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설교
Kang Won-Don's Sermons

2015/04/07 (18:57) from 211.106.190.92' of 211.106.190.92' Article Number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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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부활은 어떤 사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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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7일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채플 설교

본문 :
제1독서 출애굽기 14: 15-31
제2독서 요한계시록 1: 10-18
제3독서 누가복음 23:50-24:12

제목 : 우리에게 부활은 어떤 사건인가?

오늘은 부활절에서 이틀이 지났지만, 신학대학원 채플에서 부활절 예배를 지내지 않았기에 부활절 성서일과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부활은 어떤 사건인가?”라는 제목으로 증언하고자 합니다. 부활절 성서일과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봉독한 바와 같이 출애굽기, 요한계시록, 누가복음의 긴 단락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 말씀들을 갖고서 무엇을 어떻게 증언할 것인가를 놓고서 고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제1독서와 제2독서, 그리고 제3독서를 가로지르는 cantus firmus, 곧 주요 멜로디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사건과 증언입니다. 우리가 전혀 예기치 않는 방식으로 사건이 일어나서 그 사건이 우리를 동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건을 설교의 기본 모티프로 삼고 나니까 각기 다른 맥락에서 각기 다른 내용을 전달하는 성서일과의 세 가지 말씀들이 어떤 초점을 중심으로 배치되었고, 이야기의 맥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의 맥을 잡게 되자, 출애굽기가 증언하고 있는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I.   

출애굽기 14장 15-31절에는 두 가지 전승들이 서로 결합되어 한 줄기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집트 군대에 쫒기는 히브리인들은 그들 앞에 놓인 바다로 인해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바다를 건너갈 수 있었고, 그들을 추적하던 이집트 군대는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두 전승이 매끄럽게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 들여다보면, 두 전승의 이음매가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한 전승은 하나님이 바다를 갈라서 두 바닷물 벽 사이로 길을 내었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다른 한 전승은 하나님이 폭풍을 일으켜 바다를 물러가게 해서 바다가 마른 땅이 되게 하였다고 서술합니다. 구약학자들은 두 전승들 가운데 뒤의 것이 더 오래된 것이라고 봅니다. 바다가 갈라져서 물 벽이 생기고 그 사이로 길이 나는 광경은 <십계>라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극적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눈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수사법입니다. 이러한 광경 묘사는 바다 너머로 탈출한 사건을 전승하는 과정에서 각색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오래된 전승은 불과 폭풍처럼 야훼가 현현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끌고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폭풍을 불러일으켜 바다를 물러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의 증언은 조금 더 신앙고백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를 편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바다를 갈랐다는 것과 바다를 물러가게 했다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언자 이사야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는 51장 10절에서 “바다와 깊고 넓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의 깊은 곳을 길로 만드셔서 속량 받은 사람들을 건너가게 하신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행위를 찬양하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이 혼돈의 세력인 바다를 그분의 의지대로 지배하여 구원의 사건을 일으켰다는 데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혼돈의 바다를 갈라 그 혼돈 가운데서 구원의 길을 여는 하나님, 혼돈의 바다를 물러나게 하여 작은 사람들이 마른 땅을 밟고서 바다 너머로 탈출하게 이끄는 하나님 – 출애굽기 편찬자들은 바로 그 하나님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을 증언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위대한 구원 행위로 인해 바다 너머로 탈출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먼 훗날까지 이어져 마침내 태초에 하나님이 혼돈의 바다를 이기고 창조의 행위를 시작했다는 창조신앙으로 구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일으키는 사건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사람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겪고 난 뒤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마련입니다. 바다 너머로 탈출한 뒤에 모세가 야훼를 찬양하며 지은 시가 그 적절한 예가 될 것입니다. “내가 주를 찬송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출애 15:1)
 그렇지만 하나님이 일으키는 사건이 모든 사람들에게 찬양과 경배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이집트 땅 파라오의 억압으로부터 건지기 위해 열 가지 사건을 일으켰지만 이집트의 파라오는 오히려 더 고집이 세어져서 끝끝내 야훼에게 맞서기로 마음먹습니다. 파라오는 이집트 최고의 신인 태양신의 아들이요, 땅 위에 나타난 태양신의 화신으로서 견고한 지배체제의 한 쪽 벽에 구멍을 뚫고자 하는 야훼의 의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가 구축한 체제는 그 내부로부터 외부를 향할 수 있는 그 어떤 틈새도 허용할 수 없는 완결된 체제였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체제였습니다. 그 체제의 유지자인 파라오는 야훼가 일으키는 사건을 진압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체제의 한복판에 돌파구를 뚫고자 하는 야훼와 그 체제의 자기완결성을 고집하는 파라오의 투쟁이 성서에 기록된 영웅적 서사에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야훼와 파라오 사이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투쟁은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집합을 우주로 생각하고, 그 집합의 논리와 문법을 절대화하는 무수한 경우들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자기편이 아니면 모조리 적이라는 위험천만한 논리와 행태가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얼마나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까?
 저는 출애굽기 14장의 본문에서 포착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건에 대한 찬미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집스러움의 모티프를 안고서 누가복음의 본문을 읽고 싶습니다.

II.

 누가복음 23장 50절로부터 24장 12절까지 이어지는 본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주검을 장사지내고 사흘 뒤에 그분이 부활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리마테 요셉이 예수의 주검을 인수하여 돌무덤 안에 안치하는 과정이 꼼꼼하게 서술된 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부활 서건의 사실성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을 전하는 본문의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본문은 예수의 부활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부활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에 대한 보도에 접한 사람들이 그 사건을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의 부활 사건을 전해 주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의 주검이 안치된 돌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여인들의 목격담입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 생전에 그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장례가 치러질 때 무덤의 위치와 예수의 주검이 안치된 곳을 정확하게 알아두었고, 예수의 주검에 바르기 위해 향유를 준비하기까지 했습니다. 계명에 따라 안식일에 쉬고 향유를 바르기 위해 그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아두었던 큰 맷돌 모양의 돌이 옆으로 치워져 있었고, 돌무덤 안쪽의 시신 안치대에는 예수의 주검이 없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의 주검이 실종된 것을 보고서 “당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주검이 없어진 것을 보고서 그분이 부활했다고 생각한 여인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 예수의 부활 사건을 전해 주는 것은 두 천사의 전언입니다. 그들은 무덤이 빈 것을 보고서 당황하기만 할 뿐,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고 질책하면서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증언했습니다. 두 천사의 말을 듣고서 여인들이 예수의 부활 사건을 인지하고 받아들였는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 사건을 전해주는 것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기억입니다. 갈릴리에서 활동하실 때 예수는 이미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누가 9, 22)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생전에 그분을 “주”라 부르며 따라 다니던 여인들은 그때서야 뭔가 감을 잡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한 사도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돌무덤이 비었다는 것과 두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났다고 선포했다는 것과 예수가 생전에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예고했다는 것을 여인들로부터 전해 듣고도 열한 사도들은 도리어 여인들의 말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치부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날 리 없다는 통념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예수의 돌무덤으로 가서 그것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하기는 했습니다. 그는 빈무덤을 보고서 고작 “이상하다.”고 생각하였을 뿐이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 열한 사도들 가운데 그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믿은 사람들이 없었던 셈입니다.
 여인들이 예수가 생전에 십자가 처형을 당한 뒤에 부활할 것이라고 한 말을 “기억”했다고 하지만, 평소에 예수의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두 천사의 말을 듣고 난 뒤에 그 말씀을 비로소 “기억”한 여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여인들이 부활을 믿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III.

 부활은 분명히 사건입니다. 그것도 그 누구도 예기치 않게 벌어진 사건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리는 일이고,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부활했다는 말을 듣고 그 말을 철석같이 믿는 것은 결코 정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먼저 간 사람을 애도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에 남아 있는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신이 죽은 사람의 환생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와서 출몰하고 눈앞에 현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비정상으로 낙인찍힙니다. 죽은 자가 되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의 패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그들이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이고, 그것에 어긋나는 것은 당연히 비정상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자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성서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그 증언은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것을 뒤흔들고 그 너머를 지시합니다. 로마서 4장 17절은 아예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세상을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불러내셨다.”고까지 말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상을 불러내어 존재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부활 사건의 빛에서 전통적인 창조신앙을 재해석해서 시간적으로 뒤에 일어난 부활 사건이 시간적으로 앞서 일어난 무로부터의 창조에 근거를 제공한다는 뜻입니다. 부활을 창조의 근거로 이해함으로써 로마서의 저자는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예리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자를 다시 살려내셔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상의 권세와 힘들을 무력화하고 무효화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고, 바로 그 하나님이 무로부터 불러내어 존재하게 한 세상이 낯선 세력들에 의해 파괴되어 무로 돌아가지 않도록 세상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우리들에게는 낯설기만 하고, 받아들이기 어렵고, 더 솔직히 말하면, 받아들이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갖고서 완강한 틀을 구축하고 그 틀 안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틀 바깥에서 그 틀을 건드리고, 그 틀 안에 있는 것에 신호를 보내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포착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틀 안에 바깥을 향해 열어 놓은 작은 구멍 하나 없이 그 틀과 그 틀 안의 자기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틀 안에 있는 것을 전체로 여기고 그것을 절대화하게 됩니다. 그 틀 바깥으로부터 그 틀을 향해 오는 것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그러한 틀에 해당할까요?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업적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시장근본주의, 과학주의, 갖가지 유형의 배타주의 등등은 그 가운데 몇 가지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성서의 증언을 들으면서 나와 우리가 어떤 틀에 갇혀 있지나 않은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의 열한 제자들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부여하여 그들에게 “부활의 증언자”라는 역할을 부여했지만, 그들도 예수의 부활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에 그 사건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통념의 틀을 깨뜨리는 사건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활은 어떤 사건인가? 나는 여러분이 이 질문을 품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IV.

 제 이야기는 요한묵시록 저자 요한의 증언을 성찰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묵시를 전하라는 위임을 받습니다. 그 때 요한은 그를 불러 메신저로 삼고자 하는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서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있는 이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갖고 있다.”(1:17-18)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임을 당한 뒤에 다시 살아난 자입니다. 그는 지금 살아있고, 그의 생명은 영원무궁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그의 생명을 더 이상 위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묵시록은 부활의 사건으로부터 두 가지 신앙고백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음과 지옥의 세력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분이라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죽음과 지옥의 세력을 지배하는 위치에 섬으로써 그는 만물에 대한 주권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부활 사건의 자리에서 창조와 종말을 조망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다는 창조신앙은 부활 사건의 빛에서 재조명되고,(로마 4: 17 참조)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이룩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선취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렇듯 신앙과 신앙고백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근거와 그 미래가 부활 사건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부활 사건은 기독교적 증언의 핵심이고, 다른 그 무엇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기독교의 고유한 신앙의 알짬입니다. 부활 사건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행위는 오직 찬미와 고백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 바깥으로부터 와서 여러분을 건드리는 부활 사건의 진리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그 사건이 여러분이 설정한 틀을 관통하여 여러분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사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여러분 안에 바깥으로 나가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야 할 것이고, 여러분의 안이 비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의지와 생각에 따라 외부를 구성하려고 들지 말고 여러분의 외부가 하나의 실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직시할 것을 촉구하고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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