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설교
Kang Won-Don's Sermons

2010/01/14 (16:20) from 211.104.79.80' of 211.104.79.80' Article Number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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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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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설교
마태 4,1-11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들에게

강원돈

입학과 졸업의 추억

 해마다 2월 말과 3월 초가 되면 입학식과 졸업식이 거행됩니다. 입학을 앞둔 학생들의 설레는 마음과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들의 기대가 겹쳐서 2월과 3월의 캠퍼스들은 다소 들뜬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저 역시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졸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외국에서 학위 과정을 마칠 때까지 여러 차례 입학과 졸업을 반복하였기에 입학철과 졸업철이 되면 지난 날 입학과 졸업을 앞두고 품었던 느낌과 생각이 떠오르곤 합니다. 제게는 국민학교 입학을 앞두고 설렜던 마음이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제 나이가 만 여섯 살에서 며칠이 모자라 입학소집통지서를 받지 못하자 어머니는 제 손을 잡고 동사무소에 가서 입학소집통지서를 직접 받아내셨습니다. 어머니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이번에 저를 꼭 학교에 입학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시는 모습을 저는 기억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곧 학교에 갈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무척 기뻤는데, 며칠 뒤에 가죽으로 만든 ‘란도셀’(등에 매는 책가방)을 선물로 받자 빈 란도셀을 메고 동네 골목길을 여러 날 돌아다녔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가졌던 감회도 바로 어제 일 같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지만 졸업을 앞둔 가을 학기에는 설레는 마음보다는 뭔가 착잡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동기들도 비슷한 눈치였습니다.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에 진출하는 통과의례가 졸업이기는 하지만, 학교를 떠나면서 뭔가 보호막이 사라진다는 느낌, 사회에 제대로 진입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 친숙하고 편했던 세계를 떠나 차갑고 계산적이고 서열이 뚜렷한 세계로 던져지는 듯한 아득함 등이 서로 겹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이번 2월에 졸업하는 대학생들도 비슷한 느낌일 것입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던 1970년대 말에 비교하면 요즈음 청년 미취업 문제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은 설레는 마음보다는 사회진출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어쩌면 더 클 것 같습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대학 졸업생들을 위해 몇 마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은 스펙 이상이다

 흔히 대학을 가리켜 학문의 전당이라고 하고, 학문의 본령을 진리 추구라고 합니다만, 오늘의 대학 현실은 꼭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와 제각기 전공분야를 선택하여 공부를 합니다만, 대학 졸업 뒤에 취직을 하는 일이 엄중해서인지 취직에 도움이 되는 공부에는 열심이지만 문학이나 역사, 철학 등과 같이 인문학적 성찰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공부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대학에 설치되는 교양과정은 지식과 정보가 홍수처럼 흐르고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균형 잡힌 판단력과 통합적인 행위능력을 갖춘 전인적 주체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운영된다고 하지만, 교양과정은 전공 학습을 위한 예비과정으로 간주되거나 졸업에 필요한 이수 학점을 따야하는 달갑지 않은 과정으로 취급되기 십상입니다.
 대학생들은 취업에 필요한 학점 관리에 관심을 두고, 평균 B 플러스 이상의 평점을 얻기 위해 애씁니다. 학점 따기가 쉽고 평점을 후하게 준다고 소문이 난 교과목들에는 수강생들이 몰려들지만, 사상과 방법을 다루기에 생각을 까다롭게 가다듬어야 하거나 학점이 짜다고 알려진 교과목들은 폐강되기 일쑤입니다. 학생들은 학점 관리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토익 시험 성적이 좋아야 하기 때문에 토익 950점 이상을 목표로 정해 놓고 학원에 다니며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자격증을 따고 연수나 봉사 등 다양한 경력을 쌓기 위해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지냅니다. 친구들과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이성 교제를 하는 것은 대학생들에게 사치스러운 소비 행위로 여겨지게 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은 오직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취업에 필요한 스펙을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스펙은 본래 상품명세서를 뜻하는 스페시피케이션(specification)의 약어입니다. 스펙은 상품 매매를 위해 상품의 제원이나 성능, 원료, 제작 장소, 제작일 등등이 적힌 명세서인데, 대학 졸업생들이나 졸업예정자들이 출신학교, 학점, 어학성적, 자격증, 경력 등등이 기록된 스펙을 내밀며 취업을 하러 다닌다고 하니 착잡한 생각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스펙은 대학을 졸업하였거나 졸업을 앞둔 젊은이들이 취업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좋다고 여겨지는 정보들을 스펙에 기입하기 위하여 학생들이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등을 거치며 치열한 성적 경쟁을 벌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교육을 가리켜 도야라고 했고, 도야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건전한 판단력과 행위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과정이었는데, 요즈음 교육에서 학생들은 스펙을 위한 시험기계로 전락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자본의 이익을 위하여 노동력을 절약하는 조치를 가혹하게 취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출을 늘리고 비용을 줄이는 경영 논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있고, 각 기업은 경쟁압력으로 인해 자본비용을 줄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비용을 줄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형편입니다. 이윤이 축적되면 기업은 투자에 나서기 마련인데, 요즈음 투자는 일자리를 없애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 국민경제 차원에서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고용이 늘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른바 “고용 없는 경제”가 제도화된 것이지요.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줄어드는 일자리를 놓고서 청년들이 벌이는 경쟁은 총과 칼이 없을 뿐이지 전쟁터를 방불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펙을 갖추어야 취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고용 없는 경제성장”의 논리를 감추고 미취업을 개개인의 준비 부족 탓으로 돌리려는 일종의 속임수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쓸 만한 일자리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좋은 정보들이 기입된 스펙을 내세운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저는 대학을 졸업할 예정이거나 졸업한 사람들이 스펙 신화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펙을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을 하느라 서로 고립되고 산산히 흩어져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일인지 실감하기 어려웠겠지만, “고용 없는 경제성장”의 논리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바로 이 논리로 인해 공동체의 가장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연대를 결성하는 데 사람이 스펙 이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공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스펙 이상입니다. 사람은 감정과 생각과 의지와 꿈을 갖고, 이를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전인적 주체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사람들끼리 서로 소통하고 함께 일하며 공동체를 이루도록 지음받은 생명체입니다.(창세 1: 26-28) 스펙은 자본과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만을 기록할 뿐이고,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고 교통하고 연대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데 필요한 수많은 능력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마치 무의미한 것처럼!  

예수가 겪은 시험들  

 저는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에게 예수의 시험사화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맡아야 할 일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이전에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광야 시험은 예수의 공생애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넘어뜨릴 수도 있는 시험대였습니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그의 머리 위에는 영이 임했습니다. 그는 공생애를 준비하면서 영의 인도를 받았던 것입니다. 영은 예수와 하나님을 하나로 묶어 그 사이에 어떤 틈도 없었습니다. 마귀가 등장하였다는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가 위협받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귀가 예수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권세에 복종하려고 시도한 곳은 광야였습니다. 성서 전통에서 광야는 시련과 시험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40년 동안 유랑하며 시련을 받으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기도 했던 곳이 바로 광야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는 40일 동안 금식을 해서 허기가 저 있었습니다. 이러한 극한상황에서 그의 의지는 약해졌을 것입니다. 마귀는 바로 이런 예수를 유혹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유혹의 순서는 조금 다르지만, 그 내용은 똑같이 세 가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첫째는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유혹입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해 주겠다고 마귀는 약속했습니다. 허기가 진 예수는 귀가 솔깃해졌을 법 합니다. 주변에서 매일 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흔한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하여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외쳤습니다.
 둘째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권능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음을 보여 달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천사들이 받쳐 주어 발을 상하지 않을 수 있다고들 하는데(참고 시편 91: 11-12),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라는 유혹입니다.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하며 이 유혹도 물리쳤습니다.
 셋째 시험은 마귀의 권세에 굴복하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주권을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권력이 얼마나 굉장한가는 보통 사람들도 잘 압니다. 권력을 가지면 자신의 의지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넓은 공간에 걸쳐 관철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는 이 유혹마저 물리쳤습니다. 그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친 후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하는 신명기 6장 13절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 세 번의 시험을 통해 예수가 보여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지막 셋째 시험에 잘 나타납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써 그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음을 보여주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기적이나 표적이나 권세를 가지고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에 따라 사는 자로서 메시아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시험사화가 주는 교훈

 예수의 시험사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려는 젊은이들을 염두에 두고 예수가 거부한 마귀의 유혹들을 음미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며 내세운 말씀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큰 도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는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게 하겠다는 마귀의 장담을 물리치고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빵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빵”은 인간의 삶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물질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가르친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에 해당하는 것이고, 주기도문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첫째 요청일 정도로 중요합니다. 목수였던 예수는 사람이 빵을 얻기 위해 고역을 감수하여야 한다는 것은 절실하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빵”을 단순히 더 많이 생산한다고 해서 일용할 양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물질의 단순한 증가가 사람들의 삶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공중에 나는 새들과 들에 핀 백합화의 비유를 통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마태 6: 33) 하나님이 통치하는 정의의 원리가 바로 세워지지 않고서는 “빵”을 둘러싼 공동체의 갈등과 대립을 해결할 수 없고,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골고루 “일용할 양식”을 나눌 수 없다는 깊은 통찰이 예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에 예수는 돌을 빵으로 만들어 그 양을 증식시킬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는 마귀의 유혹을 결연하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는 하나님이 기적이나 표적을 통해서만 자신의 현존과 능력을 드러낸다는 미신을 깨뜨리고자 하였습니다. 마귀의 둘째 유혹은 표면적으로는 예수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해 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이나 표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무서운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한 치라도 밀려나면 끝장이라는 불안과 공포가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불신이 신앙의 이름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신이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되면, 예수가 경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끊임없이 시험하게 되고, 정의의 원칙에 따라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을 주겠다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권력은 자신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능력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면 상대방의 의지를 꺾어야 합니다. 정치학은 이를 가리켜 지배와 복종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이와 같은 권력 현상을 제한하지 않고서는 공동체를 이룩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5-45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메시아 통치를 펼칠 것이라고 믿고 더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었을 때 예수는 그들을 질책하며 그가 이룩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원리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 공동체는 세상의 왕들과 제후들처럼 백성을 힘으로 내리누르는 방식으로는 실현될 수 없고, 도리어 스스로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신을 비워 남을 수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친교가 이루어지고, 그 친교에 바탕을 두고 남을 섬기는 봉사가 실현될 때 비로소 자매들과 형제들의 공동체가 탄생한다는 통찰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공동체의 비전을 가졌던 예수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먼저 섬기라고 엄중하게 가르쳤습니다.

공동체의 비전

 예수의 시험사화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학교교육을 통하여 시험기계로 훈련받은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서 더 안정된 일자리를 차지하고 더 많은 봉급을 받고 더 큰 힘을 발휘하려고 하고, 그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학연, 지연, 혈연 등 인맥으로 이루어진 기득권 카르텔에 기대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이등시민으로 취급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저는 스펙 신화에 사로잡힌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정글의 풍경을 보고도 마치 그것이 당연한 세계인 것처럼 여기는 것을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스펙 이상이라면, 그래서 사람이 공감능력과 소통능력이 있고 공동체 능력이 있는 생명체라면, 그러한 사람들이 꾸리는 세계는 기득권 카르텔에 의해 위와 아래, 중심과 주변이 갈라지고 차별과 배제가 제도화되는 사회일 수 없습니다.
 예수는 “일용할 양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먼저 의존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정의의 원칙이 먼저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정의로운 하나님을 굳게 믿을 뿐, 그 분을 시험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려 하지 말고 도리어 자기를 비워 남을 받아들이고 그를 섬기라고 가르침으로써 약육강식의 논리를 부정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젊은이들이 예수의 비전을 가슴에 품기를 바랍니다. 자본과 권력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여 살맛이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한탄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예수의 비전은 물론 강물을 거스르며 배를 저으라는 주문입니다. 그것은 좁은 길이고, 가시밭길입니다.
 저는 예수의 비전이 오늘과 내일 당장 이 세상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해도 그 비전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예수의 비전을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포획되지 않고, 자기가 서 있는 일터에서 자본과 권력의 논리가 사람 살림과 생명의 원리에 반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러한 아픔의 경험이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배제당하고 차별당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동체를 이룩하기 위해 작은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도록 이끌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일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는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겨내고 하나님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형일 것입니다. 예수는 죽기까지 하나님에게 순종한 사람입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 잔을 저에게서 치워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마가 14: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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