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설교
Kang Won-Don's Sermons

2010/10/26 (13:21) from 220.66.47.11' of 220.66.47.11' Article Number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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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일용할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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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채플 설교

2010년 10월 26일
마태 20, 1-16
네 이웃의 일용할 양식

1.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업적에 따른 정확한 분배를 뒤집어엎는 하나님의 기이한 정의를 설득력 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 시대에 품꾼은 “태양이 비칠 때부터 별이 뜰 때까지” 하루의 노동을 하는 대가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가족이 하루 동안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비용에 해당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정하고 아침 일찍 일꾼들을 불러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아침 아홉 시쯤에, 열 두 시에, 오후 세 시에, 오후 다섯 시에 “적당한 삯”을 약속하고 일꾼들을 불러서 일을 시켰습니다.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레위 19:13; 신명 24:15) 그 날 저녁 일꾼들에게 품삯을 나누어주는데, 주인은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삯을 지불하기 시작하였습니다.(8절) 그런데 여기서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한 품팔이꾼들이 각각 일한 노동시간과 무관하게 모든 품꾼들에게 한 가족이 하루 사는 데 필요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찌는 더위 속에서 일한 사람들은 적게 일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지만, 적게 일한 사람들과 똑같은 품삯을 받자 그들은 분개하였습니다. 그들이 분개한 까닭은 노동 업적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는 생각에 매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모든 품꾼들에게 동일한 품삯을 주는 것이 자신의 주권적 결정임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자신의 선함에서 비롯된 일임을 밝혔습니다. “당신의 삯이나 갖고 돌아가시오. 당신들에게 준 만큼 마지막에 온 사람들에게 삯을 치루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오? 아니면 내가 착하기 때문에 당신 눈에 나쁘오?”(14·15절) 이러한 주인의 입장은 “업적에 따른 정확한 분배” 관념과는 분명히 상충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이한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의는 노동의 업적과 무관하게 삶의 필요에 따라 재화를 나누어 준 데서 드러납니다. 업적과 보상을 서로 분리하고, 보상과 삶의 필요를 직결시킨 것이 하나님에게는 정의입니다. 그것이 기이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업적과 보상을 서로 결합시키는 일이 마치 하늘이 정한 법인 양 생각하는 통념이 그만큼 강력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노동할 기회가 전혀 없거나 노동 업적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개할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궁핍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나누어준 한 데나리온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겠습니까? 한 데나리온이 일꾼이 그 가족을 하루 동안 부양하는 데 필요한 돈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 말하는 “일용할 양식”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 “일용할 양식”은 주기도문 제2항목 첫째 기원(“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맥락에서 “일용할 양식”에 대한 루터의 해석을 참고할 만합니다. 루터는 소교리문답에서 “일용할 양식”을 해석하기를,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옷,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현금, 순수하고 선한 배우자, 순박한 아이들, 착한 고용인, 순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자, 선한 정부, 좋은 날씨, 평화, 건강, 교육, 명예, 좋은 친구, 신용 있는 이웃 등”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것입니다.
 이 “일용할 양식”은 나 혼자 차지해서는 안 되고,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똑같은 기본적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레오나르도 보프가 말한 바와 같이, “그 필요를 집단적으로 충족시킬 때 우리는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도 자명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사회정의와 직결된 문제임을 뜻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로호만은 하느님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햇빛을 비추고 비를 내리는 것처럼 이 “양식은 수고하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허락된다.”고 주장합니다. “하느님의 의는 그 근본에서 효용성이라든가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은혜 충만한 공의입니다. 이 점을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3. 주가 가르친 기도의 핵심을 이루는 “일용할 양식”은 출애굽 전승에 나오는 “만나”의 예수 운동적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전승에서 만나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출애굽 공동체가 이집트의 축적 경제에 대항하여 추구하여야 했던 대안적인 삶의 상징입니다. 출애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자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하느님이 아무런 전제 없이 제공한 “일용할 양식”을 받았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집트 축적경제에서 익힌 바와 같이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은 것을 천막에 쌓아두면 만나는 곧바로 부패하여 구더기가 들끓고 썩은 냄새를 풍깁니다.
 하느님은 이와 같은 교육을 통하여 출애굽 공동체로 하여금 “일용할 양식”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배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은 것을 챙겨서 축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그것이 하느님의 정의임을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4. 여기서 우리는 성서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는가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어떤 개념이나 어떤 객관적인 척도로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오직 하느님의 구원하고 해방하는 행위로부터 인식되고, 그 인식은 하느님의 행위에 부합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무리들 편에 서서 그들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야훼임을 알린 출애굽 사건 이래로 성서를 관통하는 기본 모티프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로운 행위를 통해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서도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정의는 관계론적 개념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처절한 삶과 그 종살이로부터 해방시킨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행위를 기억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계약법전에서 강조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책임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회상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에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지 않았느냐?”(출애 22:20) 이와 같은 약자 배려의 정신은 과부와 고아에 대한 보호(출애 22:21f.), 떠돌이꾼에 대한 보호(레위 25:35) 등으로 이어지며, 타작이나 수확을 할 때 이삭을 남겨 두거나 열매를 남겨 두어 “가난한 자와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 먹도록 남겨 놓으라.”는 분부로 나타납니다.
 출애굽 전승의 핵을 이루는 약자 배려의 정신은 사회기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 제도로 발전되었으며,(신명 14:28-29) 예언자들에게도 계승됩니다.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지식과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같은 동전의 양면이었습니다.(예레 9:23f.; 예레 22:15; 이사 58:10 등) 이러한 예언자 정신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는 예수의 선언으로 이어집니다.(루가 6: 20-21)

5. 이 점에서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나오는 최후심판의 비유는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결단과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말해 줍니다. 이 비유의 말씀만큼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기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율적으로 증언하는 본문은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자가 의로운 사람들에게 한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는 것입니다.(마태 25: 35-36)

의로운 사람들이 의아한 마음으로 최후의 심판자에게 그들이 언제 그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그는 “네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고 대답합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은 “양식, 주거, 의복, 건강, 자유(존엄성)”과 같이 “인간의 경제적·정치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웃의 기본 욕구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가 결정되고 우리의 미래의 삶이 결정됩니다.

6.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느님의 정의는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전제 없이 “일용할 양식”을 보장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나는 오늘 한국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보장하는 방식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오늘 진보적인 이론가들이 제시하는 기본소득 구상과 맥이 통할는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사회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1966년에 남긴 글을 생각해 냈습니다.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득이 보장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들이 ‘불안’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되며, 이로 인하여 몸밖에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자본이 제공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강제 아래 있다고 분석하였습니다. 프롬은 소득의 보장이 자유를 실현하는 전제조건임을 분명히 하고, 소득 보장의 요구가 인간의 권리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소득이 보장된다면, 자유는 현실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서구의 종교적 전통과 휴머니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원칙, 곧 인간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 권리가 있다는 원칙이 옳다는 것이 실증될 것이다. 생명, 음식, 주택, 의료, 교육 등에 대한 이 권리는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이며, 이 권리는 그 어떤 상황 아래서도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사회에 '쓸모'가 있는가를 보고서 그 사람의 권리를 제한해서는 결단코 안 된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프롬은 근대 세계에서 확립된 자유권적 기본권을 사회적 기본권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프롬은 사회적 기본권의 핵심을 소득 보장이라고 보았으며, 어떠한 반대급부도 전제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소득 보장을 옹호하였습니다.
 이러한 프롬의 사상은 오늘날 기본소득 구상으로 가다듬어지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근대 사회에서 확립된 자유는 안전과 자기자신에 대한 소유를 그 핵심적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그 자유가 실질적 자유(real freedom)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엇을 하려고 하든 그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그 실현 수단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확보하고 있는 내적인 자원과 외적인 자원이 얼마나 확보되어 있는가에 따라 그가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좋은 삶’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몫의 자원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좋은 삶’에 대한 구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되 모든 시민들에게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동등한 자유를 보장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자원을 얼마큼 차지할 권리가 있는가는 정의의 원칙을 세워 정밀하게 따져야 할 일이겠지만, 여기서는 모든 시민이 국가를 상대로 해서 실질적 자유의 실현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본소득이 개인의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이라면, 모든 시민은 국가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민들에게 실질적 자유의 기회와 그 수단을 동등하게 부여하는 것이 정의로운 국가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교회가 네 이웃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가다듬어야 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로서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수고한 사람이나 수고하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주어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의 구원하고 해방하는 정의에 부합하는 일임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그러한 기회를 향유할 수 있도록 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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