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돈의 설교
Kang Won-Don's Sermons

2016/08/14 (15:19) from 221.158.115.178' of 221.158.115.178' Article Number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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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람들의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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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4.
천안살림교회 설교

본문: 출애 22:21, 갈라 3:28, 누가 13:29
제목: 작은 사람들의 하나님 나라

 오늘은 8·15 해방 71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했던 우리 민중은 71년 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식민지 상태로부터 벗어나 본격적으로 새 나라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나온 사진들이나 격문들, 시, 가요, 신문 기사와 사설들을 보면, 식민지 질곡으로부터 벗어난 기쁨과 새 나라 건설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감격과 흥분의 소용돌이에서 서로 얼싸안은 사람들은 분명 우리 민중이지만, 누가 어떤 나라를 세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서는 점차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여기서 저는 해방 정국에서 여러 정치세력들이 내건 견해들과 상호투쟁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은 무척 복잡하고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하는 주제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해방 직후에 나타났던 민중 주도의 인민공화국 건설노선이 점차 정치 무대 바깥으로 밀려나고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구호가 전면에 부각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해방 직후 남과 북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남쪽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여운형의 암살이 이러한 방향 전환을 가리킨다면, 김구의 암살은 한반도 남쪽에 한정된 국민국가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저는 이러한 맥락에서 국민이라는 낱말이 크게 부각되고 이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민족이라는 낱말이 신성시되기 시작한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식민지 시대에도 민족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 낱말이었습니다. 민족독립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되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였습니다. 민족독립을 위해서는 좌우의 대립을 넘어서서 이른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 1927년에 신간회 운동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이 흔히 입에 올린 것은 민족이라는 낱말이기보다는 식민지 민중이라는 낱말이었습니다. 일제의 억압과 수탈, 차별과 배제, 심지어 전시동원과 희생이 집중되어 온 몸으로 그 부담을 짊어져야 했던 바로 그 사람들, 바로 그 식민지 민중을 안중에 두지 않고 민족독립을 말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식민지에서 벗어난 뒤에 민중을 억압과 수탈, 차별과 배제로부터 해방시키는 새 나라를 건설하자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잘 아시는 대로, 한반도 남쪽에 국민국가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은 민중이 망각되는 과정이었습니다. 남북분단은 인민이나 인민해방, 인민공화국, 인민군대 등과 같은 낱말들을 금기시했고, 더 나아가 민중이라는 낱말도 불온시하였습니다. 요즈음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더더욱 그랬는데, 민중이라는 낱말이 쓰인다고 해도 고작 개, 돼지 같은 천것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뿐이지, 정치의 주체나 권력의 주체라는 정치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를 갖는 것은 국민이라는 용어였습니다. 국민국가, 국군, 국민교육, 국민의례, 국민학교, 국립대학 등과 같은 낱말들이 자리를 잡고, 그 국민이 우리 겨레의 5천년 역사의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습니다. 민족주의는 국민국가를 옹위하는 국민주의의 성격을 띠었고 애국주의의 오로라를 입게 되었습니다.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동단결을 외치는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의 아성을 자처하는 북쪽 공화국은 민족의 이름으로 부정되고 철저하게 이단시되었습니다. 해방정국, 한국전쟁, 전후 혼란, 경제개발 등이 이어지는 숨 가쁜 시기에 국가 엘리뜨가 주도한 강력한 국가형성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강고하게 결합시켰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중은 철저하게 망각되었고, 민중을 대변하는 제도적 장치들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국민과 민족이 강조되고 민족국가 형성이 강조되는데, 거기에 민중이 없었습니다. 민중 없는 국가, 민중 없는 민족, 민중 없는 국민이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기본 어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를 거치며 국민국가를 형성하였던 나라들에서 국민과 국민주의는 크고 작은 모든 차이들을 문질러버리고 모든 것을 통합하고 통일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독일, 영국을 위시하여 유럽 여러 나라들과 미국 등지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국민 형성과 국민국가 형성이 최우선적인 과제로 선정되니까 국어를 제정하고, 국민교육을 실시하고, 국민의식을 형성하고, 국가 차원에서 도량형을 통일하고, 국가 관료체제를 확립하는 일련의 작업이 체계적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이 만들어지고 국민국가가 구축되었습니다. 그것은 극히 근대적인 산물이고 인위적인 구성체였습니다. 국민에 해당하는 영어 nation은 마치 태고적부터 있어 왔던 역사의 실체처럼 여겨지지만, 그런 역사의 실체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국민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국민을 구성원으로 하는 국가가 탄생하면서 국민과 국가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최고의 주권을 주장하는 국가의 통일을 위해 국민은 순도 높은 정치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계명 앞에 서게 되고, 국민의 단결과 통일을 저해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불온시되었습니다. 이러한 국민적 통일체에서 인종 문제나 계급 문제나 젠더 문제, 더 나아가 성 소수자 문제는 제대로 다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인종적 편견과 차별과 배제가 횡행하는 국민국가 안에서 인종 문제가 정치적 의제가 되지 못하고, 계급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국민국가의 통일성과 사회적 평화가 근본적으로 위협받는데도 국가는 계급투쟁을 위로부터 억압하는 데 골몰하였을 뿐입니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요구하는 권리들은 가부장제와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국민국가에서는 오래 동안 제대로 포착되지 못했고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성 소수자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국민이 사라져야 한다거나 국민국가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북한이 갈라져서 극도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한을 아우르는 국민을 형성하고 그 국민을 구성원으로 하는 통일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과제입니다. 만일 그러한 국민국가를 형성할 수 있다면, 그 국민국가의 틀에서 우리 국민은 자유와 복지, 인류의 번영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국민과 국민국가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의 전 시기를 거쳐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던 근대적 국민 개념이나 국민국가 개념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발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읽은 본문들이 우리에게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면 반드시 출애굽기를 읽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출애굽기를 읽는 분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하나님이 억눌리고 빼앗기고 차별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먹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 분은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의 손아귀에 붙잡혀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을 듣고 그들 편에 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 분의 이름은 야훼인데, 야훼는 누군가의 편에 선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에 맞먹는 힘을 갖고 그 권력을 행사하여 엄청난 공납을 받고 그 공납을 쌓아두기 위해 거대한 창고를 짓는 파라오의 편에 서는 분이 아니라, 그 파라오의 손에 붙여져 땡 볕에 강제노역에 동원되고 하루 안식조차 취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시간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히브리인들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먹는 분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시나이 광야를 편력하면서 먹을 것과 마실 것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샘을 터뜨리고 만나와 메추리기를 공급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또한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난민들을 모아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나서고, 그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포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분이 그러한 계약을 맺으면서 자신의 백성에게 다짐받은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오직 야훼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 다짐이 그것입니다. 아무도 대적하지 못하는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자신들을 건져낸 야훼의 위대한 행위와 그분의 보살핌을 경험한 작은 사람들은 오직 야훼만을 하나님으로 믿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이것이 야훼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한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바로 출애굽 공동체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저의 시선을 끄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지만 그들이 결코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민족 같은 것은 출애굽기에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땅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던 하층민들과 노예들을 가리키는 하비루라는 이름을 공유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 이스라엘 총회에 참여하는 자격을 가졌을 때에도 가나안 땅의 여러 족속들을 그 총회에 참여시켰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명기 23장 1-8절이 중요합니다. 거기를 보면, 야훼의 총회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유형별로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 유형들은 주의 깊게 분석되어야 합니다. 먼저 “신낭이 터진 사람들”과 “사생아들”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사람들입니다. 이방신을 위해 신체의 일부, 특히 성기를 훼손한 사람들이나 성전 창기나 창남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은 야훼의 총회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은 출애굽 공동체를 저주해서 출애굽 사건에서 드러난 야훼의 뜻에 거역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에돔 출신이나 이집트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야훼의 총회에서 배제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야훼의 총회에 참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야훼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매우 개방적인 개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스라엘 민족으로 좁혀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입장입니다. 야훼 신앙을 교묘하게 왜곡하고 악용하여 이스라엘 제국주의와 국가주의를 강화시킬 때에도 예언자들은 야훼가 만군의 주임을 힘주어 강조했고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제국주의와 국가주의를 뒷받침하는 야훼 신앙은 없습니다.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모인 온 이스라엘은 야훼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문호를 열고 함께 모여서 대소사를 의논하여 결정하고, 야훼의 뜻에 따르는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이 눌린 사람들, 배제되는 사람들, 노역을 바쳐야 하는 사람들, 일용할 것을 얻지 못한 작은 사람들 편에 서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런 사람들 편에 서기로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뜻을 따르는 행위이고, 하나님의 정의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의 실천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출애굽기 22장 21절은 아주 준엄한 분부입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던 나그네였다.”(출애 22:21)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나그네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이방 지역에 와서 생업의 터전이 없이 아무런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학대당하고 억눌리는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학대와 억압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제동을 걸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죽 하면 야훼의 권위를 앞세워 그런 학대와 억압을 하지 말라고 했을까, 생각하면 착잡합니다. 그런데 야훼가 이방인 나그네들을 학대하거나 억압하지 말라고 하면서 역사에 대한 회상을 촉구한 것은 매우 주목됩니다. 야훼는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던 나그네였다.”는 점을 콕 짚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나그네 된 사람들, 작은 사람들 편에 서도록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작은 사람들, 눌리는 사람들,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사람들, 배제당하고 차별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복지를 위해 애쓰듯이 너희도 그 사람들 편에 서라는 권유입니다. 그러한 권유는 생존수단을 갖지 못한 채 버림받기 일쑤인 과부와 고아들을 위해 십일조를 모으도록 하는 야훼의 분부에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8·15 71주년을 맞이해서 저는 문득 누가복음 13장 29절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구절은 제 스승 고(故) 안병무 박사도 즐겨 인용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머리에 그리면서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하곤 했습니다. 동과 서, 남과 북은 단순히 천지사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분열과 대립으로 가득 찬 오늘의 세상 현실을 가리키는 은유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나 있는 여러 가지 균열선들이 있기에 그들은 동과 서로 떨어져 살고, 남과 북으로 갈려 삽니다. 그렇게 나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하나님을 내려다보려는 교만에 사로 잡혀 바벨탑을 쌓았다가 언어의 분열을 겪고 천지사방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동과 서에서,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고 하니 참으로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사람들이 균열선들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누가복음 기자는 그 물음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9절이 속한 큰 단락을 읽어보면,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지 않는 행위를 총칭하는 낱말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지 않는 것이 불의입니다. 불의의 뿌리는 하나님의 뜻을 물리치고 자기의 뜻을 집요하게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는 것이니, 그 의지가 강성해지면 바벨탑을 쌓으려 들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고, 온 피조물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맙니다. 그러니 누가복음 13장 29절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총회에 참여하는 전제조건을 재확인해 줍니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야훼의 뜻에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야훼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징하게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과 우리를 분열시키는 모든 권세와 세력을 누르고 우리를 그 권세와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 분 안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는 인종차별과 계급차별, 젠더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 23절이 말하는 경지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경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인종차별과 계급차별과 성차별이 극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바깥에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선취된 차별 없는 대동세계만을 바라본다면, 그런 사람은 제대로 된 야훼 신앙을 갖고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취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억을 또렷하게 갖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그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만연한 인종차별과 계급차별과 성차별에 맞서서 투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스크럼을 짜고 짱돌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진지를 향해 진격하는 형태의 싸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현실의 모순과 분열을 직시하고, 성찰하고, 인종차별과 계급차별과 성차별의 현실을 바꾸어 나가기 위해 작은 실천들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천의 가능성들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일일이 소개하지 않더라도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저는 그러한 실천을 수행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국민과 국민국가 개념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근대 이래로 국민과 국민국가가 행사했던 막강한 힘 앞에 압도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국가의 명령과 공권력에 굴복합니다. 국가의 명령과 공권력에 저항할 경우에 치루어야 할 대가가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민과 국민국가는 근대의 산물입니다. 세상을 창조하면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이름이 강조되면서 인종 문제, 계급 문제, 젠더 문제는 덮이기 일쑤였고, 인종 차별과 억압, 계급 차별과 착취, 성차별과 배제 등을 정상적인 질서처럼 유지하는 국민국가의 통일성을 깨뜨리는 행위는 국가에 의해 철저하게 억압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과는 다른 국민과 국민국가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국민 개념과 국민국가 개념을 해체하고 인종 문제와 계급 문제와 젠더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해결하여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남과 북에서 모여들어 형성하는 개방적인 국민을 상상하고, 관대하고 포용적인 국민국가를 새롭게 구성해야 합니다. 저는 작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차별당하는 사람들, 배제당하는 사람들, 빼앗기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분들의 권리와 삶의 기회를 위해 작은 실천을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정의가 동터온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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