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2010/12/06 (09:23) from 220.66.47.11' of 220.66.47.11' Article Number :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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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신학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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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신학 2

강원돈 (한신대 신학과 교수)

큰 병을 앓다

 초등학교 2학년 말에 우리 집은 서강을 떠나 신촌으로 이사를 했다. 말이 끄는 세 대의 마차로 이사짐을 나르고 식구들은 마차를 따라 걸어갔다. 누나는 교복이 구겨질세라 옷걸이에 건 교복을 손에 들고 친구와 함께 이사 행렬을 따라갔다. 아버지만은 그 행렬에 없었는데, 그분은 이사가 다 끝난 뒤에 비로소 새 집으로 들어왔다. 새로 이사한 집은 방이 네 개가 딸린 아홉 칸의 개량형 한옥이었다. 집 앞으로는 봉원천이 흘렀고, 집 뒤로는 경의선 철둑이 이어졌다. 집의 전경에 해당하는 곳에는 바람산이 서 있었는데, 피폐했던 그 시절에 그것은 나무가 거의 없는 헐벗은 산에 불과했고, 산 허리춤에는 판자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아버지는 연세대학교 재단사무국에서 재산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 당시 외할아버지는 창천교회에서 시무하였다. 큰 이모부가 군인이었기에 그 댁을 제외하고 우리 식구들을 위시하여 외가 식구들은 모두 창천교회에 다녔다. 당시 창천교회는 일제 시절에 지어진 소박한 벽돌 건물이었고, 철둑 쪽으로 넓은 공터가 있어서 운동장 구실을 하였다. 외할아버지의 사택은 지금의 독수리 다방 자리에 세워져 있었던 초가집이었으나 얼마 뒤에 교회 제단 뒤쪽에 양옥집을 지어 옮겨갔다. 주일 예배 뒤에는 옛날 만리동교회 시절처럼 외가 식구들이 모두 모여 함께 식사를 하였다. 내가 주일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외할아버지의 설교를 들은 일은 몇 차례밖에 되지 않았는데, 설교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 나는 외할아버지가 흰 고무신을 신고서 제단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보고 큰 자부심을 느꼈다.
 초등학교 4학년에 나는 중병을 앓기 시작하였다. 초여름의 어느 더운 날 서교동의 한 냇물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놀다 돌아온 밤에 나는 고열에 시달리고 피부에는 붉은 반점이 나타났다. 신촌 시장 근처의 김만협 의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본 결과 류마치스성 관절염에 걸린 것 같다는 소견이 나왔다. 어느 정도 치료를 받아 상태가 좋아졌으나 재발이 되었고, 온 몸이 마비되다시피 하여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 김만협 선생의 권유로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한 달가량 입원하며 치료를 받았으나 차도가 있기는커녕 병세는 더 악화되었다. 척추에서 물을 빼는 일까지 포함해서 매우 다양한 진단을 거듭하였으나 병명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 때부터 나는 3년가량 학교에 가지 못하고 병치레를 하였고, 주로 한방 치료를 받았다. 용하다고 소문이 난 한의사들을 찾아 종로 5가의 화창당 한의원을 위시하여 대방동의 박차관 한의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는 나를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탕약을 다려서 나에게 약을 먹여 주셨다. 나의 병을 고친 분은 대방동 박차관 선생이었다. 어머니는 아예 대방동에 집을 얻어 박차관 의원 집까지 나를 업고 가서 침을 맞고 뜸을 뜨게 하셨다. 어머니는 중병을 앓고 있는 나를 위해 늘 간절한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께서 나의 병을 고쳐 주시면 나를 주께 바치겠다고 서원기도를 하셨다.

서울중학교에 입학하다

 3년여에 걸친 병치레로 나는 무척 쇠약해졌고, 성격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못하고 집 안에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책을 읽는 일이었다. 물론 그 당시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세계동화전집, 한국동화전집, 위인전, 여행기, 각국 신화 모음집 정도가 있었는데, 만화책만은 흔했다. 누나의 방에는 번역된 소설책들과 수필집들이 많이 있어서 그 책들도 뽑아다 읽고는 했다. 나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들은 연세대학교 김형석 교수의 수필집과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 마하트마 간디의 전기 등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을 건너뛰고 6학년에 편입한 나는 열심히 공부하였다. 처음에는 별로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2개월 정도 지나면서는 반에서 선두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6학년 담임은 남상우 선생이었는데, 그분은 몸이 약한 나를 위해 여러 가지 배려를 하였고, 방과 후에는 그분 댁에서 학습 지도를 받게 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를 잘 다니고 식사를 잘 할 수 있도록 여러 모로 애를 썼다.
 6학년 말에 나는 서울중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 때는 아직 중학교 평준화를 시행하기 이전이라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체육 실기 점수가 조금 나쁘기는 하였지만 나는 좋은 성적으로 입학 허락을 받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 근처의 중학교에 진학해도 좋겠다고 생각하였지만, 내가 서울중학교에 합격하자 무척 기뻐하였다. 아버지로부터 합격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너무 기쁜 나머지 나를 껴안고 코를 물기까지 하였는데, 나는 통증과 함께 전해오는 어머니의 희열을 생생하게 느꼈다.  
 나의 서울중학교 시절은 즐겁고 빛나는 시절이었다. 그 학교에는 흔히 영재라 일컬어지는 또래들이 제각기 실력과 재능을 뽐냈기에 선생님들도 학생들을 존중하며 열심히 가르쳤다. 서울중고등학교는 경희궁 터에 일본인들이 오로지 그 자제들만을 위해 세운 경성중학교의 대지와 건물을 물려받은 공립학교였고, 부지의 면적이 4만여 평에 이르렀다. 학교 뒷산은 울창한 숲을 이루었고, 앞으로는 남산이, 뒤로는 인왕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명당에 위치하였다. 학교의 터와 건물들은 나의 마음에 들었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공부하던 건물은 신관이었는데, 학교 정문에서 신관으로 오르는 길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진 제1운동장 길과 음악관, 고목나무와 강당, 장희빈이 문짝에 깔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궐 터에 세워진 체육관이 이어졌고, 이른 아침에는 까치가 우는 소리가 청랑하였다. 제1운동장 가에 있는 신문로파출소에 바짝 붙은 곳에는 임금에게 바치는 물을 떴다는 용비천이 있었다. 본관 앞의 제2운동장 주변에는 삼일탑과 서울중학교 출신 학도의용군 전사자를 기리는 표충탑이 세워져 있었다. 학교 뒷 편의 제3운동장에서는 인왕산뿐만 아니라 북악산과 멀리 북한산맥이 보였다. 그 운동장 밑에는 일제 때 건설된 방공호가 있었다.

서울중학교 시절

 서울중학교에 다니던 동안에 나는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그들은 서울고등학교에도 함께 진학하여 학창 시절에 우정을 나누던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 안기주(安基柱) 군과는 집을 오가며 같이 잠을 잘 정도로 친했다. 그는 서울대학교 농대를 졸업한 뒤에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그밖의 다른 친구들 이야기는 다른 문맥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나는 학과 공부 이외에 많은 책을 읽었다. 누나의 방에 있는 소설책들과 수상록들은 거의 빠짐없이 읽었는데, 여기서 그 목록을 자세하게 나열할 수는 없지만 헤르만 헤쎄의 『데미안』, 『황야의 늑대』,『수레바퀴 밑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로망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릴케의 『말테의 수기』, 김은국의 『순교자』, 전혜린의 수상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이 특히 인상 깊었다. 전혜린 씨의 글은 관습과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뚜렷한 주관을 갖고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저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어 감동적이었다.
 중학교 시절의 독서로 인하여 나의 필력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향상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때에는 학교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여 그 작품이 학교 신문에 실리게 되었다. “만추”라는 제목을 받아 쓴 그 글에서 나는 여름의 빛나는 푸르름을 뒤로 하고 낙엽이 되어 뒹구는 나뭇잎을 보며 삶의 지향점을 놓고 고민하며 성찰하는 소년의 모습을 그렸고, 신부가 되고 싶은 심경을 찬찬히 묘사하였다. 사람들 앞에 처음 발표한 그 글에서 나는 나의 종교적 지향을 밝힌 셈이다.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누나와 함께 이천환(李天煥) 감독이 강론을 맡은 세브란스 병원 채플에 가서 예배를 볼 때가 많았다. 그 당시 외할아버지는 인천 내리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천에 매주일 내려가 내리교회에서 예배를 볼 수 없었기에 오덕유(吳德裕) 목사가 시무하는 안동교회에 출석하였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나도 안동교회에 가서 대예배를 보았다. 예배가 파하면 우리 식구는 종로의 한일관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곤 하였는데, 예배 뒤에 나누는 가족 식사는 참 즐거웠다.
 안동교회는 안국동에 있는 오래된 양반 교회인지라 예배 시간에는 간혹 헛기침 소리가 날 뿐 정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덕유 목사는 설교문을 꼼꼼하게 공책에 기록한 뒤에 목소리의 강약과 억양을 살려가며 설교문을 문자 그대로 읽는 방식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그 설교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교인들이 그 설교를 들으며 어떻게 하면 목사님 몰래 달아날 수 있을까 궁리할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오덕유 목사가 장로교 전통에 가장 충실한 설교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신학교 교수로서 채플에서 설교를 할 때 나는 일부러 오덕유 목사의 스타일로 설교를 하면서 이것이 장로교 설교의 모범이라고 주장하며 “왜 내가 설교 노트에 얼굴을 파묻고 설교를 하는 동안에 달아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학생들을 웃기곤 했다.

나의 사촌형 김규직(金圭稷)

 큰 이모는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 넷 가운데 셋은 모두 서울중학교에 다녔다. 그래서인지 나는 증학교에 가게 되면 당연히 서울중학교를 다녀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사촌형들 가운데 나와 가장 친한 형은 둘째인 고 김규직(金圭稷)이었다.
 규직 형은 서울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야구부에 속했다. 학교 뒷산의 숲에서 찍은 사진에는 야구복을 입고 야구방망이를 짚고 선 형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잘 생긴 얼굴에 의젓한 모습이었다.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를 지망하였는데, 여러 차례 떨어졌고, 3수를 거친 뒤에야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는 철학과에서 학사 과정과 석사 과정을 마친 뒤에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최문환(崔 文煥) 박사의 딸인 최연실과 결혼했다. 신혼의 두 사람은 서독으로 유학을 할 예정으로 있었다. 규직 형은 분배의 정의를 주제로 정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쓸 생각이었고, 최연실은 횔데를린에 대한 석사 학위 논문을 발전시켜 독문학 박사논문을 쓸 예정이었다. 1976년 6월에 서독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열린 환송연에서 규직 형은 환송주를 여러 잔 마시고 물에 들어갔다가 심장마비로 익사를 하고 말았다. 큰 이모는 형이 무엇인가를 움켜잡으려고 애쓰다가 손톱마다 이끼가 끼었노라고 울부짖으며 형이 겪었을 죽음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며 슬퍼했다. 그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내가 병치레를 하고 있는 동안에 규직 형은 나를 자주 찾아와 위로했다. 그는 여러 차례 대학 시험에 낙방하여 의기소침했다. 집에서 담근 포도주를 청해 마신 뒤에 술기운이 돌면 “원돈아, 너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나는 참 불쌍한 놈이다.” 하며 넋두리를 하곤 했다. 그는 거듭해서 낙방을 해서 면목이 없었던지 교회에서도 외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다녔다. 어느 날 창천교회 운동장에 폐목 등속을 모아 놓고 불을 낸 적이 있었는데, 형은 불길 위를 여러 차례 뛰어넘으며 호방하게 웃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사택과 교회건물 사이에서 형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형도 할아버지를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의기소침하지 않은 활달한 모습을 할아버지에게 각인시켜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규직 형과 바둑 친구가 되었고, 철학의 여러 주제들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 규직 형은 “옹느 팡스”(생각하는 존재)라는 말을 외치며 “철학하는 사람 따로 있냐?”고 반문하면서 철학하는 사람의 고뇌어린 표정을 과장되게 표현하여 나를 웃기곤 하였지만, 철학적 토론을 할 때에는 차근차근하게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제시하였다. 나는 시간의 무한성과 공간의 연장성에 관해 토론을 하면서 규직 형이 지었던 진지한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규직 형은 인과율과 자유의지에 관한 석사 학위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을 쓸 때에도 그는 나와 많은 주제로 철학적인 토론을 벌였다.
 규직 형의 영향을 받으며 나는 이미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철학 책을 읽었는데,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난 뒤에는 칸트의 인식론과 도덕철학에 관한 책들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서울고등학교 시절

 서울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문예신문반 선배들이 나를 찾아왔다. 중학교 시절 가을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적이 있었기에 선배들은 나를 문예신문반원으로 영입하고 싶어 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문예신문반에 가입했다.
 서울고등학교는 그 당시 엘리트 학교들 가운데서도 문인 전통이 특히 강한 학교였고, 문예신문반은 가장 주목받는 동아리였다. 문예신문반은 1년에 여섯 차례 학교신문 『경희신문』(慶熙新聞)을 편집하였고, 1년에 한번씩 교지 『경희』(慶熙)를 편집하였다. 학교신문에는 학교 운영과 학생 생활, 교직원 동향과 관련된 기사들이 나가는 법이지만, 『慶熙新聞』의 자랑은 교사들과 학생들의 품격 있는 논설을 많이 실었다는 것이다.
 나의 문예신문반 동기 송호근(宋虎根, 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은 “교사는 있으되, 스승은 없다.”는 탄식어린 논설을 썼고, 나는 『중용』(中庸)에 나오는 ‘신독’(愼獨)이라는 어구를 풀이하면서 홀로 있을 때 스스로를 삼가는 자율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는 학생 세평을 발표했다. 교지에는 해마다 우수한 소설, 시, 수필 작품을 뽑아 시상하는 ‘경희문학상’ 수상작들을 위시하여 학생들의 문학작품들이 실렸고, 학생들이 스스로 주제를 정하여 연구한 논문들이 실렸다. 그리고 해마다 특집 주제를 정하여 학교 안팎의 명사들이나 교사들, 그리고 학생들의 글을 실었다.
 나는 1학년 때 「침묵과 위선」이라는 단편소설을 써서 경희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1학년 때에 단군신화가 민족의 위기 시에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주장하는 논문을 썼고, 2학년 때에는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를 중심으로 삶의 부조리에 대한 명징한 의식으로부터 실존적 책임으로 나아가는 삶의 극적인 전환을 분석하는 논문을 썼다. 2학년 때에는 문예신문반장으로서 학교신문과 교지를 편집하였고,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문학의 밤 행사를 주관하였다.
 문예신문반 시절에 나는 사르트르와 카뮈 등의 실존주의 문학에 깊이 빠져 들었고, 도스토옙스키,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등의 작품을 흥미 있게 읽었다.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나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나의 일생에서 그 시절만큼 많은 소설과 시, 에세이와 평론을 읽었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현대문학』, 『시문학』,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등의 월간지와 계간지에 어떤 글들이 새로 실릴까 기대하면서 신간을 구입하고 읽는 데 몰두했다.
 그 시절의 나에게는 그 어느 것도 더 이상 자명하거나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 혹은 주장을 접할 때 나는 그것이 나에게 어떤 실존적 의미를 갖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의 존재나 계명은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 가족의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분명히 삶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분위기, 어떤 오로라였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는 삶은 부자유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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