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2016/03/01 (12:35) from 211.106.190.92' of 211.106.190.92' Article Number :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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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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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돈 (한신대 교수/사회윤리)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서울: 현대사상사, 1972)
Reinhold Niebuhr, Moral Men and Immoral Society (1932) (New York [u.a.]: Scribner, 1960).

 20세기 들어와 기독교 윤리학 분야에서 발간된 획기적인 저서들이 더러 있지만,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그 가운데 한 권으로 꼽는다고 하더라도 이에 동의하지 않은 전문가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니버는 이 저술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가 덕론(德論)의 틀에서 벗어나 제도적인 것을 규율하는 사회윤리로 구상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1932년에 출판되었다. 그 당시 그는 미국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에서 1921년부터 1928년까지 8년 동안 목회 활동을 끝낸 뒤에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여 매우 활발한 저술 활동과 정치 활동을 벌이고 있던 차였다.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목회자로서 활동하면서 미국 자본주의의 핵심 문제인 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노동과 자본의 세력관계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현상을 변경할 수 없고, 노동과 자본 사이의 권력 균형을 이루지 않고서는 일방이 타방을 지배하고 수탈하는 관계를 종식시킬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도덕이나 설교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니버의 인식과 관점은 그가 쓴 최초의 본격적인 저서인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 반영되어 있다. 그는 이 저술에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서로 날카롭게 대립시키는 방법론적 이원론에 입각하여 도덕과 정치를 구별하는 기독교 현실주의 노선을 제창한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설사 어떤 사회가 도덕적으로 잘 훈련을 받았거나 도덕적으로 성숙한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힘에 압도적으로 지배받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개인의 경우에는 회개나 설득, 혹은 도덕적 행위 능력의 함양 등을 통해 더 좋고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집단들 사이의 관계는 자기중심적인 세력관계로 나타나기 때문에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인 설득과 조정에 의해 이를 정의로운 관계로 수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집단적 관계를 규율하여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의 사용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개인의 삶을 규율하는 “윤리적” 방법은 집단적 관계에 적용할 수 없다. 집단적 관계에는 “정치적”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라인홀드 니버,『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서울: 현대사상사, 1972), 18)
 니버가 착안한 “정치적” 방법은 기독교 사회윤리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토대를 이루었다. 왜냐하면 정치적 방법은 제도적인 것을 다루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다룬다고 해서 저절로 사회윤리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윤리는 정책의 수립이나 제도의 변경, 더 나아가 사회구조의 변화를 통해 사회문제의 해결을 추구할 때 비로소 성립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버는 제도화된 집단적 관계들을 다룰 때 권력균형에 근거한 민주주의가 갖는 의의를 중시하였다.
 니버의 사회윤리가 갖는 현실주의적 특색은 폭력의 사용에 대한 입장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윤리학은 폭력을 본질적으로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 사용을 금기시해 왔다. 니버는 그러한 관념이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념에 근거한 오류라고 규정하고, 폭력과 그 사용에 대해 도구적, 기능적 접근을 할 것을 주문했다. “폭력이 올바른 사회 제도를 수립할 수 있고 그 보존의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다면, 폭력과 혁명이 배제될 수 있는 순수히 윤리적인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명제로써 니버는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폭력 혁명까지도 기독교 사회윤리의 틀에서 승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문제는 “폭력을 통해서 정의를 수립하는 정치적 가능성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앞의 책, 192)
 니버의 현실주의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기독교인들은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의가 사랑을 대신할 수도 없고 정의의 구현 그 자체가 사랑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니버는 이 점에서 냉정했다. 그는 세상을 다스리는 데 정작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의라고 보았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읽는 많은 독자들이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인 한 마디 말 속에는 니버 특유의 냉정한 현실주의가 번득이고 있다. “십자가가 그 자체로서는 승리한 사랑의 상징이지만, 사회와 세상에서는 승리한 것이 아니다.”(앞의 책, 98f.) 여전히 불의의 지배 아래 있는 사회와 세상에서 니버는 사랑과 정의의 이원론에 입각해서 더 많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권력의 형성을 중시하였다.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선을 보인 기독교 현실주의를 더 가다듬어   『그리스도교 윤리의 한 해석』 (Niebuhr, Reinhold.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 New York: Harper & Brothers, 1935)에서는 이를 근사치적 윤리로 정식화했다. 근사치적 윤리는 비전이 있는 현실주의이다. 예의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놓고 이를 풀이하면, 세상을 규율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하다. 사랑은 정의의 비전이다. 비록 정의가 사랑의 실현일 수는 없지만, 조금 더 많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의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사회와 세상에서 정의는 사랑의 근사치를 지향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근사치적 윤리는 비교급적 윤리이다.
 근사치적 윤리 혹은 비교급적 윤리는 20세기 전기간에 걸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에큐메니칼 사회윤리의 중간공리(middle axiom) 이론을 니버식으로 표현한 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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