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2014/11/11 (14:22) from 220.66.47.11' of 220.66.47.11' Article Number :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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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하는 교회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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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하는 교회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강원돈 (사회윤리/한신대 교수)

머리말

“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하는 교회”는 2014년 9월에 열린 한국기독교장로회 제99회 총회가 내건 주제이다. 총회는 참회를 상징하는 ‘재’의 입장으로 시작되었고, 회무를 마치면서 「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하는 교회 - 참회하며 새 역사를 준비합시다!」라는 총회 선언서를 채택하였다. 이 문건에서 기장 총회는 “우리는 죽음을 향하여 치닫는 사회에 대하여 예언자적 경종을 울리고 구원의 길을 제시해야 할 한국 교회가 오히려 사회의 타락에 편승하고 부추겼음을 고백하며,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마음 깊이 참회합니다.”고 선언하고, “또한 참회해야 할 한국 교회 속에는 분명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도 자리하고 있음을 부끄럽게 고백하면서 먼저 우리 자신의 죄악에 대해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와 거기 속한 모든 지교회가 참회와 죄책고백의 당사자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기장 총회가 ‘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하고 죄책고백을 한 것은 역사적 사건이다. 나는 이제까지 우리나라의 그 어떤 교단도 ‘하나님 앞에서,’ 또한 동시에 ‘세상 앞에서’ 참회하고 죄책고백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에서 세상을 향해 공개적으로 죄책고백을 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교회들의 코이노니아 기구가 채택한 죄책고백이지 교단 총회의 이름으로 공교회가 채택한 죄책고백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제99회 총회가 ‘하나님과 세상 앞에’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공개적으로 죄책고백을 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앞에’ 참회한다는 말의 의미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고 죄책고백을 하는 것은 예배 때마다 반복되기에 무척 익숙한 일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회중은 그들이 죄의 흠결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간절히 청원하지 않을 수 없다. 총회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회중이기에 일단 모여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자마자 그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죄책고백을 한다. 그러한 참회와 죄책고백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 회중이 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 앞에’ 참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교회가 ‘세상 앞에’ 참회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이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선언하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여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기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고 세상 앞에서 증언하여야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증언을 들어야 할 세상 앞에서 교회가 참회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예사로운 일이겠는가? 교회가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은 회중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믿고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회중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서 그분과의 바른 관계 속으로 회중을 이끌어 들인다고 믿을 수 없을 것이고, 그분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결단하고 행동하는 기회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 앞에’ 참회한다고 할 때, 세상이 교회의 죄를 용서하고 그 죄로 인하여 깨진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주도적인 위치에 서 있다고 상정하는 것일까? 참회와 죄책고백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 그럴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세상 앞에’ 참회한다고 말을 한다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라는 말을 전제하지 않고 단지 교회가 ‘세상 앞에’ 참회한다는 말만 한다면, 그 말은 불완전하고 불투명하다. 오직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한다는 어구를 사용할 때에만 그 참회의 의미와 의의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난다.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한다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참회와 죄책고백이 ‘세상 앞에’ 공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왜 교회의 참회와 죄책고백이 ‘세상 앞에’ 공개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상에 파견해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책임을 맡겼기 때문이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파견과 선포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였는지 ‘하나님과 세상 앞에’ 낱낱이 고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 앞에’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한다고 말을 한다고 해서 ‘세상 앞에’라는 말의 준엄성이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교회가 숨김없이 낱낱이 아뢴 잘못과 죄가 ‘세상 앞에’ 그대로 공개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모골이 송연하지 않는가? 교회의 잘못과 죄를 ‘세상 앞에’ 공개하는 것이 두렵고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허물과 죄를 감추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망하는 일이 될 것이니 그보다 더 큰 죄는 없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상에 보내서 거기서 교회가 할 일을 맡겼음을 잘 알면서도 교회가 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시인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교회의 공개적인 죄책고백의 의의

교회가 세상을 다스리고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서 세상 속에서 그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교회의 자기이해를 염두에 두면, 교회의 참회와 죄책고백은 하나님만 알게 비밀스럽게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당연히 세상과 세상 위의 만물이 인지할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교회의 역사에서 교회의 공개적인 죄책고백이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다. 교회의 가르침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오만도 오만이려니와, 교회의 제도적 안정과 성장에 기대어 교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교회의 지도세력이 그들이 이끄는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경우를 보면, 2000년 3월 12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십자군 전쟁, 유대인 박해, 종교재판에 관하여 교회의 오류를 인정하는 죄책고백을 한 바 있다. 교회가 오류를 범한 시점부터 그 오류를 인정하고 죄책을 고백한 시점 사이의 역사적 간격을 헤아려보면, 교회가 자신의 잘못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설사 잘못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잘못에 대해 아예 침묵을 지켜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의 공개적인 죄책고백은 교회가 극도의 위기에 직면하였거나 새 출발을 기약하여야 할 때 나타나곤 했다. 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실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독일개신교협의회(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 EKD)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천명된 1945년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과 1947년 「다름슈타트 선언」이다. 이 두 선언의 모태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작성한 1940년의 죄책고백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엄청난 전쟁채무를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깡그리 망각할 정도로 승리에 고취되어 있었다. 그 때 본회퍼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연약한 자매들과 형제들, 곧 유대인들”에게 죄를 졌다는 것을 또렷하게 말했다. 교회는 유대인들을 전체주의 국가의 불의에 넘겨주었고, 지배자들이 교회의 축복 아래서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도록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죄책고백을 계승한 1945년 10월의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은 독일 개신교가 나치즘에 대항해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나치의 범죄를 방조했다는 것을 통렬하게 반성하였는데, 바로 이 죄책고백이 EKD 재건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1947년 8월 고백교회의 계승 기구였던 ‘형제들의 평의회’가 구속력 있는 입장 표명으로 제출하고 EKD를 구성하는 일부 교단들에 의해 수용된 「다름슈타트 선언」은 독일 개신교가 나치 독일이 가져온 결과들에 대해 교회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일 개신교가 종교개혁 이래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범했던 오류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그러한 오류들을 시인한 것은 독일 개신교가 앞으로 같은 오류들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선언의 내용 때문에 다름슈타트 선언은 본래 「우리 국민의 정치 노선에 관한 말씀」이라는 명칭으로 제출되었다.
 EKD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채택된 두 편의 공개적인 죄책고백은 신도들의 공동체인 전체교회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제 책임을 다 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비판하고 자신의 죄책을 명기하여 고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죄책고백의 형식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교회가 저지른 오류를 구체적으로 명기함으로써 교회는 과거의 잘못을 기억한다.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범한 잘못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그 잘못을 규명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그 잘못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교회의 공개적인 죄책고백은 교회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세상을 세상으로 섬기는 임무를 잊지 않도록 찌르는 가시의 역할을 한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파견과 선포의 위임에 충실한가를 끊임없이 되묻고, 무엇이 부족한가를 살피고, 스스로를 비판하여야 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참회 선언의 역사적 배경과 그 내용

한국기독교장로회 제99회 총회가 공개적인 참회 선언을 채택하였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 한국 개신교 교회가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위임에 따라 국가와 시민사회가 제 할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이끌고 국민적 관심사에 대해 시민사회와 정치 영역에서 의견형성과 의사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영향력을 발휘하여야 할 터인데, 오늘 개신교 교회에 그런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찾기 어렵게 되었다. 정치와 시민사회 영역에서 개신교의 사회적 신인도는 땅에 떨어졌고, 정치와 시민사회가 나서서 한국 개신교가 정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신뢰성 상실의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개신교 교회가 공교회의 모습을 잃었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나온 지는 참으로 오래 되었다. 담임목사직의 세습, 담임목사의 권위주의적인 교회 통치, 교회들의 코이노니아를 가로막는 자폐증 수준의 개교회중심주의 등등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교회가 공교회일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개신교 교회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성공주의, 물질주의, 성장지상주의, 승리주의 등에 빠진 교회는 세상의 그 어떤 영리단체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도구적 합리성에 사로잡혀 있고, 교조적 배타주의로 무장하여 다종교적, 다문화적 특성을 띠고 있는 한국 사회의 통합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교회가 설정한 목표들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가를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과연 교회에 남아 있는가를 묻게 되지만, 그 대답은 부정적이고, 그런 능력을 갖춘 지도자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맘몬이 지배하고 있는 교회에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는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문제의 목록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맘몬주의에 포획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개신교를 정치세력으로 묶어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보수동맹의 한 축을 구성하려고 애써 왔고, 지금도 애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 개신교는 시나브로 친미주의, 반공주의, 시장지상주의로 무장한 권위주의적인 동맹체제의 필수불가결한 구성 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 교회의 위기를 뼈저리게 인식하면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가 채택한 참회 선언서는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참회 선언서는 세월호 참사, 한반도 분단 문제, 핵산업의 위험성, 민중의 생존권 위협, 민주주의의 후퇴, 농산물 시장 개방, 의료민영화,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언론, 국가와 정부의 무능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늘 이 시대의 참사와 위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없이 물질을 숭배하는 세상의 필연적 귀착점”이며 “현대 문명이 향하고 있는 참혹한 미래”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진단을 내어 놓으면서 참회 선언서는 “우리는 냉철하게 시대와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증언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실이 나타나게 된 데에는 교회도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참회 선언서는 교회의 죄책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고백한다. 한국 개신교가 물신주의, 물질주의, 성공지상주의에 사로 잡혔고, 배타적 교조주의에 빠져서 다원화된 사회에서 유리되고, 세속 권력과 결탁하고, 신앙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세속적 이념과 방법론을 맹종하고 있다고 뼈저린 죄책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참회 선언서는 새 출발을 다짐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말씀과 기도와 실천을 통해 위기에 빠진 오늘의 교회를 진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권을 가지신 교회가 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 앞에서의 참회와 새로운 결단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한국 교회를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도록 갱신하며 나아가 한국 사회에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언할 수 있는 은총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장 총회는 참회 선언서에서 한국 개신교 교회가 이제까지 지은 잘못을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고백하고 새 출발을 하자고 제안했다. 한국 개신교가 깊은 위기에 빠졌지만, 그 위기를 위기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 위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하는 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는 교회이다.

맺음말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한국 개신교가 총체적인 위기에 처한 상황을 직시하면서 공개적인 죄책고백을 하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 주었다. 총회 선언서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죄책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하고, 그 죄책의 진상이 낱낱이 규명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러한 죄책을 되풀이 하지 않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맡긴 사명에 충실하게 행동할 수 있다. 그 죄책을 ‘세상 앞에’ 동시에 고백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눈앞에서 같은 죄책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죄책고백을 하고 나서도 같은 죄를 되풀이한다면 교회는 ‘세상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교회에 대한 세상의 신뢰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번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가 채택한 참회 선언서에는 교회의 지배구조에서 나타나고 있는 잘못된 관행들과 지교회들 사이의 연대와 협력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에 대한 언급이 전적으로 빠져 있다. 모든 치리회와 각 위원회, 총회 산하 기관 등에서 벌어지는 선거와 공천의 불투명성, 교역자들 사이의 민주적이고 전문적인 직무관계를 짓밟는 권위주의, 교역자 사례비 지급 제도에서 나타나는 연대성의 실종, 교역자 청빙을 둘러싼 난맥과 혼란 등 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필요로 하는 사안들을 외면하고 대외적인 죄책고백을 하는 데 그친다면, 그 죄책고백은 절반의 죄책고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그 사안들에 걸려서 끝없이 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파견과 복음 선포의 위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바로 서야 한다. 교회가 바로 서서 공교회의 모습을 갖출 때 교회에 대한 세상의 신뢰가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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