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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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신학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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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신학 3

강원돈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대학에 가서 철학이나 종교학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고등학교 3학년 초에 학급담임이었던 김조영(金祖寧) 선생이 지망학과를 묻기에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종교학과를 가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3학년 내내 좋은 성적을 유지하였지만 막상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다들 어이가 없어했다.
한 해를 쉬는 동안에 나는 누나의 친구인 화가 김정재 씨의 화랑에 나가서 아그리빠 각면부터 시작해서 데생을 배우며 유화를 그렸다. 나의 방에 벽화를 그리며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고, 때때로 유랑에 가까운 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이미 공부했던 고등학교 교과서를 다시 다락에서 끄집어내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시 입시를 치루기에 앞서서 어머니는 내가 아팠을 때 서원기도를 드렸던 일을 떠올리고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길을 가지 않고서는 어떤 참된 열매도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그것은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 수업을 받으라는 권고였다. 아버지는 한국신학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그분은 조선신학교와 그 후신인 한국신학대학이 배출한 뛰어난 인물들과 청년기부터 깊은 교분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자유가 보장된 한국신학대학을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대학으로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뭔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나를 신학교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한국신학대학에 지망하기 위해서는 지망동기서를 쓰고, 소속 교회 당회장의 추천서를 받아야 했다. 나는 지망동기서를 쓰면서 칸트의 인식론을 연구한 바 있는 학도로서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일이 무망하다는 것을 밝히면서도 나를 신학교로 이끄신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알게 하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도록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파스칼이 『팡세』에서 ‘철학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선언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오직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신학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확신했다.
나는 안동교회 당회장인 용재호(龍在浩) 목사의 추천서를 받았다. 추천서를 받으러 아버지와 함께 용 목사를 만나러 갔더니 그분은 한국신학대학 학생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하는 전문가들이라고 하면서 온 힘을 다해 손을 흔들며 시위를 독려하는 시위주동자의 몸짓을 흉내 내기까지 하였다. 용재호 목사가 그런 말과 몸짓을 통해서 한국신학대학 진학을 독려한 것인지 만류한 것인지 나로서는 분명하지 않았으나, 아무튼 한국신학대학은 나에게 강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때는 1975년 1월경이었으니 유신독재가 삼엄하고 그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했던 때였다. 한국신학대학은 민주화 운동의 한복판에 있었고 당국의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안병무(安炳茂) 박사의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분은 암울한 한국 사회에서 눌린 사람들, 빼앗기는 사람들, 밀려난 사람들 가운데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었다.
나는 1975년 2월 한국신학대학 입학을 허락받았다.

한국신학대학에서 처음 맞이한 봄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한 뒤에 나는 장일조(張日祖) 교수의 개학강연을 인상 깊게 들었다. 장 교수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비판」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부르주아 계급은 자유, 평등, 박애의 시민적 가치를 정치적으로 실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이러한 시민적 가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진전되면서 바뵈프(F. N. Babeuf)가 “인권선언만으로는 굶주림을 달랠 수 없다.”고 외치며, 교육과 노동의 기회 균등, 토지소유의 제한, 소유의 평등 같은 사회주의적 요구를 내세운 것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사회의 지양으로서 역사적으로 요청되었다는 것이 개학강연의 주요 테제였다.
나는 장일조 교수의 개학강연을 들으며 한국신학대학에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신학대학이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목사후보생 교육을 담당하는 신학교이기에 혹시나 고리타분하지나 않을까 하는 기우는 사라졌다. 장 교수의 개학강연은 그 동안 실존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던 나를 뒤흔들어 현실의 구체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실존은 더 이상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하여 일상적 현실로부터 벗어난 존재일 수 없었다. 그것은 세계의 현실 속으로 던져진 존재이다. 나는 현실의 존재로서의 실존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재를 에워싸고 있는 현실의 구조를 분석하고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국신학대학에서 처음 맞는 봄 학기는 유신철폐를 위한 반정부 시위로 점철되었다. 3월 26일에는 150명의 학생들이 반정부 침묵시위를 벌였고, 4월 1일에는 독재타도, 민주화, 인권회복을 요구하는 반정부 성토대회가 열렸고, 4월 3일에는 채플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향해 나아가 경찰 병력과 충돌했다. 4월 9일 한국신학대학 학생들과 감리교신학대학 학생들은 서울 명동의 YWCA 강당에서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공동 대회를 열었고, 명동 일대에서 간헐적인 시위를 벌였다.
4월 10일 문교부(오늘의 교육과학기술부)는 한국신학대학에 휴업령 조치를 내렸다. 휴업령은 시위가 벌어진 뒤에 학교 당국이 취했던 휴강 조치와는 판이하게 다른 엄중한 행정 조치였다. 휴업령이 지속되는 동안에 학생들은 학교 출입조차 금지되었으며, 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업무 이외에 일체의 학사운영이 중지되었다. 휴업령 조치와 더불어 문교부는 안병무(安炳茂) 교수와 문동환(文東煥) 교수에 대한 해직 명령과 4학년 학생 12 명에 대한 제적명령을 내렸다. 휴업령은 7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1975년의 봄은 그 당시 『한국신학대학보』에 기록된 대로 “검은 4월”이었다.

장일조(張日祖) 교수

휴업령이 계속되자 나로서는 책을 읽는 일 이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장일조(張日祖) 교수가 교양 철학 시간에 특유의 표정으로 데까르트의 “방법적 회의”에 대해 설명하던 장면을 떠올리고는 『방법서설』을 정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데까르트는 지식의 확실성을 추구하며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하였지만, 끝없이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만큼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이와 같이 자명한 의식의 토대 위에 지식의 확실성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생각을 응축한 명제가 바로 '꼬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다. 나는 이 고전적 명제에 응축되어 있는 데까르트의 의식철학이 어떤 계보를 그리며 발전하였는가를 더 추적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 생존해 있었던 규직(圭稷) 형의 도움을 받으며 의식철학의 계보를 연구했다. 데까르트의 의식철학은 칸트의 인식론에서 인식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의식의 통각(統覺)이라는 개념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고, 엄밀한 학으로서의 현상학을 발전시킨 에드문트 훗설(Edmund Husserl)에게 이어진다. 이러한 계보를 파악하자 나는 훗설의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당시 훗설의 책 가운데 번역되어 있었던 것은 『현상학 서설』 (서울: 대양서적, 1971)과 『현상학의 이념』 (서울: 삼성출판사, 1973)이었다. 나는 이 책들을 정독하면서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감행하면서 의식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방법적 엄밀성에 경탄하였다. 휴업령 기간 동안에 훗설의 현상학에 몰두한 나머지 나는 나중에 마르틴 하이데거의 실존 분석이나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사회이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나는 데카르트로부터 훗설에 이르는 의식철학의 계보에 대한 글을 써서 장일조 교수에게 제출했다. 그 글은 200자 원고지로 200매 가량 되었다. 나는 그 글을 제출하기 위해 6월 중순에 수유리 학교로 갔는데 휴업령으로 인해 출입이 제한되었다. 장 교수 댁에 전화를 걸어 교수 사택을 방문하는 것이 확인된 다음에야 비로소 출입 허가를 받았다. 나는 교수를 만나러 가는 일조차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세상이 과연 제대로 된 세상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착잡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장 교수는 큰 글을 써 온 학생을 치하해 주었다. 나는 의식철학을 공부하면서 궁금하였던 것을 장 교수에게 물으며 토론을 벌였는데,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나는 장 교수를 자주 찾아가 철학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나의 신학교 시절에 장 교수와 벌인 토론은 참으로 다양한 주제들을 망라하였는데,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이와 같은 토론을 통하여 해석학, 변증법 등의 방법론을 익혔고,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섭렵하였다.

유신독재 시절의 대학생활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4년간(1975-1979)은 유신독재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는 긴급조치 9호가 공포되어 있었다. 긴급조치 9호는 1975년 5월 13일에 공포되었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이 패망한 직후에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명분으로 내걸면서 극단적인 억압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긴급조치 9호로 인해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일은 그 어떤 일도 허용되지 않았고, 긴급조치 9호 위반자들에 대한 일체의 보도도 용인되지 않았다. 이로써 한국 민주주의는 죽었다.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에 관한 언론보도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유비통신이 난무하였다.
1975년 7월 초순에 한국신학대학에 내린 휴업령이 풀리자 나는 『한국신학대학보』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편집장 이진숙(李眞淑, 현재 중국연변직업기술학교 선교사)은 나에게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북노회의 인권운동을 취재하라고 지시했다. 그 당시 전북노회에서는 강희남(姜希南) 목사, 은명기(殷明基) 목사, 양교철(梁校喆) 목사 등 수많은 목회자들이 민주화 인권 운동에 나서고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나서 나는 “전북노회, 인권의 횃불을 높이 들다”는 큰 기사를 써서 전북노회의 목회자들이 긴급조치 9호 치하의 깜깜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 기사와 더불어 나는 당시 여산교회에서 시무하던 양교철 목사의 기고문을 받아 게재하게 했다. “총회에 바란다”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양 목사는 기장 총회가 유신 독재의 엄혹한 시대에 교회 내부의 행정적인 일들에 붙잡혀 있기보다는 민주화 인권 운동 같이 우리 국민이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강력한 논조의 글을 썼다. 나도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기명 칼럼을 써서 학보에 발표했다.
학보가 나오자 서울지방경찰청 북부경찰서 형사들이 학보사 편집장 이진숙과 학생기자 인태선(印泰善), 김하범(金夏範) 등을 체포했다. 양교철 목사도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나는 일단 몸을 피해서 장기간의 구금만은 면했다. 동료들이 체포된 뒤에 약 보름가량 여러 지인들의 집을 옮겨 다녔던 나는 검찰, 정보부, 북부경찰서 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취조에 마침내 응했다. 그래야 수사가 끝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경찰서에 출두하자 동료들은 나를 보고 기뻐했고, 인태선은 무릎을 꿇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야, 원돈아!” 하고 외쳤는데, 이로 인하여 그는 형사들로부터 5분 이상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그는 학보에 “제 철도 아닌데 개나리가 교정에 만발했다.”고 써서 교정에 들어와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던 형사들을 개나리에 빗댔는데, 이에 약이 오른 형사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를 흠씬 두들겨 팼던 것이다.
나에 대한 형사들의 취조는 엄혹했다.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국가에 관한 기사를 손가락으로 짚고서는 “너 공산주의자지!” 하고 윽박지르며 말도 안 되는 자백을 강요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나를 구속하면 양교철 목사도 구속해야 할 판인지라 며칠 동안 취조를 받고난 뒤에 나는 검찰의 지휘를 받고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오직 편집장 이진숙만이 구속되어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신학대학 시절에 심취했던 사회과학

한국신학대학 동기들 가운데 조성범(趙聖範)은 조용범(趙容範)의 『후진국경제론』 (서울: 박영사, 1973)을 읽는 독서 모임을 만들어 사회과학 공부를 주도했다. 고려대학교 경제학 교수였던 조용범 박사의 책은 후진국 경제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한 역작이었는데, 한국 경제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 대안을 찾고자 했던 당대 지식인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한국 경제가 해외 자본의 지배 아래서 종속적 지위에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 경제가 대외종속성 지양, 매판세력 제거, 농민 주체의 실질적 토지개혁 완수, 외국자본 활동의 제한, 국제분업 지양 등을 통하여 자주적 근대화 과정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조용범의 책을 읽고 난 뒤에 경제사 공부에 몰두하였다. 그 당시 나와 있었던 유력한 경제사 책들로는 최호진(崔虎鎭)이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쓴 경제사와 조기준(趙璣濬)이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쓴 경제사가 있었다. 앞의 것은 경제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보았고, 뒤의 것은 정치적 전통과 문화적 전통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하며 경제사의 전개과정을 설명하였고, 특히 게르만 봉건경제의 전개와 초기 부르주아 계급에서 나타난 자본주의 정신의 태동을 매우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나는 경제사를 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을 나름대로 소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관련 서적들을 찾아 읽는 과정에서 맑스주의적 역사해석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맑스와 맑스주의에 대한 연구는 금기시되어 있었고, 해당 주제에 대한 원서를 입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헤에겔과 사회이론의 융성』 (서울: 문명사, 1970), 시드니 후크의 『맑스와 맑스주의자들』(서울: 思想界社, 1961), 로버트 헤일브로너의 『경제사상사』 (서울: 문명사, 1975), 에드윈 셀리그만의 『경제사관의 제문제』(서울: 한마당, 1979) 등이 번역되어 있어서 맑스와 맑스주의에 대한 젊은 지성의 갈증을 간신히 해소해 주었을 뿐이다.
나는 1976년 6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사촌형 김규직(金圭稷)의 서재를 둘러보다가 맑스-엥겔스 선집 영문판과 엥겔스의 『안티 뒤링』영문판을 발견하고는 이를 집으로 가져다가 읽기 시작했다. 장일조(張日祖) 교수에게 그 책들을 읽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분은 전문적인 안내를 받으며 읽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을 하였다.
학부 시절에 나는 몇몇 선후배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장일조 교수의 지도를 받아가며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책들을 읽었다. 위에서 말한 『이성과 혁명』을 위시하여 그 당시 번역되어 있었던 『에로스와 문명』 (서울: 왕문사, 1973), 『일차원적 인간』, 『부정(否定)』 (서울: 삼성출판사, 1976) 등을 함께 읽고 토론하며 나는 맑스주의적 사회분석과 프로이트적 심리분석을 결합시켜 비판이론을 발전시킨 마르쿠제의 입장에 깊이 공감하였다.
학부 시절에 읽고 토론하였던 사회과학 서적들과 사회철학 서적들을 여기서 다 열거할 수는 없다. 이러한 독서는 내가 훗날 신학적 성찰과 맑스주의적 현실분석의 결합에 바탕을 둔 신학적 해석학을 모색하면서 “물(物)의 신학”을 전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사회운동이념사와 학문이론 강의

한국신학대학 시절에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나에게는 매우 중대한 경험이었다. 아마 이 경험이 있었기에 내가 훗날 사회 문제를 제도적인 측면에서 다루는 기독교 사회윤리학을 나의 전공 분야로 선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현실에 대한 본격적인 사회과학적 분석을 시도하기는 어려웠다. 사회과학적 현실분석을 위한 엄격한 방법론 훈련을 할 수도 없었고, 이와 관련된 서적들이나 자료들조차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일조 교수가 몇 학기에 걸쳐 연속으로 개설한 사회운동이념사 강의는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고대 사회로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사회변화 과정에서 새로운 이념이 어떻게 정립되고 발전해 갔는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였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서로 얽혀 진행되는 혁명 과정에서 지배세력과 변혁세력 사이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내가 사회운동이념사 강의를 수강하기 시작했던 1976년 가을 학기에 장일조 교수는 고대로부터 중세 후기까지의 강의를 일단 마무리 짓고서 근대 유토피아 사상의 태동과 전개를 막 다루려던 참이었다. 그는 근대 세계에서 유토피아가 현실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의식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였지만, 그와 같은 의식이 유토피아로 표현된 것은 현실을 총체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주체가 아직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회운동이념의 전개를 설명하는 장일조 교수의 강의는 나를 크게 매료시켰다. 나는 그분의 강의에 계속 참석하면서 사회운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주목하였고, 특히 근대 세계에서 태동한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라쌀레주의적 사회주의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장일조 교수의 강의는 주로 받아쓰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당시 그 강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교과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200자 원고지에 일일이 적어 와서 그 원고를 강의록 삼아 천천히 읽어나갔고, 학생들은 그 내용을 꼬박꼬박 필기했다. 간혹 학생들의 질문이 있을 때에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 원고는 고 안병무(安炳茂) 박사가 편집한 『현존』 지에 연재되었고, 1979년에는 전망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그 책의 제목 역시 『사회운동이념사』였다.
내가 한국신학대학을 다니는 동안에 장일조 교수가 학부에서 개설한 교과목은 사회운동이념사 이외에 논리학, 학문의 체계와 방법 등이었다. 학문의 체계와 방법도 네 학기에 걸쳐 연속으로 개설되었는데, 그것은 학문이론을 연습할 수 있도록 고안된 교과목이었다. 나는 이 교과목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이수함으로써 논리실증주의, 변증법, 현상학, 해석학, 구조주의 등을 체계적으로 연습할 수 있었다. 이 훈련은 훗날 내가 기독교 사회윤리를 전개하면서 사회과학적 현실분석과 신학적 성찰을 서로 매개시키는 과정을 방법론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철학적 소양을 확고하게 갖출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