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설교
Kang Won-Don's Sermons

2011/05/18 (11:13) from 203.252.23.201' of 203.252.23.201' Article Number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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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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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7일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채플 설교

정의와 평화
마태 11: 28-30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우리나라의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할 만큼 찬란하다. 오월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이어진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기리는 달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오월은 처참한 비극의 계절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신학대학원 채플에서 설교를 하겠다고 나섰다. 오늘은 5월 17일이다. 5월 17일은 5월 16일과 5월 18일 사이에 있다. 달력상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한 순서이다. 그러나 역사적 시간의 의미를 놓고 보면, 이 숫자들은 심상치 않다. 5·16, 곧 5월 16일은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권력을 찬탈한 날이다. 5·18로 줄여 부르는 5월 18일은 1980년 신군부세력이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하여 광주 민중항쟁을 불러일으킨 날이다. 신군부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광주 민중항쟁을 진압하여 국가권력을 손아귀에 확실하게 거머쥐었다. 5월 16일과 5월 18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약 20년을 사이에 두고 군부독재가 세대를 교체하였음을 상징하는 날들이다.
 31년 전인 1980년 5월 17일은 일요일이었다.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전두환 세력은 치안을 교란하고 국가안보를 위태하게 만드는 소요세력에 맞서기 위하여 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한다고 선포하였다. 전쟁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는 그날 아침 교회에 가기 위해 한남동 로터리에서 옥수동으로 올라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단국대학교에는 군대가 주둔하였고, 탱크가 대학교 정문을 봉쇄하였다. 군인들은 착검을 한 소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서슬이 퍼랬다.
 이렇게 해서 1980년 서울의 봄은 짓밟히고, 민주화의 길은 봉쇄되었다. 5월 17일에 지극히 퇴행적인 군부독재가 그 모습을 확실하게 드러낸 것이다. 나는 그 전날까지 서울 도심에서 이어졌던 시위를 떠올렸다. 서울역 광장에는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민주주의의 조속한 실현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1980년 3월 이래로 서울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 서울을 뒤흔들었던 엄청난 규모의 가두시위는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된 5월 17일 이후 서울에서는 일단 숨을 죽였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조선대학교 학생들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고, 여기에 많은 시민들이 가세했다. 이 시위를 진압한 것은 군대였다. 군대는 유혈이 낭자하게 시민들을 공격하고 살상했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는 더욱더 격렬해졌고, 군대가 작전상 광주를 떠나자 그들은 무장하여 시민군이 되었다. 시민군과 민중은 경찰과 군대가 사라진 광주를 통치하였고, 그들의 통치 아래 있는 광주는 문자 그대로 해방구가 되었다. 거기서는 범죄가 사라졌고, 억압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신명나는 시민 연대가 꽃을 피웠다.
 그 당시 광주 민중항쟁에 관한 정보는 거의 차단되어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광주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지만, 그 진상은 가려져 있었다. 군대가 광주로 급파되어 광주를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도,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라고 조직한 이른바 “국민의 군대”가 설마 자국의 시민을 공격하고 살상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유력 일간지들은 광주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날뛰고 있다는 식의 보도를 일삼았고, 그것은 군부가 광주 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언론 공세였다. 군부는 국가권력을 찬탈한 그들의 불법 행위를 덮고 쿠데타 명분을 강화할 수 있는 그럴 듯한 본보기를 필요로 했다. 그들에게는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불순세력의 소요보다 더 적절하게 군부의 정치개입과 권력 장악을 정당화하는 본보기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광주 민중항쟁의 가차 없는 유혈진압은 신군부세력에게 이미 정해진 프로그램이었다고 할 수 있다. 5월 27일에 계엄군이 광주 도청을 함락하고 마지막 남은 시민군을 사살함으로써 광주 민중항쟁은 막을 내렸다. 그와 더불어 해방구 광주도 사라졌다.

2. 1980년대의 한국 사회는 서슬 퍼런 전두환 군부독재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지만, 이에 맞서서 민주화와 자주화, 그리고 민족통일을 달성하고자 하는 민중운동이 강력하게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중운동의 탄생과 발전은 1970년대의 민주화 인권 운동의 전개와는 그 성격을 달리했다.
 1970년대의 민주화 인권 운동은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맞서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는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운동의 주체는 대체로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이었으며, 특히 우리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위시한 진보적인 교단들과 NCCK를 중심으로 한 종교계 인사들이 중요한 구실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을 지원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고, 1977년 1월 인권을 앞세운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자 그 기대는 더욱더 커졌다. 1970년대의 민주화 세력은 전태일 분신 사건 이래로 노동자운동과 도시빈민 운동에 연대하기도 하였지만, 반독재 인권 옹호에 운동의 초점을 맞추었다.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군부의 잔인한 진압과 새로운 군부독재의 성립을 목격한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박에 없었다. 한국에서 민주화는 오직 자주화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인식이 싹튼 것이다. 군대가 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려면 그 당시 평시 군사작전권과 전시 군사작전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던 미국의 용인과 지원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미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는 민주화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기 싲가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최초의 반미 시위로 알려진 1980년 12월 9일의 광주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서 분명하게 표출되었다. 방화 주도자들은 “광주사태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군부파쇼 집단을 지원․지지하는 미국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군부독재와 미국의 연계에 대한 인식은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문부식(文富軾), 김현장(金賢障) 등은 방화 사건을 일으키며 살포한 성명서에서 미국은 “우리 민중의 염원인 민주화, 사회개혁, 통일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파쇼 군부정권을 지원하여 민족분단을 고정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자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는 민족자주화와 민족통일과 결부시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공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민주화, 자주화, 민족통일을 이끌어 나가는 주체는 민중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명제는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서는 아직 선언적 의미만을 갖는 데 그쳤지만, 1980년대에는 민중이 민주화, 자주화, 민족통일을 성취하는 운동의 실질적 주체로 등장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민중이 주체가 되어 상황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면, 군부독재, 대미종속, 민중 생존권 위기, 분단 등 당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민중이 주체가 되어 전개하는 변혁운동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땅 위에 이루어지는 과정에 동참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민중운동은 1987년 6월 민주화 대투쟁을 촉발해서 군부독재를 폐지하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1987년 7월과 8월에 지축을 뒤흔들 것 같았던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자 임금의 급격한 상승과 민주적인 노동조합 결성을 촉진하였다. 비록 군부독재의 잔재를 말끔하게 청산하고 높은 수준의 자주화를 실현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시대를 열지는 못했지만, 대통령 직선제,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지방자치제 등을 핵심으로 하는 1987년 체제가 성립되면서 한국 사회에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바탕을 두고 더 많은 정의와 더 많은 복지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확산되었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시민들은 이러한 기대가 실현되기를 갈망하였다.
 
3.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러한 시민적 기대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보고 탄식하고 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굳건하게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본의 독재를 강화시키고, 사회적 양극화를 악화시키고, 생태계의 안정을 끝없이 위협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래로 상황은 더욱 더 나빠졌다. 민주주의는 껍질만 남고, 그 실질적인 내용은 사라지고 만 것 같다. 언론의 자유는 위축되고, 국민의 건강권은 무시되고, 용산참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바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은 도외시되고, 자본의 권력에 맞설 수 있도록 헌법이 보장한 사회적 시민권은 유린되고, 4대강 개발 사업으로 상징되는 바와 같이 토건자본을 위해 생태계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 감행되고 있다.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는 철저하게 차단되고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독재 체제에서는 국가가 나서서 자본을 축적하고 이를 정책에 따라 배분하였기에 국가가 노동자, 농민 등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장본인이었던 데 반해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철옹성을 구축하고자 하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금융자본과 거대기업이 국가를 도구로 삼고서 우리 사회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국가종속적 자본독재 체제가 나타나고 있다. 그 체제는 야만적인 폭력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무수한 사람들을 세련된 광고와 부에 대한 선망으로 사로잡고 그들을 서로 질투하고 분열하게 만드는 미학적인 고립·분산 정치를 동원하기에 사람들은 엄청나게 빼앗기고 억눌리고 배제당하면서도 지배와 수탈과 배제의 아픔을 제대로 체감하지도 못한다.

4.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11장 28-30절을 읽고 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설교의 한 자락이다. 하나님 나라 선포의 알짬은 마가복음 1장 15절에 기록된 대로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이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실 때가 왔으니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제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삶의 방향을 180도 전환하여 세상 권력자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좀 더 구체적인 강령을 담고 있다. 예수가 살던 시대에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속주였다. 로마 황제는 갈릴래아에 로마 군단을 주둔시키고, 로마 총독을 파견하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감독하게 했다. 로마 황제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일년 소득의 약 20%에 달하는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팔레스타인의 농민들은 그 세금을 납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에게는 지대를 바쳐야 했다. 그들은 또한 지배자들과 지주들을 위해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로마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무자비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의 공납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은 예외 없이 로마 군단이 벌이는 “공포와 전율”의 무자비한 보복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힘으로 내리누르는 권력정치의 본보기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가혹한 세금과 지대, 그리고 강제노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는 땅을 떠나 유리걸식하거나 도적떼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바로 예수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러 다니며 만났던 “목자 잃은 양떼” 같은 사람들이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사회의 밑바닥에서 그 사회를 떠받치는 사람들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수고는 강제노역을 뜻하고, 무거운 짐은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과 인두세, 성전세 등의 각종 세금들과 지주에게 바치는 지대 등을 의미하였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하였다. 하나는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서 누리는 안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압제로부터의 해방이다. 강제노역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세금과 지대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아가게 하겠다는 것이고, 세상 권력자들의 강압과 폭력적 지배로부터 해방된 삶을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배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의 총체적인 해방의 선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시켜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수립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거기서 동터올 것이다. 나는 예수가 하고자 한 일을 생각할 때 늘 마태복음 11장의 이 말씀을 떠올린다.

5.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예수가 하고자 한 일”을 계승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예수가 살던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의 환경과 삶의 조건은 엄청나게 다르다. 따라서 “예수가 하고자 한 일”을 이어가고자 해도 그 방안은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예수는 세금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안식”이라고 말했지만, 우리 시대에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서 보편적 복지를 구현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가 살던 시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강제노역으로 인해 삶의 기회를 빼앗겼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노동시장에 참여해서 자유로운 행위주체로서 노동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는 상태, 곧 실업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그러니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선택했던 일들을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대로 계속 할 수는 없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하고자 한 일”은 언제까지든 기억되어야 한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정의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를 열어 주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정의를 실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와 수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예수에게만 절실한 과제였던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체제가 철옹성처럼 자리 잡은 우리 시대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를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하고 실제적인 해결 방안을 찾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되었다. 온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정치경제를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고,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수립하는 일이리라.
 1980년대에 “예수가 하고자 한 일”을 계승하고자 했던 뜻있는 “아브라함의 소수파” 기독교인들이 자주화, 민주화, 민족통일을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땅 위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고자 애썼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로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편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우리 시대에 구현하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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