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에세이
Kang Won-Don's Essay

2020/09/02 (17:25) from 211.199.155.44' of 211.199.155.44' Article Number : 426
Delete Modify 강원돈 (kwdth55@daum.net) Access : 133 , Lines : 43
정치적 도덕주의와의 결별
Download : 민중신학자의 눈으로 세상 읽기 (27) 정치적 도덕주의의 파산.hwp (32 Kbytes)
정치적 도덕주의와의 결별

강원돈 (길마루글방 지기/사회윤리와 민중신학)

정치적 도덕주의의 폐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윤리는 정치적 도덕주의와 결별할 때에만 비로소 제대로 구축된다. 정치적 도덕주의는 정치 행위의 정당성이 마치 그 행위자의 도덕적 역량에 달려 있는 듯이 여기게 만드는 일종의 허위의식이다. 이러한 허위의식의 폐해는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정치적 도덕주의는 요즈음 수구 언론이나 정치 검찰 등 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기 기구들과 법률 기구들이 개혁세력을 공격하는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어 왔다. 메시지의 정당성을 공격하기 위해 메신저의 도덕성을 물고 늘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전 법무부장관 조국 씨나 정의기억연대 전 대표 윤미향 씨는 이러한 정치적 도덕주의에 의해 매도되고 희생된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 노회찬 정의당 전 의원 등은 정치적, 법적 책임을 지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도덕적 비난과 정치적 적대의 압력 아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도 정치적 도덕주의에 희생된 것이 아닐까?

정치적 도덕주의의 아주 고약한 측면은 그 칼날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추악한 정치적 야욕과 이익 추구가 그 칼춤의 휘광에 일시적으로나마 가려지는 일식(日蝕) 효과를 자아낸다는 데 있다. 상대방의 악을 공격한다고 해서 자신의 선이 조금도 늘어나지 않는다는 이치는 도덕적 비난을 앞세운 정치적 공격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범죄 사실이 성립되는가의 여부에 상관없이 그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사람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 광풍처럼 지난 뒤에 그 범죄 사실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경우에는 어떻게 되나? 그럴 경우, 도덕적 비난을 퍼부었던 사람들은 대체로 나 몰라라 하고 만다. 이보다 더 고약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도덕적 비난이 대중의 기억에 쉽게 각인되고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치적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도덕적 비난을 퍼붓는 것보다 더 야비한 짓은 없다.

정치적 도덕주의의 뿌리

정치적 도덕주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사회에서 나타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유례없이 강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유교에 뿌리를 박고 있는 도덕정치가 한국 사회에서 기형적인 형태로 재생산되고 소비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정치적 ‘대의’와 ‘명분’을 내세우며 정치적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든지,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이미 올라간 사람을 지사(志士)나 ‘선생’으로 숭앙하는 태도에서 도덕정치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유가적 도덕정치의 이상은 『大學』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강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닦는 수신은 제가의 바탕이 되고, 오직 제가의 본을 보이는 사람만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나설 수 있고, 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 역량을 갖춘 사람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작은 단위로부터 큰 단위로 단계적으로 행위능력을 발전시키는 도덕발달 이론을 말하는 것 같지만, 『大學』의 정치 강령의 요체는 정치인 개인의 됨됨이와 도덕적 역량에 따라 정치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다. 수신의 기초가 제대로 놓이지 않으면 그 위에 그 어떤 건물도 제대로 올릴 수 없다는 뜻이다.

수신의 핵심은 신독(愼獨)이다. 신독은 홀로 있을 때 스스로 삼간다는 뜻이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통한다는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사상이 강했던 조선 유학자들에게 신독은 자신을 굽어 살피는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생각과 행동을 가다듬는 수양의 길을 걷는 것을 뜻했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그 자신 안에 있는 자기가 보고 있다는 양심의 윤리를 엄중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군자가 홀로 있을 때 스스로 삼간다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에 따라 살기 위해 하늘의 뜻을 헤아려 자신의 의지를 규율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도덕적 입장은 다산 정약용의 사천학(事天學)에 이르러 또렷하게 다듬어졌으니, 그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심정윤리에 필적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수신과 신독이 중시되었던 전통사회에서 정치에 나서는 사람의 됨됨이와 도덕적 역량은 지도력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으나, 동시에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정치가가 한 일과 그 결과가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평판의 초점이 되는 경우가 흔했던 것이다. 어떤 정치인의 생각과 처신이 올바른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비난은 그의 지도력을 무너뜨리는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 때문에 정치 파벌들 사이의 삶과 죽음을 건 싸움은 권력의 기회와 사회적 재화의 장악을 둘러싼 적나라한 투쟁이었으면서도, 성리학의 교리와 도덕 준칙에 대한 해석 논쟁의 외양을 띠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도덕정치의 부정적인 측면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수구 언론이나 정치 검찰에 의해 정치적 도덕주의로 기형적으로 재생산되어 정치적 적대세력의 지도력이나 정치적 기획을 결딴내는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

심정윤리와 책임윤리

정치적 도덕주의의 뿌리가 되고 있는 도덕정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는 낡은 모델이다. 수신과 신독에 바탕을 두고 있는 도덕정치는 심정윤리의 형태를 취하는데, 심정윤리는 민주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치윤리의 틀을 이룰 수 없다.

심정윤리는 양심의 명령, 혹은 마땅히 행해야 할 당위에 따르고자 하는 행위의 동기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행위를 이끄는 동기의 순수성을 강조하기에,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가 설사 손실을 가져온다고 해도 그 행위를 마다해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강화시킨다. 행위의 결과에 초연한 입장을 취하는 심정윤리는 개인의 행위에 국한될 경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가나 행정가처럼 그 행위가 공동체와 그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컨대, 전쟁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한 정치가가 전쟁 피해나 심지어 패전에 따르는 엄중한 결과를 놓고서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으로 오직 애국주의적 동기에 따라 전쟁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하였으니 그 결과를 놓고 책임을 묻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치가나 행정가처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은 설사 공동선을 증진하겠다는 갸륵한 동기에 따라 어떤 행위를 기획한다 하더라도 그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충분히 계산하여야 할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 경우에는 행위의 순수성을 앞세워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방어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처럼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입장이 책임윤리다. 책임윤리를 가장 먼저 정식화한 막스 베버(Max Weber)는 심정윤리와 책임윤리가 “두 개의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고, 서로 교체될 수 없는 대립적인 준칙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심정윤리는 당위에 투철한 탁월한 도덕적 역량을 갖춘 개인을 전제한다. 그렇기에 심정윤리는 도덕적 이상주의의 경향을 띤다. 그러한 윤리적 기획은 인간의 모든 윤리적 성취를 의문시하고, 뒤흔드는 효과가 있기에 윤리적 사유에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심정윤리가 정치를 규율하는 현실주의적인 윤리를 구성하기는 어렵다. 정치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탁월한 도덕적 역량을 갖춘 개인들이라기보다는 이기적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갈등하고 대립하고 이해관계를 놓고 투쟁하는 적나라한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고 권력의 기회와 재화의 배분을 규율하는 현실적인 규칙을 제정하는 것이 윤리의 과제라면, 그 윤리는 현실주의적인 기획이어야 한다. 권력의 기회와 재화의 배분에 관한 기획과 그 집행이 가져올 엄청난 결과를 내다보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가 없이 어떻게 현실주의적인 윤리의 기획이 가능하겠는가?

정치적 행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

정치의 영역에서 책임윤리의 일차적인 관심은 정치적 행위 과정의 조직과 그 결과에 놓이는 것이지, 그 행위의 장본인이 갖는 도덕적 역량과 그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정치적 행위자에게 필요한 역량이 따로 있고, 그것은 그 나름대로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역량은 도덕정치가 앞세우는 수신이나 신독 같은 것일 수 없고, 근면, 정직, 성실, 인내 등과 같은 개인윤리의 덕목들일 수 없다. 막스 베버는 정치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열정, 안목, 책임 등 세 가지라고 주장했다. 권력의 기회를 확보하여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열정, 자신의 정치적 기획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냉정한 예측과 계산, 자신의 정치적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 – 이 세 가지 덕목은 정치적 결사체와 사회적 결사체를 구성하여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특별한 역량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대통령은 세종이나 정조 같은 성군이 아니다. 선한 목자 같은 정신적 지도자도 아니다. 도덕적 역량을 갖춘 탁월한 개인이 대통령 노릇을 하는 것이 더 좋기는 하지만, 그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바라는 것도 아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공화국의 주권과 자유를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사회적 재화의 더 정의로운 배분을 위해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법률에 따라 행사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대통령을 원한다. 그는 열정의 화신이어야 하고, 탁월한 안목과 책임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대통령의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추궁이 언제든 가능한 나라가 건강한 공화국이다.

정치적 결사체와 사회적 결사체를 구성하여 권력의 기회와 재화의 배분을 둘러싼 정치에 나서는 사람들 역시 열정, 안목, 책임의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 결사체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적 개인’이 아니며, 따라서 ‘도덕적 개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기대할 이유도 없다. 거기에 ‘도덕적 개인’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 판단일 것이다. 의사 한 사람 한 사람은 ‘도덕적 개인’으로 현존할 수 있지만, 대한의사협회의 의사결정은 더 이상 ‘도덕적 개인’의 의사결정일 수 없다. 그 어떤 결사체든, 그것을 꾸리고 있는 사람들은 권력과 사회적 재화의 배분을 둘러싸고 최대한의 기회와 이익을 얻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현존한다. 그 집합의 사람들에게는 최대한의 이익을 얻겠다는 열정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더 필요한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의 결과를 계산하는 능력과 그것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질 각오일 것이다.

필자는 정치적 도덕주의의 시대착오적인 외투를 벗어던지고 정치의 영역에서 책임윤리의 원칙이 확립되기를 바란다. ‘도덕적 개인’이어야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환상과 허위의식을 깨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책임정치를 향해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최대한 실현하는 정치는 오직 책임윤리의 틀을 갖출 때 비로소 우리 사회에서 활성화될 것이다.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