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설교
Kang Won-Don's Sermons

2013/04/11 (11:48) from 220.66.47.11' of 220.66.47.11' Article Number : 43
Delete Modify 강원돈 (kwdth@chollian.net) Access : 2754 , Lines : 30
소유권 주장의 제한과 사회적 연대
Download : 소유권 주장의 제한과 사회적 연대.hwp (23 Kbytes)
신명 10, 12-14.17-19
소유권 주장의 제한과 사회적 연대

 오늘의 본문은 신명기 10장 12절에서 11장 32절에 이르는 긴 담화의 서론 부분이다. 이 담화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일종의 계약관계로 다룬다. 그 계약관계의 내용은 일종의 계약서식의 순서에 따라 꼼꼼하게 작성되었다. 계약서식의 순서는 대체로 전문과 경과설명, 계약의 핵심 내용에 대한 설명, 계약관계의 상세한 규정들, 증인의 소환, 축복과 저주로 이어지는데, 10장 12416절과 11장 1절은 계약의 핵심내용을 설명하는 구절들이다.
 야훼와 이스라엘의 계약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상호간의 사랑과 헌신이다. 이를 전제하고서 야훼는 이스라엘에 엄중하게 요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이러한 엄중한 요구를 내어 놓는 야훼는 “하늘과 하늘 위의 또 하늘,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한 분이고, 따라서 그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는 분으로 소개된다.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것을 제 소유물로 주장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레위기 25장 23절에서도 선취되어 있다. 거기서 야훼는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고 선언한다. 땅에 대한 소유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있고,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땅을 사용하며 삶을 꾸려나가는 용익권만이 허락되어 있다는 뜻이다.
 신명기 10장 12절-11장 1절에서 15-22절은 계약의 핵심내용에 대한 설명에 후대에 덧붙여진 일종의 윤리적 권면이다. 마음의 할례는 율법의 요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요청일 것이고, 그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세워 주시고 떠도는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는 분” 하나님을 본받아 떠도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다. 한 마디로 사회적 연대와 배려의 삶을 살아가라는 분부이다.
 방금 분석한 신명기 10장 12절로부터 11장 1절에서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과 과부와 고아의 인권을 세우고 떠도는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과부와 고아, 떠돌이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연대를 요구하는 분이라는 것도 확실하게 밝혀졌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신명기는 요시아 개혁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서이다. 이 문서가 만들어진 시기는 주전 621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701년 유다는 아씨리아 산헤립의 침공을 받아 초토화되었고, 그 참화를 딛고 왕국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서 있었던 요시아 왕은 상비군을 두고 국방에 임할 수 없었기에 옛날 판관 시기의 농민 의용군 제도를 부활시키고자 하였고, 야훼 예배의 중심지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원시 이스라엘을 지배하였던 야훼 신앙과 율법에 대한 열심을 되살리고자 하는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이 운동을 선도한 집단이 신명기 문서를 작성한 집단이었다. 그들은 고대의 제의 전통과 율법 전통을 재해석하여 당대의 청중들에게 전달하고 그 전통에 담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살아갈 것을 간절하게 촉구하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닥까지 무너진 유다 왕국과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야훼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유다 왕국과 사회의 상황이 암담하면 암담할수록 그들의 설교는 절박했다. 그 절박감은 그들이 모세의 이름을 빌어 청중에게 건넨 설교 담화들에 속속들이 배어 있다. 그들은 설교 담화에는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제 주장만 앞세우는 청중들에게 안간힘을 쓰며 호소하였는데, 그 모습은 11장 18절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그 증거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일러 준 이 말을 너희의 마음에 간직하고 골수에 새겨 두어라. 너희의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를 삼아라.”

 이렇게 보면, 야훼와 이스라엘이 맺는 계약관계의 핵심 내용을 천명하는 10장 12-14절에 만물에 대한 야훼의 주권을 천명하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레위기 25장 23절에 기입되어 있는 땅에 대한 야훼의 소유권이 새삼스럽게 재천명되는 까닭은 이미 땅에 대한 야훼의 주권이 깡그리 무시되고, 땅의 소유권 이전이 관례화되고, 토지 겸병을 통해 대토지소유가 확립되었다는 반증이다. 이미 원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왕국으로 대체되면서 옛 제의 전통과 율법 전통은 희석화되기 시작했다. 다윗-솔로몬 왕국의 판도가 넓혀지면서 원시 스라엘의 소유 관념과 무관하게 살아가던 종족의 관할 구역들이 왕국에 편입되었다. 땅의 소유권을 금지한 야훼 공동체의 엄격한 전통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를 상실하고, 토지겸병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대토지소유제가 확립되는 과정은 유다 사회 안에 사회적 양극화가 진행되고, 정의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야훼 신을 대신해서 이방 신들이 자리를 잡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미 예언자 아모스는 이러한 사회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이스라엘의 상황을 맹렬하게 비판한 바 있고, 신명기 10장 17-18절에 담긴 야훼 찬양문은 예언자 아모스가 이미 수십 년 전에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고 맹렬하게 비판하였던 북이스라엘의 현실이 남유다의 상황이 되었음을 역설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신명기 집단은 신명기 10장 12-14절, 11장 1절에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계약의 핵심내용을 천명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관례화되어 있었던 소유권 주장을 부정하고 원시 이스라엘의 용익권을 회복하라는 요구이고, 그 요구의 이행을 야훼에 대한 헌신과 경건의 토대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소유권 주장의 절대성을 제한하고자 하는 신명기 집단의 의도가 얼마나 강력한가는 바로 그러한 요구를 야훼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그 야훼를 만물의 창조주요, 만물에 대한 주권자로 호명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신명기 집단의 소유권 개혁 요구가 얼마나 절박하였는가는 10장 15-22절에 삽입된 윤리적 권면의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소유권 제도를 그대로 두고서는 한 마디로 고아와 과부, 떠돌이들의 인권을 세우고, 그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미 남왕국에 관례로 굳어진 소유권 주장을 그대로 두고서는 사회적 배려와 연대를 실현할 수 없고, 그것은 작은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는 하나님의 정의에 등을 돌리는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명기 집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이집트 땅 파라오의 지배 아래서 종살이를 하던 시대의 고통을 상기시키고, 그들을 편들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행위와 거기서 드러난 하나님의 정의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오직 하나님의 정의가 구현되는 곳에서만 깨어진 사회가 회복되고 공동체가 재건될 것이다. 그 첩경은 만물을 창조한 야훼의 만물에 대한 주권을 승인하는 것이고, 따라서 소유권 주장의 절대성을 제한하고 작은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회적 연대를 실천하는 것이다. 신명기 설교자들은 그들의 말에 아예 귀를 막고 돌아서는 당대의 청중들을 향해 이러한 담화를 발표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신명기 10장 12-14절, 17-19절의 말씀을 오늘의 한국 사회에 전하고 싶다. 까마득한 옛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말을 들었던 사람들조차 고집을 부리고 자기주장을 앞세우며 듣지 않으려고 했던 그 말씀을 갖고서 설교를 한다고 할 때, 과연 그러한 설교가 소유권의 절대성 주장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청중을 찾을 수 있을까? 어린아이들조차 “이건 내거야. 건드리지 마!”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그 말 속에는 소유권의 관념이 오롯이 담겨 있다. 내 것으로 설정된 대상에 대해 배타적 지배권과 처분권을 행사하는 것이 소유권의 핵심이라는 뜻이 그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그 말을 당연하게 여기며 어렸을 적부터 살아온 사람들에게 소유권 주장은 자연 질서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일 것이다. 이러한 소유권 관념이 뿌리 깊게 박힌 한국 사회에서 성서의 말씀에 근거하여 소유권 개혁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소유권 주장의 절대성 아래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삶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문명사회에서 보호받아야 할 권리들을 유린당하고 있기에 신명기 설교자들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절박하게 소유권 개혁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국가들에서 소유권은 신성불가침한 인간의 권리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도 제23조 1항에서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여 소유권의 불가침성과 그 법률적 보호를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제23조 2항은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이 항목은 1항의 규정을 본질적으로 침해하지 못하는 선언적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 세계에서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을 선언한 최초의 명문 규정은 프랑스 혁명 이후 선포된 “인권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선언의 정신은 프랑스 헌법에 명시된 뒤에 나폴레옹 법전을 통해 유럽 각국의 헌법에 뿌리를 내렸다. 그런데 프랑스 인권 및 시민권 선언에 소유의 신성불가침이 명문화된 것은 국가로부터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물질적 수단이 없다면, 그러한 사람은 국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야 할 것이고,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유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고 삶을 자유롭게 형성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수단은 국가의 몰수나 수용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소유권이 국가 이전에 이미 인간과 시민에게 부여된 권리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핵심 논거였다. 소유는 국가에 의해 침해될 수 없고, 국가는 소유의 불가침성을 법률로 보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국가의 헌법에 보장된 소유의 신성불가침성은 국가의 간섭과 권리침해로부터 개인과 시민의 삶을 보호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넘어서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정당화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추구의 물질적 기반을 이루는 소유권의 절대성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사용되어 왔다.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고 삶의 자유로운 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천명된 권리가 이윤추구의 가능성 조건으로 기능을 수행하고, 근대 부르주아 국가에서 자유기업 정신의 헌법적 원칙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분명 논리의 비약이다. 프랑스 시민혁명이 전취한 인간과 시민의 신성불가침한 소유권은 그 한도가 설정된 권리이지, 그 권리의 무제한적이고 무제약적인 실현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국가에 의해 개인의 생존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고 국가에 의해 개인의 삶의 형성을 간섭받지 않는 한도에서 보장되어야 할 권리이고, 개인의 소유권 주장으로 인하여 공동체에 속하여야 할 것을 침해해도 무방하다는 막무가내 식의 권리 주장일 수 없었다. 공동체에 속하는 것, res publica를 존중하는 정신, republicanism, 곧 공화주의는 개인의 권리 주장과 나란히 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확립되고 자본주의 체제가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이래로 이윤추구의 물적 기반인 생산수단의 배타적 지배와 임의로운 처분은 자본가의 절대적 권리로 인정되어야 했고, 이로 인하여 노동사회의 시민인 노동자의 권리는 유린되고, 공동체의 이익과 복지를 위해 공적인 것으로 남겨놓아야 할 것은 본질적으로 침해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보여 주는 예들을 목록으로 작성한다면 그 목록은 끝없이 길 것이다. 그러한 예들을  찾기 위하여 멀리 갈 것도 없다. 여러분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2003년 두산 중공업 고 배달호 씨와 한진중공업 고 김주익 씨의 분신자살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라. 자본 측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서 사소한 절차상의 잘못을 범할 경우에, 이를 빌미로 삼아서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불법 파업에 따르는 손해를 배상할하는 소송을 내고 손해배상 청구를 위해 노동자들의 재산을 가압류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것은 자본 측의 소유권 주장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쟁의권을 무력화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노동자들의 쟁의권과 교섭권마저 무력화하려는 조치이다. 그러니 소유권 주장을 절대화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의 권리가 유린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약간 다른 사례이기는 하지만, 쌍용차 사태의 근본요인도 자본 측의 소유권 행사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될 수 없었던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유권의 절대성 주장이 가져온 문명사회의 커다란 치욕은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와 보상을 둘러싼 갈등 끝에 여섯 명이 불에 타서 죽은 끔찍한 참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재개발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재개발로 인해 상권이 파괴되자 상가 세입자들은 상가 권리금 보전이나 생존 기회를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소유권으로 인해 막대한 이익과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마련될 수 없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헌법의 소유권 조항에 대한 해석이 혁신되고, 소유권 개혁을 뒷받침하는 법률을 제정하여야 하였지만, 이러한 시도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법조계와 학계, 여론 형성층 사이에서 소유권의 불가침성이 이윤추구를 위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을 절대화하는 논거로 당연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옛날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오캄은 자연법 해석을 통하여 인민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욕망을 충족하기 우해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사용할 권리를 당연히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익권이 소유대상에 대한 소유자의 배타적인 지배권과 임의처분권에 앞선다는 주장이다. 배가 고픈 꼬제트를 위해 빵 두 쪽을 훔친 장발장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것은 적어도 윌리엄 오캄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히브리 성서의 세계에서는 자연법을 전혀 전제하지 않고서도 소유권의 절대성 주장을 애초부터 금기시하였고, 다윗도 배가 고팠을 때 제단에 쌓아놓은 떡을 가져다가 태연히 먹을 수 있었다. 배가 고팠던 예수의 제자들도 남의 밀밭을 지나가면서 밀을 훑어 씹어 먹었다. 그것을 죄로 고발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바리사이파 사랍들에게 고발당한 이유는 남의 밀밭에서 밀을 훑어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필 그런 일을 한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신명기 10장 17-18절은 야훼를 정의로운 분으로 소개하고 그 분의 정의가 과부와 고아의 인권을 세워주고 떠돌이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데서 실중된다고 찬미조로 증언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대목을 다시 눈여겨보아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과부와 고아, 떠돌이는 사회적 보호와 배려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인간의 기본욕망을 충족할 수 없는 경계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기본욕망은 양식, 주거, 의복, 건강, 자유를 향한 욕망이며, 인간이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경제적·정치적 기본 욕구”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인구의 절대다수는 이러한 기본욕망을 충족시킬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라고 하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불안정한 직업과 불충분한 소득으로 인하여,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노후로 인하여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산다. 기술 발전과 생산력 발달로 인하여 엄청난 가치가 생산되고 축적되고 있는데도 인구의 절대다수는 증가하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1990년대 말만 해도 하랄트 슈만은 20 대 80의 사회를 말했다. 2008년 말의 금융위기를 겪고 난 뒤에 점령(occupy) 운동을 펼친 사람들은 1대 99의 사회가 이미 왔다고 개탄했다. 엄청난 부가 극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빈손으로 살아가는 사회가 과거의 복지국가들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금융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이 더 많은 이익을 위하여 산업자본을 수탈하고,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수탈하게 하고, 마침내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의 대부분을 빼앗아가는 수탈과 지배의 위계구조가 강고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 노동인구의 53%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회, 지니계수가 1997년 2.7%에서 2012년 3.2%로 급상승한 사회, 국민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급격히 높아져서 소득분배가 크게 경사진 사회, 젊은이들의 미취업과 실업이 3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사회, 성장을 위해 복지를 끝없이 희생하여야 한다고 여전히 선전하는 사회 -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회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이다. 이러한 한국 사회는 사회적 연대가 고갈된 사회이고, 각자도생을 위해 이웃을 수단이나 적으로 보는 시선이 고정되도록 작용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더 많은 연대, 더 많은 인간의 자유, 더 많은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기 위해 고려하고 개발하여야 할 정책 과제들은 물론 매우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복된 삶을 위기에 처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는 소유의 절대성 주장이 도사리고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기구의 헌법해석과 법률운용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소유권 개혁을 우회하고서 더 많은 연대, 더 많은 인간의 존엄성, 더 많은 자유를 구현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 조치들은 필요하지만 불충분한 조치들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는 소유권 개혁에 나서야 한다. 교회는 작은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편드는 정의로운 하나님이 소유권의 절대성 주장을 애초부터 부정하였다는 것을 늘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소유의 불가침성이 작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만인의 안전과 복지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공적인 것의 제도적 보장을 전제하는 주장이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나는 소유권 주장의 제한과 사회적 연대를 강조한 신명기 설교자의 절박한 마음을 갖고서 소유권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이를 위해 교회의 연구 역량과 조직 역량과 실천 역량을 집중할 것을 촉구한다.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