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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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타난 종교계의 정치적 발언에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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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타난 종교계의 정치적 발언에 붙여

강원돈 (한신대 교수/사회윤리)

최근 종교계가 나서서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훼손되었다고 비판하고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는 강력한 성명서들을 채택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종교의 정치 참여가 민주주의 실현과 인권 옹호에 큰 흔적을 남긴 것을 돌이켜 보면, 최근의 종교계 동향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유신 체제가 한국 민주주의의 죽음을 선포하며 등장하였을 때 한국 사회에는 조그만 저항의 움직임마저 사그라진 것 같이 보였지만, 유신 철폐와 긴급조치 철회를 외친 최초의 함성은 젊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로부터 터져나왔다. 순교의 각오를 다짐하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종교계의 최근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청와대와 정부는 국론분열을 조장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종교계가 종북인사들로 오염되었다고 비난하고, 종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고 다그치지만, 이처럼 케케묵고 판에 박힌 수사는 정부가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매우 까다롭다. 역사적으로 그 관계는 긍정적인 면모를 보이는 경우도 있었고,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종교가 정치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고 정치가 본연의 임무를 잘 수행하도록 감시하고 질정하는 파수꾼 노릇을 하는 경우가 앞의 예라고 한다면, 종교와 정치와 한 통속이 되어 헤게모니 블록을 형성하는 경우가 뒤의 예일 것이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제대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 여러 종교들의 역사에서 많은 사례들을 분석하여야 할 것이나, 이 짧은 글에서 나는 기독교의 역사로부터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교훈을 몇 가지 얻어 볼까 한다.

콘스탄틴적 기독교: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동맹

종교와 정치가 헤게모니 블록을 형성한 사례들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무수히 많이 찾을 수 있지만, 그 대표적인 사례는 콘스탄틴적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오랜 박해 끝에 기독교인들의 종교가 AD 4세기 초에 로마의 한 종교로 공인되고 더 나아가 4세기 말에 로마의 국교로 선언되자 기독교는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하나의 종교로 이루어지는 권력 삼위일체의 필요 불가결한 구성 부분이 되었다. 기독교는 국가 권력이 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주장함으로써 권력의 신성성과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신민들로 하여금 국가 권력에 복종하도록 훈육하는 일을 맡았으며, 그 대가로 국가로부터 엄청난 땅과 재산을 받고, 성직자들의 세금과 군역을 면제받고, 교육 시행의 권한을 부여받고, 경우에 따라서는 민사 재판권을 행사하는 등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콘스탄틴적 기독교는 교회에서 성서 해석과 성례집행 등 구원의 수단을 독점한 교권 세력과 세속 사회에서 권력 수단을 독점한 지배 세력 사이의 동맹을 그 본질로 하는데, 이러한 헤게모니 동맹은 서구 역사에서 기독교를 지배자의 종교로 만들었다. 이처럼 기독교가 지배자의 종교로 고착되어 간 것은 작은 사람들의 편에 서는 하느님의 정의와 배치하는 일이라고 볼 여지마저 있다.

종교개혁: 교회와 국가의 긴장관계

왕관과 제단의 융합을 기본으로 하는 콘스탄틴적 기독교를 극복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규율하는 신학적 관점을 제시하는 일로 나타났다. 루터는 하느님의 통치를 실행하는 두 기관을 구별했다. 하나는 국가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이다. 국가는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질서와 정의를 수립하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이다. 이를 위해 국가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율법과 칼이다. 국가는 율법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국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을 규율하고, 칼로 상징되는 폭력을 행사하여 범법을 다스린다. 이에 반해 교회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세워진 하느님의 도구이다. 이를 위해 하느님은 교회에 복음을 맡겼다. 교회는 하느님 앞에 선 사람들의 양심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한다.
루터에게서 이 두 기관들은 그 역할이 명확하게 구별되지만, 서로 분리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국가는 교회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도록 교회 바깥의 질서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국가는 교회의 문턱을 넘어서서 교회 안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양심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교회대로 국가를 위해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율법을 설교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국가의 질서를 자발적으로 지킬 수 있도록 훈육하는 일이다. 교회에 맡겨진 율법설교는 신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도 그 대상으로 한다. 교회는 통치자로 하여금 율법에 따라 통치를 하도록 요구하고 이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국가의 활동을 감독하고 비판하는 파수꾼이다. 그러나 교회는 국가의 일을 대행할 수 없다. 교회에게는 복음의 정치적 활용이 허락되어 있지 않고, 율법의 정치적 활용 역시 용인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루터의 두 왕국론은 콘스탄틴적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교회와 국가를 구별하지만 분리하지 않고, 둘 사이의 협력을 강조하지만 두 기관의 역할에 각각 명확한 한계를 설정한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기독교의 역사에서 국가와 교회의 분리라는 근대사회의 요구가 실현되기 시작한 것은 유럽 사람들이 30년 전쟁(1618-1648) 같은 종교전쟁의 가혹한 경험을 겪은 이후였다.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한 영주, 한 교회의 원칙(cuius regio, eius religio)에 따라 가톨릭교회와 루터교의 관계를 규율한 아욱스부르크 평화조약의 정신을 계승하여 가톨릭교회, 루터교, 개혁교회의 관계를 규율하고, 국가가 종교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그 기본원칙으로 삼았다. 근대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체결된 1648년의 평화조약은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해방이라는 의미의 정교분리를 규정한 것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국가로부터 교회의 해방을 목표로 하였다면,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교회가 입적, 결혼, 장례 등의 민사행정과 교육 등 국가의 기본업무로부터 손을 떼게 하고 교회에 부여한 광범위한 특권들을 박탈하였다는 점에서 교회로부터 국가의 해방을 실현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헌법에 명시되기 시작한 정교분리와 국교 금지 조항은 근대 국가 구성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헌법 조항은 부르주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채택되었으며, 우리나라도 헌법 제20조 1항과 2항에 이를 명시하고 있다.

종교의 정치 참여에 대한 시사점

위에서 간략하게 서술한 기독교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울 수 있듯이,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들을 안고 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느님의 통치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전제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기독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무릇 종교는 세상 만물을 운영하는 원리에 대한 종교적 통찰을 갖고 있기에 그 원리에 따라 정치적인 것을 다스리는 방안을 제시하고 싶어 한다. 종교의 정치 참여가 요청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콘스탄틴적 기독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의 정치 참여는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유착하는 방식을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권력을 독점한 국가는 국가의 필요에 따라 종교를 동원해서는 안 될 것이며, 종교의 일에 간섭하거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어떤 조치도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종교는 종교의 제도적 존립과 번영을 위해 정치권력에 기대서는 안 되고, 국가가 할 일을 자신이 스스로 떠맡을 수 있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종교와 정치,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구현된 근대 국가의 헌정 질서에서 종교의 정치 참여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다양한 계급, 계층, 정체성 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모든 국민이 최적의 복지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정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감시하고 질정하는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종교가 정치권력으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최근에 종교계가 나서서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으로 인해 2012년 대통령 선거가 절차적 정당성을 결여하였다고 비판하고, 박근혜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정권의 정통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종교가 수행하여야 할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례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로 인하여 노동과 자본의 권력관계가 크게 기울어지고 사회적 양극화가 악화일로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관한 공약을 폐기하다시피 한 것에 대해 종교계가 경종을 울리고 나선 것도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서 종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