롭게 규율하려는 정치적 의지도 강화될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 그러한 전환이 올 것인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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