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12/14 (23:28) from 164.124.80.106' of 164.124.80.106' | Article Number : 9 |
강원돈
(kwdth@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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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ss : 13268 , Lines : 111 |
| 비움과 열림(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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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열림(서평) 강원돈 정재현 박사가 쓴 "티끌보다 못한 주제에 - 사람됨을 향한 신학적 인간학"(왜관:분도출판사 1999, 463쪽)은 사람됨의 폭과 깊이와 높이가 어느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빼어 난 작품이다. 저자는 키에르케고오르와 하이덱거의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감추지 않고 있지만, 사람의 자연성과 사회성과 역사성이 자아내는 "상황"의 총체성을 결코 놓치지 않고 사람됨의 길을 모색한다. 저자가 단지 엄숙한 인간실존의 해설에 그치지 않고, 날카로운 사 회비판과 문명비판과 이데올로기비판을 시도하는 것도 인간의 상황에 대한 인식이 폭넓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자유롭고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젊은 신학자의 성실한 모습에 탄복할 것이다. 그들은 또한 인간을 부자유와 자기상실로 내모는 진리의 온갖 참칭자들을 향한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과 분노에 공감할 것이다. 저자는 진리 와 자유가 서로에게 속한다는 가르침을 새삼스럽게 읊조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진리를 향 해 자유로운 구도자의 모습을 실연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진리를 묻는 일과 진리를 묻 는 사람의 실존, 그리고 진리를 묻는 방식에 대한 성찰은 서로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고 의존한다는 것을 저자 자신이 깊이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책의 제1부에서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것은 따라서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 는 본질과 실존의 구별이 인식론에서 갖는 의미를 검토하는 데서 출발한다. 본질과 실존의 차이를 되새기는 사람이라면 본질의 동일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보편적 인식 주체의 설정 이 매우 무모한 일이고, 도리어 진리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실존을 거쳐서 드러난다는 것 을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또한 그는 진리를 향한 물음이 서로 다르고,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이 서로 다르고, 진리라 이름하는 것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 이 저자가 전제하는 진리 추구의 원초적인 상황이다. 진리의 드러남이 그런 것이라면, 진리가 단 하나라고 우기거나 자기와 다른 것을 비진리 로 배척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해서 같은 것끼리 모여들 어 교제하되,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지 못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 흔하지 만, 저자는 인류의 정신사에서 사유와 존재의 통일 같이 "같음"을 진리의 동인으로 삼는 사 고모형이 다른 것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멸절시키는 자기중심성의 논리를 배태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다름"을 다름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는 사유의 탈중심적 해방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갈파하고, 이 자기중심 성의 해체는 자기를 비워 "다른 것"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자기비허(kenosis) 를 거쳐간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자기비허는 자기 안과 바깥에 깃든 남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니, 이 자기비허적 교류(perichoresis)는 자기를 수축하여 형성한 공간에 자기와 전혀 다 른 남을 허락하고 그를 향해 스스로를 열고 만나는 초월의 행위를 이미 배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초월 행위가 인간을 개체성에 매몰되지 않게 하고, 도리어 관계 속에서 자 기를 인식하고 형성할 수 있게 하는 동인이다. 나와 다른 것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이를 주목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서만 중 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되어가는 과정에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됨은 사이 를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이는 결코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나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사이는 나와 다른 것을 향해 나를 열 때 성 립하는 것이어서, 나를 열지 않고 내 안에 매몰되어 있을 때에만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되 었을 뿐이다. 사이를 이렇게 생각하면 사이를 떠나서 자기를 실체화하고 그것에 이름을 갖 다 붙이는 짓은 무모하다. 도리어 사이를 살아가고 사이를 넘나들며 자기를 인식하기 위해 서는 탄력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사람됨의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기를 실체화 하고 박제화하는 명사적 사유를 버리고 자기비허적 교류에 터잡은 탈중심적 해체와 복구라 는 동사적 사유의 모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책의 제2부에서 저자는 사람됨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를 다룬다. 명사적 사유로부터 동사적 사유로의 대전환이 "자기비허적 대화주의"의 논리적 구조라면, 자기비허 적 대화주의가 신학적 인간학의 전개에서 취하는 꼴은 상관적 방법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 는 자기비허적 대화주의를 파울 틸리히의 상관적 방법과 연결시켜 이를 심화시키고 있다. 저자의 상관적 방법은 인간의 피조성과 죄성을 상호공속관계로 보는 독특한 해석에 잘 나 타난다. 저자는 인간의 피조성과 죄성을 직결시키거나 서로 분리시키는 극단적인 견해에 단 호하게 반대한다. 피조성 안에 죄성이 깃들어 있다는 전통적 견해가 인간학적 비관주의를 조장한다면, 피조성과 죄성을 서로 다른 주제로 여기는 관점은 인간학적 최대주의를 가져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극단적인 견해를 가지고서는 인간실존의 핵심적인 문 제인 자유와 불안의 창조적인 긴장관계와 파괴적인 대립관계를 인식할 수 없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명사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가는 동사적 과정이라면, 이 되어감이 이미 그 동인으로서 요구하는 자기초월의 능력과 자유는 인간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실존의 엄연한 조건으로 긍정되어야 한다. 이 유한성과 초월성의 "역설적 연합"은 "한정된 초월"을 되새기며 자기를 정립하여야 할 사람됨의 과제이지, 아직 사람됨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초월성을 이름하는 자유는 엄 청난 불안을 동반하는 것이어서, 이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헛된 노력이 자기격상의 교만 이나 자기격하의 비하로 귀결되어 마침내 인간은 자신의 전인성을 파괴하는 죄의 지배 아래 속절없이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보면, 저자의 상관적 방법이 피조성과 죄성을 수평적으로 연결하거나 분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의 피조성 자체만 가지고서는 죄성을 직접 논할 수 없다. 죄성은 오직 피조성의 발현형태인 유한성(불안)과 초월성(자유) 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저자의 상관적 방법은 악, 고통, 죽음의 문제를 심원하게 다룬 책의 제3부에도 적용된다. 여기서도 저자는 각 주제에 대한 전통신학의 극단적인 견해들을 비판하고 인간의 피조성과 죄성의 상관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인간실존의 구체적인 모습들과 과제들을 드러낸다. 지면 관계로 저자의 견해를 자세히 분석할 수는 없지만, 예컨대 죽음을 죄성에서 비롯된 숙명으 로 파악하는 견해도, 죽음을 원초적 자유로의 복귀로 보는 낭만적 견해도 저자에게는 모두 진지성을 결여한 것으로 인식된다. 저자는 "죽음을 안고 사는 삶"을 냉정하게 음미하면서 "삶과 죽음의 역설적 연합"을 인식하는 종말론적 실존의 진지성을 이야기한다. 물론 죽음은 삶을 부정한다. 죽음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의미를 구현하도록 결단하게 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삶의 부정으로 만 볼 수 없다. 삶에 대해 가장 이질적이고 낯선 것으로서의 죽음을 삶 속으로 끌어들여 이 둘을 자신의 삶 속에서 통일시키는 일은 오직 자기비허의 행위일 수밖에 없다. 자기비허를 통한 삶과 죽음의 역리적 통합은 "삶에 대해 긴장스러운 결단을 통한 의미구현의 결정적 계 기"로 새겨진다. 책의 제4부에서 저자는 자기비허적 교류의 정신이 이끄는 "열린 신앙"을 다룬다. 저자가 신학적 인간학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듯이 보이는 종교신학의 주제를 "열린 신앙"이라는 화두로 풀어나가는 까닭은 신앙이야말로 탈중심적인 자기비움의 극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지에서는 신앙과 신앙하는 자와 신앙의 대상이 이미 주어, 동사, 목적어 형태로 분절될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게 된다.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 다보는 상(相)의 미망과 집착을 끊을 수 있을 만큼 자기는 비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 문에 그 빈곳은 도리어 충만해 진다. 이 자기비허와 자기충만이 동시에 사건으로 일어나는 곳이 다름아닌 신앙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사람됨의 극치다. 저자가 신학적 인간학에서 종교신학의 어려운 주제를 굳이 다루는 까닭은 오늘의 종교들 이 신앙이라는 이름을 앞세우면서도 자기중심적 폐쇄주의 속에 들어앉아 제가 떠벌이는 진 리의 절대성을 주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종교는 사람됨을 돕기는커녕 도리 어 사람됨을 가로막는 장애물밖에는 안 될 것이다. 저자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실존으로부터 출발하여 신학적 인간학의 다양한 주제들을 다 루었고, 이 점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 하고 남의 눈에 든 티를 보기 십상인 사람들에게 제 주제를 파악하라는 저자의 가르침은 누 구나 당연히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저자의 인간학이 실존분석으로부터 출발하였으되, 관계의 인간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비허와 자기초월이 주관주의적 세계구성의 동인으로 해석되지 않고, 도리어 세계를 향한 탈중심적 해체의 논리로 가다듬어졌기 때문이다. 구조악 에 대한 관계론적 분석이 좀더 치밀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이 다소 미약하게 표현되었다고 해서 정 박사의 빛나는 업적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 "기독교사상" 1999년 12월호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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