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2016/03/01 (12:30) from 211.106.190.92' of 211.106.190.92' Article Number :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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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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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

강원돈(한신대 신학과 교수/사회윤리)

 1970년대의 암울한 유신독재 시절에 민주화와 인권실현, 그리고 민중해방을 갈망하던 지식인들과 청년·학생들에게 제3세계 지식인들의 해방 기획과 이론은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백인들의 식민지배에 맞서서 흑인의 정체성과 주체성(네그리뛰드)을 회복하는 운동을 펼친 레오폴 셍고르의 이론, 파울로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론,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 프란츠 파농의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투쟁 기록과 제3세계 민중해방 전략 등에 관한 책들이 1977년부터 번역되어 널리 읽히기 시작했고, 이 책들은 대부분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금서로 낙인찍혔다. 이 책들의 저자들은 제3세계에서 오랫동안 지배와 수탈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민중이 깨어나서 제국주의 지배 아래 있는 제3세계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을 인식하고 이에 맞서 싸우면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주체로 나서고 있음을 생생하게 증언했고, 지식인들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운동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1970년의 전태일 분신사건 이래로 민중 현실에 눈을 뜨고 민중해방에 기꺼이 헌신하고자 했던 지식인들은 새롭게 소개되기 시작한 제3세계 지식인들의 통찰과 제안에 고무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프란츠 파농의 목소리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나로서는 세 가지를 꼽고 싶다. 하나는 프란츠 파농이 알제리 민중의 민족해방전선에 투신하여 민중과 연대하며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지식인의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파농의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아직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종속적인 분단체제 아래 살고 있던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큰 공감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식민지배가 원주민들의 정체성 형성을 어떤 방식으로 왜곡시키는가를 예리하게 들여다 본 파농의 정신분석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파악하도록 큰 자극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프란츠 파농의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읽고 엄청난 지적인 성숙을 경험했다. 무엇보다도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이 그 당시 신학생들에게 당연시되었던 고백과 열정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의 주체를 세우고 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냉정하게 가다듬는 고된 작업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민중해방의 기획 아래서 정신분석과 사회분석을 통합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란츠 파농은 1925년 프랑스가 과거 식민지였던 곳에 설치한 도(道) 단위의 해외 행정구역인 마르티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의 후예였고, 어머니는 아프리카, 인도, 프랑스 사람들의 피가 섞인 혼혈이었다. 아버지가 세관감독관이었기에 그의 집은 교육을 중시하는 중산층에 속했지만, 파농 가문은 지배자들에 의해 언제나 2등 시민의 취급을 받았다. 프란츠는 1848년 마르티크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칙령을 선포한 빅톨 쇨헤르를 기념하는 명문학교에 진학하였고, 그곳에서 네그리뛰드 운동의 선구자였던 에이메 세자르의 수업을 듣는 기회를 가졌다. 세자르는 프란츠의 자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열 살이 되었을 때 프란츠는 쇨헤르의 흉상 곁을 지나가면서 왜 사람들은 흑인 해방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고 하필 쇨헤르를 기억하는가를 스스로 물었다고 한다. 이미 그때 프란츠는 그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날조된 역사라고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열아홉이 되던 해에 프란츠는 파시즘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자유 프랑스 군단에 의용군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모로코에서 훈련을 받은 뒤에 유럽 여러 곳에 배치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프랑스 군대에서 그가 겪었던 것은 가혹한 인종차별이었다. 하얀 피부를 가진 프랑스 군인들은 아프리카 출신과 아랍 출신,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 출신을 차별하고 그들을 총알받이로 전선의 맨 앞에 세웠던 것이다. 파농도 1944년 늦가을 전장에서 부상을 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프란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리용 대학교에 진학하여 철학과 의학을 전공하고, 1952년에는 처녀작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파농은 흑인 원주민이 백인의 식민지배 아래서 인정을 받기 위해 백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듯이 위장하는 하얀 가면을 쓰게 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신분석 작업에서 파농은 헤겔의 인정투쟁 이론, 마르크스의 소외론, 라캉의 거울이론 등을 능숙하게 서로 결합시키고 있다. 1953년 파농은 정신병리학자로서 알제리의 주앙빌에 있는 블리다 병원의 정신과 주임이 되었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에 따라서 정신병동의 권위주의적인 의사와 환자, 간호사와 환자의 관계를 혁파하고 식민지 지배 모델에 따른 백인 환자들과 원주민 환자들의 격리를 폐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1956년 스태프들의 반발에 직면하여 정신과 주임직을 내려놓고 알제리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투신했다. 파농은 1954년부터 병원에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전사들을 치료하고 은닉시켜 주면서 이 기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는 1961년 백혈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웠고, 알제리 임시정부의 대사로서 알제리의 해방운동을 아프리카 전역에 전파하기 위해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다. 1959년 그는 『알제리 혁명 5년째』라는 책을 썼고, 1961년 백혈병으로 죽기 전에 구술하여 작성한 고전적인 작품 『자기 땅에서 추방당한 자들』을 남겼다.
 프란츠 파농은 『알제리 혁명 5년』에서 해방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어떻게 지배와 수탈과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기만 했던 ‘물건’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사람, 진정한 행위의 주체로 태어나는가를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또한 식민지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부족의식과 전통주의에 고착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서양의 기술과 과학, 특히 의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활용하면서 발전하여 가는가를 묘사하였다. 이러한 해방운동의 성과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파농은 흑인 전통과 정체성 회복을 중시한 네그리뛰드 운동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성해방에 관한 파농의 서술이다. 그는 여성들이 그들의 몸의 일부인 것처럼 숙명적으로 받아들였던 베일을 벗어던지고 해방의 투사로 거듭나 남녀관계, 가족관계, 사회관계 등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구현하여 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서술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식민지 해방운동과 인간해방의 내적인 연관을 통찰하였기 때문에 프란츠 파농은 『자기 땅에서 추방당한 자들』에서 식민 세력의 폭력에 대항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폭력을 행사해서 식민주의적 족쇄를 깨뜨리고 인간을 억압과 왜곡된 정체성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면, 그 폭력은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농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억압의 기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바로 그 행위를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력이 폭력을 부른다고 걱정하면서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신분석학자 파농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폭력의 행사 자체에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임상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식민주의적 억압과 수탈, 배제와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쌓인 리비도를 발산하지 않고서는 저지된 공격성의 위험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공격성이 인간의 본성에 깃든 것이 아니라 구조적 모순들에 의해 축적된 것인 한, 구조적 모순들을 타파하기 위해 공격성을 발산함으로써 공격성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사회를 구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땅에서 추방당한 자들』에서 파농은 식민지 해방운동의 주체가 누구인가, 식민지 해방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천착했다. 그는 알제리 같은 저개발국가에서는 고전적인 마르크스-렌닌주의의 도식에 따라 해방운동의 주체를 설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알제리에서 소수에 머물고 있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해방운동의 선도세력이 되기보다는 농민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은 경제적 지위에 있기 때문에 식민지 체제에 순응적이라고 보았다.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전략·전술에 따르면, 토착민 부르주아는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도록 견인되어야 하지만, 프란츠 파농은 토착민 부르주아가 식민지 시대에는 식민세력에 동조하고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뒤에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외세와 결탁하는 경향을 강력하게 띤다고 보고 이들을 경계하였다. 따라서 파농에게서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의 중추세력은 농민대중과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로 설정되었다. 대부분의 혁명이론가들은 농민대중이 보수적인 데다가 협량한 계급이익에 매몰되기 십상이라고 여기고,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는 극우파나 식민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선동되고 동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파농은 달리 생각했다. 그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서 얻은 경험에 근거하여 이 세력들이 민족해방 투쟁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서 국민국가를 형성하고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건전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국민 형성과 국민국가 형성은 식민지 해방 투쟁의 과제였고, 파농의 정치철학의 중심범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민족해방을 실현하는 국민국가는 농민대중과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등의 기층민중이 중심이 되는 국가, 자본의 지배와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넘어서는 통합적인 사회주의 국가, 중앙집권적이기보다는 지방분권적인 국가여야 한다고 파농은 생각했다. 그의 정치적 비전은 민중의 참여에 근거한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국가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프란츠 파농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지구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민과 국민국가의 범주를 갖고서 민중해방과 인간해방을 논의하는 것이 여전히 타당한가를 물을 수 있다. 오늘의 상황에 파농의 식민지 해방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파농이 구상한 민중참여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적이고 정의로운 국가의 비전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러한 국가는 오직 국가 사회 내부의 모순들을 둘러싼 투쟁에서 민중의 헤게모니가 관철될 때 비로소 등장할 것이다. 그러한 국가들이 세계에 고립된 섬들처럼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국가간 협약에 근거하여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어 가버넌스를 행사한다면, 자본의 지구적 네트워크에 대항해서 국민국가의 틀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프란츠 파농이 살아있다면, 그러한 지구적 해방운동을 구상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프란츠 파농이 민중해방과 인간해방을 같은 동전의 양면처럼 생각하고 그러한 총체적인 해방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탁월한 정신분석 이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정신분석학이 우리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발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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