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2020/06/29 (17:37) from 211.199.155.44' of 211.199.155.44' Article Number :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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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사회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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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사회를 향하여

강원돈 교수(한신대 신학부/민중신학과 사회윤리)

‘공정’을 유독 강조하는 한국 사회

우리 사회에서 ‘공정’은 매우 인화성이 높은 이슈이다. 입학과 취업 등에서 불공정 사례가 적발되거나 폭로되면, 사방에서 비난과 항의가 빗발치고, 그 일에 연루된 사람들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수사와 기소와 재판을 거쳐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최순실’의 딸을 부정 입학시킨 한 여자대학교의 입시 비리, 여러 공기업들에서 불거진 채용 비리,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큰 부모를 둔 자녀들의 특권적 스펙 쌓기 등에 사람들이 보이는 일차적인 반응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공정’하지 않은 일을 보고서 사람들은 분노하고, 서로 결집하여 항의하고, 거세게 행동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 납득할 만한 일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대한 촛불 군중의 저항과 항쟁도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에 그 뿌리가 이어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불공정한 일을 겪을 때 참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데, 인적 결합이나 특권 구조가 그것을 가로 막으면 ‘공정’한 경쟁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평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 연유를 따지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전쟁과 급격한 도시화의 효과를 꼽을 수 있다. 한국전쟁은 전통적인 신분 관계와 위계구조를 뒤집어엎고, 팔도강산의 사람들을 뒤섞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전통적인 촌락 공동체 규율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수평적이고 기능적인 인간관계로 이끌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나타난 높은 교육열은 이 새로운 인간관계가 빚어낸 효과였다. 천민의 자식이라도 한 교실에서 양반집 후손과 일대일로 맞서서 경쟁하고 입시 경쟁을 거쳐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 출세를 할 수 있다는 열망이 ‘우골탑’을 쌓게 했다. 사회적 재화와 삶의 기회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은 ‘빽’을 내세운 자들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마음에 비수처럼 품게 만들었다.

이러한 수평적이고 평등지향적인 한국인의 멘탈리티는 IMF 경제신탁 과정을 거치며 크게 굴절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무한경쟁 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학교 교육의 전 영역에서 성적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사람의 가치가 성적순으로 매겨지고, 성적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 서로 고립되고 분산된 채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람들은 그 경쟁에서 밀리면 권력과 재산형성과 사회적 삶의 기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어 ‘패배자’의 낙인을 찍힌 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러한 경쟁 사회에서 신분형성과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기회의 ‘공정’과 경쟁의 ‘공정’은 금과옥조처럼 되었고, ‘공정’이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은 일종의 생존 전략이 되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는 ‘공정’하지 않은 일인가?

최근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노동자 1천 9백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은 우리 사회에서 ‘공정’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정규직 노동자 초임과 평균 임금은 대한민국 공기업들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정규직은 최고의 고용안정성을 누리고 있다. 이 공기업의 공채 경쟁률은 100대 1에 이른다고 한다. 취업준비생들이 선망하는 기업임이 분명하다.

인천국제공항공사가 그 동안 공항 검색과 보안 업무에 종사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하자 공기업을 지망하는 취업 준비생들은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이를 금지해 달라는 청원을 청와대에 냈다. 이 청원은 하루만에 20만 명 이상의 지지자를 끌어들였다. 청원을 낸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한 조치가 취업 준비생들의 취업 기회를 가로막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별도의 경쟁 절차 없이 고임금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로또’에 해당하는 특권적 조치이기에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2030 세대의 ‘취업절벽’을 생각하면, 취업준비생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 인해 정규직 채용 시장이 축소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자 국토교통부와 고용노동부가 나서서 공항 검색 및 보안 직종이 ‘일반직’과 구별되기에 ‘일반직’을 지망하는 취업준비생들의 취업 기회를 박탈하는 효과가 없고, 인천국제공항공사에 직접 정규직으로 고용된다고 해도 공항 검색 및 보안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현재 비정규직의 지위에서 받는 임금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해명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올라 온 공정성 시비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이에 덧붙여 필자가 더 말할 것은 없다.

문제는 공정성 시비를 낸 사람들이 주장하는 ‘공정’의 내용이다. 그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때 반드시 공개적인 경쟁시험을 치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개 경쟁시험만이 ‘공정’을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른 공기업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면서 내걸었던 주장과 판에 박은 듯이 똑같다. 취업준비생들과 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가 다른데도 똑같은 주장이 나오는 까닭은 단 한 가지일 것이다. 취업준비생들이 공개 경쟁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을 때 진입할 수 있는 공기업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배제하는 특권적인 보호 영역이고, 기왕 정규직으로 채용된 노동자들은 이미 바늘구멍 같은 공개 경쟁시험을 거쳐 그 특권 영역 안에 들어왔으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개 경쟁시험도 치루지 않은 채’ 그 특권 영역을 넘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경쟁을 통하여 이긴 자들만이 특권을 누릴 수 있고, 그 경쟁의 핵심이 성적 경쟁이라는 것이다. 이게 과연 ‘공정’한 일인가?

시험은 연령, 젠더, 학습비용 등을 놓고 볼 때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공정’한 제도가 아니다. 공기업 공채 시험처럼 ‘공정’ 준칙에 충실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시험은 공정성 시비의 여지를 아예 없애기 위해 객관식 위주의 시험으로 치르기 일쑤이고, 그러한 시험은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반복적 훈련을 받아 ‘시험 기계’처럼 된 사람들에게 가장 유리하다. 시험 만능주의자가 아니라면, 시험 성적을 갖고 직무에 적합한 사람을 판별할 수 있다는 망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오히려 상당 기간 동안 인턴으로 일하도록 하면서 다면적인 평가를 거쳐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요건을 상당히 갖추었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절차라고 하지 않는가? 공항 검색 및 보안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 업무에 종사하면서 터득한 직무 능력과 인간관계 형성 능력이 시험 성적보다 못하다고 판단할 근거가 어디 있는가?

이데올로기로서의 ‘공정’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차별과 고용불안정으로 인해 노동빈곤 계층으로 전락하고 심지어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트)로서 극심한 고통에 처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비정규직 지위에 있는 노동자가 노동계약을 다시 체결하여 정규직 노동자로 전환하는 것을 촉구하고 환영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늘과 땅처럼 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모든 직무를 정규직으로 채워나가되, 오직 출산, 육아, 간병, 가치관, 생활에 대한 이해 등으로 인해 개인이 원할 때에는 비정규직 노동에 종사하도록 하고, 그럴 경우에도 임금과 복지 차원에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강력한 요구이다. 정규직 일자리를 충분히 늘리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노동시간 단축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성 요건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공개 경쟁시험을 빌미로 내세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고 나서고 있으니, 그렇게 주장하는 취업준비생들과 기왕 정규직의 지위에 있는 노동자들의 일부는 ‘공정’을 방패로 내세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꼴이 되었다.

공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공정’을 내세워 공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반대하고 나서자, 보수 언론은 일제히 청년 취업사다리를 걷어차는 정규직화가 ‘공정’인가를 힐난하기 시작했다. 보수 언론으로서는 ‘공정’을 앞세우며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정책을 옹호하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셈이다. ‘좋은 일자리’로 알려져 있는 정규직을 소수화하여 정규직 특권을 차지하기 위해 골몰하는 취업준비생들의 시각을 한없이 좁게 축소하여 고착시키고, 비정규직을 늘려 노동통제, 비용절감, 손쉬운 해고 등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열과 반복을 어부지리로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대항력을 극도로 약화시키려는 자본의 논리가 보수 언론에 의해 ‘공정’의 이름으로 조장되고 강력하게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공정’은 신자유주의를 요새화하고 이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무엇이 공정인가?

공정은 존 롤즈가 자유주의 윤리의 틀에서 가다듬은 정의의 원칙이다. 롤즈의 자유주의는 스스로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하는 합리적인 개인을 전제한다. 그 개인들은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는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재화를 얻기 위해 서로 갈등하고 대립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등과 대립을 방치하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기에 개인들이 나서서 사회적 재화를 배분하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누구에게도 편파적이지 않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분배의 원칙은 무엇보다도 공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사람들은 편파적인 선택을 부추기는 모든 요인들을 일단 괄호 안에 넣고 정의의 원칙을 찾아나서야 한다.* 이를테면, 사회적 지위, 계급·계층적 위치, 천부적 능력, 지능, 체력 등에 의해 사회적 재화의 배분이 좌우되거나, 세계관이나 가치판단 혹은 취향 등과 같은 주관적 요인들에 의해 사회적 재화의 분배가 결정되어서도 안 된다. 그 어떤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서든, 그 어떤 문명의 수준에서도, 그 어떤 연령대에 속하더라도, 누구나 사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람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어떤 경우에도 자유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자유 우선의 원칙이고, 또 다른 하나는 누구에게나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면서도 최소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자유주의자 롤즈는 이 두 가지 정의의 원칙만이 공정성의 요구를 충족시킨다고 생각했다. 이 두 가지를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으로 제시하였기에 존 롤즈는 강력한 평등주의적 지향을 지닌 사회적 자유주의를 표방할 수 있었다.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을 보장하는 분배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한다면, 해가 지나갈수록 사회적 재화의 분배에서 나타나는 격차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 롤즈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합리적 개인들이 사회적 재화를 배분하는 원칙을 정하기 위해 모이는 ‘원초적 상황’에서 ‘무지의 베일’을 뒤집어쓰고 누구에게나 공정한 원칙에 대해 토의하고 합의할 것이라고 이론적으로 가정했다. 본문에서 필자는 롤즈의 난해한 논증방식을 알기 쉽게 플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롤즈가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관한 한 이론』(1971)을 펴낸지 50년 가까이 되었다. 이 책이 출판되기 이전과 그 이후로 미국의 정치철학을 구분해도 좋을 정도로 롤즈의 정의론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칸트의 사회계약설을 발전시켜 공리주의를 넘어서는 정의론을 수립하였고, 칸트가 강조해마지 않은 ‘이성의 공적인 사용’에 기반을 둔 정치철학과 공공성 윤리를 발전시켰다. 최근에는 필립 반 빠레이스가 롤즈의 정의론에 바탕을 두고 기본소득 이론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롤즈의 정의론은 오래 전부터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아왔다. 무엇보다도 롤즈가 정의의 원칙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기 위해 호명한 사람들은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근대 자유주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는 원자화된 추상적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은 환상이지 실재가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로 나뉘어져 있고, 서로 다른 헤게모니적 위치들에 서 있고, 각기 다른 성향과 특질과 능력과 세계관적 지향을 갖고 있다. 정의의 원칙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이 구체적 인간들의 투쟁과 조정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구체적 인간들 사이의 모순과 갈등과 대립을 기본 질서로 갖는 사회가 전제될 때, 민중이 기왕의 분배 구조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담론의 틀을 뒤흔들고 깨뜨리면서 정의의 원칙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끄는 주체의 지위에 서게 될 것이다.

롤즈의 정의론이 갖는 자유주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가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한 원칙으로서 내세운 최소수혜자 최대 이익 보장의 원칙은 ‘공정’이 중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자들과 그들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각자도생의 무한경쟁에 휘말려 들어간 사람들은 ‘공정’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사람들’(마태 25:40)의 처지를 보지 않고, 그들이 외치는 목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옹호하고,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을 위해 함께 싸우고, 일자리와 재산형성과 사회적 지위 등 사회적 재화의 분배를 다시 설계하는 일을 위해 강력하게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 도입을 결합시키고, 돈벌이 노동과 공동체 활동을 융합시키는 새로운 노동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헌신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사업장 단위의 경제투쟁에서 벗어나 산업부문과 국민경제를 내다보는 산별 노동조합을 구축하고, 산별 노사교섭의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자본과 그 동맹세력에 맞서서 본격적으로 힘을 모으고 싸워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시각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끌어안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노동자들의 힘을 전제할 때에만, 공정은 우리 사회에서 정의를 신장시키는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취업준비생들은 ‘공정’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신자유주의적 ‘노동사회’ 너머의 노동세계를 세워나가는 미래의 동지들로 합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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