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2019/03/21 (10:58) from 220.66.47.11' of 220.66.47.11' Article Number :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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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몰랐던 루터
우리가 잘 몰랐던 루터
- 양명수 교수의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를 읽고

강원돈 (사회윤리/한신대 신학부 교수)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서 최근 몇 년 동안 나온 루터에 관한 책들 가운데 양명수 교수의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 마르틴 루터의 정치사상과 근대』는 가장 탁월한 저술들 가운데 하나로 꼽힐 것이다. 루터의 정치사상이 근대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가 잘 몰랐던 루터, 아니 자기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미처 모르고 있었던 루터의 생각을 분석하고 해석하여 우리에게 생생하게 되살려 놓고 있다. 필자에게 익숙한 한국과 독일의 신학계를 통털어 이 책은 아마도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논쟁적인 루터 해석서로 여겨질 것이다.
 양명수 교수는 교의학에 조예가 깊은 기독교윤리학자요, 법학을 전공한 신학자요, 해석학을 깊이 있게 연구한 고전학자이다. 그는 신학, 철학, 법학을 가로지르는 뛰어난 학제간 연구 역량을 발휘하면서 이제까지 통용되었던 관례적이고 도식적인 루터 해석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틀을 제시하고 있다. 이 새로운 해석의 틀은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칸트, 리쾨르, 레비나스, 퇴계, 남명 등의 고전 읽기와 해석에서 다져진 역량에서 비롯된 저자의 독보적인 고전 읽기와 독창적인 해석에서 비롯된 성과이기도 하다.
 양 교수의 책은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면 크게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끌어가면서 피력한 정치사상이 근대를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다양한 측면에서 일관성 있게 밝히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1) 두 왕국론과 두 정부론, 2) 개인의 내면성 확립과 해석학적 주체의 형성, 3) 자유주의자 루터의 사상적 면모, 4) 세속국가의 과제와 그 한계, 5) 루터의 법 실중주의와 저항권 이해, 6) 루터의 직업소명론과 사회적 하나님 나라 등의 주제를 상세하게 다루었다.
 근대성의 확립은 저자가 이제까지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연구한 주제이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한창 유행하고 있던 시절에도 우리 사회의 가장 절실한 과제는 근대성의 확립이고, 이를 우회하고서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근대성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자기 세계를 내면에 품는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하여야 하고, 그러한 개인이 자유롭고 존엄한 주체로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품위 있게 살아가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이 인정될 때 비로소 개인이 국가에 우선하고, 권리가 의무에 앞서고, 국민주권에 바탕을 둔 공화주의적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정의의 원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조정되는 사회의 전망을 뚜렷하게 세워나갈 수 있다. 양명수 교수는 이러한 사회를 형성하는 원칙을 “아무도 나에게 명령할 수 없다.”는 한 마디 말로 요약했다.
 이 명제는 국가 권력이 자기세계를 갖고 있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건드리거나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단호하게 지적하지만, 종교도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천명한다. 저자는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내면성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종교적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바로 이와 같은 개인적 내면성의 확립이 교회에서는 교직자들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평신도 주권과 공의회 정신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고, 세상에서는 자유주의, 법치주의, 공화주의, 사회복지 등을 구현하는 근대 사회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양명수 교수는 오늘의 한국 교회가 보이고 있는 교권주의와 성직자 특권주의, 교인들에게 강제되는 맹목과 무지 등등에 맞서고 한국 사회가 깊이 빠져 있는 부족주의와 이데올로기적 과잉 등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세계를 갖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타자와 연대하는 개인이 탄생하고 확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를 다시 불러내어야 한다고 보고, 루터의 사상을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는 단 하나의 명제로 정식화고자 했다.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저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루터를 ‘자유주의자’로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잘 모르고 있었던 루터이다. 루터 자신도 자기 자신이 ‘자유주의자’인 줄 몰랐을 것이다. 루터는 두 정부론을 전개하면서 관헌국가에 대한 신민의 복종을 강조한 신학자로 생각되어 왔기에 자유주의자 루터는 생뚱맞을 정도로 낯설다. 그러나 저자는 루터가 자기 세계를 갖는 개인의 내면성을 확립하고 이러한 내면성을 갖는 개인이 먼저 교회권력으로부터 자유하고, 그 다음에 국가권력의 침해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자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루터의 종교적 자유주의는 그 논리의 철저성 때문에 정치적 자유주의의 토양을 조성하였고, 두 정부론이 촉진한 국가의 세속화 과정을 거쳐 서구 사회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근거한 자유주의적 헌정질서로 나아가는 길을 예비하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루터가 확립한 개인의 내면적 자유를 논증하기 위해 인간의 내면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 하나님 이외의 그 무엇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곳, 심지어 세상의 질서와 관습이 내면화된 규범의식마저도 넘어서 있는 곳임을 강조하고, 이를 가리켜 ‘안의 안’이라고 명명했다.(114) 사람은 남을 대하기 이전에 자신을 대하여야 하고, 자신을 대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대하여야 하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곳이 바로 이 ‘안의 안’이다. 바로 이 내면성이 확립될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에게 충실하게 되고, 이웃을 향해 자신을 열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자기 자신의 바깥인 세상을 다스리는 공권력과 법의 질서에 초탈한 태도를 가지면서도 그것에 자발적으로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루터의 두 정부론 해석으로부터 루터가 법실증주의의 아버지임을 부각시켰는데, 이 또한 주목할 만한 주장이다. 법실증주의는 법의 정당성과 타당성이 입법 과정과 절차를 거쳐 확립된 법 자체에 있는 것이지, 신학적 근거나 형이상학적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제까지의 통설에 따르자면, 루터는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위로부터 왔다는 로마서 13장에 근거하여 국가가 하나님의 세상 통치를 위한 기구임을 주장하였기에 세상을 다스리는 법의 근원도 하나님의 의지에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저자의 견해는 이와 전혀 다르다. 저자는 루터가 말하는 법이 신성로마제국에서 통용되는 실정법이었고, 이 실정법을 통해 세상에 질서와 평화를 수립하는 것이 하나님의 세상 통치에 간접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었다고 논증했다. 바로 여기서 국가의 실정법이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가 확보된다. 저자는 이러한 논증에 기대어 루터가 법실증주의를 예비한 법신학자로 평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기독교 사회윤리를 구상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반드시 깊이 있게 다루어 보아야 할 주장이다.
 루터의 저항권에 대한 저자의 해석도 눈길을 끈다. 이제까지의 통설에 따르면, 루터는 공권력이 무너지면 사탄이 세상을 집어삼키게 되어 질서와 평화가 무너지고 대혼란이 빚어지기 때문에 폭정이 무정부상태보다 더 낫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권력이 불의를 자행한다고 할지라도 이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1524년과 1525년의 농민봉기 때에도 루터가 일관성 있게 지킨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설사 공권력이 신앙의 문제에 간섭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기독교인들은 통치자를 위해 기도하고, 통치자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다가 순교를 당할 수는 있어도 통치자에 맞서 봉기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1530년을 전후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가 교황과 결탁하여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의 가톨릭 복귀를 명령하고 이를 군사·정치적으로 관철하고자 할 때, 개신교 군주들이 이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만일 루터가 황제의 지배와 영주의 지배가 이중적으로 행사되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영주가 교황과 결탁한 황제의 부당한 권력 행사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면, 그것은 루터의 저항권 해석만이 아니라 정당전쟁론에 관련해서도 깊이 살펴야 할 주장이다. 우리 신학계는 말할 것도 없고 독일 신학계에서도 이에 관한 연구가 아주 드물게 이루어진 점을 감안하면, 루터의 저항권 사상에 대한 저자의 상세한 분석과 설명은 후속 연구를 촉진시키는 중요한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루터의 직업소명론에 대한 저자의 해석도 흥미진진하다. 루터는 사람이 선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직업 활동이 생계활동인 동시에 이웃을 위한 봉사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직업 활동은 세상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운동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저자는 루터가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장으로서의 사회를 국가와는 별도로 염두에 두었다고 지적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루터가 세상에서 ‘사회적 하나님 나라’(424)를 이루는 방법을 고민하였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사회적 개신교의 출발점을 루터의 직업소명론과 이에 근거한 사랑의 공동체 구상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를 사회적 개신교로 개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필자는 양명수 교수의 이와 같은 논의가 더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저자의 루터 해석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루터의 두 왕국론과 두 정부론에 대한 해석에서 영주의 교회 관할권이 도출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구별하는 두 왕국론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두 가지 통치 방식을 다루는 두 정부론을 옳게 구별했다. 또한 보니파시우스 8세 이후의 쌍검론이나 루터가 번역한 성서를 회수하게 한 작센 선제후의 조치를 ‘통치의 혼동’으로 보고, 그것이 가져오는 해악과 그 사탄적 성격에 대한 루터의 예민한 반응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지적했다. 루터가 교회로부터 권세를 박탈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권세를 오직 세속국가에만 귀속시키고, 시민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법 제정권과 형벌권, 평화의 유지와 회복을 위한 전쟁권 등을 세속국가의 배타적인 권한으로 인정하고, 세속국가가 법과 이성의 지배를 향해 나아가게 했다는 저자의 지적도 옳다. 루터가 국가의 형벌권에 예외를 두지 않아 교역자들도 세속국가의 법과 형벌권 아래 서게 했다는 지적도 당연히 옳다. 그러나 루터의 두 정부론으로부터 영주의 교회 관할권(summa episcopa)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영주의 교회 관할권은, 저자가 인정하듯이, 독일 농민봉기 이후에 피폐해진 교회의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응급조치였고, 말년의 루터도 식탁담화에서 세상의 통치자들과 법률가들이 세상의 일을 다루듯이 교회의 일을 주무르는 것에 반대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73) 작센 선제후의 주교 취임이라는 1528년의 응급조치가 영주의 교회수장제로 굳어지고, 영주가 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회의 일을 관할하는 국가교회 체제가 확립된 것은 영주가 영지와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게르만 사회 특유의 제도가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적용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루터의 두 정부론은, 그 논리의 철저성을 놓고 볼 때, 영주의 교회 관할권을 정당화한다고 해석될 수 없다.
 근대국가의 헌정질서를 이루는 정교분리는 국가의 세속화를 공인하는 원칙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확립하고자 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국가교회 체제가 확립되어 있었던 독일에서 교회는 국가로부터 자유를 확립하기 위해 오랜 투쟁의 과정을 거쳤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확립된 독일연방공화국에서 교회는 국가가 교회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물리치기 위해 독일연방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내어 교회의 자유를 판례로 확인하는 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러한 투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 것은 루터의 두 정부론이었다. 국가가 교역자들의 비리나 재산 문제 등을 실정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교회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해 국가가 간섭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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