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2020/05/11 (19:49) from 211.199.155.108' of 211.199.155.108' Article Number :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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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래는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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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래는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에 달렸다

강원돈 교수(한신대 신학부/민중신학과 사회윤리)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3주년 특별연설의 빈약함

어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연설에서 국가 목표를 제시했다. ‘세계 속의 한국’이 아니라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우리나라의 국가 목표이고, 그 자신은 나머지 2년 임기 동안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차단하고 통제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K방역이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성공적인 방역 모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에 고무되어 문재인 대통령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를 만들겠다는 자신감을 보인 것 같다.

문 대통령은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의 형성이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 ICT(정보통신기술), 바이오산업 분야 등을 중심으로 선도적인 경제 구축, ▲ 고용안전망 확충, ▲ 디지털 뉴딜과 이에 결합된 사회경제적 인프라의 스마트화를 중심으로 한 한국판 뉴딜, ▲ ‘인간안보’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연대와 협력의 선도 등 네 가지 국가 발전 전략을 제시했다. 이 네 가지 국가 발전 전략들 가운데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기술 시대에 ICT와 바이오 분야에서 미래의 먹거리를 마련하고 선도적인 경제를 구축하겠다는 것은 비록 오래 전에 채택된 국가 발전 전략이었지만, 이를 다시 강조한 것은 여전히 큰 의미가 있다.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인간안보’를 중심으로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을 선도하겠다는 것은 팬데믹 공포와 불안이 가져온 인종 차별주의 확산, 자국중심주의와 보호무역주의 강화, 국제 공조 붕괴 등의 현실을 감안하면 방향을 잘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문재인 대통령이 설정한 국가 목표는 막연하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세계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지향해야 할 비전이 분명해야 하지만, 그런 비전은 제시되지 않았다.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의 형성이라는 막연한 목표 아래 포섭된 네 가지 국가 발전 전략들이 어떤 일관성 있는 논리를 매개해서 서로 결합되는가도 분명하지 않다. 이러한 막연함과 불분명성 때문에 문 대통령의 특별연설이 빈약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특히 ‘한국판 뉴딜’의 구상은 그 내용이 빈약하고, 고용안전망 구축은 크게 새로울 것이 없다.

먼저 문 대통령의 특별연설에서 주목을 끌고 있는 ‘한국판 뉴딜’ 부분을 살펴 보자. ‘한국판 뉴딜’의 핵심을 디지털 뉴딜로 설정하고자 하는 발상은 코로나19가 강제한 사회적 격리가 비대면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의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성을 환기시켰기에 강력한 추진력을 얻은 것 같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판 뉴딜‘이라는 말을 들을 때 경제, 사회, 재정, 금융 등 한국사회를 운영하는 프레임을 일관성 있는 구도 아래서 대담하게 재구축하는 작업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을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는 미래 선점투자’로 좁게 규정했다. 그러고 나서 디지털 인프라 구축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결합하여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부연했다. 이러한 정책을 ‘한국판 뉴딜’이라고 명명을 하니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디지털 인프라 구축은 사회와 경제의 운영을 뒷받침하는 기술적 수단이지, 사회와 경제를 운영하는 프레임을 재구축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디지털 뉴딜이 문 대통령이 생각하는 ‘한국판 뉴딜’이라면, 그러한 구상을 갖고서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디지털 인프라 구축은 OECD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국가들이 추진하는 사업이기에 새로울 것도 없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경제와 이에 맞물려 있는 한국경제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가시화하였기에 고용보험 확대와 직업재교육 등을 중심으로 고용안전망을 구축하겠다고 나선 것은 당연히 필요한 조치이다.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서는 후진국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 고용보험에 가입한 노동자들이 노동인구의 절반에 그치고, 프리랜서, 플래트홈 노동자, 특수고용직 종사자, 단기 아르바이트 종사자 등은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고용유지비 지원, 고용보험 가입과 관대한 실업급여 지급, 직업재교육비 지원과 교육 기간 동안의 생계비 지급, 사회부조금 지급 등 고용안전망과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제도화하여 시행하고 있고, 제도가 커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이미 지체된 고용안전망 구축을 시도하면서 전국민의 고용보험 가입을 추진한다는 구호를 내세운다고 해서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과도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노동시장 바깥으로 축출되어 자영업을 창설하도록 강제되는 사람들이 노동시장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과 제도를 창의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큰 과제이고, 세계의 주목을 끌 사안일 것이다.

한국형 뉴딜 구상은 사회적 뉴딜과 녹색 뉴딜을 두 축으로 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연설에서는 본격적인 의미의 사회적 뉴딜과 녹색 뉴딜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재정 운영 원칙의 변경과 약탈적 금융의 규율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었다. 한국 사회와 경제를 운영하는 큰 틀을 새롭게 구축하는 대담한 구상이 문 대통령의 연설에서 제시되지 않은 채 ‘한국판 뉴딜’을 디지털 뉴딜로 축소하는 기술주의적 방책만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국민이 집권 여당에 몰아준 180석을 갖고서 한국형 뉴딜을 법과 제도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삼성재벌을 위시한 특정 사업체들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특정 산업 분야 육성과 디지털 뉴딜에 매몰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산업자원부 장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고용노동부 장관, 혹은 국토교통부 장관이 발표할 만한 정책을 대통령 특별연설에 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필자는 한국형 뉴딜이 사회적 뉴딜과 녹색 뉴딜을 주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한국형 뉴딜이 필요로 하는 재정정책의 운영 원칙과 약탈적 금융의 규율 원칙은 별도로 다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선, 사회적 뉴딜은 다른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권력과 자본가들의 권력을 제도적 균형 상태에 놓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한다. 따라서 사회적 뉴딜은 노동자들의 단결권 보장과 강화, 산별노사교섭 제도 도입, 사회적 안전망의 두터운 구축 등을 전제한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 권위주의 정부가 해 왔던 것처럼 노동과 자본의 협력을 강조해 왔지만,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억압하거나 방해하는 일체의 법규와 회사 정관 등이 결사의 자유를 침해하기에 위헌적 행위로 간주되도록 하는 실질적인 조치를 취한 바 없다.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자유권으로 규정하는 개헌을 할 수 없다면, 국제노동협약 제87조를 비준하는 의회 절차를 충실히 밟으면 될 일인데도, 문재인 정부는 역대 권위주의 정부와 똑같이 그 길을 가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파업의 위력을 강력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산별 노사교섭 제도의 도입은 문재인 정부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노동력의 상품화에 제약을 가하여 자본의 권력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는 관대한 실업급여의 장기적 지급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 의제로 설정된 적이 없다.

문제인 대통령이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이 노동자들의 단결권 강화와 산별 노사교섭 제도의 도입, 그리고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을 한 축으로 삼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한국판 뉴딜’을 구상하면서 이를 완전히 도외시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에서 내수의 기반이 되는 노동소득 비중을 적게 잡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수출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도록 뒷받침하려면 쉽게 자본 축적을 해서 투자여력을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수출기업들이 많은 경우 한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초국가적 기업들인데도, 수출을 위해서는 내수를 희생시켜야 마땅하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교리를 여전히 고집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자본소득배율과 노동소득배율의 변경이 최종적으로 자본에 경사된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자본과 노동의 권력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역대 권위주의 정부와 마찬가지로 노동권력을 강화시키는 데 관심을 갖기는커녕 도리어 이를 크게 경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그러니 사회적 뉴딜이 경제운영과 사회운영의 기본논리로 수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다음, 녹색 뉴딜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국가 운영의 기본 전략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시민사회와 학계의 상식이 되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더욱 더 그렇다. 기후위기는 해수면 상승과 사막화, 수자원 고갈, 국지적 빙하기의 도래 등으로 인하여 인류 문명의 공간적 배치에 엄청난 변동을 가져올 것이고, 식물들과 동물들의 생활공간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오랫동안 동토에서 동면중이던 바이러스를 깨어나게 해서 면역력을 갖추지 못한 동물들과 사람들을 공격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기후위기를 저지시키고 극복하는 실효성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문명의 기반이 붕괴되는 것은 물론이고,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이 팬데믹으로 발전하는 사태가 짧은 주기로 발생할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러한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최고지도자가 기후위기에 대응해서 우리나라의 경제 운영 방식과 사회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새로 짜겠다는 구상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녹색 뉴딜 방안이 전혀 없는 ‘한국판 뉴딜’의 빈약한 구상을 갖고서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한국형 뉴딜은 사회적 뉴딜과 녹색 뉴딜을 두 축으로 하고, 디지털 뉴딜을 사회적 격리 상황에 대응하는 기술적 보조축으로 설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한국형 뉴딜이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유지하는 조건 아래서 사회세력들의 권력균형에 바탕을 두고 사회정의와 생태학적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구상으로 가다듬어져야 하고 그 구상을 실현하는 정교한 전략들에 의해 확실하게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면, ‘한국판 뉴딜’을 디지털 뉴딜로 축소하여 기술주의적 함정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회적 뉴딜과 녹색 뉴딜은 불가분리적이다

사회적 뉴딜과 녹색 뉴딜은 별개의 두 사안이 아니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도 사회정의와 생태학적 정의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다. 사회정의를 앞세우는 노동자들은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태계 보전 운동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생태계와 경제계의 관계를 파악하고, 경제계 안에서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인식한다면, 사회정의 없이 생태계 정의 없고, 생태계 정의 없이 사회정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통찰하게 될 것이다.

생태계와 경제계는 에너지-물질의 순환관계에 있다. 생태계로부터 경제계로 투입되는 에너지와 물질은 인간이 소비하는 데 적합한 형태로 변형되어 소비되었다가 폐기 에너지와 폐기 물질의 형태로 생태계로 방출되어 그곳에 축적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태계로부터 경제계로 투입되는 에너지와 물질의 양은 경제계로부터 생태계로 방출되는 폐기 에너지와 폐기 물질의 양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물질 보존의 법칙 때문이다. 만일 경제계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면, 생태계에 부존된 에너지와 물질은 경제계로 대량으로 투입되고 경제계에서 발생한 폐기 에너지와 폐기 물질은 생태계로 대량으로 방출될 것이다. 이것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스템으로 인하여 생태계에 부존된 에너지 자원과 물질 자원이 급속히 고갈되고 생태계에 엄청난 폐기 물질과 폐기 가스가 축적된다는 뜻이다. 폐기 물질과 폐기 가스는 생태계의 건강성과 안정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생태계 오염과 위기를 촉진시킨다. 따라서 부존자원의 고갈과 생태계 오염과 위기는 같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부존자원의 고갈과 생태계 오염과 위기를 불러오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어떻게 해서 서로 맞물리게 되었는가? 자본주의 경제에서 대량생산은 자본이 빠르게 규모적으로 축적되어 생산능력을 확대시키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고, 대량소비는 대량생산에 뒤따라가는 현상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자본의 축적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을 제도적으로 수탈하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자본의 축적과 사회적 가난은 함께 간다. 이러한 구조적인 모순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서로 맞물려 돌아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이로 인한 공황과 세계대전의 뼈아픈 경험을 겪은 나라들에서는 국가개입주의 노선을 정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국가가 재정을 풀어서 대량소비 능력을 억지로 키우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자본의 축적에서 비롯된 대량생산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빚은 미래 세대에게 전가된다.

위에서 말한 바로부터 얻는 결론은 분명하다. 사회적 가난과 생태계 위기는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따라서 경제계 안에서 노동과 자본의 권력관계를 균형에 이르게 하는 제도적 방안을 마련해서 과도한 자본 축적을 억제하지 않고서는 부존자원의 고갈과 생태계 위기를 해결할 수 없고,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유지하지 않고서는 노동과 자본의 대립과 협력에 바탕을 둔 지속가능한 경제를 운영할 수 없다. 지속가능한 경제는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성과의 상당 부분을 지출하는 경제일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규율하는 사회정의가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생태학적 정의가 실현될 수 없고, 생태계를 구성하는 생명체들과 무생명체들의 네트워크를 온전히 보존하는 생태학적 정의 없이 사회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정의에 입각한 사회적 뉴딜과 생태학적 정의에 바탕을 둔 녹색 뉴딜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내적 연관을 갖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러한 내적 연관에서 출발하지 않는 ‘그린 딜’은 기술주의와 관료주의와 금융자본 지배의 함정에 빠질 것이다. 유럽연합이 추진하는 ‘그린 딜’이 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유럽연합은 탄소배출량 축소, 태양광, 풍력, 바이오 디젤 등 대체에너지 개발, 전기자동차 생산과 보급, 산업 분야에서 에너지 효율성 제고 기술 개발과 보급, 주택, 집합건물, 빌딩, 공장 등의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한 리모델링 사업 등을 중점으로 하는 ‘그린 딜’의 추진을 공론화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천문학적인 재정 수단의 조달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린 딜’은 정부 관료, 거대기업, 금융자본 등 자본주의 경제의 기득권 세력에 의해 추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유럽연합의 ‘그린 딜’ 모델은 한국형 뉴딜의 한 축을 이루는 녹색 뉴딜의 모델이 될 수 없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응하는 한국형 뉴딜이 사회적 뉴딜과 녹색 뉴딜을 필수불가결한 부분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뜻이다. 노동의 권력과 자본의 권력이 제도적 균형을 이룰 때,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혹은 자본가들의 몸을 입은 경영자들은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서도 서로 협력할 수밖에 없는 파트너로서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하는 경제 운영의 민주적 주체들로 마주 설 것이다. 이러한 경제민주주의의 기반 위에서만 생태계의 안정성과 건강성을 중시하면서 노동의 몫과 자본의 몫을 정의롭게 배분하는 사회가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자유와 기본권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자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의 비전을 갖고서 한국형 뉴딜을 새롭게 구상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 문 대통령은 한국형 뉴딜에 대한 관료들의 조언에만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고, 사회정의와 생태학적 정의가 숨을 쉬는 한국형 뉴딜에 관한 시민사회와 사회세력들과 학계의 의견을 예민하게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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